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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부여계인 백제 28대 왕에 대한 내용은 혜왕 문서,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계왕(동음이의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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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12대 국왕 계왕 | 契王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290년 ~ 304년 사이 추정[1] |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사망 (음력) | 346년 9월 (향년 40~50대 추정) |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제12대 국왕 | ||
344년 10월 ~ 346년 9월 (1년 11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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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계(契) | ||
부왕 | 분서왕 | ||
왕호 | 계왕(契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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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12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10대 분서왕의 장남. 백제 초기 왕 중 유일하게 이름이 한 글자인 왕인데 이름에 포함된 계(契)라는 한자는 《계림유사》에서 순우리말 "해"를 음차하는 데 사용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한다.#2. 생애
낙랑군에 강경책을 고수하던 분서왕이 304년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당시에는 분서왕의 아들들이 너무 어려 왕위는 비류왕에게 돌아간다. 비류왕은 한동안 끊어진 초고왕의 후계를 잇는 왕으로 여겨진다. 40여 년 후 비류왕이 승하하자 344년에 계왕이 고이왕의 후계를 다시 잇는다.345년 2월, 동명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후 1년 뒤인 346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계왕이 2년만에 승하하면서 고이왕의 후계는 확실히 끊어졌다.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계왕 4대에 걸친 고이왕계가 이렇게 끊어진 이후 백제의 왕통은 근초고왕을 중심으로 한 근초고왕계로 이어지게 된다.
계왕 사후 비류왕의 장남이 아닌 차남 근초고왕이 즉위하였고 근초고왕의 통치 노선이 비류왕보다 고이왕계와 더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직계로는 연관이 없지만 외척으로서 근초고왕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2.1. 가공인물인가?
계왕이라는 왕명 자체가 고이왕 계통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契(맺을 계)' 자는 '끊을 결'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근초고왕이 고이왕계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고 고이왕 계통을 단절시켰음을 천명하기 위해 '결왕'이라는 시호를 올렸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이 훈음은 아주 희귀한 거의 쓰이지 않는 용례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아직 중국에서 시호 제도나 피휘 개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왕의 실제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백제에서 국왕에게 올린 첫 시호는 동성왕이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실제로 이름이 초고, 구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편이다. 따라서 契를 고이왕 계통을 끝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이런 속성과 즉위할 때 상당한 나이(최소 40대)였다는 것을 보아서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즉위한 이후 임금으로서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즉위와 관련된 설명에 다소 어색한 부분도 있어 계왕이 실제로 존재했다기보다 후대에 백제 사람들이 왕실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건국 연대를 조정하기 위해 삽입한 가공의 인물이 아닐까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비류왕의 다른 이름 중 '문휴해(汶休奚)'[2]가 있기 때문에, 계왕은 결국 비류왕과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2년을 늘리려고 했다면 비류왕이나 근초고왕의 재위 기간을 늘리면 그만이므로 가공 인물일 가능성도 높지는 않다.
사실 이 정도 계보는 있을 만도 하다. 강직하고 용감하며 말타기와 활쏘기 모두에 능한 왕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른 죽음이 아까운 인물이었으나 비류왕의 즉위로 부활한 초고왕계 왕족들에게 시해당했을 가능성도 높다.
2년 동안 집권했는데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도 계왕을 대표로 한 고이왕계와 비류왕 쪽 초고왕계 왕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집권 기간 내내 벌어졌고, 권력 투쟁에 대한 기록이 사라졌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사실 비류왕도 40년간 집권했는데 평화 정책을 계속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서 계속해서 권력 투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옛 역사서에서는 자연 재해를 내부 반란이나 권력 투쟁을 은폐하는 우회 서술로 쓰는 경우도 많았는데 비류왕 후반기에는 이런 자연 재해 관련 기사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비류왕도 정황상 깨끗한 최후를 맞은 것은 아니었기에 계왕이 시해되었을 일말의 가능성을 본다면 계왕의 사망 이후 고이왕계가 완전히 백제 역사에서 퇴출되는 것은 근초고왕이 집권 후 고이왕계를 전면적으로 제거해버렸기 때문일 가능성도 높다.
3. 현왕과의 동일인물설
일부 대륙백제를 신봉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은 계왕의 죽음을 대륙백제에 끼워 넣는다.백제의 제8대 왕인 고이왕은 중국 산동 반도로 진출하여 대륙백제를 건설한다. 고이왕이 이곳에 진출한 것은 평소에 국력에 대한 야망이 컸을 뿐더러 주변에 있는 중국 여러 나라를 견제함은 물론 중국 국가간의 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반도의 백제에서는 고이왕계의 혈통과 귀족들 간의 불화가 있었는데 고이왕이 사망하자 유력 귀족 중 하나인 비류계가 이를 계기로 왕위를 찬탈한다.
위협을 느낀 고이왕계는 대륙백제에 건너가 군주가 되어 세력을 키워가고 한반도의 백제에게서 왕위를 탈환하기 위해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대를 이어 가다가 한반도의 백제에서 비류왕이 사망하자 그의 자식이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반도의 백제를 점령하고 왕위를 되찾아 정식으로 즉위하는 것이 계왕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신변에 위협을 느꼈던 비류계 혈통 중 하나였던 근초고왕 또한 왕위에 올라 이를 계기로 계왕과의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을 벌였고 결국에는 근초고왕이 승리하여 계왕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록이 불분명하며 짧은 것, 이름을 모르는 것, 재위 기간의 햇수를 따져봐도 겨우 2년인 것, 근초고왕의 기록이 재위 20년 이후부터 기록된 것도 후대의 왕족들이 고이왕의 혈통을 학살하고 기록을 지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허나 위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고이왕의 산동 진출부터 입증해야 하는데 사서 기록이나 유물로는 전혀 검증되지 않는다. 또한 부여의 현왕은 346년 전연의 공격을 받아 끌려간 것이지, 그 해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없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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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계왕 본기>
一年冬十月 계왕이 즉위하다
三年秋九月 계왕이 죽다
추가로 《삼국사기》는 <제사> 편에 옛 기록을 인용한 재위 2년(345년) 여름 4월에 동명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사반왕 다음으로 기록이 적은 왕이다.
5. 드라마 근초고왕
자세한 내용은 계왕(근초고왕) 문서 참고하십시오.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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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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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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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분서왕 사망 당시 계왕의 나이가 어렸다는 기록이 있어 290년에서 304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2] 문휴가 성씨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문휴마나, 문휴대산 등의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