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01 13:48:53

왕패

운대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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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노 오환 ·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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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覇
(? ~ 59)
1. 개요2. 생애

1. 개요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원백(元伯). 예주 영천군(潁川郡) 영양현(潁陽縣)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 지방 관아에서 법 집행을 담당했으며, 그의 아버지도 옥사와 형벌 일을 돕던 결조연(決曹掾)이었다.

2. 생애

결조연이던 아버지를 따라 젊은 시절부터 군의 옥리(獄吏)가 되었다. 왕패는 옥리 일을 하면서 종종 아버지에게 자신은 말단 관리가 되고 싶지 않다 한탄하니, 그의 아버지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장안(長安)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고 개혁에 여러 차례 실패해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왕패는 유학을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황 4년(23년), 용릉(舂陵)에서 유연(劉縯)과 그 동생 유수가 유현(劉玄)을 추대하고 왕망의 신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유수군이 영양을 지날 때, 왕패는 빈객들을 거느리고 유수에게 나아가 말했다.
"장군께서는 의병(義兵)을 일으키셨으나 저는 도량이 얕아 그러지 못 했습니다. 평소 장군의 위덕(威德)을 흠모하였는데 마침 오셨으니 부디 저희를 행오(行伍)에 넣어 주십시오."
유수가 왕패를 환영하며 대답했다.
"꿈에서조차 현사(賢士)를 그렸거늘, 함께 성공하는 것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
이리하여 왕패는 유수 휘하로 들어가 신나라군과 싸웠으며, 나중에는 곤양대전에도 참전해 유수의 지휘 아래 왕심, 왕읍의 군대를 격파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현은 유수를 사예교위로 삼고 낙양성을 순시하게 하였다. 유수 일행이 다시 영천군을 지날 때, 왕패는 함께 유수를 따라가자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왕패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늙어 더이상 군생활을 할 수 없으니, 너나 가서 열심히 하거라!"
왕패는 유수 일행과 합류하여 낙양으로 갔다. 얼마 후, 유현이 낙양에 입성해 현한 정권을 세워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개원하였다. 그리고 유수를 행대사마로 삼고 하북을 돌며 군현을 위로하게 하였다. 왕패는 공조영사에 제수받아 유수와 함께 황하를 건너 하북으로 갔다. 당시 하북의 군현들은 겉으로만 현한에 항복한 상황인데다 하북 각지에 도적들까지 난립하였으니, 사실상 경시제가 유수를 견제하기 위해 사지로 보낸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경시제는 유수를 하북으로 보내면서 수행원 정도만 데려갈 수 있도록 해주고 다른 지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에 유수를 따라다니던 왕패의 빈객 수십 명은 하북으로 가던 도중 하나둘 이탈하다가 결국 한 명도 남김없이 다 떠나버렸다. 왕패가 크게 실망해 있자 유수가 왕패를 격려해주었다.
"영천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자들이 전부 떠나가고 이제 그대 혼자만 남았소. 힘내게나! 세찬 바람이 분 후에야 비로소 억센 풀을 알 수 있는 법이라네."
여기서 나온 고사가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로, '사람은 환난을 겪어야만 의지와 지조가 굳은 사람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하북에 도착한 유수는 여러 군현을 순시하며 백성을 위로하였다. 유수가 계(薊)에 이르렀을 때, 한단(邯鄲)에서 점쟁이 왕랑이 23년 12월에 반란을 일으키고 여러 군현들의 항복을 받아내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시켰다. 왕랑은 현재 유수를 가장 큰 장애물이라 생각해 유수의 목에 10만 호의 후작을 상금으로 걸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유수는 왕랑에게 맞서고자 왕패에게 명해 병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왕패는 계성 시장바닥으로 나가 사람을 구해보려 했으나, 사람들은 그런 왕패를 비웃고 야유하니 참담한 심정을 억누른 채 유수에게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유수 일행이 계성을 빠져나와 동남쪽으로 도망쳐 하곡양(下曲陽)에 이르렀을 때, 왕랑의 군사들이 바싹 쫓아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유수 일행은 모두 겁에 휩싸여 말을 더욱 재촉해 호타하(虖沱河) 인근에 다다랐다. 유수는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척후병을 보내 호타하 강물 상태를 확인하게 하였다. 마침 겨울이었으므로 강물이 얼어있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척후병은 돌아와 강물이 풀려 얼음이 둥둥 떠다니고 배가 없이는 건널 수 없을 것이라 보고하였다. 유수는 이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이번엔 왕패로 하여금 강을 다시 확인하고 오게 하였다. 왕패가 직접 가서 확인해보니 과연 척후병의 말이 맞았다. 왕패는 돌아가 유수에게 보고하였다.
"강물은 모두 단단히 얼어 있습니다."
이에 일행들이 모두 기뻐하였고 유수도 웃으며 말했다.
"척후병이 헛소리를 하였구나."
유수 일행이 호타하로 나아가자 기이하게도 그 사이에 강물은 정말 얼어 있었다. 왕패는 사람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감독하였고, 일행 대부분이 강을 건너고 난 뒤에야 얼음이 깨져 다시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유수가 말했다.
"나의 무리가 편안히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경 덕분이네."
왕패가 대답했다.
"이는 명공(明公)의 은덕이며, 신령의 가호 덕분입니다. 주무왕이 흰 물고기로부터 도움 받은 이야기라 할 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수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왕패의 기지로 우리가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내린 상서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유수는 그 자리에서 왕패를 군정(軍正)에 임명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했다.

