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5:53:08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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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의 전개

1. 개요2. 제1차 아편전쟁(1840~1842)3. 제2차 아편전쟁(1856~1860)4. 영향5. 기타
5.1. 아편의 해악성은 과장되었다?
6. 미디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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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편전쟁(, Opium Wars)은 1840년과 1856년 2차례에 걸쳐 영국청나라무역수지 문제로 일어난 전쟁이다. 계속 청으로 유출되는 은화(銀貨)를 영국이 다시 회수하기 위해 청에 아편을 밀거래한 것[1]이 원인이다.

2.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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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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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향

청나라는 아편전쟁 전까지만 해도 대국(大國), 미개한 동양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체급의 소유자 등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어지간하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으나 전쟁 이후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자 청은 서구 열강[2]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비슷한 시기(1853~1856년)에 참전한 크림 전쟁에서는 두 나라가 무려 40만 대군을 투입해 러시아 제국을 상대한 데 비해 1856년 말에 일어난 2차 아편전쟁에서는 고작 2만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청나라의 무릎을 꿇렸다. 얼마나 동서양의 국력 차이가 벌어져 있었고 중국이 동네북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일전쟁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기 이전까지 무려 100여년 동안 중국은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 기간을 치욕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고 이를 아예 백년국치로도 통용하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에 의해 청이 패배했고 조선도 이 소식을 듣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라는 거대한 방패 뒤에서 존재하던 조선은 세도정치로 청나라보다도 정치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 있었기 때문에 서양 열강이라는 새로운 적들이 등장하자 백성들 사이에는 "조선도 서양인들에게 멸망당하지 않을까?!"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는 동학이라는 신흥종교의 창설로 이어졌다.

제1차 아편전쟁 이전 아편 무역에 정면으로 맞섰던 임칙서는 현재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대중국 무역 침탈은 가속했어도 아편 자체의 판매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아편이란 게 양귀비꽃 열매를 가공하면 뚝딱 나오다 보니 중국이 아편의 국산화에 성공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령 인도의 아편들은 판로를 잃었고 이는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영국은 왜 청이 아편을 단속했는지 뒤늦게 깨달았지만 때는 늦어 영국에 아편이 대량 보급된 후였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을 포함한 중화권 국가들은 현재도 마약과 관련된 범죄만큼은 절대 무관용 원칙의 초강경 대응을 고수하고 있다. 광서신정 때부터 아편 단속을 꾸준히 강화해 온 결과,중국 및 대만은 물론 중화권 국가인 싱가포르나 중국 주변 한자문화권 국가들에서도 마약 관련 법률은 서양이나 한자문화권 밖의 국가들보다 엄격한 편이다. 특히 중화민국의 마약 정책은 주변 국가들과 비교해도 유달리 엄격해졌으며 일정량 이상 제조, 유통까지 가게 되면 최소 종신형으로 시작해서 최고 사형(총살형)까지도 집행할 수 있을 정도다.[3] 이웃나라 일본도 마약에 대해서는 역시 강경 대응하며 한국은 유달리 마약 관련 처벌은 서방 선진국에 비해 미약한 편인데 최근 들어 한국에 유통되는 마약의 양이 12+@배가량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고위 간부 자녀/연예인이 마약과 관련되었으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인맥이 약한 일반인 등의 마약 관련 처벌은 수위가 높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마약 관련 처벌이 매우 무거운 편인데 아편전쟁의 후유증이 그 근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중 성향의 한국 누리꾼들도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마약 때문에 경을 쳤다는 소식을 듣거나 마약으로 인해 어느 특정 인물이 구속 또는 소환됐다는 등의 기사가 올라오면 진보ㆍ보수ㆍ친중ㆍ반중 진영 가릴 것 없이 마약만큼은 중국의 강경책을 옹호하는 등 전반적인 국민 여론도 마약을 죄악시한다. 중국처럼 마약사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하자는 초엄벌주의자들도 있다.[4]

