최근 수정 시각 : 2019-06-22 13:17:15

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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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보장왕(寶臧王) / 고장왕(高藏王)[1]
성씨 고(高)
보장(寶臧, 寶藏) / 장(臧, 藏)
왕태자 고복남(高福男)
왕자 고안승(高安勝)[2], 고덕무(高德武), 고임무(高任武)[3]
왕손 고안순(高安舜)[4] , 고보원(高寶元)
부왕 대양왕(大陽王)
생몰년도 음력 ? ~ 682년
재위 기간 음력 642년 10월 ~ 668년 9월 (25년 11개월)

1. 소개2. 생애
2.1. 고구려왕 재위기2.2. 항복 이후
3. 삼국사기 기록
3.1. 삼국사기 21권3.2. 삼국사기 22권
4. 후손들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소개

고구려의 제28대 이자, 마지막 임금. 망국의 군주이지만 재위 기간은 26년으로 의외로 긴 편이다.

2. 생애

2.1. 고구려왕 재위기

영류왕의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 즉 영류왕의 조카. 영류왕에게는 태자 고환권을 비롯해 아들들이 있었으므로, 고보장은 순리대로라면 왕위에 오를 팔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쿠데타 때 영류왕이 시해당하고 그가 왕으로 옹립되었다. 연개소문이 전왕과 대신 수백 명을 몰살하고 독재 권력을 만들면서 태생이 바지사장으로 추대되었기에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형제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사실상 실권 없이 보냈다고 보는 편이다.[5]

재위 초반에는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했었다. 실권자 연개소문도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 도교를 받아들이자"고 진언했고, 당의 사신이 고구려에 왔을 정도다. 당시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불교 측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다"고 대놓고 디스할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현존하지 않는 구삼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성사는 원래 고구려 반룡사(盤龍寺) 스님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현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성사는 방장(方丈)을 날려 백제의 고대산(孤大山)에 이르렀다. 후에 한 신인이 고구려의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패망이 며칠 안 남았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와 같다.
《대각국사문집》 권17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영정에 예배함.

이러한 무리수를 둬가며 당과의 친분을 유지하려 했으나, 당의 사신은 고구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신라와 싸우는 것은 그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결국 이게 화근이 되어서 645년 당의 침입, 즉 고구려-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645년의 전쟁은 당나라를 일으켜세우고 중원을 통일시킨 전쟁영웅인 당태종이 직접 나선 전쟁이었다. 이 침입으로 고구려는 개모성요동성이 함락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나,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당나라의 철군을 이끌어낸다.

이후에는 당의 침입이 뜸해진 틈을 타, 실권자 연개소문백제와 함께 신라 공격에 열을 올린다. 당태종의 침입 직전에 김춘추가 직접 고구려 평양성에 와서 역사적인 외교회담을 열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나당동맹이 만들어지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이후 당고종은 간혈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는데, 이는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를 기습공격하기 위한 작전 중 하나로 여겨진다. 즉 전격적인 백제 공격 이전에 고구려의 백제 원조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백제가 멸망당한 이후 고구려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 상황에서 661년 당나라의 2차 침입이 펼쳐진다. 이 침입은 상당한 공격이어서 평양성까지 포위를 당하게 된다. 물론 이 때의 침입은 엄청난 방어공세와 여러 지역에서의 시선분산을 통해 막아냈지만,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라와 당나라 지배하의 백제 사이의 회맹이 이루어지면서 남쪽 지역에서의 안정이 이루어지자 고구려는 다시금 위기에 빠지게 된다. 결국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666년 태자를 당나라에 보내 봉선의식에 따라가게 하는 등, 그동안 당에 대한 적대정책에서 벗어난 화친책을 펼치며 전쟁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차에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죽게 된다.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직위를 이었으나 연남생의 나이는 고작 32세에 불과했으며, 연개소문과 같이 군략에 뛰어난 인물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되자 결국 그의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이 연남생의 직위를 탐내면서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연남생이 이 내분에서 패하여 국내성에서 항거하다 결국 국내성을 비롯한 요동 일대를 당나라에 바치면서 항복하였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도 신라에 남쪽 영토를 바치면서 항복하였다.

결국 이러한 내분에 힘 입어 668년 나당연합군은 평양성 공략에 나서게 된다. 이 때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연남건을 물리치고 연남산과 함께 항복 사신을 보내는 데 찬성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평양이 포위되었을 때 98명의 수령을 거느리고 먼저 항복을 청했고, 이때 신라 측 요인으로써 참전한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왕을 당군 총사령관 이세적 앞으로 데려가 그의 죄상을 열거하였다고 한다.

