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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청 제11대 황제 광서제 | 光緖帝 | |||
광서제의 어진 | |||
출생 | 1871년 8월 14일 | ||
청나라 직예성 북경 공왕부 | |||
사망 | 1908년 12월 7일 (향년 37세) | ||
청나라 직예성 순천부 중난하이 영대 함원전 | |||
능묘 | 숭릉(崇陵) | ||
재위기간 | 제11대 황제 | ||
1875년 2월 25일 ~ 1908년 12월 7일 (33년 26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 중국식: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 |
휘 | 중국식: 자이톈(載湉) 만주어: 자이탼(ᡯᠠᡳ ᡨᡳᠶᠠᠨ) 한국식 독음: 재첨 | ||
국적 | 청나라 | ||
부모 | 부친 순친왕 혁현 모친 예허나라 완전 | ||
형제자매 | 7남 3녀 중 2남 | ||
배우자 | 효정경황후 예허나라씨 | ||
후궁 | 단강황귀비 타타랍씨, 각순황귀비 타타랍씨 | ||
신장 | 161~164cm[1] | ||
한호 | 바다랑아 도로 한(ᠪᠠᡩᠠᡵᠠᠩᡤᠠ ᡩᠣᡵᠣ ᡥᠠᠨ᠌) | ||
칸호 | 바다르굴투 토로 칸(ᠪᠠᠳᠠᠷᠠᠭᠤᠯᠲᠤ ᠲᠥᠷᠥ ᠬᠠᠭᠠᠨ)[2] | ||
묘호 | 덕종(德宗) | ||
시호 | 중국식: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만주어: 암발링우 황디(ᠠᠮᠪᠠᠯᡳᠩᡤᡡ ᡥᡡᠸᠠᠩᡩᡳ) | ||
연호 | 1875년 ~ 1908년 중국식: 광서(光緒) 만주어: 바다랑아 도로 |
<colbgcolor=#f9d83e> | |
가마에서 내리는 광서제의 모습[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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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이다.청나라 최초의 방계 혈통 황제이며, 원래대로라면 1항렬 1황제의 원칙[4]에 따라 계승권 자체가 없어 방계 황족으로서 풍족한 환경에서 편하게 살 운명을 타고났으나 큰어머니이자 이모인 서태후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옹립되어 사실상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다가 결국 독살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으로는 쓰러져가는 청나라를 지키려고 무술변법을 시도하는 등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했던 안타까운 군주이기도 하다.
그의 시기 청나라는 멸망의 조짐이 보이던 시기였다. 민란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 열강 세력들의 침략이 이어지고, 광서제 말기에 이르자, 청나라 정부는 북경 주변만 통치가 가능해지고, 지방에서는 군웅할거가 발생하여 정부의 권력은 상실되었다. 한편 광서제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친조카가 즉위했으나, 약 4년 만에 강제 퇴위당하며 청나라도 결국 멸망했다.
2. 즉위 후
2.1. 즉위 배경
[5] |
사실 광서제는 청나라의 종법상 원래는 황제 계승 자격이 사실상 없었다. 청나라의 황제 계승 원칙상으로는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6]가 원칙이었는데 광서제는 전 황제인 동치제와 항렬이 같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그 다음 항렬인 '부'(溥)자 돌림자의 황족이 제위에 올라야 했다. 이렇게 입양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인 청 황실은 마땅히 다음 항렬을 둘러보기 시작했지만, 기상정변에 참여했던 도광제의 아들들이 다들 도광제의 족보상 후손 중에는 '부'(溥)자 항렬을 쓰는 양자감이 부륜(溥倫)[7] 외에는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부륜은 족보상으로만 도광제의 후손이었다. 도광제는 일찍이 혁위를 황장자로 낳았으나 천한 시녀와의 원나잇 스탠드로 태어난 사생아 취급을 하며 홀대하다 혁위가 자식 없이 요절하고서야 안타까워하며 양손을 들였는데, 그 양손은 건륭제의 황11자 성철친왕 영성의 아들 면의의 아들 혁기의 아들인 재치이고, 그 재치의 아들이 부륜이었다. 이렇듯 부륜은 실제 혈통상으로는 멀어도 너무 먼 방계라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8] 결국 대안이 없으니 차선책으로 같은 항렬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는데, 도광제의 손자 항렬에서 가장 상식적인 대안은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라이벌인 도광제의 황6자 공친왕의 둘째아들 재형(載瀅)이었다.[9] 재형은 3살 위의 형 재징(載澂)이 그럭저럭 잘 컸기 때문에 공친왕가를 계승할 종법상의 후계에 여유가 있었고 나이도 마침 1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즉위하면 곧장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재면이 있어서 후사에 문제가 없던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 조씨의 합의로 임금에 오른 이재황의 포지션인데 나이까지 적절했던 셈. 