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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3세기[1] 사로국의 영토 확장. | |||
기원전 57년 6월 8일 ~ 서기 936년 1월 13일 (약 992년) | |||
시대 구분 | |||
진한 사로국 | 삼국시대 신라 | 통일신라 | 후삼국시대 신라 |
<colbgcolor=#4A2D5B> 위치 | 한반도 | ||
주요 사건 |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 | ||
수도 | 금성(서라벌) | ||
민족 | 예맥[2] | ||
언어 | 신라어 (고대 한국어) | ||
문자 | 한자(이두, 향찰, 구결) | ||
종교 | 토착 신앙 | ||
정치 체제 | 선거군주제 | ||
국가원수 | 거서간(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 ||
주요 군주 | 1대 박혁거세,(bc57~4), | ||
국성 | 박(朴) |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 ||
성립 이전 | 합병 이후 | ||
진국 | 고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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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로(斯盧)는 진한 12소국의 하나로, 지금의 경주 분지 계림 일대(서라벌)를 다스리던 족장사회(Chiefdom)에서 시작하여 진한 내 다른 소국을 복속하여 신라로 발전한 나라이다.'사로국'이란 이름은 당대 기록에 가까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신라의 초기 국명이다. 지증왕 재위 이전 신라의 국호는 여러 사료에서 '사로' 이외에, 사라(斯羅), 신라(新羅)[3] 등이 혼용되어 나타나지만,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사로국은 진한 시대의 초기 신라 시대를 강조하기 위해 가장 이른 기록인 《삼국지》의 사로국이란 이름을 사용한다.
2. 역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고조선의 유민인 여섯 개 마을(주요 6부 또는 6촌)에서 박혁거세를 추대하여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건국년도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환산했을 때 기원전 57년경인데, 앞서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해서 유민이 남하한 사실과 이어지고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의 양상과 어느 정도 연결된다.[4]다만 사로국이란 국가가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는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 수정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에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 다만 중국의 《정사 삼국지》에도 사로국이 소개되며, 적어도 2세기 이전에는 그 존재가 확실시된다. 사로국은 국내 문헌에 따르면 101년 월성을 정궁으로 하고 102년 음즙벌국을 병합하였으며, 이듬해 실직국과 압독국까지 복속하며 진한의 유력자로 떠올랐다.
사로(斯盧)의 '사(斯)'는 고대 한국어에서 '세[se]', '시르[sir]', '셰[sie]'[5], '시[shi]]'로 발음되었으며 '로(盧)' 역시 상고한어에서 '라[c-raʔ]' 로 발음되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이에 맞추어 고대 한국어 음가로 이 글자를 읽으면 '시(ㄹ)라(시르-라)', 즉 신라가 된다. 따라서 사로, 사라, 신라 등의 국호 표기는 같은 이름을 다른 한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사로국과 신라국의 경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내물 마립간 시기를 기준으로 신라로 지칭하는데 사로국과 신라국 사이에 공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신라의 역사이다. 내물 마립간이 그 기준이 된 이유는 이 시점부터 왕국으로서의 왕위 계보가 안정되었으며, 결정적으로 국서에 '신라'라는 이름을 사용한 기록이 다수 발견되기 때문이다.[6] 내물 마립간 이후에도 신라, 계림, 사라 등 다른 표기가 혼용되다가, 이후 지증왕 대에 군주의 칭호를 '왕'으로 바꾸면서 국호를 신라로 공식 지정하기에 이른다.
2.1. 진한에서 우위를 점한 이유
당대의 주요 국제 교역로 상의 결절점에 위치한 금관국만큼은 아니지만 사로국의 입지는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경주는 당시 금관국의 주요 교통로인 낙동강 유역에서 벗어나 있는 독립된 형산강 수계에 위치하면서, 또 다른 전통적인 교통로인 동해안 교통로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간단한 고개길만 넘으면 낙동강 수계와 연결되며, 단층 지대로 직결되는 양산을 통해서 낙동강 하류역 및 남해안 진출이 가능하다. 물론 경주 분지와 직결되는 울산과 포항을 통해서도 해상 진출로가 열려있다.[7]이렇듯 경주는 당대의 주요 교통로상의 결절지에 해당한다. 비록 영남 지역의 최대 교통로인 낙동강, 그것도 하류역을 장악하고 당대 최고의 국제교역로인 남해안 해상 교통로로 왜, 중국 군현과 교섭하던 금관국에 비해 입지상으로는 뒤쳐지지만, 경주는 이들의 2차 결절지이면서도 동해안 국제 교통로를 통해 고구려 및 제 정치체(옥저, 동예 등의 소국)와 직결되는 상대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4세기 이후는 전통적인 간선 국제 교통로인 해상 교통로가 쇠퇴하게 되며[8] 고구려가 부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기존 교통로에 의존하던 금관국에 대해 사로국은 교역로 장악의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된다.[9]
이상이 사로국이 비록 금관국보다는 못하지만 주변 소국들에 우위를 점했던 배경이며, 후에는 고구려가 부상하면서 금관국을 추월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3. 형성 시기
3.1. 정사 기록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제2실의 해설. |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건국한 때는 기원전 57년이고 삼국유사 역시 동일한 내용을 전한다.
