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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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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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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신나라의 관리에서 하서의 지배자로2.2. 하서 경영과 ‘두융귀한(竇融歸漢)’2.3. 후한의 공신으로서의 화려한 말년2.4. 가문의 오만과 최후
3. 업적 및 평가

竇融
(기원전 16 ~ 62)

1. 개요

“천하의 안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하서(하서회랑)는 부유하고[1] 황하를 요새처럼 두르고 있으며, 장액속국(張掖屬國)에는 정병 만 기()가 있다. 일단 급한 사태가 벌어지면 황하의 나루터를 차단하여 스스로 지킬 수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우리 가문을 보존할 수 있는 땅이다.”
후한서 두융열전

후한 초기에 활동한 군벌이자 명신. 자는 주공(周公), 사례 우부풍(右扶風) 평릉현(平陵縣) 사람이다. 봉호는 안풍후(安豊侯)이며, 시호는 대후(戴侯).

신나라의 혼란기에 하서 5군(河西五郡)의 군벌로 시작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으나, 대세를 읽고 후한 세조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그의 천하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귀순은 훗날 ‘두융귀한(竇融歸漢)’ 이라는 고사성어로 남아, 난세에 자신을 보전하는 신중한 정치적 선택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서 지역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부흥시킨 뛰어난 행정가였으며, 동한 건국 후에는 대사공(大司空), 대사도(大司徒)의 지위에까지 오른 개국공신이다. 또한 명제 때 남궁 운대에 화상을 걸어 기린 28명의 공신(운대 28장)에 더해 추가로 선정된 4명 중 한 명으로, 이들과 동급의 공로를 세운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가문은 후손 대에 이르러 더욱 번성하여 후한 외척 세력의 정점이 되지만, 동시에 가문 몰락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훗날 북흉노를 격파한 명장 두헌(竇憲)과 장제의 황후인 장덕황후(章德皇后)가 바로 그의 증손자, 증손녀이다.

2. 생애

2.1. 신나라의 관리에서 하서의 지배자로

두융은 전한 문제의 황후인 효문황후의 남동생 두광국(竇廣國)의 7세손으로, 나름대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두융은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의 여동생은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의 소실로 시집갔었고 이로 인해 두융의 온 가족은 수도 장안(長安)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는 권세 있는 귀족들, 지역의 호걸들과 교류하여 의협심이 강한 인물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어머니와 형을 섬기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등 가정 내에서는 품행을 바르게 닦았다. 왕망이 섭황제로서 섭정할 무렵, 그는 강노장군(強弩將軍) 왕준(王俊) 휘하의 사마(司馬)로 복무하며 반란을 진압하는 등, 신나라의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곤양대전에도 참전했다가 광무제 유수에게 대패하여 겨우 도망치는 등 당대 신나라 혼란기의 중심에 있었다.

곤양대전에서 패배한 신나라군이 장안으로 급히 돌아와 관문으로 들어간 후, 왕읍이 두융을 추천하여 그는 파수장군(波水將軍)에 임명되었고 황금 천 근을 하사받았다. 이후 두융은 군대를 이끌고 신풍(新豐)에 이르렀는데 곧이어 왕망이 분노한 장안 백성들에게 살해당해 패망하자, 갈 곳이 없어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경시제의 대사마(大司馬) 조맹(趙萌)에게 항복하였다. 조맹은 그를 교위(校尉)로 삼아 매우 중히 여기며 거록태수(鉅鹿太守)로 추천하였다.

하지만 그는 천하가 여전히 혼란스럽다고 판단, 관동 바깥의 관직 대신 관서 지방인 하서(河西) 지역으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의 조상들이 하서 지역에서 태수와 호강교위를 지냈기에 그곳의 풍속에 밝았고, 무엇보다 혼란을 피해 세력을 보존할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두융은 날마다 조맹을 찾아가 거록태수 직을 사양하고 하서로 나가기를 도모하였다. 조맹이 이를 받아들여 경시제에게 건의하여 마침내 장액속국도위(張掖屬國都尉)에 임명되자, 두융은 크게 기뻐하며 가족을 데리고 서쪽으로 떠났다. 이렇게 두융이 부임하자마자 영웅호걸들을 모아 단결시키고 강족(羌族)을 회유하여 달래니, 그들의 환심을 크게 사서 하서가 모두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적미군에게 장안이 함락되고 경시 정권이 무너지자, 하서 지역의 주천태수 양통(梁統) 등 5개 군의 태수와 호족들이 두융을 하서 5군 대장군사(河西五郡大將軍事)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두융은 하서지역 여러 군현의 군사를 관할하면서 사실상의 독립 세력을 구축했으며 하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2.2. 하서 경영과 ‘두융귀한(竇融歸漢)’

