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淸史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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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벽 청나라 의정대신 | ||
정체 | 張勳 | |
간체 | 张勋 | |
한국식 독음 | 장훈 | |
영문 | Zhāng Xūn | |
호 | 송수노인(松壽老人) | |
자 | 소헌(少軒) | |
시호 | 충무(忠武) | |
출생 | 1854년 9월 16일 청나라 강서성 봉신현 | |
사망 | 1923년 9월 11일 중화민국 톈진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
학력 | 없음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의정대신 재임 기간 | 초대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
1. 개요
청나라의 관료이자 중화민국의 정치인, 군벌. 한국식 독음으론 장훈으로 읽으며 1917년에 선통제를 복위시킨 장훈복벽으로 유명하다. 청나라 최후의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2. 생애
2.1. 유년시절
장씨 가문은 대대로 강서성 봉신현 남쪽의 적전촌에 살았는데, 장쉰은 음력 1854년 10월 25일 오전 9시~11시 사이에 태어났다. 1861년 태평천국군이 적전촌까지 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난갔지만 장쉰의 할아버지는 피난가지 않았는데 태평천국군은 장쉰의 할아버지 곤일공을 잡아 부자들의 집을 지목할 것을 요구했다. 그가 거부하자 태평천국군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때려죽였고 충격을 받은 장쉰의 어머니 위씨가 사망했다. 장쉰은 1864년 학교에 들어갔으며 1865년 장쉰의 아버지인 연임공이 사망하였고 계모 온씨까지 잇달아 죽었다. 이 때문에 장쉰은 이복동생 장계구와 함께 유리걸식하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1881년 10월 조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복건성과 호남성을 전전했다.2.2. 군문에 들다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장쉰은 호남순무 반정신의 군대에 참여하여 전쟁에서 공을 세워 육품 품계를 받았다. 그는 진남관을 통과하여 5월 관음산에서 프랑스군과 싸웠고 8월 지금의 쑤저우에 해당하는 선두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에 반정신과 양광총독 장문양, 광서제독 소원춘은 장쉰에게 공작새 깃털로 만든 모자 장식인 화령을 하사하고 명예 대위 계급장[1]을 붙인 중위[2]로 승진시켰다. 1885년 장쉰은 문연주와 랑손, 장경, 양강에을 점령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고 이에 그는 소령(유격)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광무우군에서 청불국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아 5년을 근무했고 다시 대령(부장) 대우의 중령(참장)으로 승진했다.그러던 중 1893년 호북에 여행을 갔다가 아내가 출산 중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고 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자 사천 제독 송경의 부탁에 따라 만주 의군에 합류하여 1894년 8월 봉천으로 달려갔다. 그는 선봉 사단의 기병대장이 되었는데 호아산을 점령하여 압록강을 장악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응으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나자 장쉰은 베이징으로 떠났다. 1895년 태복시경 천춘쉬안의 부름에 따라 그는 산동의 방어군 지휘관을 맡기로 되었으나 천춘쉬안과 산동순무의 권력다툼 때문에 장쉰은 이를 거절하고 천진으로 떠났다. 거기서 장쉰은 절강성 온주 도대 위안스카이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신건육군을 훈련시키던 위안스카이는 장쉰에게 선봉대 고관 자리를 주었고 공병대와 예비대 관대로 임명하여 중용했다.