중국의 이런 강경책은 외국인이라도 예외가 없어서 한국인 마약사범이 체포되자 바로 사형을 때리고 실제로 집행한 일이 2014년 말에 있었다. 참고로 당시 한국인 마약사범을 체포하고 중국은 바로 한국 정부에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고 통보를 날렸으며, 이를 접수한 한국 정부 측에서 "형을 집행하지 말고 당장 한국으로 양도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형을 집행한 다음에 집행이 끝났다고 통보를 전하며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2009년에는 파키스탄계 영국인 아크말 샤이크가 마약 밀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샤이크의 정신병 경력을 제시하며 샤이크의 감형을 호소했지만 중국은 샤이크를 사형시켰다. 유럽인이 중국공산당 집권 후 처형을 당하는 전례 없는 사건에 대해 영국과의 외교 문제로까지 떠올라 큰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양국이 벌인 기싸움은 몹시 오래 갔다. 세간에서 다시금 아편전쟁을 떠올린 것은 덤.

싱가포르는 진작부터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이 개항시킨 홍콩을 통해 많은 중국인들이 쿨리로 건너왔는데[5] 이들 역시 영국인들로부터 아편을 구해다가 피우며 중독에 빠지는 바람에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발전한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싱가포르도 마약 관련 법은 다른 중화권에 비견될 정도로 굉장히 엄격한데 아예 입국 신고서 서류에 마약 밀수는 사형[6]이라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현재는 입국신고서 자체가 전자 처리로 바뀌면서 볼 일이 없어졌다.

다만 이에 대해 과장된 면도 없지 않은데 단순 마약 소지 및 흡입은 마약 제조 및 판매, 유통 범죄에 비해 엄벌되지 않으며 사회 유력인사들은 암암리에 빠져나간다. 중국 유명 가수인 인샹제나 성룡의 아들인 방조명[7]은 그냥 단순 소지 및 흡입만 해서 징역 6개월 및 벌금에 그쳤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며 중국 네티즌들에게 쌍욕을 먹었다. 중국공산당 관료들 중에도 알게 모르게 마약을 하는 이들이 꽤 많다.

중국은 과거 영국이 중국인들에게 했던 짓을 2010년대부터 펜타닐 유통의 중심지가 됨으로써 엄한 전세계에게 돌려주기 시작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 조직들이 중국 제약회사에서 원료를 주문해 멕시코에서 제조하고 미국과 캐나다에 수출하는데 이는 중국 당국에서 단속하기도 힘들뿐더러 어차피 단속하든 말든 경제에 타격을 입힐 놈들에게 뭘 더 해줘야 하냐면서 태업하는 것이다.[8]

대표적인 하드 드러그헤로인 유통은 감소했으나 필로폰케타민향정신성 마약들은 250만여 명이 이를 이용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 이상으로 심각한 마약은 'China White'라고 불리는 오피오이드계 마약 펜타닐중국보다 중국 밖, 특히 미국, 캐나다에서 가장 심각한 마약이다. 마약 카르텔이 만들고 뿌린 펜타닐로 인해 매년 이 지역에서 7~8만명씩 오피오이드 중독 사고로 인해 사망하는데 그 중 80% 이상의 사인이 펜타닐 과다흡입이다.

5. 기타

  • 아편전쟁 때문에 대한민국의 서브컬처 사이트 등에서 소위 약을 빨았다고 일컬어지는 영국(인)의 각종 기행이나 해괴한 물품, 작품들을 일컬어 홍차에 아편을 탔다고 표현하는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 인도의 아편을 동인도회사와 연결한 민족이 파르시였다. 그들은 이를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5.1. 아편의 해악성은 과장되었다?


당시 아편의 해악성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는 수정주의적 시각도 존재하며, 아편의 해악성은 후대의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과장하였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프랑크 디쾨터가 있다.

