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07:36:08

도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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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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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녀
※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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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8대 황제
도광제 | 道光帝
파일:800px-清_佚名_《清宣宗道光皇帝朝服像》.jpg
출생 1782년 9월 16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자금성 힐방전
(現 베이징시 둥청구)
사망 1850년 2월 25일 (향년 67세)
청나라 직예성 북경 원명원 구주청안전
(現 베이징시 둥청구)
능묘 모릉(慕陵)
재위기간 지친왕
1813년 ~ 1820년 10월 3일
제8대 황제
1820년 10월 3일 ~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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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중국식 : 민닝(旻寧)[1]
만주어 : 민닝(ᠮᡳᠨ ᠨᡳᠩ)
한국식 독음 : 민녕
부모 부황 인종 예황제
모후 효숙예황후
형제자매 5남 9녀 중 2남[2]
배우자 정후 - 효목성황후 뉴호록씨
계후 - 효신성황후 동가씨, 효전성황후 뉴호록씨
후궁
21명 [ 펼치기 · 접기 ]
효정성황후 박이제길특씨, 장순황귀비 오아씨
동귀비 서목록씨, 가귀비 곽가씨, 성귀비 뉴호록씨
화비 휘발나랍씨, 상비 뉴호록씨, 상비 혁사리씨
염빈 부찰씨, 예빈 상가씨, 순빈 휘발나랍씨
순빈 유가씨, 항빈 채가씨, 진빈 혁사리씨
평귀인 조씨, 이귀인 이씨, 나귀인 휘발나랍씨
정귀인 손씨, 만상재 관가씨, 목답응 혁사리씨
관여자 유씨
자녀 9남 10녀
신장 165cm[3]
한호 도로 얼덩어 한(ᡩᠣᡵᠣ ᡝᠯᡩᡝᠩᡤᡝ ᡥᠠᠨ᠌)
칸호 토로 게렐투 칸(ᠲᠥᠷᠥ ᠭᠡᠷᠡᠯᠲᠦ ᠬᠠᠭᠠ)[4]
묘호 선종(宣宗)
시호 중국식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만주어 : 샹안 후왕디(ᡧᠠᠩᡤᠠᠨ ᡥᡡᠸᠠᠩᡩᡳ)
연호 1821년 ~ 1850년
중국식 : 도광(道光)
만주어 : 도로 얼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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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 전3. 즉위 후
3.1. 아편 전쟁3.2. 죽음
4. 가정 관계
4.1. 아내4.2. 후궁
5. 평가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청나라의 8대 황제이자 유일한 적장자 출신 황제이다.[5] 후대 청 황제들의 공통 조상으로는 마지막 황제로 황자 시절에는 지친왕(智親王)으로 불렸다.

그의 재위기 청나라는 가경제 시대부터 시작된 몰락세가 심해져 점차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되는 시기였다. 한때 최전성기때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강대국이었던 청나라는 쇠퇴할대로 쇠퇴하여 아편전쟁에서 전세계 열강들의 예상을 깨고 대영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국력이 얼마나 쇠퇴했는지 보여주었고[6][7] 이보다, 열강들은 이때부터 세계 초강국들이던 청나라와 오스만 제국이 얼마나 쇠망했는지를 깨닫게 되고, 이권침탈에 눈이 벌개졌다.[8] 그가 죽은 지 몇 달 후에는 청나라는 역사상 최악의 대규모 반란이라 불리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며 중국 대륙 남부가 완전히 피폐해져 청나라는 멸망의 가파른 길을 탔다.

2. 즉위 전

1782년 9월 16일 가친왕 영염과 효숙예황후 히타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친왕이 측복진과의 사이에서 낳은 형이 있기는 했지만 유아기에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장자 대접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문무를 빠르게 익혀나가며 할아버지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가경제가 황위를 물려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말았다.

