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6 17:19:16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의 역사 L'Histoire de la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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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프랑스 왕국
1



1


보나파르트 왕조







백일천하
7



2



2


보나파르트 왕조

3



파리 코뮌
자유



4



5


부르군트 왕국 메로빙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










비시
서고트 왕국 독일령
아르모리카브르타뉴, 아키텐 왕국, 노르망디 공국, 부르고뉴 공국 1차 프랑스
식민제국
2차 프랑스 식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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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파일:프랑스 국기.png 파일:110px-Official_seal_of_the_third_French_Republic.png
국기 국장
파일:French_Republic_1939.svg.png
존속 기간 1870년 ~ 1940년
표어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형제애)
국가 라 마르세예즈
위치 오늘날의 프랑스알제리[1] 및 식민제국(諸國)
수도 파리[2]
인구 1870년 38,400,000명
1910년 41,500,000명[3]
정치체제 내각책임제
국가원수 대통령
주요 지도자 아돌프 티에르
조르주 클레망소
아리스티드 브리앙
언어 프랑스어
종교 세속주의[4]
민족 프랑스인
통화 프랑
성립 이전 프랑스 제2제국
주요사건 1870년 건국
1940년 멸망
멸망 이후 비시 프랑스
자유 프랑스
프랑스 군정청

1. 개요2. 인구3. 정치
3.1. 구성3.2. 정교 분리
4. 외교
4.1. 유럽 내 외교정책4.2. 제국주의
5. 역사
5.1. 주요 사건5.2. 연표
6. 대중매체에서의 프랑스 제3공화국

1. 개요

1871년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된 이후 아돌프 티에르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세워진 프랑스의 정치 체제. 1940년 제2차 세계대전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정확히 70년 동안 유지됐고, 이는 지금까지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장수한 공화국이다.[5]

또한 유럽내에 최초로 정착되어 장수한 현대식 공화정 체제다. 당시 프랑스를 제외하면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왕정을 고수하고 있었다.[6][7] 그로부터 약 40년 후 포르투갈 왕국에서 왕정이 붕괴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유럽의 유일한 공화국이었다.[8]

2. 인구

프랑스의 출생 인구는 계속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프랑스의 공화국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해당 시기가 끝나고 현재까지도 출생 인구가 조금씩 줄거나 정체된다. 1900년 프랑스의 출생 인구는 887,000명으로 이미 이 시기에는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프랑스의 출생 인구를 앞서 나갔고 다른 국가들도 추격을 하는 상황이었다.[9]

프랑스의 기대 수명은 공화국이 시작될 때부터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1900년 프랑스의 기대 수명은 47세였는데 이 시기에는 상당히 좋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출생 인구는 정체되는데 기대 수명은 늘어나니까 인구가 조금씩 증가해도 대부분 나이가 많은 인구가 증가해서 고령화가 진행되었다. 프랑스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것은 무려 1865년으로 다른 국가들은 고령화 사회에 빠르게 진입한 국가도 스웨덴이 1890년, 영국, 독일이 1930년, 미국이 1945년일 정도로 고령화가 심했다.[10]

그나마도 이 시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에서는 인구가 거의 정체 수준이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다른 서유럽 국가도 인구가 정체되기 시작할 때도 같이 인구가 증가하지 않아서 이런 현상은 지속되었다.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 처음에는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이민을 오는 인구가 조금 더 많았는데도 인구는 별로 증가하지 않을 정도였고 나중에는 태어나는 인구는 더 적은데 이민도 가는 인구가 더 많아져서 인구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11]
시기 자연 증감 이민 증감 인구 증감
1890년 +50,000명 +20,000명 +70,000명
1930년 +20,000명 −10,000명 +10,000명

