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4:04:03

화타


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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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陀

145년(?) ~ 208년 이전[1]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로 는 원화(元化)로 본명은 부(敷)다.[2] 예주 패국 초현 출신.[3]

신의(神醫)라고 일컬어지는 전설적인 명의로서 또 다른 고대의 전설적인 명의인 편작과 더불어 중국에서 의사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인물이다. 더불어 동시대의 인물인 장중경, 동봉과 함께 건안삼신의라고 불린다.

워낙 유명한 명의다 보니 실제 역사와 관계없는 설화에서도 등장이 잦다. 판본에 따라선《토끼전》에 나와 토끼를 놓친 자라에게 만병통치약을 주며 구원하는 역할로 나오는 것이 그 일례다.[4]

2. 정사 삼국지

사실 화타는 전업 의원이 아니었다.《정사 삼국지》의 <화타전>에 그는 서주의 유명 인사였으며 여러 경전에 통달한 학식 있는 유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양생의 방법에 밝았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화타의 나이가 백 세 가까이 되었지만 장년의 용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패국의 재상 진규가 화타를 효렴으로 천거하였고, 태위인 황완이 그를 조정에 출사하도록 불렀지만, 화타는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당고의 화와 같은 비극이 비일비재했던 불안정한 중앙 정부에서 굳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까지의 의술은 어떤 병이든 간에 침 혹은 내복약을 사용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화타가 살던 시대는 침구학 및 경혈학 자체가 발전 도상에 있는 단계였고, 침구학의 일차적인 완성은 서진시대의 황보밀이 침구갑을경을 저술함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내복약 사용의 일차적 완성, 즉 상한론의 완성은 화타가 사망한 뒤인 210년으로 학자들은 보고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화타는 특수한 탕약인 마비산(麻痹散)이라는 마취약을 사용하고 외과 수술을 행하여 병의 근본 원인을 적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전한다. 삼국지 시대에 마취를 이용한 외과 수술을 실행한 것이다. 약 먹어 50년 걸릴 병을 한 번 수술에 끝장내니 신의로 추앙받을 만하다.

화타가 실제로 개복 수술 정도의 외과 수술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존재하는데, 마비산을 복용시켜 환자의 정신을 잃게 한 후, 복부를 절개하여 장기의 일부를 도려내고 실로 봉합하여 수술을 마친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대의 외과 수술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있다. 하지만 현대 외과 수술의 핵심 중 하나인 소독수혈 부분의 언급이 없어, 실제 화타가 위 내용대로 수술을 시행하였다 하더라도 사망률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타가 수술을 어디서 배웠다는 기록도 없고 제자에게 전수되지도 않아 거의 전설적 인물로 추앙된다는 점 또한 화타가 정말로 외과 수술을 하였는지 의심이 들게 한다. 다만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인도 문화권에서도 대마, 아편 등을 이용하여 진통 및 마취를 한 기록도 있고, 인도 경전에 마취, 절개, 봉합의 순으로 이어지는 수술 기록이 많이 전해지며[5][6], 남미 등지의 미라에서 외과 수술 흔적이 발견되는 등, 고대 시대에 외과 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상황에서 중국 고전에 나와 있는 화타에 의한 수술 기록을 완전히 허구라고 단정 짓기 어렵기는 하다. 한대에는 실크로드로 로마, 인도 등이 모두 중국에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의술 역시 영향을 주고받았을 수 있다.

그 외에도 동물의 몸동작을 보고 건강 체조를 고안하여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체질을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전해지는데, 곰 체조, 호랑이 체조, 사슴 체조, 원숭이 체조, 새 체조 등 다섯 동물의 동작을 본떠 오금희라고 한다. 이는 중국에서 아직도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화타는 위나라에서 활동하였으나,《삼국지연의》에서는 , , 전부에서 활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7] 물론 실력은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력과 그 이상의 소문이 본인에게 재앙을 불러왔다.