전한 지절 원년 임자【옛 기록에서 건호 원년 또는 건원 3년이라 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에 남자는 왕이 되고 이어 여자로 왕후를 삼았다.
以五鳯元年甲子男立爲王, 仍以女爲后.
『삼국유사』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에 남자는 왕이 되고 이어 여자로 왕후를 삼았다.
以五鳯元年甲子男立爲王, 仍以女爲后.
『삼국유사』
지절 원년은 기원전 69년, 오봉 원년은 기원전 57년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건호 원년(기원후 25년), 건원 3년(기원전 138년) 등 다른 내용도 언급하지만 일연이 '오래된 책 중 이런 기록도 있지만 이는 오류'라고 못박았거니와 이에 대해 언급하는 다른 기록도 없으므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김부식의 가치 개입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 문제 등을 의심하는 측에서는 신라의 건국년도가 앞당겨졌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러한 주장에도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논란이 있다.
아래에서는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로 나누어 사로국의 형성시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헌사학계나 고고학계나 최근에는 2세기 초 정도에서 아무리 늦어도 3세기 초 정도에는 신라가 건국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다만 그 안에서의 세부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3.2. 문헌사학계
- 먼저 이종욱은 사로 6촌이 청동기 시대(기원전 7세기 ~ 2세기)[10]에 이미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긍정하여 이들이 기원전 2세기 말쯤 통합하여 하나의 사로국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 강종훈과 선석열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왕들의 재위 연수가 인간의 수명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긴 편이고 계보 역시 모순이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삼국사기의 내용 전반은 인정하되 그 일들이 일어난 연대는 인정할 수 없다며, 연대에 대한 수정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수정 결과 대체로 내물 마립간 이전의 왕들이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달리 3세기 ~ 4세기 즈음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사로국이 기원전 57년이 아닌 3세기 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문헌 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를 긍정하는 측면에서 사로국의 형성 시기를 기원전 2세기 말기와 이를 수정하는 시각에서 기원후 3세기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3.3. 고고학계
고고학계에서 역시 두 가지 시각이 있다.- 먼저 이청규는 경주 지역에 기원전 2세기 말쯤 국(國)이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국들은 경주 지역 내에 하나가 아닌 여러이 존재했으되 기원후 3세기에 완전히 통합되면서 사로국이 등장했다고 여겼다.
- 이희준은 이청규의 견해대로 기원전 2세기 말 경주 지역에 국(國)이 등장했다는 데에는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청규와는 달리 경주 지역에 사로국 하나만 존재하였고, 그가 말했던 황성동 지구, 조양동 지구 내 각각의 국(國)들은 개별 단위 정치체[11]가 아닌 사로국을 구성한 하위 읍락으로 보았다. 정리하면 이희준은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미 경주를 통합하는 광역의 정치체인 사로국이 등장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 문헌 사학계와 고고학계의 견해를 정리하면 사로국의 형성 시기는 기원전 2세기 말과 기원후 3세기 대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4. 형성 과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사로 6촌(사로육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A. 알천양산촌
경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 경주시내, 월성(月城)부근, 경주 남쪽, 남산(南山) 서북쪽 등으로 약간 차이가 있다.
B. 돌산고허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대체로 상주로 보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남천(南川)의 서쪽이나, 서악동 일대로 보고 있다.
C. 무산대수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제천과 예천, 또는 의성과 제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경우, 모량리나 건천 일대로 파악한다.
D. 취산진지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성주 또는 영해, 울진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인왕리, 또는 조양동, 또는 월성과 황룡사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E. 금산가리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김천·성주로 보거나, 개령·성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소금강산 또는 명활산(明活山) 부근, 천북면 일대 등으로 본다.
F. 명활산 고야촌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경주·영천 지역이나, 경산·영천 지역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경우, 명활산이나, 보문리 일대, 또는 황성리 일대로 보기도 한다.
