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어: The rape of Belgium[1]벨기에의 학살을 묘사하는 삽화 |
1914년 9월 영국 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 연합군의 프로파간다에 자주 사용되었고 훗날 미국의 참전에도 명분을 더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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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화가 에바리스트 카르팡디에가 그린 블레니 학살 사건
파괴된 루뱅 대학교와 루뱅 도서관
1915년 파괴된 루뱅
관련 영상.
2. 계기
1914년 6월 28일 터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 제국은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면서 같은 게르만 민족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 및 상호 방위조약을 이행하고자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전쟁에 뛰어들었다.독일 제국은 일찍이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세워둔 슐리펜 계획 하에 대다수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보내 프랑스를 6주 안에 항복시키고 곧장 그 병력들을 동부전선으로 보내 러시아 제국을 항복시킬 생각이였다. 따라서 프랑스를 빠르게 항복시키기 위해 파리를 어떻게 해서든 빠른 시일 내에 손에 넣고자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알자스-로렌 지역으로 쳐들어가기보단 차라리 중립국이였던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쳐서 손에 넣고 프랑스 동북쪽 방면으로 병력을 몰빵하여 파리로 들이치는 것이 나았다.
개전 당시 독일 제국군은 벨기에군을 초콜릿 군인(Schokoladensoldaten:쇼콜라데졸다튼)으로 폄하했다.[2] 벨기에는 1830년에 중립국으로써 강대국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생긴 나라라 상대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추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군은 벨기에를 며칠이면 금방 무너질 나라라고 생각하여 벨기에군의 저항 자체를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때 벨기에로 진격하면서 내건 명분이 '프랑스가 벨기에를 침공하려 하니 독일이 지켜주겠다. 그러니 문 열어!' 였는데 당연히 그런 것 따위 없는 공갈이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벨기에군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매우 강렬하게 저항하였고 설마 벨기에 같은 콩알만한 나라가 저항을 하면 얼마나 할까 하고 무시하고 있던 독일군은 의외의 항전에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고 격노했다.
그러던 중 루뱅(Louvain, 네덜란드어로는 뢰번(Leuven))이라는 도시에 주둔하던 독일군 병사 하나가 어디서 온 지 모를 총알 하나에 제대로 헤드샷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작스럽게 병사 하나가 즉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제대로 공황 상태가 온 루뱅 주둔 독일군 병사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고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범인이 벨기에인 빨치산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날이 밝자 독일군은 루뱅 시에 살고 있었던 모든 민간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총이나 쇠붙이를 만진 흔적이 있거나 군복을 입은 경험이 있는 자들을 죄다 끌어내 처형하였다. 그리고 증거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총살했다. 헌데 정작 독일군 병사를 쏴죽인 사람이 벨기에인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학계에 따르면 밤에 피아식별을 잘못하여 벌어진 오인사격일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아무튼 루뱅에서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독일군은 벨기에의 도시들을 점령한 후 벨기에 민간인들 중 상기한 것처럼 민간인으로 위장해 독일군에게 총질하는 프랑스어로 '프랑-티뢰르(franc-tireur)'라고 부르는[3] 자발적 빨치산에 대해 병적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군을 폭압적인 침략군으로 인식했던 벨기에인들은 정보를 연합군에게 흘리거나, 삐라를 뿌리거나, 독일군이 강제로 징발한 전시 노동 작업을 사보타주하는 등 소규모 저항은 적극적으로 펼쳤지만 아예 대놓고 점령군에게 총 들고 저항하는 직접적인 물리적, 무장 저항은 거의 없었다[4][5] 그러나 독일군은 벨기에 빨치산에 대한 의심만으로 가톨릭 성직자들까지 인질로 삼아 죽이고, 논밭을 짓밟고, 마을마저 불태우기 시작했다. 물론 이 사건의 영어 명칭 그대로 민간인 여성에 대한 강간도 일삼았다. 이때 도시에서 각 구역마다 10명씩 잡아서 독일군이 공격받으면 모조리 처형하고 다시 잡아오는 짓을 반복했다.