208년 무렵, 조조가 중병이 들어[8] 화타에게 자신을 치료해 달라고 청했으나 그는 한 번 와서 이 질병은 단기간에 치료하기는 어렵고, 장기간 치료해야만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하고 증상이 조금 호전되자 부인의 병환을 핑계로 돌아가, 그 후 아내가 위중하여 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몇 번을 다시 불러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는 정확하게는 差라고 쓰였다. 즉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다는 이야기. 꾀에 밝은 조조는 몇 번이고 거부하자 이를 수상하다고 여겨 군현의 관리에게 명령하여 화타를 보내도록 했다. 화타는 자신의 본령을 견지하고 다른 사람을 모셔 녹을 먹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길에 오르지 않았다. 조조는 매우 노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가서 살펴보도록 했다. 만일 화타의 처가 정말로 병에 걸렸다면 팥 열 섬을 내리고 휴가 기한을 더 늘려주도록 하고,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면 체포하여 압송하도록 했다. 그의 상황을 살피게 했는데, 과연 아프다는 아내는 오히려 말짱하고 화타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화타는 허현의 감옥으로 넘겨졌으며, 심문을 받고 죄를 시인했다. 이에 분노한 조조는 그를 즉시 하옥시켰고, 결국 화타는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의사로서의 재주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조조의 일등 모사인 순욱이 재주가 아까우니 "화타의 의술은 확실히 매우 정통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바이니 그를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라고 살리자고 탄원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조는 걱정하지 말라며 천하에는 이런 쥐새끼 같은 자가 없어야만 한다고 화타를 가혹하게 고문했다. 화타가 죽으려고 할 때, 책 1권을 꺼내 옥의 관리에게 주고 이 책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했지만 옥의 관리는 법을 범하는 것이 두려워 받지 않았고, 화타 또한 강요하지 않고 불을 찾아 태워버렸다. 화타가 죽은 후에도 두통이 사라지지 않자 조조는 "화타는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나의 병을 고쳐 스스로를 높이려고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끝내 나를 위해 이 병의 근원을 잘라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조조가 사랑하는 아들 창서(倉舒)[9]가 질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필경엔 조조마저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화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인 조충이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화타를 처형할 때 조충이 앓아눕게 되어 조조가 부랴부랴 처형을 취소했으나 명령이 사형장에 도달하기 직전 화타가 처형당했다는 야사도 있다. 사실 그 외에도 야사는 무지막지하게 많다. 조조를 고쳐주려고 약을 만들어봤는데, 그 약이 극약이라 맛보다 본인이 먼저 가버린 게 왜곡되었다는 이야기 따위 말이다.

후한서》에서는 '常在左右'라고 하여 '오만하고 자기 재능을 과신하여 위정자들 밑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니 그냥 조조 밑에서 일하는 게 싫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조조의 병은 화타 입장에서는 '치료 불가능'이었을 가능성도 크고 화타가 성격적으로도 얽매이고 몸을 굽히기 싫어하는 두 가지가 다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화타가 출세욕이 강하거나, 아부를 잘하거나, 혹은 권력의 냉혹함을 잘 알거나 눈치를 잘 살피거나 조조의 잔혹함을 실감하거나 했다면 조조에게 달라붙지 않더라도 차라리 도망을 치건 어떻게든 방도를 마련했거나 눈치라도 열심히 살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조가 잔혹하게 군 것과 별개로 화타의 생존에는 화타 자신의 성격적인 문제도 아예 없다고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후한서》에 나오는 조조의 병은 상술했듯이 두풍(頭風)이었는데, 현대의 삼차신경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완치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꽤 높고, 차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나 일시적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설령 화타 본인의 주장대로 완치가 가능하더라도 조조 본인의 상황을 볼 때 스트레스가 엄청나기에 재발이나 악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렇다고 은퇴하여 요양에만 전념할 상황도 아니었다.[10]

후한서》에는 몇 가지 치료 예시가 나온다. 그중에는 광릉태수 진등이 날생선을 먹고 걸린 기생충 질환을 고쳐준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진등에게 '지금은 내가 있어서 치료를 해줬으니 살았지만, 날생선을 먹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재발하여 요절하게 될 것이다'고 조언했는데, 결국 3년 뒤에 화타가 사망한 뒤 진등은 병이 재발하면서 병사했다.[11]

옥중에서 자신의 의술을 집대성한 책인 청낭서(靑囊書)를 옥리에게 건네 의술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가 두려워 받지 않았고 이에 책을 태워버렸다고 전한다.[12] 하지만 화타는 실제로 직전 제자가 둘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이 이야기는 거짓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둘은 광릉 사람 오보와 팽성 사람인 번아인데, 후한서에는 오보가 오금지희를 전수받고 번아는 침술과 처방 중 일부를 전수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 시대가 도제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완전한 전수인지 아닌지는 의문이다.

그의 저서로는《침중구자경》,《관형찰색삼부맥경》,《화타내사》,《화타방》,《청낭서》등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모두 유실되어 일부 내용들만이 다른 의서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진수화타의 진료, 두기의 음악, 주건평의 관상술, 주선의 꿈풀이, 관로의 점괘는 진실로 모두 현묘하고 정교하며 비범한 기술이고 옛날 사마천편작, 창공, 일자의 전을 지은 것은 불가사의한 것을 포괄하여 기록하고자 한 것이며 때문에 자신 역시 이런 것을 기록하였다고 했다.

2.1. 일화

  • 그는 약품 처방에도 정통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끓일 경우에는 불과 몇 종류의 약재를 합쳐 끓였으며, 마음속으로 약품의 분량을 가늠하고 다시 저울로 재지 않았다. 끓여서 익으면 환자에게 먹이고 약을 복용할 때의 주의 사항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이와 같이 하여 약을 먹으면 병이 완쾌되었다. 불과 한두 곳만을 선택하여 각 곳마다 만일 뜸질을 해야 될 경우라면, 뜸질을 7, 8회만 하여도 병세가 사라졌다. 만일 침을 놓아야만 될 경우라면 한두 곳만을 선택하여 침을 놓으면서 환자에게 말한다.

