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帝國主義|Imperialis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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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hodes Colossus[1] 로도스의 거상 |
1. 개요
...그들 모두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도 된다는 듯 바다 세계를 침략하여 정복했고, 해적 같은 세 강대국이 폴란드를 나눠 가졌듯이 각자가 대서양과 태평양과 인도양을 나눠 가졌다.
허먼 멜빌, 1851년 작《모비 딕》 14장 중[2]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는 열강들이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에 대해 정치, 경제 및 문화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사상과 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의미한다. 따라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의 제국과는 의미가 다르다. 허먼 멜빌, 1851년 작《모비 딕》 14장 중[2]
제국주의가 야기한 막대한 폐해를 의식하여 현대에 제정되는 국제법과 국제협약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와 자유로운 주권 행사가 전제된 자결권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2. 특징
제국주의의 태동을 언제로 잡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좁게 잡으면 산업 혁명 이후 열강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넓게는 신항로 개척 시대를 전후한 식민주의의 유행까지 포함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에 제국주의가 시작됐다고 보는 학자들은 15-18세기에 유럽이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한 것을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라 부르면서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전형적인 형태의 제국주의는 다음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 강압과 무력을 통해 종족적/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공동체(나라, 민족 등)를 병합. 이렇게 식민지가 구성됨.
- 병합 과정에서 고유의 정치 체계를 파괴하거나 꼭두각시 형태로만 남겨놓고, 정치적/외교적 기능을 무력화시킴.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탈취하고 나면 지배국가의 통치체계를 이식.
- 지배국가(정권)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왜곡된 사회과학/자연과학적 이론으로 차별을 정당화.
- 피지배민족이 지배민족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을 넘어 지배민족의 지도와 교화를 통해서만 피지배민족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설파.
유럽과 미국이 아시아·아프리카권을 대상으로 실행한 제국주의는 사회진화론, 인종차별, 우생학, 근대만능주의 등의 정당화 수단을 사용했으며 심지어 유럽에서도 식민지-제국과 유사한 구조가 형성됐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의해 분할된 동유럽이 그 예시다. 물론 동유럽은 일단은 같은 유럽으로 인식했기 태문에 아예 비문명의 세계로 간주한 비유럽권보다는 훨씬 나았다.[3]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중국 등에서 원주민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것도 넓은 의미의 제국주의로 볼 수 있지만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형태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 사례들은 원주민 집단을 파괴한 뒤 지배민족(나라)의 지배체제를 제외한 하부구조를 거의 남겨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국과 식민지를 분명히 구분하고 크기만으로는 식민지가 본국 이상인 경우도 있던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구조와 다르다.
3. 역사
3.1. 식민주의에서 제국주의까지
식민주의 초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원주민의 정치 체제를 전복시킨 뒤 귀금속을 약탈하거나 노예무역을 했다. 이러한 착취 구조는 얼마 안 가 생명력을 잃었는데 국내에 생산동력을 갖추지 않고 원료만을 파는 방식에 의존하다가 오히려 국내 산업이 고사했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는 프랑스식 모델과 영국식 모델이 위세를 떨쳤다. 프랑스는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면서 농업 이민을 주로 실시한 반면 영국은 간접통치를 하면서 원료 수탈과 자국시장에서의 소비 쪽으로 나아갔다.제국주의를 주도한 나라들에서 실질적인 혜택은 고위층에게 돌아갔고 서민들은 궁핍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은 학술적으로도 조명됐다. 카를 마르크스가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자본주의가 극단화되면 제국주의로 비화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강대국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착취하다가 한계에 부딪히는데 피지배계급의 저항의식이 고양되는 데다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원가절감/가격경쟁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자본가계급은 제국주의를 실행함으로써 생산된 물자를 식민지에 안정적으로 수출하고, 자원을 저렴하게 강탈하며 인종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로 국내 피지배계급의 공격성을 타국(식민지)인들에게로 돌리고, 식민지의 저임금 노동력을 근거로 국내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누른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레닌은 아예 한발짝 더 나아가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위의 설명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경제적 목적으로 식민지배를 한 사례가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식민지배가 더 많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콩고나 인도네시아처럼 자원을 위해 식민지배를 했거나 인도처럼 아예 국가의 주요 무역 축을 담당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식민지는 경제적으로 새로운 시장이 되어주지 못했으며 위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식민지의 저임금 노동력의 덕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제적 목적으로 식민지배를 했는데 지배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나가 오히려 국가 대 국가로 무역해 얻는 것보다 손해를 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실제로 식민지화의 목적은 국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불만을 해외로 투사하거나 '문명화'를 명분으로 기독교 전파를 원하는 보수세력과 문명화의 전파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행한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프랑스의 경우 알제리 식민지화는 해적 문제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으나 그건 해안가 한정이고 알제리 내륙과 나머지 식민지화는 경제적 이유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것이 대다수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역시 경제적으로는 파국이었으며 정치적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단 이 반론은 결과론적인 것에 가깝다. 제국주의의 첫 단계는 타국에 수교를 요청하면서 시작되는데(흑선내항이나 운요호 사건 등) 이 단계에서는 분명 새로운 시장, 자원 채굴권 및 값싼 노동력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맞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제의 철도 건설 등 효율적으로 뽑아먹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다만 식민지배가 결과적으로 비용 대비 수익을 따졌을 때 그리 경제적이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문인들도 산업화와 제국주의가 병행되던 시대상을 다루었다. <올리버 트위스트>, <레 미제라블>, <목로주점> 등만 읽어도, 하층민들의 처참한 삶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제국주의는 서민들의 불만을 다른 화두로 돌릴 떡밥으로 기능한 측면도 있다. 쇼비니즘과 징고이즘으로 대표되는 맹목적 애국주의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내세워진 것이다. 나폴레옹 3세나 벤저민 디즈레일리 등의 정치가들도 팽창주의적 정책을 펼쳐 자국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당대에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계층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그런 열정이 제국주의적 광기로 이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영국 보수당 정권이건 프랑스 제3공화국이건 그야말로 제국주의 정책의 온상이었다. 서구 열강들의 이러한 모습은 우습게도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에서 정의한 야만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려 경쟁하다 보니, 이들끼리의 충돌도 불가피했다. 이러한 이유로 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의 영토는 황폐화됐고 군사력의 상당 부분이 소실됐다. 이렇게 유럽이 식민지를 유지할 역량을 잃어버린 가운데 새롭게 세계의 주도권을 쥔 미국은 민주주의 전도사를 자칭하고 소련은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주의로부터의 탈출을 부르짖었다. 유럽 안에서도 확장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1900년대 초반부터 식민지들의 독립이 시작되어[4] 1950~60년대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 중 대부분이 독립했고 제3세계 담론이 활발하게 들끓었다. 그러나 유럽이 식민지에 강제로 구축했던 억압적 체제와 그 잔재들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적잖은 독립국가들이 정치적 공백으로 인해 내전 등 내홍을 겪거나 독재체제[5]로 이행하는 등의 비극을 겪었다. 즉,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식민지배 종결 이후로도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분쟁과 내전, 분단, 종속, 쿠데타 등으로 피를 흘려야 했다. 2025년 현재도 제국주의의 영향은 전 세계 사회에 깊게 남아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인 수단과 협력이 요구되고 있다.
3.2. 현대의 제국주의
3.2.1. 신식민주의
과거의 제국주의처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지만 해당 국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종 정치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형태이다. 과거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가 병행되던 시절부터 그래왔듯이 신식민주의에서도 경제적 혜택은 해당 국가들의 서민층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병행되는 특성상, 공장 해외이전으로 인한 높은 실업률과 복지 축소 등 역효과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도 많아 자국민에게도 긍정적이지만은 많다.현대의 대표적인 신식민주의 국가로는 현시대의 강대국들인 미국, 러시아, 중국, 및 서유럽, 일본이 있다.
