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6 17:08:34

삼한

한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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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분류
2.1. 원삼국시대 한강 이남에 있었던 세 개의 국가 또는 소국 연맹체2.2. '삼국시대의 세 나라'로 의미 변화2.3. '한민족, 국가, 문화권'의 통칭으로
3. 중국, 일본의 삼한 기록4. 야요이와의 연관성5. 둘러 보기

1. 개요

三韓

예맥(濊貊)족과 더불어 고대 한반도에 거주하던 농경민족이자 예맥(濊貊)족과 함께 현 한민족의 주류 조상이되는 한(韓)족의 나라들을 말한다.

2. 분류

2.1. 원삼국시대 한강 이남에 있었던 세 개의 국가 또는 소국 연맹체

진국(辰國)에서 나뉘어진, 고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서 형성된 소국들의 연맹체인 마한, 진한, 변한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사실 마, 진, 변한이라고 편의상 분류하지만 실상은 각 문서 내에서 확인할 수 있듯 수많은 소국이 난립하고 있었으며, 같은 정체성으로서 서로 단결할 때도 있었고 서로 열심히 싸우기도 하며 서로 세력을 넓히려고 했던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각자 소국들의 크기는 지금의 , 한 두개, 커봐야 몇개 정도 묶어놓은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된 국가라기보다는 성읍 국가나 지역들의 연맹체에 가까운 형태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연맹이라는 것도 거대 국가인 중국이나 한반도 북부 지역과의 교류에 있어 그런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지 내부의 국가들끼리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포상팔국 전쟁(소위 포상팔국의 난)이라거나... 한국사판 춘추시대라고도 볼 수 있으며,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수수께끼의 나라들이다.

사서에 따르면 진국(辰國)에서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 졌다고 하지만 진국이라는 실체 자체는 인정되지 않으며 마한과 진한, 변한의 각 나라들은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온조가 남하했을 때에도 긴 시간동안 마한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고 보고 있고(최대 5세기 ~ 6세기에도 전남 지방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존재), 수혈식 고분과 석곽등을 볼땐 마한, 변한, 진한은 상대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서로 비슷한 양식과 문화를 가진 것으로 보여지며 특히 진한과 변한은 서로 거의 비슷한 문화 양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명확한 구분도 불가능하다.

마한은 백제의 남하로 인해 백제국으로 병합되고 변한은 후에 가야로, 진한은 후에 신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금세 일어난 일 같지만 이들은 실제로 백제신라의 건국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그 세력이 남아있었다. 신라와 백제는 건국 후 처음부터 흔한 삼국 시대 지도처럼 서부와 동부를 다 가진 영토 국가는 아니었다.

가령 신라는 맨 처음에는 수많은 진한 지역 소국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는데, 신라만 해도 경주에서 말 그대로 바로 옆인 울산, 안강, 영천에도 각자 우시산국, 음즙벌국, 골벌국이 존재했을 정도니 초기 신라(사로국)이 얼마나 작은 나라였는지 알 수 있고 그리고 이런 작은 나라들을 하나하나 연합하고 복속해나가면서 우리가 아는 경상도 일대를 지배하는 신라가 된 것이다.

백제 역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서는 백제가 건국된 이후 곧 마한을 복속시켰다고 나오나, 고고학 연구 상으로는 그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이룬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차 마지막 개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 추정이 공식적으로 삽입되었다. 교과서는 마한이 천안, 익산, 나주 등을 중심지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는 성장하는 백제에 밀리면서 천안 -> 익산 -> 나주 지방으로 차차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마한도 속을 들여다보면 목지국 같은 맹주격 국가가 있었고 수많은 마한계 소국들이 연맹체로 있거나 세력을 넓히거나 하였는데, 어떤 식으로 밀려나고 따위는 최고(最古) 사서가 삼국사기밖에 남아있지 않아 기록이 워낙 일천해 알기 어렵다. 하지만 백제 고이왕 시기에 통역 오류로 인해 마한과 한군현이 정면으로 충돌한 기리영 전투의 기록에 따르면 대방태수가 전사하는 등 일부 소국들은 상당한 세력을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신분활국이 북부 마한 소국들의 리더였던 걸로 추정되는데 한군현의 반격으로 신분활국은 아예 멸망한다(...).

중국 정사 삼국지에도 당시 한반도 남부의 삼한 소국의 지배자는 신지라 하는데 그 중 일부에 호칭을 더한다고 쓰여 있으며, 삼한을 대표하는 목지국 진왕 이외에도,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사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부례(濆臣離兒不例) 구사진지렴(狗邪秦支廉)" 즉 (해석에 따라 조금 차이가 나지만) 신운국의 견지보, 안야국의 축지, 분신리아국의 불례, 구야국의 진지염이 있다라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각각 마한의 신운신국(전남 지방의 침미다례국), 신분활국(백제 이전 경기 북부에서 가장 강했던 나라로 봄), 변한의 구야국(금관 가야의 전신), 안야국(아라 가야의 전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백제와 신라가 흥하기 이전에도 각 지역별로 나름 주변 지방에 영향을 미친 강성했던 나라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이러한 나라들의 발전이 3세기 경 있었는지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이 문제이다. 대표적으로 안야국)

삼한은 각각 백제, 신라, 가야로 판도가 정리되어 북쪽을 장악한[1]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만들게 된다.