2.3. 승진가도
신식제복을 입은 장쉰 |
그러다가 1900년 5월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는 휘하의 무위우군을 데리고 이를 진압하려 출병했다. 장쉰은 선봉대 지휘관이 되었으며 교통로를 보호하는 임무도 맡았다. 장쉰은 해풍에서 의화단원을 격파하고 양신, 빈주, 포대, 이진에서도 잇달아 승리하여 장쉰이 맡은 구역에선 의화단 세력이 일소되었다 한다. 1900년 8월 북양대신 이홍장은 위안스카이에게 직예성 동남부를 의화단에게서 구하라고 명령했고 위안스카이는 장쉰에게 기병, 보병, 포병대대 총지휘권을 맡겨 반란군 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장쉰은 염산, 흑우왕장에서 승리하여 창주까지 진격하였고 무위우군 1보병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1901년 황하가 범람하여 혜민현 오양가의 제방이 터지자 장쉰은 4개월 동안 제방을 수리했다. 그가 무위우군을 훈련시킨지 3년이 지나자 군기대신 영록이 그의 승진을 추천하여 장쉰은 대령의 지위에 올랐고 황제는 장쉰에게 '용맹한 바투르'라는 만주어 칭호를 하사했다.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이 되자 장쉰도 그를 따라 바오딩에 부임했고 11월 14일 황제를 직접 알현하고 자금성 단문 경호의 임무를 맡았다. 1902년 그는 황제의 동릉 행차를 호종하여 기병과 보병 의장대를 통솔했고 1902년 8월 사천성 건창 총병에 임명되었으나 금위군 임무 때문에 부임하진 않았다. 1903년 3월 서릉 행차를 수행하고 윤 5월에 "선봉 기병대를 재조직하여 만리장성 밖의 보안부대와 야전부대를 개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장쉰은 거용관을 넘어 대동과 선화의 마적부대들을 토벌했다. 1904년 그는 황제의 특별명령으로 1계급 승진했고 파투룽아 바투루의 칭호를 받았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몽골 초원 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고 돌아온 후 국경지방 방비계획을 위안스카이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1906년 위안스카이는 장쉰을 펑톈에 보냈고 조이손 장군은 장쉰을 성경성(지금의 요녕성) 북부의 봉천군사령관에 임명했다. 장쉰은 창도에 사령부를 두고 후방, 우익의 보병과 기병을 지휘했다. 같은해 황제가 장쉰의 금위군 시절의 공적을 치하하여 최고위 훈장을 수여했고 다시 장쉰은 제독으로 승진했다. 1906년 4월 쉬스창이 동삼성[3] 총독이 되었는데 그는 행영익장과 만주 주둔 방어군의 재편을 장쉰에게 맡길 것을 황제에게 상주했고 이에 따라 길림성의 장쉰은 영고탑과 봉밀산을 시찰하고 흑룡강성의 수화를 시찰하였다. 그는 목단강 부근의 마적단을 섬멸하고 마적단에 사로잡힌 중국인, 일본인, 러시아인들을 구출했다. 1908년 그는 운남성 제독에 임명되었으나 "북부에 머물며 직예와 봉천의 군대를 지휘하라"는 칙명을 받았고 동시에 황마괘를 받았다. 그의 운남제독 지위는 곧 감숙제독으로 교체되었으며, 1908년 9월 그는 베이징에서 황제 탄신일을 기념하는 경극에 참석하는 영예를 받았다.
1909년 선통제가 즉위하자 쉬스창은 동삼성총독에서 다시 군기대신이 되었고 후임으로 석량이 동삼성총독이 되었는데 장쉰은 석량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쉬스창과 함께 북경으로 떠났다. 석량은 장훈에게 돌아올 것을 명령했으나 그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벌줄 것을 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에 서태후가 죽자 그는 동릉까지 호위군을 거느리고 장례식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고 운구가 끝난 후 융유태후에게 귀비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장례식이 다 끝나자 그는 숙기청분이라는 친필 두루마리를 태후에게 하사받았다.
