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1 10:54:48

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
파일:베르바라 로고.png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장인물
주역
마리 앙투아네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한스 악셀 폰 페르젠 앙드레 그랑디에
조역
로잘리 라 몰리에르 알랭 드 수아송
기타 등장인물
마리 앙투아네트
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
Marie Antoinette[1]
파일:베르사이유의 장미.마리 앙투아네트.jpg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탄생 1755년 11월 2일
사망 1793년 10월 16일 (향년 37세)
성별 여성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2]
가족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큰언니 마리아 안나
큰오빠 요제프 2세
둘째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
셋째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3]
둘째 오빠 카를 요제프[4]
넷째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
셋째 오빠 레오폴트 2세
다섯째 언니 마리아 요제파[5]
여섯째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
넷째 오빠 페르디난트 카를[6]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츠[7]
남편 루이 16세
장녀 마리 테레즈
장남 루이 조제프
차남 루이 17세
외모 금발벽안[스포일러]
성우 파일:일본 국기.svg 우에다 미유키 (TVA)
히라노 아야 (신작 극장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문지현 (대원 비디오판)
권희덕[9] (KBS)
윤성혜 (EBS)
박영희 (MBC 극장편집판)

1. 개요2. 미모3. 성품4. 작중 행적
4.1. 오스트리아의 공주4.2. 프랑스의 왕세자비4.3. 뒤바리 부인과의 신경전4.4. 페르젠과 사랑에 빠지다4.5. 사치와 낭비4.6. 각종 추문에 휩싸이다4.7. 다이아몬드 사건과 뒤늦은 변화4.8. 메울 수 없는 재정난 사태4.9. 프랑스 혁명4.10. 모두가 떠나다4.11. 바렌느 도주 사건4.12. 폐위와 남편의 처형4.13. 가족들과의 이별4.14. 국민 재판4.15. 최후4.16. 사후
5. 평가6. 대인관계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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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베르사유의 장미.마리 앙투아네트.jpg
<colbgcolor=#d71a36><colcolor=#ffffff> 애니메이션판[10]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겸 히로인.
당연하겠지만, 바로 그 실존인물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와 함께 양대 주인공이며, 오스칼이 픽션상의 주인공이라면 이쪽은 실화상의 주인공이다.

2. 미모

파일:마리 앙투아네트.왕세손비 시절.gif 파일:Marie Antoinette (Lady Oscar) Beauty Shot 3.gif 파일:마리 앙투아네트.백발.gif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소녀 시절 성인이 된 프랑스 왕비 시절 최후반부에 백발이 된 모습

페르젠, 로잘리, 루이 16세 등이 언급한 바에 의하면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큼 순수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녀.

작중 언급에 의하면 예쁜 금발[11]과 반짝이는 푸른빛 눈을 지닌 보는 사람마다 감탄할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으로 묘사된다. 원작 만화에서 로잘리의 표현에 따르면 베르사유 궁전에서 눈부시고 찬란한 붉은 장미처럼 군림했다고 한다.

얼마나 절세미녀인지 알 수 있는 예시를 들자면 원작에서는 유명한 모차르트와의 에피소드는 물론 오스트리아 공주 시절 그녀의 애교와 매력에 넘어가 선생님들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하녀들 또한 마리의 매력에 안 넘어간 사람은 목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특히 애니메이션 2화에서 오스칼에게 구출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녀 복장 상태에서[12] 루이 15세와 프랑스 귀족들 앞으로 우아하게 다가갔는데 그 자리에 있던 루이 15세와 귀족들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녀 차림인 건 신경쓰지도 않은 채 일제히 감탄했다.

여러모로 오스칼과 더불어 베르사이유의 장미 내 최고 미인. 다만 성숙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냉미녀인 오스칼과 대조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발랄하고 순수해보이는 인상의 소녀스러운 미녀로 등장한다. 이후 나이가 들고 어른스러운 미인이 되며 애니메이션에서도 성우의 목소리 톤이 점점 성숙하게 바뀌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 모두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작중 상황이 갈수록 어두워지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건 변하지 않았지만 외모도 그에 걸맞게, 점점 초췌해지다가, 결국 마지막에서는 그동안의 화려한 금발과 휘황찬란한 드레스에 보석을 휘감은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백발에 초라한 행색이 되어버린다.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우아하고 매력적인 미인이긴 했지만 좌중을 감탄시킬 정도의 엄청난 미녀[13]까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한 미인의 기준이었던 백옥같은 깨끗한 피부와, 고열량 위주의 식사와 과식으로 대부분 뚱뚱했던 당대 왕족들과 반대로 호리호리한 몸매, 풍만한 가슴, 왕족 특유의 타고난 우아함과 나긋나긋한 화술에 뛰어난 패션 센스까지 적극 활용하여 당대의 스타일 아이콘이자 미인으로 군림했다.

3. 성품

상냥하고 순진한 인품[14]과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며 그와 동시에 당시 강대국인 오스트리아의 공주이자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서의 강한 긍지와 자존심[15]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상냥한 성품과는 별개로 어릴 때부터 워낙 놀기를 좋아하는데다 공부나 힘든 일은 물론 깊이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하다 못해 피하려드는 무책임한 면모가 큰 단점이었다. 그래서 공부 시간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하는 걸 넘어 애교와 꾀를 피워 선생님들을 속여 수업을 피하곤 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르친 선생님도 "마리 님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열정이 없어서 걱정입니다"라고 한탄했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마저 그런 딸의 철없는 모습에 여러 번 뒷목을 잡을 정도였다. 그나마 오스트리아의 막내 공주로 살던 시절에는 나이도 어린데다 자신을 비호해줄 부모형제가 모두 건재했기 때문에 그저 성격상의 사소한 결함으로 치부되어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런 철없고 무책임한데다 상황 파악을 못하는 면모를 혼인 후 프랑스의 왕세손비가 되고 왕비가 된 이후에도 고치지 못해서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는데 크게 일조하고 말았다.[16]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은 생각치 않고 지나치게 감정에 솔직하고 남을 너무 쉽게 믿는 순진하고 다소 천연적인 면모가 있다. 문제는 호의를 품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애정공세를 베풀고 그 사람에 대한 간언을 들은 척도 안하면서, 반대로 자신이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상종을 안하다 못해 일관된 경멸과 회피로 일관하는 등, 좋게 보면 인간관계의 맺고 끊음이 확실하지만 나쁘게 보면 아무리 싫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융통성이 전혀 없고 기본적인 공사구분도 못해 쓸데없이 적들을 불리고 다녔다.[17] 이런 점이 앞서 말한 놀기를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무책임한 성격에 이어, 자신이 좋아하면 민중들도 좋아해줄 거라는 착각과 왕비라는 신분이 합쳐지면서 가히 엄청난 악효과를 낳는다.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서 적어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쁜 사람은 없었지만 공사구분도 못하는 철없는 면모로 인해, 프랑스 사회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와중에 무책임하게 굴고 가까운 사람에게만 곁을 내주는 칼같은 인간관계의 정리함은 오히려 대외적인 이미지만 갈수록 최악으로 치닫는데 한몫했다.

4. 작중 행적

4.1. 오스트리아의 공주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의 막내딸로 첫 등장하며 오스칼페르젠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다른 유럽의 왕실들과 달리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배제하고 자유롭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추구한 오스트리아 왕실의 영향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자라는 동시에 언니, 오빠들과 같이 자유롭게 놀고 예술을 즐기는 안락한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혼인 동맹이 체결되고 대대로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훈에 따라[18]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11살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의 왕세손비가 되는 미래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마리는 나비처럼 우아하게 춤을 출 수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왕족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인 프랑스어, 역사, 정치, 피아노, 노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문에서 일자무식인 상황이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상상 이상으로 심한 막내딸의 무식함에 경악하여 뒷목을 잡고(...), 일단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선생님들을 데려오는데, 특히나 프랑스어를 공부를 빡세게 시키는 동시에 마리가 프랑스로 시집가기 전 몇 주 동안 딸과 함께 지내며 프랑스 왕비라는 지위의 중요함과 무거움에 대해 직접 가르쳤다.

그래도 철부지 막내딸이 마지막까지 걱정되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당일 자신이 직접 쓴 지침서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읽어보라고 주고, 측근인 메르시 백작까지 프랑스로 함께 보내며 이후에도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으면서 온갖 노력[19][20]을 기울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어머니의 당부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이는 그녀의 비극적인 최후에 일조하게 된다.

4.2. 프랑스의 왕세자비

이후 14살 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을 위해 프랑스로 오며 이때 미래 남편인 프랑스의 왕세손 루이와 자신의 호위를 맡은 오스칼과 만나게 된다. 프랑스에 온 직후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불안감과 모국의 모든 것[21]을 두고 와야 하는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울음을 터뜨렸고 남편이자 결혼 상대인 루이 16세에 대해 실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결혼식[22]을 마친 후, 왕세자비로서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는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첫 연회날 '아무도 내게 말을 걸 수 없고 모두가 내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우아하고 화려한 프랑스의 사교계와 자신이 프랑스 내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23]이란 자리에 도취되어 이전의 슬픔과 실망감을 바로 잊어버린다.

4.3. 뒤바리 부인과의 신경전

마리는 처음으로 맞이한 베르사유 궁전의 연회에서 아름다운 미모와 우아하고 기품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파리의 귀부인들은 그런 마리의 우아하고 의연한 모습과 아름다운 매력에 감탄하며 마리에게 금방 매료되고, 마리 역시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프랑스의 사교계에서 자신이 '베르사유의 여왕' 이 된 상황에 긴장과 설레감을 느끼며 속으로 들떠하는데, 이 와중에 멀리서 자신을 경계하듯 힐끔힐끔 쳐다보는 루이 15세의 애첩 뒤바리 부인을 보게된다.

연회가 끝난 후, 자신을 찾아와서 뒤바리 부인을 뒷담까는 시고모들의 부추김과[24] 어머니의 영향[25], 마리 본인의 높은 자존심까지 더해서 뒤바리 부인을 일부러 무시하고 보란듯이 못 본 척 인사를 걸지 않는 등, 대놓고 신경전[26][27] 을 벌이게 된다.

마리의 무시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의 왕태자비이자 미래의 왕비라는 신분과 현재 왕실 내 지위가 제일 높은 여성이라는 지위,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리에 동조한 베르사유 내 귀족 여성들도 뒤바리 부인을 은근히 피하면서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태어난 왕세자비가 출신이 천한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 건 당연하다' 라며 뒤바리 부인을 몰래 비웃는 등, 이런 상황에 분노한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에게 대놓고 불만을 터뜨린다.

이러한 뒤바리 부인의 불만에도 루이 15세는 처음에는 "오해다, 마리는 아직 어린애가 아니냐" 라며 적당히 달래면서 별 거 아닌 일로 흘려 넘겼고, 나중에는 "나는 이제 그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않다, 부탁이니 내버려둬라" 라며 루이 15세는 옆에서 뒤바리 부인의 하소연을 하든, 두 여자들끼리 대놓고 기싸움을 벌이든 중간에서 아예 나서지 않았지만[28] 자신에게 뒤바리 부인의 연이은 하소연과 짜증이 계속 이어지자, 루이 15세는 어쩔 수 없이 마리의 측근인 노아이유 백작부인과 메르시 백작을 통해 경고를 준다. 그러나 사태 파악을 못한 마리는 루이 15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국왕의 명령이라고 해도 프랑스의 왕태자비인 내가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면 매춘부가 왕궁에 출입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왕태자비로서의 긍지의 문제다' 라며 결국 마리는 일부러 뒤바리 부인을 향해 대놓고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면서 끝까지 말을 걸지않고 버틴다. 그런 마리의 행동에 뒤바리 부인은 모욕감에 울며불며 하소연하고, 프랑스 국왕인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마리의 행동에 불쾌해하며, 루이 15세는 메르시 백작을 따로 뒤바리 부인의 방에 불러서 경고를 준다.

결국 메르시 백작에게 이 사태를 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주의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메르시 백작까지 강하게 나서며 설득하지만, 마리는 '오스트리아의 공주이자 왕세자비인 내가 매춘부인 뒤바리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할 수 없다' 라며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 보다 못한 메르시 백작은 일부러 궁정에 쓰이는 독약 이야기로 마리에게 겁을 준 다음, "마리 앙투아네트님 혼자 싸우는 거라면 아직은 괜찮다, 그러나 국왕은 여차하면 오스트리아와 전쟁도 사양치않는 태도다,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은 어찌 되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님이 그렇게 노력하셔서 성립시킨 이 동맹은 어떻게 되는 거냐" 라며 강하게 말한다.

결국 그 말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떠올린 마리는 충격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그 여자에게 단 한번 말을 걸겠다, 하지만 이건 내 뜻이 아니다, 다만 어머니를 위해서다! 메르시 백작, 이제 됐죠!" 라고 메르시 백작에게 자신의 뜻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확실히 못을 박으며, 그렇게 마리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을 위해 자기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열린 무도회에서 마리는 "오늘은 베르사유 궁전에 사람이 많군요" 라고 뒤바리 부인에게 인사를 하면서, 결국 뒤바리의 보이지않는 승리를 쥐면서 그렇게 두 여자들의 신경전은 일단락 된다.[29][30]

그 뒤로 마리는 뒤바리 부인은 물론 시고모들과 아예 엮이길 피하면서 오랜만에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한편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루이 16세와의 어색한 부부관계와[31] 왕세자비라는 자리에서 오는 과중한 책무로 지쳐가고, 오스트리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에티켓[32]으로 가득차있는 프랑스 사교계에서 벗어나서 다른 여성들처럼 무도회, 연극, 오페라를 즐기고 어릴 때처럼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했다.

4.4. 페르젠과 사랑에 빠지다

그러다 왕세자 부부의 첫 파리 방문[33]을 계기로 가면무도회나 연극 등 파리의 밤문화에 매료된 마리는 어느날 밤 오스칼만 동행하여 파리의 가면무도회에 신분을 숨기고 몰래 참석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엄격한 에티켓에 얽매여 맘껏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지쳐있다가 오랜만에 맘껏 웃고 놀게된 상황에 감격해 있던 마리는 마침 무도회에 참석한 페르젠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한다.

이후 페르센은 마리를 만나기 위해 알현을 핑계로 궁에 자주 출입하기 시작하고 감정에 솔직한 마리는 페르센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다보니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직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프랑스 왕비라는 무거운 자리에 오르게 된다.[34]

결국 불륜 상대였던 페르센도 친구인 오스칼의 충고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프랑스를 잠시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페르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페르젠이 떠난 빈자리와 후계자와 관련된 악담, 왕비라는 직위의 부담감과 외로움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디자이너인 로즈 베르탱을 개인 디자이너로 임명해서 각종 드레스와 장신구[35][36]를 사재기하는 사치[37][38][39]를 부렸다.