3. 정치

3.1. 구성

아돌프 티에르나폴레옹 3세가 도망간 이후로 집권했지만 보불전쟁에서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굴욕적인 협상안에 사인을 해야했으며, 이로 인해서 나폴레옹 1세에 대한 향수로 기존 나폴레옹 3세를 지지했던 보수층들은 아돌프 티에르에게도 불만감을 나타내며 왕당파로 휘귀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1871년 지방에 투표소를 덜 설치하는 등의 방해공작을 벌였음에도 총선에서 왕당파가 총 의석 638석 가운데 과반을 훌쩍 뛰어넘는 396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웠고, 공화주의자들은 불과 23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거기에다가 파리 코뮌을 강제로 진압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제3공화국에 대한 신임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로 인해서 초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가 왕당파에 의해 추방되기도 했지만, 왕당파가 부르봉 왕가루이 필리프 1세의 오를레앙 왕가 사이에서 누구를 임금으로 추대해야 할 지를 놓고 내분을 빚은 덕분에 공화정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공화정으로 국가의 정치 체제를 규정한 헌법이 불과 한 표 차이로 의회에서 통과됐다. 당시 얼마나 왕당파의 세력이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1876년 총선에서 왕당파의 의석이 크게 줄고 이후로도 쭈욱 세력이 줄어들면서 왕당파들이 소멸하고, 공화주의자들이 정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런 정치 상황을 만드는 것에도 프랑스가 고령화 사회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시기가 1865년이라는 것은 당시에 65세 이상이었던 인구가 전체 인구의 7%였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 1800년보다 전에 태어난 인구가 전체 인구의 7%였고 대부분 사회의 지배 계층이 된 이런 나이가 많은 인구는 프랑스가 엄청난 국력을 표출할 시기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가 프랑스가 전쟁에서 쉽게 패배하자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고 싶은 감정이 공화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 경향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다시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전환하려는 갈등이 있던 시기에 대한 기억이 있는 인구가 사회의 지배 계층이 되었던 경향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는 내각제 중심의 대통령제를 정치체제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이 국가의 원수였지만, 프랑스 제2공화국 시절의 반성을 토대로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렀고, 실권은 내각의회의 손안에 있었다.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의 동시 표결을 거쳐서 선출되었고, 관리의 임명권과 면직권 역시 대통령이 아니라 내각이 지니고 있었다.

3.2. 정교 분리

제3공화정 내내 정부와 가톨릭 교회 측은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가톨릭 측은 앙시앵 레짐 이후로도 왕당파 및 우파 세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공화정에 크나큰 위협이었다.[12]

특히나 이 시기 가톨릭 사제수도자들은 초등 교육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사제들이 아이들에게 반동적인 이념을 교육시킬까봐 매우 우려했다. 이에 1882년 정부는 학교 내의 모든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는 법안인 쥘 페리 법을 통과시킨다.[13] 경제적으로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해서 가톨릭 사제 출신의 선생들의 월급은 대폭 깎였고(...) 가톨릭 재단, 특히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이들 학교 측에게 많은 공과금을 납부하게 해서 이렇게 받은 돈으로 공립학교를 설치했다. 교사들이 정교분리를 이뤄내는 일등공신이었는데, 이 시기 프랑스 농촌으로 파견된 젊은 선생들은 모두가 공화국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칭하는 별명 중 하나가 '공화국의 검은 경기병단'이었다. 이 시기 선생님들의 근무복이 검은 색이었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이 법 이후로도 정부의 가톨릭 견제는 더욱 심해졌고, 20세기에 들어서면 가톨릭의 거센 반발에도 1884년 이혼이 합법화되는 한편, 군종 신부들이 군에서 추방된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3세가 중재를 해보려고 나름 노력을 했지만, 19세기 말에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에서 가톨릭 측이 보여준 극우적이면서도 편향된 모습은 진보적 정치인들로 하여금 더더욱 가톨릭을 정계에서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해주었을 뿐이었고, 1904년 총리를 지낸 에밀 루베가 정교분리법을 발의하고 가톨릭 교육 단체를 강제로 통폐합시켜버리면서 가톨릭 세력은 치명타를 입고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반대로 국가가 가톨릭 교회에 간섭, 특히나 주교를 누구로 임명할 지를 놓고 정부와 교회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중단됐다. 쌤쌤

후손인 오늘날의 프랑스 정부 역시도, 오늘날의 민주 국가 중 가장 극단적인 정교분리 원칙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헌법 제 1조에서 프랑스를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불가분적 공화국으로 규정하였고, 공적인 장에서 일체의 종교적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공립 학교에서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히잡을 착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을 정도이다. 오늘날 터지고 있는 부르키니 문제를 쉽게 이슬라모포비아로만 간주하기 어려운 것도 프랑스가 강경한 정교분리 원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14]