2.4. 신해혁명
1910년 10월 장쉰은 장강 방어군 사령관이 되어 포구에 총사령부를 두고 장강 연안의 방어를 맡았는데 황제에게 직접 상주할 권리도 받았다. 1911년 7월 그는 강남제독이 되었다. 그런데 1911년 8월 신해혁명이 터지면서 청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장쉰은 맨 처음 봉기가 일어난 무창을 진압하려 했으나 무창으로 출병할 허락을 받지 못해 무산되었다. 혁명은 쑤저우로 확대되었고 다시 전국에 퍼졌다. 양강총독과 만주족 지휘관들이 장쉰과 만나 싸울 것인지 남아 지킬 것인지를 의논했다. 난징의 모든 문무관원은 신해혁명의 폭발력에 겁에 질려 있었고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쉰은 양강총독 등을 꾸짖으며 백기를 걸면 비록 동료지만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소리쳤고 이에 양강총독과 지휘관들은 모조리 달아났다. 다음날 9여단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쉰은 이들을 추격하여 공격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규모는 갈수록 거대해졌고 장쉰은 식량이 떨어지고 원군도 없어 지연전을 펼치며 장강 북부로 퇴각했다.1911년 9월 장쉰은 강소순무에 임명되었고 임시 양강총독 겸 임시 남양대신이 되었으며 2등 세습 귀족 지위인 경기도위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청조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는 것이라서 12월에 공화국 선포와 더불어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선통제는 1912년 2월에 퇴위했다.[4] 전투 중인 모든 부대는 무기를 버리고 공익을 위해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부대들도 황제에게 충성한다면 더 이상 싸우지 말란 명령이 내려오자 장쉰도 언젠가 복벽이 이루어질 것이라 곱씹으며 전투를 중지했다. 그 휘하의 장강 방어군은 국방군 선봉대, 즉 무위전군이 되었으며 장쉰은 직예, 산동, 하남의 반란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장쉰은 반란을 토벌하지 않고 부대를 연주로 이동시켰다. 1912년 4월 쉬스창이 전문렬과 함께 장쉰을 찾아 양강총독직을 폐지하고 양홍기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위안스카이의 뜻을 전했다. 이에 장쉰은 이렇게 대답했다.
"원공의 깊은 은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황제 폐하에 대한 신하로서의 의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원공이 조정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제가 원공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1913년 정월 위안스카이는 융우태후와 선통제를 이화원으로 옮기려 했는데 이에 장쉰이 크게 반발하여 위안스카이의 결정을 철회시켰다. 얼마 후 융우태후가 사망하자 장쉰은 국장과 복상을 요구했으며 자신도 지역 명사. 상인, 군인, 시민들을 거느리고 추모식을 거행했다. 구체제의 붕괴로 공자에 대한 제사 폐지 운동이 벌어지자 폭도들이 산동성 곡부의 공자 사당의 나무를 베고 제기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장쉰은 군사를 파견하여 제기를 지켰다. 이후 정부가 공자묘의 제전을 몰수하고 연성공에게 세습되는 수입을 빼앗아 연금으로 대체하자고 하자 장쉰은 이 역시 결사반대하여 철회시켰다. 장쉰은 이를 성인의 영험함의 덕분이며 자신이 그 대리인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913년 6월 황홍이 강녕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냉휼이 서주를 점령하여 북부를 침공하자 장쉰은 냉휼의 군대를 이랑산에서 패퇴시키고 서주를 탈환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장쉰을 육군대장 즉 상장으로 승진시키고 강북진무사 자리를 주었다. 1913년 7월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장쉰은 청강과 양주 사이 전 지역에 걸친 1,000여리의 반란군을 모조리 토벌했다. 장쉰은 진강을 점령하고 난징까지 진격하여 격전 끝에 8월 초 난징을 점령했다. 이에 장쉰에게 가화장, 문호장 등의 훈장이 수여되었으나 장쉰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그를 강소도독에 임명하자 장쉰은 군사지휘권을 위해 이를 수락했다. 중국의 반란군이 토벌되고 다시 통일이 이루어지자 장쉰은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이를 반려하고 12월에 그를 장강순열사에 임명했다.
예복을 입은 장쉰 |
1915년 8월 주안회가 활동을 개시하고 중앙정부에서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대해 의견을 구하자 장쉰은 이를 극력반대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끝내 홍헌제제를 단행하고 중화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하려고 했다. 장쉰은 일등 공작 작위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고 황실의 권리와 특전을 승인하고 자금성과 조정을 보호해달란 청원을 올렸으나 무시당했다. 1915년 12월 15일 차이어, 량치차오가 운남에서 호국군을 조직하여 거병했고 이는 전국적인 호국전쟁으로 번졌다. 이때 장쉰은 강소독판 리춘, 진윈펑, 탕향명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하야를 촉구하는 연명 통전을 보냈고 견디지 못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했다. 1916년 3월 장쉰은 순열사 및 안휘독군이 되어 호국군을 토벌하려 했으나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하면서 취소했다.