“경시제의 사업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이내 망했으니, 이는 한 왕조가 두 번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징험이오. 지금 주인에게 소속되어 섬기면 속박되다가 권력을 잃을 것이며, 후일 위태로울 때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오. 지금 영웅들이 다투어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각자 땅을 지키며 농(隴)과 촉(蜀)과 연합해야 하오. 잘 되면 (전국시대의) 여섯 나라처럼 될 것이고, 못해도 남월위타(尉佗)처럼은 될 것이오.”
농서의 군벌 외효(隗囂)가 변사(辯士) 장현(張玄)을 보내 두융을 설득하며

두융은 하서를 통치하며 뛰어난 정치, 군사,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북방의 흉노와 남방의 강족(羌族)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관대한 이민족 정책으로 여러 이민족을 아울렀다. 하서의 민속은 질박하였고 두융의 정치도 관대하고 화평하여 상하가 서로 친밀하고 태평하며 부유해졌다. 두융은 훌륭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군마를 수련하고 전투와 궁술을 익히며 봉화 신호를 엄격히 해, 강호가 변경을 침범하면 두융이 항상 친히 군대를 이끌고 여러 군과 함께 구원하여 약속대로 움직여 매번 적을 격파하였다. 이후 흉노가 징벌을 당해 드물게 침략했고, 변경을 지키는 강족들이나 호(胡)족들은 모두 두융을 두려워하며 복종해 친밀히 의지하였다. 이렇게 하서가 번영하자 안정(安定), 북지(北地), 상군(上郡)의 기근을 피한 유민이 끊임없이 두융에게 모여들었다. 그의 통치 아래 하서는 “병마는 정예하고 강했고, 창고에는 양식이 쌓이고, 백성은 부유했다(兵馬精強,倉庫有蓄,民庶殷富)”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이 무렵, 동쪽에서는 유수(훗날의 광무제)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농서의 외효, 촉의 공손술이 버티고 있었다. 두융은 멀리서 광무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광무제에게로 기울었으나, 하서가 격리되어 멀어 스스로 통하지 못하였다. 이때 농서의 외효 먼저 건무(建武) 연호를 칭하자, 두융 등이 그에게서 역법(正朔)을 받아들이고 외효가 그들에게 장군 인수를 임시로 수여하였다. 외효는 겉으로는 광무에 순응했으나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광무에 대항하여서 서쪽에서 크게 할거할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두융에게 연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하서의 지배자로 계속 남을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이었으나, 두융은 신중했다. 결국 그는 부하들과의 논의하고 신중하고 정밀히 헤아린 끝에 천하의 대세가 유수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동쪽, 즉 유수의 한나라에 귀순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두융귀한’ 고사의 탄생이다. 그는 29년,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 귀순의 뜻을 전했고, 광무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량주목(涼州牧)으로 임명하고 황금을 하사했다. 이때 광무제가 두융을 높게 평가함은 그가 두융에게 량주목을 내렸을 때 조서에서도 알 수 있다.
이전에, 황제가 하서(河西) 지역이 부유하고 완전하며 농(隴), 촉(蜀) 지역과 접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항상 (두 지역의 군벌인) 외효(隗囂)와 공손술을 압박하기 위해 (하서의 실력자) 두융을 포용하려 했는데, 마침 사자를 보내 두융에게 글을 전하려 할 때 도중에 (두융이 보낸 사신) 유균(劉鈞)을 만나 함께 돌아왔다. 황제가 유균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예를 갖추어 접대한 후 돌려보내며 두융에게 옥새가 찍힌 칙서를 내렸다.

“칙명을 내리노라, 하서 오군 대장군 사무를 행하는 속국도위(두융)에게: 변방 오군을 수호하는 수고가 크다. 군사는 정예하고 강하며, 창고에는 비축이 있고 백성은 부유하다. 밖으로는 강족과 오랑캐를 꺾고 안으로는 백성에게 복을 내렸다. (그대의) 위엄과 덕행이 멀리 퍼져, 마음을 비우고 (그대를) 바라마지 않으나 길이 막혀 답답함을 어찌할 수 없구나! 장사가 보낸 글과 바친 말 모두 도착했으니 그 깊은 뜻을 잘 알겠다.

