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6:35:09

왕망


신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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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ece5b6>
신 초대 황제
왕망 | 王莽
출생 기원전 45년
전한 기주 위군 원성현(元城縣)
(現 허베이성 한단시)
즉위 9년 1월 8일
전한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23년 10월 4일 (향년 66~67세)
현한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미상
재위 전한의 섭정
6년 ~ 9년 1월 8일[G]
(2년)
신 초대 황제
9년 1월 8일
~ 23년 10월 4일
(14년 8개월 26일 / 5,38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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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ece5b6> 성씨 왕(王)
망(莽)
거군(巨君)
부모 부왕 신도현왕
모후 거씨
배우자 미상
자녀 효평황후 왕씨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연호 시건국(始建國) (9년 ~ 13년)
천봉(天鳳) (14년 ~ 19년)
지황(地皇) (20년 ~ 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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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외모3. 생애
3.1. 한나라 시절
3.1.1. 집안 내력 및 초기3.1.2. 유한의 기둥3.1.3. 가짜 태평성대
3.2. 신나라 건국과 폭정3.3. 이민족 정책3.4. 반란과 처참한 말로
4. 평가5. 기타6. 같이보기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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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前漢) 말기의 권신이자 신(新)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는 거군(巨君). 중국사의 유명한 역적 4명(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를 가리키는 사자성어 망탁조의(莽卓操懿) 중 첫 번째이다. 망탁조의 중에서 유일하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창업군주로 인정받는 조조나 사마의와 달리 현재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다.

제위 찬탈 이전까지 완벽하게 스스로를 관리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제위 찬탈 이후에는 막장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무너졌다. 근대까지 중국에서 왕망의 평가는 말그대로 최악의 폭군이었다. 오늘날에는 왕망을 단순히 쇼맨십에 능한 폭군으로만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시도했던 세제(稅制)[2] 정책과 개혁에 대해서 평가하기도 한다. 다만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었던 인물이라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실패한 개혁가 정도로 보는게 최고. 본인의 실정으로 나라 전역이 전란에 휘말렸으며, 이로 인해 대규모 유랑민이 발생하고 통치 체계 및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권을 장악한 왕망은 역성혁명으로 황제를 폐위하여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新)나라를 건국했다. 하지만 폭정과 실정을 반복한 탓에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 결국 신나라는 멸망하고 자신도 끔찍하게 처형당했다. 그러니까 왕망은 궁예처럼 자신이 세운 나라의 초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였다. 혈통 및 명분론적으로 전한을 계승한 후한이 건국되면서 왕망은 얄짤없이 역적으로 규정되었다. 한나라 시기부터 조위 시대까지 나라를 말아먹거나 찬탈한 역적들로 평가받는 망탁조의의 첫번째 인물로 현대 이전까지 전형적인 위선자 원톱으로 통했다.[3]

중국 왕조의 변천사를 논할 때 신나라는 취급하지 않는다. 유교적 정통성을 중시한 중국의 전근대 역사가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을 정도로, 왕망의 신나라를 적법한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나라는 존속기간이 15년, 1대에 그친 단명 왕조였기 때문에 부정하기도 쉬웠다. 함께 역적의 대명사인 조씨위나라사마씨진나라는 정통성 계보에 포함되는 것과 대비된다. 조조가 토대를 쌓은 조위는 신나라의 3배가 넘는 45년 동안 왕조가 존속되었고, 사마의가 토대를 쌓은 서진은 51년 동안 왕조가 존속한 데다가 한때 통일왕조이기도 했고, 왕조 자체는 서진 이후 동진까지 이어지므로 사마씨의 진나라는 중국사 전체적으로 봐도 오래 간 편에 속하는 왕조다.

2. 외모

한서》에 나오는 왕망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망은 입이 큰데 턱이 짧고, 퉁방울눈에 눈이 빨갛고 크고 걸걸한 목소리였다. 키는 7척 5촌[4]으로 바닥이 두꺼운 신발과 높은 관을 좋아했고 북실북실하고 생기있는 털을 옷에 넣어 가슴을 젖혀 높은 곳을 보고, 먼 곳을 바라보듯 좌우의 눈을 보았다.
<왕망전>

3. 생애

3.1. 한나라 시절

3.1.1. 집안 내력 및 초기

기주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이었다. 전한 제11대 원제 유석의 치세였던 초원 4년(기원전 45년)에 태어났다. 그는 전제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로 제북왕이었던 전안(田安)의 후예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라고 불렀기 때문에 아예 규성 전씨에서 왕씨(王氏)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5]

아버지 왕만(王曼)[6]은 일찍 죽었는데 왕망은 그의 차남이었다. 왕망의 숙부들인 왕담(王譚), 왕상(王商), 왕립(王立), 왕근(王根), 왕봉시(王逢時) 등은 성제 시절에 황권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모두 후작의 지위에 올랐지만 왕망은 외롭고 가난했다. 왕망의 고모 효원황후 왕씨는 왕망과 그의 어머니 거씨를 동궁에 데려와 살게 했는데, 왕망은 절개를 굽혀 공손하고 검박하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 어머니와 과부 형수를 섬기는 데 공손하고 주도면밀했다. 밖으로는 뛰어난 인물들과 사귀고 안으로는 여러 숙부들을 섬기면서 예의를 지켰다. 백부이자 대장군이었던 왕봉이 병석에 있을 때 왕망은 병문안을 정성스럽게 하여 달포 동안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약을 달이고 맛을 볼 정도였다.