참고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문구에 예인(穢人)들과 함께 나오는 한인(韓人)들이 바로 삼한인(三韓人)들이다.

삼한의 한(韓)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마찬가지로 당시 그 지역에 사는 집단들을 일컬어 부르는 명칭의 음차(音借)이다. 빌릴(借) 음(音)에 해당되는 한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신라, 고구려, 백제와 달리[2] 삼한은 선택할 수 있을 만큼 한자 문화가 흡수되기 전에 멸망했다.

음차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의 원래 발음 및 의미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음차자를 스스로 선택하든 중국의 음차자를 쓰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 나라도 학자들의 수많은 가설만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 완벽하게 정확히 밝혀진 건 없다.

2.2. '삼국시대의 세 나라'로 의미 변화

그러나 삼한을 삼국 정립 이전 한반도 중남부로 보는 관점은 어디까지나 조선 후기 이익과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후이다.

마진변 삼한이 처음 기록된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위 단락대로였지만, 삼국 시대 후반부쯤 가면 삼한 =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른 표현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이 천 년 이상 계속되었다. 지금 우리가 백제, 신라는 삼한과 연결이 되지만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삼한과 별도로 인식하는데 이것은 근대 역사학 지식이 축적된 결과물이고, 그 전엔 천 년 넘게 삼한 = 고구려 + 백제 + 신라로 인식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고증해내기 전까지 저 마한, 진한, 변한의 세 나라가 고구려, 신라, 백제로 발전 및 대체되었다는 것이 전근대 지식인들의 인식이었다.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남긴 고진 묘비명, 고현 묘비명에서도 고구려인들이 스스로를 삼한인으로 여겼다는 것이 드러난다.[3]단지 진한 = 신라는 맞는데 마한과 변한 중 어느 쪽이 고구려이고 어느 쪽이 백제인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을 뿐. 즉 한민족들은 고대부터 삼한(三韓)이란 정체성은 마한, 진한, 변한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로서 이어져 왔다고 할수 있다.

수서(隋書), 당서(唐書)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칭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최소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된 이후에 삼국 = 삼한으로 칭하는 관점은 삼한 일통으로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때 쓰던 정치적 구호로 쓰인 점도 있었으나 그 전부터 중국에서 한반도를 본 입장과 더불어 묘비명 등을 볼때 고구려, 백제, 신라도 자신들을 삼한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로 보인다. 수나라, 당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삼국을 삼한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고구려 왕족 출신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인물인 고현의 묘지명에서도 스스로를 요동 삼한인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아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말이 확실하다. 고려에서 삼한 공신을 책봉하거나 후일 조선이 대한제국을 자칭하면서 생각했던 한도 마한, 진한, 변한이 아니라 삼국의 삼한이다. 심지어 실학자들에 의해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임에도 대한제국을 건국할 때의 교서를 보면 삼한을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중국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중화"라는 개념을 통해 나라는 달라도 보다 큰 민족적인 공통 인식을 형성하였듯, "삼한" 또한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다른 국가로써 이권을 다투던 것과는 별개로 조금 더 큰 민족적 공통 의식으로써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삼국의 백성들이 서로 다른 민족성을 가지고 있던 것은 맞고, 그게 고려를 거쳐서 간신히 통합된 것도 맞다. 단지 언급하였 듯 중화처럼 좀 더 상위 개념의 민족적 정체성이 있었을 뿐.

이 외에도 한국을 뜻하는 한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의 요동처럼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는 한민족의 거주 지역을 뜻하는 관용적인 말로 쓰였다. 또한 삼한을 마한, 진한, 변한으로 칭하는 것을 어디까지나 근대 시기 이후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한, 진한, 변한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중국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이를 한전(韓傳)이라고 쓰고 있지 삼한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마한, 진한, 변한을 삼한이라 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근대 시기 역사학이 정립되면서 그야말로 고대 삼한만을 일컬어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일 뿐이다. [4]

2.3. '한민족, 국가, 문화권'의 통칭으로

한국을 뜻하는 삼한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의 요동처럼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는 한민족의 거주 지역을 뜻하는 관용적인 말로 쓰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이 대한 제국을 자칭하면서 생각했던 한도 마한, 진한, 변한이 아니라 삼국의 삼한이다. 애초에 신라가 삼한일통할 때 외쳤던 그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였다. 고구려는 마한, 백제는 변한, 신라는 진한으로 놓고 생각했던 것인데, 물론 이건 근대 역사학의 연구 결과로는 틀린 생각이지만 신라나 고려가 외쳤던 삼한일통이 한반도 남부를 통합한 의미로 쓴 게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도 스스로를 삼한이라고 자칭하며 공통적 인식을 가졌었다.