이를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사로 6촌과 사로국의 건국 과정에 대해 설화 형식으로 자세히 나와있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촌(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뛰어나고 영리하며 몸가짐이 조신하였다.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박【匏, 조롱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커다란 알이 마치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으로 한 것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임금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삼국사기》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다.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가 있다. 그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瓢嵒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李)씨의 조상이다. 【노례왕 9년(서기 32년)에 부를 두고 이름을 급량부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서기 940년)에 중흥부(中興部)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잠(波潛)ㆍ동산(東山)ㆍ피상(彼上)ㆍ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다.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 형산(兄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 정(鄭)씨의 조상이다. 【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량을 혹은 탁(涿)이라고도 하는데 읽을 때는 역시 도(道)라고 한다.】 지금의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ㆍ마등오(麻等烏)ㆍ도북(道北)ㆍ회덕(廻德) 등의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은 구례마(俱禮馬)【구(俱)를 구(仇)라고도 한다.】이다. 처음엔 이산(伊山)【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량(梁)을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孫)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다. 【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나 빙지(氷之)라고도 한다.】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본피부(本彼部) 최(崔)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의 남쪽에 옛 터가 있다. 여기가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맞는 것 같다.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이다.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 촌장은 지타(祗沱)【지타(只他)라고도 한다.】이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곧 한기부(漢歧部)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ㆍ하서지(下西知)ㆍ내아(乃兒) 등의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다.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 금강산에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薛)씨의 조상이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ㆍ잉구며촌(仍仇旀村)ㆍ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이 여기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서기 32년)에 비로소 여섯 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여섯 성(姓)을 내려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라 하고 장복부를 아버지라 하며, 임천부를 아들이라 하고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기원전 69년)【고본(古本)에는 건호 원년 또는 건원 3년이라 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 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 왕이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아마도 우리말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이것은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면서 ‘어진 이를 임신해서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룡(雞龍)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어찌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에 ‘알지(閼智) 거서간(居西干)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후로 왕의 존칭이 되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사로 6촌이 내부적으로 통합하여 사로라는 정치체를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로 6촌의 존재 여부와 위치 등에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사로 6촌의 실재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왜냐하면 사로 6촌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사로 6촌이 통합하여 사로라는 정치체가 등장한 것이고, 이를 부정한다면 또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6촌 존재를 인정하는 학설은 6촌에서 나중에 6부로 이름이 변화된다고 보고, 6촌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는 6촌이라는 명칭은 신라 중대에 설화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다. 또 이 학설은 사로국의 형성을 6부의 형성과 통합이라는 입장에서 본 연구와 6부의 존재여부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고고학적인 유물/유적을 통해 그 성립과정을 밝히는 연구가 있다.
아래에서는 6촌의 존재를 인정하는 학설과 인정하지 않는 두 학설을 문헌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입장을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4.1. 문헌사학계
4.1.1. 6촌 실재설
먼저 6촌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며, 이러한 6촌의 통합으로 사로국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학자로 이종욱과 이현혜가 있다.- 이종욱은 청동기 시대에 계급 사회가 형성돼[12] 촌락을 통제하는 수장층이 출현하였으며, 이러한 수장이 경주에서는 각기 직경 10km 범위의 촌락을 각기 다스리는 6촌장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6촌이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기원전 2세기 말경 통합을 이루어, 직경 30km ~ 40km 범위를 가진 광역의 사로국이 탄생하였다고 보았다.
- 이현혜는 기존의 사로 6촌 허구설들을 비판하며, 경주 지역에서 나오는 목관묘(木棺墓)와 목곽묘(木槨墓)를 통해 그 실존 여부를 살피고 있다. 그는 기원전 2세기 말 목관묘 조성 단계가 되면 경상도 지역에 유물, 유적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다면서 이전 단계(초기철기시대)의 무덤들이 1, 2기의 단독 무덤(독립묘)으로 조성되는 것과 달리 100여기 이상의 군집묘(집단 묘역)가 등장한다고 하면서 이는 장기지속취락의 등장과 정치체의 형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또 이러한 집단 묘역은 대규모 유이민 파동에 의한 급격한 인구 증가로 보고, 이러한 유이민은 고조선 멸망 후 내려온 고조선 유민으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육촌이 고조선 유민으로 이루어진 것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하였다. 즉 정치체의 형성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군집묘들은 기존에 비정된 각 촌의 위치마다 분포하고 있으므로, 육촌의 실재를 인정할 수 있고, 이러한 육촌이 통합하여 형성된 것이 사로국으로 보았다.