1813년에는 가경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나 있을 때 가경제 재위기 초반 10년간 난리를 피운 백련교와 마찬가지로 건륭-가경 연간의 민란 주동세력 중 하나였던 백련교 분파 천리교의 신자들이 복수를 꿈꾸며 자금성 내로 쳐들어오는 '계유지변'이 벌어졌는데, 민녕은 당황하는 시위와 환관들을 지휘하여 건륭 연간부터 사용이 금기시되었던[9] 머스킷을 꺼내들어 쏘며 진압했다. 물론 끝난 뒤 내통자들까지 깔끔하게 처벌한 것은 덤.[10]

가경제는 열하에 가 있었기 때문에 별 피해가 없었지만 큰 충격을 받아 스스로 신료와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죄기조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민녕은 이 때 반란군으로부터 황궁을 지킨 공으로 지친왕에 봉해졌다.

3. 즉위 후

1820년 가경제가 후계자 지명 없이 열하에서 심장마비로 붕어하자 황자 중 최연장자로서 황위를 이어받았다. 맏형이자 유일한 적자였던 데다 계유지변에서 공을 세우는 등 일찍이 능력을 뽐내며 친왕에 임명된 바 있었기 때문에 무난히 즉위했다.[11] 1850년까지 30년간 청나라를 통치했다. 즉위하자마자 가경제 이후로 쇠퇴에 가속도를 밟기 시작한 청나라를 떠맡았다. 1820년에는 신장-위구르의 호자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1826년경 반란 자체는 진압했고, 주동자는 베이징으로 압송하여 처형했다. 이후 청나라는 반란으로 잃어버린 영토들도 모두 수복하는데에 성공했으나, 계속된 행정마비로 결국 코간드 칸국에 유리하게 관세를 조정해 준 조약을 맺었다. 이후 청나라는 위구르 지방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전통적인 동군연합 체제에도 균열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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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과 신강 지역 (18세기~19세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그의 치세기는 청나라가 열강에게 샌드백이 되는 서막을 여는 시대이기도 했다. 1840년의 제1차 아편전쟁과 그로 인한 난징 조약(1842년)이 대표적이다.

3.1. 아편 전쟁

도광제는 1810년대부터 마구 들어오기 시작하여 당시 청나라의 최대 문제로 대두되었던 중독성 강한 마약인 아편과의 전면전을 선언했다.[12] 아편은 일찍이 옹정제 시기부터 청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1년에 200상자 정도로 수입량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양이 불어나며 건륭제 시기에는 1천 상자, 가경제 시기에는 4천 상자, 도광제 시기에 이르자 3만 상자에 달했다. 이 때문에 웬만한 고위급 인사들은 모두 아편을 즐겨 피웠고, 사실 황제 자신도 아편을 피웠지만, 워낙 아편의 사회적인 병폐가 심각했기에 임칙서를 파견하여 외국 상인의 아편까지 몰수하도록 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이때 도광제는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황자 시절부터 즐기던 아편을 과감히 끊어버리고[13] 못 끊는 황족들을 작위를 박탈한 채 신강으로 유배 보내는 등 아편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청나라가 자국 상인들의 아편까지 몰수하여 바다에 처넣어 버리자, 서양 상인들은 특히 분노했고 그중에서도 영국이 나서 이를 빌미로 1840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문에 일어난 전쟁을 제1차 아편전쟁이라고 부른다. 다만 이 아편전쟁은 심지어 영국 내부에서도 비난이 많았는데, 따지고 보면 영국의 명분이 타국에 마약을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었다.[14] 초기에 청 조정은 단순히 출병한 영국군을 항의사절단 정도로 생각했고, 영국군이 임칙서를 비난하자 임칙서를 파면하는 선에서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였다. 허나 임칙서가 쫓겨난 이후에도 영국군이 중국 남동부 해안가를 침공하여 파죽지세로 밀려오자 청나라는 깜짝 놀라 남부의 군대를 끌어모아 겨우겨우 이들을 막으려 들었다. 허나 이미 망해가는 청나라에는 최신무기로 무장한 영국에 맞설 힘 따위는 없었고, 심지어 난징이 거의 함락되자 전의를 상실하고 1842년에 영국과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는 난징 조약으로 홍콩섬을 영국에게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중국 연안의 5개 항구를 개항하였다. 이후 아편의 수입량은 폭증하며 청나라는 갈수록 망해갔고, 영국의 승리 소식을 들은 다른 서구 열강들도 개떼처럼 모여들어 영국과 비슷한 이권을 뜯어가며 청나라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당시 청나라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서양 문명 및 제국주의를 막아낼 능력이나 세계정세의 이해 부재, 설상가상으로 팔기군/녹영이 중심이 된 국방력의 저하 등이었다. 게다가 당시 중국 관료층은 산업 혁명이나 신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지난 2천여 년간의 틀에 갇혀 유연한 사고를 할 기량 따위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편 전쟁 이후 70여 년간 청나라는 외세의 반식민지 상태에 처했다. 이는 도광제와 임칙서 개인의 능력 문제라기보다는 패기득권층인 만주 귀족들의 모함과 당쟁, 그리고 막장화한 팔기군과 녹영의 무능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만, 도광제 역시 아편전쟁 초창기에서 군함끌고 온 영국군을 그냥 단순한 '항의사절단'으로 생각하고 결사적으로 싸우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던[15] 임칙서를 파면하고 기선을 새 흠차대신에 임명하는 등의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16]