지금 익주에는 공손자양(공손술)이, 천수에는 외장군(외효)이 있어, 마침 촉(공손술)과 한(외효)[2]이 서로 공격하니, 권세는 장군에게 있다. (그대가) 발을 들여 좌우 어느 쪽에 두든 바로 경중(輕重)을 이루리라. 이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후하게 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여러 일들은 장사가 본 바, 장군이 아는 바와 같다. 왕업이 중흥하니 천년에 한 번 만날 기회로다. 마침내 환공문공처럼 세워, 쇠미한 나라를 보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공업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삼분천하(三分天下)로 정립(鼎立)하여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한다 해도 또한 때에 맞추어 정해야 할 것이다.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으니 나와 그대는 서로 떨어진 땅에 있어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 논의하는 자들 중에는 반드시 옛날 임효(任囂)가 위타(尉佗)에게 권고하여 칠군(七郡)을 다스리던 계책(남월국 건국)을 본받으려는 자도 있을 것이다. 왕자(王者)에게는 나눈 땅이 있을지언정 나눈 백성은 없으니,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할 뿐이다. 지금 황금 2백 근(斤)을 장군에게 내리노니, 편의대로 말하라.”

이에 따라 두융을 량주목(涼州牧)으로 임명하였다.
후한서 두융열전

이후 두융은 광무제의 편에 서서 외효 세력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2년, 그는 하서의 군사와 강족, 소월지족 등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광무제의 군대와 합류하여 외효를 공격, 대파했다. 이 공으로 그는 안풍후(安豊侯)에 봉해졌다.

2.3. 후한의 공신으로서의 화려한 말년

광무제에게 최후로 저항하던 공손술이 몰락하고 천하가 통일된 후, 두융은 36년에 후한의 수도 낙양으로 입조했다. 그는 오랫동안 변방을 통치한 것에 대한 황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량주목과 안풍후의 인수(印綬, 직인의 끈)를 모두 반납하는 등 극도로 조심스러운 처신을 보였다. 광무제는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안풍후의 작위는 돌려주고, 그 이듬해에는 삼공(三公)의 하나인 대사공(大司空) 에 임명했다.

이후로도 그는 위위(衛尉), 장작대장(將作大匠), 대사도(大司徒) 등 요직을 역임하며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두씨 가문은 “한 명의 공(公), 두 명의 후(侯), 세 명의 공주(황실과 혼인), 네 명의 2천 석 고관이 동시에 나올(竇氏一公,兩侯,三公主,四二千石,相與並時)” 정도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되어 번성했다.

2.4. 가문의 오만과 최후

하지만 권세가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 항상 처신을 조심했던 그와는 달리 그의 일가는 오만방자하여 법을 어기는 일이 잦았다. 광무제의 뒤를 이은 명제는 이를 마뜩히 보지 않았다. 59년, 두융의 종형의 아들인 두림(竇林)이 죄를 짓고 옥사했다. 명제는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두융을 꾸짖었고, 전한 시기 두영(竇嬰)과 전분(田蚡)의 고사를 예로 들어 그를 훈계했다.[3] 두융은 두려움에 떨며 은퇴를 간청했고, 명제는 그에게 집에서 요양하도록 명했다. 1년여가 지난 후, 두융이 위위(衛尉)의 인수를 반납하자 명제는 그에게 소와 좋은 술을 하사했다.

60년, 명제는 중흥 공신들을 기리며 남궁(南宮) 운대(雲臺)에 28명의 공신을 그려 봉안했다.(운대 28장) 여기에 두융은 왕상(王常), 이통(李通), 탁무(卓茂)과 함께 추가적으로 더 초상이 그려져 총 32명의 초상이 걸린 운대의 공신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아들 두목(竇穆)이 권세를 믿고 오만하게 굴다가, 육안후(六安侯) 유우(劉盱)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대형 사고를 쳤다. 62년, 유우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집안에서 이 일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려 이 사건이 발각되자 명제는 대노하여 두목을 비롯한 두씨 일족의 관직을 박탈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두융만은 개국공신임을 감안하여 수도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모든 두씨 일가를 수도로 돌아오게 했으나, 때마침 두융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명제는 그에게 ‘대(戴)’라는 시호를 내리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었고 71년에 두훈(竇勳, 두목의 아들)의 동생인 두가(竇嘉)를 안풍후(安豐侯)에 봉하고 식읍 2천 호를 내려, 두융의 대를 잇게 하였다.