게다가 왕세자비 시절과 달리 왕비가 되면서 무한대로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은 것에 취한 나머지 매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티와 무도회[40]를 열고, 하루가 멀다하고 파리에 드나들며 밤늦게까지 가면 무도회와 연극[41]을 즐기고 국고를 도박과 경마에 탕진하며 유흥과 놀이에 몰두하기만 한다. 정작 이렇게 세금을 자신의 사치비용으로 낭비하면서 왕비로서 해야할 국정 운영과 사교계의 통솔은 무심하게 여기며 다소 방만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이 철없는 행동은 평민과 부르주아는 물론 귀족과 왕족들의 불만까지 사게되는 마리 앙투아네트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4.5. 사치와 낭비

더구나 전술한 국고로 사치를 부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자신이 프랑스 왕비가 된 상황에 도취된 나머지 왕비 신분을 이용해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벼슬과 각종 특혜[42]를 마음껏 퍼주었던 것도 문제였다. 하필이면 겉보기엔 다정해보여도 실제론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던 폴리냑 백작부인에게 호감을 가져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온갖 특혜[43][44]를 주고, 그녀의 꾀임에 빠져 도박을 벌여 많은 돈을 뜯기는 등 순진하다 못해 거의 호구같은 짓을 벌였다.[45][46]

심지어 폴리냑 백작부인은 마리를 위한다는 이유로 후계자 출산 관련 비난[47]과 아르투아 백작 부부의 아들 출산 소식[48]으로 힘들어하던 마리에게 거짓말로 회임하라고 제안한다. 안그래도 후계자 문제로 우울증까지 걸릴 정도로 지쳐있던 마리는 잠시나마 비난을 피하기 위해 폴리냑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짓 회임 소식을 알리고 이 덕분에 한동안은 잠잠해진다. 그러나 마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오스칼이 도박을 그만해달라고 충고하자 폴리냑 백작부인은 거짓 회임을 끝낼 동시 걸림돌인 오스칼을 내치기 위해 궁중 사람들에게 오스칼이 마리를 칼로 협박해서 그 충격으로 유산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이때 마리는 자신의 거짓말로 소중한 친구인 오스칼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더 무너지고 더더욱 폴리냑 백작 부인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만다.[49]

설상가상으로 마리는 힘든 왕비로서의 업무와 지나친 에티켓과 무미건조한 삶이 반복되는 베르사유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지극히 사적이고 어이없는 이유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떠나, 루이 16세가 결혼 선물로 준 개인 궁전인 쁘띠 뜨리아농에 폴리냑 부인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끼리 틀어 박혀 연극과 농가생활을 즐기며 국정을 멀리하는 일국의 왕비로서 최소한의 책임마저 내팽개치는 바보같은 짓을 한다.[50]

더 문제는 쁘띠 뜨리아농의 출입조차 마리 앙투아네트의 허락이 있어야 해서 알현을 하러 온 백성들과 고위 귀족들은 물론 국왕 루이 16세도 허락을 받지 못하면 못 들어갔기에 백성들은 민생에 1도 관심을 안주는 왕비[51]에게 실망하였고, 귀족들도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왕비의 태도[52][53]에 큰 모욕감을 느껴 와달라고 해도 가지 않을 거라고 대놓고 힐난을 할 정도로 마리에게 제대로 등을 돌려버린다.

최측근인 오스칼마저 왕비님이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는 무책임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말렸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딸의 어리석은 행동에 놀라, 그만 쓰러지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마리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현실을 눈과 귀를 막고 외면하였으며 자신이 만든 허황된 낙원 안에서 달콤한 독 같은 행복을 누리며 스스로를 파멸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로 인해 훗날 마리 앙투아네트가 모두에게 버림받고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에 한 발짝 더 다가게 만들었다.

덧붙여서 뜨리아농에서의 생활이 좋은 영향이 있다면 베르사유 궁전에서와는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족들, 가까운 친구들과 농가 생활을 체험하는 등 우아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겼고 이는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마리는 소박하고 심플한 슈미즈 드레스 (Chemise a la Reine)[54]를 즐겨 입었는데 귀족들도 왕비를 따라 가볍고 편안한 슈미즈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고 이후 슈미즈 드레스는 엠파이어 드레스로 이어지는 등 어떻게 보면 신고전주의 복식의 시작을 열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마리는 쁘띠 뜨리아농 옆에 아담한 촌락을 지어, 가끔 백성들이 그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거나, 그동안 악마의 음식으로 오해받은 감자를 올바르게 재배하고 먹는 방법을 농민들에게 전하는 등 나름대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그녀 나름의 정성스러운 도움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역으로 왕비가 백성들의 삶을 놀잇거리에 이용한다는 악소문이 퍼지고 만다.

4.6. 각종 추문에 휩싸이다

설상가상으로 소극적인 남편과 남편과의 애매한 사이로 인해 프랑스로 시집 온지 7년이 넘도록 후계자를 낳지 못해 여론은 더욱 안좋았다. 게다가 마리가 오랜만에 만난 페르젠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총애하는 행동을 보여서 주변 귀족들도 마리와 페르젠과의 관계에 의심을 가지고 아예 대놓고 조롱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뒤늦게 첫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고 연달아 장남 루이 조제프와 차남 루이 사를을 낳으면서 마리도 안정을 찾고 주변 시선도 달라지는가 싶었지만 장남은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요절하고 차남 루이 17세는 아예 내연남이였던 페르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휩싸인다.이 후계자 문제는 훗날 루이 16세의 남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 루이, 아르투아 백작 샤를부터 프랑스 왕가의 먼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가 득세하여 왕위를 넘보며 왕실을 어지럽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페르젠과의 부적절한 관계야 말할 것 없고 폴리냑 부인에 대한 마리의 지나친 총애도 부추김을 더하다 못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염문설과 레즈비언설도 번지게 된다. 문제는 그냥 세간의 헛소문으로만 떠도는데 그치지 않고 각종 음란물 서적과 팜플렛으로 인쇄되어 파리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종국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라는 지위가 무색하게 신분, 성별, 나이 상관없이 프랑스 전국민의 조롱거리이자 욕받이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55]

4.7. 다이아몬드 사건과 뒤늦은 변화

결국 전술한 요인들과 오해들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심해지던 중 로잘리 라 몰리에르의 언니 잔느 발루아 드 라 모트가 프랑스 왕실에 납품될 예정이었던[56]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탐내 사기사건을 벌이고 이에 대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된 대처[57]까지 겹치면서 다이아몬드 사건[58]이란 대형 사건이 터진다.

이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고함이 밝혀졌는데도 재판에 회부된 잔느는 "마리가 자신을 시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레즈비언이고 여자들과 관계하는 것뿐만 아니라[59] 여러 남자들을 침실에 끌어들이는 문란한 여자다"[60]라는 등의 온갖 위증을 한다. 물론 이런 말도 안되는 증언과는 별개로 명백한 증거들이 있었기에 잔느는 사기죄가 인정되어 수백 대의 채찍형을 얻어맞고 양 어깨에 도둑(Voleuse)을 뜻하는 머릿글자 V를 새겨서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자 수용 감옥의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선 형벌대에서마저 잔느는 간수를 물어뜯으며 발악했고[61] 급기야 마리 앙투아네트를 적대하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하여 해외로 망명한 뒤, 돈벌이 겸 복수로 앞서 위증한 레즈비언설부터 수많은 남자들과의 염문설에 살을 덧붙혀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구잡이로 욕하는 가짜 소설을 팔기까지 한다. 더구나 이 사기극에 일조한 로앙 대주교는 무죄로 풀려나고 부르주아 혁명가들을 필두로 한 황색 언론도 잔느의 사기극을 대대적으로 알리다 못해 그녀를 민중 투사로 포장시켜버리고 만다.

하필이면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안그래도 앞서 말한 각종 사치와 무책임한 행태에 이어 페르젠과의 풍문까지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온갖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말이 많던 시기였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민중과 귀족들도 사기꾼인 쟌느에게 동정을 표하고 로앙 대주교의 무죄에 환호하며 피해자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히려 욕을 먹는 사태까지 치닫고 만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엄청난 수치심에 떨며 쟌느의 말은 거짓이라고 호소하지만 평민과 귀족들 중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 뒤늦게서야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안 좋다는 걸 알게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신을 차리고 페르젠의 조언을 받아, 간신배인 폴리냑 부인과 그 측근들을 멀리하고 오스칼과 메르시 백작을 가까이 하며 사치와 도박도 그만두고 국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때는 늦어 프랑스 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가는 아무하고나 놀아나는 문란한 오스트리아 여자이자 나라를 망치는 악녀라고 불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진다.[62] 따지고보면 쟌느가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족과 프랑스를 파멸시킨 최악의 만행을 저지른 셈이다.

4.8. 메울 수 없는 재정난 사태

당시 프랑스는 연이은 흉년과 군인들의 식량소비로 파리와 파리 주변부는 식량부족사태가 빈번했으며 이미 루이 14세부터 축적된 왕실의 엄청난 빚과 미시시피 거품, 미국 독립 전쟁[63] 참여 등 여러 실책으로 세금으로 이전 왕실이 지은 빚을 갚는데 대부분을 쓰일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세금 면제란 특혜를 누리고 왕실은 면세 특권을 폐지하는 수단조차 거부하고[64] 백성들에게 세금을 지속적으로 부과하는 악수[65]를 둔다.

이러다보니 앞의 부조리한 상황과 식량난과 세금개혁 실패에 평민대표가 삼부회에서 큰 소리를 내고 이후 이런 평민 대표에 동조하는 제 1, 2신분의 귀족과 성직자[66]들도 나타나 테니스코트의 서약으로 국민의회가 성립된다. 이런 급격한 사회 변화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민중들의 소리를 듣고 개선하긴 커녕 왕당파 귀족들과 함께 남편 루이 16세에게 귀족들의 면세특권 유지와 민중들을 반역자로 몰아 남편 루이 16세에게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하라"고 강요하는 시대착오적인 언행을 보이고 만다.

4.9. 프랑스 혁명

결국 이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책과 무능이 연이어 이어지자 민중들의 고통과 왕실을 향한 증오가 하늘을 찌른 끝에 마침내 유럽 최고의 절대왕정이었던 프랑스 왕실의 존폐 자체를 깨부수고 프랑스 공화국의 시초가 되는 프랑스 혁명이 터진다.

이때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을 제압하라 보낸 오스칼과 위병대들도 이들에 합류하여 바스티유 감옥 함락 사태에 기여하고, 급기야 굶주림에 분노한 민중들과 부녀자들이 아예 베르사유의 궁전까지 쳐들어 와서 왕가 가족들을 습격하는 등 루이 16세 가족들의 생명까지 위헙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나 그들에게 가장 증오받았던 마리는 이때 시위대 앞으로 끌려가서, 그들의 분풀이 대상이자 웃음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사태까지 갈 뻔했지만 그녀는 직접 베르사유 궁전까지 쳐들어온 분노한 민중들의 앞에 나서서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67]하는 모습을 보여 흥분한 민중들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왕비로서 위엄을 보였다. 이후 국민 의회와 민중들의 요구로 가족들과 쫒겨나다시피 베르사유를 떠나[68] 파리의 고성인 튈르리 궁전에 유폐된다.

4.10. 모두가 떠나다

비록 앞의 사건들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권을 하나 둘씩 빼앗기긴 했어도 매일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받고 어전회의에도 참여하며 여전히 국왕과 왕비로서 국민 의회와 민중들에게 존중받고 있었다. 아울러 혁명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인 미라보 백작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봉 왕정도 잘만 하면 절대왕정 시대만은 못해도 최소한의 권위를 인정받고 남은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 측근들의 부추김과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한 행동,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고집하는[69] 마리의 시대착오적 행동, 미라보 백작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으로 그마저도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꽉 막힌 상황과 우유부단한 왕과 왕비에게 질려버린 일부 귀족들은 살길을 도모하고자 프랑스와 왕실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하면서 마리는 외톨이 신세로 전락한다.

특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에서 온갖 아첨을 일삼아 막대한 국비를 낭비하게 하고 마리에게 귀족들의 면세특권 유지와 군대를 통한 강경진압을 주장하면서, 이를 반대하며 충언을 하는 오스칼을 모함하고 자신들이 충신인 것처럼 굴던 간신들은 막상 루이 16세 부부가 위험에 처하자 바로 그들을 버리고 해외로 도주해버렸다.[70] 심지어 도망가지 않고 왕실에 충성하는 왕당파마저도 충성심과는 별개로 대다수가 무능하였기에 부르봉 왕실을 수호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71]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 곁에 유일하게 남은 건 시누이 엘리자베트, 페르젠, 자신에게 늘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오스칼[72]의 아버지 자르제 백작 뿐이었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젠에게 더욱 의지하면서도 자신이 베르사유의 중심에 있었을 때는 온갖 아부를 일삼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기들끼리 살길을 찾아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도망쳐버린 현실에 비참해한다.

4.11. 바렌느 도주 사건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장기화되고 왕실에 대한 위협이 갈수록 거세지자 페르젠의 도움으로 가족들과 함께 바렌느를 거쳐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된 최대최악의 실책이었다.

마리는 어전회의가 끝나자마자 아들 루이 샤를을 여장시키고 딸 마리 테레즈와 함께 가장 무도회에 간다고 안심시킨 뒤 두 자녀를 데리고 튈르리 궁을 나가 페르젠이 준비한 도주용 마차를 타고 출발한다. 그렇게 무사히 튈르리 궁에서 탈출해 왕당파 군대가 기다리고 있는 바렌느까지 가는데 성공하지만, 중간쯤 다다랐을 때 자신들과 엮일 시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한 루이 16세의 강건으로[73] 페르젠을 먼저 벨기에로 보내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그와 헤어진다. 하지만 계획에 가담한 왕당파의 무능 때문에 계획이 자꾸 어그러지면서 안전한 도피는 물건너 갔고 우연의 우연이 겹친 끝에, 생트머누의 역참이자 자코뱅파의 일원인 장바티스트 드루에가 자신들을 보자마자 바로 국왕 일가임을 눈치채고 이를 국민 의회에게 알리면서 도주극은 실패로 끝난다.

당시 바렌느의 한 민가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있던 루이 16세 일가는 들이닥친 혁명대를 보고 놀라 시치미를 떼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드루에가 자신들의 정체를 완전히 확신하는 건 물론[74] 파리의 국민 의회로부터 국왕 일가가 튈르리 궁을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붙잡아 파리로 돌려보내라는 전령까지 받아 읽으면서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이 소식에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민가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된 바엔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틀림없이 푸이에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도우러 올 것이니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보라고 지시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하지만 속셈을 눈치챈 드루에에게 바로 저지당하고, 분노한 시민들도 국왕의 몸으로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려 하다니 비겁하다며 빨리 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까지 하고 우리들을 배반한 국왕따위 필요없다며 국왕과 왕비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고 위협한다. 결국 바렌느의 시장마저 어서 출발하지 않으면 생명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다고 하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체념하고 먼저 떠난 페르젠만은 무사히 망명해서 자신의 몫까지 살아달라고 빈다.

이후 바렌느의 시민들 앞에 루이 16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만 왕과 왕비가 외국으로 도주하여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키려 했단 것에 분노한 시민들에게 "이 나쁜 년아! 이런 드레스로 치장한 매춘부! 어디 한번 당해봐라!"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온갖 험한 욕설에 드레스가 찢어발겨지고 돌팔매질까지 당하며 온갖 치욕을 겪는다.[75] 만신창이가 된 채로 견딜 수 없는 조롱까지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려 공포에 질린 아들 루이 샤를을 챙겨 마차에 타려고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군중들은 루이 샤를에게마저 뭐가 왕세자냐며 넌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페르젠의 사생아라고 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를 모욕한다.[76] 이에 돌을 맞아 얼굴에 피까지 흘리면서도 자신에 대한 증오로 아무 죄없는 어린 아들까지 모욕해대는 시민들에게 분노하여 국민 누구 하나라도 용서할 수 없다며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눈물을 보일 줄 아냐고 겨우 마음을 추스리며 아들을 달래준다.