    "침은 어떤 장소에까지 찔러야만 합니다. 만일 그곳까지 찔렸다면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환자는 '벌써 찔렸습니다'라고 말한다.

    즉시 침을 빼고 나면, 환자의 병세 또한 차도가 있었다. 만일 신체 내부에 병이 있는데 침과 약으로는 환부에 미칠 수 없어 반드시 절개를 해야만 될 경우에는 환자에게 마취약을 먹여 잠시 취한 듯 죽은 듯 지각하는 바가 없게 하고 환부를 잘라 꺼내었다. 만일 창자 속에 질병이 있다면 창자를 잘라 깨끗이 씻어내고, 다시 봉합하여 고약을 붙인다. 4, 5일 후면 차도가 있어 통증이 없고, 환자 또한 스스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되며, 한 달 만에 완쾌되었다.
  • 감릉의 상으로 있던 사람의 부인이 임신한 지 6개월이 되었는데 복통으로 편안하지 못했다. 화타는 그녀의 맥을 짚어보고 씁쓸한 얼굴로 '태아는 벌써 죽었습니다.' 라며 아이가 이미 유산되었다고 말했다. 사람을 시켜 손으로 더듬어 태아의 위치를 살피게 하고, 왼쪽에 있으면 사내아이이고, 오른쪽에 있으면 여자아이라고 했다. 위치를 살핀 사람이 왼쪽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탕약을 배합하여 태아를 씻겨내리니, 과연 내려온 것은 사내아이의 모습이었고, 즉시 통증이 사라졌다.
  • 현의 관리 윤세는 사지에 열이 나고 입안이 마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소변도 순조롭지 못하였다. 화타가 말했다. 시험삼아 뜨거운 음식을 먹어보아 땀이 나면 쾌차하고, 땀이 나지 않으면 사흘이 지난 후에 죽을 것이라고 했다. 즉시 뜨거운 음식을 만들어 먹었지만 땀이 나지 않았으니 장기가 이미 체내에서 끊어졌고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만 기를 이을 수 있다라고 하니 과연 화타의 말과 같았다.[13]
  • 부(태위의 막부)의 관리 아심과 이연이 함께 화타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두통과 전신에 열이 있었으며, 느끼는 고통이 똑같았다. 화타가 아심은 설사를 해야만 되고, 이연은 땀을 내야만 합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병은 같은데 치료 방법이 다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화타는 아심은 체질이 겉으로 튼실하고, 이연은 속이 튼튼하기 때문에 당연히 다르게 치료해야 한다고 했고 즉시 각자에게 약을 주었는데, 다음 날 아침 두 사람 모두 병이 완쾌되어 일어났다.
  • 염독의 엄흔이 몇 사람과 함께 화타를 찾아왔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화타가 엄흔에게 당신의 몸은 좋느냐고 질문했고 엄흔은 평상시와 같다고 했다. 화타는 화급을 다투는 병이 있는 것이 얼굴에 나타나니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다. 엄흔 등은 담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몇 리를 가다가 엄흔이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수레 위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부축하여 수레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튿날 밤에 죽고 말았다. 화타가 말한 그대로였다.
  • 이전에 독우(순찰관)를 지낸 돈자헌이 병에 걸렸다가 쾌차하여, 화타에게 진맥을 짚어보게 되었는데 화타는 몸은 아직 허약하며 원래대로 회복되지 않았으니, 수고로운 일(방사)을 하지 말라고 했다. 돈자헌의 아내는 돈자헌의 병이 좋아졌다는 것을 듣고 백여 리 밖에서 와서 그를 살펴보고는 밤에 그의 집에 머물며 교접을 하였는데 중간 3일 만에 발병하였다. 하나같이 화타가 말한 것과 같았다.
  • 독우 서의가 병이 들었으므로 화타가 가서 그를 진찰해 보았다. 서의가 어제 의조리 유조를 시켜 위에 침을 놓게 한 후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와서 누워서 편안히 잘 수가 없었다고 하자 화타가 말하길 유조가 침을 위에 찌르지 않고 잘못하여 간을 찔렀다고 했다. 먹는 것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닷새가 지나면 구할 수 없다고 했고 결과는 화타의 말처럼 되었다.
  • 동양현 진숙산의 작은 아들이 두 살 때 병에 걸려 변을 보지 못해 항상 울었으며,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다. 화타에게 묻자 이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을 때, 태아를 자라게 하는 데 양기가 집중되었으므로 모유를 먹는 아이는 어머니의 차가운 성분을 섭취하였기 때문에 쉽게 나을 수 없다라고 말했으나 한 가지 방도가 있다며 네 가지 물건을 합쳐 만든 여완환을 주었는데, 이를 먹으니 열흘 후에 병세가 사라졌다.
  • 팽성태수의 부인이 밤에 변소에 갔다가 전갈에 손을 쏘여 신음소리를 내며 아파했지만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화타는 사람을 시켜 탕약을 뜨겁게 하여 그 속에 손을 씻어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하니 즉시 잠을 잘 수 있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여러 번 탕약을 바꾸어 탕약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여 날이 새자 쾌차했다. 화타가 미리 탕약을 뜨겁게 유지해야 독이 빠진다고 미리 귀띔한 것을 그대로 시행한 것이다.
  • 군대의 관리인 매평이 병에 걸려 업무를 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광릉현에 있었는데, 2백 리를 남겨두고 친척 집에서 머물렀다. 오래지 않아 화타가 우연히 주인집에 오게 되었고, 주인은 화타로 하여금 매평을 보도록 했다. 화타는 당신이 일찍 나를 만났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질병이 이미 다했으니, 빨리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만나라 닷새 후면 죽는다라고 했다. 매평은 즉시 돌아갔고, 죽은 기일은 화타가 예측한 것과 같았다.
