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9:49:16

뒤바리 부인

프랑스 메트레상티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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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75CD><colcolor=#ffffff,#000000> 뒤바리 부인
잔 베퀴
Madame du Barry
파일:Madame_Dubarry.jpg
이름 잔 베퀴
(Jeanne Bécu)
출생 1743년 8월 19일
프랑스 왕국 보쿨뢰르
사망 1793년 12월 8일 (향년 50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배우자 기욤 뒤바리 (1769년 결혼)
아버지 장 바티스트 고르망 드 보베르니에 (추정)
어머니 안 베퀴 드 캉티니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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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antique-prints.de/8378.jpg

Jeanne Bécu, Madame du Barry

루이 15세의 마지막 로얄 미스트리스. 본명은 잔 베퀴이며 뒤바리 부인이라고 불리지만, 프랑스어 표기는 Madame du Barry, 그러므로 ''바리 부인', 혹은 '바리 백작부인(Comtesse du Barry)'이 맞다.

같은 평민 계급이라고 해도 부유한 집안의 딸로 교양을 갖추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와는 달리, 원래부터 매춘부(코르티잔)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신분이 낮다. 후술할 듯 바리 백작의 눈에 띄었을 때 코르티잔이 된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재단사였고, 아버지는 확실치 않다. 10대 때는 파리에서 장신구를 팔거나 미용사로 일했고, 귀부인에게 고용되어 말상대가 되기도 했다. 그녀의 후견인이 된 바리 백작은 처음부터 그녀를 국왕의 애첩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며, 실제 그녀를 본 국왕은 곧 매료되어 그녀를 베르사유 궁전에 들이게 된다. 다만 당시 프랑스 국왕의 애첩은 법도상 반드시 기혼녀여야 했고, 그래서 바리 백작은 그녀를 자신의 남동생과 급히 결혼시켜 그녀를 입궁시켰다.

한국에는 베르사유의 장미 덕분에 악랄하고 거만한 여자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며 따뜻하고 소탈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들을 통해 직접 보면 방탕한 요부보다는 오히려 영성체하러 나온 순진한 시골처녀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국왕의 애첩으로 실질적인 나라의 안주인이 된 이후에도 선량한 성격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호감을 샀다. 요컨대 벼락출세한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루이 15세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국왕에게서 많은 재산을 하사받았음에도 항상 재정적으로 곤란했는데, 이는 그녀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긴 것에도 이유가 있으나, 더 큰 이유는 자선활동과 후원사업에 대부분의 수입을 사용해서였기 때문이다. 다만 아래의 생애 설명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개인적인 성격은 선량하고 순진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 탓에 정치적으로 현명하게 처신하는 방법은 몰랐던 듯하다.

2. 생애

어찌 보면 의외로, 어찌 보면 당연히, 권력이나 정략에는 관심이 없었고 외교정치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전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 때처럼 정치적 행사나 회의에 동행했으나, 바리 부인은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후세의 호의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드레스 같은 사치스러운 물품을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보석을 굉장히 좋아했다. 실제로 나중에 문제가 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에서 보석업자가 팔려고 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원래 바리 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루이 15세가 주문했던 것이었다.[1] 때문에 루이 15세에게 졸라 시도때도 없이 보석과 각종 사치품을 질러대서 그녀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굉장히 나빴다. 또 가족과 지인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성격 때문에 청탁을 많이 받기도 해 구설수를 사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신앙심이 무척 깊은 사람들은 질색했겠지만) 대체적으로 국왕이 정부를 두거나 여색을 탐하는 것이 그렇게 큰 흠으로 평가되지는 않았고 당연히 여겼다. 오히려 남성성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했을 정도이며[2], 애첩이 없는 왕은 생식기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3] 다만 루이 15세의 경우 국왕 자신이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바리 부인의 전임자(…) 퐁파두르 부인이 정치에 개입했다가 전쟁까지 나서 결국 패전한 것이 크게 작용하여, 바리 부인은 구설수에 올랐다.[4] 당시 프랑스에서는 직접 왕을 뒷담화할 수 없으니 대신 애첩을 뒷담화하는 것으로 일종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했다.[5]