왕망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왕봉은 죽기 전에 누이인 황태후(효원황후) 왕정군과 외조카인 성제에게 왕망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이 덕분에 왕망은 황문랑(黃門郞), 사성교위(射聲校尉)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명사들과 그의 숙부인 성도후 왕상, 고모인 황태후 왕정군 등은 모두 조카 왕망의 행각을 성제에게 고했고, 성제도 결국 이종사촌인 왕망이 어질다고 인정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왕망은 신도후, 기도위, 광록대부, 시중으로 승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검소하게 살며 의복과 물건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명사들을 문하에 끌여들여 많은 권문세가들과 사귀었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서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왕망을 추천했다. 또한 길 가는 사람들이 왕망을 칭송하여 백 • 숙부들보다 더 알려졌다. 그러나 왕망은 분수에 넘치는 행동이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찍 죽은 형의 아들을 위해 쉬는 날이면 술과 양고기를 싣고 가 사부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모두가 감탄했다.

3.1.2. 유한의 기둥

성제 치세 말기인 수화 원년(기원전 8년), 왕망의 숙부인 곡양후 왕근은 대사마였는데 병환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했다. 당시 황태후 왕정군의 언니의 아들인 시중 순우장(淳于長)이 성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무엇보다 재능이 있었기에 그가 마땅히 왕근의 뒤를 이어야 했다.

왕망은 이를 시기하여 순우장이 성제의 황후였던 허씨[7]의 언니와 간통했고 허씨를 희롱했으며 궁중 물품 1천여 만을 횡령했다고 무고하여 결국 순우장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왕망이 충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성제는 왕망을 충직하다고 칭찬했으며, 왕근 역시 왕망을 추천했으므로 왕망이 대사마에 올랐다. 이때부터 왕망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왕망은 스스로를 단속하고 행동을 부지런히 했다. 하사받은 재물은 모두 빈객 접대에 사용하고 자신은 검소한 삶을 이어나갔다. 왕망의 어머니 거씨가 병이 나자 공경, 열후가 병문안을 왔는데 왕망의 아내가 입은 옷차림만 보고 노비로 생각했다가 나중에 모두가 놀랐다.

건평 2년(기원전 5년), 왕망은 애제의 조모인 부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걸 반대한 탓으로[8] 귀양을 갔는데 조정의 많은 관리들은 억울하다고 동정했으며 왕망 자신은 두문불출했다. 그의 차남 왕획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자 아들을 심하게 질책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

귀양 3년 동안 왕망의 죄를 씻어달라는 요구와 상소가 엄청나게 올라왔다. 결국 원수 원년(기원전 2년), 애제는 왕망을 수도 장안으로 불러들여 태황태후 왕씨를 시중들게 했다. 이 해 제태태후 부씨가 죽고 이듬해에는 애제마저 붕어했다. 결국 어린 평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 왕정군은 조서를 내려 대사마에 마땅한 자를 추천하게 했는데 왕망이 다시 선출되었다.

3.1.3. 가짜 태평성대

이에 왕망은 대사마, 상서가 되었고 원시 원년(기원후 1년)에는 안한공에 올랐는데 세 번 사양한 후에야 이를 수락했다. 왕망은 태황태후가 늙어 정사를 귀찮게 여기자 대신들에게 "태후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작은 일까지 걱정하시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보오."라고 하니, 태황태후 스스로 대신 4명과 왕망이 정사를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왕망은 평제의 외가인 위씨 일가가 권력을 얻을까 걱정하여 그들을 수도로 오지 못하게 했다가 나중에 위씨 일가를 멸족시켰는데, 오직 평제의 어머니만이 목숨을 건졌다. 또한 자신의 장녀평제에게 시집을 보내 스스로 국구, 즉 황제장인이 되어 더욱 권력을 튼튼히 다졌다.

황후를 뽑는데 왕망의 청에 따라 왕망의 딸은 제외했더니 궐문에 몰려와 상서하는 자가 하루에 1천 명이었다. 결국 왕망의 딸이 황후가 되었다. 법에 따라 황후의 아버지인 왕망이 금전 2억 전을 받아야 했는데 4천만 전만 받고 3300만 전을 황제의 첩 집안에 나누어 주었다. 황후가 2300만 전을 더 내리자 1천만 전을 친척 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원시 2년(기원후 2)에 전국에 한재가 들자 왕망은 돈 100만 냥과 땅 30경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원시 4년(기원후 4)에는 8천 명, 다음해에는 무려 48만여 명이 왕망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고 청원했다.

원시 7년(기원후 7)에는 동군태수 적의(翟義)가 군대를 이끌고 봉기하자 적의의 아버지를 포함한 그의 선조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관들을 불태우고 삼족을 멸했으며 어린 아이들도 오독을 먹여 죽인 후 모두 한 무덤에 묻었다. 적의도 곧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왕망은 앞에서는 이를 다 사절했지만 뒤에서는 오히려 사람을 시켜 자기의 공덕을 칭송하고 태평성대를 가장하게 하여 "지금은 관청에 송사가 없고 고을에 도적이 없으며, 들에 빈민들이 없고 길가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가져가지 않는 태평성대"라고 조작했다.