그렇게 군중과 국민위병에게 둘러싸여 돌아오는 내내 온갖 모욕과 위협을 받으며 3일에 걸쳐 파리로 압송되어 다시 튈르리 궁으로 돌아오지만 이때 5일간의 도피와 3일간의 체포와 압송 중 겪은 공포 때문에 금발 머리가 노파와 같은 백발로 하얗게 세어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바렌느에 도착한 푸이에 장군도 국왕 일가의 귀환 행렬을 보고 이미 늦었음을 깨달아 바로 퇴각하고, 미리 벨기에로 망명해있던 페르젠마저 이 소식을 듣고 운명은 끝내 우리들을 비웃는다며 모든 것이 파멸이라고 절망한다.[77]

결국 왕실 가족의 도피 사건이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려한 국왕과 왕비는 사형에 처하고 왕정을 폐지하자고 소리칠 정도로[78]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혁명 정부 또한 국왕 일가가 자신들과의 공존은 커녕 협조하려는 마음조차 없음을 여실히 깨닫고 왕정제 폐지와 공화정 준비에 착수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일가는 완전히 몰락하고 그들의 운명도 사실상 이때 결정된다.[79]

4.12. 폐위와 남편의 처형

그렇게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가족들과 튈르리 궁에 유폐되어있다가, 목숨을 걸고 변장하여 찾아온 페르젠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들을 외국으로 탈출시키겠다고 하는 페르젠의 말에 이미 프랑스 내부의 여론이야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왕실마저 자신들을 버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와 자신의 최후는 정해져 있었고, 스스로도 살아남을 거라 생각치 않아서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 초연해하며 구차하게 살기보단 차라리 왕과 왕비로서 아름답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며 페르젠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의 안위를 걱정해 황급히 튈르리 궁에서 내보내면서 영원히 이별한다.

이후 전세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말처럼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을 두려워 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관여하고 설상가상으로 해외로 도피한 프로방스 백작 루이아르투아 백작 샤를의 부추김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한 연합국이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누가 이기든 자신들은 무조건 프랑스 국민에 의해 처형당할 게 확실시된 위태로운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에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가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에 대해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 자신들이 국민에게 살해당하길 바라다니, 지옥에나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절규하자[80] 이성을 잃지 말고 의연하게 기다려보자며 최후까지 왕족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자고 위로한다. 그 모습을 본 루이 16세가 당신이 이 나라에 시집온 것이 이런 불행을 맛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며 슬퍼하자, 자신도 프랑스의 국민들과 가족들은 물론 유럽 전역에게 버림받고[81] 죽기만을 기다리는 신세에 눈물을 흘린다.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쟁에 이어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대립까지 일어나면서 튈르리 궁에서 계속 국민들의 습격을 받으며 위협당하다가 마침내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일가족과 함께 탕플 탑에 수감된다. 루이 1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최후까지 남아있던 왕당파와 지지세력도 이때 모조리 수감되어 학살되면서[82]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다. 이에 어린 자식들을 위로하면서도 프랑스군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이 빨리 파리로 침공해와 혁명따윈 박살을 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국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더 신경쓰는 왕비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인다.

결국 1792년 9월 21일 프랑스가 정식으로 공화국이 된 것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부르봉 왕정의 폐지와 남편 루이 16세의 폐위를 통보하면서 자신도 프랑스 왕비에서 폐위된다.[83] 이후 국민공회에서 격렬한 토론 끝에 찬성 361표 대 반대 360표로 단 한표 차이에 의해 남편 루이 16세의 처형이 결정되자 절망한다.

처형 전날인 1793년 1월 20일에 격리되어있던 루이 16세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허락받자 남편의 품에 안겨 오열한다. 결국 다음날 1월 21일 감옥 안에서 엘리자베트 공주와 함께 루이 16세의 처형 소리를 들으며 절규한다. 이후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아내와 남편으로서 20여 년간을 함께 사는 동안 루이가 보여준 깊은 애정과 성실함은 진실했고 격렬한 연애감정은 아니었지만 분명 남편을 사랑했다고 회고하면서 루이 16세의 죽음을 애도한다.

4.13. 가족들과의 이별

남편이 처형당하는 불행을 겪었어도 탕플 탑 안에서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순간만을 위안으로 삼으며 버텨내지만 그조차도 얼마 가지 않는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국민 공회가 그의 아들 루이 샤를마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떼어놓기로 결정하면서[84] 아들과도 생이별하는 비극을 연이어 겪게 된 것이다.

감옥에 들이닥친 혁명군들이 국민 공회의 결정을 통보하며 루이 샤를을 데려가려고 하자, 마리는 아들을 필사적으로 품에 끌어안은 채 절대 안된다며 당장 나가라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끝내 루이 샤를이 강제로 혁명군에게 끌려나가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주저앉아 처절하게 오열하며 아래와 같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당신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뺏어 갔어! 내 지위도, 내 남편도, 내 행복도...! 모든 것을 뺏어 갔어요! 그런데 이 아이까지 뺏으려는 것입니까?! 이제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나를...!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어째서 이렇게까지 괴롭히려고 하지?! 차라리 죽여다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다오! 너희도 한 아이의 부모가 아니더냐!
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혁명군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동정하긴 커녕 차분하지만 원한이 서린 듯 "물론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었죠. 우리가 아들에게 먹일 우유도 없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당신은 호화로운 궁전에서 보석을 몸에 걸친 채 웃고 있었죠."라며 일갈한다.[85][86] 이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아들을 빼앗기고[87] 완전히 자포자기하여[88] 어서 빨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후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시누이 엘리자베트와도 이별한 뒤[89] 콩시에르쥬리에 감옥에 수감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 신세가 된다. 그야말로 일국의 국모에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비참한 신세였지만 다행히 시중을 든 로잘리[90]와 감옥 사람들의 배려[91] 덕분에 나름 편안하고 행복한 감옥 생활을 보낸다.

4.14. 국민 재판

그러나 평화로운 감옥 생활도 얼마 가지 못하고 혁명 정부측에 의해 콩시에르쥬리에서 끌려나와 온갖 사치로 프랑스의 세금을 낭비하고 혁명을 때려부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내통하여 도주하려한 반역죄로 국민 재판에 서게 되면서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온 실책으로 증오가 폭발한 평민들의 매서운 비난을 마침내 목도한다. 국민 재판에 여러 번 회부되어 혁명 정부측이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책부터 하지않은 짓까지 모조리 유죄로 몰아가는 것[92]에 반박하는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프랑스의 왕비로서 위엄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이때 로잘리의 도움으로 자신을 찾아온 자르제 백작에게 탈출 제안을 듣지만 자녀들까지는 함께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탈출을 포기하며 자르제 백작에게 마지막까지 애써줘서 고맙다는 작별 인사를 나눈다.[93]

그렇게 지리멸렬한 싸움을 반복하던 중 급기야 자신을 확실하게 처형시키기 위해 에베르가 자신을 아들 루이 샤를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며, 말도 안되는 혐의로 고발하고 장래에 루이 샤를이 국왕이 되었을 때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한 음모가 틀림없다는 어이없는 이유까지 갖다 붙히며 매도하기에까지 이른다. 이때 아들이 자신에게 강간당했다고 거짓 증언했다는 걸[94] 듣고 잠시 경악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아들과의 근친상간만큼은 모든 어머니와 여성에 대한 부끄러운 모욕이고, 적어도 어머니에게 가해지는 이런 비열한 고발에 대답하는 것을 거부한다며 마지막까지 왕비로서 위엄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근거도 없는 누명까지 씌우려는 국민의회에게 한방 먹인다.[95]

4.15. 최후

이처럼 멋지게 근친상간 혐의를 반박해냈지만 애초에 결과는 이미 정해진 채로 진행되는 재판이었기에 끝내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이미 폐위되고 남편이 처형당하는 걸 시작으로 어린 자식들과도 생이별하는 여러 가지 비극을 겪으면서, 삶의 의지를 잃은지 오래인지라[96] 오히려 마침내 길고 긴 고통이 끝난다고 안도하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처형 전날 밤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97]를 쓰고 모든 걸 포기하였으나 로잘리의 도움으로 겨우 기운을 차린다. 그리고 남편이 처형당한 지 9개월 뒤, 처형 당일인 1793년 10월 16일에 처형장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리본을 로잘리에게 준 후 고마움을 표한다.[98]
파일:베르사이유의 장미.마리 앙투아네트.처형.jpg
<colbgcolor=#d71a36><colcolor=#ffffff>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
자아, 봐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 죽는 모습을... 이 목이 떨어지고 피가 방울져 떨어져도, 나는 영원히 눈을 뜨고... 조국 프랑스의 장래를 지켜보련다. 잘 봐두어라! 이것이 프랑스 왕비의 죽는 모습이다!
안녕, 페르젠! 언제까지나 나를 잊지 마세요. 최후의 이 순간까지 끌려가듯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겠죠. 신이여! 이제... 갑니다.

원작 8권 中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유언
이후 남편과 다르게 초라하고 굴욕적인 모습[99]으로 대중들의 야유를 받으며 처형장에 당도하지만[100],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과거의 주마등과 페르젠을 떠올리며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다.[101]

4.16. 사후

사후에도 처지와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는데 세간의 평처럼 희대의 악녀는 아닌데다 개인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냥한 여성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감정만 중시하며 왕비로서 온갖 실정을 벌인 것도 사실이었기에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왕비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 악명의 수준이 어찌나 대단한지 사후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마저 자신들의 궁정 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엄중히 금지해버리고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할 정도이며[102], 페르젠을 때려죽이던 스웨덴 시민들이 한참 전의 일이고[103] 프랑스 혁명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프랑스 국민을 배신하고 목이 잘린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할 정도다.

더 비극적인 것은 막내아들 루이 샤를은 혁명군에 끌려가서 왕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자라나고 외전에서 언급조차 안될 정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나마 형제부터 고모까지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포로 교환 협상으로, 외가인 합스부르크 황실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게 되고 페르젠 백작의 도움과 사촌 프란츠 2세마리아 테레사 부부의 배려로 부르봉 왕가의 공주로 대접받게 된다.

그러나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과 고된 유폐 생활로 인해 과거의 천진난만하고 말괄량이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도 감옥에서 학대한 프랑스 혁명군과 민중들은 물론[104], 가족들의 죽음을 방관한 외가[105]와 혁명군의 세뇌로 거짓 증언을 하여 어머니가 처형당하는데 공헌한[106] 남동생 루이 샤를마저 부모를 죽인 죄로 총살시켜야 된다고 할 정도로 저주할 정도로 냉혹하고 매마른 성격이 되어 버렸다.[107][108]

5. 평가

파일:Marie Antoinette (Lady Oscar) Beauty Shot 2.jpg
마리는 귀엽고 어떤 사람이든 사로잡는 매력과 활달함을 갖고 있지만 사람이 좋아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무엇보다 아직 어려서 자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해...어쩌면 왕관과 왕비라는 지위가 응석받이에 순진하기만 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평범한 딸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게 아닐까?
원작 1권 中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혼인 동맹을 맺으면서 딸의 단점을 생각하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걱정
누구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순수하신 앙투아네트님을 만나게 되면 앙투아네트님을 좋아하시게 되지. 하지만, 그 솔직함을 너무 드러내시는 점이 문제가 된다는 부분을 모르신다는 게 걱정이야...난 그 점이 무지 두려운 거야.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 그런 마리 앙투아네트님을 어떤 눈으로 볼지..
애니판/ 원작 2권 中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점을 이해하면서도 그녀를 걱정하는 오스칼의 생각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의 감동을 잊지 않았다면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원작 1권 中 왕세손비 시절 처음 파리에 방문했을 때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프랑스 시민들에게 감동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달린 각주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회전시키려 하는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진리를 앙투아네트는 끝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원작 7권 中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궁전 습격이 일단락되고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끌려가 튈르리 궁에 유폐된 후에도 여전히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혁명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달린 각주
물론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었죠. 우리가 아들에게 먹일 우유도 없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당신은 호화로운 궁전에서 보석을 몸에 걸친 채 웃고 있었죠.
원작 8권 中 아들 루이 샤를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자 당신들도 부모가 아니냐고 절규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혁명군이 한 대사

본인이 한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가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등의 장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모로 해결하기엔 당시 프랑스의 문제는 너무나 심각했고 시대가 원한 것도 전형적인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는 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큰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무고한 인물은 아니며 개인으로서는 착하고 고운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왕비로서는 부족한 인물이었다.[109] 남편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일국의 왕비로서 책무보단[110][111] 자신의 감정을 더 중시해서[112] 자신의 위치나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않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볍게 행동하며 인망을 망치고 실책을 연달아 저지르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한계가 뚜렷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정략결혼으로 희생당한 피해자라고 두둔할 수도 없는 게 마리는 남편 루이 16세가 아내를 배려하고 한눈도 팔지않는 남자여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무엇보다 체면 때문에 페르젠과의 사랑을 포기한 부분만 제외하면 작중 내내 프랑스의 왕비로서 피해는 커녕 온갖 특혜란 특혜[113]는 다 누리고 다녔다.

냉정하게 정리하면 이 만화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로서의 권리와 특혜는 있는대로 다 누려놓고 그 대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는 책임지기 싫어하며 나라의 안위도 신경쓰지 않고 무능하고 무책임하게 굴다가[114], 그로 인해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서 이제껏 저지른 실책에 대한 응보를 남편의 처형과 자식들과의 생이별로 처절하게 돌려받자 반성하거나 상황을 수습하긴 커녕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고 떼를 쓰기만 하는 철부지에 불과했다.[115][116][117][118]

차라리 격동기의 프랑스 혁명의 연관자가 될 일이 아예 생기지 않게 루이 16세와 결혼하지 않고[119] 오스트리아의 공주로만 남았다면, 혹은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나라의 왕비 혹은 고위 귀족과 결혼해 평범한 귀부인으로 살았다면 본인도 국민도 모두 행복했을 여인이었을 것이다.[120]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착하고 순진해도 정치적인 자리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한 사람이 민중과 정치판의 심정과 동향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면 무슨 꼴이 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인간상이다. 또한 비슷하게 페르젠에 대한 연심과 여성으로서 누릴 행복을 포기한 것에 괴로워 했지만 이를 극복하는 동시에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온 특권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신분과 특권을 모두 버리고 조국과 백성을 지키고자 혁명에 투신하는 길을 결심하는 성별과 신분을 뛰어 넘어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한 오스칼의 안티체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 역사에 의하면 그녀의 사치가 역대 프랑스 왕비들 중 가장 적은 비용이었으며[121], 오히려 백성들에게 감자를 올바르게 재배하여 먹을 수 있도록 돕는 등 작은 도움을 주는 너그러운 선행도 많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만으로는 백성들의 삶을 완전히 나아지게 할 순 없었다.[122] 또한 너무 어린 나이에 후계자를 일찍 낳지 못해 친구들을 제외한 귀족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123], 백성들을 어느정도 돕기 위해서 조금 소박한 생활을 유행시켰으나 역으로 왕비가 왜 이리 천박하냐는 욕까지 받는 등 정신적으로 심하게 상처받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안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모저모 노력해도 온갖 욕을 먹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음에도 자살을 시도했다거나[124], 그 누구도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자 한 걸 보면 엄청난 대인배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서술해본다면...
  • 첫번째로는 뒤바리 부인한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아직 베르사유에 온지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억압적인 관습은 물론 친구를 제외한 귀족들의 뒷담화까지 받으면서 생긴 정신적 스트레스가 한계에 다다라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왕세자비로서의 자존심과 품위를 절대 잃지 않았다. 뒤바리 부인 역시 저주하지 않고 다시는 말을 걸지 않겠다고 확실히 마무리지었다. 물론 자신을 그토록 챙겨주는 오스칼의 위로 덕분인 것도 있지만, 오스칼 역시 이런 마리의 고귀하고 용기있는 자세에 크게 감탄했다.
  • 두번째로는 오스칼과 드 게메네 공작의 사격 시합이 있었을 때도 오스칼에게 딱 한달간의 근신처분만 내리면서까지 오스칼을 도와주었다. 비록 드 게메네가 이 사건의 큰 주범이긴 하나, 원래 공작을 건드리면 큰 엄벌에 처할 정도로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리는 자신의 절친과 마찬가지인 오스칼에게 절대 피해가 가는 일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가벼운 처분을 내렸다.
  • 세 번째로는, 위병대에서 한 군인이 총기를 팔아버린 행각이 발각되어 체포당하고 다음 날 사형을 당할 상황에서 오스칼과 위병대를 비롯하여 많은 백성들이 군인의 석방을 요구하게 되자, 주변 귀족들의 차가운 거부와는 달리 남편 루이 16세에게 군인을 빨리 석방시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졌는데, 고작 총기 하나 팔았다는 이유로 처형된다면 백성들의 민심을 크게 잃을 수 있다는 걸 마리가 스스로 판단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때는 본인이 백성들한테 조롱거리로 비난받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후에는 시대착오적인 절대왕정 방향을 주장하는 실책을 고려하면, 군인 석방을 주장했을 때의 현명한 판단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다름이다.
  • 결정적으로 모든 걸 잃고 단두대에서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 누구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비록 많은 실책을 벌인 건 맞지만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것까지 누명받고 그녀의 실수를 더욱 과장하여 악녀로 지목당하는 등 너무 가혹한 대우와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마리는 마지막까지도 여왕으로서의 침착함을 잃지 않았고, 남편인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남은 자식들에게 절대로 자신의 죽음을 복수하지 말라고 부탁했다.[125]