여하튼 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 제국군은 루뱅 지역에서만 380여 명을 살해하고 벨기에의 유서 깊은 명문 루뱅대학교를 파괴하고 대학생들을 학살했다. 그것도 모자라 디낭(Dinant)에서는 676여 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민가 750여채를 불태웠다. 1914년 한 해에만 벨기에 전역에서 1,000여 명의 벨기에인들을 죽이고 강간했다. Larry Zuckerman[6], Alan Kramer[7], Jeff Lipkes[8] 등 서부전선과 1차대전 당시 전쟁범죄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차대전 내내 독일 점령기 내내 최소 6천 명의 벨기에 민간인이 주로 입증되지도 않은 빨치산 혐의로 인하여 독일군에게 직접 학살당했고 추가로 15,000명에서 20,000명 가량의 민간인들이 강제 이주나 의도된 기아, 독일군에 의한 구금 상태에서 죽었으며 30,000명 가량이 영구적이든 일시적이든 신체적 상해를 입었고 2,000채 이상의 건물과 가옥이 무너졌고 십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독일의 전시 공업에 노예 노동자로 강제 동원되어 독일 본토로 끌려갔다. 여기에 이프르와 리에주, 브뤼셀, 루뱅 등 수많은 도시들이 전투에 휘말리든 독일군의 보복성 파괴에 의해서든 쑥대밭이 되었다. 루뱅 가톨릭 대학교 도서관 방화 사건에서는 20만권 이상의 장서가 파괴되었는데 그 중에는 1,700권 가량의 귀중한 중세에 제작된 필사본 고서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9]
사건이 알려진 후 독일에서는 "비겁하게 우리의 뒷통수를 친 벨기에의 잘못"이라고 주장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이 사건이 당시 벨기에에 있었던 '중립국' 미국 기자들의 취재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직은 고립주의 상태였고 연합군과 조금 더 친할 뿐이었던 미국 언론의 보도는 독일의 만행을 이야기했다. 미국 기자가 루뱅 시장을 인터뷰했는데 울음 때문에 제대로 말도 못했다고 하며 그리고 독일군은 1918년 11월 11일 패망하는 그 마지막 날까지 벨기에를 수탈하였다. 다만 독일군 수뇌부 역시 루뱅 학살이 적군들의 프로파간다에 적극 활용되고 독일의 이미지를 추락시킨다는 것을 인지하였기에 전쟁 초반 이후에는 루뱅 학살과 같은 대규모 전쟁범죄가 일어난 적은 없다. 하지만 전쟁 말기엔 독일 본토도 굶주리던 상황에서 대놓고 수탈당하던 벨기에의 식량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다.
3. 뒷이야기
- 2001년 5월 당시 독일의 국방차관이였던 "발터 콜보(Walter Kolbow)"는 이 학살 사건에 대해 벨기에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유족들과 그 후손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 벨기에의 루뱅과 디낭 등 다수 지역에서는 하켄크로이츠는 물론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10]도 엄격히 게양이 금지되고 있고 게양하면 법적 처벌을 받는다.
- 1914년 당시 벨기에 학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자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이 사건을 프로파간다로 적극 활용했다. 즉, "이런 야만적이고 미개한 기본적인 인권조차 모르는 독일 놈들을 때려잡는 것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우리들의 임무다."라는 취지의 모병 포스터 등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영프군은 "독일군이 이때 벨기에에서 아기를 잡아먹었다"는 상당히 과장된 거짓말로 이 사건을 포장했는데 물론 당시 협상국 병사들과 민간인들도 그 말을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지만 이미 독일군이 저지른 비인간적 행위는 외부에 알려진 지 오래였고 그것만으로도 연합군이 제국군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는 것에는 충분했다. 미국조차 1917년에 벨기에의 학살을 들먹이며 "훈족 야만인들을 싸그리 쳐부수러 가자!"고 했던 사실을 보면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협상국이 치를 떨었는지 알 수 있다.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도 주인공 일행 프로이센 군인들이 왜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느냐 등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프로파간다를 언급하며 '적들은 우리보다 더 속고 있는건 분명해. 이런식으로 전쟁을 부추기는 놈들이 정말 나쁜 놈들이야.'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 상술한 영미 언론의 벨기에 학살을 주제로 한 선전 활동이 유아 식인에 벨기에 여성이란 여성마다 교회 문에 칼로 박아 놓아 유방을 도려냈다는 수준으로 과장한 바도 있어서 1차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 과잉론과 더불어 독일에 대한 동정 여론과 영국, 프랑스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퍼졌을 때는 벨기에 학살이 마치 영미 언론이 전적으로 지어낸 뻥으로 취급받던 시절도 있었다.[11]