미국과 일본은 다른 나라의 땅을 사서 식량 자원을 개발하거나 채굴권을 얻어 자원 개발을 한다. 대가만 지불했지 사실상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6][7]
소련은 냉전 시절에 동유럽 국가들에 강하게 개입했다. 아예 브레즈네프가 제한주권론이 내포된 브레즈네프 독트린까지 천명한 바 있다. 이는 프라하의 봄에 대한 개입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훗날 고르바초프에 의해서야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부인됐고, 그 영향으로 1989년에 동유럽 혁명이 발발했다. 이후 출범한 러시아 연방은 소련 붕괴 후 혼란이 어느정도 진전되자마자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떨어저나간 영토들에 대하여 다시금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고 있으며 이에 반발하는 나라들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두고 러시아 제국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예전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개입을 계속해오고 있으며, 이들이 독립한 뒤에도 이런저런 정책으로 간섭하는 중이다.[8] 특히 프랑스는 프랑스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고 기준금리/환율까지 결정하는 CFA 프랑 체제를 통해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해당 국가들의 부가 프랑스로 유출되어 경제성장이 억제되고 있다. CFA 프랑 체제를 탈퇴하고 싶어도 프랑스가 경제, 외교, 군사 분야 등 다방면으로 이들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는데, 결국에는 쿠데타 벨트가 형성되면서 프랑스 손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르완다가 콩고민주공화국, 부룬디 등 주변 국가들에 반군으로 위장한 군대를 보내어 영향력을 넓히거나 자원을 수탈하는 등 팽창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지리적인 거리가 먼 국가들에 한정해서는 내정 개입이 적어, 반서방 독재 국가가 많은 아프리카의 지도층, 즉 독재자들은 중국의 자원외교 및 지원을 반기는 편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다음으로 아프리카를 쥐락펴락 했었던 아프리카의 자본가들이나 지역 소상공인들한테 환영받지는 못한다. 아프리카 자본가들과 소상공인들에 있어서 중국은 그들의 생존 영역을 침범하는 적대세력이나 다름없다. 한편으로 중국은 아프리카의 다수 국가들에 산업 인프라를 지원해주는 대신 자원과 중요 사회 자본을 얻어오는 식의 대외 영향력 행사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게 다른 나라들에게 '자원 제국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대로 스리랑카, 파키스탄,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과 같은 거리가 가깝고 자국에 비해 국력도 한참 약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눈치보지 않고 거리낌없이 패권주의적인 외교 및 토지, 항구 임대를 하고 있다. 이를 중국 제국주의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며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중국 회사들의 노골적인 경제침탈과 하대, 새로운 인프라 건설이나 유지에도 현지인들은 배제하고 그 자리에 본토 중국인들을 데려와 관리하는 등 현지인들에게 적절히 분배되지 않는 이득, 중국의 힘을 실컷 이용해먹고 정작 민심이 흉흉해지자 모든 걸 중국의 탓으로 돌리며 뒷통수를 친 현지 권력자들 등의 이유로 중국에 대한 여론이 구 제국주의 국가들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이런 곳들은 중국 대신 새로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그너 그룹, 레두트 등의 러시아 세력을 환영하기도 한다.[9][10]
번외로, 식량자원 수탈형 제국주의의 경우 대한민국의 민간기업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2008년 대우 로지스틱스의 마다가스카르 농지 구매 사태 역시 민간 차원의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마다가스카르는 이 사건의 여파로 혁명이 일어났다. 그외에 정부 차원에서도 이명박 정부 당시의 자원외교 역시 신식민주의적이라는 지적이 (특히 친박계와 야권 등) 일부에서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남방 해상 영해 범위가 너무 넓다는 점과 해군이 좁은 영토에 비해 비효율적인 대양해군을 외친다는 점 역시 대한민국도 신식민주의 국가라는 일각에서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현 대한민국 정부 자체는 강대국들과 달리 대내외적으로 신제국주의에는 그렇게 관심이 있다고 평가받진 않으며, 설령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대놓고 신식민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진 않고 있다.
3.2.2. 인권 제국주의
일부 문화상대주의자들은 전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서방의 개입이나 서구식 민주주의 주입 시도 자체를 '인권 제국주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인권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보일 수 있는 사례로 리비아 공습, 북한 문제의 유엔 인권위 회부 문제 등이 있다.문화상대주의자들은 문화는 어떠한 잣대로 가치판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모든 문화는 그 고유의 특수성과 맥락을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것 자체는 서구식 자유주의의 가치를 타 문화권에 강제하는 제국주의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인권 제국주의이라는 담론이 등장한 이후로 인권의 보편성 vs 상대성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들은 서구, 특히 미국의 위선을 가장 먼저 공격한다. 과거 냉전기에는 민주주의 정부라도 소련에 줄을 서면 가차없이 개입했고[11], 인권을 침해하는 독재정부라도 친미라면 거리낌없이 지원했기에[12] 완전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13]
인권에 보편성이 있느냐에 대한 논쟁은 개인적 가치판단의 문제이므로 명확한 결론은 없지만 서구에서 발원된 인권 담론은 현재 어느 정도는 전세계적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논거로 인권의 보편성 전부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별개로 제국주의에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를 핑계로 서구에서 기원한 인권과 자유 개념까지 제국주의적 요소로 불순히 보고 탄압하는 사례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냉전 당시의 대한민국, 중화민국, 남베트남, 남아프리카 공화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이 이러한 사례에 속했고 오늘날에는 북한과 중국, 동남아[14]와 아프리카 국가들, 상당수의 이슬람 국가들이 있다.[15]
4. 끝나지 않는 논쟁
4.1. 일각의 '제국주의 옹호론'과 재평가 시도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수정주의는 통계학 기반의 경제학사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목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연원한 제국주의 이론이 실제와는 맞지 않음을 증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의 연구들은 수치자료를 제시하면서 오히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로부터 별 경제적 이익을 얻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니얼 퍼거슨은 제국주의가 전세계적인 공용어(영어나 프랑스어) 보급, 철도 보급, 교육기회 확대 등을 가능케 만들어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면 제3세계는 지금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 여긴다. 또한, 탈식민지화 이후에 제3세계 국가가 겪는 빈곤문제는 그들 국가의 지도자들이 행한 사회주의 정책이나 부정부패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프랑스 지배 하에서 세네갈은 기존 토후국 시절보다 위생이나 교육 면에서 발전을 누렸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비록 정복을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프랑스가 의학 및 교육을 보급시켰다는 것이다.
4.2. '제국주의 옹호론'에 대한 반박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은 다음 논지로서 반박된다.첫번째로 식민지 경영이 식민 모국에게 별다른 경제적 이익을 주지 못했다는데, 이 주장대로라면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했던 점의 설명이 어렵다. 아무도 식민 모국의 지배를 환영하지 않는데 말이다. 선악의 문제를 떠나, 제국주의가 과연 효율적인 정책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저런 수정주의적 견해로 인해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를 경영해 온 제국주의 국가 전체를 보면, 이러한 식민지 경영이 국민의 삶의 질이나, 세수 확보등을 통한 시장에서의 입지 강화에 큰 실효는 적은 반면, 이를 꾸려나가기 위한 비용은 더 큰, 배보다 배꼽이 큰 방식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 국가 내부에서 이를 통해 이득을 얻은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대게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가 낳은 최악의 인물 중 하나인 레오폴드 2세만 해도, 그의 식민지 수탈이 벨기에를 딱히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콩고 공화국 수탈의 정점에 선 그와 그에 협조한 이들은 이를 통해 상당한 치부와 개인적인 이득을 얻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진실이다.
물론 레오폴드 2세는 극단적인 예이긴 하나 이런 식민지 수탈에 들어가는 비용은 국가가 지원하는 행정체계, 국민, 군인들에게 대신 지불하게끔 하며, 이를 통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 예는 매우 흔하다. 대표적인 제국주의자였던 세실 로즈는 로디지아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회사를 설립하고, 남아공의 자원을 무자비하게 수탈했으며, 그가 남긴 유산이 600만 파운드 가량 될 정도였다. 참고로 세실 로즈는 제국주의 시절에 움직인 자본가 중에서 뒤가 좋지 않았던 예인데도 불구하고, 수탈 과정에 개입하여 벌어들인 수익은 엄청 났다는 것이다.
이런 이익은 결코 국가와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배분되는 국익이 아니라, 일부 자본가 등의 소수만이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과 심지어는 정치인들까지 국익에 대한 환상과 백인우월주의에 단꿈을 꾸는 동안, 이런 소수의 인사들은 이 미쳐 돌아가는 판을 이용하고, 선동하는데 열중했으며,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러한 제국주의 이론들을 신봉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본다면, 제국주의는 국가라는 개념에서는 실효성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드러낼 때까지 작동했던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즉, 모두가 이득을 보지는 못했어도,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확실하게 이득을 봤으며, 이를 통해 획득한 부와 영향력이 제국주의 국가 내의 사회에 적극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와 영향력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수탈을 통해 얻어지는 부를 획득하고 독점하기 위한 치열한 내부적인 경쟁과 시장 개척에 대한 열망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대신 빚을 지고, 대신 재화와 인력을 소모하고 있던 국가,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 정책에서 딱히 득은 보지 못했으면서, 식민지인들 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사실을 자위하며 비슷한 방식으로 수탈당하던 대다수의 하층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자 제국주의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과 노동자의 권리를 요하는 사회주의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러한 갈등이 어마어마하게 불거져 국가 권력과 체제를 뒤흔들기 시작했다는 것만 봐도, 제국주의를 통해 어느 누구도 그 과정에서 이득을 얻지 못했다는 주장은 논파된다.
제국주의가 정말로 모두를 말아먹었다면, 이러한 형태의 계급 갈등이 발생하기도 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가 멸망 테크를 탔던가, 망했을 것이기 때문. 그러나 현실은 강력한 내부적인 갈등을 통한 혼란상이 유발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국가 전반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약을 하면 유럽이 식민지에서 얻게 된 이득은 분명 컸으나 이것의 분배 및 대가는 결코 공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나오는 그 이득에 현혹된 대다수 국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제국주의 팽창을 합리화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즉 유럽이 고비용을 감수하고 식민지의 근대화에 애썼다는 말이 아니라(실제로 그러지도 않았고), 백인의 의무 등의 사이비 이론에 휩싸여 제국주의 이론을 정당화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제국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의 현대의 유럽 국가들은 영국 등 자국 이주자 위주로 커넥션을 구축한 국가 등 극히 일부를 빼면 옛 식민지를 통해 그다지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떤 제국주의도 상당수의 현지 협력자 및 동조자들의 암묵적 묵인 없이는 장기간 성공한 사례가 없다. 또한 현지 협력자 및 동조자들은 대부분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내부적 갈등 요소로 인해 생겨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도의 국민회의를 예로 드는데, 현지 협력자들로 구성된 기관마저 결국 식민지 현지인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1905년 벵골분할령에 반발하는 것을 기점으로 반영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으로도 반박할 수 있다.