  • 화타는 길을 가다가 목구멍이 막히는 병에 걸린 사람이 음식을 먹으려고 했지만 먹지 못하자, 집 식구들이 수레에 태워 의사에게 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화타는 그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고 수레를 멈추게 하고 가서 살펴보고 그들에게 방금 지나온 길 옆쪽 빵을 파는 집에 마늘을 부수어서 시게 만든 것이 있으니 세 되를 사서 그에게 먹이면 병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화타의 말처럼 했더니 환자는 즉시 한 마리를 토해냈다. 토해낸 뱀을 수레 옆에 걸고 화타를 방문하니, 화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어린아이가 문 앞에서 놀고 있었는데, 맞이하여 보고 "우리 아저씨를 만난 것 같군요. 수레 옆에 뱀을 매달았네요." 라고 말했다. 환자는 앞으로 들어가 앉아서 화타의 집의 북쪽 벽에 이런 뱀이 수십 마리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 어떤 군의 태수가 병이 들었다. 화타는 그 사람이 크게 화를 내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많은 돈을 받고 치료를 하지 않았으며 오래지 않아 환자를 내버려 두고 떠나면서, 태수를 욕하는 편지를 남겼다. 태수는 과연 매우 화를 크게 냈으며, 사람들을 시켜 화타를 추격하여 잡아 죽이도록 했다. 태수의 아들은 화타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수하 관리들에게 쫓지 말도록 했다. 태수는 최대 한도로 분노하더니 검은 피를 토하자 병이 낫게 되었다. 몸이 건강해지자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태수는 크게 기뻐하며 화타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 한 사대부가 있었는데, 몸이 불편하였다. 화타는 "그대의 병은 깊습니다. 배를 잘라 절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수명 또한 1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니, 질병이 그대를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10년간 질병을 참아낼 수만 있다면 수명과 함께 질병이 다할 것이므로 특별히 절제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라 했으나, 사대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반드시 절제하려고 했다. 화타는 마침내 수술을 하였고, 환부는 빨리 좋아졌는데, 10년이 지나 결국 죽게 되었다.
  • 조조가 소문을 듣고 화타를 불러 화타는 항상 조조 곁에 있었다. 조조는 두통으로 고생하였는데, 매번 재발할 때마다 마음이 산란하고 눈이 몽롱했다. 화타는 침으로 횡격막을 찔렀으며, 손이 따라가는 대로 병세가 사라졌다.
  • 화타별전(華佗別傳)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양다리(兩腳)가 절뚝발이(躄) 되는 병에 걸려 걷지를 못하였기에 수레를 타고 화타에게 가니, 화타가 그것을 멀리서부터 지켜보고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몸은 침과 뜸을 사용하고 약을 복용해야 할 것이다. 다시 진맥하지 않아도 된다." 옷을 벗도록 하여 편하게 하고, 등 수십 곳을 점하였는데, 서로 거리가 어떤 것은 1촌이고, 어떤 것은 5촌이어서, 놓인 것이 일정하지 않아 서로 균형되게 어울리지 않았다. 말한 대로 뜸이 이처럼 각 10장(壯)이었는데, 뜸의 상처가 낫자 곧 움직일 수 있었다. 후에 뜸을 뜬 곳 협척혈(夾脊穴, 등마루를 끼고 양쪽에 있는 혈) 1촌으로 남아 있는 상처의 모양이 상하(上下) 행(行)이 바르고 곧았으며, 하나같이 고르게 있어 마치 포승줄(혹은 새끼줄)과 같았다.
  • 이장군(이통)의 부인이 병세가 심각하였으므로 화타를 불러 맥을 짚어 보도록 했다. 화타는 유산이 되었지만, 태아가 모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라고 말했는데 이장군이 유산이 확실하다면 태아는 이미 떨어진 것이라고 들었다라고 했다. 화타는 진맥에 의하면, 태아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라고 했지만 이장군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화타는 진료를 멈추고 떠났다. 부인의 병세는 점점 호전되었다가 백여 일 후에 병이 재발하였으므로, 다시 화타를 불렀다. 화타가 말하기를 "이 맥의 관례에 따라 판단하면, 태아는 아직 있습니다. 이전에 두 아이가 생겼는데, 한 아이는 먼저 나왔는데 출혈이 매우 많았고, 이 탓에 뒤의 아이는 아직 출생하지 못했습니다. 산모는 자각하지 못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 또한 깨닫지 못했으므로 이어서 낳지 않았기 때문에 출생하지 못한 것입니다. 태아는 죽었고, 어머니의 혈맥은 다시 태아에게 돌아가지 않으니, 태아가 말라서 어머니의 등골뼈에 붙어있기 때문에 등골뼈의 통증이 많았던 것입니다. 지금 탕약을 주고, 아울러 한 곳에 침을 놓으면, 죽은 이 태아는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탕약과 침을 모두 사용하자, 부인의 격렬한 통증이 아이를 낳을 때와 같았다. 화타는 이 죽은 태아는 너무 오래 말라 있었으므로 스스로 나올 수 없고 응당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찾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산파의 도움을 받아 과연 죽은 사내아이를 꺼냈는데, 손과 발이 모두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었고, 안색은 검었으며, 몸은 1척쯤 되었다.
  • 처음에, 군대의 관리 이성이 고통스런 기침으로 밤에도 낮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으며, 항상 피고름을 토하였으므로 화타에게 물었다. 화타는 "그대의 병은 장에 종기가 난 것으로 기침할 때 토하는 피고름은 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두 전의 가루약을 줄 테니 두 승쯤 되는 피고름을 토하고 마음이 유쾌해지고, 기를 갖고 자애롭게 한다면 1년이면 건강하게 될 것이며 18년이 지나면 한 차례 작은 발작이 있을 것인데, 이 가루약을 복용하면 또한 병세는 회복될 것이고 만일 이 약을 얻지 못한다면 죽게 될 것이다" 라고 한 후 그리고는 두 전의 가루약을 주었다. 이성이 약을 얻은 후 5, 6년이 지났을 무렵에 친척 중에 이성과 또 같은 병에 걸린 자가 있었는데, (병에 걸린 친척이 이성에게) "그대는 지금 건강하고, 나는 죽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병이 없으면서 약을 수장하고 장차 올 병에 대비하며 견디십니까?[14] 먼저 나에게 주면 나는 병이 치료될 것이고, 다시 당신을 위해 화타에게서 구해 오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성은 약을 그에게 주었고 친척은 병이 완치되어 초현으로 갔지만, 마침 화타가 (조조에게) 붙들려 갔으므로 화타에게서 약을 구하지 못했다. 18년 후, 이성은 병이 재발했지만, 약을 복용할 수가 없어 죽게 되었다.
  • 어떤 사람이 산양태수(山陽太守) 광릉(廣陵)사람 유경종을 보았던 적이 있었는데, 여러 번 화타를 만났던 것을 이야기했다. 그 병을 치료함과 평맥을 짚어 증상을 살피는 것을 보았는데, 귀신 같았다고 증험하였다.
  • 낭야 사람 유훈(劉勳)이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있을 때 스무 살 가까운 딸이 있었다. 딸의 왼쪽 다리와 허벅지 안쪽에 창이 있었는데, 가려움이 심했지만 통증은 없었다. 창이 나았다가도 수십 일이면 다시 발병하였는데, 7~8년 동안 이와 같아서 화타를 맞이하게 되어 딸의 병을 보도록 하였는데, 화타는 "이런 정도는 쉽게 고칩니다. 쌀겨와 같은 색의 누런 개 한 마리와 좋은 말 두 필을 준비하시오"라 말하였다.