6. 대인관계

6.1.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작중 오스칼과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원만한 주종관계로 그려진다. 마리가 처음 프랑스로 시집왔을 때 오스칼이 호위를 맡게 되고 마리도 처음부터 오스칼에게 호의를 가지고 여러가지로 호의를 표하거나 편의[126]를 봐줬다. 물론 오스칼 역시 페르젠과의 불륜 관계, 목숨 걸고 낙마할 때 구하는 등 마리를 도우면서 동시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호의[127]를 딱 잘라서 거절하며 간신인 폴리냑 부인을 멀리하고 프랑스의 국모로서 책임감을 가지라고 간언을 하는 등, 마리 앙투아네트의 충신이자 진정한 친구로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스칼은 프랑스의 왕비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하게 지내는 마리가 왜 그렇게 쓸쓸해하며 폴리냑 부인에게 의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고, 결국 그렇게나 걱정하던 패르젠과의 추문이 온 사교계에 퍼지자,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마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마리에게 진지하게 충고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때 마리는 오스칼에게 그동안 사랑을 모르던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나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사실과 자신은 왕비이기 전에 살아있는 마음를 가진 여자이니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페르젠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며, 남편인 루이 16세는 분명 훌륭한 분이니 존경하지만 형식적으로 부부일지언정 절대 사랑하는 마음은 아니라며, 자신은 그렇게 허무한 마음을 채우기위해 그토록 사치를 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오스칼은 그제야 자신이 그동안 마리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자책한다. 하지만 그런 오스칼에 반대로 마리는 자신을 걱정해준 오스칼의 마음이 진심인 걸 알고도 진지하게 듣지않고, 오히려 국정을 멀리하고 유흥을 즐기기에 바빴고, 자신을 좋지 않게 보는 국민들과 귀족들을 탄압하려는 등 철부지에 시대착오적인 모습만 보였다. 이로 인해 개인적으로 마리를 안타깝게 여긴 오스칼마저 제대로 마리에게 실망하고, 반대로 마리 역시 왜 오스칼이 자신의 호의를 거부하고 자신의 말을 반대하는 건지에 이해하지 못하면서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사실 이전에도 오스칼은 여러 경험들을 통해, 귀족인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국민의 대다수인 평민들이 엄연히 소수인 귀족과 왕족을 떠받치느라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고, 그저 신분이 더 낮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인권유린 문제[128]들도 알고 있었다. 또한 위병대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비귀족(+ 몰락귀족) 출신 군인들이 총까지 몰래 팔아치워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는 것도 목격하며 오스칼은 (마리의 일을 제외하고도) 프랑스 사회에 문제가 많으며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몸소 실감[129]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스칼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이후 변해가는 마리의 모습을 보면서 마리를 비롯한 왕실에 어느 정도 희망을 걸고 유화적인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삼부회의 실패, 귀족들의 말에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루이 16세와 평민 대표를 진압하라는 왕실의 명령을 거부하는 오스칼의 부하 위병대를 탄압하고 왕권신수설을 고집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보고 결국 부르봉 왕조에 가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신의 지위를 모두 버리고 혁명 노선을 택한다.[130]

한가지 의미심장한 부분이라면, 오스칼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이 결정되기 전에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에서 한참 뛰다가 사망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에 더해 바렌 사건까지 더해져서 프랑스의 마지막 왕조인 부르봉 왕조가 완전히 끌어내려진 뒤에도 혁명파벌 내에선 루이 16세의 사형 여부에 대해 치열한 투표공방이 있었고, 겨우 1표 차이로 사형 지지 측이 승리해, 그 결과 루이 16세는 사형당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 뒤를 따랐다.[131] 오스칼이 죽은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된다. 이때 시중을 들던 로잘리가 마리에게 오스칼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마리는 "오스칼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져요." 라며 그녀를 그리워했다. 서로 단순한 주종관계를 떠나 친구로서 우정과 신뢰를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역사로 대입한다면, 폴리냑 부인과는 달리 마리에게 어떤 사욕이나 권력욕도 없이 그녀 곁에서 끝까지 절친으로 남아준 랑발 부인과 상당히 유사하다.

6.2. 루이 16세

남편인 루이 16세와는 왕비로서 함께 행동하고 인간적으론 싫어하진 않으나 진심으로 사랑한 건 페르젠이였다.[132]

그러나 루이 16세 역시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찬가지로 당대 프랑스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무능하고 유약하게만 행동하다가, 프랑스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끝내 바렌 사건이라는 최악의 실책을 저지르면서 모두에게 버림받아 가족들과 함께 폐위되어 처형당한다.

그래도 둘 다 어릴 때 결혼하여 온갖 고난을 함께한 애정은 분명해서 루이 16세바렌 사건 이후 탕플 탑에 갇혀 온갖 모욕과 고초를 겪는 마리를 보고 당신이 이 나라에 시집온 것이 이런 불행을 맛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며 미안해했고, 마리 역시 국민투표로 루이 16세의 처형이 결정되자 혁명군들이 보든 말든 품위와 체면 전부 다 갖다 버리고 루이의 품에 안겨 미친듯이 오열했고 끝내 감옥 안에서 남편이 처형당하는 소리를 듣고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와 함께 절규하면서 슬퍼한다.

이후 마리는 루이 16세와의 관계에 대해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아내와 남편으로서 20여년 간을 함께 살며, 자신에게 보여준 루이의 깊은 애정과 성실함은 진실했고 자신 역시 격렬한 연애 감정은 아니었지만 루이를 분명 사랑했다고 회고한다.

6.3. 한스 악셀 폰 페르젠

마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평생동안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

왕세자빈 시절 파리를 방문했을 때, 오스칼만 데리고 신분을 숨기고 참석한 가면무도회에서 처음 만났고 서로 첫눈에 반한다. 사랑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정략 결혼을 위해 낯선 외국에서 답답한 생활과 소극적인 남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외로워하던 마리는 매력적인 페르젠에게 바로 빠졌으며, 서로의 진짜 신분(프랑스의 왕비/스웨덴의 귀족)을 알게 된 뒤에도 페르젠이 알현을 핑계로 매일 같이 프랑스 궁정을 드나들며 자주 만남을 가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결국 현실적으로 둘의 사랑은 불륜이었고, 가뜩이나 프랑스에서 오랜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외국 여자라는 편견이 박힌 상황 속에서 페르젠과의 추문까지 나돌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성적으로 조롱하는 팜플렛까지 돌아다니며 조롱 당하고 왕비로서의 권위도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칼의 조언으로 페르젠이 프랑스를 떠나지만 문제는 여기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젠의 부재에 대한 공허함과 외로움 때문에, 폴리냑 부인 등의 간신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국정을 멀리하고 패션과 도박에 빠져 사치하면서 가뜩이나 위기에 처한 자신의 평판을 스스로 깎아 먹고 만다.

거기다가 루이 16세의 무능과 아내의 잘못된 행동을 방임하는 우유부단함이 겹치면서 마리의 평판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고, 결국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란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마리는 나라를 망치는 악녀이자 욕받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제야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면서 페르젠의 조언 대로 간신들을 멀리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왕실을 향한 프랑스의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았고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그래도 다른 왕족과 귀족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외국으로 도피하는 반면, 페르젠만은 끝까지 자신과 루이 16세의 곁을 지켜주자 그에게 더욱 의지한다. 이후 페르젠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가족들과 함께 바렌을 거쳐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를 시도하지만 중간에 루이 16세의 강권으로 헤어지게 되자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바렌으로 도주하는데 실패하고 파리로 끌려가서 튈르리 궁에 유폐된 자신을 페르젠이 목숨을 걸고 변장한 채로 찾아오면서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지만, 이미 루이 16세와 자신의 최후는 정해져 있었고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치 않으니 차라리 왕비로서 아름답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며 페르젠과의 도피를 거절하면서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참수당하고 페르젠 역시 그녀의 사후 국민들에게 가혹한 정치가로 돌변해버리고, 그로 인해 원한을 산 스웨덴 국민들에게 두들겨 맞아 처참하게 살해당하면서 두 연인은 똑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일단 장본인들은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했고 서로에게 진심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간 타국에서 힘들어 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페르젠과의 관계는 개인적으로 심적인 위로를 주었을지는 몰라도, 결국 본질적으로는 부도덕한 불륜 관계에 불과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저지른 수많은 실책들과 마찬가지로 일국의 왕비로서도 해선 안될 짓이었다.[133] 결국 페르젠과의 불륜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평판을 떨어뜨리고[134] 후대에도 길이남을 이미지인 사치를 부리며 나라를 말아먹은 악녀로 낙인찍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원인이 된다. 게다가 두 사람의 사랑 아닌 불륜으로 애꿎은 아들 루이 샤를까지 페르젠의 사생아라는 루머에 시달리며, 온갖 뒷담화와 모욕을 당해야만 했으니[135] 마리 본인의 심적인 위로를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도움되지 않은 관계였다.[136]

6.4. 마리 테레즈, 루이 조제프, 루이 샤를

남편 루이 16세에게서 낳은 세 자식들. 결혼한 이래 7년동안 임신하지 못해 후계자 문제로 온갖 뒷담화를 들으며 골머리를 앓고있었던 지라 첫 아이이자 장녀인 마리 테레즈를 시작으로, 두 아들인 루이 조제프와 루이 샤를을 낳으면서 그동안 허무한 마음에 벌이던 온갖 사치와 유흥행각도 그만두고 마음의 평화를 찾게해준 존재들이었다. 그만큼 프랑스 혁명이 이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순간을 위안으로 삼으며 버텨낼 정도로 모성애가 지극한 어머니였다.

장남 루이 조제프가 척추결핵으로 요절하자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다가 결국 자신과 페르젠의 불륜으로 인한 벌을 받는 것이라며 깊이 반성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공회가 차남 루이 샤를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자 절대 안된다며 필사적으로 거부했고 끝내 아들을 빼앗기자 미친듯이 절규하며 거의 삶의 의지를 잃다시피 했다.

하지만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바로 그 자식들에게 피해만 끼쳤다. 루이 조제프가 척추결핵으로 요절하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동안 자신이 벌인 사치로 악화된 프랑스의 재정 상황 때문에 루이 조제프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사치를 후회하고 왜 주변 측근들이 폴리냑 부인의 감언이설에 홀려 유흥행각을 벌이던 자신을 뜯어말렸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비단 루이 조제프뿐만 아니라 차남인 루이 샤를도 어머니의 실책으로 많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젠 백작에게 노골적으로 연심으로 드러내는 잘못된 처신을 일삼고 그와의 염문설이 프랑스 전역에 퍼질 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루이 샤를은 페르젠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에 휩싸였고 왕위를 노리던 숙부들이 공식석상에서 이 소문을 대놓고 들먹이고, 나중에는 루이 16세에게마저 익명으로 루이 샤를은 페르젠의 아들이라고 고발하는 편지까지 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다가 바렌느 도주 사건 때 분노한 아낙네들에게 "뭐가 왕태자냐?! 사생아지!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페르젠의 아들이겠지!"라는 모욕을 면전에서 듣기까지 한다.

딸 마리 테레즈 역시 부르봉 왕가의 금지옥엽 공주님이었지만 부모의 실책으로 벌어진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 어린 나이에 일가족을 모두 잃고 탕플 탑에 감금되어 온갖 학대를 받는 죄수이자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신의 이기적인 실책 탓에 그토록 사랑하던 자식들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셈.

그래도 루이 17세가 자신에게 근친상간을 당했다고 위증해도 원망하지 않았고 자르제 장군이 자기 혼자만이라도 탈출하라고 권유해도 "아이들을 남겨놓고 혼자 도망칠 수는 없다"라고 의연하게 거부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의 행복을 바랄 정도로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루이 샤를을 빼앗긴 후로 너무 슬퍼하며 절망한 탓에 바로 옆에 있는 마리 테레즈의 존재를 신경쓰지 못했다. 외전에서 가족들을 전부 잃고 혼자 살아남아 포로생활을 이어나가던 마리 테레즈는 상냥했던 어머니의 처형을 떠올리며 슬퍼하다가도 '국민공회가 루이 샤를을 빼앗아가자 어머니는 반미치광이처럼 절규하셨고 남아있는 딸인 나같은 건 아무런 위로가 되지않는다는 듯이 구셨다'라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6.5. 뒤바리 부인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자신이 시집오기 전까지 프랑스 왕실의 안주인 노릇을 해온 사람이지만 창녀 출신인 뒤바리를 경멸하며, 왕세손비인 자신의 신분을 백분 활용하여 일부러 무시하고 말을 걸지않으며 대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뒤바리 부인에 대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반감은 일단 오스트리아에서 매춘을 철저히 금지시키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교육, 뒤바리 부인을 싫어하던 시고모들의 부추김과 천한 신분의 뒤바리 부인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마리 개인의 자존심 탓이었다. 때문에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못 본 척 하고 일부러 말도 걸지 않았지만 뒤바리 부인의 짜증과 하소연에 루이 15세까지 나서서 경고하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굽히고 먼저 말을 걸면서 뒤바리 부인의 승리로 신경전이 일단락된다.

결국 자존심이 상한 마리는 프랑스의 왕세손비인 자신이 한낱 창녀인 뒤바리에게 패배했다며 울먹이지만 복수를 계획하지 않고 앞으로 다시는 그 여자와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후로는 아예 뒤바리를 피해다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반목한 두 여자는 훗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단두대에서 똑같은 최후를 맞이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단두대로 가면서 죽기 싫다고 미친듯이 도망치며 절규한 뒤바리 부인과는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지막 순간에도 저항없이 침착함과 품위를 유지하고 사라졌다.

6.6. 로잘리 라 몰리에르

로잘리는 오스칼에게 거두어지기 전에는 굶는 것은 다반사에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어 매춘을 시도할 정도로 가난한 삶과 귀족의 횡포로 동네 친구 피에르와 어머니가 사망한 일, 파리 시내에 떠돌던 마리와 관련된 각종 음란물, 찌라시의 영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싫어하다 못해 '나라를 망치는 냉혈한 악녀'라고 믿고 증오했다. 그러나 무도회 때 오스칼의 소개로 처음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주하며 소문과 달리 그녀의 아름답고 다정한 모습에 온화한 사람인 걸 알고 오해를 풀고 서로 호의적인 관계가 된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로잘리도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프랑스 평민들의 삶에 크게 공감하고 있었고, 왕비로서 이런 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긴 커녕 자기 감정에만 몰두하며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책만큼은 안좋게 평가했다.