3.2. 신나라 건국과 폭정

그런데 이 해에 평제가 자신의 외가인 위씨가 박살났음을 알고 불만을 품자, 왕망은 12월에 평제를 독살하고 당시 겨우 2세였던 선제(제10대)의 현손 유영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유자영이라고 부르고 자기가 섭정하면서 섭황제를 칭했다. 이때부터 전한은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다.

왕망은 결국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초시 원년(기원후 8) 11월에 한나라를 멸하고 신(新)나라를 건국한다. 그리고 수도 장안(長安)의 이름을 상안(常安)으로 고쳤다. 그는 이렇게 가짜 선양의 시조가 되었다. 이러한 선양 방식은 무려 1천 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북송 시대에 이민족 왕조들 시절에 사라졌다. 제위를 찬탈한 뒤부터 왕망은 대인군자 코스프레를 집어치우고[9] 마각을 드러내어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왕망은 전국의 토지를 왕전으로 고쳐 조정 소유로 귀속시키고 사사로운 매매를 금지했으며, 관직 제도는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5등작을 실시했다.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상안(장안), 낙양, 한단, 임치, , 성도 등 전국 6대 도시에 오균사시(五均司市) 관직과 전부관(錢府官)을 설치하여 오균육관(五均六莞) 제도를 실시했다. 오균육관에서는 외상을 주는 것과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행하고 물가를 관리하게 했으며 술, 소금, 쇠붙이 등에 세금을 매기게 했다. 그러나 제도가 복잡하여 기존 제도보다 훨씬 못했고, 물가가 폭등해 오히려 사회혼란을 야기했다.

3.3. 이민족 정책

3.3.1. 흉노

전한의 중흥을 이룬 제10대 선제 이래로 흉노 및 서역 여러 나라들과 평화롭게 지내던 것을 무시하고 전쟁을 감행했는데, 이때 왕망이 워낙 여기저기 주변국을 들쑤시고 다니며 적을 만들어 놓아 주변 민족들은 모두 왕망의 적이 되었다.

시건국 원년(기원후 9)에 사신을 동흉노로 보내 한나라의 책봉 인장을 흉노선우새(匈奴單于璽)에서 신흉노선우장(新匈奴單于章)으로 낮추게 하고[10] 오환이 동흉노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동흉노의 오주류약제 선우[11]가 대노하여 이듬해 삭방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그래 12월, 왕망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흉노를 4년 동안 공격했으나 결국 국력만 잔뜩 소모했을 뿐 얻은 것이 없었다. 또 이 해에 제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정의 국왕을 후작으로 낮추었다. 구정 왕이 이를 무시하자 왕망은 회견을 빌미로 구정 왕을 유인해 암살한 뒤, 이때를 틈타 20만 대군을 보내 구정을 공격하여 일단은 평정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전염병에 태반이 죽고, 오히려 서남 지역의 이민족들도 왕망에게 저항하게 되었다.

3.3.2. 고구려

시건국 2년(10년), 왕망은 고구려에게서 군사들을 받아 동흉노를 치려했지만 고구려가 거부하자 엄우를 시켜 그 수장인 구려후(句驪侯) 추(騶)[12]를 살해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이 내용을 다소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왕은 유리명왕이었으며, 그때 살해된 사람은 고구려의 왕이 아닌 고구려의 장수 연비였다고 했다. 또한 고구려의 이름을 멋대로 고쳐 "하(下)구려"라 칭했으며, 왕위를 제멋대로 고구려 왕에서 하구려 후(후작)로 낮추었다. 그러자 격노한 고구려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신나라의 변방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왕망의 과격한 대외 정책은 중국에 인접한 여러 이민족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왕망에게 복종하기는커녕 등을 돌렸다. 고구려의 사례는 당시 왕망이 실시한 이민족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 혹자는 기록에 나온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죽은 구려후 추를 고구려현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미약하며 실제로 이렇게 보는 학자도 얼마 없다.

왕망은 즉위 이후에 주변 이민족들의 왕을 후(侯)로 격하했다. 구려후 추 또한 본래는 고구려 왕이었으나 왕망의 이런 정책에 의하여 격하된 것이다. 기록에 보이는 구려후 추가 정말로 일개 고구려현의 우두머리였다면 애초에 왕을 칭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구려현이 속한 현도군은 기원전 75년에 고구려 원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밀려나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기에 고구려현은 그저 이름만 유지했을 뿐이었다.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뢰하여 고구려후 추가 죽었다는 기록을 잘못으로 보았고, 고구려 장수인 연비가 대신 죽었다고 묘사했다. '구려후 추'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고구려의 건국자인 추모왕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이미 승하했고, 고구려의 왕을 죽였을 정도면 멸망시키지 찌질하게 국가명만 비칭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

거기다가 고구려의 군대를 이용해서 흉노를 치겠다는 말 자체로 고구려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1개 군의 태수가 수장을 죽였을 정도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물론 공손찬과 같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흉노는 후한 초기보다 많이 약했어도 1개 군 정도 규모가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특히나 일반적인 고구려와 흉노의 위치를 생각하면 인접국가를 이용한 공격도 아닌 장거리 동원이다.