3. 업적 및 평가

(두융은) 수고로이 변방의 다섯 군(郡)을 진정시키고 지키니, 병마는 정예하고 강하며 창고에는 물자가 쌓여 있고 백성은 풍요로웠다. 밖으로는 강(羌)과 호(胡) 이민족을 꺾고, 안으로는 백성이 복을 입었다.

충효의 뜻을 굳게 지켜, 미약한 이를 돕고 위험한 이를 구했다. 반란을 일으킨 오랑캐 외효(隗囂)를 원수처럼 미워하여, 다섯 군의 정예병을 이끌고 강(羌)과 호(胡)를 모두 모아 공격하니, 군사들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았음에도 그 오랑캐의 땅은 허물어지듯 와해되었으니 그 공이 실로 크다. 그의 돈독한 뜻은 분명하고, 결단은 의심할 바가 없으니, 내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긴다.
광무제의 평가
두융(竇融)은 처음에 호협(豪俠)으로 이름을 떨쳤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 일어나 하늘이 준 기회를 포착하였다. 마침내 매미가 허물을 벗듯 왕후(王侯)의 존귀한 지위에 올랐으며, 끝내는 경상(卿相, 최고위 신하)의 자리를 받았다. 이는 공을 구하고 권세를 좇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위가 더할 나위 없이 높아지자, 도리어 권력과 총애를 멀리하며 매우 공손하고 조심하여 마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이 또한 어찌 그리 지혜로운가! 내가 일찍이 홀로 이 인물의 풍모를 자세히 음미해 보건대, 비록 나라를 다스리는 경국(經國)의 술책은 크게 논할 만한 것이 없으나,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아는 예절(進退之禮)만큼은 진실로 칭찬할 만하다.

정성스럽고 성실한 안풍후여, 재능 있는 영웅이라 일컬을 만하도다. 하서 지방을 장악하고, 지도를 바치며 충성으로 귀의하였네.
후한서의 저자 범엽의 평가
비록 옛날의 일이나 두융이 농우(隴右)를 등지고 하서(河西)를 점거함으로써 광무제의 대업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여 아름다운 명성과 실리를 얻었는데, 어찌 이것이 잘못이라 하겠는가?
손권의 평가

난세의 처세술과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인물이다. 두융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기에 하서 지역을 안정시키고 번영시킨 것이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민족을 아우르는 관대한 정책과 농업, 목축업, 상업을 진흥시키는 행정 능력으로 하서를 난세의 파라다이스로 만들었으며 하서를 이민족의 침입에서 보호해 한의 영역으로 존속시켰다.

또한, 그의 정치적 결단은 후한의 천하통일 과정을 수월하게 만든 결정적인 한 수였다. 만약 그가 외효공손술과 손을 잡고 서쪽에서 작정하고 할거했다면 광무제의 통일은 더욱 늦어졌거나 광무제 당대에 통일하기엔 힘들었을 것이다.[4] 그러나 그는 독립적인 군벌 내지 군주로 남는 길 대신, 대세에 순응하여 더 큰 영광과 안정을 택했다. 광무제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다.

후한 건국 후에는 권력의 정점에 섰음에도 스스로를 낮추고 근신하며 정치적 숙청의 피바람을 피했다. 개인의 처세술만 놓고 보면 말년에 아들의 횡포를 바로잡지 못한 것 외엔 흠잡을 데가 거의 없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룩한 막대한 부와 권세, 가문의 명성은 후손들에게 독이 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외척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숙청당하며 가문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1] 전한 당시 하서는 실크로드길에서 중국 쪽 시작점 부분으로 매우 번영했다.[2] 아직 이 때만 해도 외효가 결정적으로 광무제에게 반기를 든 시점이 아니라 명목상 후한의 장군이었다.[3] 두 사람은 각각 문제와 경제 시대의 외척으로 오만하게 전횡을 일삼은 사람들이었다.[4] 광무제의 주력이자 그가 각지에서 승리하여 천하의 대권을 잡게 만들어 준 병력은 당대 최고의 정예 기병오환돌기(烏丸突騎) 였는데, 두융이 가지고 있던 장액속국의 정예기병 만여기면 천하의 광무제라도 긴장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두융은 서북방 이민족들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족 병사, 기병을 동원하기도 쉬운 위치에 있었다. 광무제가 괜히 두융이 마음먹기 따라서 중원 각 세력의 파워밸런스가 달라질 것이라 평가한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두융이 하서가 할거하여 종족을 지키기 좋은 땅이라 평가했던 것처럼 하서는 진짜 작정하고 농서와 연계해서 버티면 할거하기 매우 좋은 곳으로 후대의 전량, 서하가 이를 증명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