그래도 이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가 폐위되고 루이 16세마저 처형된 뒤, 다음 차례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홀로 콩시에르쥬리 감옥에 수감된다는 걸 듣자 남편 베르나르에게 부탁해 시중 역할에 지원했다. 바렌느 사건을 비롯한 여러 실책으로 부르봉 왕조에 대한 반감과 특히 그중 가장 미움받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희생양으로 삼은 혁명정부와 민중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마리는 감옥 안에서마저 뒷담화를 들으며 힘들게 버티고 있었으나 그나마 로잘리가 매일 아침마다 치장을 돕고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끼니도 챙겨주며 마리를 보살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감옥에서 로잘리를 바로 알아보고 반가워했으며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정성껏 보필하고, 그리웠던 오스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로잘리 덕분에 힘든 재판과 감옥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처형 당일 날 감옥에서 끌려나가는 도중 마주친 로잘리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리본을 들고있자 "그건 내가 선물로 드릴게요.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가끔 나를 생각해줘요. 마지막까지 마음 써줘서 고마웠고 천국에 가더라도 결코 잊지 않겠어요"라는 고마움이 담길 말을 남기고 처형장으로 떠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후로도 그녀가 남긴 유언대로 마리의 유품들[137]을 전달받아 자르제 백작에게 전해주는 등, 마지막까지 마리의 뒤를 지켜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인지 몰라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인이었던 페르젠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받고 아들과 함께 스웨덴에서 남은 여생을 편히 보내게 된다.

본인을 진심으로 좋아해준 마리의 마음을 이용해 잇속을 뜯어내기 바빴고 이후 마리가 불리해지자 바로 해외로 도주했던 어머니 폴리냑 부인들을 포함한 여러 간신들과 달리, 로자리는 프랑스 평민으로서 힘든 나날을 보냈고 마리의 엄청난 총애를 받지 않았지만 가장 힘든 상황에 있던 마리 곁에 와서 그녀를 돕고 약속을 끝까지 지켜주었으니 어떻게 보면 오스칼과 더불어 마리의 진정한 친구이자 충신.

7. 기타

당시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으로 왕족이나 신하들이 정부를 두거나 성적으로 문란한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때문에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정부뒤바리 부인도 싫어했으나 정작 자신은 남편을 냅두고 페르젠과 대놓고 불륜을 저질렀다.[138] 물론 만화와 애니메이션 내에서는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역사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페르젠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만남은 플라토닉한 관계로 그려지며, 마리도 장남인 루이 조제프가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불륜행각 때문에 아들이 아프게 되면서 벌을 받는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로 깊이 반성했다.

외전인 브레게의 시계 에피소드 편에서 실제 역사처럼 브레게에게 가장 뛰어난 시계를 만들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혁명 이후 콩시에르쥬리에 감옥에 갇혔을 때 필요한 물건을 물어본 국민의회에게 브레게의 시계를 원한다고 요청한다. 당시 브레게는 국민의회의 추적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행히 로잘리에게 브레게의 시계를 받고 시간을 되새기면서 힘든 재판을 이겨나간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후 브레게와 그의 아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계를 완성하는 걸로 끝난다.

작중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 둘다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상냥하고 선한 모습을 완벽히 증명하는 동시에 그녀의 실책과 단점 역시 확실히 묘사해냈다. 덕분에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배운 시청자/독자들 중에서 실제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렇게나 천사같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 재평가 관련 영상에서도 자주 언급될 정도로 큰 임펙트를 남겼다.

오스칼이 여덕들에게 인기가 높았듯이 마리 앙투아네트는 보통 남자아이들과 남자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될지 몰랐던 팬들은 그녀의 안타까운 결말에 크게 충격받기도 했었다. 또한 실제 역사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정주행하는 경우 초반부에 나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는, 저렇게 어리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훗날 욕받이 신세가 되어 모든 걸 잃고 비참하게 처형된다는 사실에 씁쓸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참 뒤에 나오는 Fate/Grand Order마리 앙투아네트가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발랄하고 화려한 소녀틱한 외모에 더해 성격도 화사하고 발랄하나 왕족다운 면모가 있고 세간에 퍼진 편견과 달리 상냥한 성품이었다는 게 고증된 점, 오스칼에서 많이 컨셉을 따온 듯한 슈발리에 데옹과 붙어다닌다는 점 등등. 다만 이쪽 마리는 금발인데 페그오 마리는 은발. 다만 엄연히 역사적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실책도 적나라하게 묘사된 베르사이유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139] 페그오의 마리는 그런 단점들이나 부정적인 면모는 보다 희석되었다.[140] 그러면서도 막간의 이야기에서는 마냥 긍정적인 면만 있지 않다는 것 또한 강조된다.

후속작인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몇 가지 비슷한 부분이 있는 캐릭터인 안토니나 크리코프스카야가 등장한다. 둘 다 당대 최상위계층 출신[141], 귀족주의적인 사고방식, 화사하고 발랄한 인상을 지니고 공들여 치장하고 다니는 화려한 미인, 남편이 있는 와중에 불륜을 저지른 점,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혁명을 지지하는 평민 계층이 그들의 몰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등등이 닮았다. 다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느낌이 있는 마리와 달리, 안토니나는 확실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구석도 있다. 둘 다 버젓히 남편이 있는데도 불륜을 저지르고, 그 불륜 상대에 대한 연애 감정 때문에 감정적으로 변하는 건 비슷하지만.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뮤지컬 버전에서는 원작과 다르게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의 생애보다는 페르젠 백작과의 사랑을 좀더 강조했고, 남역 위주인 다카라즈카답게 페르젠을 자주 띄워주면서 비중도 조금 밀렸다. 다만 재연할수록 이게 좀 심해져서 원작의 주인공이라는 말과 무색하게 비중이 점점 반쯤 공기화 되어가며 쩌리 수준으로 떨어졌다.

