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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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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2대 국왕
효공왕 | 孝恭王
파일:경주 효공왕릉.jpg
효공왕릉 전경.
출생
(음력)
885년[1]
신라 금성
즉위 897년 7월 8일[A][3]
신라 금성
사망
(음력)
912년 4월 (향년 27세)
신라 금성
능묘 효공왕릉(孝恭王陵)
재위기간 신라 왕태자
895년 음력 10월 ~ 897년 7월 8일[A] (1년 9개월)
신라 제52대 국왕
897년 7월 8일[A] ~ 912년 음력 4월 (14년 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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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嶢)
부모 부왕 헌강왕
모후 의명부인 / 의명왕태후 김씨
형제자매 의성왕후 김씨[6], 계아태후 김씨[7][8]
왕후 왕후 박씨[9]
후궁 미상[10]
시호 효공대왕(孝恭大王)[11]
골품 진골(真骨) }}}}}}}}}

1. 개요2. 생애
2.1. 출신 배경2.2. 실권이 없는 임금2.3. 신라 하대 왕통의 단절
3. 《삼국사기》 기록4. 대중매체에서5. 여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52대 국왕.

제49대 헌강왕서자이자 제50대 정강왕과 제51대 진성여왕의 조카이다.

혈통을 중요시했던 신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서자 출신 임금이다.[12]

2. 생애

2.1. 출신 배경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이 사냥을 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어떤 여자[13]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 나가 동침하여 태어났고, 궁 바깥에서 자라다가 장성하여 입궁했다. 《삼국사기》 <진성왕 본기> 를 보면 헌강왕의 태자인 효공왕이 태어난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진성여왕이 대신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고, 효공왕의 친모인 의명왕태후가 헌강왕의 정비인 의명부인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기록상 모순되는 부분이 보인다. 의명부인도 다른 왕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있는 가계 배경에 대한 기록도 누락되어 있다는 점과 왕후가 아니라 왕태후로 추봉되었다는 점[14] 때문에 의명부인=헌강왕의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효공왕의 외모에 대한 기록에는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三國史記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진성왕(眞聖王) 9년 10월 요를 태자로 책봉하다(0895년 10월 (음)) #

헌강왕에게 아들은 효공왕 뿐이었지만 당시 신라의 법도상 서자가 왕위를 잇는 것은 맞지 않았고[15] 나이가 너무 어려서 대신 동생 정강왕에 물려주었는데 정강왕마저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에 여동생인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지만 하필 세 남매가 모두 아들이 없었던 게 결정타였다. 후에 진성여왕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비록 서자라도 헌강왕의 유일한 아들이며 조카라는 점에서 895년 효공왕을 태자에 봉했고, 897년 지방 도적들의 반란이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고 여기며, 후삼국시대 개막의 책임을 지고 자진 퇴위,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는 골품을 중요시하던 신라 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였다. 동시대 중국의 경우, 비록 궁인 출신 후궁의 에서 났을지라도 황제의 자식이라면 계승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신라에서는 오직 정실 왕후의 소생만이 계승권을 가질 수 있었다[16]. 더욱이 효공왕의 신분은 그 출생 설화상 서자도 아닌 사생아 신분에 가까웠다.

진성여왕 재위 후반부에 이미 서라벌 사람들조차도 진성여왕과 김위홍을 은어로 비난할 정도로 경문왕계 왕가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어 있었고, 그런 와중에 혈통상 약점을 가지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데다 재위 내내 박예겸, 박경휘(제53대 신덕왕)를 위시로 한 박씨 족단의 위세에 휘둘린 점을 봤을 때 진성여왕이 양위를 결정한 시점에서 이미 박씨로의 왕위 이양은 기정사실화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골에서 태종 무열왕계로 이양할 때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이양할 때 선덕왕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던 것처럼 내물왕계에서 아달라왕계로 이양할 때 효공왕이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2.2. 실권이 없는 임금

효공왕은 즉위 이후 사면을 내리고 문•무 백관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준 후 898년 정월, 친모를 추존하면서 높여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라 칭했다. 서불한 준흥(俊興)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계강(繼康)을 시중으로 삼았다. 899년 3월 이찬 박예겸(朴乂謙)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예겸은 다음 왕이 될 박경휘의 양아버지로, 사실상 어린 효공왕 대신 효공왕 치세의 실권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와 혼맥으로 이어지는 것도 박씨가 왕위를 넘겨받기 전에 명분을 쌓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효공왕의 재위 초기는 이미 신라가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고, 특히 훗날 태봉후백제가 될[17] 궁예견훤 양대 세력, 양길 및 패서의 군소 호족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형세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직 경상도 지역은 그나마 통제 가능한 상태였지만 이마저도 통일신라 시절의 지방관을 통한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지방세력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간접 통치로 전환한 상태였다.