한편 양국의 왕가 내에서의 항렬자 '재'자도 한자까지(載) 같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청나라의 모든 이들이 공친왕의 1인 영도에 엎드려 절하는 세상이 열릴 것이므로 권력에 환장한 서태후는 이를 용납치 않았고, 재형이 도광제의 황8자 종단군왕 혁합의 후사로 입적했다는 핑계로 재형의 제위 계승을 반려한 후[10] 보다 적당한 꼭두각시감을 찾아 다시 족보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편, 함풍제의 동생들 중에는 공친왕 혁흔 외에도 순현친왕 혁현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혁현은 원래 도광제의 황7자로, 동치제 즉위 직후 서태후와 혁흔이 기상정변으로 숙순 등 보정대신들을 제거할 때 태후들이 조서를 내려 보군통령으로 임명되어서 북경의 군사력을 장악함으로써 보정대신들을 체포한 덕에 동치 연간 내내 서태후의 신임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혁현은 부인이 서태후의 여동생이었기에 서태후는 혁현의 형수이자 처형이었는데, 동치제가 후사 없이 요절하자 서태후는 차마 공친왕의 아들을 데려올 수는 없다는 의도로 자신에게는 조카인 4살짜리 어린아이인 재첨을 양자로 뺏어와서 광서제로 즉위시킨다. 허나 이는 평범한 사촌 간 입양이라기엔 상당히 부적절했다. 종법상으로도, 인정상으로도 자신의 외아들이 죽었으니 동생의 외아들을 뺏어오는[11] 무례한 행동이었다. 이를 통보받은 혁현은 서태후의 권력욕을 체감하며 통곡하다 실신을 할 정도로 충격에 빠졌다. 이후로도 혁현은 광서 연간 내내 서태후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의 안위를 지키는데에 골몰하며 서태후의 예스맨이 된다. 유일하게 서태후를 제지할 수 있었던 동태후마저 의문사하자 더욱 넙죽 엎드리며 서태후에게 설설 기었던 혁현은 명목상으로는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전멸하며 혁흔이 총리아문과 군기처 직책에서 물러나자 군기대신이 되며 정계의 전면에 나섰으나, 실상은 아들을 인질로 잡아간 서태후가 시키는대로 행동해야 하는 방탄대신에 불과했다. 혁현은 물론 재풍보다 어린 다른 친가 동생들인 재순, 재도도 기껏 외국에 유학 갔다와서 해군대신, 양황기 몽고도통[12]에 앉혀줬건만 유폐된 큰형에게는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평범한 방계 황족으로 잘 먹고 잘 살 것만 같던 재첨에게서 서태후의 꼭두각시로서의 불행한 삶이 시작되었다.
2.2. 꼭두각시 황제
1881년, 동태후가 석연찮은 이유로 사망하면서 독살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순현친왕은 아들이 동태후랑 똑같은 신세가 될라 바짝 쫄아서 북양 해군 지휘권을 1885년에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891년에 죽을 때까지 서태후의 비위를 계속 맞추었다. 심지어는 동태후의 사망 이후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앞장서서 처형에게 섭정 노릇을 계속해달라 부탁하여 서태후가 마지못한 척 권력을 유지했을 정도. 서태후는 그런 혁현을 시켜 동태후와 공친왕이 뜯어말리던 원명원 재건은 못하지만 청조의 위상을 다시 세운다고 이화원 건립에 나섰다.물론 혁현도 나름대로 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인물이었기에 이홍장에게 힘을 실어주어 1885년 11월, 독일로부터 정원과 진원을 입수하여 청불전쟁 중 박살난 복건함대를 대신하여 북양함대를 증강하는 등 대대적인 건함경쟁에 나섰다. 북양함대의 위세를 과시하는 과정에서 나가사키 청국수병 폭동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3. 청일 전쟁
1890년대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힘을 키우고 아시아 유일 열강으로 떠오르며 기존의 중화 중심 질서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온갖 애를 쓰고 있었다. 이와중에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청나라와 일본은 각각 반란을 진압해준다는 명분으로 조선 내부로 들어왔다. 조선 조정과 동학군은 외세 침략을 막기 위하여 전주 화약을 맺었으나, 청나라와 일본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고 계속 조선에 주둔했다.일본은 점차 조선을 먹어버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경복궁을 점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에 선제 공격을 퍼부으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기만 서구식이었지 훈련과 기강은 바닥이었던 청나라 군대는 대대적인 근대화를 거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1894년 6월부터 1895년 5월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은 이홍장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 條約)을 끝으로 청의 완패로 끝났다. 청은 일본에게 1년 예산의 2.5배나 되는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 섬과 펑후(澎湖) 섬, 요동 등을 할양했다. 특히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심혈을 들여 키워온 북양함대가 전멸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양무 운동이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청일 전쟁의 패배는 청나라 조정과 국민들에게 단순히 승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서양 열강들에게 당했던 것은 듣도보도 못한 서구 오랑캐들에게 역습당한 것이라고 치더라도, 전통적으로 중국이 해적 근거지 정도로 취급해오던 일본 따위에게까지 패했다는 것이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심각하게 개혁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한편 한족이 대다수인 국민들의 민심은 갈수록 들끓어만 갔다.