[1] 본명은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서, 출생 당시의 국적은 신성 로마 제국이었지만 루이 16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로 바뀌었다.[3] 결혼하지 않고 큰언니 마리아 안나처럼 수녀가 되어 인스브루크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고 평생 마리아 안나와 같이 살았다.[4] 1761년 천연두로 사망.[5] 1767년 천연두로 사망.[6] 에르콜레 3세 데스테의 딸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해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가를 개창했지만 1875년에 남계 후손이 단절되었다.[7]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스포일러] 바렌 사건의 실패 후 시민들에게 온갖 위협과 조롱을 당하며 파리로 끌려간 충격 탓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면서 은발벽안이 되었다.[9] 2018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KBS판의 오스칼 성우와 마리 앙투아네트 성우가 모두 고인이 되었다.[10] 프랑스의 왕세손비가 된 지 얼마 안된 소녀 시절이다.[11] 뒤바리 부인마리 앙투아네트가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그녀의 머리색을 깎아내리며 험담하자, 그 말을 들은 루이 15세는 오히려 "마리는 예쁜 금발" 라며 손자며느리의 머리색을 칭찬한다. 하지만 뒤바리 부인은 이에 반발하며 붉은색이라고 끝까지 우긴다. 그런데 사실 서양의 금발 중엔 마리처럼 확실히 노란색으로 보이는 '허니 블론드' 도 있고, 붉은색이 좀 감돌아 붉은색이나 주황색에 가까운 '스트로베리 블론드' 나 '피치 블론드' 도 있다. 그리고 뒤바리 부인이 까내린 것과 달리 만화, 애니 모두 마리의 금발이 가장 밝고 화사한 금발로 묘사된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대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밝고 우아한 백금발이었다. 즉, 이것 또한 역사 고증이 잘된 것이다.[12] 작중 오를레앙 공작의 부하 중 한명이 마리 앙투아네트한테 드레스를 바꿔입자고 해서 부하 본인은 공주 행세를 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녀차림으로 바꿔입었다.[13] 아마도 친정인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제 초상화에서도 그 주걱턱이 어느 정도 보이고(…) 코도 살짝 매부리에 얼굴도 긴 편이었다. 그래도 왕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을 넘어 유럽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닮아서인지 꽤 예쁘장하다는 말도 들었으며 다행히 아랫 입술의 치아가 살짝 삐뚤어진 것뿐이어서 치아교정과 부채로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14] 왕세자비 시절 앙드레의 실수로 타고 있던 말이 흥분하여 달려가는 낙마 사고가 벌어졌을 때 오스칼과 페르젠을 도와 앙드레를 변호했고, 로잘리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소문대로 악녀라고 생각해 그녀를 꺼렸으나, 실제로 만난 마리가 소문과 달리 우아하고 다정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15] 이 자존심은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인 뒤바리 부인에게 절대 말을 걸지 않는 것(신분제였던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는 신분이 높은 귀부인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에 신분 낮은 귀부인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과 이후 메르시 백작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말을 건 후 오스트리아공주이자 일국의 왕세자비인 자신이 천민 출신 애첩에게 졌다며 결국 뛰쳐나가 울었던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후술했듯이, 그럼에도 뒤바리 부인에게 앙심을 품거나 저주하지 않고, 그 일로 뒤바리 부인과의 관계를 딱 끝내는 깔끔한 마무리를 짓는다.[16] 페르젠과 불륜이 공공연하게 소문이 퍼질 때 오스칼은 그녀에게 현재 마리의 상황이 위험하며 프랑스 왕비로써 체통을 지켜달라고 충언을 올리지만 마리는 상황 파악을 파악하긴 커녕 도리어 "나는 왕비이기 전에 한 여자입니다, 당신에게 여자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건 무리였나보군요."라고 오스칼에게 하소연을 했다.[17] 인간관계의 맺고 끊음이 확실한 건 본인이 평민이였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정적을 최대한 만들면 안되는 높은 지위와 신분의 특성상 악효과만 낳을 뿐이었다. 하물며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그 어느 한쪽의 파벌도 편애하지 않고 공평함을 유지해야하며 가장 확실한 아군이 되어줄 귀족들을 포섭해야하는 왕족이라면 더더욱.[18]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제 모토가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일 정도다. 그만큼 철저히 정략에 따른 결혼을 통해 일개 지방 영주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와 스페인 왕위를 몇 백년동안 독차지 할 정도로 성장하여 카를루스 대제의 피를 이은 카페 왕조에서 시작된 프랑스 왕가와 라이벌 관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주걱턱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정략혼과 근친혼의 폐해도 가장 많이 보여준 가문이다.[19]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간지 7년 가까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대자연이 찾아왔다" 라는 사생활까지 감독하는 편지를 받을 정도로 막내딸을 많이 신경썼다. 게다가 아들 요제프 2세처럼 프랑스의 불안한 현실을 직감해서 사돈인 루이 15세의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메르시 백작에게 마리를 지켜봐달라고 당부하고 동시에 내 딸의 행복한 나날은 이제 끝났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한 예견을 남겼는데 이 예견은 최악으로 이뤄지고 말았다.[20] 또한 작중에서는 안 나왔지만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큰오빠 요제프 2세도 어머니 못지 않게 막내 여동생의 안위를 걱정해 결혼식때 같이 동행하고, 어머니로부터 여동생의 철부지 행동을 듣고 보다못해 루이 16세 부부를 보러 프랑스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의 불안한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방만하게 행동하는 여동생과 매제에게 정신 차리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엄하게 충고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큰오빠가 다녀간 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침내 임신하여, 첫 자식인 마리 테레즈를 시작으로 아이를 출산하여 후계자 문제를 종식시키면서 좋은 영향이 되기도 했다.[21] 당시 마리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지역에서 인도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시녀와 애완견을 포함한 모든 것을 놓고 오스트리아에서 출발할 때 입은 옷부터 속옷 전부 프랑스의 옷으로 갈아입는 과정을 거쳤다. 다만 이때 어머니가 준 지침서와 금시계만은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22]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지하는 듯 결혼 문서 서명 중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에 검은 얼룩이 번지고, 결혼식 당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등 불길한 징조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게다가 작중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인도 과정을 거치는 건물에 불길한 결혼의 대명사로 불리는 '왕녀 메데이아'의 내용을 담은 태피스트리가 걸려있고, 루이 16세 부부의 첫 파리 방문에 니콜라이 2세 대관식처럼 사람들이 몰려 대형압사 사고가 나기까지 했다.[23] 마리 앙투아네트가 갓 시집을 올 당시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와 왕세자비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는 이미 사망했다. 그래서 공식 애첩인 뒤바리 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기 전까지 왕비 역할을 해왔지만 형식적인 신분으론 백작 부인에 지나지 않았다.[24] 당시 루이 15세가 딸들에게 약했기에 공주로 대접 받은 것이지 이 세명은 냉정히 말해 놀고 먹는 잉여인간에 불과했다(당장 막내 여동생인 루이즈가 수녀로 사는 길을 선택했고 그들이 무시한 뒤바리 부인이 자선 사업에 열중했던 것과 대조적). 게다가 심보도 고약해서 실제 역사에는 마리가 처음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오자 적국의 여자가 왜 왔냐는 뒷담을 까고 뒤바리 부인과의 다툼에서 지자 베르사유에 마리에 대한 악의적 소문까지 퍼뜨렸다. 참고로 이런 시고모들의 철부지 행각을 본 마리는 자신의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큼은 저런 안하무인으로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 딸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25] 비록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매춘업을 금지하려고 했고 매춘부들에게 채찍형을 내린 후 감화원에 집어넣는 등, 축첩과 매춘을 엄청 싫어했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돈에 몸을 팔거나 남자의 애첩이 되는 일은 여자로서 가장 천한 행동' 라고 가르쳤다.[26] 신분제 사회이자 엄격한 에티켓을 강조하고 있던 프랑스 사교계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신분이 높은 귀부인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에 신분이 낮은 귀부인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뒤바리 부인이 공식 애첩에 실질적인 궁정 안주인 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공식적인 신분으로는 왕세손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 궁정에서 가장 지위 높은 왕실 여성이었고, 평민 출신인 뒤바리 부인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만큼 출신도 신분 차이도 까마득히 높았다. 루이 15세의 공주들과 왕세손비 마리는 이 점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뒤바리 부인을 견제했던 것이다.[27] 여담으로 이 신경전에 오스칼은 "나는 누구의 편에도 붙지않고 이 재미있는 여자들의 기싸움을 구경하고 싶을 뿐이다" 라고 웃으면서 관망하는 자세였으나, 오스칼의 인기를 이용하려는 뒤바리 부인과 반대로 그걸 막으려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둘 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각자 자기 시녀로 오라는 명령을 동시에 내리면서 오스칼은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오스칼의 어머니 한명에게만 내려진 명령이었지만 사실상 오스칼에게 '둘 중 누구를 지지할 건지 선택하라' 라는 의미였고,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오스칼로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런 왕실 내의 기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명령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결국 둘 중 한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루이 15세가 선택의 자유권을 줬기에, 결국 오스칼은 누구를 선택하든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꼭 선택해야한다면 어머니를 위해 혈통도 지위도 높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선택한다. 그렇게 오스칼의 어머니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로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오스칼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 쪽에 가게 되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칼의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고 언제나 상냥하게 대해주었다.[28] 뒤바리 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칼의 어머니에게 각자 자신의 시녀로 오라고 동시에 제안했을 때도 선택은 하되 어느 쪽을 선택을 할지는 자르젤 가의 자유라고 말했다.[29] 원래는 메르시 백작과 세운 계획대로 왕실 가족들 간의 카드 게임 시간을 끝내고 돌아가는 틈을 타서 마리가 뒤바리 부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는 걸로 일단락 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아델레이드 왕녀(마리의 시고모중 한명)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인사를 하려는 마리를 억지로 끌고 가버리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왕실 가족들과 귀족들이 전부 목격해버리면서 뒤바리 부인이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고 귀족들은 뒤바리 부인을 남몰래 비웃는데, 루이 15세가 노발대발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마리 입장에서는 분명 억울한 상황이었기에 메르시 백작과 마리가 루이 15세에게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여 가까스로 기회를 얻었다.[30] 이후 원작, 애니에서 이 모습에 대놓고 비웃는 뒤바리 부인을 보자마자 그간 극에 달한 스트레스와 자신이 뒤바리 부인에게 졌다는 분함을 못 이겨 울면서 뛰쳐나간다. 다행히 마리를 걱정해 달려온 오스칼의 위로 덕에 평정심을 되찾게 되며 두번 다시 뒤바리 부인과 말을 거는 일은 없을 거라고 결심한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대단한 게, 남들 같았으면 아예 뒤바리 부인을 향해서 복수를 계획했겠지만, 반대로 마리는 아예 이번 말 한마디로 확실히 끝이라고 결론짓는 깔끔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상황은 상황인지라 모든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해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원작과 애니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뒤바리 부인과의 일은 끝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으며, 뒤바리 부인이 보내는 보석들은 모두 거절하는 등, 아예 관계를 모두 정리했다.[31] 이 어색한 관계에는 마리가 첫 만남 때부터 아내 될 사람에게마저 낯을 가리는 루이 16세에게 실망한 것도 있지만 루이 16세의 성격이 소극적인데다 취미도 독서, 사냥, 자물쇠 만들기처럼 정적인 반면에 마리는 활달하고 연극이나 무도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걸 좋아하는 등, 부부의 성격부터가 정반대인 것도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6세는 그런 자신이 볼품없다고 생각해서 마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며 마리의 첫 연회 때부터 춤을 추지도 않으며 한동안 각방을 쓰는 등, 그런 루이에게 마리는 실망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루이 16세는 가정에 충실한데다 호색한도 아니어서 할아버지 루이 15세처럼 정부를 들이는 등의 바람은 피우지 않았다.[32] 예를 들어 프랑스 왕궁에는 매 시간마다 왕비나 왕세자비가 귀부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일명 '투알레트' 라는 의식이 있었다. 게다가 과정도 그냥 옷을 갈아입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담 다투르(의상담당)가 치마를 보여주면 담 도뇌르(시녀장)가 입히고 담 도뇌르가 속옷을 골라주면, 다음 귀족이 입히는 역할이 하나하나 정해져있고 만약 담 도뇌르보다 서열 높은 귀족이 들어오면 그녀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온갖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다. 이렇다보니 왕비나 왕세자비는 30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수행원들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또한 당시 왕세자 부부를 포함한 왕실 식구들의 식사는 공개 식사로서 귀족, 평민들을 포함한 여러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으며 당시 어린 마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식사를 잘 하지 못해 유일하게 사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오전 시간에 맘껏 먹었다고 한다.[33] 이때 마리는 튈르리 궁전에서 파리 민중들의 큰 환영을 받고 크게 감명하며 오스칼(실제 역사에선 파리 시장)은 마리에게 "비 전하는 지금 여기서 비 전하를 사랑하고 있는 20만명의 국민들을 보고 계신 겁니다."라고 말했다. 기묘하게도 20년 후 마리는 자신이 환영을 받은 그 자리서 민중들의 차가운 반응을 받으면서 처형되었으며 작가는 "만일 이날의 감격과 민중의 애정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잊지 않았다면 그녀는 비극의 왕비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냉정히 평가했다.[34] 작중과 실제 역사에서 새로운 왕의 즉위를 환영하는 귀족들과 대조적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갑작스러운 즉위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 "신이여. 아직 어린 나이에 즉위한 저희들을 지켜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올렸다. 덤으로 본인을 그렇게 욕하고 멸시하던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의 사망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쫓겨나게 된다.[35]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드레스로 작중에서 나온 벼룩색 드레스, 세 갈레 퍼브의 로브 아 라 폴로네즈가 있다. 작중과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패션 리더로서 왕실 문화를 주도했고 마리의 패션은 귀족들은 물론 패션 잡지였던 르 메르쥐르갈량의 판화에 실려 크게 유행했다.[36] 또 드레스나 악세서리 뿐만 아니라 헤어스타일도 유행시켰는데, 초상화 대부분에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붙임머리와 함께 높게 올리고 약간의 가루를 사용해 머리카락을 높고 풍성하게 고정시키는 화려한 스타일이 바로 그것. 마리는 가끔 가루에 색을 넣어 머리카락에 화사한 색을 연출하기도 했다고 하며, 최대 높이는 30~60cm 사이를 넘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스타일의 높이 및 풍성함 탓에 간혹 마차를 타야 할 때는 머리 장신구와 붙임머리를 벗고, 안에 들어가서 다시 스타일링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러한 헤어스타일을 맘에 들지 않는다는 편지까지 보냈다.[37] 작중뿐만 아닌 실제 역사에서도 왕비에 오른 후 화려하게 치장한 자신의 초상화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내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건 프랑스 왕비의 초상화가 아니라 화려하게 치장한 여배우의 초상화로구나!"라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딸의 어리석은 행동에 한탄했다.[38] 이후 요절한 장남 루이 조제프의 장례식에 치를 돈조차 없어서 궁정 내 은식기나 보석을 팔아 겨우 돈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악화된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듣고 이제껏 자신이 부려온 사치에 대한 응보를 받았다고 크게 후회하며, 프랑스 혁명 재판 때 검사 측이 총신들에게 연금을 퍼다주며 온갖 사치를 부리느라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하지 않았냐고 추궁하자 그전까지 당당했던 태도마저 접고 상상한 이상의 돈이 들어갔을 거라며 인정할 정도였다.[39] 다만 실제 역사에서 그녀의 사치비용이 역대 왕비들보다도 훨씬 적은 것으로 밝혀졌고, 왕실에서의 사치란 단순히 돈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품위 유지이자 왕실의 위상을 알리는 의도 였다. 게다가 동시대 입헌 군주제인 영국도 왕실의 사치를 어느 정도 허용했던지라 시청자들 및 독자들 중 저 정도 사치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냐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상황은 후술하겠지만 루이 14세, 루이 15세를 거치면서 국가가 진 빛이 너무도 많아서 작은 사치조차 허용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애매한 편이다.[40] 예술을 후원한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자란 영향으로 마리도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왕비에 오른 뒤 다양한 주제의 연극,오페라,무도회를 선보였다. 한번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각선미를 드러내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드레스인 로브 아 라 시르카시엔느를 입고 카드리유를 추기도 했다. 당시 루이 15세 때까지 엄중한 분위기의 행사였던 무도회는 마리 앙투아네트로 인해 모두가 즐기는 경쾌한 행사가 되었고 프랑스 문화와 패션도 엄청 발전했다는 소정의 긍정적인 바람을 주었다.[41]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는 왕세자비 시절부터 틈만 나면 측근들과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과 함께 파리로 가서 밤새도록 가면 무도회와 연극을 즐기고 돌아왔다고 한다. 문제는 마리가 밤에 놀러다닐 동안 루이 16세는 잠을 자고 반대로 낮에 루이 16세가 활동을 할 동안 마리는 밤새 논 여파로 푹 자는 등 생활패턴이 서로 안맞다보니 후계자가 늦게 태어나는 악영향으로 이어졌다.[42]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 자리에 오르자 먼저 한일이 총애하는 오스칼을 근위연대장으로 승진시키고 막대한 봉급과 선물을 보낸 것이었다. 물론 오스칼은 마리의 지나친 총애를 떠나 근위연대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기에 주변에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대쪽같은 오스칼은 봉급 인상과 마리가 보낸 선물을 거절하였고, 마리가 훌륭한 왕비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등 마리 앙투아네트의 순진한 면모를 걱정했다.[43] 폴리냑 백작 가는 경제적인 부분이야 말할 것 없고 공도 하나 세운적 없던 몰락 귀족 가문이다보니 백작 부인도 어쩌다 한번 베르사유 궁전에 올 정도로 비천한 신세였다. 그러나 폴리냑 백작 부인이 자신의 사정을 말한 걸 마리 앙투아네트가 솔직하다고 제대로 착각해 폴리냑 백작의 벼슬을 올려주고 폴리냑 가에 품위 유지비 지원, 궁정 거주 허락권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서 귀족들도 반감을 보였다.[44] 원작에선 폴리냑 부인이 마리의 특혜를 이용해서 딸 샤를로트를 베르사유의 여왕님으로 만들겠다는 장면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도울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라고 순진하게 좋아하는 마리의 모습을 대조하여 마리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은 지독한 순수함의 폐해와 어리석음을 묘사했다.[45] 도박으로 뜯겨나간 비용이 얼마나 컸으면 프랑스의 재무대신이 갈수록 불어나는 마리의 도박빚을 견디지 못해 그녀의 측근인 메르시 백작에게 따로 보고할 정도였고 그 엄청난 액수를 보고받은 메르시 백작은 아예 기함을 넘어 기절해버렸다. 결국 메르시 백작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낭비했는지 듣게 된 마리도 놀라 도박을 그만두자 말하려다가 또 다시 폴리냑 백작부인의 피해자, 눈물 연기에 약해져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 다행히도 폴리냑 부인이 임신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오스칼의 조언도 있고 마리도 자신이 생각해도 심각하다고 생각해 도박을 그만두게 되었다.[46] 덤으로 실제로 폴리냑 백작부인이 과연 간신배인지 아니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정한 친구였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확실한 점은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 폴리냑과 도박과 사치로 국고를 낭비했으며 이는 당시도 그렇고 현재에서도 도저히 옹호의 여지조차 없는 마리 앙투아네트 최악의 실책이었다.[47] 사실상 이게 마리가 알현을 꺼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나라 발전을 위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묻는 자리에서 귀족들이 대놓고 애 언제 낳을 거냐고 닦달하니 우울증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48] 루이 16세 즉위 직후 아르투아 백작 부부는 장남 앙투안 백작을 가지고 얼마 안 있어 차남 베리 공작까지 가졌다.[49] 이걸 실제 역사와 대입한다면, 오스칼의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는 랑발 부인의 자리를 폴리냑 백작부인이 가로챈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50] 게다가 마리는 연극을 보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연극을 계획하고 출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연극 주제가 귀족들을 풍자하는 '세비야의 이발사' 였다는 것. 당연히 이 이야기를 들은 오스칼은 "이 연극을 들은 평민들이 왕가를 어떤 눈으로 볼지에 대해 아무도 생각을 안한 것이 기가 막힌 일이다." 