898년부터 궁예에게 한반도 중부 지방인 한주삭주의 성을 대거 빼앗기는 기사가 나온다. 899년 궁예와 양길이 비뇌성 전투에서 격돌하여 결국 궁예가 승리했다.

900년에 이미 892년부터 사실상 왕을 칭하던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고, 901년에 궁예가 태봉을 건국함으로서 이른바 후삼국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한때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던 신라 조정은 오늘날 경상도 일대만 겨우 다스리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비록 궁예와 견훤이 왕을 칭했지만 신라 조정은 이들과 국가 대 국가로서 일체 교류하지 않고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유지했다.[18]

901년에는 견훤이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인 대야성을 공격하지만 겨우 지켜냈다. 대야성은 과거 삼국시대백제군이 신라를 공격할 때 막아내는 최전선이었는데 삼국통일 이후 평화기가 오면서 쓰이지 않다가 다시 국경 방어선이 된 것이다. 망국의 징조는 예전부터 보였지만 이때까지는 신라의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였기에 견훤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이 때 대야성을 방어한 지휘관은 사료에 남아있지 않으나 훗날 신라가 대야성을 잃은 후에도 김억렴이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때, <지은 일화>를 통해 이름을 떨친 화랑 출신이자, 박씨 족단에 의해 권력 중심에서는 밀려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헌강왕(제49대)의 사위로서 당시 신라의 유력인물이었던 김효종-김억렴 일가가 지휘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거기에는 김효종의 화랑으로서의 동원력[19]을 포함한 사병을 털어서 이뤄낸 성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전투 직후인 902년에 김효종이 시중으로 임명되는데 이 역시 김효종 일가가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관련짓기도 한다.

효공왕은 전대 진성여왕이 그랬듯 당대 민중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선종 고승들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전국 각지의 고승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에 따르면 효공왕은 태자사의 낭공 대사를 경주로 초빙했고, 그에게 정치적 자문을 맡겼다고 한다.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905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905년 8월 죽령 동북쪽까지 궁예의 군대가 이르렀지만 건국 초기의 진취적 활력이 넘치던 태봉에 비해 힘이 없던 신라였기에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하여 지키라"라는 명령만 내릴 수 밖에 없었다. 907년에는 추풍령 일대 영역, 그 일대 요새들, 거기 소속된 정예병들이 죄다 후백제에게 넘어가고, 909년경부터 나주 공방전 등 궁예와 견훤의 대결이 시작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신라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었다.[20]

2.3. 신라 하대 왕통의 단절

조정에선 이미 박씨 족단이 실권과 후계 구도를 쥐었고, 지방에선 반란군이 통제가 안 되는 이런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효공왕 역시 자포자기로 사치와 향략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왕자 신분을 감추고 민간에서 성장한 그는 조선 말기의 철종이 그랬듯 왕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질려버렸을 수도 있다. 보다 못한 대신 은영이 후궁들과의 향락을 중지하고 마음을 다잡을 것을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은영이 후궁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왕의 의사에 정면으로 반하는 짓을 했는데도 처벌 기사가 없다는 게 이미 신라 조정 내부에서도 경문왕계의 왕권이 크게 떨어져 있었던 듯하다.

사실 효공왕은 기록상 미천한 출신의 여자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진골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애매한지라[21] 귀족 대신들이 효공왕을 무시했을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 효공왕은 두려워하다가 912년 4월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

한편 시호에 '공'(恭)이라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어서 폐위당했거나 적어도 이에 준하는 형태로 임기를 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만도 한 것이 효공왕의 왕비는 박예겸의 딸이다. 즉 신덕왕 박경휘와 남매인데 정작 효공왕이 왕비 박씨가 아닌 천첩 및 후궁을 가까이 하면 신덕왕을 위시로 한 박씨 족단의 위세가 약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은영 역시 친-박씨 족단과 연관된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것을 포함한 효공왕 말년의 기록들을 쿠데타의 징후로 파악하여 훗날 성씨가 다른 신덕왕이 즉위한 것도 정변 형식으로 효공왕을 폐위한 뒤에 즉위한 것이 아니냐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가정하에 폐위되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것을 근거로 정변 과정에서 시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기록에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으니 순전히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진성여왕 재위 후반기부터 박씨가 실권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굳이 정변을 또 일으킬 필요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한편 본인이 서자 출신임에도 다른 적자가 없어 왕위를 이은 것인데 효공왕조차도 후사가 없어서, 제38대 열조 원성왕 때부터 혈연으로 내려 온 신라 하대의 내물왕계 왕통은 결국 끊기고 말았다. 동시에 556년 경주 김씨 왕성의 왕위 독점이 끝났음을 사실상 고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처남박예겸의 아들 박경휘가 뒤를 이으니 이것이 신덕왕이다.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되돌아왔다. 진성여왕 시절에 일어난 다라니 은어 사건처럼 이미 경문왕계 왕가는 수도에서도 민심을 잃은 상태였고, 박씨 집단은 위기의 신라가 대안으로 선택한 마지막 카드였다. 박씨 왕조는 부족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계의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상황을 타개해보기 위해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재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927년 견훤의 침공 때 무너져 겨우 3대 15년밖에 가지 못했다.