2.4. 변법자강운동
2.5. 무술정변
위안스카이는 서태후에게 광서제가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밀어내려 한다며 밀고한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변법자강운동은 좌절되었고,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이 서태후에게서 전권을 받아 변법파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변법자강 운동의 주도자인 담사동은 그의 동료 5명과 함께 처형되었고,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은 국외로 망명했다. 광서제도 무사하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자금성에 유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를 일컬어 무술정변, 100일 천하라고 한다. 즉, 아래에 나오는 1898년 이후 광서제의 업적은 모두 서태후가 결정하고 집행한 사안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서태후는 아예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보국공 아이신기오로 푸쥔을 새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보경(保慶)이라는 새 연호까지 정했으나, 이홍장 등 원로 대신들이 목숨을 걸고 말린데다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광서제를 폐위시키지는 못했다.
2.6. 의화단 운동
상황이 이렇게 되고 세계 최고라고만 생각했던 청나라가 계속 서구 세력들에게 털리기만 하자 청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서구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고 만다. 결국 이같은 반감은 대대적인 폭동으로 터져나왔고, 민중들은 닥치는 대로 백인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사관을 포위하여 잔인한 방법으로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을 살해하였으며, 단순한 상인들도 잡아 학살하고는 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를 믿는 같은 중국인조차 한패로 취급, 모두 잡아죽였다. 이때 서양 선교사 188명에 중국인 45,000여 명이 죽었는데, 이를 의화단 운동이라고 칭한다.중국인들이 서양인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족치자, 분노한 서구 세력들은 연합국을 결성하여 중국과 전쟁을 할 것을 다짐한다. 이 와중에 서태후는 의화단 세력과 힘을 합쳐 서구를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들의 만행을 암묵적으로 묵인해주었다. 청나라는 1900년 6월 21일에 서구 세력들과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서구 세력들은[14] 이에 대항하여 48,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8개국 연합군의 공격에 청나라가 연전연패하자 광서제는 베이징에 남아 서구 세력과 협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이럴 경우 황제가 다시 실권을 잡을 것을 우려한 서태후에 의해 반강제로 시안으로 피신한다.[15] 결국 선전포고 후 두 달도 되지 않은 그 해 8월에 화친 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전쟁으로 청나라는 호구를 넘어 아예 반쯤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고 서구 세력은 중국에 대한 침탈을 점점 더 가속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1년, 열강 연합군과 의화단에 협력한 청나라 정부 사이에 신축조약이 성립되었고, 광서제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서태후는 광서제의 유폐를 여전히 풀어주지 않았고 광서제의 괴로운 감금 생활은 계속되었다.
2.7. 광서신정
신축조약으로 사실상 청 왕조는 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권력을 잡은 서태후와 보수파 대신들은 3년 전에 실패로 돌아갔던 개혁을 다시금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를 신정이라 하며 광서제 시기의 신정이라 하여 광서신정이라 부른다.1901년 4월 설치한 독판정무처(督辦政務處)를 중심으로 각종 개혁들을 내세우게 되는데 우선 헌법 편찬 작업에 나서 각국의 헌법을 연구하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07년에는 의회성격을 지닌 자정원이 설치가 되었고, 1908년 8월 《흠정 헌법 대강》이 반포된다. 여기에는 제한적이나마 삼권 분립의 원칙이나 언론 저작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보장되는 근대적인 내용들이 많이 담기게 되었다. 또한 지방자치를 위해 자의국을 설치하기도 한다.