3.2. 죽음

도광제는 1850년 2월 26일 여름궁전 원명원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약 10년 후 원명원이 제2차 아편전쟁에서 서양 침략군에게 불타버리면서 도광제는 원명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마지막 황제로 남았다. 그가 붕어한 후에는 넷째 아들(이지만 위의 형들이 모두 죽어 실제로는 맏이였던) 혁저가 함풍제로 즉위하였다. 도광제의 시신은 청서릉의 모릉(慕陵)에 묻혔다. 한편 도광제의 죽음 직후인 12월에 중국 사상 최악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고, 이후 청나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며 서서히 망국의 길을 걸었다. 여러모로 청나라의 본격적인 쇠락기를 맞이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4. 가정 관계

4.1. 아내

효목성황후 니오후루씨(孝穆成皇后 鈕祜祿氏)
1781년 출생 ~ 1808년 사망

효신성황후 퉁기야씨(孝愼成皇后 佟佳氏)
1790년 출생 ~ 1833년 사망

효전성황후 니오후루씨(孝全成皇后 鈕祜祿氏)
1808년 출생 ~ 1840년 사망

효정성황후 보르지기트씨(孝靜成皇后 博爾濟吉特氏)
1812년 출생 ~ 1855년 사망
황제의 대복진도, 차기 황제의 생모도 아니었으나 정식 황후로 추봉된 청사 유일의 황후. 효전성황후가 죽자 황귀비가 되어 육궁을 통솔하면서 함풍제를 양육하였다. 함풍제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던데다 공친왕 혁흔 또한 청나라 정계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독한 상태에서 함풍제에 의해 황태후로 존숭되었다. 다만 순치제의 애틋한 여자친구(...)였던 효헌황후 동고씨가 순치제의 시호를 함께 받지 못한 예처럼 사후 도광제의 시호를 함께 받지 못하면서 약간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는데, 훗날 함풍제가 사망한 후 신유정변으로 친아들 혁흔이 권력을 쟁취하면서 다시금 버프를 받아 도광제의 시호를 함께 받은 정식 황후로 기록되었다. 누르하치가 죽자 순장당한 대복진 울라나라씨가 아들 도르곤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으나 도르곤이 일찍 사망하고 사후 추탈당하면서 끝내 정식 황후로 기록되지 못한 예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4.2. 후궁

장순황귀비 우야씨(莊順皇貴妃 烏雅氏)
1822년 출생 ~ 1866년 사망

동귀비 슈무루씨(彤貴妃 舒穆祿氏)
1817년 출생 ~ 1875년 사망
1831년 수녀선발에서 동귀인으로 입선했고, 그 후 순조롭게 빈, 비를 거쳐 1836년 귀비가 되었다. 그러나 1844년 태감 이덕흠의 처소에서 동귀비가 준 물건들이 나와 도광제의 큰 분노를 샀고, 무려 귀인으로 3계급이나 강등되었다.[20] 그래도 꿋꿋히 존버에 성공, 도광 30년 황고동빈으로 올랐고,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습격했을 때도 살아남아 동치 13년에 동귀비로 승진, 광서 1년에 사망하였다.