유수가 신도(信都)에 도착해 군을 재정비하고 왕랑에게 항복한 현들을 병탄해갔다. 그렇게 수 개월 간의 전투를 끝으로 왕랑의 근거지인 한단성을 함락시켰다. 왕패는 도망치는 왕랑을 추격하여 그를 참수하고 옥새를 빼앗았다. 유수는 그의 공을 치하해 왕향후(王鄉侯)로 개봉하였다.

유수는 왕랑을 토벌했지만 아직 하북에는 도적떼들이 극심히 설치고 있었다. 왕패는 유수를 따라 하북 정벌에 종군하였는데, 항상 부준, 장궁(臧宮)과 같은 병영을 썼다. 왕패는 이들 가운데 유독 병사들을 아끼기로 유명해, 전사한 병사들을 자신이 직접 염(殮)을 하는가 하면, 부상병들을 손수 돌보기까지 하였다.

건무 원년(25년) 6월, 하북 정벌을 마친 유수는 호현(鄗縣)에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올랐다. 광무제는 왕패가 가장 병사를 잘 챙긴다 생각해 그를 편장군에 임명하고 부준과 장궁을 기도위로 삼아 그들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무 2년(26년), 부파후(富波侯)로 전봉되었다.

건무 4년(28년) 7월, 광무제는 초현(譙縣)을 순시하고 왕패와 포로장군 마무를 수혜(垂惠)로 보내 주건(周建)을 정벌하게 하였다. 왕패와 마무가 포위한 지 수 개월 쯤 지난 이듬해 2월, 주건의 동료인 소무(蘇武)는 수혜를 구원하기 위해 오교(五校)의 병사 4천여 명을 거느리고 출병했다. 소무는 우선 정예 기병을 보내 마무의 군량을 약탈하게 하였다. 마무는 곧장 소무의 공격에 대응하였으나, 주건이 수혜성 안에서 병력을 이끌고 나와 소무와 협공하였다. 마무는 왕패의 구원을 믿고 끝까지 버텼음에도 왕패는 마무를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결국 마무가 패주하면서 왕패의 군영을 진날 때 큰 소리로 도와달라 외쳤는데, 왕패는 구원을 해주기는 커녕 이렇게 답하였다.
"적군이 강성하여 나가서 싸워봤자 양군 모두 패할 뿐이니 열심히 싸워보시오."
그리고 부하들에게 군영을 걸어 잠그고 수비를 철저히 하라 지시했다. 왕패의 부장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자 건의하니, 왕패가 부장들을 설득했다.
"소무의 병사들은 정예고 그 수가 또한 많아 우리 병사들이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소. 포로장군과 내가 서로 의지하고 있긴 하나, 그렇다고 하여 양군(兩軍)이 하나가 되진 않으므로 지금 나가서 싸우는 것은 패배의 길이오. 지금 군영을 닫고 굳게 지켜 우리가 서로 구원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도적들은 반드시 승세를 타고 가벼이 돌진할 것이며, 포로장군도 구원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사력을 다해 싸우게 될 것이오. 이리하면 소무의 병사들은 어느새 피곤해질 터이니, 그 틈을 타 치게 되면 우리는 능히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이오."
그 후로 시간이 꽤 흐르고 왕패의 부장 노윤(路潤) 등 수십 명이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들의 결의를 보이며 나가서 싸우기를 청했다. 왕패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군영 문을 열어 정예 기병으로 소무와 주건의 군사들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왕패가 나오지 않으리라 믿고 등을 완전히 내어주던 적들은 크게 놀라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버렸다. 갑작스런 협공에 적들은 큰 혼란에 빠져 성으로 후퇴하고 마무와 왕패는 각자 진영으로 복귀하였다.