제 3국의 빈곤 문제는 제국주의와 무관하고, 식민지 국가 사람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라는 주장도 웃기는 건 마찬가지. 대표적인 예로 그들은 말리의 모디보 케이타와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를 들고 있는데, 사회주의와 영 상관없는 콩고민주공화국이나 부룬디, 차드 같은 나라들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다. 애초에 우민화 정책과 중우정치, 독재 등은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가리지 않고 그 나라의 상황에 따라 작용하는 독인 점에서 사회주의를 집어 비판하는 것도 곤란하다. 줄리어스 니예레레의 경우 자신의 경제계획이 잘못되자 그걸 순순히 인정하고 깨끗히 정계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대륙으로 제한하자면 개념있는 지도자 소릴 들으며, 탄자니아는 여러 국가가 제 기능을 못하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래도 안정된 편에 속하는 국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실컷 민주주의를 심고 다녔다고 해도 제대로 자리잡기까지 오래 걸린 나라는 한둘이 아니며, 몇몇 나라들은 아직도 우여곡절을 겪는 중이다. 또한 남미와 중동의 각국의 역사를 보면 그 국가 사람들이 정정당당한 민주주의 선거로 뽑은 지도자를 단지 미국의 국익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개입해서 없애버린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반론으로 적합하다. 참고로 첨언하자면 앞서 예로 든 세네갈의 영아사망률은 세계 48위로 높은 편이고 평균수명은 에이즈 문제가 심각하지도 않음에도 56세에 불과하여 미개발국과 다를 것이 없다. 문맹률 또한 60.7%에 달하며 그나마 독립 이후 개선된 게 이 수준이다. 또한 식민 통치 때문에 경제구조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농업국가[16]라는 기이한 형태로 변해 버렸다.
극단적으로는 지배당하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평화롭던 피지배국이 지배국의 영향을 받아 독립 후에 과거의 지배국 이상으로 악랄하게 변해 버리는 일도 많았다. 인종 차별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한때 전제군주제로 회귀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아프리카 독재의 스테레오타입이 만들어진 우간다, 정부 자체가 소멸하여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변한 소말리아, 두 부족의 갈등을 이용한 벨기에로 인해 국민이 학살의 주체가 된 르완다, 세계 최악의 언론 탄압국인 에리트레아, 엄청나게 왜곡된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민중을 탄압하는 북한, 독립 이후 통합이 안 되는 틈을 타 테러리스트들에게 점령당한[17] 아프가니스탄, 인류 역사상 최악의 국가로 꼽히는 민주 캄푸치아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4.3. 피지배 국가에 대한 사죄와 보상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지 최소 반백년이 넘은 현 시점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같이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정치/경제적 착취와 피해를 받은 구 식민지 출신 국가들은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편이다. 다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피식민지 국가들을 무시하지만 일본만이 보상해줬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일단 대한민국이나 인도, 인도네시아 등과 같이 독립 후 경제발전을 통해 강대국 ~ 지역강국 급으로 체급이 매우 커진 나라들에 대해서는 일본, 영국, 네덜란드 같은 구 제국주의 출신 국가들은 직/간접적으로 여러 차례 자신들의 과거사를 반성하는 발언을 해 주고 경제적 차관 역시 제공해 주었던 예들이 있다.[18]
이렇게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제국주의 출신 국가들은 자신들의 구 식민지에서 발생한 국지적인 사건 등에 한해서는 부분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있으며 경제적 차관을 지원해 준 사례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식민지배를 하면서 발생한 국지성 사건에 대해서만 부분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죄 및 보상을 하는 것이지,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사죄와 그에 따른 충분한 배상을 한 사례는 아직까지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유럽 내에서 일부 인사들이 과거 조상들이 자행했던 제국주의의 끔찍함과 그에 따르는 식민지배 자체를 반성 및 사죄하는 발언을 하는 양심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적인 의견 표현이지, 국가가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것은 아니며 심지어 해당 국가 스스로가 개인적인 의사 표출이라고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물론 피해를 받았던 나라들도 당연히 가만히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독립 이후 사죄나 배상을 요청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들만 하더라도 국내의 어지러운 사정과 식민모국에 의한 정치/경제/문화적 종속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이들과 척을 지기가 힘든지라 사죄나 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고사하고 과거사를 자신감있게 꺼내는 것 자체부터가 상당히 지지부진한 상황이며,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인 아시아 중진국 국가[19] 역시도 독립 이후 정치/경제가 엮인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상황인지라 구체적인 사후책임(보상액 산정 등)을 논하는 것에 대해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출신 국가만 해도, 독립 초기부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국민들에게 제국주의 피해자 운운하며 반제국주의, 반서방주의를 마구 선동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말만 씨불였을 뿐이고, 실제로 정권을 잡고 나서는 독재자가 되어 뒷구멍에서 식민모국 정치권과 은밀히 공작질을 하면서 줄것 다 주고 받을것 다 받아먹었다. 이러한 사례들이 국가별로 너무 많다보니, 독재정권 시절이 지난 현 정권에서 식민모국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가 어렵다. 아울러 식민모국에서도 과거의 선례들이 있다보니 과거사 논의를 뭔가 불순한 목적을 가진 정치적 거래로 오해하기도 한다. 게다가 당시의 식민지 국가가 독립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이유(내전, 혁명 등 정치사회적 변화)로 개편이 되어 민족/체제 등이 전혀 다른 국가로 탈바꿈되었다면 그 식민지 피해자[20]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애매해진다.
제국주의 출신 국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백번 양보해서 사죄의 말은 할 수 있다고 쳐도 그에 따른 책임, 즉 배상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될 때부터는 문제는 아주 커지고 복잡해진다.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과거부터 보유했던 식민지가 한두개뿐만이 아닌 경우가 절대다수인지라, 특정 어느 한 국가에 배상을 해주었을 때에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형평성 차원에서 똑같이 보상을 해줘야 한다. 어느 곳은 해주고 어느 곳은 안 해주고 이런 처분은 피해받은 식민지 국가 입장에서는 도저히 말이 안 되기 때문. 이렇게 된다면 그 제국주의 국가는 아무리 잘사는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경제와 국력이 배상 문제로 크게 휘청거릴 수 있다. 특히 당대 정치인/기업인 등 제국주의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 요구 등 정치적인 문제까지 이어진다면 국가의 정체성까지 흔들릴 문제이다. 당대 제국주의자는 식민지 입장에서 봤을 때 악인(惡人)이겠지만 제국주의 모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다소 이견이 있을지는 몰라도) 대체적으로 국가의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민주화로 인한 정치적 안정성 확보 및 선진국 반등[21]으로 일본에 대충 맞닥뜨릴 수 있는 국력을 갖춘 199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과거사에 대해서 자신감있게 맞다이를 뜰 수가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해야할 일들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구 식민지 국가가 식민모국에 대해 과거사 청산을 힘있고 줄기차게 요구할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대한민국의 일제강점기 문제와 자세한 사항은 일본/과거사 청산 문제를 참고.
5. 제국주의 국가 목록
식민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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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534~1980) | 영국 (1607~1997) | 포르투갈 (1415~2002) | |||
■ 황제국 | ■ 시대에 따라 황제국·비황제국으로 변화 | ■ 비황제국 |
상기된 제국주의 국가들은 강대국으로 개편하여[22] 21세기 현재에도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반적인 질서를 주도하고 있다. 해당 목록들은 넓은 의미로써 제국주의가 아닌 좁은 의미의 식민제국주의에만 국한한다.
또한 인도, 대한민국, 브라질 등의 극히 일부의 제국주의 피해국 국가들도[23][24] 엄청난 성장으로 당시 제국주의 국가 급의 강력한 국력을 갖추면서[25][26] 제 무대에서 상당한 목소리를 내는 편이다. 다만 이들 국가들도 초강대국인 미국처럼 리더 정도의 위치에서 세계 질서를 주도할 정도는 못 된다. 또 제국주의 피해국 출신인 중국이 미국 다음가는 어마어마한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여러 시도는 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 역시 양대 초강대국이라 하기에는 미진한 편이라 다른 제국주의 국가 출신 러시아와 연합하여 겨우 대응하고 있다. 다만 제국주의를 식민제국주의 뿐만이 아닌 팽창주의, 강대국의 국제사회에서 강압적인 영향력 등을 포함시킨 넓은 의미의 제국주의라면 21세기 중국도 제국주의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상기 언급된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가들은 지금 현재에도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식민지배국들이 구축해놓은 질서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포르투갈 제국
제국주의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하고 가장 먼저 몰락한 사례이며 유럽 제국주의의 시초이다. 동시에 1999년 식민지를 반환하며 소멸한 세계 최후의 식민제국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포르투갈은 산업혁명 이전인 18세기에 몰락해서 일반적인 제국주의 국가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인도양과 브라질을 지배하던 엄연한 식민제국이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가장 먼저 열고[27], 가장 처절하게 몰락했다.[28] 기술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영토도 별로고 내세울 게 없다. 애당초 신대륙에서의 이익도 제대로 얻어먹은 건 스페인이지 포르투갈이 아니며,[29]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는 자기보다 훨씬 작은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타협하는 와중에도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반쪽만 남겨 달라고 하는 비굴한 모습도 보여줬으며, 나중엔 미국과 호주, 말레이시아를 등에 업은 수하르토 인도네시아에게 그마저도 뺏기고 동남아에서 완전하게 쫓겨나게 된다. 20세기에 인도가 독립한 후에도 옛날에 조차한 포르투갈령 인도[30] 지역을 계속 지배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고수하다 결국 인도군에게 참패하고, 주둔군 수천 명이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했다.[31] 또한 1970년대에 앙골라(포르투갈령 앙골라), 모잠비크(포르투갈령 모잠비크),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포르투갈령 기니), 상투메 프린시페 등 독립하려는 아프리카 국가에 공산주의 제재를 핑계로 군대를 보내서 당시 국제 왕따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정부 및 로디지아, 말라위, 프랑코 정권과 손까지 잡아가며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이를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라고 하며, 1970년대 아프리카에 안 좋은 쪽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결국 생돈과 젊은이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며 민심의 이반만 얻은 포르투갈은 식민지 개발에 반대하는 세력의 카네이션 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 경영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포르투갈 식민제국은 1974년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1999년 마카오 반환을 마지막으로 이름뿐이었던 포르투갈 제국은 진짜로 막을 내린다.