4. 외교

4.1. 유럽 내 외교정책

보불전쟁에서 참패한 이후 프랑스의 외교목표는 오로지 독일 제국에 복수(Revanche)하고 잃어버린 고토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는 외교의 천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건재했던 탓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하지만 빌헬름 2세에 의해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이후 유럽 외교의 지형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빌헬름 2세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안전보장 조약을 연장하지 않고 파기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 또한 빌헬름 2세가 군함 건조 경쟁을 벌이면서 독일-영국 사이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자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도 전격적으로 동맹을 체결한다. 오랜 경쟁 심리와 더불어 파쇼다 사건으로 독일만큼이나 영국도 싫어했던 프랑스 여론은 델카세의 외교노선에 거세게 반발했지만 영국에 대한 원한보다는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서 결국은 이를 수용한다.

프랑스는 1차대전 승전국 중 최대 지분국이다. 프랑스가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된 원인도, 프랑스가 먼저 독일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면서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자주 정권이 교체되어 일관성이 없는 국방정책을 펴던 정치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부는 보불전쟁의 수모를 앙갚음하고 군국주의적인 독일 제국의 팽창주의를 우려해서 방위체제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의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전선을 유지하면서 막강한 독일군을 정지시켰고, 결국 승전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4.2. 제국주의

보불전쟁에서 비참한 패배와 더불어 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민족주의가 더해지면서 프랑스 역시 활발한 식민지 구축에 나서게 된다. 이미 제3공화국 시기 이전에 차지했던 알제리베트남을 발판으로 하여 북/중 아프리카 일대와 인도차이나에서 거대한 프랑스의 식민 기지가 건설된다. 이러한 식민지 건설에는 특히나 가톨릭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15] 이렇게 획득한 식민지는 프랑스의 경제 체제에서 원료 공급과 상품 소비와 같은 경제 활동으로 해외 투자자의 투자 수익을 얻게 해서 프랑스의 경제에 일부 참여한다.[16] 대공황 시기에 프랑스는 이들 식민지에 대한 산업을 거의 독점해서 세계적인 경제 교류를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5. 역사

5.1. 주요 사건

  • 1871년 파리 코뮌
  • 1889년 불랑제 위기
    : 1886년~1887년 육군 장관이었던 불랑제 장군이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17] 그의 인기를 두려워했던 내각은 그를 육군 장관에서 해임한다. 이후 그의 주위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극단적 공화주의자 등이 몰려들었고 특이한 정치적 연합이 형성된다. (가령 극단적 공화주의자이자 1884년 이혼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던 Naquet이란 국회의원도 여기에 참여하여 'Dissolution, révision, constituante' 이란 슬로건을 내놓는다.) 육군 장관에서 해임된 이후 블랑제는 총선에 출마하여 여러 곳에서 당선 되었고[18] 1889년 1월에 실제로 쿠데타 계획을 세웠지만 정부가 먼저 손을 써서 불랑제의 측근을 체포한다. 불랑제는 벨기에로 망명해서 그 곳에서 자살한다.
  • 1892년 파나마 스캔들
    : 1880년대 후반에 민간업체를 이용하여 프랑스 정부는 파나마 운하를 시공하였는데, 말라리아 유행, 당시 기술로는 힘들었던 건축, 자금 부족등이 겹쳐셔 건설이 중도에 중단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민간업체가 내각과 의회에 엄청나게 뇌물을 뿌렸던 것이다. 덕분에 정국은 뒤집어졌고 반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정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씹고 다닐 수 있었다. 여기에 해당 민간업체가 유대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유령회사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대중 사이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거세진다. 그리고 이렇게 팽배해진 반유대주의는 3년 뒤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 1895년 드레퓌스 사건
  • 1914년~1918년 1차 세계대전
  • 1929년 대공황
  • 1938년 뮌헨 협정
  • 1939년 2차 대전 발발
  •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제 3공화국 붕괴