4.1.2. 6촌 허구설
4.1.2.1. 배경
육촌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로는 전덕재와 주보돈 등이 있다. 그들은 육촌의 내용에 나오는 유리 이사금 대의 6부명의 개칭, 6부에 대한 성씨 하사, 17관등제의 정비, 그리고 촌(村)의 용어 문제에 대해 제기하고 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리이사금 9년(A.D 32)에 기존의 6촌(村) 이름을 6부(部)로 바꾸고, 각 부마다 성씨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또 17개의 관직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촌(村)이라는 명칭 문제이다. 촌(村)은 마을을 뜻하는 일반명사로서 현재까지 흔히 사용되지만, 중국 후한(後漢)대까지만 하더라도 '마을'을 지칭할 때 촌(村)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취(聚) 혹은 오(塢)를 사용하였고, 촌(村)이 지금의 마을의 의미로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부터이다.
한국을 포함하는 동이(東夷)지역[13]의 정치체들 역시 마을을 뜻하는 의미로 촌(村)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 때까지는 부(部) 혹은 읍락(邑落)이 기본 단위로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최초의 촌(村) 사용은 4~5세기대로 생각되며, 광개토대왕릉비가 가장 빨리 확인되는 사료이다. 신라에서는 501년에 만들어진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서 최초로 확인되고 있고, 기존 연구성과를 통해 볼 때 5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촌(村)을 기초 마을 단위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사로 6촌으로 등장하는 지명 문제를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촌의 이름은 각각 양산촌(楊山村), 고허촌(高墟村), 대수촌(大樹村), 진지촌(珍支村), 가리촌(加利村), 고야촌(高耶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이름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초기기록에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7세기 이후에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허촌의 고허라는 지명은 진평왕 때 등장하고[14], 대수촌의 대수는 태수방(太樹坊)이라는 명문기와[15]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방(坊)이란 바둑판모양으로 구획한 도시의 네모 한 칸(블럭)을 의미한다.[16] 이 방(坊)의 정립시기에 대해서 논란은 있지만, 대체로 7세기 이후에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에 대수촌 역시 7세기 이후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또 진지촌의 진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빈지(賓之)라고도 부르는데, 통일신라 때 신라 귀족들이 살았다는 39금입택(金入宅) 중 하나로 빈지택(賓支宅)이 나오고 있어 역시 7세기 이후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6부의 명칭은 현재 신라에서 가장 빠른 금석문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단계부터 계속해서 그 명칭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부(部)가 6촌 지명보다 빠른 시기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17]
한편 6촌 중 진지, 가리, 고야는 고유어 음차로 보이는 반면 양산, 고허, 대수는 한자식 이름이므로 촌이라는 용어와 함께 후대에 붙여진 것이란 설도 있다.
세 번째는 성씨(姓氏) 사용 문제이다. 신라에서 최초의 성(姓)을 사용한 사람은 기존 연구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진흥왕이다.[18] 이후 귀족들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를 지나서이고, 특히나 유리 이사금이 6부에 하사했다는 성씨 중 일부는 8세기 이후부터 사용한 성씨임이 확인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7관등제 성립은 법흥왕 이후로 생각되는데, 이는 신라 금석문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관등명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관등명의 등장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전덕재와 주보돈 등은 이에 따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6촌은 6부의 명칭이 부회되어 후대에 설화형태로서 생겨난 것이며, 이 설화가 등장한 것이 신라 중대인 7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대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6부(部)에 주목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6부가 연합한 육부체제가 형성된 것이 사로국이라고 본다. 다만 주보돈은 이러한 육부체제의 형성이 마립간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므로, 여기서는 전덕재의 견해만을 보도록 한다.