    그런 후 새끼줄을 개의 목에 걸어서 말 한 마리가 개를 끌고 달리게 했고, 말이 지치면 즉시 다른 말로 바꿔서 달리게 했다. 이렇게 말이 끌고 다닌 거리가 30여 리가 되었다. 끌려 다니던 개는 지쳐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다시 사람이 걸어다니며 그 개를 끌고 다니게 하여 총 50리를 끌고 다녔다. 이에 화타는 그 사이 처녀에게 약물을 먹였는데 딸은 편안히 누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서 화타는 큰 칼(刀)로 개의 배 근처 뒷다리 앞을 자르고, 그 자른 부분을 창구(瘡口)를 향하여 두었는데, 2~3촌 정도 떨어지도록 하였다. 잠시 후 뱀처럼 생긴 것이 창 속에서 따라 나오자, (화타는) 익숙하게 쇠몽둥이(철추)를 휘둘러 뱀의 머리를 뚫어버렸다. 그랬더니 그 뱀은 피부 속에서 한참을 꿈틀거리며 요동을 치더니, 잠시 뒤 멈추었다. 이에 화타가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자 길이가 3자(尺)가 넘으며 진실로 뱀이었으나, 다만 눈이 있어야 할 곳에 있었으나 눈동자가 없었고 또한 비늘이 거꾸로 나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고약을 창병에 바르자 일주일 만에 나았다.
  • 어떤 사람이 있어 머리가 어지러운 것으로 고통스러워하였는데 머리를 들 수도 없었고 눈으로 볼 수도 없었던 것이 수년이나 되었다. 화타는 옷을 모두 벗고 거꾸로 매달게 하여 머리가 땅에서 1~2촌 정도 떨어지게 하고서는 천을 적셔 몸을 고루 닦게 하였는데 여러 맥을 보니 모두 5색의 빛을 띄었다. 화타는 제자 몇 명으로 하여금 피도로 맥을 갈라 5색의 피가 다하고 붉은 색의 피가 보이고 나서야 내려주고 연고를 바른 이후 덮어 주었다. 땀이 온몸에서 나고 정력견혈산(亭歷犬血散)을 마시게 하니 곧 나았다.
  • 어떤 부인이 있어 긴 병을 수년 동안 알았는데 세상에서 말하길 오한과 발열이 병을 나게 한다는 것이다. 겨울 11월 중 화타는 그녀로 하여금 나무 욕조에 앉게 하여 이른 새벽에 차가운 물로 몸을 적시게 했는데 말하길 마땅히 100번을 채워야 한다고 하였다. 처음 7~8번을 적시자 몸에 전율을 일으키며 죽을 것 같으니 물을 끼얹는 사람이 두려워 멈추고자 하였다. 화타는 그로 하여금 숫자를 다 채우도록 하였다. 장차 80번에 이르러 열기가 뿜어져 나와 효효히(들레는 모양) 높이가 2~3척이나 되었다. 100번을 채우자 화타는 마침내 불을 지펴 상을 따뜻하게 하고는 두텁게 덮도록 했고 오래 지나자 땀이 나왔고 분을 발랐으며 땀이 마르고 나서 곧 나았다.
  • 어떤 사람이 있어 배 속의 반절이 아파 10여 일 동안 수염과 눈썹이 떨어질 정도였다. 화타는 말하길 '이는 비장의 절반이 부패한 것이니 가히 배를 갈라 치료할 수 있다.'고 하고는 마취약을 먹여 눕게 한 뒤 서둘러 배를 갈라 보니 비장의 절반이 과연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이를 칼로 잘라내 썩은 살을 없애고 나서 고약을 상처에 바르고 갈라낸 복부를 소독한 실로 꿰멘 뒤 기운을 차리자마자 회복약을 마시게 하니 100일 만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3. 삼국지연의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당연히 등장하지만, 몇몇 창작이 덧붙었다.