3.3.3. 토하라인

서역의 인도-유럽계 토하라인들의 도시국가들도 건드려서 서역 왕을 후작으로 낮추고 그들을 모욕했다. 이에 언기(焉耆, 카라샤르)가 가장 먼저 배신하고, 시건국 5년(13년)에 서역 도호 단흠(但欽)을 죽인 후 흉노에 투항했다. 이듬해 왕망은 서역 여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여 언기를 습격하고 구자(쿠차)를 보호하게 했지만 오히려 대패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과 관계가 단절되었다.

3.3.4. 결과

결국 왕망의 이러한 정책들은 국내와 국외 모두 적을 만들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자충수였다.

또 왕망은 신선귀신을 믿고, 엄청난 돈을 들여 궁중에 팔풍대(八風臺)와 구묘(九廟)[13]를 지어 수만 명에 달하는 군사와 죄수들이 죽어 나갔으며 국고가 소모되었다.

왕망은 또한 다섯 가지 돌과 구리로 위두(威斗)라는, 국자 비슷하게 생긴 주술적 물품을 만들었다. 위두는 길이가 2척 5촌[14]이었다고 하는데, 북두칠성의 형상을 본뜬 것이었다. 왕망은 위두를 만든 뒤로는 늘 곁에 두되, 하늘에서 북두칠성의 두병(斗柄), 즉 북두칠성의 국자 손잡이에 해당하는 별 3개[15]가 가리키는 방향에 맞추어 위두를 배치했다. 시간이 지나면 별자리가 일주운동을 하느라 두병의 방향이 달라지므로 그에 따라 위두의 방향을 계속 조절했다. 위두(威斗)란 이름은 '북두칠성의 위력'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북두칠성의 힘으로 백만 대군이라도 물리칠 수 있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16]

이처럼 왕망은 정치가나 사상가로서의 면모도 어느 정도는 있었으나, 명예욕이 지나치게 강했고 스스로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데다가, 주술을 강하게 믿으면서도 시기심이 엄청나게 강한 소인이었다. 초시 원년(기원후 8)에 익주 재동군(梓潼郡)[17] 사람 애장(哀章)을 시켜 천서를 위조하게 하여 황제가 되었다.

"왕망은 천자가 틀림없노라."라고 조작하게 하고 주변 나라에 몰래 뇌물을 주어 귀한 조공을 받는 척을 했다. 그리고 왕망은 한 고조 사당에 가서 "황천상제와 고조 폐하의 위명을 이어받겠습니다."라는 깃발을 걸게 하고 유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나는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황천의 위명을 어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왕망은 대범하지 못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는 등용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죽였다. 충신들은 죄를 날조하여 죽였는데 자기의 가족과 친척을 가리지 않았다. 명성을 얻기 위해 차남 왕획을 자살하게 한 것 외에도 장남 왕우와 숙부였던 홍양후 왕립 등이 황제가 되는 것의 부당함을 건의하자 그들을 모두 죽였다.

천봉 3년(기원후 16)에는 왕손경(王孫慶)이 붙잡혔다. 왕손경은 왕망이 전한의 섭황제였던 원시 7년(기원후 7)에 반란을 일으킨 적의의 동지였다. 왕망은 태의를 시켜 왕손경을 해부하여 오장의 길이와 무게를 재게 하고, 가는 대나무를 혈맥을 따라 넣어 그 시작과 끝을 측정하여 "이것으로 병의 치료법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18] 이것이 중국 역사서에 실린 최초의 인체해부다.

지황 2년(21년), 자다가 꿈 속에서 한고조에게 꾸지람을 받자 무사를 파견하여 고조의 사당에 들어가 사당을 부수게 하는 졸렬한 짓을 하였다.

3.4. 반란과 처참한 말로

결국 참다 못한 각지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눈썹에 붉은 물감을 들인 도적들의 집단인 적미군을 비롯하여 전한의 황족 유현의 지휘하에 유수(광무제) 형제[19], 그 외에 공손술, 연잠, 왕랑 등 군벌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왕망은 겉으로 태연한 척하면서 머리와 수염에 물감을 들였는데, 너무 걱정을 하느라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셌기 때문이었다. 또 근심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병서를 읽다가 , 그리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치품인 말린 전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피곤해지면 베개도 없이 책상에 엎드려서 자기도 했다.

왕망의 군대는 곤양대전에서 유현의 군대에게 대패를 당했다. 유수 등에 의해 추대된 황족 유현은 남양에서 황제에 올라 경시제라고 칭했다. 경시제는 왕광에게 낙양 공략을 신도건, 이송, 우광, 등엽, 왕헌 등에게 장안 공략을 맡겼다. 왕광은 쉽게 낙양을 떨어뜨렸고 장안도 위급했다. 경시제 유현이 낙양과 무관을 함락시키자, 대사마 최발이 울음으로써 하늘에 구원을 청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왕망은 문 • 무대신들과 함께 남교에 가서 절을 하고 아침 • 저녁으로 통곡했다. 또한 백성들 중에서 잘 우는 3천여 명을 뽑아 통곡하며 기도하게 했는데 잘 우는 자들에게는 낭중이나 낭관 자리를 주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 5천여 명이나 되었다.