다만 이 주장은 정설이 아닌 극소수설일 뿐이며 이 책의 저자인 프랑크 디쾨터는 현재 사학계에서 자료를 자기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한다고 비판받는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당대 중국의 수많은 사료들이 아편의 심각성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편 중독이 당시의 중국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당시 호기심에 아편에 손을 대었다가 전 재산을 거덜내고 끝내 아내와 자녀마저도 노예로 팔았다는 기록이 여럿 있으며 이웃나라인 조선, 일본 또한 청나라보다 적었을지언정 아편으로 인한 사건사고가 잦았다.

6. 미디어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1997년에 이 사건을 토대로 중국에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영화 <아편전쟁(鴉片戰爭, The Opium War)>이 있다.[9] 제1차 아편전쟁을 다뤘다. 대한민국에서도 개봉했지만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근현대사 강의를 하는 교수들이 시청각 자료로 즐겨 쓰는 경우도 있다. 임칙서 역은 84부작 삼국지에서 조조로 나온 중국의 국민배우 포국안이 맡았다.

영국군들이 "낙후된 무기로 우리랑 맞붙냐?"고 비웃자 곁에서 한 영국 장교가 "중국에는 의가 있으니 그들은 그걸로 싸우는 겁니다"라고 좀 어이없는 말을 한다든지, 비겁자로 나오던 인물[10]이 마지막 광둥성[11]이 영국군에게 털릴 때 "매국노였으나 청을 위하여 죽겠다"고 나선다.[12]

약간의 개그씬도 있다. 흠차대신[13]으로서 엘리엇 제독을 만나러 간 기선이 식사를 대접받는데,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사실상 날고기[14]였던 레어 스테이크를 대접받고 칼로 썰다 육즙이 나오는 걸 보고 더는 손대지 않고 치워 버리며 "날고기나 먹으니 성격이 흉폭해졌나 보지"라며 영국 요리를 디스한다. 통역을 통해 그 말을 들은 엘리엇 제독은 "중국 요리가 산해진미인 건 맞는데, 대신에 당신네들은 대포가 쓰레기잖소?"라며 응수한다.#

아편전쟁 작중에서는 좀 생략된 것이 있는데 기선의 죄목이다. 감히 청나라의 영토인 홍콩을 영국에 맘대로 할양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후 기선은 불행하게도 흠차대신과 양광총독직에서 해임되었고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헤이룽장성으로 유배되는 형을 받았다.[15] 임칙서도 병사들을 선동해 국가에 누를 끼쳤다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유배된다.

이재학이 그린 만화에서도 아편전쟁 당시 무협 고수들이 나오는 게 있었다. 1995년 여름 한가위 특선 추천만화로 씨네21에서 소개한 적도 있는데 무협 고수들이 영국군 총기에 마구 죽어나가는 현실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1984년 중국본토에서 이연걸의 소림사 흥행에 고무되어 당시 남권 최고수였던 구건국을 주연으로 하여 제작한 영화 <남권왕>도 아편전쟁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양 제국주의가 아편을 대량으로 판매하여 갈수록 중독자가 늘어나자 흠차대신 임칙서가 아편 근절 정책을 강력히 펴는 한편 서양의 침략에 대비해 서양의 최신총포 설계도를 광불철공소 지배인이자 남권의 고수인 임해남에게 의뢰한다. 임해남은 사교무리, 서양인과 결탁한 임칙서의 정적들에 맞서 가까스로 총포를 제작하여 해안경비대에게 보낸다.

서태후의 일대기를 다루는 사극에서 2차 아편전쟁이 단골로 등장한다. 이른바 서태후 더 비기닝(?)이라고 할만한 시기로, 함풍제가 아우 공친왕에게 경성을 맡기고 열하로 도망가는 사이 영불연합군이 원명원을 잿더미로 만드는등 청조의 무능과 쇠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중국사의 암흑기인지라 아편전쟁기를 다루는 사극들은 강건성세를 배경으로 하는 흔한 청나라 사극에 비해 몹시 우울한 분위기이다. 그나마 청말민초는 중국에서 높이 평가하는 신해혁명을 묘사하기 때문에 제법 '새 시대에 대한 희망' 같은게 묘사되지만 18세기 초중반의 청조를 다룬다면 그저 그렇다.