먼저 습격당한 손책이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화타를 찾는 장면이 있는데, 화타 본인은 바빠서 부득이하게 오지 못했고, 대신 그의 제자가 찾아와 진단하는 것으로 나온다. 과연 그의 제자답게 정확히 처방을 하고는 '화내지 말고 100일 동안 안정을 취하라'라는 말을 덧붙여서 손책은 차차 나아지지만, 우길과 얽혀서 안정을 취하지도 못하고 크게 화를 내는 바람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이후 주태를 치료해 주는 장면이 창작되었다. 그런데 사망 연도가 조조의 사망 부근으로 미뤄졌다. 덧붙여 손권이 주태의 몸 곳곳에 난 상처를 하나하나 짚어보고 눈물을 흘리며 상처마다 사연을 물어보고, 주태가 대답할 때마다 술을 권해서 주태가 몹시 취하는 장면도 나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이 쓰고 다닐 수 있는 파란 양산을 선물하기도 했다.

219년, 번성 전투에서 화타가 방덕이 쏜 독화살에 맞은 관우를 치료했다는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다. 하지만 치료한 사람이 화타가 아닐 뿐 관우가 태연하게 바둑을 두면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수술받았다는 기록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관우를 치료한 의원이 화타라는 것과 사망 연도가 관우보다 나중인 건 연의에서 각색된 내용이고, 관우가 화살에 맞고 수술을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했던 것과 조조가 화타에게 치료를 의뢰했다가 분노해 그를 가둔 후 처형한 건 사실이다.[15] 화타에게 치료받고 완치된 관우가 크게 상을 내렸으나 화타는 거절하고 그대로 떠나갔다고 하는데, 상술한 것처럼 편력의였기에 다른 데로 출장을 간 듯하다.

1년 후인 220년에 조조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고 뇌막염을 치료해 주려고 했으나, 조조는 이러한 치료법을 믿지 않고[16] 화타가 관우의 예를 들어가며 설득하자 오히려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잘못 생각해[17] 당장 화타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고, 그렇게 화타는 옥사했다. 화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의술을 집대성한 책 청낭서를 평소에 본인에게 잘 대해 주었던 간수 오압옥(吳押獄)[18]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일을 마치고 귀가한 오압옥은 아내가 그 청낭서를 불에 다 태워버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그가 다급히 불을 껐지만 이미 몇 장을 제외하곤 전부 불타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돼버린 뒤였다. 아내에게 왜 태운 거냐고 기가 막혀 하며 따지자 아내는 "제 아무리 신묘한 의술을 배워봐야 결국은 화타와 같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기밖에 더 하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며 대꾸하고 이에 오압옥은 이에 깊은 한숨과 탄식만 할 뿐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19] 결국 이로 인해 화타의 의술은 타다 남은 몇 장에 적힌 가축을 살찌우거나 거세하는 별 볼 일 없는 방법들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청낭서는 어디까지나 연의와 전설에만 나오는 실존하지 않는 서적일 뿐 화타의 실제 저서는 아무도 모른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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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외에

속담 중에 '화타나 편작이 와도 못 고칠 병'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과식을 해서 생기는 병에 대한 속담이다.