재정 개혁으로는 상공업 진흥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식산흥업 정책을 펼쳤으며, 교육 개혁으로는 1905년에 과거제를 폐지시키고 서양식 학교 제도를 받아들이는 근대식 신식 교육을 시행, 군사 개혁에서는 기존의 군 체제를 개편하여 육군과 해군을 설치하는 등 신식 군대를 양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신정은 1908년 광서제가 사망하고, 서태후 또한 곧바로 죽게 되자 사실상 개혁의 주체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이후 각종 혼란이 발생하게 되어 청 왕조는 무너진다.
2.8. 사망
1908년, 광서제는 37세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급사를 두고 청나라 정부는 광서제가 오랫동안 앓아왔던 지병[16] 때문에 사망했다고 공식발표했지만 사망 당시부터 독살설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사망 후 100년째가 된 2008년에 중국에서 광서제의 능을 공식적으로 발굴해 광서제의 유골과 머리카락 일부를 X선 투과법으로 조사해 본 결과 다량의 비소 성분이 발견되어 독살을 당했음이 확정되었다. 독살의 배후로는 서태후나 위안스카이가 유력한데, 당시 서태후가 고령에다 건강도 나빴으며 이질에 걸려 오늘내일 하는 몸이었고 애초에 건강이 나빠지기 전부터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또 황제를 살해하는 것은 본인의 권위와 정치적 안정성조차 무너뜨리는 팀킬이라는 점 때문에 광서제에게 독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고 보고 위안스카이를 의심하는 편이다. 다만 이 때 독살당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얼마 가지 않아 죽는 건 확정이었다.선통제의 영어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은 1930년대에 저술한 저서 《자금성의 황혼》에서도 광서제의 독살설을 강하게 지지했다. 존스턴 역시 서태후보다는 서태후 이외의 인물이 독살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서태후의 명을 받고 광서제를 감금했던 환관들이 만약 서태후가 사망한 이후 다시 권력을 되찾은 광서제가 자기를 감금시켰던 자신들에게 복수할까봐 먼저 선수를 쳐서 독살하지 않았을까?"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같은 책에서 존스턴은 광서제가 유폐되어 있던 별궁의 옥란당이 매우 좁았으며[17] 이는 "서태후가 광서제를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어 왔음을 알 수 있게 한다."고 기술한다.
어쨌든 광서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광서제의 3살짜리 조카 푸이[18]를 다음 황제로 지목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다. 그러나 광서제가 죽은 지 이틀 만에 서태후도 죽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어린 아이를[19] 황제에 앉히고 계속 수렴청정을 할 생각이었으나 갑자기 죽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전술했듯이 당시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염두에 둘 정도로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 아마 본인의 죽음을 예감했을 터이다. 게다가 항렬의 순서대로 계승권을 부여하는 법도에 따르면 오히려 순친왕 재풍이 아닌 푸이를 즉위시킴이 맞는 행동이었다.[20] 물론 광서제가 37세에 요절한 것은 광서제를 독살한 장본인이 서태후인지 위안스카이인지를 막론하고 서태후 본인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광서제의 후임자로 나이 어린 황족이 즉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또한 서태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사실상 서태후가 만들어낸 셈이다.
광서제는 붕어한 후 숭릉(崇陵)에 안장되었다. 후임 황제 선통제는 묘호[21]도 비공식적으로 받았으므로,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묘호를 받고 황릉에 안장된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가 마지막이다.