당시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와 왕세자비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6]가 사망한 프랑스 궁정에는 여주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왕의 애첩으로 자리잡은 바리 부인은 사실상의 왕비 역할을 했다. 당시 루이 15세의 딸들은 신분이 낮은 애첩인 바리 부인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기에 바리 부인은 공주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러한 바리 부인의 지위를 처음으로 위협한 것이, 바로 왕세손비로 프랑스에 시집오게 된 합스부르크 제국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윤리적으로 대단히 엄격하여 축첩과 매춘을 무척 싫어하여 매춘을 전면 금지했고[7], 신하들이 정부를 둘 경우 굉장히 엄격하게 처벌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애첩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빅투아르를 필두로 한 루이 15세의 공주들은 프랑스에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었기에 프랑스어가 서툴러 궁중 생활 적응에 애먹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접근, 바리 부인에 대한 악평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어머니와 시고모들의 교육으로 인해 마리는 바리 부인을 몹시 싫어하게 되어, 어떤 공식 석상에서도 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된다. 신분제였던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는 신분이 높은 귀부인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에 신분 낮은 귀부인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바리 부인이 아무리 프랑스의 실질적 왕비였다지만, 형식상으로는 세손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 궁정에서 가장 지위 높은 귀부인이었고, 당연히 법적으로 왕실에 아무 권리도 의무도 없는 바리 부인보다 신분도 까마득히 높았다.루이 15세의 공주들과 마리는 이 점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바리 부인을 견제했던 것이다.

바리 부인은 처음에는 어린 의붓손자며느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호감을 보이며 친해지려고 했으나, 왕세손비가 아예 말을 걸어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바리 부인은 계속 참다가 결국 격노해 루이 15세에게 달려가 울고불고 하소연했다. 루이 15세는, 비록 외국에서 시집온 어린 손자며느리를 귀여워하긴 했지만, 이번 행동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바리 부인은 프랑스의 로얄 미스트리스들 중에서도 유일무이하게 공인된 지위를 가진 '메트레상티트르(maîteesse-en-titre)'였던 것이다. 원래 로얄 미스트리스는 어디까지나 '왕의 내연녀'에 불과하지만, 프랑스에는 메트레상티트르라 하여 일종의 '공인 로얄 미스트리스'라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왕의 여러 정부들 중에서도 1명만이 임명될 수 있는 자리였고, 남편의 집이 아닌 왕궁에 거주하고 왕에게 조언하거나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등의 공식적인 권한을 받았다. 자녀들도 왕의 자녀로 공인받고 작위도 받았다.

결국 루이 15세는 손자며느리 마리 앙투아네트를 직접 불러 타이르거나, 자신의 딸들을 말리는 대신, 오스트리아 대사를 불러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이 사태에 엄청나게 당황한 오스트리아 대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서 사태의 전말을 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도 비록 정부라는 존재를 불쾌해하긴 했어도, 타국의 전통적 관습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딸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의 지시에 더해 오스트리아 대사마저 눈물로 설득하자, 마침내 베르사유 궁 신년행사에서 바리 부인에게 말을 건네게 된다. 그 유명한 "오늘 베르사유 궁에는 사람이 정말 많군요(Il y a bien du monde, aujourd'hui, à Versailles)!"가 이 때 나온 말이다.[8]

