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8:26:16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Prise de la Bastille | Storming of the Bastille
파일:Prise_de_la_Bastille.jpg
{{{#000000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 1789, 종이에 수채}}}.

1. 개요2. 과정3. 사건 이후4. 오해와 반박5. 매체에서의 등장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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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89년 7월 14일에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탈취한 사건. 본격적인 프랑스 혁명의 효시라고도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2. 과정

1789년 당시 파리 근교에는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국경 지대에서 진주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파리 시민들 사이에는 군대가 파리로 진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나갔다. 이런 가운데 7월 11일 루이 16세는 재정 총감 자크 네케르를 파면했고 이 소식에 파리는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고 각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쳤다.

파일:bastiu80.jpg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파리 동쪽에 위치한 감옥인 바스티유를 습격했다. 본래 백 년 전쟁 시기에 도시를 지키기 위해 지어진 요새인 바스티유는 이미 그 존재 목적을 잃어 감옥으로나 쓰이고 있었고, 많은 양의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천여 명의 시민들은 탄약을 약탈하기 위해 바스티유로 쳐들어갔고 바스티유 수비군과의 전투로 시민 약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수비군의 항복으로 결국 바스티유는 함락되었고 7명의 잡범들이 석방되었다.

요새의 수비를 총괄하던 사령관 드로네와 파리 시장 드플레셀은 분노한 시민들에게 린치당해 살해되었고 그 목이 창끝에 꽂혀 시민들에게 조리돌림당했다.

3. 사건 이후

이후 혁명 정부가 압제의 상징인 감옥, 요새, 성당, 궁전 등 파리의 구건축물들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바스티유도 철거되었다. 여기서 나온 석재들로 다리를 짓기도 하고, 사람들은 바스티유 벽돌을 빼다가 바스티유를 조각한 기념품을 만드는 등(...) 잘 썼다.

오늘날 바스티유가 있던 자리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프랑스는 매년 7월 14일을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지정하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념하여 군사 퍼레이드, 각종 축제나 콘서트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집권기인 1989년에는 200주년 기념일(Bicentenaire de la Révolution(불어) 참조)이어서 더욱 더 성대하게 치렀다. 때마침 이해 G7 정상 회의 의장국 순번이 프랑스였던 관계로 루브르 박물관베르사유 궁전에서 정상 회담이 열렸고 14일 밤 파리에서 대규모로 열린 200주년 기념 행사에 당시 해당국 정상들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마거릿 대처, 헬무트 콜 등을 초대하기도 했으며 그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피라미드와 신도시 라데팡스 지역에 위치한 신개선문(La Grande Arche)을 이날에 맞춰 완공하기도 했다. 참고로 200주년 기념일 전날인 1989년 7월 13일에는 파리 국립 오페라의 소속 오페라 하우스 중 하나인[1]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이 바스티유 광장 옆에 개관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94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더욱 파격적인 볼거리를 선보였다. 독일군 부대를 초청해 파리에서 행진을 하게 한 것! 이는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50년 만에 독일군이 파리에서 행하는 행진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지만 역시 프랑스 국내에서는 엄청난 논란이 일었으나[2] 미테랑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행사를 강행했다. 프랑스 최고의 국가 기념일에 행한 독일군의 행진은 독일과 프랑스가 역사의 앙금을 완전히 털어내고 협력 관계로 접어들었음을 상징하는 모습 중 하나로 남았다. 1994년 당시 독일군의 모습을 담은 뉴스 영상

4. 오해와 반박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시민들에 의해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 규모나 전투의 양상, 사상자의 숫자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주장은 19세기 이래 항상 있어왔다. 특히 시민군의 숫자는 고작 백여 명 남짓이라는 주장부터 무려 만 명이 넘었다는 주장까지 오차 폭이 매우 큰데, 최근에는 약 900명으로 천 명이 조금 안 됐다는 것이 정설로 취급된다.

한편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에 수용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구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파리 시민들은 감옥에 저장된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 위해 쳐들어간 것이지, 죄수들은 딱히 안중에도 없었다. 애초에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습격할 당시 바스티유에 수감된 죄수는 고작 7명이였다. 전부 혁명을 둘러싼 정치 상황과는 크게 상관없는 범죄자들이였고, 그나마 유명한 사드 후작[3] 습격 며칠 전에 이감되었다. 수감자들의 범죄 구성에는 서술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결국 일부는 소란을 틈타서 사라졌고, 일부는 이후 혁명 정부에서 다시 다른 감옥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시민군 사상자에 관련된 이야기에도 잘못 전해진 부분이 있다. 습격에 가담한 시민들 중 희생자 대부분이 서로 총기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혹은 조작 미숙으로 총구를 본인 얼굴을 향하게 하였다가 사망하였다.