다만 연개소문 일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일방적으로 연개소문에 휘둘리는 군주였다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연개소문이 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겉으로는 협력하나 이면에서는 대립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권력은 지키면서 제 역할을 했다는 해석도 있다. 항복 이후에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키려 한 업적이 있기에 현재로서는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해석에 무게가 실리기도 하고, 또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그려지는 편이다.

2.2. 항복 이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되었고, 당태종의 묘에 참배를 시켰다. "연씨가 정권을 잡았지, 나는 정치를 한 것이 아니니,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한 것을 당나라에서 인정해 (당나라 입장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되었다. 과거 고구려의 중심 지방이였던 요동 지방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이 거세자[6] 그를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7]에 봉하고 안동도호부로 부임하게 하여 부흥 운동을 무마시켜보려 했으나 오히려 보장왕은 말갈과 손을 잡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고, 681년(신문왕 1년) 고구려와는 대륙 반대편인 땅(지금의 쓰촨성)에 유배당했으며, 죽은 후 위위경에 봉해졌고, 돌궐 힐리가한의 무덤 옆에 묻혔다고 한다.

그 후 당나라의 기미정책에 따라 보장왕의 손자가 요동에 봉해진다. 이후 계속 세습되어 독립적인 정권인 소고구려가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3. 삼국사기 기록

보장왕은 2권이나 될 정도로 기록이 많다.

3.1. 삼국사기 21권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상)
一年冬十一月 왕이 즉위하다
一年 신라의 김춘추가 와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다
二年春一月 왕이 그 부친을 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조공하다
二年春三月 당에 도교를 구하니 노자도덕경을 보내주다
二年夏閏六月 당태종이 왕을 책봉하다
二年秋九月 신라가 당에 구원병을 청하다
二年秋九月十五日 밤이 밝은데 보름달이 보이지 않다
三年春一月 당이 상리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하다
三年秋七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
三年秋九月 당 태종이 백금과 숙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
三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다
三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고구려 공격을 위한 병력을 동원하다
四年春一月 당의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다
四年春三月 당 태종과 이세적이 출정하다
四年夏四月 당군이 고구려의 성을 공격하다
四年夏五月 비사성이 함락되다
四年夏五月 당군이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四年 백암성이 당 태종에게 항복하다
四年 개모성이 함락되다
四年 고구려 군대와 말갈 병력이 당 태종의 군대와 싸워 패하다
四年 당군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돌아가다
四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후회하다
五年春二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이유를 묻다
五年夏五月 당 태종이 다시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다

3.2. 삼국사기 22권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하)
六年春二月 당군이 소규모 병력으로 다시 침략하다
六年夏五月 당의 이세적 군대가 쳐들어왔다 돌아가다
六年秋七月 당군에 패하다
六年秋八月 당태종고구려를 정벌하고자 배를 만들게 하다
六年冬十二月 왕자 임무를 당에 들여보내 사죄하다
七年春一月 당 태종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다
七年夏四月 당 고신감의 군대에 패하다
七年夏六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다
七年秋七月 평양에서 머리가 2개인 아이가 태어나다
七年秋七月 당 태종이 배를 만들게 하다
七年秋九月 평양에서 노루이리 떼가 서쪽으로 이동하다
七年秋九月 당군이 박작성을 공격하다
八年夏四月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 전쟁을 포기하라고 유언하다
九年夏六月 보덕화상이 백제로 가다
九年秋七月 곡식이 서리와 우박 피해를 입다
十一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十三年夏四月 고구려 멸망을 예언하는 말이 떠돌다
十三年冬十月 거란을 공격하였으나 패하다
十四年春一月 신라의 33성을 빼앗다
十四年春二月 당이 공격해오다
十四年夏五月 당군이 요수를 건너와 큰 피해를 입히고 돌아가다
十五年夏五月 평양에 폭우가 내리다
十五年冬十二月 당의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다
十七年夏六月 당군의 공격이 실패하다
十八年秋九月 호랑이평양성 안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다
十八年冬十一月 온사문이 설인귀의 당군에 패하다
十九年秋七月 평양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당이 고구려를 공격해오다
二十年春一月 당이 평양을 향해 공격해오다
二十年夏四月 당이 고구려 원정을 중지하다
二十年夏五月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年秋八月 소정방의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다
二十年秋九月 평양성이 당군에게 항복하다
二十一年春一月 방효태의 당군이 연개소문과 싸워 전사하다
二十五年 태자가 당의 태산 제사에 참가하다
二十五年 연개소문의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다
二十五年夏六月 연남생이 당으로 달아나다
二十五年秋八月 연남건막리지가 되다
二十五年秋九月 당 고종이 연남생에게 벼슬을 내리다
二十五年冬十二月 당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
二十六年秋九月 당군이 고구려의 성을 빼앗다
二十七年春一月 당이 유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임명하다
二十七年春二月 부여성 등 40여 성이 당에게 함락되다
二十七年夏四月 동북쪽에 혜성이 출현하다
二十七年秋九月 멸망하다
二十七年冬十月 당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가다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다
唐 高宗 摠章二年春二月 왕의 서자 고안승이 신라에 투항하다
唐 高宗 摠章二年夏四月 당 고종이 고구려인을 대거 옮기다