이후 안휘군벌 돤치루이와 연계하여 안휘성장 겸 안휘독군 니쓰충과 함께 독군단회의를 개최, 대리총통 리위안훙을 핍박하였다.
2.5. 복벽과 사망
그러던 중 장쉰은 1917년 장훈복벽을 일으켜 선통제를 복위시키고 북양대신 겸 내각의정대신, 직예총독에 취임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말년의 장쉰 |
쑨원을 비롯한 혁명당은 물론, 탕지야오 등의 서남군벌들과 돤치루이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면서 장쉰의 변자군은 순식간에 전멸했다. 장쉰은 항복을 거부하고 싸웠지만 결국 패하여 네덜란드 공사가 보낸 자동차를 타고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918년 10월 10일, 쉬스창이 대총통에 취임하면서 장쉰은 사면되었고 1920년 5월에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이주했다. 이후 장쉰은 국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은거하며 통감을 읽고 서예 수련 등을 하며 여생을 보냈고 사업에 투자하여 많은 돈을 벌기도 하였다…는데, 돈을 많이 번 건 사실이지만 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장쉰의 허세이고 실제로 복벽이나 아이신기오로 푸이에 관련된 사건만 터지면 배후에 장쉰이 있다는 소문이 하도 많이 돌아서 그는 죽기 전까지 중국 정치판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이후 장쭤린이 우페이푸, 차오쿤 등의 직예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안직전쟁 이후 장쉰을 여러 요직에 추천하기도 하였으나 직예군벌의 극렬한 반발로 성사되진 못하였다.
이후 청나라 황실에 우호적인 레지널드 존스턴과 교류하며 자신의 자서전인 송수노인 자서전을 그에게 맡겨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송수노인 자서전은 1921년 8월 쓰여졌다. 그는 2명의 아들을 더 낳았고 1923년에 위독해졌다. 그가 죽기 직전에 선통제는 어의를 보내 그에게 처방전을 내렸는데 이에 장쉰이 침상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말하길
"저는 이제 일흔이나 되었습니다. 신해년에 죽어야 했는데 죽지 못했습니다. 정사년에도 죽어야 했는데 살아남았습니다. 지금 너무나 늦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죽는다고 어찌 저의 고통이 끝나겠습니까? 아아! 황은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침상에 다시 들어가 통곡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참을 울고 난 장쉰은 갑자기 병세가 좀 회복되어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나 곧바로 악화되었고 1923년 9월 12일(음력 8월 2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톈진에서 치러졌고, 1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였으며, 4천명 이상이 참석했는데 톈진 역사상 가장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고 한다. 선통제는 장쉰에게 중국 육군 총사령관의 직위와 충무 시호, 호기를 내렸고 30점 가량의 값비싼 선물을 따로 내려 장례식에 쓰게 했다.
3. 여담
청나라가 망한 후에도 변발을 자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1915년 장쉰이 베이징에서 선통제를 알현하고 위안스카이를 방문하자 위안스카이의 부하 중에서 장쉰의 변발을 비웃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에 장쉰은 "내 변발을 자르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나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라고 일갈했고 아무도 그 이후로 장쉰의 변발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장쉰의 부하들도 모두 변발을 자르지 않은 군대였고 그에 따라 변발군, 변자군이라고도 했다.장쉰의 아들 장몽조는 장쭤린의 4녀 장회경과 결혼했으나, 장몽조에게 신경기능 장애가 있어서 부부관계가 좋지 않았고 이 때문에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이후 이혼했다.
4. 매체에서
1988년 드라마 <말대황제>에서는 양보종(楊寶琮)이 장훈으로 분했다.2011년작 건당위업에선 도택여(陶澤如)가 장훈으로 분했다.
2013년 드라마 <말대황제 푸이>에서는 홍콩 배우 서금강이 장훈으로 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