4.1.2.2. 내용
전덕재도 이현혜와 동일한 방법으로 경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고학 자료들을 이용하였다. 그는 자신이 기존 연구에서 밝힌 6부의 위치를 근거로 경주 시내를 훼(喙) 집단, 덕천리 등의 경주 서남부를 사훼(沙喙), 사라리 등의 지금의 건천을 잠훼(岑喙, 牟喙), 조양동 등의 경주 동남부 집단을 본피(本彼), 천북면 동산리 등의 경주 북부 집단을 사피(斯彼) 그리고 지금의 감포 지역을 한기(漢祇) 집단과 연결시켰다.[19] 그리고 이들 6부 집단을 언어학적으로 연결시켜 이를 사로국의 형성 집단의 순서와 연결시켰다. [20]훼부(喙部)는 급량부(及梁部)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급(及)을 근본이라는 뜻으로 풀이했고, 본피부(本彼部)의 본(本) 역시 근본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또 사훼부(沙喙部)의 사(沙)와 사피(斯彼部)의 사(斯)는 새롭다(新)로 해석하고, 이에 따라 경주 분지에서 최초의 사로국 주체 세력을 근본의 의미를 가진 훼부(喙部)와 본피부(本彼部)로 보고, 이를 고조선 유민이 이주한 것과 연관지으며 기원전 2세기 말쯤으로 보았다. 그리고 기원전후 ~ 기원후 1세기경 사훼(沙喙) 집단이 사로국으로 편입되었고, 이어서 기원후 2세기경 잠훼부가 사로국의 단위 집단으로 편입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피부와 한기부는 이 시기의 고고학적 자료가 뚜렷히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피부는 2~3세기경에 한기부는 3세기 후반경에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고, 이 때 6부연합인 육부체제가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정리하면 그는 기원전 2세기 말경 사로국이 형성되었다고 보면서도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훼부와 본피 두 집단에서 사로국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사로국 집단에 사훼 집단 잠훼 집단 등이 편입되면서 차츰 사로국이 큰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였고, 3세기 후반 모든 부집단이 사로국에 편입되면서 경주 지역 모두를 포괄하는 광역의 사로국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이상 문헌 사학계의 기존 논의를 정리해보면 크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에서 사로 6촌의 실체를 인정하고, 사로국의 형성을 사로 6촌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시각과 이를 부정하고, 부(部)라는 각 단위 집단이 차츰 통합하여 광역의 사로국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다. 두 견해 모두 사로국의 출현을 기원전 2세기 말로 잡고 있으나, 앞의 견해는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경주 지역 모두를 통합한 광역의 사로국이 등장했다고 보고 있고, 뒤의 견해는 최초의 사로국이 성립한 이후 각 단위 집단을 차츰 통합하면서 광역의 사로국이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
4.2. 고고학계
고고학계에서는 일찍이 사로 6촌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 위치를 고증한 김원용의 학설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문헌 기록에 나오는 사로 6촌이나 6부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연구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청규와 이희준이 있으며, 이들의 설은 각각 '지구국설'과 '지역국설'로 불리어지고 있다.지구국설과 지역국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지구국설은 지금으로 말하면 송파구, 강남구와 같은 구(區) 정도의 면적을 가진 소국(小國)들이 경주 지역에 여러 개로 난립해 있다가 이들이 나중에 통합되어 경주시 전체를 다스리는 정치체인 사로국으로 발전하였다는 학설을 말한다. 위의 전덕재의 학설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면 좋다.
반면에 지역국설은 경주지역에 정치체가 출현하였을 때부터 사로국이라는 단일정치체가 경주지역 전체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학설을 말한다. 지구국설에서 구(區) 정도의 면적을 가진 소국(小國)들은 단일정치체인 사로국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하위읍락으로 보았다.
4.2.1. 지구국설
지구국설을 대표하는 이청규는 먼저 국(國)이 언제 출현하였는 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면서 다양한 청동 무기와 청동 의기를 부장한 대전 괴정동 유적, 아산 남성리 유적, 부여 연화리 등의 유적을 들며 금강 유역에는 초기철기시대에 읍락을 아우르는 국(國)이 출현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영남 지역과 경주 지역에서는 아직 이 시기의 유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으므로, 국(國)이나 읍락(邑落)을 형성하는 주도 세력이 등장할 만한 적극적인 증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2세기 말경이 되면 경주 입실리, 경주 죽동리, 안강 안계리 등에서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출토하므로, 이 때부터 국(國)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았다.그리고 기원전후한 시기의 국(國)의 범위와 3세기 이후의 국(國)의 범위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며, 기원전후한 시기의 국(國)은 3세기 이후 국(國)을 구성하는 읍락(邑落) 수준으로 보았다. 즉 그는 읍락에서 국(國)으로 넘어가는 것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친다 할 때 단일 읍락의 국(國) 단계를 거쳐 다수의 읍락이 있는 보다 발전된 국(國)으로, 그리고 읍(邑)은 도시적 성격을 점차 갖추면서 국읍적 체제(國邑的 體制)로 발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추정하였다. 기원전 2세기 말경에는 직경 15km 범위에 수백가(數百家) 정도의 규모가 3세기에는 안강, 언양, 울산, 영천을 경계로 한 직경 30km의 경주권을 범위로 삼는 국(國)이 출현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희준과 권오영이 사라리 130호가 이 시기 사로국의 중심지이며, 경주권 전역을 다스린다고 보았지만, 이를 비판하면서 이 시기의 국(國)은 직경 10km 내외로 한정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하였다. 또 사라리 130호는 영천권에 가깝고, 상호 청동 유물 갖춤새가 비슷하므로, 사라리는 영천권에 속해아 하며, 25km나 떨어진 입실리 수장묘 등을 아우르는 국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양동 38호나 사라리 130호 등의 이들 수장묘는 각기 한 지역 집단을 다스리는 국읍(國邑)의 수장(首長)으로 본 것이다.