- 스페인 제국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로 재빨리 신대륙을 개척해 막대한 부를 얻었다. 한때 포르투갈의 브라질(포르투갈령 브라질), 영국의 가이아나(영국령 기아나)와 벨리즈(영국령 온두라스), 프랑스의 기아나, 네덜란드의 수리남(네덜란드령 기아나)을 제외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전부 스페인이 차지했다. 다른 서양 제국주의 국가와 비교해서 그나마 온건한 편이기는 했어도, 스페인의 식민지배 역시 가혹했다. 가령 전세계 은 채굴량의 60% 이상이 쏟아져 나와 스페인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준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에서는 원주민들이 당시 유행하던 수은 아말감법에 강제로 동원됐다. 따라서 광산 주위 원주민들은 수은 중독과 노동 착취로 죽어갔다. 당시 유럽에 거대한 경제 팽창을 일으킨 신대륙의 막대한 광물들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 착취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스페인은 북아메리카 지역의 멕시코나 미국 서남부 지역(캘리포니아, 텍사스, 뉴멕시코, 플로리다 등)도 식민지로 삼았다. 아프리카의 서사하라(스페인령 모로코) 지역과 적도 기니(스페인령 기니)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훗날 식민지들이 하나둘씩 독립해 나갔지만, 오늘날에도 스페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5억이 넘으며 옛 식민지들은 경제/문화적으로 스페인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 프랑스 식민제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남은 몇 안 되는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32] 영국과 가장 치열하게 영토 경쟁을 벌였고 지금도 전세계에 해외 영토가 있으며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본국의 일부처럼 여기던 프랑스령 알제리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부터[33],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기아나, 퐁디셰리(프랑스령 인도), 마다가스카르(프랑스령 말라가시), 레바논, 시리아(시리아-레바논), 아이티(생도맹그)[34]를 점령하고 청나라에도 여러 조계지를 건설해 착취했다. 많은 식민지 독립 운동가들을 프랑스에서 직도입한 기요틴(단두대)으로 참수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악명이 높아서 과거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겪었던 국가들은 모로코, 튀니지 같은 북부 아프리카의 아랍-베르베르계 국가들이나 베트남, 세이셸 등을 제외하면 아직도 내전, 반란, 독재, 빈곤 등으로 국가가 제대로 기능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들이 상당하며 그나마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국가들도 선진국과는 거리가 멀다.[35] 피지배국에 대해 가혹했던 것은 물론, 본국 피지배층마저도 세계 최초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왕정을 뒤엎어 버리고 공화정이 잘 자리잡은 현재까지도 프랑스 정부와 갈등을 겪을 정도로 프랑스 지배층의 피지배층 탄압 문제는 유럽 내에서도 심각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외세에 의한 점령을 겪으면서도 종전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프랑스령 알제리(알제리) 같은 식민지들에서 일어나던 식민지 독립 운동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을 일으켜 억누르려다 외교적으로 여러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군사적으로도 전쟁에서 패배해 본토에서 식민지에 집착하던 프랑스 제4공화국 정권이 샤를 드골에게 붕괴된 이후에야 이들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현재는 누벨칼레도니,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비롯한 태평양의 몇몇 섬들과 프랑스령 기아나, 레위니옹, 마르티니크, 마요트 등 일부 지역만 보유한다.[36]
- 이탈리아 제국
이전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의 세력 다툼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배당하는 국가에 가까웠다. 사보이아 왕가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주축으로 이탈리아 통일이 이루어져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으며,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이탈리아령 소말리아)[37], 리비아(이탈리아령 리비아), 에리트레아(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가진 제국주의 국가였다. 파시스트 정당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 추축국 동맹에 가입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알바니아를 침략해서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로써 점령하였고 라테라노 조약 등으로 이탈리아 반도 안의 내륙국인 바티칸과 산마리노를 압박했으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그리스 지역에도 스파치오 비탈레와 고대 로마의 부활을 이유로 하여 눈독을 들였고 나치 독일과 함께 북아프리카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원 영토를 지키던 영국, 이집트 왕국, 소련과 교전했다.
- 네덜란드 제국
예로부터 무역 국가, 해상의 지배자로 유명했고, 타이완 섬,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수리남, 미국 뉴욕(뉴 암스테르담), 일본 데지마, 케이프타운 등 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부 지역들을 비롯하여 의외로 여러 식민지를 보유했다. 특히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경우 본국보다 수십 배 거대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자체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도 운영하며 동남아와 인도양 일대를 지배한 강대국이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독립할 때 4년에 걸쳐 전쟁까지 치른 끝에 미국, 소련 등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독립을 인정했다.[38] 1975년 마지막 대륙 내 식민지인 수리남이 독립한 이후 남아 있는 아루바, 퀴라소, 신트마르턴은 명목상 네덜란드 왕국을 구성하는 구성국으로서 본국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 대영제국
이 분야의 시초이자 끝판왕.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만큼, 바로 옆에 있는 아일랜드(영국령 아일랜드)와 헬골란트부터 태평양 한복판의 뉴헤브리디스 제도까지 전 세계의 무려 4분의 1의 광대한 식민지를 가졌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이었다. 거기다가 영국은 당시에 개척한 미국이나[39]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식민지가 아닌 자국 영토[40]라는 개념으로 개척했고 훗날 자치령의 형태로 각각 반쯤 독립시켜 줬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다.[41] 이후 19세기~20세기 초반 당시 그레이트 게임으로 불리는 대러 정책으로 러시아 제국과 가장 강한 대립각을 세우며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42]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령 아일랜드가 1171년부터 계속된 피지배층 탄압과 부활절 봉기 유혈 진압을 못 견디고 독립 운동 끝에 1922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고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중국 등의 압박[43] 및 대외개입으로 식민지를 줄줄이 상실하며 1997년 마지막 남은 영국령 홍콩마저 홍콩 반환으로 중국의 특별자치구 홍콩으로써 떨어져 나가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중에서는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별 마찰 없이 발을 뺀 사례도 있었고, 영국령 케냐(케냐)와 남아라비아 연방 및 아덴(남예멘)이 독립하려고 할 때 군대를 동원해 식민지 독립운동을 유혈 탄압, 학살하는 실책을 보이기도 했다.[44]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처럼 남의 나라의 전쟁에 식민지 수호 여론을 위해 간섭한 경우도 있으며, 키프로스처럼 온갖 내부 분쟁과 테러를 견디다 못해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손을 털고 나온 경우도 있다. 현재도 영어나 국제 매너, 뛰어난 대중문화, 영국의 문화적 후손인 미국의 존재 등으로 전세계에 소프트 파워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세계에 흩어진 잔존 해외영토는 영국군과 동맹인 자유 진영 국가들의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옛 식민지들과 동등한 관계로 연대하는 영연방을 이루고 있다. 홍콩의 경우 영연방은 아니지만 옛 식민지였던 역사로 인해 지금도 중국에 맞서 홍콩 인권 문제에도 개입하고 있다. 또 식민지보다는 교역지로 발전시킨 도시들의 경우 현재 세계의 주요 경제 중심지로 세계 경제에 매우 큰 영향을 주고 있다.
- 덴마크 제국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 같은 북유럽 일대에 영토를 많이 확보했으나, 타 대륙인 지금의 가나 해안 일부와 카리브 섬 일부, 인도 일부 지역, 안다만니코바르 제도를 지배한 적도 있었다. 특히 자체적인 동인도 회사를 갖추고 있었을 정도로 대외진출에 적극적이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할 때 상대하기 가장 벅찼던 맞수는 프랑스였지만 의외로 덴마크와도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경쟁의 승자는 결국 영국이었고, 덴마크는 인도 일대의 모든 식민지를 영국에게 넘겼다.
- 러시아 제국
몽골 제국(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200년 동안 받았으나, 독자적으로 힘을 키워 몽골을 몰아낸 뒤에는 옛 지배자 몽골에 버금가는 팽창주의를 선보였다. 원래는 모스크바 지역에서 몽골 지배자들에게 조공을 바치던 소규모 공국 중의 하나였으나[45] 이반 뇌제가 다스리던 16세기 말부터 팽창을 시작하여 한때 자신들을 지배했던 몽골 세력 다수를 정복, 흡수하고[46] 북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이란 일부 지역과 만주, 청나라 북부, 북미 대륙 서해안(지금의 알래스카 일대)까지, 대영제국 다음으로 큰 제국을 건설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1제국 몰락과 함께 러시아가 러시아 제국으로 본격적으로 강력해진 19세기 초반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대영제국의 가장 강력한 견제 대상이었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다. 부동항 확보를 위해 조선에도 관심을 보인 몇 안 되는 제국주의 국가였으나 영국과 일본에 의해 러일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며 이러한 관심은 좌절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는 와중에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하고 적백내전동안 다른 열강들의 내정간섭 시도와 소속국들의 분리독립 시도를 어떻게든 상대하다가 최종적으로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가 외국을 끌어들인 백군을 격파하고 러시아를 계승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 시기에는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식민지 독립을 지원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대표적인 것이 식민제국과 군벌의 밀착관계를 배격하던 중국의 쑨원을 도운 것이다. [47]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으로 정권이 굳혀진 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 이후 독소전쟁 등을 겪고 훗날 1956년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 유혈진압(다뉴브 작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을 겪으며 소련 또한 서방과 중국으로부터 제국주의 국가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소련-러시아 제국주의는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비에트 제국 및 러시아 제국주의 참조.