- 독일군 총사령관이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919년 위의 저 프랑-티뢰르 빨치산들의 존재를 언급하며 당시 독일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문필가 G.K. 체스터튼[12]이 쓴 사설이 아래에 있다."(설령 민간인 빨치산들이 유의미한 규모로 존재했다 쳐도) 이런 문제에서 독일 제국이 한 일은 정말 멍청 단순하기 짝이 없다. 한줌 숨어서 총 한두 발 날리고 숨는 게릴라로 인해 그리 심한 타격을 받았을 만큼 당시 독일군이 무능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설령 그런 사건이 존재했다 한들 단연코 말하건데 프랑-티뢰르[13]은 군인의 관점에서 비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존재가 아니라 되려 조금의 명예와 관용의 정신을 지닌 군인이라면 마땅 경외감을 담아 전쟁 포로로 대하여할 적이다. 프랑-티뢰르란 무엇인가? 그는 곧 1870년 프로이센군이 제공한 군복과 장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그대로 자유인으로서 침략한 외세에 맞서 총을 들고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항하기로 결심한 존재이다. 그 누가 훈장 하나, 군복 한 벌도 주지 않는데 순전한 자유 의지로 인해 점령 당시 가지고 있던 외로운 총 한자루로 들고 소시민으로서 결의를 한 투사이다. 포츠담의 군국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건 전혀 사소한 요소가 아니다."Illustrated London News 9월 13일자 사설 중.
- 독뽕들은 레오폴드 2세가 저지른 콩고 대학살을 들먹이며 독일을 옹호하는데[14] 그냥 피장파장의 오류다. 레오폴드 2세의 콩고 대학살과 독일인들이 저지른 벨기에 학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독일이 콩고인들을 위해 벨기에인들에게 복수를 해주겠답시고 한 짓도 아닐뿐더러 그냥 독일인 개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욕심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이딴 논리면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도 '조선이 여진 정벌 과정에서 벌였던 여진족 학살에 대한 업보' 정도로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다. 그저 두 악이 벌인 악행으로 분리해 봐야지 두 사건이 무슨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고 착각해 경중을 따져서 선택적으로 비난하고 옹호할 사안이 아니다.
[1] 'rape'라는 말에는 강간이라는 뜻도 있지만 약탈, 파괴, 학살을 포함하는 '유린'이란 뜻도 있어 '벨기에 유린'과 같은 뉘앙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 학살 당시 수많은 강간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또 난징 대학살도 영어로는 'The Rape of Nanjing'이라고 한다.[2]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도 호주군을 초콜릿 군인이라고 비하했다.[3] 직역하면 '자유 사수'란 뜻으로, 의병과 똑같은 의미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급속도로 진격하며 당시만 하더라도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정규군에게 총을 쏘며 저항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프로이센군은 루아르 계곡 일대에서 이런 소규모 지역 의용군에게 상당히 고생했다.[4] 애시당초 벨기에-네덜란드는 영토 면적은 좁고 지형은 평지인지라 게릴라전에는 최악의 환경이다. 시대적으로도 수만명 돌아다니는 중근세가 아니라 백만명 죽으면 백만명 더 붓는 시대였다.[5] 또 벨기에 당국도 민간인 학살을 우려해 민간의 총기를 모아두고 비저항을 선포하는 등 노력했다. 하지만 독일은 그딴 거 신경 안 썼다.[6] The Rape of Belgium: the Untold Story of World War I[7] Dynamic of Destruction: Culture and Mass Killing in the First World War[8] Rehearsals: The German Army in Belgium, August 1914[9] Craig Gibson, The culture of destruction in the First World War (2008)[10] 물론 독일에서도 네오나치들이 하켄크로이츠의 대용품으로 사용해서 그런지 금기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11] 상술한 Lipkes 저서에서 발췌.[12]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작가.[13] 빨치산 의병[14] 꼭 독빠가 아니더라도, 제암리 학살 사건이나 남한 대토벌 작전같이 식민지배를 당하던 와중에 학살의 피해를 당한 경험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을 포함해서 식민지배를 저지른 과오가 있는 나라들을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콩고 자유국의 비극을 잘 알고있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벨기에에 대한 인식은 식민지배를 하면서 죄없는 콩고인들의 사지를 자른 만행을 저지른 주제에 일체의 반성도 하지않는 악당 국가로 각인되어 최악인 상황이니, 벨기에 학살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꼴좋다고 비웃는 여론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