다음 날, 주건과 소무가 다시 성 밖으로 나와 싸움을 걸어왔는데, 왕패는 이들을 무시한 채 병사들에게 술을 나누어 주고 노래를 부르며 편히 쉬게 하였다. 이에 소무의 병사들은 왕패의 군영을 향해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았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왕패 앞의 술동이에도 꽂혔으나 왕패는 그대로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왕패의 부장들이 다시 건의했다.
"소무는 전날 이미 패했으니 지금 쉽게 쳐부술 수 있습니다."
왕패가 답했다.
"그렇지 않네. 소무의 군사들은 먼 길을 와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승리로 싸움을 끝내려 하는 것일세. 지금 군영을 닫고 병사를 쉬게 하면 싸우지도 않고 이길 수 있으니, 이것이 곧 병법에서 말하는 최선의 계략이라네."
소무와 주건은 결국 싸우지도 못하고 다시 자신들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그 날 밤, 주건의 조카 주송(周誦)이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닫고 성을 장악했다. 주건과 소무는 앞에 적을 두고 공성전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수혜성을 포기하고 도주하였다. 그들이 도주한 후 주송은 성을 들어 투항하였다. 참고로 주건은 도망치다가 길 위에서 분사하고 소무는 하비(下邳)로 도주해 또다른 군벌인 해서왕(海西王) 동헌에게 의탁하였다.

건무 5년(29년) 6월, 광무제가 태중대부를 보내 왕패를 토로장군으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적장군 방맹(龐萌)이 난을 일으키자 도성(桃城)에서 마무와 함께 방맹을 쳤다. 이윽고 광무제의 친정군도 도착해 방맹을 향해 총공격을 퍼부으니 방맹을 크게 패하여 군사를 전부 잃고 동헌에게 투항했다.

건무 6년(30년), 신안(新安)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건무 8년(32년), 함곡관(函谷關)에도 둔전을 설치하고 형양(滎陽)과 중모(中牟)의 도적들을 쳐 모두 섬멸하였다.

건무 9년(33년) 6월, 흉노가 다시 발호하여 하북을 넘보자 광무제는 왕패와 대사마 오한, 횡야대장군 왕상, 건의대장군 주우, 파간장군 후진(侯進)에게 5만 병력을 주어 고류(高柳)를 공략하게 하였다. 당시 고류는 노방의 장수 가람(賈覽)과 민감(閔堪)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고류가 위험하자 노방은 흉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흉노는 기병대를 보내 한군을 쳤고 비까지 내리면서 전황이 악화되었다. 오한은 하는 수 없이 병사를 물려 낙양으로 물러갔고, 광무제는 남겨진 나머지 4명의 장수들을 각각 태수로 임명해 흉노에 대비케 하였다. 이때 왕패는 상곡태수에 임명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하였다.

건무 10년(34년) 정월, 대사마 오한이 낙양에서 돌아와 왕패 등 4명의 장수를 지휘해 고류성을 다시 공략했다. 광무제는 특별히 오한에게 조서를 내려 왕패와 어양태수 진흔(陳訢)을 선봉에 세우라 당부하였다. 흉노도 좌남장군에게 수천 기병을 주어 다시 고류로 보냈다. 왕패는 흉노군과 평성(平城) 아래에서 회전을 벌여 흉노군을 대파하였고 승세를 몰아 변경까지 도망치는 흉노병을 추격해 수백 개의 수급을 획득했다. 이후 왕패 등은 안문(鴈門)으로 가, 표기대장군 두무와 함께 노방의 장수 윤유(尹由)를 곽(崞)과 번치(繁畤)에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무 13년(37년) 4월, 대사마 오한이 익주를 평정하고 돌아오면서 대륙의 군벌들이 드디어 절멸하였다. 광무제는 천하통일을 축하하며 공신들의 식읍을 늘려주었고, 왕패의 식읍 또한 늘어나 향후(向侯)로 다시 봉해졌다. 하지만 노방이 흉노, 오환(烏桓)과 연합하여 끊임없이 유주와 병주를 위협하고 도적들도 많아져 변경 백성들의 근심은 끊이지 않았다. 광무제는 죄수 6천여 명을 모아 형구를 풀어주고, 그들을 안문으로 보내면서 조서로 두무와 왕패에게 이 형벌 부대를 이용해 비호도(飛狐道)를 수리하라 명령했다. 왕패는 대(代)에서 평성(平城)까지 돌을 쌓고 흙으로 덮어서 곳곳에 정장(亭障)을 설치하였다.

왕패는 그동안 흉노, 오환과 수십, 수백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자못 변경의 일에 대해 깨달은 바가 많았다. 이에 수 차례 광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흉노와 화친을 해야한다 주장했고, 변방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며 온수(溫水)를 이용하여 배로 물자를 실어 나르자 건의하였다. 왕패의 의견은 전부 시행되어 그가 20년 동안 상곡태수를 지내는 사이, 남선우와 오환족이 한나라에 투항해 북방이 마침내 평안해졌다.

건무 30년(54년), 회릉후(淮陵侯)로 전봉되었다.

영평 2년(59년), 병이 들어 사퇴했다가 몇 개월 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왕부(王符)가 작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