워낙 의사 하면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축빠들 사이에서는 팀 닥터들이 훌륭한 실력을 보이면 해당 구단에 화타가 있다고 표현한다. 대표적인 게 '봉동 화타' 전북 지우반.

마피아 게임을 할 때에도 의사 역이 신들린 찍기로 마피아에게 공격당한 이를 구해낼 경우 '화타 떴다', '화타 크리'라고 표현한다.

2014년삼성 라이온즈이승엽이 홈런을 치자 병실에 있던 삼성그룹이건희 회장이 눈을 떴다는 보도가 나오자 국민화타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간혹 야빠들 사이에서 못하는 선수나 팀이 특정 팀이나 선수를 만난 기점으로 실력이 만개하거나 되살아날 경우에도 화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사 삼국지 화타전에 따르면, 화타는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선비로 여겼기 때문에 의원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사실 화타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평생 동안 은사를 자처했는데, 어찌 보면 남들에게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난세를 조용히 살고 싶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는 단순히 화타가 의원이라는 직업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이야 의사가 몹시 선망받는 직업이지만, 전근대의 의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위와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다.[20] 즉, 당시 선비들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에 선비를 자처했던 화타가 자신의 직업이 선비가 아닌 의사로 알려지는 것을 꺼렸음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중국사 속의 명의로는 가장 유명하고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만 하더라도 주태, 관우, 조조 등 숱한 인물들이 그의 손을 거쳐가거나 또 직접적으로 거치진 않았지만 손책이 그의 제자에게 치료를 받는 등 여러모로 인상적 활약상을 많이 남기기 때문이다. 별주부전 판본 중에서도 막판에 화타가 토끼가 도망가 곤란해진 별주부에게 용왕의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줘 돕는 전개도 있을 정도로 매우 오래전부터 친숙한 인물.

편작과 더불어 중국사 속에서 의원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곤 하는데, 재미있게도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평생토록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날리며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으나, 정작 자신들은 그 의술 때문에 누군가에게 타살당하는 등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편작과 화타는 모두 당대의 명의답게 치료보다는 예방을 중요시했다. 편작은 이미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는 자신의 재주보다도, 사람들의 병을 미리 예방하는 재주를 지녔던 자신의 형들의 재주를 높이 쳤다.[21] 화타 또한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개선해서 병에 걸릴 확률을 줄이기 위해 직접 체조법까지 고안해 내기까지 했다.