물론 이런 엉터리 대책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결국 경시 원년(23년), 9월 1일에 유현의 군대가 장안의 선평문을 부수고 진입하자 왕읍, 왕림, 왕순, 대운 등의 신하들이 병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저항하였으나, 날이 저물자 대부분의 신하와 병사들이 왕망을 배신하고 도망쳤다. 왕망은 자신이 평소에 그토록 신뢰하던 주술도구인 위두를 곁에 두고 유현의 군대에게 저항했지만 당연히 효과를 보지 못했다.

9월 2일, 결국 왕망한테 분노한 장안의 주민들이 노략질을 당할까 두려워서 모두 왕망을 죽이려 봉기를 일으켜 궁전으로 몰려갔다. 장안성 안에 있던 젊은이인 주제(朱弟)와 장어(張魚) 등이 노략질을 당할까 두려워서 성안을 달리면서 소란스럽게 하다가 서로 화답하면서 작실문(作室門)[20]에 불을 지르고 경법전의 작은 문에 도끼질을 하면서 부르짖었다.
"반역자 녀석인 왕망은 왜 나와서 항복하지 않느냐?"
「反虜王莽,何不出降!」

황황실주 왕씨는 본인이 거처하던 곳에 불이 옮겨 붙자 말했다.
"무슨 면목으로 한나라 집안 사람들을 볼 것인가?"
「何面目以見漢家!」

그리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당시 26세였다.
왕망은 어두운 남색 옷을 입고 비수를 들고 있었는데, 천문랑(天文郞)이 왕망의 앞에서 점괘를 뽑았고, 왕망이 북두칠성 방향으로 돌아 앉으면서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은덕을 내려주었는데, 한나라의 병사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天生德於予,漢兵其如予何!」

3일에 왕망의 곁에 있던 신하들이 나서서 왕망을 부축하고 점대로 갔는데,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왕망을 따르고 있었다. 왕읍은 밤낮으로 싸우다가 병사들이 대부분 죽자, 말을 달려 여러 곳을 돌다가 점대로 갔다. 아들인 시중 왕목(王睦)이 의관을 벗어던지고 도망치는 걸 보자 그를 꾸짖어 돌아오게 한 뒤에 부자가 모두 왕망을 지켰다. 봉기한 주민들과 군사들이 왕망이 점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수백 겹으로 둘러쌌다. 점대 위에서는 화살을 쏘며 저항했으나 군인들이 워낙 많아 화살이 다 떨어지자 짧은 칼로 접전을 벌였다. 왕읍 부자와 대운, 왕순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왕망은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오후 4시 경, 점대 안으로 난입한 주민들 중 상인 출신 두오(杜吳)가 왕망을 살해한 다음 교위 공빈취(公賓就)가 왕망의 목을 자르고, 그 옆에 있던 군사 수천 명이 왕망의 몸뚱이를 난도질하여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난도질하면서 다투다가 서로 죽인 것도 수십 명이었다.

한편 왕망을 도륙내고 나서 신도건, 이송이 이끄는 유현 군대를 길라잡이하던 백성들은 궁궐을 약탈하고 마음껏 날뛰었다. 공빈취에게 왕망의 머리를 받은 왕헌(王憲)은 한나라의 대장군을 자칭하고, 성 안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자기에게 귀속한 후 장락궁에 머물면서 왕망의 후궁들을 처로 삼고, 황제의 수레와 복장을 사용했다.

6일에 이송과 등엽, 조맹과 신도건이 도착하였는데, 왕헌이 옥새를 바치지 않고 궁녀들을 많이 끼고서 천자의 북과 깃발을 사용하는 걸 보고 그를 잡아서 목을 베었다. 또한 궁궐을 약탈하고 날뛰던 백성들 수천여 명 역시 잡혀서 참수당했는데, 궁궐을 약탈하고 황제의 물건을 건드리는 자를 처형하는 법 때문이었다. 이어 왕망의 조상과 처자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관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왕망 일족들을 절멸시켰다. 왕망이 건축했던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타면서 장안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장군 신도건이 왕망의 머리를 완성으로 보내 효수하게 하자 분노할대로 분노한 백성들은 왕망의 머리를 때리고 칼로 혀를 잘라 먹기도 했다.

왕망 일가를 멸족시킨 유현은 마침내 경시제로 즉위했으며 조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시제의 능력은 백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은 오히려 왕망의 시대를 그리워했다. 경시제는 적미군들이 장안으로 들어올 때 잡혀서 즉위한 지 2년 만에 유폐된 뒤 그들에게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4. 평가

통치기간에 유의미한 업적도 없이 폭정을 저질렀으며, 본인 1대를 끝으로 허무하게 멸망하고 그 결과는 과거 초한전쟁 시절처럼 지방관들이 할거해서 광무제가 이를 수습할 때까지 전란이 이어졌기에 후한은 전한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전란의 후유증에 제대로 시달렸다.