라고 분노를 참지 못했고 동시에 왕비 곁에 제대로 된 충언을 해준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현실에 한탄한다.[51] 원작에서 평민 대표들이 세금 감면을 청원하기 위해 왕비를 알현하고자 먼 지방에서부터 어렵게 베르사유 궁까지 왔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며 문전 박대를 당하자 민생에 1도 관심을 안주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고 간다.[52] 사실 작중에서 안 드러났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태도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은 즉위 초부터 조짐이 보였다. 당시 마리는 즉위 하자마자 늘 해온 투알레트를 아예 생략해버리고 시녀장과 일부 측근들만 데리고 카바네(개인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로 인해 귀족들의 불만이 터지고 보다 못한 노와이유 백작 부인 등 여러 사람들이 충고하자 결국 마리가 투알레트를 하는 대신 옷맵시를 이유로 패션 디자이너인 로즈 베르탱을 동행하겠다고 하자 평민과 같이 있을수 없다는 귀족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되었다.[53] 물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고 아직 10대인 마리의 입장에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수치스러운 장면에 과정 하나하나가 까다롭다 보니 오히려 투알레트를 생략하는 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귀족 입장에선 투알레트를 포함한 에티켓과 왕실 일정 공개는 돈을 쓰지 않고도 귀족들에게 왕비의 옷에 관여할 수 있다는 특권을 주어 반발을 무마하고, 귀족들도 이를 통해 자부심을 얻는 등 서로 윈윈하는 전략 이었다. 더군다나 마리는 엄연한 프랑스의 적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자라는 꼬리표가 있기에, 프랑스 귀족들 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왕비가 프랑스의 전통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으며 결국 이 악수로 비호감이 더 쌓여갔다.[54] 그러나 그녀의 이런 노력은 칭찬을 받긴 커녕, 귀족, 백성들 대부분에게 왕비인데 왜 이렇게 천박하게 속옷 드레스[142]를 입었냐는 비난을 받아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의 초상화는 비공개 처리되고, 같은 포즈지만 화려한 복식으로 바꾼 초상화로 대체됐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억지스러운게, 기존 패션에는 왕비가 세금을 사치로 낭비한다고 비난하고, 이제는 왕비인데 왜 이렇게 초라하냐는 비난을 퍼붓는, 어느 쪽을 골라도 무조건 욕하는 상황이다.[55] 귀족들은 마리를 보자마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대놓고 욕을 하고 파리 시민들은 물론 근위대 대원들마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성희롱하는 음란물 팜플렛을 보고 희희락락했다. 당연히 이를 본 오스칼은 "결국 내가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절망한다.[56] 정확히는 루이 15세가 자신의 정부였던 뒤바리 부인에게 선물하려고 주문 제작한 목걸이였지만 루이 15세가 사망하여 흐지부지되었다. 그후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사달라고 제안했지만 마리는 그 돈으로 최신 포대가 달린 전함을 두대 사겠다고 거절했다. 거기다 그 목걸이의 원래 주인이 왕세자비 시절 자신을 모욕하고 다닌 뒤바리 부인이라는 것과 더불어, 당시 패션 센스가 뛰어난 마리가 봐도 목걸이 디자인도 그닥 예쁘지도 않다고 했다. 실제로 역사 박물관 중에서 그 목걸이의 복제품을 착용한 라모트 백작부인의 밀랍 인형도 있는데, 정말 마리의 예상대로, 착용하면 아름답다기보다는 현란하고 촌스럽기까지 하다.[57]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목걸이 대금을 지불해달라고 편지를 보내면서 사태를 제때 눈치채고 무마할 기회를 얻었지만 마리는 찌라시라고 여기며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편지를 태워버리는 경솔한 행동을 벌였다.[58] 작중에서는 잔느(실존인물이자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범인이었던 라모트 백작부인이 모티브)는 마리에게 추근덕거리던 로앙 대주교를 속여내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필체 위조자를 이용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한 연애 편지를 보내고 심지어 마리와 얼굴이 쌍둥이 수준처럼 닮은 창녀(니콜 올리버)까지 데려왔다.[59] 여기서 잔느는 폴리냑 부인과 오스칼을 지목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오스칼은 마리와 자신을 모욕한 잔느의 헛소리에 크게 분노했고 재판정에 있던 로잘리도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반박했다.[60] 물론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 페르센과 불륜을 벌였으니 좀 찔리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래도 잔느의 말대로 늘상 문란하게 생활하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페르젠과는 실제로는 건전한(?) 플라토닉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61] 더 소름끼치는 부분은 형벌대에서 V자가 새겨지기 직전 이 사건은 물론 자신이 받은 형벌과도 전혀 관계없는 무고한 피해자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옥에 떨어지라며 저주해놓고 고문당한 후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밌었다며 비웃었다는 점이다. 이런 면 때문에 천하의 오스칼도 경악을 금치 못했고 심지어 동생인 로잘리도 이런 언니에게 크게 실망해 그녀의 은신처를 고발했다.[62] 삼부회 때 성직자, 귀족, 평민측의 모든 대표가 루이 16세를 환영한 것에 반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어왔을 때 환영 인사는 고사하고 싸늘한 눈으로 처다보고 수군거리며 아무도 반기지 않는 반응을 드러낼 정도로 마리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다.[63] 특히 이 부분은 역대급 자살골이라도 할말 없는게 프랑스가 전쟁으로 얻을 이득을 바라고 미국의 독립을 도와준게 아니라 라이벌 국가인 영국을 골탕 먹이고 7년 전쟁의 복수라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참전했다(...). 이로 인해 안그래도 최악 상태인 왕실에 빚이 더 늘어나는 것은 덤.[64]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거두는 제도를 만들었고 그녀의 아들들인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도 나름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1차 세계대전까지 살아남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가난과 실의에 빠져 요절했지만, 그의 아내인 치타 황후와 자식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어느 정도 천수를 누렸고 카를 1세의 자손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후손들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65] 게다가 만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당시 프랑스 왕실은 세금을 걷는 권리를 국가 공무원이 담당하는 게 아니라 그 직책을 산 사람들이 하는 일명 세금징수업자들이 했기에 상황을 더 악화되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걷을 세금이 100만원이라고 상정하면 세금 징수업자는 평균 200~300만원을 걷는 식으로 백성들에게 통상 2~3배의 세금을 걷어갔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세금징수업자들은 막대한 부를 누리는 동시에 백성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그 업보로 혁명 이후 대부분 잔혹하게 처형되었으며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런 케이스다.[66] 대표적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한 라파예트 후작, 시예에스 신부가 있었으며 미라보 백작은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민대표로 삼부회에 참여한다.[67] 마리 앙투아네트가 강한 자존심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사태의 심각성이 얼마나 컸는지, 또 그녀 스스로 그걸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여하튼 사과에서 어느 정도 진정성이 보인 탓인지, 분노에 가득차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궁전에서 작정하고 끌어내려 했던 민중들도 침착하게 인사를 하던 마리를 보고 조용해졌을 정도다.[68] 파리로 떠나는 루이 16세 일가의 행렬을 본 한 시민이 "국왕, 왕후, 왕자를 모두 생포했다!"라고 소리칠 정도. 마리 앙투아네트도 과거 처음 파리에 방문했을 당시 시민들이 자신에게 환호와 찬사를 보내던 걸 떠올리고, 지금은 그때와 정반대로 온갖 비난을 받으며 쫒겨나는 꼴로 전락한 자신들의 초라한 현실에 절망하며 눈물을 흘린다.[69] 물론 당시에는 영국 이외에는 입헌군주제라도 대부분 왕권이 강할 정도로 전제군주제가 당연했던 시기임을 감안해야한다. 당장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합스부르크 왕가도 전제군주제였고 의회가 설립되고 힘이 강해져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뒤에도 제 1차 세계대전까지도 군주의 권한이 막강한 편이었다. 물론 이건 합스부르크 왕가가 특이한 것이기도 했지만.[70] 이렇게 도망간 사람들 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용해 여러 특권을 뜯어낸 폴리냑 일가와 루이 16세의 동생들인 루이 18세샤를 10세도 있었다.[71] 작중 오스칼과 대립하고 평민 출신들을 차별했던 푸이에 장군은 낭시에서 벌어진 반란을 제압할 때 주동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가혹한 처분을 해서 국민들이 왕당파에 반감을 사게 만들었고 바렌 사건에도 일을 엉성하게 진행하여 국왕 부부가 시민군에 체포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72] 사실 오래 전부터 프랑스의 부조리한 현실에 의문을 품고 위병대로 있으면서 평민계급의 비참한 실상과 그들의 분노를 경험한 오스칼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군대를 철수시키고, 민중들의 분노를 달래주셔야 합니다" 라고 탄원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칼의 말조차 거절한다. 결국 이런 왕실에 실망한 오스칼은 귀족 신분을 버리고 시민군에 합류해 바스티유 감옥 함락을 성공시키까지 이른다. 사실상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충신을 내친 것.[73] 이는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더욱 감정적으로 묘사되었는데, 비록 자신의 왕비와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임을 알지만 그에 불구하고 그들을 도와준 페르젠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함과 걱정을 표한다.[74] 하인으로 변장한 루이 16세와 귀부인인 척한 자신, 여장한 왕세자 루이 샤를, 공주 마리 테레즈의 정체까지 알아낸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드루에는 이전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본 적이 있어서 바로 왕비임을 눈치챘고 화폐에 새겨진 왕의 초상화를 통해 마리 옆에 있는 남자가 루이 16세라는 것도 알아보면서 국왕 일가임을 눈치챘다고 한다.[75] 다만 애니메이션에선 심의 기준 등을 고려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탄 마차를 둘러싸고 "왕과 왕비라는 작자가 어떻게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느냐!" 수준의 폭언만 하는 걸로 묘사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애니와 마찬가지로 마차가 지나가는 길마다 온갖 욕설이 난무하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공격은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체적인 공격은 받지 않았다고 해도 일평생 오스트리아의 공주이자 프랑스의 왕비로 고생 한번 안해보고 자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서 저런 사람 취급도 안해주는 욕설과 모욕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주 참혹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후술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실제 역사에서나 만화에서나 모두 3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었는데도 머리가 노파처럼 하얗게 세어버리고 말았다.[76]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로서 수준 미달의 여러 실책을 저질렀고 이후로도 잘못을 뉘우치고 상황을 수습하긴 커녕 아예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실상의 국가반역죄를 저지름으로서 프랑스 백성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결국 이에 대한 응보인지 몰라도 프랑스 민중들은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와 프랑스 혁명 세력을 경계한 각국의 간섭으로 인한 전쟁으로 온갖 고생을 겪는다.[77] 이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모두 처형당하자 페르젠은 바렌느 도주 때 끝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하지 않았던 걸 죽는 그 순간까지 후회한다.[78] 이러한 분노는 비단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국민 의회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에 돌아온 루이 16세에게 한 의원이 "멋진 여행을 하셨더군요. 국왕 폐하... 인권 선언을 인정한다고 말씀하신 당신이... 혁명을 배신하고 프랑스 국민을 배반하다니..."라고 차갑게 일갈할 정도였고 외전에서 알랭 드 수아송도 파리로 끌려가는 국왕 일가의 행렬을 보고 국왕부부가 어떻게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냐며 이건 부르봉 왕실의 장례식이라고 한탄한다.[79] 일단 남편인 루이 16세부터가 국왕의 몸으로 직접 맹세한 인권 선언마저 저버리고 외국으로 도망치려 했고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를 말리긴 커녕, 아예 적극적으로 동의했으니 사실상 국왕 일가 전체가 스스로 혁명정부와의 공존 가능성을 완전히 내다버린 셈이었다. 더구나 만약 루이 16세 일가가 무사히 탈출해서 오스트리아에게 혁명세력을 반역자로 때려잡아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파견해 프랑스를 침공했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너무나 뻔했다. 여기서 왕실 일가가 무죄라면 혁명정부가 유죄라는 소린데 결국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걸 혁명정부측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80] 기묘하게도 이에 대한 응보인지 몰라도 루이 18세샤를 10세 모두 혁명 이후 해외를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년이 되어서야 겨우 조국에 돌아왔다. 그나마 왕위에 올랐다가 천수를 누리고 간 루이 18세와 달리 샤를 10세는 또다시 혁명 세력에 쫓겨나 살아생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지에서 외롭게 죽고 시신조차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게다가 루이 18세는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후손 자체를 남기지 못했고 샤를 10세 역시 마지막 남계 후손인 샹보르 백작 앙리가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부르봉 왕조의 남성 직계는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81] 당시 페르젠이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루이 16세 일가의 구출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과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마저 그 어떤 도움도 주기를 거부하며 사실상 손절했다. 그나마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한 언니들인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아말리아만이 겨우 연락을 주고 받을 뿐이었고 마리를 유독 아꼈던 큰오빠 요제프 2세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이후 둘째오빠 레오폴트 2세바렌느 도주 사건 이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여동생을 구하려는 협상을 벌이려 했지만 중도에 사망했으며, 레오폴트의 아들이자 뒤를 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 프란츠 2세는 고모와 고모부 일가를 구해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형 이후를 다루는 외전과 실제 역사에서도 아예 오스트리아 황궁 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엄중히 금지할 정도였다.[82] 재판도 받지 않은 왕당파 죄수들을 무작정 국민들이 끌고가 죽였기 때문에 처형이 아니라 학살이 맞다. 이때 만화에서 묘사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켜주던 랑발 공비도 그저 왕당파란 이유로 끔찍하게 살해당했다.[83] 이때부터 프랑스의 왕비 폐하라는 공식 칭호도 전부 박탈당하고 마담 카페(카페 부인)라고 불리게 된다. 남편 루이 16세도 폐위된 이후 처형될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칭호 다 빼고 루이 카페란 본명으로 불렸다.[84] 명분은 루이 샤를에게 자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잊게 하고 공화국의 한 시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루이 16세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자, 왕세자로서 왕당파의 마지막 희망이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루이 샤를의 신변을 혁명정부측에서 먼저 확보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추정된다.[85] 그나마 원작에서는 우리라고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고 양해를 구하며 루이 샤를을 데려가고 저 대사도 차분하게 말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규에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분노하며 저 대사를 소리친 뒤 루이 샤를을 강제로 데려간다.[86] 이 장면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성품은 선량했을지언정 백성들의 현실과 시대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일국의 왕비로서도 실격인 인물이란 걸 잘 보여준다. 작가 이케다 리요코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손비 시절 파리 방문 때 환영하는 인파에 감동하는 장면에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의 감동을 잊지 않았다면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거다." 라는 각주를 달았다.[87] 더 비극적인 건 이후 루이 샤를은 혁명군들에게 세뇌당하여 그들과 함께 혁명가를 부르며 자신의 어머니인 줄도 모른채 탑에 갇힌 마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등, 본래의 신분과 처한 상황부터 어머니와 가족들은 물론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다. 외전에서 포로 교환으로 오스트리아에 간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다르게 루이는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실제 역사대로 요절했거나 아예 평범한 아이로 자라게 된 듯.[88] 외전에서 딸 마리 테레즈의 언급에 따르면 유일하게 남은 딸의 존재도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고, 로잘리에 의하면 콩시에르쥬리 감옥에 갇힌 후에도 코르셋에 몰래 아들의 머리카락과 초상화를 숨겨 가져가서 이를 보며 계속 울었다고 한다.[89]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두 사람과도 죽을 때까지 재회하지 못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후 시누이 엘리자베트도 처형되고 홀로 남은 마리 테레즈는 포로 교환 전까지 탕플탑에서 감금된다.[90] 로잘리는 마리의 소식을 듣자마자 국민 의회 일원인 남편 베르날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중을 지원했다. 마리는 바로 로잘리를 알아보고 반가워 했으며 자신을 걱정하며 우는 로잘리를 위로해주었다.[91] 마리를 악녀로 보는 대다수의 대중들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를 구경거리로 보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마리의 치장을 돕는 로잘리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방 안을 따뜻하게 해주는 등 이모저모 도움을 줬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왕비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 라는 이유로 로잘리를 제외한 사람들을 전부 쫓아낸다.[92] 폴리냑 부인 등을 비롯한 총신들과 사치를 부리며 국민의 세금을 낭비했다는 것과 자신의 불륜남과 내통하여 바렌느로 도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는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변명을 못하고 인정했지만 명백한 모함이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과 그외 다른 사건들까지 전부 마리의 죄로 몰아갔다.[93]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르제 백작에게 자신의 유품을 페르젠에게 전해주고 당신은 무사히 탈출하라고 부탁했다. 또한 외전에선 로잘리가 자르제 백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가 브레게의 시계를 원한다고 말하자 이때 자르제 백작은 아내의 유품인 시계를 준다.[94] 실제 역사에서도 루이 17세는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을 겁탈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어머니의 처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도 루이 17세의 사칭자들을 두고 부모를 죽인 죄로 총살시켜야 된다고 할 정도로 남동생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로 모자간의 근친상간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당시 혁명정부측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확실히 처형시키기 위한 물증으로 가족들과 전부 떨어진 채, 독방에 수감되어 간수들에게 학대까지 받으면서 육체와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진 어린 루이 17세를 세뇌시켜 거짓 증언을 받아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결국 루이 17세 역시 부모와 고모의 처형 뒤에도 계속 탕플 감옥에 수감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 부모님이 처형된 지 2년만인 1795년에 고작 1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95] 이때 법정에서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는 에베르 저 멍청이가 왕비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조소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극도로 증오하던 부인들마저 에베르에게 이건 솔직히 선을 넘었다며 반발할 정도였다.[96] 애니메이션에서 특히 살아갈 의지도 잃고 자포자기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더 확실히 묘사한다. 프랑스에 시집온 순간부터 끝나지 않는 거짓 소문과 악담에 시달리는 것을 시작으로 비록 자신의 실책이 어느정도 원인 제공을 하긴 했지만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 가족을 비롯한 모든 걸 잃고 아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됬으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마따나 드디어 모든 고통이 끝난다며 죽는 게 더 나았던 셈이다. 다만 원작에서는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받아들일지언정 싸늘했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오히려 당당하게 프랑스의 장래와 발전을 기도하며 마지막까지 왕비로서 품위를 버리지 않았다.[97]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엘리자베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베트의 사후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드러난다. 더 비극적인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편지에서 자신의 아이들만은 복수심을 품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고 쓴 것과 정반대로 이미 가족들과 떨어져 온갖 학대를 받던 루이 17세는 요절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마리 테레즈는 나폴레옹 몰락 후 조국으로 돌아오나 오랜 감옥 생활과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메마르고 차가운 성정이 되었고 평생 혁명 세력과 프랑스 민중을 증오했다. 