대체역사소설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영국에서 전쟁의 명분이 "조선을 돕는다"여서 원역사보다 찬성이 높아졌고 임칙서가 원 역사에서처럼 아편 밀수를 막기 위해 노력하다가 영국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지만 조일준이 만들고 박현상이 넘겨준 대형 자돌폭뢰[16]로 철갑선 2척을 격파하면서 영국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임칙서의 전공을 탐탁지 않게 여긴 도광제가 독약을 보내 토사구팽 당하고 말았다. 이에 향용으로 참전했다가 임칙서의 가르침을 받아 관리가 된 홍수전이 심각하게 부패한 청나라의 현실을 보고 좌절하던 상태에서 임칙서의 사망 원인을 알게되어 청나라를 뒤집어엎기로 결심하였다.

7. 관련 문서



[1] 1799년 가경제가 단속령 내리기 전인, 178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아편 무역 자체가 불법이었다. 애초에 마약 거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법이다.[2]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가담해서 청나라를 조금씩 갈취하기 시작했다.[3] 중화민국은 민/군 구별 없이 공평하게 총살형이다. 중국 대륙지구는 약물주사형.[4] 다만 강경책이 사용되는 건 마약 제조 및 판매, 운반의 경우에 해당되고 단순히 마약을 사용하는 경우는 오히려 단순 복용범은 한국보다도 처벌이 약한 편인데 보통 백만원 안팎의 벌금이 구형된다고 한다. 심지어 초범일 때는 훈방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5] 이때 건너온 중국인들은 오늘날 싱가포르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중국계 싱가포르인의 조상이 된다.[6] 원문은 "WARNING DEATH FOR DRUG TRAFFICKERS UNDER SINGAPORE LAW", 직역하자면 "경고: 싱가포르 법 아래 마약 밀수범을 위한 죽음". 의역하자면 "경고: 싱가포르 법에 의거 마약 밀수범은 사형에 처함". 붉은 영어 대문자와 볼드체DEATH를 강조하고 있다.[7] 이쪽은 카더라로는 적당히 무마(원래는 유통에도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돈다)해 주는 대가로 성룡이 친 중국정부발언을 더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돈다.[8] 미국에서도 이를 엄청나게 의식했는지 2023년 시진핑의 방미 회담에서 미측에게 펜타닐 단속을 요청받을 정도였다.[9] 당시 중국 영화로서는 최대 규모인 180억을 들였으며 40척의 범선과 수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제작했다.[10] 작중에서 광둥성 광저우의 총병인 한조경.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처형할 죄인도 맘대로 보내주질 않나, 밖으로 영국 마약상과 결탁해 아편 무역을 눈감아주고 매년 아편 200여 상자를 빼돌렸다. 수십만 냥에 달하는 뇌물을 챙겨 배를 불리며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행세를 했다. 결국 임칙서에게 딱 걸리며 깜빵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11] 광저우. 장군 관천배가 지키고 있었던 지역이다.[12] 자국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실제 역사와 조금 다르게 연출되었다. 어찌 되었든간에 여러모로 중국 민족주의적인 요소들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평이다.[13]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특사[14] 중국은 예로부터 고기와 채소를 불문하고 생식을 기피하여 고기도 채소도 모두 익혀 먹는 것을 선호했었다. 근대화되고 한국과 일본에서 생식 문화가 전래된 후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날고기 및 날생선을 먹는 문화가 퍼졌으나 장노년층 중에는 지금까지도 날것을 못 먹는 사람들이 많다.[15] 당시 임칙서를 몰아가 관직에서 파면시켰는데 결국 자신도 관직에서 짤려 먼 타지에 유배당했으니 자승자박인 셈.[16] 차도살인식으로 영국에게 한방 먹여줄 생각으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