왕망은 한나라의 황제를 선양으로 폐위시킨 역적인 동시에 외척의 폐해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왕망이 세운 정책의 결과는 나쁜 방향으로 치달았고, 여기에 제위를 선양이란 이름으로 찬탈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불안정해서 지방관들은 왕망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불복했으며 오히려 반기를 들었다. 이와 동시에 지방관들이 지역 패권을 다투기 위해 대란이 발생했고, 후한의 성립으로 한나라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왕망 시기부터 광무제까지 이어지는 전란기에는 그야말로 다시 초한전쟁 시절로 되돌아갔고, 안전한 곳이 단 하나도 없이 폐허가 된 성과 마을, 시체로 가득한 인외마경이 되었으며 감정적인 대립으로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지옥도가 도래했다. 이러한 악영향으로 전근대에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평가가 매우 나빴다. 중국과 한국에서 반역자의 대명사로 꼽혔으며, 왕망이 했던 행위는 흑역사이자 금기로 규정되었다. 또한 한나라를 멸망시킨 망탁조의(莽卓操懿)의 필두로 역적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역사상 '유교를 본격적으로 정치이념으로 도입하여 체계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왕망의 역사적 의의는 작지 않았다. 전한은 유학을 최초로 정치 이념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그 실상을 알고 보면 시작부터 유교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21] 제5대 문제와 제6대 경제 치세에는 도교와 임협사상, 제7대 무제 치세에는 법가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제의 법가 사상은 만만치 않은 폐해를 낳았고, 반작용으로 유교의 풍조가 점점 강해지더니 왕망의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

왕망은 신나라를 세운 뒤 서주 초기를 숭상했던 초기 유교사상을 현실에서 재현하려 애썼다. 나름대로 시도는 가상했으나 왕망은 지나치게 설정 놀음을 좋아하여 관직 이름과 지방 이름을 바꾸고 화폐 정책도 조변석개했다. 또한 유교 이론을 숭상했다고 하나 그 주장자가 자기 비위를 거스르거나 그 이론이 역시 자기 설정놀음과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았으니 설령 을 숭상하는 유학자들이 봤다고 해도 유가적 입장에서 왕망은 엄청난 사이비였다.[22] 이러니 성공할 턱이 없었다. 왕망은 개혁이 단지 궁정에서 내리는 조칙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사유재산제가 정착한 사회에 공동소유와 공동경작을 하는 정전제를 도입해 각계각층의 반발을 샀다.
  • 경전을 일일이 따라하느라 관직 체계가 쓸데없이 복잡해졌다.
  • 관료들에게 무조건 봉사를 강요해 녹봉을 주지 않았다. 관료의 부정부패착취가 심해졌다.
  • 타국 지도자를 함부로 '후'(侯)로 낮추었는데,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중화사상으로 외국을 무시해서 괜히 적의 침략을 불러오기도 했다.[23][24]

그리고 모든 것을 주나라의 모범으로 돌린다는 정치적 신념에 의해, 주나라 시절에는 예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두 글자 이름을 금지했다. 이는 《춘추공양전》에서 이름을 두 글자로 쓰는 것을 비판한 공양학의 주장을 전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춘추》 본문에서 '중손하기'(仲孫何忌)를 '중손기'(仲孫己)로 표기한 것에 대해 《춘추공양전》에서 너무 심오한 뜻을 부여한 뻘짓으로, 《춘추좌씨전》에서는 이 부분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지 않아 해설(전)을 달지 않았다.[25]

신나라 이후 후한위진남북조 시절에 외자 이름이 주류가 된 것을 신나라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나, 이는 단순한 관행이었지 신나라의 개혁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날 두 글자 이름이 대세인 것도 별 이유가 없는 단순한 관행인 것과 같다.[26] 왕망이 시행한 정책은 죄다 엎어져서 반대로 돌아갔는데, 이것만 왕망이 망한 뒤에도 이어졌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삼국지집해》의 편저자인 노필(盧弼)은 후한 시대 이름이 전부 외자라는 설은 깊이 살피지 않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실례로 삼국시대에 살았던 왕원희나 주만세(朱萬歲)[27], 곽유지가 있다.

즉, 왕망은 비현실적으로 극단적인 복고주의자, 이상주의자, 형식주의자, 국수주의자였다. 권모술수를 비롯한 정치력은 분명 만렙이었으나 행정에는 너무나도 무지했다. 행정을 모른다면 영리한 개혁가나 믿을 만한 부하들을 끼고 일해야 했는데, 왕망은 자기가 권신으로서 찬탈했으니 또 다른 권신을 키우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신하 집단 전체를 불신하고 권력도 정책 결정 권한도 거진 주지 않았다. 그러니 결과는 군웅할거로 이어지는 전란과 유랑민의 대규모 발생, 이를 수습한 후한의 전쟁 후유증이었다.

개혁 방향은 분명 틀리진 않았지만, 실무능력과 인적 자원 활용능력이 떨어지면 실패함을 잘 보이는 예시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렇게 개혁하다가 실패한 탓에, 훗날에는 제대로 개혁을 펼쳐보려는 애먼 사람들까지 도매금으로 왕망으로 묶여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세력들의 좋은 무기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북송의 왕안석, 조선의 조광조 등이다.[28]

5. 기타

《한서》 <왕망전>에는 교위 한위가 왕망에게 "한 말의 식량도 쓰지 않고 배고프면 오랑캐의 고기를 먹고, 목이 마르면 그 피를 마시며 싸우겠다." 하고 말하자, 왕망이 한위를 장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29]

삼국지연의》에서도 역적의 대명사로 언급된다. 관도대전에서 조조와 원소가 서로를 비난할 때 원소가 조조에게 "네 죄는 왕망과 동탁보다 더 크다."라고 말하고, 사마사가 이풍 일파를 떠볼 때도 "나를 왕망과 동탁에게 견주었을 테지?"라면서 비웃는다.