사실 이후의 다른 사례들에 비하면 눈에 좀 덜 띄기는 하지만, 이 사건 역시 바리 부인이 정치나 정략적 측면에서는 별로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볼 만하다. 물론 먼저 바리를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이니 자신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응할 필요는 있었지만, 문제는 바리의 처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화난다고 무작정 질러버려도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는 것. 메트레상티트르(국왕의 공식 애첩)인 바리의 유일한 권력적 배경은 루이 15세의 총애뿐인데, 당시 루이 15세는 이미 노년이었으며 루이 15세 사후의 확정적인 왕위 계승자는 그의 손자인 루이 16세였다. 결국 당장은 루이 15세의 위세를 빌려 마리 앙투아네트를 굴복시킬 수 있지만, 루이 15세가 죽는 순간 마리는 명분상으로든 실질권력에서든 바리가 상대할 수 없는 상대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를 두고 바리 부인이 대놓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골탕먹인 것이라느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바리 부인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수녀원으로 추방하는 등의 보복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라는 주장은 무리한 해석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바리 부인의 역할은 프랑스에서 대대로 공인되어온 관습이었고, 교황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나름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루이 15세의 공식적 항의가 말해주듯 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그녀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녀원에 보내는 것 역시, 루이 15세가 직접 하면 모를까,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9]

아무튼 이 사건 이후 바리 부인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의기양양했고, 세 공주들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분한 감정을 참고만 있어야 했다. 그러나 1774년 4월 27일 루이 15세천연두에 걸렸고, 세 딸들과 바리 부인은 열과 성을 다해 그를 간호했다.

하지만 병세는 악화되어 나중에 가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지한 루이 15세사제를 불러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이 15세의 고해신부는 "바리 부인을 출궁시키지 않으면 성사를 줄 수 없습니다"라고 고집했다. 고해성사는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며 하느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인데, 죄의 상태(불륜)에 계속 머물러 있을 생각이면서 고해한다는 것은 고해성사를 모독하는 대죄(모고해)이기 때문에, 정부가 함께 있는 한 절대 고해성사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루이 15세는 바리 부인을 출궁시킬 수밖에 없었고, 5월 3일에 그녀를 베르사유 궁 가까이에 있는 뤼엘 궁으로 떠날 것을 명했다. 당시 루이 15세는 바리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담, 나는 병이 들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소. 이 휴식이 나로 하여금 늘 당신에 대한 가장 정다운 우정의 감정을 갖게 해주는구려.

몇 시간 후 루이 15세는 바리 부인을 불러올 것을 명했으나, 바리 부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이후 5월 10일에 루이 15세가 사망했다. 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의 사망 이후 장시간 수녀원에 머물러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곧 조치가 풀려 자신이 소유한 루브시엥 성[10]에서 은거하게 되었다. 왕의 애첩이 된 이후로 정치적으로 음모를 짜거나 정적을 만든 적도 없었기 때문인지,[11] 베르사유 궁전에서 나가게 된 것 말고는[12] 실질적으로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않은 셈이다. 사실 루이 15세의 세 딸들이 조카 루이 16세에게 바리 부인을 처리하라고 닥달했기에, 그나마 명목상의 보복으로 수녀원으로 잠시간 추방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추방당해 있던 수녀원에서도 특유의 친화력과 사교성을 발휘해서, 처음에는 자신을 왕을 홀린 요부로 여겨 적대적이었던 수녀들과도 금세 친구가 됐다. 심지어 수녀원장과도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루브시앵 성에 살게 된 이후로도 바리 부인은 정치적으로 나서는 일 없이 조용히 지냈다. 그래도 프랑스 귀족인 브리삭 공작과 영국 외교관 헨리 시무어 사이에서 삼각관계 연애를 하는 등, 사적으로는 여전히 활발한 모습을 보여줬다. 두 남성 모두 바리 부인이 양다리를 걸치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유지했으며, 브리삭 공작은 바리 부인을 일생일대의 사랑으로 묘사하며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프티 트리아농 궁은 루이 15세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 세운 별궁으로 18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졌는데, 정작 완공된 것이 마담 드 퐁파두르가 죽은 이후인 1768년에 끝이 났기 때문에 바리 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베르사유 궁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에게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낳은 선물로 받는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루브시엥 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792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피로 물들기 시작하고 귀족 및 왕족에 대한 위협이 전면화되면서, 바리 부인의 애인 중 한명이었던 브리삭 공작이 살해당하고 그 시체가 바리 부인의 창문 앞에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낀 바리 부인은 친구를 만난다는 이유로 영국 런던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녀는 고가의 보석들을 영국으로 빼돌렸는데, 이것들은 결국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싸우기 위한 군자금으로 쓰이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 인생 최대의 오판을 터트리니, 그녀가 소유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러 파리에 들른 것. 문제는 이때 파리는 극렬 과격파인 자코뱅당이 득세하고 있었고, 자코뱅은 귀족으로도 부족해서 부르주아나 악덕 상인들까지 처형해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 부인이 대체 왜 파리에 갔는지 아직도 얘기가 분분하지만, 어쨌건 그녀가 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평판이 여기서 입증되었다. 결국 바리 부인은 프랑스로 돌아왔을때 얼마안되어 바로 체포되었다.