결국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백색 테러를 여러 번 일으켜 자신에게 동정적인 민중들의 민심을 잃어버려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가 집권하면서 프랑스에서 쫓겨나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98] 애니메이션에서는 감옥 안에서 직접 휴지로 만든 장미꽃을 로잘리에게 건네주며 "평소 오스칼이 좋아하던 색으로 장미를 칠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처형장으로 향하고, 단두대에서 원작 만화처럼 당당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실책을 부정하거나 울며불며 발악하지도 않고 그저 후회와 서글픔이 교차한 표정으로 조용히 최후를 맞이한다. 나중에 로잘리는 알랭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막상 자신은 오스칼이 생전에 무슨 색의 장미를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로잘리가 앙투아네트에게 받은 휴지 장미는 알랭 앞에 보여질 때까지 여전히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은 흰색이었다.[99] 남편 루이 16세는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금장 마차를 타고 처형대로 향했고 그곳에서 처형 집행인도 나름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예우 따윈 없이 단두대에 목이 잘리기 쉽게 긴 머리카락도 단발로 잘리고 두 손이 묶인 채 짐마차에 앉아 처형대로 끌려갔다. 게다가 가는 길 내내 루이 16세의 처형을 엄숙하게 지켜보던 시민들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은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참고로 처형대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라한 모습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크로키가 남아있다. 다만 단발인 채 처형당한 것은 원작 한정이고, 1979년판 애니메이션에서는 긴 머리인 채로 죽게 된다.[100] 과거 프랑스 왕세손비로 파리에 처음 방문했을 때 대중들에게 환호받던 장면이 교차되어 대비된다. 그때 각주처럼 마리 앙투네아트가 당시 민중들이 주는 감동을 잊지 않았다면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거다.[101] 구작 애니메이션에서는 침착함을 잃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당당했던 원작과는 달리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싸늘하고 자포자기한 피해자로서 묘사되며, 마지막 순간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거의 빨리 자신을 죽여달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슴 아프지만 조용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때 처형장으로 가기 전 감옥에서 종이로 만든 장미를 로자리에게 주면서 오스칼이 좋아하던 색으로 칠해서, 그녀를 추모해달라고 부탁했고 오스칼은 모르겠지만 앙드레는 흰색을 좋아했다는 말에 칠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이 더욱 가슴 아픈데 처형 집행자의 발을 실수로 밟아 "용서해주세요, 무슈. 절대 일부러 그런게 아니었어요."라고 했다.[102] 실제 역사에서도 합스부르크 황실은 프랑스 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조차 꺼내지 않았으며 그녀의 딸이자 자신들의 외손녀이기도 한 마리 테레즈마저 마리 앙투아네트를 외면했다는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존재였기에 썩 반기지 않았다.[103] 페르젠이 사망한 년도는 1810년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3년에 참수당한 뒤로 무려 17년이나 지난 뒤다.[104] 외전편에서 자신을 겁탈하려는 간수에게 강하게 저항했으며 실제 역사에서도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 때 조국인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극렬한 왕당파 보수주의자가 되어 백색 테러를 여러번 일으키고 자신의 일기에서도 혁명세력과 민중들을 일관되게 악마로 묘사했다.[105] 외전에서 외사촌 프란츠 2세가 화려한 드레스를 선물로 주고 사촌올케 겸 이종사촌인 마리아 테레사가 티파티에 초대해주며 부르봉 왕조의 공주로서 극진히 대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지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위기에 질려하고 대놓고 마리아 테레사가 그리 맘에 안든다고 말할 정도로 불편해했다.[106] 사실 마리 테레즈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몬 주범은 본작의 악녀 잔느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 없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테니.[107] 게다가 만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마리 테레즈는 오랜 감옥 생활로 얻은 발성장애까지 더해져 날카롭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엄청난 고성을 토해냈다고 한다. 정작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부부는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도 않고 자녀들에게 절대로 자신의 죽음을 복수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부탁했던 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현실이다.[108] 실제 역사에서든 만화에서든 보면 사실 마리 테레즈 본인도 루이 17세가 학대와 세뇌 때문에 위증을 했다는 것 자체는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생을 그 지경으로 만든 원흉인 과격파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대로 복수하지도 못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이미 죽어버린 남동생이라도 원망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것.[109] 작중에서 적국인 프랑스와의 혼인 동맹이 맺어져 각종 공부나 준비로 노심초사해도 뭐할 판에 힘든 생각은 하지 않겠다는 것에서 이미 조짐이 보였고, 결혼을 주선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힘든 일을 싫어하고 생각이 짧은 막내딸에게 오히려 왕비라는 지위가 독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내내 불안을 내쳤을 정도였다.[110] 당장 그토록 충성을 다바쳤던 오스칼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날이 세도록 무도회나 연극에 참석하고자 수차례 파리와 베르사유를 드나들었지만 정작 파리에서 프랑스 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단 한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탄했고, 왕비로 즉위한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매번 하는 백성들의 일반 알현을 자신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없애려는 것(이후 오스칼의 만류로 없었던게 되었음)에서 백성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1도 없다는 조짐이 보였다. 또한 귀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절차인 투알레트도 거부했는데 알현과 투알레트는 왕실이 평민과 귀족들에게 주는 특권이였으므로, 이를 거두는 것은 그들에게 불만을 심을 수 밖에 없었는데 개인적 이유만으로 하지 않으려고 했고 주변인들이 아무리 말려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런 무책임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행태를 독자들뿐만 아니라 작중에서 오스칼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위에 서술된 혁명군의 대사를 통해 평민들과 귀족들부터 가족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잘 알고 있었고 똑같이 안좋게 바라봤다는 게 드러난다.[111] 그러나 마리는 본인의 실책과 사치로 국가 예산이 파탄지경에 이르고 백성들은 한끼 하나 챙기지 못할 정도로 굶주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국민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의무라는 내로남불적인 망언만 내뱉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파리로 끌려가는 상황까지 왔는데도 정신을 차리긴 커녕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혁명 따윈 절대 인정치 않는다는 시대착오적인 모습만 보였다. 급기야 본인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고 프랑스 혁명정부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차라리 프랑스군이 져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빨리 파리로 침공해와 혁명따윈 박살을 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라의 안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왕비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인다.[112] 이 단점은 왕세자비 시절 뒤바리 부인과 신경전을 벌일 때부터 잘 드러났다. 어머니의 영향과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귀하게 자란 마리에게 왕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이 좋게 보일리 없다지만, 뒤바리 부인은 공인된 지위를 가진 '메트레상티트르(maîteesse-en-titre)'이고 무엇보다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측근인 노아이유 백작부인, 메르시 백작을 통해 경고를 줄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그러나 마리는 이 경고를 듣고도 위기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흘려들었으며 결국 보다 못한 메르시 백작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훈육을 해서 마리를 뜯어말려야 했다. 급기야 자신의 친구 오스칼이 이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자 마리는 정신차리고 설날에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뒤바리 부인은 그 모습을 대놓고 비웃는 기행을 저질렀고, 이러한 태도는 그간 힘든 베르사유 궁전 생활과 뒤바리 부인 관련된 문제로 스트레스를 참았던 마리에게 심한 상처를 입힌다.[113] 당장 마리의 사치 비용과 노름빚은 모두 마리의 개인재산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의 세금으로 지출되었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물론 작가도 마리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세금이 쓰였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고 비판했다. 게다가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제외한 나머지 자매들은 중소 왕국 내지 공국으로 시집가거나 수녀가 된 것에 반해 마리가 시집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대륙을 양분했던 강대국이자 주변 나라들은 물론 적국인 오스트리아도 모방할 정도로 당시 트렌드를 선도했던 문화 선진국이기도 했다.[114] 앞서 각주에서 설명한 평민들의 알현과 투알레트를 개인적인 사유로 중지하고 최후반부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이유로 벌인 바렌느 도주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들 모두 일국의 왕비로서 최소한의 책임감과 상황판단력이 있었다면 절대 해서는 안될 짓이었다.[115] 당장 실제 역사에서 조지 6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요크 공작 부인으로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지만, 시아주버님인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퇴위로 원치도 않은 왕비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러운 즉위와 그 직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대 혼란 속에서도 망명 제의를 거부하고 영국에 남아 남편 조지 6세를 내조하고 폭격으로 엉망이 된 런던을 시찰하고 국민들과 똑같이 배급을 받으며 생활하여 국민들을 독려하는 등 왕비이자 국모로서 책임(무책임하게 퇴위한 에드워드 8세와 그 계기가 된 월리스 심프슨은 2차 세계대전 내내 나치 부역 및 반역 논란이 일었던 것과 대조적)을 다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왕비와 조지 6세의 모범적인 모습은 영국 국민들이 영국 왕실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그들의 딸을 거쳐 외손자가 즉위하면서 영국 왕실은 현재까지 엘리자베스의 후손으로 번창하고 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왕비는 런던 대공습으로 궁궐마저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도 "이제야 고통받는 런던 시민들을 볼수 있어서 기쁘다"고 당당하게 말해 남편에게 용기를 주고 남편이 먼저 떠나간 슬픔을 뒤로하고 어린 나이에 즉위한 딸을 도와 여러 정무를 보좌하는 등, 모범적인 아내이자 어머니였다.[116] 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루이 16세를 제대로 내조하긴 커녕 남편의 우유부단한 성격(실제 역사에서 마리는 측근에게 보낸 편지에 대놓고 루이 16세를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놀리기도 했고 오죽하면 이를 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놀라서 딸을 꾸짖었다)을 이용해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데 급급하고 자신의 응석을 다 받아주는 루이 16세에 대한 고마움은 거의 없었다. 결국 남편의 뒷배를 입고 페르젠과의 불륜부터 사치와 바렌느 도주를 비롯한 실책을 벌여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본인은 물론 남편의 평판과 인생마저 망쳐버렸다. 그래도 프랑스 혁명 기간동안 루이 16세가 마리의 실수를 모두 용서해주고 마리도 남편의 명복을 비는 걸 보면 부부로서의 사랑은 존재했다.[117] 또한 마리는 어머니로서도 좋은 사람이었냐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고의 어머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편이다. 당장 아들 루이 샤를은 페르젠과의 사생아란 루머에 시달리게 만들고, 딸 마리 테레즈도 탕플 탑에 갇혀서 지옥같은 유폐생활을 하게 만드는 등 아이들의 인생을 망쳐 버리고 말았다. 결국 루이 17세는 온갖 학대를 받다가 요절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리 테레즈는 이때의 트라우마로 인간불신의 냉랭한 성격이 되어 버리고 만다. 더구나 개인적으론 몹시 다정했지만 장남 루이 조제프가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나 차남 루이 샤를이 혁명군에게 끌려갔을 때 감정에만 매몰되어 남은 아이들의 안위를 살피지 않았다.[118] 물론 샤를의 경우 혁명군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상황인 탓에 아들 목숨만은 살려달라 간청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또한 실제 역사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최고의 어머니까지는 아니지만, 어머니로서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으며 아이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들자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아이들이 마리에게 값비싼 선물을 기대한다고 하자 마리는 "궁 밖에서는 너희들처럼 선물을 바라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오히려 너희들은 매일 편안한 생활과 음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또한 마리 테레즈가 태어났을 때 후계자들을 바라던 귀족들이 실망한 반면 루이 16세와 함께 마리 테레즈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으며 '아들이었다면 프랑스를 가졌겠지만 마리 테레즈 너는 나의 모든 것이란다'라는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119] 물론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실제 역사에서 원래 루이 16세와 혼인할 사람은 열번째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였지만 아홉째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가 사망하여 혼인 순번이 당겨지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게 된 것이다.[120] 작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추문이 돌아다니는 걸 보다 못한 오스칼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걱정해 "프랑스의 왕비이자 국모로서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을 하나, 마리는 오스칼의 충언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자신을 이해할 수 없냐며 반박하는 장면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정도 안타깝긴 했지만 자기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국고를 탕진하고, 그 돈이 다 어디에서 나온지 생각하면 이때부터 마리는 프랑스의 국모이자 왕비로서 완전히 실격이었다.[121]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16세 이후 프랑스를 다스리는 나폴레옹의 첫번째 황후 조제핀이 오히려 더 많은 사치를 누렸으며, 두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는 후계자를 출산하자 나폴레옹이 그녀에게 온갖 사치품과 보석을 선물했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 프랑스가 빚이 너무 많아서 그 적은 사치마저도 큰 사치로 보이게 할 정도였다는 거다.[122] 당장 히키코모리를 두고 죽어 마땅한 범죄자라고까진 안 하지만 왜 부모 등골 빼먹는 몹쓸 놈이라고 욕하는지 생각해보자. 제대로 뭐 하고 벌어오는 것도 없는 주제에 돈 잘 안 쓰기만 한다고 해서 만사가 오케이인게 아니다.[123] 심지어 자신의 편이 될 줄 알았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편지로 언제 후계자를 출산할 거냐고 압박했다.[124] 그래도 남편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멸시받은 다이애나와는 달리, 남편 루이 16세는 표현이 다소 서툴었지만 아내인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마리도 뜨거운 사랑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125] 한 가지 특이사항으로는 앞서 설명했듯이 두 버전 모두 그녀의 침착한 자세를 재현했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마치 자신을 빨리 끝내달라는 듯이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상당히 싸늘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피해자로서의 마리를 더욱 강조하였다.[126] 초반부 드 게메네 공작과의 결투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른 행동, 후반부 국민대표를 무력 진압하라는 왕실 명령 거부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상관없이 평등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정의감에 따른 오스칼의 행동을 묵인해줬다.[127]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자마자 오스칼의 승진과 함께 엄청난 상을 내리지만 오히려 오스칼은 딱 잘라서 거절하며 마리 앙투아네트가 훌륭한 왕비가 되는 게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한다.[128] 초반에 드 게메네 공작이 평민 아이를 시덥잖은 이유로 쏴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것, 로잘리의 양모 니콜이 폴리냑 백작부인의 마차에 뺑소니 사고를 당해서 사망했으나 가해자인 폴리냑 부인은 책임지지도 않고 튄데다 처벌도 안 받는 것 등등.[129] 작중에서 금서로 불리던 루소의 서적을 몰래 읽고 있거나 팔레 투야알에 가서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여러 혁명가들과 모임을 가지는 등 프랑스를 개혁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130] 이때 인사를 드리러 온 오스칼과 서로 마지막 만남임을 예감하면서도 둘이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또 만나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헤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후 오스칼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살아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고 각각 바스티유 감옥과 단두대에서 사망한다. 사망 시기는 오스칼이 좀 더 먼저 죽었고, 이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131] 그런데 오스칼은 이미 그 전에 죽었기에, 과연 이들의 사형 여부를 놓고 투표전쟁이 벌어질 때 어느 쪽을 지지했을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스칼의 성격을 비롯하여, 루이 16세와 마리가 개인으로서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오스칼도 알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차라리 이들을 죽이지 않으면서 프랑스 혁명군에게 유리할 대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특히 오스칼이 마리와 작별을 고할 때도 마리를 걱정해주는 우정을 생각한다면 더욱 확실하다.[132] 그래봤자 불륜이긴 해서 페르젠과의 풍문으로 시끌시끌했고, 두 사람에 대한 추문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을 더욱 떨어뜨리는데 한몫 했다. 루이 16세도 이를 알아채곤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한 마리의 연애에 차마 손대진 못했다.[133] 과거 절대 왕정시대에서 왕비의 불륜은 그냥 사생활적인 문제가 아니라 반역죄로 취급되었다. 내연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의 자식으로 속여서 후계자로 내세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캐서린 하워드, 캐롤라인 마틸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불륜 문제로 이혼당하거나 처형당한 왕비 및 왕세자비다.[134] 마리 앙투아네트가 본격적으로 평민과 귀족 할 것 없이 프랑스 백성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된 이유는 폴리냑 백작부인같은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사치를 부리며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고 국정을 등한시했기 때문인데 그 계기가 바로 페르젠이 떠난 공허함을 메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페르젠도 혼인을 거부하고 마리와 자주 만남을 가지는 등 자기 감정대로 행동했지만 오스칼의 조언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프랑스를 떠나거나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등 나름대로 처신을 했다. 그러나 마리는 최소한의 의무조차 안 지려하고 대놓고 페르젠을 총애하는 잘못된 처신을 일삼았고 결국 마리를 이해하고자 한 오스칼조차 그녀에게 실망한다.[135] 더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남 루이 조제프가 불치병에 걸려 루이 샤를이 차기 왕세자로 지목되자 안그래도 왕위를 노리던 프로방스 백작 루이아르투아 백작 샤를은 공식석상에서 루이 샤를의 정통성을 대놓고 조롱하고 나중엔 루이 16세에게마저 익명으로 루이 샤를은 페르젠의 아들이라고 고발하는 편지까지 올 정도로 루이 샤를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136] 왕실을 가장 지지해야할 귀족들도 마리를 공식석상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대놓고 비난했으며, 바렌 사건이 실패한 이후 분노한 시민들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 루이 샤를을 페르젠과의 사생아라고 조롱하거나,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재판에 회부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검사측이 바렌 사건을 지원해준 사람이 페르젠이라고 캐묻는 걸 보면 두 사람의 불륜은 프랑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137] 루이 16세와 자신의 머리카락, 백합 문양이 새긴 반지, 브레게의 시계 등.[138] 심지어 남편 루이 16세는 이전의 프랑스 왕들과 달리 가정에 매우 충실해서 그 어떤 여자와도 바람피우지 않았다.[139]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가 역사 관련으로는 고증을 뚜렷이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 이러한 정확한 역사 고증은 후속작인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그대로 나온다.[140] 이는 Fgo의 마리가 단순히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 아니라, 프랑스 왕실 그 자체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등장했기에 이런 차이가 있는 걸로 보인다. Fate 시리즈 자체가 질 드 레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대놓고 변명의 여지 없는 악인인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141] 마리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막내딸, 안토니나는 러시아 제국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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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당시 슈미즈는 그냥 속옷 내지는 잠옷이었고 더구나 그 옷의 재료인 모슬린은 프랑스와 오랜 라이벌 국가인 영국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