중세 일본의 군담인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도 조고, 주이, 안녹산과 함께 권력만 믿고 전횡을 부리다 패가망신한 중국의 권신으로 언급된다.

망탁조의 중 유일하게 게임에 등장하지 못했다.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 등장이라면 가능성이 있긴 하겠지만, 오히려 신나라 소속 인물이 없고 인지도도 저조하며, 고대 무장은 항상 능력이 특출한 인물로 선별하는 만큼 단점이 심각하게 많은 왕망을 등장시킬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삼국지 10>, <삼국지 13> 등에서 황제로 즉위할 때 국호 중에 신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남긴 흔적의 전부이다. 굳이 보자면 게임보단 《삼국지》 바탕의 소설이나 만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에서 가볍게 언급하는 정도 또는 《삼국지》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에 나오는 정도다.

신나라의 비중이 워낙 적다 보니 역사 교육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중등교사 임용시험에서 왕망의 시대착오적 개혁 정치를 소재로 한 서술형 문제가 나오는 정도이고, 중등 교육과정 동양사 파트에서는 - - 춘추전국시대 - - - 위진남북조시대 순서로 고등학생에게 중국사를 가르친다.[30] 그나마 수능특강/완성의 경우 신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지나간다. '기원후 8-23. 급진적 개혁으로 호족과 백성들의 반발을 삼' 정도로.

서유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왕망이 천하를 찬탈할 무렵이 손오공석가모니에게 벌을 받아 오행산에 갇혔던 때라고 한다.[31] 서진 때 무고(武庫)에 화재가 발생해 보물들이 소실되었을 때 왕망의 머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육조시대 양나라에서 후경의 난을 일으킨 후경이 있다. 후경은 황제를 자칭하고 한(漢)나라를 세우는 등 기세등등했으나, 폭정을 하다 막판에 진패선, 왕승변 등에게 반격당하고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후경은 머리가 잘려 소금에 절여지고 소역이 있던 강릉으로 보내졌다. 후경은 난을 일으킬 때 양무제를 유폐해서 아사시켰기에, 소연의 아들 원제 소역은 아버지의 제삿상에 후경의 머리를 제삿상에 올렸다. 제사가 끝난 뒤 후경의 머리가 썩지 않게 옻칠을 하고 물감으로 색을 입힌 다음 강릉 무기창고에 보관했다. 그 뒤의 후경의 머리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서위의 침입을 받을 때 강릉이 폐허가 되면서 사라졌을 것이다.

통일 왕조 중간에 세워졌지만 없는 셈 쳤다는 점에서는 측천무후주나라(무주)도 비슷하다. 무주는 당나라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섰다가 망했고 전근대 역사가들이 따로 독립된 왕조로 취급하지 않았다.[32]