바리 부인이 체포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73년에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치타공 출신의 벵골인 노예 자모르를 시종으로 하사했다. 그녀는 자모르에게 루이 브누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교육시킨 후 하인으로 삼았는데,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자모르는 상당히 똑똑한 동시에 계급에 대한 불만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프랑스 혁명 시기에 그는 자코뱅에 가입했고, 이 사실을 안 바리 부인은 그에게 자코뱅과 관계를 끊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자모르는 바리 부인이 반혁명파를 후원하고 있다고 밀고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모르는 바리 부인 사후 얼마안가 그녀의 공범이라는 혐의로 투옥되었지만 탈출하여 영국으로 도망쳤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한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1820년에 죽었다.

바리 부인은 재판을 받을 때까지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숨겨두었던 보석을 모두 제공할 테니 살려달라"고 탄원했지만, 네임드를 잡은 극렬파 자코뱅당이 그녀를 살려줬을 리가 없다. 결국 자모르의 거짓 증언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3년 12월 8일 단두대에서 사형당한다.

선고가 있기 전 자신이 석방될 줄 알았던 바리 부인은, 사형 판결이 나오자 충격을 받아 목청이 찢어질 정도로 절규했다고 한다. 그녀가 수감되었던 콩시에르쥬리 감옥에서 마차단두대까지 호송되는 와중에도 계속 자신을 석방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여 교도관들이 강제로 끌어내야했고, 단두대가 눈에 보이자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가서 울면서 사형집행인들과 광장에 모인 대중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고 한다. 물론 더 이상 젊은 나이도 아니었고 나이가 들어서 뚱뚱해진 노부인이었지만[13] 완력이 장난이 아니어서, 그녀를 단두대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형집행인 수십명이 달라붙어야 했다고 한다.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에도 울면서 계속 찢어지는 목소리로 "단 몇 분만, 몇 초만이라도 사형을 연기해 달라"고 애원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는다.

유언"잠깐만, 난 할 말이 있소. 잠깐만!"[14]이었다. 그녀의 목이 잘린 뒤에, 광장에 있던 시민들은 긴 악몽에서 깬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사후 그녀의 시신은 마들렌 묘지에 묻힌다.[15]

바리 부인이 영국에 숨겨둔 보석 65점은 결국 2년 뒤 영국 정부에 압류되어 경매로 다 팔려나갔고, 영국에 숨겨둔 150만 리브르(약 2,000억원 대) 상당의 돈과 채권까지 영국이 차지하여 영국 정부만 돈을 챙기게 되었다.

그녀의 처형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유명한 망나니 가문인 상송 가문의 4대 당주이자 프랑스 망나니들의 우두머리인 "무슈 드 파리" 샤를앙리 상송이 집행했는데, 공교롭게도 상송은 여성을 유혹하고 다니던 젊은 시절에 바리 부인과도 인사를 나누어 구면이었다. 또한 상송은 바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의 목을 날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바리 부인은 상송에게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걸했지만 그는 임무대로 형을 집행하였다. 하지만 상송은 바리 부인이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편치 못했고, 일지에 '모두들 바리 부인처럼 울부짖으며 살려달라 빌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사람들도 일의 중대함을 깨달아, 공포정치 또한 빨리 끝나지 않았을까'라는 문장을 남겼다.