사족으로 바스티유 감옥 안의 죄수들은 사복도 입고 하인을 부리고 애완동물을 기르는 등 복지 수준도 심각하게(?) 높았다는 주장도 있다[4] 습격 당시 수용된 죄수 중에는 자원해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과도하게 좋은 시설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서는 재정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하던 시기에는 그냥 폐기하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워낙 수감된 이들이 범털이라....

다만 바스티유 감옥이 그저 높으신 분들의 휴양지에 불과했다는 주장에는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 파리 경찰국의 직원이었던 조세프 데므리가 당시 파리에서 활동했던 문필가 500여 명의 인적 사항을 조사하여 정리한 기록부에 따르면 그중 10%에 달하는 사람들이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었으며 수감 이유 역시 정치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문필가 중 한 사람이었던 샤를 드피외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드피외는 카페에서 왕과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공격하는 시를 유포시킨 이유로 방금 체포되어 바스티유로 이송되었다." 데므리의 기록이 인명부가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 없이 문필 활동을 벌였던 모든 인물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수치는 결코 적지 않다. 비록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에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바스티유 감옥이 마치 오늘날의 서대문형무소처럼 한때 정치범 수용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구체제의 압제를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바스티유 수비군에 대해서도 시민군과 마찬가지로 언급마다 차이가 있다. 규모나 시민을 상대로 가한 공격, 저항의 정도 등등.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리 무기와 탄약이 많더라도 식량과 물 비축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에 이들이 오래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바스티유 수비대장인 드로네 사령관은 시민 대표와 협상한 끝에 무기와 탄약을 내주고 수비대가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이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드로네 사령관과 3명의 병사들은 파리 시청에서 처형당한 뒤 시민들은 이들의 목을 창에 꽂아 파리 시내를 행진하며 조리돌림을 가했다.

이러한 점들은 혁명 과정에서 연금 대상자 선정 등과 관련해서 증거를 찾다 보니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문제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거의 성역에 가깝게 취급되기 시작하고, 멀리 볼 것도 없이 습격일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 된 판에 그 신화를 붕괴시킬 수는 없어서 규모를 과장되게 묘사되거나 이러저러 어두운 면은 묻어버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북 전쟁로버트 리 등의 '고매한 남부 장군 신화'와 유사한 이야기다.

5. 매체에서의 등장

5.1. 베르사이유의 장미

프랑스 혁명기를 다룬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의 최후반부 이벤트로 다루어진다.

베르나르 샤틀레가 지휘하는 파리 시민군들이 바스티유를 공격하지만 튼튼한 성벽과 대포 등으로 수비대가 저항을 하자 공격이 막힌다. 12문의 대포가 있기는 했지만 시민군들 중에는 대포를 다뤄본 사람이 없어 있으나 마나 한 상황에서 앙드레 그랑디에의 죽음이 불러온 슬픔을 떨쳐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가 이끄는 위병대가 대포를 운용해 수비군의 포대를 타격하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드 로네이의 지시하에 수비군이 포격을 지휘하던 오스칼에게 집중 사격을 가했고 총격을 맞은 오스칼은 후방의 골목길로 옮겨졌으나 결국 알랭, 로잘리, 베르나르가 곁을 지키는 가운데 숨을 거두게 된다. 오스칼의 죽음으로 분기탱천한 알랭과 위병대의 맹렬한 포격과, 시민군의 진격으로 바스티유가 함락되며 전투가 마무리된다. 주인공인 오스칼이 죽게 되는 만큼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사실상 최후반부나 다름없는 사건으로, 애니에선 이후 알랭과 베르나르, 로잘리의 입을 빌려 바스티유 함락 이후~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서 끝이 난다. 제갈량 사후 급마무리되는 삼국지 관련 매체들의 이야기와 왠지 비슷한 느낌.

5.2.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


18세기 말 혁명기 프랑스가 배경인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초반부에 다루어진다.