이후 기원후 2세기경 목곽묘가 출현하면서 무덤의 규모가 커지고, 많은 철기와 토기들이 부장되고, 무덤의 머리 방향이 동서에서 남북으로, 무덤 입지도 변화하지만, 이 시기에도 경주 내에 있는 여러 국(國)을 아우르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같은 경주권 내의 세력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주변의 포항 옥성리 집단이나 울산 중산리 집단[21]에서도 대규모 목곽묘군이 확인되면서 경주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우위에 있는 광역의 지역국이었다는 증거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황성동 집단이 목관묘 단계의 읍락 사회를 계승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당시 첨단 제품인 대규모 철 생산의 공방지를 조성하였고, 교통로상의 잇점을 기반으로 국(國)으로서 상대적 위상이 높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점차 다른 국(國)들과 차별성이 커지면서 3세기 이후 지역 국(國)이 성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리하면 기원전 2세기 말 죽동리, 입실리, 안계리 등 여러 지구에 3세기경의 읍락(邑落) 수준에 해당하는 국(國)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직경 10km ~ 15km 내외의 규모였다. 이들이 큰 수준 차이 없이 지속되다가 2세기 목곽묘 단계에 들어서면 황성동 집단이 성장하여 점차 이들 국(國)들과 차별화되기 시작한다. 그 계기는 당시 최첨단 기술인 철기에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기원후 3세기가 되면 이들 경주 권역의 모든 국(國)들을 평정하고, 경주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광역의 사로국이 등장한다고 본 것이다.
4.2.2. 지역국설
지역국설은 주로 이희준의 학설이다.5. 참고문헌 및 관련 서적
안타깝게도 삼한과 관련한 개설서는 전혀 없기 때문에, 아래에 서술된 참고 문헌들은 모두 연구서와 논문이다.참고문헌 등을 서술하기 앞서서 우리 같은 대중들은 사로국(斯盧國)과 같은 고대국가 이전의 정치체에 대해 아직까지도 부족국가(部族國家)라는 명칭을 흔히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 부족국가라는 용어는 이미 70년대 즈음하여 굉장히 큰 비판을 받았고, 이후 국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 더는 통용되지 않고 있다. 사실상 70~80년대 연구 성과조차 일반인들에게 공유되지 않는 국사의 대중성을 보여주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용어를 대체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를 하였는데, 특히 당시 서구학계에서 통용되어 온 인류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삼한사회를 재구성하고 그 성격에 대해 정의를 내린 김정배[22]의 연구가 주목된다. 그는 과거 삼한사회를 정의했던 '부족국가(部族國家)', '부족연맹체(部族聯盟體)'라는 용어를 강력히 비판하고, '군장사회(Chiefdom)'[23]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군장사회(Chiefdom)란 국가(State)단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굉장히 복잡화 된 사회로 국가에 준(準)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당시 그의 연구는 굉장히 파격적이었고, 이후 연구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규정한 이 Chiefdom 역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를 대신하여 삼한 단계의 정치체는 '소국(小國)'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연구를 비판했던 연구자들은 서구의 이론을 원용하는 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만 내거나 그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심각한 오류를 범한 서투른 비판만을 했을 뿐 이 용어를 대체한다거나 삼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했다. 삼한 정치체를 '소국'이라는, 그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용어로 정의한 것이 그 예이다.
이후 이 문제는 고고학계로 넘어가서 최몽룡, 최정필, 강봉원 등에 의해 논의가 되긴 하였으나, 역시 이 Chiefdom이라는 용어를 학술적 용어로서 일반화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고, 사실상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24] 따라서 3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연구는 충분히 학계에서 논쟁이 될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가형성, 고대 이전의 원사사회의 구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해 관심이 많으면 아래 자료를 참조 바란다.
- 김정배, 1986,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 출판부
다음은 삼한사회의 구조와 형성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힌 연구서이다. 이러한 것에 관심이 있다면 아래 자료를 참조 바란다.