3. 대중매체에서

3.1. 베르사유의 장미

파일:베르사이유의 장미.뒤바리 부인.jpg
만화/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의 초반 3화부터 등장하며, 작중에서는 꽤 인상적인 악녀로 나온다.[16] 성우는 키노미야 료코. 비디오판은 최문자, KBS판은 이경자, EBS판은 이소영.

실제 역사의 유명한 일화를 각색해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된지 얼마 안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신경전을 벌이는 걸로 첫 등장한다. 전술했듯이 왕비와 왕세자비가 부재 중인 프랑스 왕실에 공식적으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으로 온 마리 앙투아네트를 뒤 바리 부인은 경계심[17]을 가지게 된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르침으로 성윤리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데다가, 안그래도 아버지의 애첩이란 이유로 온갖 권세를 누리던 뒤 바리 부인을 싫어하던 루이 15세의 딸들(남편 루이 왕세자의 고모)의 부추김으로 자연스레 바리 부인을 천한 여자로 여기며 경멸하게 된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위치와 베르사유 궁전의 에티켓(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낮은 사람에게 말을 걸수 있는 규칙)을 이용해 뒤 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일부러 무시하는 등 치열한 신경전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오스칼의 어머니 자르제 백작부인까지 휘말려 바리 부인 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가 되는 명령을 받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18] 여러 번이나 패배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행동으로 자신이 소외되는 분위기를 느낀 뒤바리 부인은 결국 유일한 자신의 편이 되줄 루이 15세에게 하소연을 한다. 물론 루이 15세도 처음에는 느긋하게 "뭐... 보아하니 예쁜 손자며느리더군. 처음에 그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제 고집을 꺾을테니 크게 신경쓰지 마라."라며 달랬다. 그러나 뒤 바리 부인의 연이은 하소연에 점점 질려가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애첩을 계속 무시하는 손자며느리를 안좋게 보게 된다.

하지만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전히 바리 부인에게 말조차 걸지 않는 것도 모자라 아예 고모들과 한패로 비웃고 조롱하는 바람에 갈등을 극대화[19]시키는 바람에, 결국 화가 폭발한 루이 15세는 아예 '바리 부인을 무시하는 것은 곧 짐을 무시하는 것이다! 왕세자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그만 바리 부인에게 인사해라. 그렇지 않으면 오스트리아가 짐을 무시하고 능멸하는 것으로 여겨 전쟁을 벌이겠다!'라는 최후 통첩을 날린다.

이에 주변 신하들은 당연히 "오스트리아와 26년만에 또 전쟁이란 말이냐!"라며 기겁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도 프랑스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20],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신하의 이름을 통한 칙령을 찔러넣어 당장 바리 부인에게 인사하고 그녀와 화해할 것을 요구한다.[21]

이렇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대립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만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평화협정을 무너뜨릴 것이냐라는 메르시 백작의 충언으로 결국 마리도 뜻을 꺾고 바리 부인에게 먼저 말을 걸며 인사를 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못본 루이 15세의 딸들이 나서서 인사하기 직전의 마리를 잡아채 끌고가는 바람에 불발 되어 버리나 마리의 본의에 의해 바리에게 인사 걸기가 불발된 게 아닌지라, 루이 15세도 그냥저냥 넘어 갔다. 이후 새해에 귀부인들이 황태자비 앞에서 인사를 올릴 때 마리는 분함과 굴욕감 등을 꾹 참고, 그 유명한 "오늘은 베르사유에 사람이 많군요"라고 바리 부인에게 인사를 건냄으로써 바리 부인은 그토록 고대하던 마리의 인사를 결국 받아내는데 성공한다[22]