화비 호이파나라씨(和妃 輝發那拉氏)
?년 출생 ~ 1836년 사망
  • 황장자 다라은지군왕 혁위(奕緯) 1808년 ~1831년
    화비는 잠저 시절 관여자 출신의 후궁으로 황장자 혁위를 낳자 가경제가 특별히 측복진으로 승격시켜주었고, 혁위는 태어나자마자 패륵에 봉해졌다. 그러나 도광제는 화비 모자를 매우 싫어하여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다른 후궁들이 낳은 황자들이 모두 요절하자 도광제는 늦게나마 후회하며 혁위에게 관심을 가지고 제왕학을 가르치려 했으나 혁위와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고,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생모인 화비 또한 크게 상심하여 도광제의 총애도 잃고 건강도 점점 나빠져 아들을 잃은지 5년 뒤 폐심증으로 사망하였다. 혁위의 후사로는 이후 건륭제의 황11자 영성의 아들 면의의 아들 혁기의 아들 재치가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재치의 아들인 부륜은 동치제의 양자로서 황제로 추대될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실제 혈맥이 너무 먼 방계라며 배제되었다.

상비 니오후루씨(祥妃 紐祜祿氏)
1808년 출생 ~ 1861년 사망

5. 평가

도광제 시절 벌어진 아편전쟁은 결국 2000년 이어져 온 중화질서를 무너뜨렸고, 결과적으로 19세기 중후반부터 혼란의 도가니에 접어든다. 도광제 자신은 꽤 청렴했고 자신이 모범을 보여 아편을 끊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임칙서를 등용해 이를 금지하려고 한 것에서 보듯이 국가통치에 나름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국가체제가 매우 낡은 것이었기 때문에 황제 한사람의 의지만으로 난관을 헤쳐나가기는 불가능했다. 특히 충신인 임칙서를 파면한 것은 숭정제원숭환을 처형한 것과 비교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나마 임칙서를 처형하지 않고 살려둔 점에서 숭정제보다는 평가가 나은 편이다. 어쨌든 그의 치세를 기점으로 청나라는 한때 청나라를 두려워하던 열강의 동네북 신세가 된다.

민국시절의 역사학자인 채동번은 도광제에 대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좋은 인물이나, 국가를 다스리기에는 역량이 모자랐다"고 평가했다.

6. 여담

아편전쟁 시기의 황제인지라 로마자 표기가 자주 나온다. 19세기 당시에는 Taou-Kwang[22], 현대에는 Dao-guang으로 표기한다.