일부에선 흉노에서 투항한 김일제의 외가 쪽 친척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궁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왕망의 시체를 난도질하자 지나가던 자가 "잔혹하구나 인간의 행위여"라고 한탄한다. 그 옆의 지나가던 다른 엑스트라는 "그러면 어때! 나는 다리 하나 건졌지롱!"이라고 그를 조롱하는 것은 덤이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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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2] '세금제도'의 줄임말[3] 조조사마의도 역사적인 관점으로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동탁이야 위선자조차도 아닌 완전한 악당 취급이다.[4] 후한척이 약 23 cm였으므로 7척 5촌은 약 173 cm 정도이다.[5] 중국의 왕씨 중에는 그런 식으로 유래한 경우가 많다.[6] 제12대 성제 유오의 생모인 왕정군은 왕금의 딸인데, 왕금에게는 8남4녀가 있었다. 장녀는 왕군협, 차녀는 왕정군, 셋째 딸은 왕군력, 넷째 딸은 왕군제였다. 8남은 왕봉, 왕만(왕망의 부친), 왕담, 왕숭, 왕상, 왕립, 왕근, 왕봉시였다.[7] 전한 제10대 선제의 황후인 공애황후 허씨(허평군)의 조카로 이름은 허과였다. 성제의 황후였으나 폐위되었다.[8] 전한 제12대 성제의 조카인 애제가 뒤를 이은 후, 애제의 아버지인 정도공왕 유강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애제의 할머니인 소의 부씨가 태후가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존호를 요구하며 친족 부씨들을 등용하라고 손자인 애제를 압박했다.[9] 수양제도 비슷하게 겸손한 척했다가 자기 아버지인 문제 양견이 붕어하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10] 새로 보낸 도장에는 국호 '신'(新)이 표기되어 동흉노 선우가 신나라의 신하임을 강조했다. 또한 무엇보다 도장의 급 자체가 '새'에서 '인'으로 격하되었다. 동흉노 측에서 이를 뒤늦게 깨닫고 신나라 측에다 옛 도장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는데, 신나라 또한 흉노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여 동흉노 선우의 옛 도장을 미리 파기했다.[11] 재위기간: 기원전 8~기원후 13[12] 고구려동명성왕 고추모와 동일인물설이 있는 인물이다.[13] 황제의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사당. 왕망 이전의 중국 전통에선 칠묘를 지었는데, 왕망이 구묘를 지은 이후로 중국의 왕조들도 이를 따랐다.[14] 길이의 기준이 후한척이라면 약 58 cm쯤 된다.[15] 두표(斗杓), 표(杓)라고도 부른다. 두병을 이루는 별 하나하나를 전통적인 한자어로는 옥형(玉衡) · 개양(開陽) · 요광(搖光), 영어로는 알리오스(Alioth) · 미자르(Mizar) · 알카이드(Alkaid)라고 부른다.[16] 위두를 왕망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이미 한나라 시절에도 위두가 있었고, 소수긴 하지만 한나라 시절의 위두가 유물로도 발견되었다. 중국 학자들에 따르면 본래는 죄인을 뜨겁게 달군 쇠붙이로 지지는 낙형(烙刑)이란 형벌을 가할 때 사용하는 낙두(威斗)라는 다리미에서 위두가 유래했다고 한다. 고문도구가 주술적 도구로 바뀐 것이다.[17] 현재의 중국 사천성 선양시[18] 翟義黨王孫慶捕得 , 莽使太醫 , 尚方與巧屠共刳剝之, 量度五藏, 以竹筳導其脈, 知所終始, 云可以治病 - 《한서》 <왕망전>[19] 라고는 하지만 유현은 원래 광무제 유수의 형이 데려와서 내세웠던 인물이다. 유수 형제보다 유현의 혈통이 더 정통에 가까웠기 때문.[20] 공장(工匠)들이 출입하는 쪽문을 말한다.[21] 전한을 창건한 한 고조 유방은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며 유학을 금하자 "이제 공부 안해도 된다!"라고 좋아했으며, 나중에 선비를 욕하고 관을 벗겨 안에다 오줌을 쌀만큼 유학, 유학자들을 싫어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육가의 제안으로 유교를 받아들이는데, 그 배경 중 하나가 위아래가 없던 전한 초기 궁정의 분위기를 좀 바꾸기 위한 목적이란 이야기가 있다. 궁궐에서 천하통일의 공이 누가 더 큰지 말다툼하다 빡친 신하가 칼로 궁궐 기둥을 내려칠 정도였으니 말이다.[22] 게다가 위에 나왔듯 온갖 괴력난신 행위를 행했다.[23] 대표적으로 고구려를 '하구려'라며 경멸적으로 불렀고, 한 군현을 통해 삼한을 감시하거나 간섭하려 하는 등 삼한에서도 왕망을 좋지 않게 봤다.[24] 결국 고구려는 왕망의 선제 공격을 물리치고 오히려 요동에 있던 현도군을 치기도 하였다.[25] 이러한 차이는 크게 보면 당시 경전을 두고 해석하는 데서 나온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유학 경전이 다수 소실되면서 각 사람들의 암기한 내용을 가지고서 새롭게 경전을 복구해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벽 등에 숨겨진 경전의 원본들이 발견되면서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를 가진 2가지의 경전이 존재하게 되었다. 왕망의 시기는 이 2가지 경전의 내용을 가지고서 어느 것을 기본으로 삼을 것인지 대립하던 시기였고, 왕망은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닌 서한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경전을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름을 외자로 하는 등 불필요한 사항들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후한 시기에는 새롭게 발견된 경전을 기본으로 한 유학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26] 고대 중국의 인명에 외자 이름이 대세였던 것은 상고한어가 단음절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중국어에 점점 예외적인 다음절 어휘가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아예 다음절 어휘가 일반화되면서 사람 이름도 두 글자가 대세가 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두 글자로 작명하면 동명이인이 생길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장점도 있다.[27] 주치(朱治)의 넷째 아들이다.[28] 다만, 왕안석이나 조광조도 "그들의 개혁 방식이 적절했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29] 이런 식으로 외적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줌은 고대 중국에서 보편적이긴 했다. 후한 시대의 명장인 경공은 흉노에게 포위되어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항복을 권고하러 온 흉노의 사자를 잡아먹었고, 남송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악비는 자신의 문학작품인 <만강홍>에서 '오랑캐의 고기를 먹고 흉노의 피를 마신다'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30] 신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한다면 은-주-춘추-전국-진-전한-신-후한-위진남북조가 되어야 옳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는 덕에 중고등학교의 중등교육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며 고등교육을 성실하게 받아도 동양사 전공이 아닌 이상은 신나라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관련 전공을 깊게 이수하지 않는 한 모를 수밖에 없다.[31] 신나라, 후한, 삼국시대, 위/진/남북조, 수나라 다 보고 당나라 돼서야 풀려난 손오공. 취소선은 그었지만 농담만은 아니다.[32] 측천무후의 정치는 오늘날 재평가가 이뤄져 긍정적 측면도 부각뎌었다. 그리고 당대에도 황제로서 인정받지는 못하였지만, 제3대 고종 이치의 황후로서 대우받았다.[33] 해당 장면에서 고우영 작가는 항우의 시신을 서로 가지려다 다섯 조각으로 찢어졌지만 왕망은 수천 수만 갈래로 쪼개졌다고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