- 미국 식민제국
미국 독립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미국인들의 팽창욕 때문이었다. 13개 식민지 시절 영국은 전비 부담으로 원주민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식민지인들이 진출하는 것을 막았는데, 이에 대한 불만이 미국 독립전쟁의 한 원인이었을 정도로 미국은 호전적인 시작을 보였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사법체계를 무시하면서까지 개척 정신의 이름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들을 침략했는데, 이때 직접적으로 살상하거나 재이주 과정에서 죽은 원주민들은 수십만에 이른다.[48] 이를 합리화했던 말이 바로 명백한 운명이다. 심지어는 옛 주인인 영국 땅에도 눈을 돌려,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에 묶여 있었을 때, 영국령 캐나다까지 공격하려고 깊숙히 몬트리올까지 진출했다가 패배했고, 그 여파로 워싱턴 DC도 점령당하고 백악관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49] 이후 당시의 초강대국 영국이 버티는 캐나다는 포기하고, 그 대신 나폴레옹 3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멕시코 혁명으로 어수선한 멕시코 땅에 눈독을 들여 현재의 텍사스[50], 뉴멕시코, 유타,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애리조나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빼앗았다. 태평양까지 진출한 미국은 매튜 페리 제독의 흑선내항과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적극적으로 에도 막부의 일본을 식민지화하려 했으나 남북전쟁과 역량 부족으로 인하여 실패했고 이어 미서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으로부터 쿠바 도독령(쿠바)나 필리핀 도독령(괌, 필리핀) 등을 빼앗았으며[51] 하와이 왕국를 현지 거류민들을 내세워 괴뢰국인 하와이 공화국을 세우게 한 후 무력으로 병합하는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스페인을 쫓아내고 나서도 미국 없이 필리핀인들이 자체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선포한 필리핀 제1공화국이 세워지자 이를 없애기 위해 미국이 일으킨 미국-필리핀 전쟁 당시 필리핀에서 학살한 원주민들만 수십만에 달하며, 당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스페인 제국주의를 비난했다가 자국인 미국도 별반 다를 것 없다며 극렬히 비난했다. 19세기에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제창해서 유럽 국가가 남/북아메리카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먼로주의의 근원에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 종주권 야욕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20세기 후반까지 라틴아메리카에 정치적 개입을 하였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일본, 남한, 서독, 오스트리아 등을 잠시 통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필요한 국가가 있으면 자본주의 쪽으로 무력없이 회유하는 방법을 썼지만, 파나마 침공과 그레나다 침공 등 무력을 사용하거나 1953년 이란 쿠데타, 1964년 브라질 쿠데타, 1973년 칠레 쿠데타,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과테말라 내전처럼 쿠데타를 사주한 사례도 있었다.[52] 현재도 주요 전략적 거점에 미군이 주둔하며 정치, 경제, 문화적 영향을 주고 있으나 이것은 제국주의가 맞는지에 이견이 있기 때문에 약간 논외이다. 미국에서 국가 차원의 제국주의는 사라지거나 소프트 파워로 바뀌었지만[53], 노예 무역이나 붉은 여름 등으로 대표되던 민간 차원의 제국주의는 미국 내 인종 갈등의 불씨가 되어 1865년 노예해방선언, 1964년 민권법 통과 등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돌이나 델몬트,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경제력과 토지를 장악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치키타)나 코차밤바 물 전쟁을 일으킨 벡텔 등 플랜테이션이나 위탁 생산으로 대표되는 초국적 기업의 경제적 제국주의 문제 역시 심각하며, 중국과 함께 문화제국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심각한 나라이다. 한편 우주경쟁 시기 나사는 우주의 평화적 이용과 과학 연구에 주력했지만, 미 공군의 경우 X-20 다이노소어 우주 전폭기나 신의 지팡이 등 타국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우주 무기들을 기획한 바가 있다.[54]
- 일본 제국
보통 일본을 제국주의 열강으로 분류하는 시기는 청일전쟁 전후이다. 청일전쟁 이전에도 메이지 유신 무렵 아이누족이 살고 있는 북부 홋카이도 일대를 완전히 행정적으로 내지화하고[55]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로 병합하며[56] 가까운 일본 열도 부근에서는 제국주의 정책을 폈다. 그리고 청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열도를 넘어 대륙 차원에서의 확장 정책을 시작했는데 청일전쟁의 결과로 중국의 영토였던 대만을 빼앗고 대만총독부를 세웠다. 이후 유럽 열강과 더불어 의화단 운동에도 개입했다.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로부터 사할린 섬 남부 지역을 일본령 가라후토로써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정한론의 완성을 위해 대한제국을 차지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1910년 병합하고 조선총독부를 세웠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령 칭다오와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하고 1931년에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군벌 시대 혼란을 틈타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운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대대적으로 침략했고 1941년에는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열강들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초기에는 동남아를 점령하고 미국 서부 해안에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기까지 하며 선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반격이 이어지고, 점령지에서는 초기 일본령 동인도 정도를 제외하면[57] 기존 식민제국보다도 잔혹한 대우와 학살로 현지인들의 민심마저 잃어 연합국과 저항세력의 총공세 끝에 패전, 모든 점령지를 잃고 본토는 미군에게 점령되었다. 외지로써 중요시 여기던 일본령 조선 역시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들어서며 영영 잃어버렸다. 이후 일본은 미국 GHQ에 의해 철저히 개조당하여 천황은 현인신이 아니라 그냥 인간임을 선포하고, 자체적인 군대를 가질 수 없게 헌법으로 규정시키는 둥의 수단으로 이전같은 침략국으로 돌아가기 어렵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의 대타협 이후 헝가리 왕국의 역량(과 제국주의적 야심)까지 더해지며 이전부터 이어온 오스트리아 제국으로써의 명성을 이어 계속해서 발칸 반도의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안다만니코바르 제도를 점령하거나 의화단을 진압할 때 군대를 파견하는 등 대외진출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앞서 진출한 식민제국들의 방해로 해외진출에서 크게 성과를 보지 못했고, 이미 다 쓰러져 가던 구 제국의 한계로 대외에 투사할 역량이 부족했다. 때문에 주로 유럽 내에서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계속해서 독립을 원하는 세력의 활동과 이들을 부추기는 외세의 위협이 이어졌고 결국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며 제1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시초에 휘말리고 만다. 이에 제국의 이익을 지키고자 독일 제국과 야합하여 협상국에 맞섰지만 결국 역량부족을 이기지 못하고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으로 나라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헝가리 왕국으로 갈라져 소멸했다.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오스트리아 연방국과 헝가리는 이후 전간기 동안 내부 파시즘 세력의 발흥으로 추축국에 다시금 참여하여[58] 다시금 영토를 얻어내기도 했지만[59], 결국 연합국에 참패하여 각각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소련 점령하 헝가리가 되어 대외 영토를 모두 잃고 중부 유럽 소국들로 완전히 몰락했다.
- 오만 제국
오만은 지금은 석유 수출과 관광업, 사이 안 좋은 중동 나라들의 관계 중재가 주업인 중동의 조용한 나라지만 한때 파키스탄 카라치와 과다르, 아라비아 반도부터 모잠비크까지 인도양을 주름잡고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과 함께 서아시아를 삼등분했던 꽤나 잘 나가는 국가였다. 하지만 식민지에 대한 취급이 가혹하고 악랄한 편이어서 한때 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탄자니아와 아랍에미리트, 케냐, 소말리아, 모잠비크 같은 아프리카, 중동 국가들에서는 지금도 오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과 함께 노예 무역으로 매우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이란 제국 사파비 왕조에 의해 세력이 위축된 이후에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면서 제국주의의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락했다. 오만이 몰락할 대로 몰락하여 내전에 시달리던 빈국이 된 시점인 1958년 마지막 해외영토 과다르를 석유가 개발되었을 때 오만 술탄에게 수익의 일정 부분을 지급할 것, 쌀을 오만에 무제한적으로 수출할 것, 과다르 주민들을 오만군에 징집할 수 있을 것이란 조건으로 파키스탄에 반환하며 오만 식민제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의 통치는 정복지의 현지 지배 세력 중 협력하는 자들은 기존의 권리를 인정해 주고 그렇지 않고 저항하는 세력은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식으로 급속도로 팽창할 수 있었다. 제국의 피정복민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밀레트(공동체)'로 분류하여 서로 다른 법으로 통치했다. 정교회 밀레트는 교회법이, 무슬림 밀레트와 유대인 밀레트는 각자의 율법에 기반한 법으로 운영되었으며, 세금 제도도 각 밀레트마다 다르게 적용되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제 또한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극단적인 튀르크 민족주의 뿐만 아니라, 지방의 영향력을 거의 갖추지 못한 오스만 제국 중앙정부와 현지 유력가들의 불협화음 또한 문제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근대 제국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600여년간 지속된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이는 반동군주로 평가받는 압뒬하미트 2세의 통치 시기 이후 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동유럽 국가와 아랍권 국가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억압자로서의 이미지는 다른 문제로, 민족주의 시대 이후 이들이 독립할 무렵, 그리고 신생 독립국가가 형성된 이후 신생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설정이며, 21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의 다문화성, 지방 통치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피지배국들에 대한 지배도 절대 온건하지만은 않았고, 피지배국 속주 내부의 민족, 종교간 분열을 조장하며 통치했고, 제국의 몰락 시기인 20세기 초에는 오스만 제국의 극단화를 상징하는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가 발생하기도 해서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들은 불가리아나 그리스, 요르단처럼 일부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민족, 종교 분쟁들이 끊이지 않는 화약고들이 많다. 특히 아랍 레반트 지역은 그리스나 불가리아, 이집트보다 못한 2등 지역처럼 취급하여 굉장히 하대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라크나 시리아와 같은 레반트 지역에서는 월성기도 함부로 쓰지 않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과 튀르키예에 대한 취급이 이스라엘보다 살짝 나을 만큼 좋지 않다.