그는 매우 검소한 황제였다고 전한다. 황궁의 예산은 은 20만 전을 넘지 못하게 했고, 스스로 솔선하여 낡은 옷을 입었다. 이것이 유행을 탄 나머지 고관들도 모두 낡은 옷을 입고 나와 자신의 청렴을 과시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낡은 관복이 새 관복의 두 배 가격을 하고, 그마저도 구입하지 못해 새 관복을 열심히 해지게 하고 더럽히는 촌극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청렴 프렌들리 정책' 덕분에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총애를 받았는데, 이 자는 채소장수와도 직접 흥정을 할 정도로[23] 쪼잔한 인물이었다. 청렴하단 이유로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라는 대신도 총애를 받았는데, 정작 그는 밖에서는 사치로 악명이 자자한 위선자였다. 청렴한 임금이 반드시 명군은 아니며, 군주가 청렴하다고 신하들까지 청렴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 비슷한 예로 명나라숭정제가 있다.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 청나라 역사에서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절약으로 유명한 자린고비의 대명사로 유명하고 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도 본인 재산으로 사치를 했기에 황실 은고를 털었다는 천일야사 내용은 역사왜곡인 수준이다. 천일야사에서는 도광제를 다룬 편에서 총애를 받지만 황실 예산을 긴축정책으로 유지한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사실은 사치를 일삼은 위선자였다는 내용으로 방송을 했는데,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가 사치로 유명했다는 위선자라인 것과 혼합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도 본인 가문의 재산으로 사치를 했기에 황실 은고를 털었다는 내용도 실제 역사와 다르다.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사치를 일삼은 위선자였다는 주장은 천일야사의 허구인데 정작 겉으로는 검소한 척 하지만 뒤로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던 위선자인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는 극중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실제로 도광제의 명으로 황실 은고(銀庫)를 지키는 관원은 장성보(張誠保)로 그의 형 장형지(張亨智)는 아들 장리홍(張利鴻)에게 지주(知州)라는 관직을 사주고 싶어서 동생이 지키는 은고 열쇠를 훔쳐 11월초 11474량의 은자(銀子)을 11개의 포대에 담아 호부(戶部)로 보냈는데 훔쳐낸 은자가 남아서 그걸 마저 집으로 가져오다가 들키는 바람에 분노한 도광제에게 재산이 몰수당하고 일가가 역모에 준하는 혐의로 멸족당하게 된다. 문제는 천일야사에서는 도광제의 눈을 피해 황실 은고에서 은자를 빼내가던 장성보(張誠保)와 그의 형인 장형지(張亨智) 형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아서 천일야샤 제작진에 의해 애꿋은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악역으로 연출되었다.

어이없게도 자린고비를 자처한 황제 자신이 사후에 안장될 능묘인 모릉(慕陵) 공사에는 훗날의 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이나 이전 황제 중 최대인 건륭제의 유릉(裕陵) 공사비보다도 더 많은 240만 냥을 소모했다. 이는 동릉 구역에 처음 지었던 능묘에 물이 새는 하자가 발견되자 그걸 수리해서 재사용하는 대신 아예 서릉 구역에 새로 능묘를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능묘의 위치가 동릉에서 서릉으로 옮겨진 덕분에 뒷날 군벌 쑨뎬잉동릉 구역의 황릉들을 무차별 도굴할 때 무사할 수 있었다.[24] 어떻게 보면 검소함의 보람이 있긴 한 셈이다. 대신 도광제가 받았어야 할 횡액은 아들 함풍제에게 넘어갔으니.[25]

아편 중독의 후유증이 엿보이는 초상화를 보면 별로 안 그랬을 것 같지만 지친왕 시절엔 '거동이 멋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도광제는 10대 때부터 할아버지 건륭제 앞에서 팔기식 궁술을 선보이며 사슴을 잡아내는 등 무예가 뛰어났고, 가경제 시절에 자금성으로 반란군이 잠입하자 손수 권총을 들고 이들을 제압했던 경력이 있다. 더불어 이 시기의 도광제는 럭셔리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아편을 정말 멋들어지게 피웠기에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도, 궁녀들도, 심지어 아버지 가경제도 도광제를 멋쟁이로 보았다. 이 때문에 훗날 사람들에게는 가식적인 위선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에 대해 여러가지로 배려를 한 모양이며, 화이관에 투철했던 조선 왕조에서도 도광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에 철종 임금과 대왕대비가 안타까워 했다. 철종실록 조선 사신들도 통치력에 의문을 표한 전임 가경제와는 다르게 도광제는 호평했다.