고대사 인물답지 않게 기록이 매우 상세하다. 삼국사기에서 신라 문무왕과 보장왕만이 혼자서 2권을 차지한 왕이다. 기록 양이 어지간한 고려 시대의 왕들보다 조금 적은 정도. 하지만 보장왕 본인에 대한 기록은 얼마 없다.[8]

보장왕은 고구려 왕 중에 최다의 기록을 보유했으나, 안타깝게도 망국의 왕이 되었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신라 왕은 문무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백제는 의외로 시조인 온조왕이다. 문무왕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모든 왕들 중에서도 기록이 가장 많아서, 명실상부한 No.1 이다.

4. 후손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보장왕 아들 고약광은 고구려 유민 1천7백여 명을 데리고 일본에 정착했다. 현재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로, 고약광을 기리기 위한 '고마신사'가 세워져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행사가 열린다고 하며, 오늘날에는 보장왕 61대 후손이 전해진다고 한다. 자세한 건 여기로. 2017년에는 아키히토 덴노, 미치코 황후 부부가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이때 아키히토 덴노가 신사 관계자들에게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라는 등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 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명색이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다 보니 고구려 말기를 다룬 각종 소설과 영상물에 거의 빠지는 법 없이 등장한다. 이때 묘사되는 모습이 작품마다 다른데, 그 갈래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연개소문에 의해 의도치않게 왕좌에 올라 소심하고 찌질한 모습만 보이는 모습, 2번째는 꽤 강단있는 모습으로 등장해 연개소문과 함께 국정을 주도해 나가는 모습 등이다. 특히 보장왕이 연개소문과 결탁해 영류왕을 살해했다는 독특한 내용 전개도 나오고 있는 중. 특히 이후에 나온 창작물일수록 제법 영민하고 능력도 갖춘 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역사에서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니 마냥 나약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망국의 군주 중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처럼 재평가를 받는 케이스.

5.1. 삼한지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는 그야말로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제위 내내 연개소문의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늘 끌려다니기만 하는 모습만 보여준다(...).

다만 작중에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에게 눈물콧물 다 쏟으며 애걸복걸한 끝에(...) 보장왕을 옹립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개소문은 진심으로 보장왕에게 충성을 다 하고 있는 듯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5.2. 연개소문(드라마)

SBS에서 방영한 연개소문에서는 이배국[9]이 연기했다. 연개소문을 신격화하다시피 미화한 드라마인만큼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왕으로 나오는데, 연남건이 연남생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킨 뒤 선도해와 신성 등이 이 틈에 연씨 가문을 몰살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언을 함에도 겁에 질린 나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답을 하는 등 안습의 극치.

5.3. 대조영(드라마)


파일:068006018_L.jpg

KBS에서 방영했던 대조영에서는 길용우가 연기하였다.[10] 작중 자식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며, 그 때문인지 조카인 숙영을 친자식처럼 여겼고, 숙영 역시 보장왕을 친아버지처럼 여겼다.

연개소문의 손에 의해 등극한, 정통성 없는 임금이다보니, 실권이 별로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연개소문에게 휘둘렸다는 세간의 이미지 및 작중 유약한 임금이라는 평가[11]와 달리 상당히 중후한 성격의 인물로 묘사되며, 나름 현명하고 결단력도 있는 모습도 보여준다.