프로레슬링 팬들 사이에선 DDP 요가로 많은 전/현직 프로레슬러들을 재활시키는 데 성공한 다이아몬드 댈러스 페이지가 화타 선생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타는 결핵이 전염병임을 알고 있었는데 그 후 로베르트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하여 결핵이 전염병임을 밝혀냄으로써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허난성에 화타의 사당이 조조, 관우의 사당과 함께 있다.
[1] 후술되었지만 화타의 전기에 조조가 아들 조충이 위독하게 되자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늦어도 조충이 사망하는 208년이나 그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배송지 왈, 옛 부(敷)자는 전(專)자와 서로 비슷하여 글을 베끼는 자가 쉬이 분별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생각건대 화타의 자가 원화임을 고려한다면, 그 이름은 마땅히 부旉(=敷)가 될 것이다.[3] 조조에 의해 죽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또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초(譙: 現 보저우시) 출신의 동향이다.[4] 이 구원자가 편작이었다는 버전도 있다.[5] 불교 경전의 지바카 코마라밧차의 경우에는 누구에게 배웠다는 내용이나 몸 내부를 볼 수 있는 막대기 등의 내용도 있어 화타의 내용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이다.[6] 인도에서는 수술 도구로 추정되는 유물이 상당히 발굴되며, 고대 인도에서 죄를 범하면 코가 잘리는데, 이마 쪽 피부를 잘라 이식하여 코를 다시 복원하는 등 외과 수술이 실제로 수행되었다. 그것도 기원전 800년경에 말이다. 유럽에서는 15세기경부터 이런 비슷한 수술을 시행하였다.[7] 이와 같은 의사를 편력의(遍歷醫)라 하며 쉽게 말해 '출장 의사'라고 할 수 있다.《사기 열전》의 <편작 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덧붙이면 이 시대에 살았던 장중경도 본업은 의사가 아닌 장사 태수였다고 한다.[8] 두풍(頭風)이라고 하는데, 증상이 심하고 길게 지속되는 두통을 뜻한다. 유한양행에서 발간한 '건강의 벗' 2007년 11월호 참고[9] 조충의 자(字)[10] 화타가 장기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으면서도 조조를 떠난 것은 결국 치료하다 보니 조조는 장기치료해도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거나 장기치료가 지루하거나 권력자에게 매여있는 일 자체를 싫어했다거나, 아니면 어떤 이유로 조조 자체를 좀 싫어했거나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하단의 일화가 판타지 같긴 하나 그래도 믿는다고 하면 그 중에서 님 어차피 수술해도 10년 이내에 죽는 건 변함이 없고 그냥 고통만 없어지는 건데 그냥 참고 사시지? 같은 말을 한 걸로 보아 잔여수명에 영향이 없이 통증만을 없앤다거나 하는 치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다. 판타지 일화 같긴 해도 전해지는 일화대로 화타가 잔여수명 예측을 잘 했다면 208년 무렵에는 조조의 수명이 12년 정도 남아있는데 두통만 없애는 치료, 그것도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잘 듣지 않는 환자 상대로 장기치료의 경우 화타 본인 생각에는 무의미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11] 정사 삼국지에는 이렇게 나온다. '광릉태수 진등이 병이 들자 가슴속에 고민이 가득하였으며 안색이 붉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화타는 그의 진맥을 보고 말했다."당신의 위 속에 있는 몇 되의 기생충이 안에서 악성 종기가 되려고 하는데, 날것을 먹어서 생긴 것입니다." 즉시 두 되의 탕약을 만들어 먼저 한 되를 복용하게 하고, 조금 있다가 전부 복용하도록 했다. 탕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세 되의 기생충을 토했는데, 붉은색 머리는 모두 움직이고 있었으며, 반쪽은 아직 물고기를 얇게 저민 모습을 하고 살아있었다. "이 병은 3년 후에 또 재발합니다. 그때 훌륭한 의사를 만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 과연 화타가 말했던 기일에 병이 재발하였는데, 그 당시 화타가 죽어서 치료하지 못했다.[12] 후술하겠지만《삼국지연의》에서는 옥리가 책을 받고 집에 가져갔지만, 남편이 화타와 같은 죽음을 맞이할까 봐 걱정한 아내가 태워버렸다고 나온다.[13]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신부전증(콩팥병) 증세에 가깝다. 소변도 땀도 안 나올 정도로 순환비뇨기계가 고루고루 망가졌으니 요독이 쌓이고 수분배출도 안 되어 팅팅 붓는 것.[14] (배)송지가 살피기로는, 고어(古語)에서는 장(藏)이라는 의미로 거(去)를 썼다고 했다.[15] 이문열은 관우가 화살 맞고 치료받은 일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화타에게 치료받았다는 식으로 각색됐지 실제로 관우가 치료받으며 아무렇지 않아 했던 것은 사실임이 드러나자 망신당했다. 만화 창천항로에선 관우가 이마에 화살을 맞은 상처를 치료하려고 상처 부위에 술을 붓고 꿰매는 일은 부하 장수 요화에게 맡기는 장면이 나온다.[16]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정상이다. 뇌를 건드리는 외과 수술은 전문적인 설비를 갖추고 의학이 발달한 현재 21세기에도 어려운 마당에 당시로서는 더더욱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 수술 자체가 연의의 창작이니 그냥 의학 지식도 없는데다 의학 전공자도 아닌 나관중이 단순히 되겠지 싶어 끼워넣은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 머리에 구멍을 뚫는 천공술 자체는 '당시에도 그런 기술은 있었다.' 정도는 알려져 있었지만, 당대의 의학기술로는 수술하고서 죽을 확률이 살아남을 확률을 압도하던 상태라서 제대로 된 치료법 취급은 받지 못하던 기술이기는 했다.[17] 안 그래도 조조는 옛날에 동승의 의대조 사건 당시 의원 길평에게 독이 든 약으로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수술을 권하는 화타의 말을 듣자마자 길평처럼 지금 본인을 죽이려 드는 거냐고 불같이 화를 낸다. 버전에 따라서는 조조가 관우 얘기를 하자 "물론 나도 팔을 가르는 수술은 견딜 수가 있다! 하지만 머리를 가른다는 게 정녕 말이 되기나 하는 소리냐?"라고 화를 불같이 내기도 한다.[18] 본명이 아니라 성이 오(吳)씨인 옥졸(押獄)이라는 뜻이다. 교국로, 오국태와 같은 원리.[19] 이야기에 따라 이 사건으로 오압옥은 아내와 이혼하고 아내는 마을사람들한테 그 귀중한 화타의 청낭서를 불태운 정신나간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해 한평생을 고통스럽고 외롭게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다른 버전에서는 반대로 오압옥 본인이 책을 소각하자 이를 본 그의 부인이 의아해하며 이유를 묻고, 그 이유에 대해 이걸 읽는다고 화타처럼 된다는 보장이 없고 괜히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 그저 지금의 삶에나 만족하자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20] 우리가 너무 잘 아는 허준도 중인 신분이었음은 저명한 사실이다.[21] 편작의 형들은 그렇게 뛰어난 명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병에 걸리거나, 중병으로 악화되기 전에 이를 잡아내는 바람에 가벼운 병이나 고칠 줄 아는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의원들로 여겨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