광서제의 재위기간은 조선 및 대한제국의 고종(高宗)(재위기간: 1864년 ~ 1907년)과 순종(純宗)(재위기간: 1907년 ~ 1910년)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3. 평가
서태후 때문에 대국의 황제라기엔 삶이 불행했던 인물이다. 무려 34년 간 청나라의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37년의 짧은 인생을 살고 요절했다. 특히 모든 것을 서태후에게 통제당하며 산 데다 황제가 되었어도 실권을 서태후한테 거진 다 빼앗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변법자강운동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자 여생을 갇혀 살다가 나중에는 독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게다가 그가 즉위할 때 그나마 눈꼽만큼이라도 가망이 있었던 청나라는 그가 죽을 무렵에는 사실상 멸망 직전에 놓였다. 광서(光緒), 즉 빛나는 후계라는 연호가 무색하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 등을 보면 결코 의지가 없진 않았으며, 당대의 평가를 보면 총명하고 당시 정세 파악도 정확히 하는 등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꼭두각시여도 향락에만 빠진 동치제와 다른 점은 그 부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청나라 개혁의 의지 때문에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 그래서 청국의 마지막 명운을 지키려던 광서제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들도 많다.물론 변법자강운동이 완벽한 근대화의 성공을 보장할 순 없었겠지만, 적어도 청나라 황실 지지 입장에서 보면 "청나라의 멸망을 늦추고 최소한 신해혁명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강력한 보수파의 거두인 서태후가 살아있는 한, 청나라의 근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또한 서태후가 찬성했다고 쳐도 비슷하게 비유되는 갑신정변이 그렇듯,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서태후가 처음엔 지지했지만, 이후 철회한 것도 이런 무리한 개혁의 위험성과 실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다민족에다 당시 수억 인구와 넓은 영토를 자랑한 청나라라면 그 위험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또 개혁을 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살아남기 어려웠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며, 실권자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강제로 군주가 되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고 요절했다는 점에서 청나라판 철종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강한 개혁의 의지를 가졌지만 외세의 침탈과 이미 망조가 든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종도 많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재미있는 점은 광서제와 고종은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며 또한 각 왕가 내에서의 항렬자가 한자까지 같은 재(載)자라는 것이다. 다만 고종은 본인이 주도하여 나라를 말아먹기도 했고, 또 그 나라를 되찾으려고 뭔가 하려고도 했다는 점에서 행동력이 있었으므로 완전한 동일선상에 두기는 어렵다.
4. 여담
광서제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황제였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압박 때문에 그녀의 조카인 효정경황후(융유황태후) 예허나라씨(隆裕皇后 葉赫那拉氏)[22]와 결혼해야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는데 광서제는 고집 세고 성격도 나쁜 황후를 싫어해서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애정을 주지 않았다. 특히 융유황후는 후비들을 괴롭히고 남편인 광서제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기에 광서제가 더욱 미워했다. 서태후를 모셨던 궁녀의 증언에 따르면, 문안 인사를 온 황후가 이제 나가보라는 광서제의 말을 듣고도 침전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격노한 광서제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침전 밖으로 끌어냈을 정도였는데, 이게 광서제가 붕어하기 10일 전의 일이었다.진비 |
광서제는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열강 연합군이 베이징을 습격할 때 잠시 시안(西安)으로 탈출했지만, 그 사이에 진비가 서태후에게 살해된다. 이때 진비 역시 유폐되어 있었는데, 서태후는 진비를 죽일 생각으로 "너무 예뻐서 함께 탈출하다가 외적에게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진비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일설에는 진비가 황제를 자금성에 남겨 연합군과 협상을 통해 서태후 일당을 일소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를 우려한 서태후가 "너 먼저 우물에 빠지면 나도 따라서 빠지 마"라고 설득한 다음 유유히 피난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며 설득하기는커녕 진비가 자살 강요를 거부하자 빡친 서태후가 쟤 죽여버리라며 고함을 지르자 반항하는 진비를 환관 최옥귀가 강제로 우물에 밀어넣어 죽였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향년 24세였다. 후일 서태후는 뻔뻔하게도 "내가 화낸 건 맞지만 죽이라고 했던 건 아닙니다"라며 딱 잡아뗀 뒤, 최옥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고 정작 최옥귀는 처벌하지 않고 그를 출궁시키는 것으로 끝냈다. 진비의 가족들이 슬퍼하며 우물에서 그녀의 시신을 건져올릴 때도 광서제는 유폐당한 신세라서 차마 나타나지 못했다. 광서제의 시종이 현장에서 진비가 생전에 썼던 낡은 휘장 하나를 슬쩍 가져와서 그에게 갖다주었을 때 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광서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한다.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제일 유명한 유물 중 하나인 취옥백채가 광서제의 결혼 때 혼수품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만 국립고궁박물원 측에서는 해당 전설을 소개하면서도 청조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며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청나라 황제 중 선통제와 함께 사진을 찍은 황제다. 문서 최상단의 가마에서 내리는 사진을 포함해 꽤 사진자료가 남아있는 편이지만 아쉽게도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광서제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인정받은 사진은 가마에서 내리는 사진 딱 한장 뿐이다.#
레지널드 존스턴의 《자금성의 황혼》에 나온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자료이다. 출처를 참고하면 사진 아래에 '광서황제형상'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마찬가지로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자료로, 미국 유타 주 오그던(Ogden)에서 1894년부터 1907년까지 판매된 담배 카드(Ogden's 'Guinea Gold' Cigarette Cards) 등에서 광서제의 것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해당 카드에서는 앉아 있는 인물이 아닌 좌측의 어린 인물을 광서제로 적시하였다. 어린 광서제 옆에 앉아있는 인물은 광서제의 친부인 순현친왕 혁현이라고 한다. 출처 허나 "이 사진이 광서제일 리 없다."는 지적도 있는데, 3세에 즉위해서 어린 아이였던 시절에도 광서제는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황제였다. "아무리 부자 간의 정과 의리가 있다고 하나 감히 친왕만 앉고 황제를 세워둔 채 사진을 찍을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사진을 본 푸이는 이것이 광서제의 사진이 아니라 혁현의 둘째 아들인 자신의 부친, 즉 2대 순친왕 재풍과 찍은 사진이라 지적하였다고 한다.