오히려 고구려 멸망 후에 비중이 높아진다. 보장왕을 견제하던 권력자들은 죄다 사라진데다,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이라는 타이틀은 그대로 남아있는 만큼, 오히려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귀양살이 할 때부터 야망 없는 무기력한 인물인 척 하였으나, 그 때 우연히 보장왕의 귀양지에 있던 미모사는 보장왕이 큰 뜻을 숨기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후 안동 도독부의 조선 왕으로 임명되고 나서는 매일 취성루를 드나들며 주색잡기에 빠진 모습을 보인다. 물론 취성루는 사실 보장왕이 책사 미모사에게 뒷돈을 대서 만든, 동명천제단(東明天帝團)의 본거지였으며, 보장왕은 주색잡기에 빠진척 하며 동명 천제단 일원들과 몰래 만나며 고구려부흥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보장왕은 고구려 부흥 운동의 주도자로 대조영을 선택하는데, 당시 대조영은 한성에서 이해고의 습격을 받아 사지가 마비된 상태였고, 대조영을 비롯하여 모두들 절망한 상태였다. 이때 보장왕은 '대고구려(大高句麗)'라는 혈서를 써서 대조영에게 보냈고, 혈서를 보고선 각성한 대조영은 수 많은 재활 훈련 끝에 부활에 성공한다.

대조영이 요동성에 돌아오자 보장왕은 동명 천제단을 창설하였고, 대조영을 중심으로 동명 천제단은 부기원, 사부구 등 매국노들과 안동도호부로 부임하는 당나라 관리들을 암살한다. 여기서 보장왕은 동명 천제단의 세작 역할을 하는데, 신성 암살 때는 안동도호부를 속이기 위해 동명 천제단에게 쫒기는 척 하여 마치 동명 천제단의 다음 목표가 보장왕인 것처럼 위장한다. 제대로 낚인 안동도호부는 보장왕을 미끼로 함정을 팠지만 동명 천제단은 그 사이 안동도호부를 빈집털이하여 신성을 암살한다.

그러나 이문이 잠입시킨 부하들로 인해 동명 천제단의 정체가 발각되었고, 결국 대조영과 흑수돌, 걸사비우를 제외한 나머지 일원들이 모조리 붙잡히고 만다. 물론 이 때 아무도 자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장왕이 동명 천제단의 주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진 않았다(당나라 측에선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어서 아직 보장왕을 건드리지 않았다). 설인귀 측에선 대조영을 낚을 겸 이문의 전공을 없애버리기 위해 포로들을 모조리 처형하는데, 대중상이 처형당할 때 보장왕은 자기가 포로들을 처형하겠다고 나서서는, 자기가 동명 천제단의 일원이었음을 당당히 밝힌다. 설인귀 측이 당황하는 사이, 보장왕은 백성들과 고구려 출신 병사들에게 고구려 부흥 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는 연설을 하며 포로들의 포박을 풀어준다. 이에 백성들과 병사들은 처형장에 달려들어 포로들을 구출했고, 이를 틈타 미모사 일행이 탈출에 성공한다. 이문이 보장왕을 인질로 삼으면서 결국 대조영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지만, 이때 보장왕이 처형장에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더라면 이때 대중상을 비롯한 동명 천제단 인원들이 모조리 처형당했을게 뻔한 상황이었다.

이 직전까지 보장왕은 주색잡기에 빠져있는 매국노 노릇을 하고 있었기에, 보장왕은 백성들에게 돌을 맞을 정도로 이미지가 나빴다. 그러나 보장왕이 동명 천제단의 주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백성들의, 보장왕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고, 요동성 백성들은 보장왕을 석방하라며 안동 도호부 청사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이미 처형장 사건 때 백성들이 다수 희생된 관계로, 보장왕 및 대조영 측은 요동성 백성들이 더이상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 들이 해산하길 원했으나 백성들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에 안동 도호부 측은 백성들을 유혈 진압하고자 한다.

이에 보장왕은 설인귀에게 자신이 백성들을 해산시키겠다며 제안했으나, 이미 보장왕의 영향력을 경험한 설인귀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 때문에 보장왕의 제안을 거절한다.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이때 설인귀는 보장왕을 당 태종과 필적할만한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며 보장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작중 설인귀는 죽을 때까지 당태종 이세민을 유일무이한 진정한 영웅이자 주군으로 여기는데, 인생의 주군과 동급으로 평가할 정도로, 설인귀는 보장왕의 인품과 열정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연남생이 목숨을 건 호소를 하여 백성들을 자진 해산시킨 후, 보장왕이 당나라로 끌려갈때 또다시 백성들이 몰려오는데, 이때 보장왕이 그들 스스로의 목숨을 아끼라는 연설을 하여 백성들을 해산시킨다. 여기에 힘을 다써버렸는지 귀양길에 중병에 걸리고 만다.

결국 시골로 귀양을 가는데, 당시 당나라 장수였던 대조영 일행이 죽기 직전의 보장왕을 찾아갔고, 보장왕은 고구려 땅에 새로운 국가를 세울려는 자는 자신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며, 대조영에게 새로운 국가를 세우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이때 대조영은 보장왕의 조카 숙영과 결혼한다.