- 이현혜, 1984, 『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 일지사
- 권오영, 1996, 『삼한의 '국'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문창로, 2000, 『삼한사회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 을 참고 바란다
다음은 국가형성기의 고대국가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문헌사적 입장으로 정의한 저서와 논문들이다. 이를 '부체제(部體制)'라고 정의하는데, 현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인 노태돈 교수가 세운 '초기고대국가구조론'이다. 그가 이 단계를 명시적으로 삼한단계로 정의하진 않았지만, 고구려를 기준으로 고유명 부(部)가 해체되고, 방위명 부(部)가 정착되는 3세기 후반 이전의 단계라고 정의하고 있으므로, 이는 곧 한반도 남부로 따지면 삼한 ~ 삼국 초기 사이로 정의해 볼 수 있겠다. 그의 이러한 이론에 관심이 많다면
- 노태돈, 1975, 「삼국시대 부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 노태돈, 1999, 「제2부 1장, 부체제의 성립과 구조」, 『고구려사 연구』
- 노태돈, 2000,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 『한국고대사연구』 17
- 노태돈, 2009,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 집문당
그리고 그의 이러한 이론에 영향을 받아 역시 신라사에서 논의되었다. 신라사의 관점에서 부체제를 정리한 연구로는
- '전덕재, 1996,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 '주보돈, 1992, 「삼국시대 귀족과 신분제」, 『한국사회발전사론』'
- '주보돈, 2006, 「신라의 부와 부체제」, 『효원사학회』30' 이 있다.
진변한사회를 고고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논문으로는
'이재현, 2003, 『변진한사회의 고고학적 연구』, 부산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삼한시대 소국의 위치와 성격 그리고 사로국의 정복과정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으로는
'이형우, 2000, 『신라초기 국가성장사 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그리고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삼한 소국정복과정을 삼국사기 수정론적 입장에서 본 저서로
'선석열, 2001, 『신라국가성립과정연구』, 혜안'
선석열의 수정론 입장에 영향을 받아 이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한 연구성과로'이희준, 2008, 『신라고고학연구』, 사회평론'
마지막으로 신라의 교통로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로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김세기, 2002, 「진변한의 교통로」, 『진변한사연구』'가 있다.
본 문서를 쓴다고 직접적으로 참고한 문헌들이다.
사로국 성립에 대한 문헌사학계의 논의들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선석열, 2001, 『신라국가성립과정연구』, 혜안'
'이종욱, 1982,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이현혜, 2008, 「고고학 자료로 본 사로국 육촌」, 『한국고대사연구』52'
'전덕재, 2016, 「사로국의 건국 주체세력과 그 과정」, 『한국고대사연구』82'
사로국 성립에 대한 고고학계의 논의들
'이청규·박자연 2000, 「사로국 형성 전후의 경주」, 『고문화』55'
'이청규, 2000, 『원삼국시대 전기의 경주와 주변지역과의 교류』, 국가형성기 경주와 주변지역, 제25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
'이청규, 2005, 『사로국의 형성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26,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이희준, 2000, 「삼한 소국 형성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틀」, 『한국고고학보』43'
'이희준, 2002, 「초기 진·변한에 대한 고고학적 논의」, 『진변한사연구』'
'이희준, 2011, 「경주 황성동유적으로 본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 사로국」, 『신라사학보』38'
중국 및 한국의 촌(村) 명칭의 기원 논의 및 신라 촌(村)의 분석
'전덕재, 1996,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전덕재, 2016, 「사로국의 건국 주체세력과 그 과정」, 『한국고대사연구』82'
'신성곤, 2009, 「주마루(走馬樓) 오간(吳簡)을 통해 본 육조시대 '촌'의 기원에 대한 연구」, 『역사문화연구』34'
'주보돈, 1998,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과정과 촌락』, 신서원.'