1902년 1월 8일 프랑스 출신 기자가 가마에서 내리는 광서제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으며 현재까지는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광서제의 모습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면에서 찍은 사진은 아니기 때문에 광서제의 얼굴은 초상화로만 알 수 있다.
37세에 안타깝게 요절한 것 때문에, 전형적인 전근대 중국 황제 이미지로 기억되는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26] 마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전형적인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이미지로 기억되는 마지막 인물이고 잔 다르크가 중세 프랑스 왕국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마지막 인물인 것과도 비슷하다.[27] 만약 그가 천수를 누렸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봤을 수도 있으며, 변수에 따라서는 말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나 냉전에 휘말리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28]
5. 창작물에서
- <신 중화일미> 애니메이션에서는 고증에 맞지 않게 상당한 뚱뚱보에, 복식도 이전의 한족 왕조의 황제들이 입었던 한푸, 정확히는 곤복과 비슷한 옷과 면류관의 차림으로 등장한다. 청나라 황제 복식보다는 차라리 선조격 국가인 금나라[29]의 황제 복식에 더 가까운 스타일이다.
- 《천공의 옥좌》에서는 가상의 나라 덕나라의 황제가 나오는데, 황태후의 양자가 되어 황제가 되고, 충신들과 같이 황태후를 내치려다 주인공의 오라버니(= 환관)가 결정적인 상황에서 배신을 하여 결국 유폐[30] + 강제결혼[31]까지 하고, 그 여파로 자유롭지 못하다. 광서제의 나라와 이름, 성씨, 태어난 과정 그리고 어이없게도 허수아비인 상태라도 "국정 최종 결정자"이지만 의협 일지매로 나오면서 백성을 구하는 일을 제외하면 전개 과정은 광서제와 똑같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강남에서 올라온 백만인소를 읽고 각성하여 의회를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으로 손덕명과 원세개를 등용하여 친정에 나섰다. 하지만 청이 계속 '천조'로 남을 수 있게 무력을 동원하여 급히 변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토지개혁 때문에 외번과 강남의 민심이 요동쳤고, 권력에 취한 원세개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금성에 유폐되는 신세가 됐다. 조선의 개입으로 쿠데타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조바심과 편벽된 마음 때문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황권을 공화정부에게 이양하였고, 주나라 이후 중원이 수천년간 고집했던 천조질서가 소멸했음을 선언했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타타라씨가 낳은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고 자신의 손자가 또 그 다음 황제가 되는 등 원 역사보다 월등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 자세한 내용은 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문서 참조.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의화단 운동 당시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사로잡혀 서경으로 끌려가다 9개국 연합군의 일원이던 대한제국군에게 구출되어 자유를 되찾는다. 이후 서태후는 정치적 개입을 완전히 포기하는 조건으로 북경으로 돌아오고 유폐된다. 이를 기점으로 친한 군주로서 변법자강운동을 재개한다. 1907년 현재 헌법을 반포하고 입헌군주제 선언을 준비하고 있으나 혁명은 피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주인공인 이선의 변경 분리 계획의 일부로서 만주로 물러나 나라와 황실은 보존할 수 있을 듯 하다. 주인공을 존경하여 이선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 2010년 드라마 <창궁지묘>에 등장한다.