- 쿠를란트-젬갈렌
현 라트비아 지역에 존재했던 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었다. 1651년, 1654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있는 섬들을 식민지화하였다. 그러나 공국의 역량적 한계로 식민지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공국은 종주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주변 열강에게 분할되어 해체될 때 같이 멸망하였다.
- 독일 식민제국
독일 제국은 통일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어 식민경쟁의 후발주자였다. 당시 아프리카의 나미비아(독일령 남서아프리카), 탄자니아와 르완다, 부룬디(독일령 동아프리카), 토고, 카메룬(독일령 서아프리카)과 중국의 칭다오(독일령 칭다오), 뉴기니(독일령 뉴기니), 남양 군도(독일령 사모아) 등을 식민지로 보유했고 영국, 네덜란드와 함께 뉴기니 섬을 분할 점령하는 등 어느 정도 식민지를 확보했으나, 타 유럽 주요국들에 비해 국가 체급에 비해서는 식민지가 부족했다.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 지역에서 현지 흑인 토착민들을 상대로 무임금 노동, 유혈 진압, 인권 탄압, 학살 등을 가해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20세기 제노사이드의 첫 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사건이 바로 독일령 동아프리카(나미비아)에서 로타르 폰 트로타에 의해 일어난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이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강제 점령하며 이 과정에서 학살을 가했다. 이후 독일 혁명으로 제정이 페지되고,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모든 식민지를 상실했다.
- 벨기에 제국
지정학에 관심이 많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세계 여러 국가들과 인권주의자들,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명사들을 감언이설로 속여먹어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든 결과 본국 영토의 80배에 달하는 콩고를 국왕 개인의 사유지로 점령했다. 그는 치하의 콩고 '자유'국에서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도 강하게 비판하고, 기독교와 인권을 운운하던 명분과 달리 레옹 롬과 같은 용병들과 식인종들로 이루어진 식민지인 부대들이 국왕의 전권 하에 고무 할당량을 놓고 민간인들의 손목을 자르고 참수를 자행할 만큼 잔혹한 통치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착취 행위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명분이라도 있었고 실제로 국익에도 도움이 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달리 이익이 들어오는 대로 개인 내탕금으로 집어넣느라 본국인 벨기에의 발전에 돌아가는 이익도 거의 없었다.[60] 레오폴드 2세가 워낙 콩고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독립한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은[61] 국가기량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등 그 후유증을 겪는다. 결국 레오폴드 2세의 만행이 드러나자 1908년에 콩고는 벨기에에 강제로 반환되어 정부의 공식 식민지인 벨기에령 콩고로 바뀌었다. 한편 1차 세계 대전 이후 벨기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일부였던 부룬디와 르완다를 루안다-우룬디로써 차지했다. 이후 식민통치를 하면서 투치족과 후투족의 민족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했는데, 이것은 훗날 르완다 내전 및 그 과정에서 발생한 르완다 학살과 부룬디 내전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6. 관련 인용구
백인종이 황인종이나 흑인종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유럽 백인이 다른 지역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보다 뛰어난 문명을 자랑하는 우리 백인이 식민지인을 지배하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며, 그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62]
- 알프레드 테니슨
- 알프레드 테니슨
나는 어제 런던 이스트 엔드[63]의 실업자 집회에 가서 '빵을 달라'는 절절한 연설만 듣고 오다가 문득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우리는 영국의 4천만 인구를 피비린내 나는 내란으로부터 지키고, 과잉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만 한다.[64][65][66] (중략) 당신이 내란을 피하려 한다면 당신은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이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에 많이 거주할수록 인류에 좋다고 주장한다.
세실 로즈, 『유언집』 中
세실 로즈, 『유언집』 中
7. 창작물에서
- 문명 6: 아기자기하게 원시티 플레이를 하거나 대놓고 베네치아처럼 도시 개척이 불가능한 나라도 있던 5에 비해서 다수의 도시를 갖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초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타국 혹은 옆의 도시국가라도 박살내고 내가 부족한 자원(전략자원 뿐만이 아니라 캠퍼스같은 특수지구들도)을 전쟁으로 뺏어먹어서 타국과 격차를 좁히는 게 유용하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필수적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대표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인 미국,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의 지도자가 제국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빅토리아 여왕과 시어도어 루즈벨트, 펠리페 2세, 주앙 3세로 바뀌었다. 지도자들이 이런데다 맵도 실제 지구 시작위치로 하면 역사를 그대로 체험해 볼 수도 있다.[67]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제목부터가 제국의 시대다. 이 문서에서 다루는 근대 자본주의적 형태의 제국주의는 3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 줌비니 수학논리여행: 학습 게임이지만 스토리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 Paradox Interactive의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Victoria 시리즈: 전자는 정착형 식민지 개척을 통한 초기적인 형태의 제국주의를, 후자는 이 문서와 같이 본격적인 근대적 제국주의를 주로 다룬다.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아스가르드 제국은 원래 전우주에 걸쳐 침략전쟁을 벌여온 제국주의 국가였으나 오딘의 개심 이후 성향이 바뀌었다.
-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작품들.
- 외계의 침공을 다루는 작품 대다수.
- 인디펜던스 데이: 작중 미군은 지구 자원을 대규모로 수탈하여 행성까지 통째로 붕괴시킬 외계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치열하게 맞서 싸운 끝에, 미국 독립기념일날 드디어 승리를 거머쥔다.
- 스티븐 유니버스: 젬 제국은 전 우주에 걸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행성의 생태계를 파괴시켰다. 후에 젬 제국이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로 바뀌면서 식민지를 만들지 않게 된다.
- 토탈 워: 엠파이어, 토탈 워: 나폴레옹 : 제국주의 시대의 지상전과 해상전을 중심으로 한 게임이다.
- Warhammer 40,000 : 인류제국의 대성전 참조.
8. 관련 문서
- 식민주의
- 미국 제국주의, 중국 제국주의, 러시아 제국주의 - 이들이 현재, 과거 식민제국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제국주의를 의미한다.
- 자유제국주의
- 대독일주의
- 일본 제국주의
- 스파치오 비탈레
- 백인의 의무
- 명백한 운명
- 이슬람[68]
- 신시오니즘
- 영국 연합주의
- 프랑사프리크
[1] 세실 로즈가 주장하던 케이프-카이로 전신을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로도스의 거상에 빗대어 풍자한 그림이다. 로도스 섬을 뜻하는 단어와 로즈의 성의 철자가 같아서 생긴 언어유희. 그는 영국령 남아프리카 연방에 있던 회사의 사장이자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다이아몬드 채굴 사업을 했다. 영국령 식민지이자 독립국인 로디지아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2] 멜빌의 작품에 나타난 반제국주의와 인본주의 사상 연구(2017)[3] 그래도 이런 사실 때문에 폴란드나 아일랜드,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설움의 역사로 알려져 있는 편이다.[4] 대체로 비백인 식민지들을 일컫는다. 백인들이 주도한 미국이나 라틴아메리카 등의 독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5] 특히 독립영웅이 독재자로 타락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6] 일본의 경우 한국 대상 한정으로 자국 내의 정권의 시류에 따라 19세기~20세기 초의 일본 제국이 조선에게 가한 모습으로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집요해지고 있는데 일본의 고도발전이 끝나고 후발국인 한국이 한류나 한강의 기적으로 자국의 산업 파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견제심리로 정치, 경제, 외교적 전방위로 한국의 영향력을 억제시키고 한미일 관계에서 소외시켜 예전 1960~1980년대의 단순 하청형 위성국가화 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의 경우는 체급의 차이로 인해서 속으로는 욕하고 더럽다고 구역질할망정 겉으로나마 중국의 시장과 소비력 때문에 신년사에서 총리가 중국어로 인사를 건내거나 자국 문화컨텐츠가 중국을 비하하는 장면이 나오면 칼같이 사과하고 수정하는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중국와 일본의 관계는 일방적인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보다는 최근 80년간의 추세를 보면 시류와 외교적 순이득에 따라 반목과 화합이 반복되는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일 정도의 변덕이 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7] 하지만 2020년 전후를 기점으로 일본의 한국을 대하는 양상은 크게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크게 성장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몇몇 분야에서는 아예 추월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무역 분쟁과 같은 강경적인 조치에도 맞대응을 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엿을 날리니 일본 입장에서는 이제 중국을 대할 때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버린 것이다.[8]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인데 영연방이라 불리는 이전 식민지들은 오히려 자국에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에 영국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한다. 한 때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도 르완다 학살 당시 학살을 대놓고 부추긴 프랑스나 별 도움도 안 된 벨기에에 앙금이 많이 쌓여 원래 공용어였던 불어도 멀리하고 영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영어를 새로 도입할 정도이다. 브렉시트 때도 쌍수들고 환영한게 이 영연방 국가들이었다.