효공왕 이후 15년 뒤에 김부가 경순왕으로 다시 등극하긴 하는데 그래도 경순왕은 자력으로 뭘 해볼 권력은 효공왕보다는 훨씬 강한 상태였다. 이때의 신라는 영토가 줄었으면 줄었지 누구처럼 활개치는 권신은 없는 상태였고, 경순왕은 재위 기간 내내 효공왕과는 달리 당당한 왕으로 통치는 했다. 다만 아예 경상남도 전역과 대야성까지 없어 그야말로 사로국 시절로 영역이 축소되었던 점, 견훤의 서라벌 기습 때 정예병을 워낙 많이 잃은데다 약탈도 크게 당해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캐스팅보트삼아 뭘 해볼 여지까지 다 잃었던 점은 비극적이지만, 임금으로서의 정치인생만 따지고 본다면 적어도 경순왕이 효공왕보다는 훨씬 행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효공왕은 20대에 요절한 데 반해 경순왕은 나라가 망한 뒤에도 40년 넘게 잘 먹고 잘 살았다.[22]

어쨌든 이 왕도 재위 15년차인 912년 승하한 후 화장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사자사(師子寺)의 북쪽에서 화장하고 뼈를 구지제(仇知堤)의 동쪽 산허리에 묻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 효공왕릉으로 전해지는 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14번지에 있는데 신라가 몰락한 말기의 왕릉이라 높이 약 5m의 규모,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일부 노출된 것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이 무덤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자사로 추정되고 있다.

3.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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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주몽 · 고유리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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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효공왕 본기>
一年冬十二月 효공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대사면을 하고 관작을 한 계급씩 더하다
二年春一月 어머니를 의명왕태후로 삼다
二年春一月 준흥을 상대등으로, 계강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秋七月 궁예송악군에 도읍하다
三年春三月 예겸의 딸을 비로 삼다
三年秋七月 양길궁예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다
四年冬十月 청길과 신훤이 궁예에게 투항하다
五年 궁예가 왕을 칭하다
五年秋八月 견훤이 대야성 공격에 실패하고, 금성 남쪽 부락을 약탈하다
六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六年春三月 대아찬 효종시중으로 삼다
七年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다
八年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고 국호연호를 제정하다
八年 패강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하다
九年春二月 별이 떨어지다
九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九年秋七月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침략하자 성주에게 수비를 명하다
十年春一月 김성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年春三月 입당 급제한 김문울이 책명사로 귀환하다
十年夏四月 4월에서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十一年 봄,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十一年 일선군 이남의 성을 견훤에게 빼앗기다
十二年春二月 동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다
十二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三年夏六月 왕건이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견훤이 나주성에서 후퇴하다
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一月 왕의 천첩을 은영이 죽이다
十五年春一月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다
十六年夏四月 왕이 죽다

효공왕의 치적보다 되려 궁예, 견훤, 왕건의 활약과 기상에 관한 기사가 훨씬 더 많다.

효공왕부터 《삼국사기》 12권이 시작된다.

4. 대중매체에서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중견 연극배우 한근욱[23][24]이 연기했다. 비빈과 함께 풍악 속에서 연회를 즐기다 대야성에서 김효종을 비롯한 신라 장수들이 견훤을 막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신라의 영토를 다시 되찾으라고 기세등등하게 말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사치 및 향락에만 빠져 지내는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