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살다가 독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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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권 「장훈등전(張勳等傳)」 474권 「오삼계등전(吳三桂等傳)」 475권 「홍수전전(洪秀全傳)」 장훈 · 강유위 오삼계 · 경정충 · 상지신 · 손연령 홍수전 476·477·478·479권 「순리전(循吏傳)」 백등명 ,탕가상 임진단 우종요, · 송필달 · 육재신 · 장목 ,장훈(張塤), · 진여함 · 목수 ,진시림, · 요문섭 ,황정린, · 낙종린 ,최종태 조진조, · 조길사 · 장근 · 강고 ,장극억 가박, · 소사요 ,위입정 고음작 근양, · 최화 · 주중횡 · 유계 · 도원순 · 요기형 · 동국롱 · 육사 · 공감 · 진덕영 · 예복전 · 장림 · 염요희 · 남정원 · 엽신 · 시초정 · 진경문 · 주인룡 · 동화 · 이위 · 사중훈 · 이대본 · 우운진 · 장견도 · 소대업 · 주극개 ,정기 강기연 언여사 주제화, · 왕휘조 ,여돈화 주휴도, · 유대신 · 오환채 · 기대규 · 소희증 · 장길안 ,이육창, · 공경한 · 개방필 · 사소등 · 이갱예 · 이병수 · 적상경 · 장돈인 · 정돈윤 · 이문경 · 유체중 ,유후, · 장기 ,석가소, · 유형 ,서동, · 요간지 · 오균 · 왕조겸 · 조근 · 계초만 · 장작남 · 운무기 · 서대영 · 우수매 · 하왈유 · 오응연 · 유병림 ,진숭지 하자령 소세본, · 이병도 ,유주 주근인 추종준 왕무훈, · 괴덕모 · 임달천 · 방대제 · 진호 · 양영서 · 임계 · 왕인복 · 주광제 · 냉정형 · 손보전 · 가소경 · 도관준 · 진문불 · 이소 · 장해 · 왕인감 480·481·482·483권 「유림전(儒林傳)」 손봉기 · 황종희 · 왕부지 · 이옹 · 심국모 · 사문존 · 고유 · 탕지기 · 육세의 · 심윤 · 응휘겸 · 주학령 · 심호정 · 백환채 · 호승락 · 조본영 · 유원록 · 안원 · 이공 · 조포 · 이내장 · 이광파 · 장형양 · 왕무굉 · 이몽기 · 호방 · 노사 · 고동고 · 맹초연 · 왕불 · 요학상 · 당감 · 오가빈 · 유희재 · 주차기 · 성유 · 소의진 · 고염무 · 장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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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1cm는 학자들의 연구결과고 164cm는 유골 조사의 키이다. 그러나 키에 대한 정보가 차이가 있는데 사진을 보면 광서제의 키는 160cm대 초반에서 160cm대 중반으로 보인다.[2] Badarɣultu Törö. 현대 몽골어로 Бадаргуулт төр хаан (Badarguult Tör Khaan)[3] 프랑스인이 찍었으며 현재까지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광서제의 모습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4] 한 항렬에서는 황제도 1명만 나올 수 있다는 원칙이다. 지금까지 청나라 황가는 부자 직계 세습으로만 이루어져 문제가 없었으나, 사촌형 동치제의 항렬이 '재'자 항렬인 '재순'이라 같은 항렬자의 '재첨'은 원칙대로라면 제위를 이을 수 없었다.[5] 이게 광서제의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진이 아니고 초상화이며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은것이다.[6] 사실 1~2대로 단명한 왕조들을 제외하면 그 어떤 왕조에서도 이루지 못한 원칙이다. 정종-태종, 경종-영조 사례가 있는 조선은 물론 바로 전 왕조인 명나라도 정덕제 사후 사촌동생인 가정제가 물려받음으로서 깨졌다.[7] 1874~1922. 참고로 먼 친척 할아버지인 혁광과 그의 아들 재진과 친한 사이로 이 사람 역시 경친왕 라인을 타고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선통제 즉위 후 경친왕 내각에서 상부대신(호부상서)를 맡게 된다. 허나 이 내각의 대다수가 황족과 만주족(경친왕과 부룬 외에도 선통제의 숙부인 재순, 유각군왕 윤우의 5대손인(이자 서태후의 조카사위이며 선통제의 이모부)보국공 재택, 숙친왕 선기 등이다. 참고로 선기와 재택은 청조 멸망 후 만몽독립운동에 참여한다.)인 관계로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신해혁명 당시 위안스카이에게 동조하여 선통제의 퇴위를 주장한다.[8] 만약 이렇게 되었으면 영성의 친모인 숙가황귀비 김가씨가 정묘호란 전후로 만주족에 귀화한 조선인의 후손이었으므로 희미하게나마 조선 혈통이 이어지는 청나라 황제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계승 원칙대로라면 동치제의 아랫항렬에 해당하는 황족이 계승해야 했지만 그 항렬의 황족은 가장 가까운 황족도 혈연상으로 동치제의 9촌이라, 다들 촌수가 멀어 차선책으로 같은 항렬의 황족을 물색하게 되었다.