이런 표현은 100여년 전까지도 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위안스카이안중근을 위해 써 준 시에도 시적 표현으로 삼한이 등장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1cbvvpNzvY

그러나 현대에는 삼한이 한반도 남부의 삼한을 칭하는 것이라는 교육의 영향으로 이들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한민족 혹은 그들의 거주 지역의 대명사로 삼한을 쓰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한다.

3. 중국, 일본의 삼한 기록

중국의 정사(正史) 중 하나인 삼국지에는 고대의 삼한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 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嚾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라는 말이 나오는데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흠좀무스럽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를 지게로 해석한다.[5]


"또 주호(州胡)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족(韓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없기 때문에 하의실종?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豬.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巿買韓中.

라는 기록도 같은 책에서 등장하는데 여기서 주호는 탐라국, 즉 제주도를 뜻한다고 추정하고 있다.[6]

일본에서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을 일컫는 말로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의 근거로 쓰인다. 나중에 한반도를 자기들 영토라는 역사 왜곡을 일삼아 정한론을 걸쳐서 한반도 병합에 이른다. 또한 조선 시대까지도 삼한의 한(韓)은 고려(高麗)와 함께 한민족 국가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왜국으로선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정벌이 있다고 절대 보기 힘들다.

신공 황후 자체가 일본 서기에 의하면 垂仁天皇3年3月条 (스이닌 덴노 3년 3월)에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라는 신라 또는 가야 왕자가 왜 열도로 도래하여 播磨國(다지마)에 정착하여 왜왕이 大友主와 市磯長尾市(이치시노나아오치)를 다지마에 파견하여 천일창에게 왜 왔냐고 질문하니 왜국에 聖皇(성왕)이 있어 왜국에 귀속하길 원한다고 하여 정착하여 낳은 후손이 (정확히 말하자면 그 후손이 왜왕과 결혼하여)낳은 딸이 신공 황후로 되어 있어 일본 서기를 편찬할때 왜왕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일 창작된 글이라는 견해도 있고 신공 황후가 벌인 삼한 정벌이 일본 서기에 나타나는 백제 근초고왕과의 동맹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벌인 마한(침미다례국)과 변한(가야)의 전쟁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전쟁으로 각색되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현 일본 오키나와 현과 아마미 제도를 지배한 류큐 왕국에서도 조선을 삼한으로 지칭한 예가 있다. 1458년(조선 세조 재위기)에 쇼 타이큐(尚泰久, 상태구) 왕의 명으로 주조된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7]의 명문(銘文)에 류큐를 주변국에 비교하며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조선을 삼한으로 적고 있다.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 = 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 = 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 = 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이 명문에서 삼한이 외국 중에 제일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류큐인들이 조선을 가장 좋아했던 게 아닌가(?) 짐작되고 있다.

4. 야요이와의 연관성

고고학적으로 야요이인들은 한반도 남부에서 도래한 민족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삼한은 지리적으로 왜와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형성되었고 고대 일본에서 왜의 기원과 삼한의 기원이 같다 기록된 책을 간무 덴노가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을 보면 언어도 풍습도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부여와 말갈의 전신 읍루가 이웃동네라도 언어도 문화도 달랐듯 한반도 남부에서 삼한과 함께 발생한 다른 민족이 일본으로 도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한반도 하나만 봐도 고구려, 진, 예, 옥저, 낙랑국, 삼한 등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있었지만 석기, 청동기, 철기는 비슷한 편이었고 도래인인 야요이인도 거의 비슷하다.

5.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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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고구려도 처음엔 작은 나라에서 시작해 부여나 낙랑, 옥저 등을 전부 정리하고 우리가 아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고구려가 될 때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2] 예를 들어 신라는 사로, 시라, 서야, 서나 등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모두 당시의 신라 고유어(순수 신라말)를 음차한 것이다. 이는 이탈리아(Italia)를 이태리(伊太利, イタリー), 의대리(意大利, Yìdàlì) 등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후에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새로울 신(新)에 망라할 라(羅)를 써서 신라라 하였다. 신라처럼 이렇게 음차할 한자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 한 나라는 중국에서 한자로 가차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3] 고요묘 집안은 진변(辰卞)에서 존귀했고 명성은 순기(珣琪)처럼 두터웠다, 고진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 고현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 고모 군의 휘는 모요 자는 구이고 안동사람이다. 가문은 진한에서 융성하고 다른 명문의 명예를 모두 압도하였다. 부여융 공은 이름이 융이고 자도 융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다.[4] 당시 기준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렸던 동로마 제국이 현재는 비잔티움 제국이라 불리는 것, 헬라스가 원어지만 로마식 표현인 그리스라 불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역사 용어는 실제 당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5]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한반도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분은 대부분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인 만큼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6] 마한 서쪽이라고 해서 환빠들이 이런저런 억측을 내놓고 있지만, 사학계에서는 당시 중국인들이 한반도와 그 주변에 대한 지리를 잘 몰라서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7]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한 명칭은 구 슈리성 정전종(旧首里城正殿鐘)이다. 만국진량의 종은 흔히 부르는 이름이다. 참고로 만국진량은 세상 모든 나라를 연결하는 가교(架橋)라는 의미인데, 각국과 교역하던 류큐 왕국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