5.2. 연표

연도 대통령 주요 사건
1870 ~ 1873 아돌프 티에르 보불전쟁 패전으로 집권.
파리 코뮌 진압.
1873 ~ 1879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19] 1873년 대통령 임기가 7년으로 확정
1875년 권력기구 구성에 관한 법률 재정.
1879 ~ 1887 쥘 그레비 파나마 스캔들
1887 ~ 1894 사디 카르노 국방장관 조르주 불랑제(Georges Boulanger)의 제거.
1894 ~ 1895 장 카지미르페리에 드레퓌스 사건.
1895 ~ 1899 펠릭스 포르 레옹 "부르주아" 내각.
1899 ~ 1906 에밀 루베 정교 분리
1906 ~ 1913 아르망 팔리에르
1913 ~ 1920 레몽 푸앵카레[20] 제1차 세계대전
1920 폴 데샤넬[21]
1920 ~ 1924 알렉상드르 밀랑 "국민 블록(Bloc Nationale)" 출신.
사회주의자 출신의 권위주의 우파.
루르 점령
1924 ~ 1931 가스통 두메르그 인민 전선(좌파)의 집권.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
바이마르 공화국 국제연맹 가입허용.
(1925~1930)[22]
1931 ~ 1932 폴 두메르 인민 전선.
1932 ~ 1940 알베르 르브룅 인민 전선.
국무총리의 신설(두메르그#)[23]
마지노 선, 뮌헨 조약.

6. 대중매체에서의 프랑스 제3공화국


[1] 알제리는 특이하게도 유럽에 속하지도 않는데 프랑스 본토로 취급되었다.[2] 역사적인 인구 변화는 파리(프랑스)/인구 참조.[3] 프랑스/인구 참조.[4] 물론 국민들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였다.[5] 현 프랑스 제5공화국은 1958년에 성립되어 앞으로 별다른 헌법 개정이 없다면 2027년에 70주년을 맞이한다.[6] 물론 입헌군주 형식으로[7] 다만 이웃나라인 스위스는 좀 특별하게 느슨한 연합체에서 연방 형태의 공화정으로 그들만의 체제를 구축해나갔다. 즉 엄밀히 따지면 최초의 공화국은 스위스라 할 수 있는데 스위스는 전형적인 공화체제와는 좀 다르기 때문에 예외로 둔다.[8] 다만 이웃나라인 스페인에선 여러번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첫번째는 1년만에 망했고 두번째는 내전에 시달리다가 쿠데타로 단명했다.[9] 프랑스/인구 참조.[10] 프랑스/인구 참조.[11] 프랑스/인구 참조.[12] 여담이지만 위그노유대교는 이 다툼에서 열심히 정부의 편을 들어줬다. 적의 적은 동지[13] 다만 모든 종교 교육을 금지시킨 것은 아니고 목요일은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14] 한국의 경우, 프랑스의 방식이 아닌 미국/독일 방식의 정교분리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에서의 정교분리는 '국가가 특정 교단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이며, 그렇기에 독일에서는 종교 정당인 기민련 등이 활동할 수 있으며 정치인이 종교적인 동기를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물론 선택은 여론의 몫이지만.[15] 다만 이는 프랑스 만이 아니라 모든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선교사를 보내 문화적으로 침투하는 한편, 이에 반발해서 선교사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이를 빌미로 군대파견(...)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침략과 정복에 동의한 건 아니었고, 일부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고국의 탄압에 반발을 해서 고국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16] 제국주의가 과연 본국의 경제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공헌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회의적 검토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해외의 학자를 잘 모른다면 한국의 학자 중에서는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지향, 「제국주의-신화와 현실」등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제국주의 정책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제학적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감정과 지배 계층의 체제 유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17] 1887년 Schnaebelé 사건 이후 독일에게 공공연히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다녔고 병사들의 병영생활 개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8] 당시 프랑스에선 한 사람이 여러 곳의 선거구에 동시에 출마할 수 있었다.[19] 왕당파로 합법적인 왕정복고를 추진했지만 왕위 계승자인 보르도 공작 (앙리 5세)가 입헌군주정이고 공화정이고 가리지 않고 증오하는 인물인지라...[20] 20세기 초의 저명한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와는 사촌지간이었다.[21] 여담으로 이 사람의 증손녀가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썸머 역을 맡아 유명해진 프랑스계 미국인 배우인 조이 데이셔넬이다.[22] 1926년 노벨 평화상 수상.[23] 1936년 거국일치 내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