[9] 도광제의 1~3남은 요절하여 친아들이 없었고, 5남 돈근친왕은 아들이 많았지만 가경제의 3남인 돈각친왕 면개의 양자로 들어가서 족보상으로는 도광제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함풍제는 4남), 이들을 모두 제외하면 공친왕이 도광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10] 서태후는 동치제와 함께 자금성에서 자라던 시절부터 재형을 진심으로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형을 혁합의 후사로 출계시키는 입양을 주도한 것도 서태후였는데 정작 혁흔의 사후 터진 의화단의 난 때 서안으로 몽진하면서 서태후는 가만히 있던 재형의 작위를 빼앗기로 결정, 재형은 혁합의 양자로서 얻은 버이러 작위를 박탈당하고 파양까지 당하고 말았다. 쉽게 말해 모든 의전을 박탈하고 공왕부의 뒷방 짐덩이 신세로 만든 것. 재형의 아들 부위가 공왕작을 계승하긴 했는데 이조차도 재형의 아들이 아닌 후사 없이 요절한 재징의 양자로서 계승케 한 것이라 의전상으로 재형에겐 별 예우도 없었다. 이후 혁합의 가문은 재형이 아닌 황7자 혁현의 아들 재도가 계승하게 된다.[11] 혁현의 첫 아들은 요절했고, 재첨을 양자로 뺏긴 뒤 낳은 3, 4남도 요절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잘 키워낸 5남이 바로 부의의 친아버지인 재풍.[12] 재도는 승마덕후여서 프랑스에서 배워온 군사학도 기병전을 중심으로 공부했고, 덕분에 청나라의 마지막 남은 기병 전력인 몽골 기병대의 수장이 되었다. 물론 밀덕한테 실권을 쥐어준다고 잘할리는 없었다.[13] 이 운동은 1898년(무술년)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14] 대영제국, 영국령 호주, 영국령 인도, 미국, 독일 제국, 프랑스 공화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15] 서태후는 무술정변 후 광서제를 폐위시킬 생각도 했으나 서구 열강의 반발로 인해 무위에 그쳤던 적이 있기에, 황제와 서구가 유착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16] 실제로 광서제는 몸이 약해서 그와 관련된 처방이 182가지에 달할 정도로 잔병이 잦았다.[17] 광서제가 생활 공간으로 쓸 수 있었던 알현실과 침실 2개가 있었고 침실은 동서로 12피트 3인치 혹은 3.7미터, 남북으로 16피트 8인치 5.1미터에 불과했다. 그 외에도 알현실에 연결된 방이 2개가 더 있으나 그 방안의 벽을 따라서 벽돌 담에 ㅁ자로 쌓여 있어서 사용 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18]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 재풍의 아들[19] 푸이의 생부 순친왕은 1951년까지 살았다.[20] 더군다나 광서제의 다른 조카들도 모두 어렸기 때문에(가장 나이가 많았던 푸궁이 1904년생) 계승 원칙을 지키려면 어린 황제를 세우는 선택지밖에 없었다.[21]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憲宗)이라는 묘호를, 2004년에는 공종(恭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헌릉이다.[22] 1868년 ~ 1913년. 본명은 예허나라 징펀(葉赫那拉 靜芬). 서태후의 조카로, 광서제에게는 사촌 누나가 된다. 광서제 사후 태후로 봉해졌고 선통제 때 섭정을 맡았다.[23] 1876년 ~ 1900년. 본명은 타타라 서설(他他拉 瑞雪).[24] 당시 성차별이 심한 시대인터라 남장을 하는 여성을 좋게 보지 않았다.[25] 당시에는 사진을 찍으려면 20분이나 걸렸고 20분 동안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기에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26] 중국의 마지막 황제는 후임자인 선통제이지만, 이쪽은 전형적인 전근대 중국 황제로서의 삶은 어린 나이에 짧게 경험했고 이후에는 불안정하게나마 근현대적인 삶을 살았다.[27]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 '둘 다 요절했다'는 것이다.[28] 동갑인 인물들 중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1941년까지,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1956년까지 살았다.[29] 정확히는 금희종 치세부터...[30] 오늘날의 자금성 중난하이[31] 당연히 아내가 될 사람은 황태후 쪽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