신라의 성씨사용의 기원과 확산과정
'이순근, 1980, 「신라시대 성씨취득과 그 의미」, 『한국사론』6,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종서, 1997, 「나말여초 성씨 사용의 확대와 그 배경」, 『한국사론』3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신라의 관등제 성립과 정립과정
'주보돈, 1990, 「6세기 초 신라왕권의 위상과 관등제의 성립」, 『역사교육논집』13·14'
[1] 건국 연대를 2세기로 보고 기년을 조정하면 4세기, 내물왕의 즉위를 380년대 전후로 조정하면 4세기 중반 정도 된다.[2] 신라 초창기, 즉 사로국의 경우, 지배층부터 피지배층까지 모두 고조선과 낙랑에서 남하한 예맥족이 민족적 근간이였음이 고고학적으로 유력시되고 있다.[3] 지증왕 때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긴 했지만, 지증왕 이전에도 신라라는 이름을 쓴 적은 많다. 다른 표기도 같이 존재했을 뿐이다.[4] 기원전 2세기 말 이후에 조영된 대구, 경주 지역 무덤에서는 철기의 비중이 커지고 주로 의식용구인 청동기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한반도 북서부도 비슷한 변화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변화 시기는 위만조선이 한무제에 의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위만조선 멸망 직후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군현을 벗어나 영남지방으로 이주정착하고 새로운 정치권력과 새로운 지배집단이 생겨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5] 셰(시에)는 발음상 '쉬' 로 발음이 변하기 쉽다.[6] 중국에 신라 명의로 사신을 파견했다. 이전까지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지에 '사로(斯盧)'로 서술되어 있다.[7] 실제로 많은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기록을 보면 가야군은 주로 양산(황산진)을 통해서, 왜군은 포항과 울산을 통해서 경주로 진격하거나, 시도한다.[8] 그 중심인 중국 군현 지역이 전쟁터가 되며, 수십년간의 전쟁, 특히 근초고왕의 침략으로 군현 복속 이후 유지되던 중국인 세력이 말소되면서 그 교역로도 쇠퇴하게 된다.[9] 삼한 전체를 아우르던 진왕의 작위를 가지던 목지국 또한 대중국 무역에서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때문에 오랜기간 삼한의 대표취급을 받았다. 목지국의 몰락 역시 교통의 요지가 한강유역으로 넘어가면서 패권을 백제에게 내주게 된다.[10] 지금의 청동기 시대 편년안이 아닌 이종욱의 편년안이다.[11] 국가(State)는 아니지만, 수장(Chief)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된 사회를 고고학계에서는 '정치체(political)'라고 정의한다. 대표적으로 삼한사회가 그 단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도 국가단계 이전 사회는 국가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모두 정치체로 서술한다. 여기서 국가단계라 하면 4세기 이후의 삼국시대의 세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생각하면 된다.[12] 청동기시대 사회성격에 대해 계급사회로 보는 학설과 평등사회로 보는 학설로 나누어져 있다.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청동기시대 후기인 송국리문화 등장 이후에는 계급사회로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3] 중국 입장에서 오환, 선비, 고구려, 삼한, 일본 등 '동쪽 오랑캐' 전부를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14] 48년(서기 626년), 8월 고허성(高墟城)을 쌓았다. 四十八年 八月 築高墟城[15] 박방룡, 2013년,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p.394[16] 요즘 신도시의 네모난 도시구획을 생각하면 된다.[17] 사견이지만 나머지 지명들은 아예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6촌의 실재가 의심스럽다. 예를 들면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돌산(突山),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의 무산(茂山),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취산(觜山), 그리고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은 전부 그 지명을 찾을 수 없다. 그 중 금산 가리촌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개령군조에 금산현(金山縣), 성산군조에 가리현(加利縣)이 등장하고 있어 그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물론 후대에 그 지명이 소멸되어 못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대체로 지명이 잘 남아있는 경주에서 이 지명들을 가지고 어디라고 추측할 만한 연결고리 자체가 없다는 것이 의문스럽다.[18] 이후 김씨, 박씨 등으로 나뉘어진 혈족 개념은 그 전에도 물론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진흥왕 대에 비로소 중국식 성씨를 사용하고 그것을 멀리 혁거세까지 이어지는 선조들에게 소급했다는 것이다.[19] 여기서 나오는 훼, 사훼, 잠훼, 본피, 사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각각 급량부(及梁部), 사량부(沙梁部), 모량부(牟梁部), 본피부(本彼部), 습비부(習比部)와 대응한다. 위의 용어는 6세기 신라 금석문에서 나오는 용어들이다. 예외적으로 한기부만 금석문상에서 등장하지 않는다.[20] 단, 계림유사에 의하면 한자 喙은 닭의 한자 차음표기라고 설명되어 있으므로 훼부가 아닌 탁부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또한 이는 왜 신라의 이칭이 계림이고, 혁거세와 알영이 난생신화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될 것이다.[21] 울산 중산리 고분을 조영한 집단은 일반적으로 사로국의 6부 중 한 세력으로 본다.[22] 박근혜 정부 당시의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하였던 그 인물이다.[23] 이 용어는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보는 것처럼 김정배 교수는 군장사회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는 족장사회로, 이종욱 서강대 명예교수는 추장사회로,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는 추방사회로, 김범철 충북대 교수는 수장사회로 부를 것으로 제안하였다.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되었지만, 대체로 군장사회와 족장사회 둘 중에 하나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4] 최근에 문헌사학계에서는 고려대 박대재 교수가, 고고학계에서는 서울대 고일홍 HK연구 교수, 서울대 김종일 교수, 경북대 이성주 교수 등이 간헐적으로 관련 논문을 내고 있긴 하나, 일회성에 그치는 데다 이를 가지고 어떤 생산적인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