재위기간은 조선의 순조(1800년 ~ 1834년), 헌종(1834년 ~ 1849년)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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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제들은 면(綿)자 돌림인데, 도광제는 이 글자가 상용한자인 관계로 즉위시 피휘를 위해 동음이자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도광제는 아버지 가경제가 개명하는 것도 보며 자란지라 이 피휘규정을 몹시 귀찮게 여겼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망 몇년 전엔 아예 돌림자 피휘는 할 필요 없이 뒷글자나 안 겹치게 적절히 조심하고 옛날 책도 괜히 트집잡지 말라 하교하기도 했다. 어차피 뒷글자는 종친들이 다들 크게 겹치지 않게 자식 이름을 짓는지라 도광제의 아들 항렬부터는 한 글자 겹치는 정도로는 피휘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2] 형이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장남이었다.[3]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4] Törö Gereltü.[5] 선제 가경제의 유일한 적자였고, 서자인 이복형이 일찍 죽었기에 그가 차남이면서도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도광제의 아들인 함풍제는 위의 형들이 모두 요절하여 서장자가 되었다. 함풍제의 생모도 정실황후 출신이지만, 함풍제를 출산할 당시에는 후궁신분이었고, 이후에 황후에 책봉되었다. 유일하게 진짜 장남 출신 황제인 동치제도 아버지처럼 서장자 출신이었다.[6] 국력의 쇠퇴보다는 국가의 기강과 내부모순이 축적된 게 문제였는데, 아편전쟁은 명백히 청나라가 유리했고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다.[7] 실제로 청나라와 대영제국이 전쟁한다는 소식에 전세계 열강들은 청나라의 승리를 예상했었다고 한다. 물론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 국가들이 세계 패권을 잡았지만 그럼에도 영국을 포함한 유럽 열강들은 여전히 청나라만큼은 미개한 황인종일 지언정 그렇게 만만히 보아서는 안되는 강대국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몇만 수준의 원정군한테 수십만 청나라군이 압도적으로 패배할것이라고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다만 영국에서 전쟁 내놓을 때 의견을 보면 '우리가 이길 건 자명하고 이득도 명백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아편 팔아먹자고 이 짓 했다가는 두고두고 욕 먹을 거다.'라는 글래드스턴의 연설이 버젓이 실려있다. 사실 이쪽이 더 가능성 높은 게 자기네들도 질 거라고 생각하는 전쟁을 자기손으로 일으켰다면 그건 영국 정부가 죄다 멍청이라는 소리가 된다. 즉, 당시 영국인들 인식은 잘해봐야 '이기는 건 기정사항이지만 그래도 피해는 좀 크겠지'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8] 아편전쟁은 단지 전쟁당사국 영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청나라의 현실을 광고한 사건으로, 포르투갈 왕국 같은 19세기 기준 2류 열강들도 포르투갈령 마카오의 지위를 올리는 등 청나라는 열강의 동네북이 된다. 이 시기에 오스만도 이미 유럽의 환자로 유명해 실컷 조리돌림당하던 상황이긴 했다. 그 옆에 페르시아도 마찬가지.[9] 건륭제는 궁술과 기마가 만주의 정신이랍시고 화약무기의 개량 및 개발을 억제시켰다. 물론 건륭제가 바보도 아니고 만주의 정신 운운은 당연히 핑계고 실제로는 무기 강화의 빌미로 중앙 밖의 군사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결국 건륭제의 손자, 증손자들이 아편전쟁에서 호되게 대가를 치렀다.[10] 당시 내시들이 총을 장전해주었고 도광제는 사격만 했는데, 내시 중에도 내통자가 있어 총알 없이 화약만 장전된 총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도광제는 수 차례 총을 쐈는데도 적이 죽지 않자 내시 중 내통자가 있음을 알았으나 전투 중인지라 그 자리에서 처벌하지는 않았고, 총알 대신 옷 단추를 뜯어넣어 발사해서 위기를 넘겼다고.[11] 당시 성인인 동생으로 황3자 면개가 있기는 했지만 1820년에야 겨우 돈군왕에 책봉되는등 큰형과 경쟁을 벌여볼만한 입지가 아니었다.