5. 여담

  • 신 안동 김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김선평은 효공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왕위를 세습받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족보 기록이라 신빙성은 다소 떨어진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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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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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대야성 전투
관련 장소 효공왕릉
관련 문서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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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치원이 쓴 《납정절표》에 헌강왕 사망 당시인 886년에 효공왕이 돌이 채 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학계에서는 885년 즘에 출생했다고 보고있다.#[A] 음력 6월 1일, 율리우스력 7월 4일[3]고운집》과 《동문선》 기록.[A] [A] [6] 신덕왕(제53대)의 아내.[7] 경순왕(제56대)의 어머니.[8] 어머니가 같은지는 알 수 없다.[9] 박예겸의 딸, 신덕왕의 누이.[10] 은영이 효공왕의 후궁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어 효공왕에게도 후궁 혹은 측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태자사낭공대사비 기록[12] 신라/고려의 서자 개념은 조선의 그것과는 달라서, 잘 쳐주면 사생아 나쁘게 말하면 외간 남자의 씨앗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성의 정조 개념이 없었기 때문. 차라리 외손자가 압도적으로 더 적법한 후계로 여겨지던 국가들이다.[13] 일단 헌강왕에게 후궁이 있었다는 것은 금석문에서도 나왔듯 확실하다. 수원 권씨라는 인물로 헌강왕 사후 그의 명복을 빌고자 비구니로 출가했다고 전한다.[14] 일단 한 번 왕후로 봉해지면 왕태후로 변경되지는 않았다. 즉 처음부터 왕태후로 봉해졌다는 것은 왕후였던 적이 없다는 뜻이다.[15]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로 유명한 홍길동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서자와 적자는 전근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었는데, 그 조선보다도 더 심하게 적•서를 차별하던 것이 신라와 고려이다. 당장 신라 하대의 상황에서도 여자(진성여왕)보다도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린 원인이 서자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때도 서자인 군보다는 왕비 소생인 공주가 서열이 높았으며, 왕비에게 아들이 없어(즉 대군이 없어서) 서자가 왕세자가 된 것이 아닌 이상 군은 꼬박꼬박 공주에게 존대를 해야 했다. 다만 《삼국사기》의 다른 단락에서는 단순히 나이가 어려 늦게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16] 신라에서 서자의 계승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부분은 조선에서 여성의 계승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과는 정반대다. 고려는 왕후를 여러 명 들이는 방법으로 서자와 여성의 계승을 모두 금지했다. (조선의 경우 왕후는 1명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후궁이었다.)[17] 효공왕 즉위 시점에서는 둘 다 사실상 독립 상태의 군벌이기는 했는데 정식으로 건국한 상태는 아니었다.[18] 명분상의 정통성 때문이다. 대한민국북한을 나라가 아니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것과 같다.[19] 삼국통일전쟁 때도 그렇고 김헌창의 난 때도 명기 등 화랑들이 나라를 위해 휘하 낭도를 이끌고 김헌창군을 토벌하기도 했다. 그리고 <효녀 지은 열전>에 의하면 김효종의 낭도가 수천 명(郎徒幾千人)이라고 되어 있다.[20] 효공왕 승하 11년 후 즉위한 경애왕(제55대)은 왕건과 연합해서 후백제 견제를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효공왕과 시대를 같이한 궁예는 신라에 적대적이어서 그러기도 어려웠다.[21] 골품이 나뉘는 정확한 기준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고 연구 대상이기는 하지만 하위 골품 사이에서 난 자식은 골품이 낮아진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당대에 서출 효공왕을 정상적인 진골로 인정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왕족 혈통에 하자가 있다고 여겨졌을 가능성은 있다.[22] 현대 한국인 대부분은 나라가 오늘내일 하는데도 왕실과 임금은 여전히 생생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전성기 때와 똑같은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신라말 상황이 고려말, 조선말과 완전히 다른 데 그 원인이 있다. 고려나 조선 같은 경우 체제 안에 파고든 매국노나 체제 자체의 부패가 문제였던 반면, 신라말 상황은 체제는 그럭저럭 잘 돌아가지만 국경을 접한 외국이 워낙 군사력, 경제력, 인구가 넘사벽이라 언제든 훅 불면 날아갈 상태였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고려나 조선은 어쨌든 그래도 망하는 직전까진 인구와 영토라도 만만찮게 있었으나 신라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23]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정호용 역,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경성제국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 역. 20대 중후반에 요절한 실존인물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명백한 미스 캐스팅이다.[24] 참고로 <태조 왕건>의 신라 왕 배역은 대부분 미스 캐스팅인데 만 15세에 즉위해 만 29세에 사망한 경문왕은 즉위 전의 모습부터 만 44세의 이성용, 골격이 흡사 건장한 사내와 같다고 기록된 진성여왕은 평균키보다 살짝 큰 배우 노현희, 견훤의 신라 침공 당시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경애왕은 당시 만 56세의 배우 문회원이 맡았고, 한술 더 떠 배우 정태우가 연기했던 최응과 동년배로 추정되는 경순왕은 당시 만 62세의 배우 신귀식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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