주인공 아르노 빅토르 도리안이 양아버지에 대한 살인 누명을 쓰고 바스티유에 수감된다. 아르노는 감옥에 먼저 수감되어 있던 암살자 피에르 벨렉과 만나는데, 그를 통해 자신이 매의 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릴 적 살해당한 자신의 친아버지가 암살자였음을 알게 된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르노는 벨렉에게 격투와 검술 교육을 받다가 드디어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에 의한 습격이 일어나자 난리 통에 벨렉을 따라 탈옥을 감행하는데, 둘은 감옥 꼭대기에서 군인들에게 몰리다가 신뢰의 도약으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아르노는 설정상 이때 처음으로 신뢰의 도약을 하는 것이라 굉장히 주저하지만 뒤쫓아오는 군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뛰어내리고, 이윽고 시리즈 전통의 '배경 와이드뷰 + 로고'가 뜨면서 프롤로그가 끝났음을 알린다.

위 트레일러와 인게임 스토리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메인 스토리와 관련 없는 코옵 플레이 홍보 영상이기 때문.[5] 해당 트레일러에서는 어쌔신들이 시민 봉기를 일으키는 데 앞장서 도와준 것처럼 묘사해 놓고선 정작 스토리에서는 아르노가 이미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난리 덕에 탈출한다는 내용이었고, 애초에 암살단과 시민 봉기에는 큰 연관점이 없으며, 심지어 코옵 모드에서조차 바스티유 습격 관련 내용은 없었으니, 당연히 트레일러 같은 장면이 한 번쯤은 게임에 나올 것으로 기대하던 플레이어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본 트레일러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넘어서, 전체 게임 트레일러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압도적인 퀄리티와 간지폭풍을 선사하여[영상스포일러] 기대치를 하늘 끝까지 올려 놓은 상태였기에, 눈 뜨고 표지 사기를 당한 플레이어들에게 대차게 욕을 먹었다.

게임 발매 당시는 레 미제라블의 2012년 영화판이 세계적으로 흥행한 지 2년밖에 안 된 시점이라서, 해당 영상에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입힌 영상도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레 미제라블의 작중 시점은 대혁명보다 수십 년 이후라, 한국으로 치면 4.19 혁명6월 민주항쟁 이상으로 큰 차이가 있다. 타 문화권 유저들은 물론 프랑스사에 나름 친숙한 구미권 유저들이라고 크게 다른건 아닌지, 아예 게임 내 데이터베이스에서도 대혁명과 레 미제라블은 완전히 다른 시기라고 강조하면서 여기다가 대고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운운하는 사람들을 폭풍처럼 까대는 내용이 들어있다.

6. 기타

밴드 바스틸은 이 감옥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사건 당시 파리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군은 소총은 앵발리드에 비축된 물량으로 조달했지만 탄약이 없어 대량의 탄약이 저장되었다고 알려진 바스티유 요새로 향했다고 한다. 즉 바스티유 요새에 수감된 수감자를 구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탄약을 구하려고 습격한 것이다.

[1] 다른 하나는 가르니에 극장.[2] 미테랑의 전임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은 행사를 반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TV 등에 출연해 미테랑과 독일 측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런데 데스탱 본인도 나중에 치명적인 꼬투리를 잡혔다. 데스탱이 집권한 시절에도 독일군을 초청한 전례가 있었다. 데스탱 정권 시절인 1978년 독일군 군악대가 프랑스에 들어와 퍼레이드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데스탱은 웃음거리가 되었다.[3] 사디즘이라는 단어의 유래로 유명한 그 사드 후작이다.[4] 상술한 사드 후작의 감방에는 엄청난 숫자의 장서와 자위 도구(자신이 만든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반입한 것들) 및 각종 가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거기서 유명한 소돔의 120일이라는 작품까지 썼으니... 이건 뭐 감옥도 아니다. 일설에 따르면 7월 2일에 사드 후작이 들끓기 시작한 감옥 밖의 군중을 향해 "시민 여러분, 간수들이 우리 죄수들을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감옥 습격을 선동하는 고함을 질렀고 그 탓에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를 다룬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도 이 대사가 등장한다.[5] 정작 게임 내 코옵 모드에서도 바스티유 습격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영상스포일러] 특히 마지막에 암살자들이 바스티유 주둔군을 모두 처리하고 드로네 사령관의 목에 암살검을 겨누다 이내 살려주는가 싶더니, 직후 성문을 부수고 들어올 시민들에게 마지막을 양보하기 위해 조용히 자리를 비키고 바스티유 옥상에서 혁명에 물든 파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