[9] 물론 러시아라고 원래 있던 중국, 프랑스보다 나은 게 아니라 정도만 약했지 똑같이 자원을 수탈하거나 민간군사기업을 시켜 방해되는 민간인들을 전부 살해하는 등 일이 벌어진다. 먼저 러시아가 왔다 갔던 시리아에서도 이렇게 러시아 정부 및 용병들의 등에 업혀 온 러시아 기업들의 약탈이나 자원수탈, 투자 사기, 분식회계 등 악행이 바트주의 시리아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야 보도된 바가 있다. 이렇게 온 러시아 기업들은 정작 2024년 시리아 반군 공세로 정권이 무너지자 앞장서서 금고, 노트북, 현금, 백금 30kg 등 돈 될만한 것들을 허겁지겁 챙겨 달아났다고 한다.#[10] 그렇다고 현재 시리아 경제가 나아질 전망은 희박하다. 러시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반군에 지원해온 튀르키예 역시 이들리브같은 반군 지역은 물론 리비아, 수단 등에서 러시아가 했던 짓 비슷하게 자원을 수탈하고 영향력을 넓히는 신식민국가들 중 하나이다. 몇몇 국경지대는 튀르키예군이 3.1 운동 이전 무단통치 시기처럼 군정을 시행한데다 2019년에는 로자바를 공격해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따라서 현재 국제사회가 시리아에 무관심한 동안 튀르키예 영향력이 더 강해지면 러시아가 했던 악행을 튀르키예가 그대로 할 가능성이 높다.[11] 칠레, 과테말라 등이 그 예시이다.[12] 대한민국, 싱가포르 등이 그 예시이다.[13] 다만 보편인권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것이 전형적인 그쪽이야말로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미국의 반인권적 외교 행태가 반미국가의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보가 '위선'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위선'이 없었다면 세계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역시 친미 독재 국가들에게 지원을 하되 그들과 동등하게 짝짜궁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며 항상 권위적인 태도로 대해주었다는 일관성을 잊으면 절대 안된다. 미국이 권위주의적으로 대하면 악행이고 다른 나라가 권위주의적으로 대하면 필요악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14]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싱가포르. 동남아는 아니지만 남아시아인 방글라데시도 포함.[15] 오히려 식민지배를 겪지 않았으며 최소 지역강국 이상의 국력을 지닌 중국과 이슬람국가들은 성향 측면에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별반 차이가 없으며, 중국과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은 여전히 제국주의 성향을 보이는 국가들이다.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와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역시 무분별한 대외 개입을 꾸준히 해 왔다.[16] 예전에는 쌀과 같은 주식을 충분히 생산했는데, 프랑스의 식민 통치 덕분에 온 나라가 땅콩만 심게 되면서 땅콩을 수출하고 식량을 사 오는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17] 하지만 탈레반이 통제 중인 곳조차 카불을 포함한 일부 지역에 국한되며, 나머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이다.[18] 사우디아라비아도 영국의 보호령이긴 했으나 기간도 10년 가량으로 짧고 큰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 논외.[19] 동남아시아의 경우 1940년대 일본 제국의 잔혹한 지배와 수탈, 학살을 겪은 명백한 피해국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나 국민 정서상으로나 일본에 대한 호감이 매우 높은 친일 국가이다. 그 이유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 이전 자신들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반감이 워낙 심해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고, 또 하나는 개방 이후 신제국주의적/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중국에 대한 위기감이 반작용하여 그나마 중국에 비빌 수 있는 일본에 대해 친화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20] 이를테면 다민족국가의 경우, 독립 당시 주체였던 민족이 현재는 해당 국가에서 소멸되거나 마이너 취급을 받고 있다면 그 국가에서는 과거사 논의에 대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21] 1993년 세계 12대 경제대국이 되었고, 1997년 IMF로부터 선진국으로 분류되었다.[22] 현재 세계 무대의 주요 강대국들이 중국, 인도를 제외하면 제국주의 국가 출신이다.[23] 현재 순 국력이 지역강국 중에서도 상위권인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목소리를 내려 해도 미국에 완전히 가려지며 민주주의 국가 치고는 부정부패, 암살, 마약 카르텔과 인신매매 조직들의 군웅할거 등 정치, 치안 불안이 굉장히 극심하기 때문에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인도네시아 역시 경제력, 군사력에서 식민 모국이었던 네덜란드보다 앞서는 모습을 보이며 호주, 튀르키예, 멕시코 등과 더불어 지역강국들 중에서는 최상위권 국력을 자랑하지만 여전히 내실은 부족한 상황인데다 동남아시아 자체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지역이 아닌지라...그래도 체급이 체급인지라 무시할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며 네덜란드에서도 국왕인 빌럼알렉산더르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했을 정도다.[24] 게다가 이들 중 브라질은 아예 식민지배국이던 포르투갈 왕실이 식민지로 이사한후 독립한 특이 케이스이며, 인도도 인구 1위 국가라 기본 체급부터 엄청나다.[25] 인도는 현재 총 경제력이 영국을 능가했고 국제적으로도 영향력이 강해져 명백한 강대국이 되었고 한국도 영향력이 비교적 낮을 뿐 순수 국력은 엄연한 열강인 이탈리아와 동급 내지 우세한 강대국이며 브라질은 인도, 한국보다 국력은 밀리나 지정학적으로 영향력이 엄청나 경우에 따라 강대국으로 분류되기도 할 정도로 세 국가 모두 현재는 제국주의 열강 급의 국력을 갖추고 있다.[26] 사실 한국도 과거 제국주의적인 액션을 취했다가 국내외적으로 큰 비판을 받고 GG쳤던 적이 있다. 2009년 마다가스카르 정치 위기 참조. 다만 해당 사건은 한국 정부가 아닌 일개 기업인 대우로지스틱스에서 벌였던 행위였던 데다 이후로는 딱히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마다가스카르에 대해서도 지원을 많이 해주는 덕분에 금방 묻히긴 했다.[27] 스페인이랑 별 차이가 안 나는 시기지만 엄밀히는 포르투갈이 먼저다.[28] 심지어는 뒷날 스페인한테 지배당하고 그 다음에는 본인들은 동맹이라 생각하던 영국에게 식민지 무역에서의 소득마저 삥뜯기는 신세로 전락했다.[29] 그나마 스페인은 신대륙에서의 착취로 얻은 거라도 많지만 포르투갈은 그것조차 스페인과 영국에게 수시로 빼앗겼고, 나중엔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식민지 포르투갈령 브라질은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의 현직 왕자 신분이던 페드루 1세가 자기 멋대로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고 본국에서 도망가는데도 잡지 못하는 굴욕을 겪는다.[30] 고아와 다만, 디우, 다드라나가르하벨리.[31] 당시 인도군에게 밀리던 포르투갈은 유럽 안보 기구인 NATO에 포르투갈을 도와 인도와 싸워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했다가 철저히 무시당했다. 반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월맹군에 큰 손실을 입고 괜히 또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는 별 마찰 없이 프랑스령 인도에서 발을 뺐다. 한편 이는 남아라비아 연방 지역에서 한동안 피를 봤던 영국에도 교훈이 되어서, 결국 영국은 홍콩 반환으로 홍콩에서 순순히 물러났다. 다만 홍콩 체제 보장 기간인 2047년까지는 이해관계가 아직 남아 있어서 2014년의 홍콩 우산 시위,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등 홍콩의 인권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중국을 압박하고 탄압받는 홍콩 정객들의 망명을 도왔다.[32] 현재도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프랑스를 거치지 않고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이 지역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와 프랑스가 밀어주는 지배층에 대한 증오가 높다. 동시에 워낙 언어와 문화 면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터라 가난한 자국을 벗어나 프랑스로 이민이나 취업을 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점이다.[33] 프랑스령 튀니지, 프랑스령 모로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프랑스령 수단 등 많은 영역을 지배했다.[34] 아이티 혁명으로 독립시켜주긴 했지만 독립 이후에도 앞바다에서 함포를 겨냥하고 배상금을 달라고 협박하여 반 식민지처럼 수탈하는 등 꾸준히 내정간섭을 일삼았다.[35]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2020년대에도 CFA 프랑과 같은 수단으로 프랑스의 내정간섭을 받는다. 이를 프랑사프리크라고 칭한다. 아프리카 이외도 직접적인 내정간섭만 받지 않을 뿐 국가 상황이 크게 다른 건 없다. 특히 프랑스령 캄보디아가 가장 극단적으로 변해 버렸는데, 식민 지배의 영향과 수혜를 받은 한 지식인이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축에 속하던 가봉마저도 2023년 가봉 쿠데타가 일어나는 실정이며 반대로 현재는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알제리는 90년대 내내 알제리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36] 프랑스령 기아나를 제외하면 전부 자그마한 섬 지역에 불과하다.[37] 독립 이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이 국론 통합에 실패하여 아예 박살났다.[38] 실제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독립 인정은 냉전 시기 아시아 신생 국가들을 친미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려던 미국의 압박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국은 나치 독일로부터 네덜란드를 해방시킨데다 마셜 플랜을 통해 네덜란드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및 일본령 동인도 시절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게 국민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고 인프라가 파괴당한 것도 겨우 회복하는 좋지 못한 상황에 미국 돈으로 전쟁을 하던 네덜란드는 미국 정부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한편 전후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지 관련 시대착오적인 정책은 나치에 의해 피해를 본 후에도 오히려 식민지에 강압적인 행보를 보인 뻔뻔한 사례이기에 비판받는 편이다. 특히 네덜란드는 안네의 일기 등을 출판하고 일제 위안부 피해에 대해서 역설하는 등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편인데 정작 그런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가 1940년대 말 인도네시아에서 가해자로 돌변하며 보인 탄압과 학살은 네덜란드의 도덕 외교를 위선으로 보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39] 물론, 미국의 원류가 되는 13개 식민지는 영국과의 마찰로 중간에 미국 독립 전쟁이후 떨어져 나갔다.[40]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경우, 잉글랜드와 한 섬 안에 있고 교류가 잦았으므로 강제 병합보다는 자연스러운 합병에 가까웠다.