5.4.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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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사극 대왕의 꿈에서는 안신우가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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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롭게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 처음 등장하는데, 결연한 표정으로 왕관을 받아들여 자신의 머리에 쓰고 옥좌를 차지하는 장면이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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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에게 휘둘리는 듯한 모습으로는 묘사되지 않으며 오히려 연개소문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며 그와 뜻을 함께하는 등 상당히 친밀한 관계로 묘사된다. 드라마가 신라 위주이다보니 실제역사와는 다르게 고구려 멸망직전 신라한테 항복한다.

5.5. 칼과 꽃

파일:20130801_1375314170_70761500_1.jpg
KBS 사극 칼과 꽃에서는 온주완이 연기하였다.

작중에는 영류왕의 조카로써 왕을 보필하는 일종의 가신(家臣) 내지 호위무사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역시 기존의 비실비실한 이미지는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몸이 날렵하고 무예에 능하며 용맹하면서도 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영류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영류왕과 대립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치열한 암투를 벌이지만 왕을 시켜주겠다는 연개소문의 꾀임에 넘어가 결국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동참하여 궁을 장악하고 주인공인 영류왕의 공주에게 칼까지 들이댄다. 여기서 과거가 드러나는데 실은 어려서부터 부모와 동떨어져 살며 영류왕의 직속 부하가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이 때문에 꽤 오래전부터 영류왕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연개소문과 더불어 영류왕을 시해한 보장왕은 결국 처음에 약조한대로 연개소문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얻게 된다.

하지만 점차 연개소문에게 쏠리는 권력에 불안감을 느끼며, 도수 등의 귀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나, 도수 등이 연개소문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실패한다. 연개소문이 이 사실을 알게되면서 거의 모든 권력을 빼앗긴 허수아비가 되고 만다.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내관 복장을 입고 내관인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5.6. 평양성

영화 평양성에서는 정규수가 서북 방언을 살려 가며 연기하였다.

실권자인 연개소문과 그 자식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으로 인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나약한 전형적인 허수아비 임금으로 묘사된다.

제대로 된 왕으로 지내 본 적이 없어서인지 명분보다는 생존을 우선하는 데다, 당군에 수도가 포위된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결사 항전하려는 연남건에게 "내래 살고 싶어!"를 외치며 성문을 직접 열고 고구려 중신들과 함께 제일 먼저 당군에 투항한다.


[1] 보장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장왕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망한 나라의 왕이라 시호가 없다. 보장왕은 이름 + 왕. 의자왕도 마찬가지다.[2] 고구려본기에선 안승이란 왕족이 2번 나오는데 보장왕의 서자 고안승, 외손자 고안순(승)으로 등장한다.[3] 둘째 아들. 막리지 관등을 가졌다.[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선 외손자 안순으로, 신라본기에선 안승으로 기록되어있다.[5] 권력이 삼국지헌제마냥 거의 없었는지, 나름대로 발언권은 있었는지 정도의 이견은 있지만, 어쨌든 보장왕은 실권이 거의 없었고 국정 운영은 연씨 일족들이 거의 다 해먹었던 건 확실하다.[6] 당시 고구려부흥운동의 구심점은 신라로 망명해 고연무, 검모잠 등에 의해 한성(황해도 재령군)에서 새로이 고구려 왕으로 추대된 안승의 고구려국이었고, 안승을 새로운 고구려 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의 보호자이자 후원자'라는 헤게모니를 선점한 것에 대한 대응책이었다는 지적도 있다.[7] 조선고조선을 말한다.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므로 훗날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전까지 조선이라는 말은 평양과 그 근처의 지명 비슷하게 썼다. 비슷한 호칭을 받은 사례로 조선국공 이자겸이 있다.[8] 고려의 왕들은 고려사 덕분에 보통 매년 기록이 3개 이상 남을 정도로 상세하다. 조선은 역사학계의 넘사벽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등 각종 기록 덕분에 연, 월 단위가 아닌 일 단위 기록이 남아있다.[9] 같은 작가가 집필한 야인시대 2부에서 휘발유를 연기한 배우이다.[10] 길용우는 1990년대 초 역시 KBS의 삼국시대 사극 <삼국기>에서 백제 의자왕으로 출연했다. 망국 군주 전문 한편으로는 태조 왕건에서 복지겸 역을 맡기도 했는데, 태조 왕건에서는 고려 건국 이전에도 복지겸이 왕건보다 관직상 우위에 있는 기간이 대부분이었음에도 명령을 내리기는커녕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번에는...[11] 양만춘연개소문과 대화할 때, 보장왕을 유약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