[12] 서구열강들은 청나라의 은을 빼오기 위해서 일부러 고가의 아편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세계 은의 블랙홀이라고 할 정도로 막대한 은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은의 순유출이 가속화되었다.[13] 이에 대해서는 모범을 보이는 치국의 차원이 아니라 아들을 낳아야 하니 건강관리에 신경쓴 것이라는 삐딱한 시선도 더러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장자 혁위가 요절한 후 후사가 위태로워져서 황제가 밤일에도 신경쓰고 만수무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건강관리를 한 덕에 만 70세까지 장수하여 성년기의 혁저와 혁흔 중 '후사를 고를 수 있는' 여유(?)도 누릴 수는 있었다. 그래도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 중독성 강한 아편을 단칼에 끊을 정도면 그의 정신력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4] 영국 하원에서 전쟁 찬성이 271표, 반대가 262표가 나왔다. 그만큼 의원들 사이, 더 나아가 영국 국내 여론의 의견 차도 심했다는 이야기. 반전파이자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의원은 "우리 대영제국의 양심이 262명밖에 안 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15] 임칙서는 영국군에 대항하여 미국 상인들에게 서양 대포 300문과 군함을 구입했다.[16] 1992년 영화 '아편전쟁'에 잘 드러나 있다.[17] 도광제가 가장 예뻐한 딸로 총애가 함풍제에 버금갈 정도였고, 사위도 가장 신경써서 골랐다고 한다. 도광 21년 박이제길특 덕목초극찰포(德穆楚克札布)가 액부로 정해지고 얼마 후 수안고륜공주로 책봉되었다. 함풍 10년에 병으로 사망.[18] 부찰 가문의 경수와 혼인했으나 함풍 9년에 사망했다. 경수는 이후 함풍제의 임종을 지키며 보정대신 8인 중 하나로 지명되었다가 신유정변으로 실각하나, 혁흔의 매형이었기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은 숙순, 단화, 재원과 달리 관직에서만 물러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19] 1855년에 수장화석공주로 책봉되었고, 박라특 덕휘에게 하가했으나 1865년에 남편과 사별했다. 조카인 광서제가 즉위한 후 1881년에 오빠의 배려로 고륜공주로 승격했다.[20] 무려 궁녀를 때려죽인 건륭제의 돈비도 1계급 강등이었는데, 돈비의 처벌이 얼마나 솜방망이었는지 알 수 있다.[21] 가경제의 황3자였으나 자식 없이 죽은 돈친왕 면개의 양자로 출계하여 자연스레 황위계승에서 제외되었다. 친가 동생들이 신유정변 이후 열심히 정계에서 구른 것과 달리 동생들의 쿠데타를 지원하면서도 스스로는 정계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살았으나, 아들 단군왕 재의는 무술변법 때 서태후의 농간에 휘말려 아들 부준이 황제로 옹립될 뻔하거나 의화단의 난에도 가담하는등 삼촌들만큼의 국제정세 인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짓만 골라 하다 머나먼 영하로 유배당하는등 인생이 꼬였다. 칭화대학이 혁종이 거주하던 옛 돈왕부 자리에 들어섰다.[22] 난징 조약 영어 원문에도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특정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 것은 아니고, 발음을 적당히 영어식으로 옮긴 표기.[23] 물론 장을 보는 것이 주제거리가 될 만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청 제국 대학사가 채소장수와 흥정을 하는 건 역시...[24] 비슷하게 이전에 이곳에 묻혔던 옹정제가경제의 무덤도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후대인 광서제의 무덤은 서릉에 있었지만 도굴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25] 건륭제 때 소목을 적용해서 확립된 청나라 황실의 조장 제도에 따르면 황제가 동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면 그의 뒤를 이은 황제는 서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는 식으로 동릉과 서릉을 번갈아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동릉의 유릉, 가경제는 서릉의 창릉이었으므로 응당 도광제는 동릉으로 가야 했으나, 서릉의 모릉으로 조장 제도의 방향을 틀어버리자 아들 함풍제는 어쩔 수 없이 동릉의 정릉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