[41]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은 현대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스리랑카, 네팔 일부, 예멘의 아덴 등을 아우르는 거대 권역이었고 이 지역의 인구 자원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 총합은 물론 중국보다도 더욱 컸다.[42] 그레이트 게임은 방사능 홍차 사건이나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위 대여법안 등을 통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43] 중국이 영국 해외 식민지의 소요를 노리고 지원한 67폭동이나 말라야 비상사태가 대표적이다.[44] 이 때문에 케냐가 영국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뒤 영국에서 프랑스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프랑스를 비판하자 케냐에서는 "프랑스군이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죽인 알제리 사람 수보다 적을 뿐이지 영국 너희들도 우리 나라를 식민통치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국가일 뿐이다"라고 영국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이후 영국은 케냐를 독립시켜주긴 했지만 1년간의 케냐 자치령을 거쳐 완전한 독립국 케냐가 된다.[45] 이 당시 모스크바 강 일대를 지배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 계열 공국들로부터 몽골에게 공납할 세금을 걷는 역할을 얻었는데, 이 공납금을 야금야금 훔치는, 일종의 공금횡령을 통해서 루스 계열 공국 가운데 최대 세력이 되었다.[46] 청나라와 몽골계 세계를 나눠 차지하는 구도가 되었다. 그리고 타타르의 굴레라 불리는 200년 동안의 치욕을 철저한 탄압으로 갚아줬다. 이는 청나라,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태그를 짜서 실행된 준가르-토르구트 학살에서 정점을 찍는다. 물론 준가르나 토르구트는 몽골 제국의 주류 민족은 아니었지만 말이다.[47]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 시기 레닌에게 지원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이로 인해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48]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원주민들이 이 때문에 연방 정부에 반감을 가졌고, 훗날 남북전쟁 때 남부에 대거 합류하였다.[49] 이때 체서피크 만까지 진출한 영국함대가 미국의 본진이라고 불리는 볼티모어의 매켄리 요새를 맹폭할 때 영국의 콩그리브 로켓 포격에도 꿋꿋이 휘날리는 성조기를 보고 미국 국가가 작사되었다.[50] 텍사스에 살던 미국 거류민들이 텍사스 공화국을 세우고 멕시코에서 무력 투쟁 끝에 분리독립한 후 투표 끝에 미국에 가입했다.[51] 이들은 각각 미국 통치기 쿠바, 미국 통치기 필리핀 시기를 겪고 쿠바 제1공화국과 필리핀 제3공화국으로써 둘 다 미국에 의해 독립된다. 괌은 21세기에도 미국 영토로써 남아 있다.[52] 북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침공한 베트남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같은 사례도 있으나, 이것은 미국이 먼저 공격당하여 반격을 할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논외. 물론 이라크 전쟁은 그 어떠한 명분도 없었다.[53] 국가 단위로 노예제를 지향하던 미연합국 포함.[54] 물론 같은 시기 소련의 폴류스처럼 대부분 효율성과 비용 문제로 취소되었다.[55] 단, 홋카이도는 이미 15세기에 일본인의 진출을 시작으로 17~18세기 무렵이 되면 사실상 전역이 일본 영토인 상태였으며 19세기 초엽부터는 국제적으로도 일본령으로 완전히 공인되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와 1:1로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19세기 중후반 이후 일본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아이누의 자치를 완전히 철폐하고 강압적인 중앙정부의 직할 통치를 시작했던 것은 맞다.[56] 단, 홋카이도의 사례와 비슷한데 류큐는 형식적으로 17세기 초부터 사쓰마 번에 복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 대만 등과 달리 일본도 나름 역사적 연고가 있었던 지역이다.[57] 그마저도 민사를 중요시했던 원래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가 대본영의 압력으로 물러난 후에는 다른 점령지들과 똑같은 인권탄압과 대량학살이 시행되었다.[58]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으로 반쯤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게 비자발적으로 끌려간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안슐루스에는 현지 협력자들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고, 상당한 수의 오스트리아인이 나치 독일 국민으로써 침략 전쟁에 군 말 없이 협조한 사항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헝가리는 초반부에는 텔레키 팔을 비롯한 반전파들과 찬전파들의 다툼이 있긴 했지만, 텔레키 팔이 자살한 이후 찬전파가 호르티 미클로시의 비호 아래 권력을 잡으며 의심의 여지 없는 침략국으로써 종전 전까지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편에서 추축국으로 활동했다.[59] 특히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의 무효를 요구하며 유고슬라비아 왕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친추축국 성향 국가들에게도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등 수시로 시비를 걸어 영토를 뜯어내고 대량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60] 벨기에의 건축 문화와 초콜릿 산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긴 하였으나 이것 역시 레오폴드 본인의 사리사욕에서 출발한 부수적인 영향에 가깝다.[61] 벨기에의 식민통치도 충분히 가혹했는데, 벨기에 지배의 후유증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독립 직후부터 심각한 국가적 악운을 상당히 많이 겪은 것까지 겹쳤다. 레오폴드빌 콩고의 혼란과 자이르 시절 모부투 세세 세코의 도둑정치 및 독재의 영향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으며, 모부투가 집권 말년에 이웃 르완다에 군대를 보내 르완다 학살을 조장하고 인테라하므웨 전범들을 숨겨준 탓에 새로 세워진 르완다 애국전선 신정부에게 책이 잡혀 콩고 내전, 키부 분쟁 등에 폴 카가메가 3월 23일 운동 등 친르완다 반군을 투입시켜 콩고인들을 죽이고 자원을 수탈하는 데에도 한참 작은 국가인 르완다에게 제대로 대처조차 하지 못하는 등 국가로써 어려움을 겪고 있다.[62] 역사에 만약이란 말이 없지만 유럽권과 기존 열강들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리적 환경과 사회적 배경을 통해 파생된 여러 가지의 결과물 중 하나다. 선진국은 말 그대로 선발주자이기 때문에 선진국이 될 수 있었고, 열강 중에 제일 뒤떨어진다 평가받던 일본이나 이탈리아조차도 기본 역량이 있었기에 대전 이후 선진국에 문제 없이 등극할 수 있었다. 열강 이외 국가들이 선진국이 되는 일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처럼 아예 작정하고 키운 곳들이거나, 아시아의 네 마리 용과 같은 일부 아시아 국가들, 원래부터 부유했던 룩셈부르크나 모나코, 동구권에서 빠져 나와 선진국에 진입한 체코, 발트 3국,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등이나 북유럽의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그 외 아일랜드, 이스라엘 정도의 경우를 제외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63] 런던 동쪽에 위치한 지역. 19세기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다.[64] 사실 이런 식으로 국내의 넘쳐나는 실업자나 빈민들을 해외로 내보내서 본국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자는 식의 발상 자체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포함하여 그리스 전역에 넘쳐나는 빈민들과 실업자들을 소아시아(현재의 터키)로 내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대규모 식민지를 개척하게 만들면, 그리스 본토의 치안이 안정됨과 동시에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넓고 풍요로운 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그리스 세계의 떠오르는 강대국이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인 필리포스 2세한테 편지로 써서 보냈다. 이 편지는 필리포스 2세가 읽었고, 그 편지에 담긴 주장에 따라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3세(흔히 말하는 알렉산더 대왕)가 원정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를 포함한 페르시아의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자, 페르시아 각지로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였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65] 문제는 당시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에 비해서 인구가 한참 적은 먼 옛날으로 인구가 적은 이유로 식민도시를 세우는데 있어 무리는 딱히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혹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도시 단위이므로 통제도 쉬웠고 로마의 경우 포에니 전쟁 이전부터 이민족들에게도 시민권을 내주었고 포에니 전쟁 이후에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동맹시들이 받던 대우도 노예마냥 처참한 대우를 받았다기보다는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해나가는 와중에 그 과실을 로마만 보고 동맹시에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을 뿐이었고 동맹시들의 주장도 동맹시 전쟁 이전까지는 로마 시민권의 획득이었다.(이전까지는 로마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있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이를 제한했다. 결국 동맹시 전쟁 이후 로마는 동맹시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66] 허나 제국주의 시대에는 인구가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이렇다 보니 제국주의 열강들도 현지의 원주민이자 피정복민들의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또한 워낙 멀리 떨어져 있던 관계로 문화가 너무 달라 정복민과 피정복민간의 융화도 이뤄지지 않았다. 즉 그 때에 비해서 식민지를 얻으려면 비용은 많이 드는데 유지비는 더럽게 많이 드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피정복민에 대해서 온화한 태도로 나온다면 모를까 로마가 정복한 속주에 참정권을 제외하면 로마 시민과 다르지 않은 라틴 시민권을 준 반면 제국주의 열강들은 대부분 인종주의에 찌들어 원주민들을 핍박하기 일쑤였다. 예외적으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같은 나라들은 모국이었던 영국과 사이가 좋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들은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밀어내고 주류를 차지한 나라다.[67] 그러나 맵 크기에 한계가 있고 자원 배분도 조금 다르기 때문에, 보통 중국이 개사기 입지를 점하게 된다.[68] 유대인의 폐쇄적인 민족종교에서 그친 유대교나 초창기에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 하층민들 간의 믿음으로 퍼진 기독교와 다르게, 이슬람은 이슬람 제국의 제국주의적인 정복과 점령으로 퍼진 종교이기에 종교 자체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