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08 03:39:54

두헌


한의 대장군(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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竇憲
(? ~ 92)
1. 개요2. 권세를 얻게 되다3. 북흉노 정벌4. 권세를 휘두른 끝에 죽음

1. 개요

후한의 외척이자 권신. 명제, 장제, 화제 등 3명의 황제를 섬겼고, 외척으로써 권세를 휘둘렀으며, 북흉노를 정벌하고 화제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자 자살했다.

2. 권세를 얻게 되다

77년에 누이동생 두씨가 귀인이 되어 궁중으로 들어가자 시중 겸 호분중랑장이 되었으며, 두헌이 외척으로써 세력을 이루자 음씨, 마씨 등이 두려워했다. 또 아주 싼 값으로 명제의 딸인 심수공주의 밭과 정원을 탈취하기 위해 압박했는데, 이 사실을 안 장제에게 책망받아 탈취한 것을 모두 돌려줬다,

86년에 태위 정홍(鄭弘)이 두헌의 권세가 강하다고 상소를 했으며, 두헌은 낙양현령 양광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자 정홍이 대신임에도 비밀스러운 일을 누설했다고 상주해 정홍의 인수를 빼앗기게 만들었다. 88년에 두헌은 등표가 의롭고 양보하는 성격이면서 이전 황제인 명제가 존경하고 덕망이 있었으므로 자신이 시행하고자 하는 것을 밖에서 상주문을 올리게 하고 안으로 들어가 두태후에게 말하니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과단성이 있고 조급해서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원한만 있어도 보복했으므로 62년에 아버지 두훈의 옥사를 조사했던 알자 한우를 빈객을 시켜 죽이고, 그 목을 두훈의 무덤에 바쳤으며, 북흉노에서 내분이 일어나 남흉노의 선우 난제둔도하가 북흉노를 함께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자 겨울 10월에 북흉노 정벌을 위해 거기장군에 임명되었다.

두헌은 문생을 보내 상서복야 질수를 찾아가 청탁한 적이 있었는데, 질수가 그 문생을 감옥에 보내고 두헌이 교만방자하면서 두씨 일족이 저택을 함부로 짓는 것, 흉노 정벌에 반대하는 것 등을 상소로 올리자 두헌은 공전을 사들이고 조정을 함부로 비방했다는 모함을 했다.

3. 북흉노 정벌

89년 여름 6월에 두헌은 경병과 함께 삭방군 계록의 요새 밖으로 나아갔으며, 염반, 경기, 경담 등을 파견해 남흉노의 군사와 함께 계락산에서 북흉노의 선우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여러 부를 추격해 사거북제해에 도착해 13,000여 명을 죽이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여러 가축 100여 만 마리를 획득하고, 연연산에 올라가 돌에 공로를 새겼다.

북흉노와 화친한 후, 북흉노에서 선우가 직접 오지 않고 동생인 우온우제왕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두헌은 선우가 직접 오지 않은 것으로 인해 우온우제왕을 돌려보내자는 상주문을 올렸으며, 9월 7일에 대장군에 임명되고 무양후에 책봉되어 식읍 20,000호를 받자 후작이 되는 것을 사양했다.

90년에는 부교위 염롱에게 기병 2,000여명을 주어 북흉노의 이오를 점령하게 했으며, 이 공으로 관군후에 책봉되자 이를 사양했다. 가을 7월 7일에 양주로 나아가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북흉노의 선우가 직접 조현하기로 하자 두헌은 반고, 양풍을 보내 영접하게 했다. 91년에 두헌은 북흉노를 멸망시키기 위해 2월, 좌교위 경기, 사마 임상 등를 파견해 금미산에서 선우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선우의 어머니 연씨를 사로잡고 5,000여 명을 죽였다.

4. 권세를 휘두른 끝에 죽음

두헌은 북흉노를 정벌하는 대공을 세우자 경기, 임상을 조아로, 등첩, 곽황 등을 심복으로 삼았으며, 반고, 부의 같은 사람들이 문장을 관장해 자사, 태수, 현령은 대부분 두헌의 문하에서 나와 그는 관리, 백성들로부터 부렴을 거두면서 뇌물을 받았다. 상서복야 악회가 범법자를 검거하면서 이를 피하는 일이 없어서 두헌이 싫어했으며, 악회가 속한 주군에 눈치를 주어서 그를 협박해 약을 먹고 죽게 만들었다.

또 조서를 받아 거가와 장안에서 만났고, 상서 이하의 관료들이 두헌에게 절하고 엎드려 만세를 부르고자 했는데, 상서 한릉이 이를 막는 말을 하자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면서 중지했다. 두헌은 북흉노 선우의 동생인 우록려왕 어제건을 세워 선우로 삼고 중랑장을 두어 보호하면서 북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는데, 원안, 임외 등이 남흉노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남흉노의 선우인 난제둔도하에게 항복한 무리를 거느리게 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올려 의논했다가 두헌의 의견대로 되었다.

92년 여름 4월 18일에 두헌은 경사로 돌아왔고 그의 무리들 중에 양후 등첩, 보병교위 등뢰의 어머니인 등원, 두헌의 사위 곽거 등이 화제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화제가 환관들을 이용해 이들을 잡아들여 죽였으며, 두헌은 봉국에 보내졌다가 압박을 받고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