그러다가 루이 15세천연두에 걸려 죽기 일보 직전에 이르자[23], 바리 부인은 오스칼에게 앙투와네트와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고 얘기를 잘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둘의 갈등을 처음부터 모두 지켜본 오스칼에게는 씨알도 안먹힐 소리였고,[24] 당연히 거절하자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물론 오스칼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칼에 스스로를 들이대자 당황한 바리 부인이 칼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설령 이때 오스칼이 부탁을 받아줬다고 쳐도, 바리 부인이 원하는 대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치하의 궁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25]

결국 원작 만화에서 천연두로 죽어가던 루이 15세는 끝내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어, 대주교를 불러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려고 한다. 이에 성사를 집전하러 온 대주교는 루이 15세에게 "그동안 주님을 모독하고 사치로 프랑스와 왕실을 망신시킨 바리 부인을 추방하십시오"라고 요구했다. 결국 천하의 루이 15세도 찍소리도 못하고 바리 부인을 추방시킨다. 다만 루이 15세는 바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애니메이션에서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희미하게 "뒤바리....." 라고 말하며, 궁궐에서 추방당해 슬프게 루이 15세를 부르는 바리 부인의 목소리에 안타까워하는 묘사를 추가했다.

결국 루이 15세는 죽고 바리 부인은 비참하게 궁에서 쫓겨나지만, 오스칼이 그녀를 안전히 호위해주며 떠나는 길을 배웅해준다. 여기서 바리 부인은 오스칼에게 자신의 비루했던 과거를 얘기해주며[26], "그래도 할거 다 해보고 살았기에 후회는 없다"라는 심경을 밝히고 작중에서 퇴장한다.[27] 그리고 오스칼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헤어지기 직전에 "이렇게 온화한 기분이 든 건 5살 때 부모를 잃은 후 처음이네요"라면서, 오스칼에게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군요"라고 중얼거린다.[28]

그리고 나레이션을 통해 실제 역사대로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음을 알려준다.[29]

참고로 라이벌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의도치 않게 시간차로 엿먹인다.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주려고 제작을 주문했다가 구매가 불발되었기에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 바로 그것.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사건의 핵심인물이자 작정하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엿먹였던 라모트 백작부인의 본명도 이여서 맨 앞 이름이 둘이서 동일하다.

3.2. 그밖에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도 나온다. 배우는 아시아 아르젠토. 밤에 루이 15세와 침대 위에서 하는 고양이 놀이 장면이 깨알같다.

만화 이노센트에서는 마리 잔느 베큐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오토메 게임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에서는 조연 인물로 나온다. 베르사유의 장미에서처럼 악녀로 나오지만, 장르 특성상 비중은 없다.

유명한 고전영화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가 1919년에 만든 무성영화 <뒤바리 부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여러 창작이 곁들여진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실존 인물의 발자취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며 비극적인 결말도 동일하게 재연되었다. 루비치의 출세작이기도 해서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고 미국으로 넘어갔다.

2023년 뒤바리 부인을 소재로 한 <잔 뒤 바리> 라는 제목의 프랑스 영화가 나왔으며, 해당 영화는 제76회 칸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프랑스의 여배우 마이웬이 이 영화의 감독 겸 주인공 뒤바리 부인을 맡았고, 조니 뎁루이 15세를 연기하였다.

경국의 재봉사 로즈 베르탱에서는 첫 등장때 애첩이 되기 전 잔 뵈퀴로 나오며 이후 애첩이 되고 주인공인 배드탱을 도와주는 조역이자 친구로 비중 있게 나온다. 사치를 일삼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대립하는 악녀로 묘사된 베르사유의 장미를 포함한 대다수의 창작물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을 남 몰래 돕고, 루이 15세는 물론 시종 자모르과 수녀들에게도 다정하게 대하는 따뜻하고 소탈한 성격인 실제 뒤 바리 부인의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

다만 실제 역사처럼 마냥 순수한 성격이 아닌 자신을 비아냥 거리는 베르사유 내 귀족들의 도발에도 재치있게 넘어가고,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인사 싸움에서도 베르탱의 도움을 받아 마리 앙투아네트를 존중하는 드레스를 입고 정중하게 인사하여 마리의 진심어린 말을 이끌어내는 뛰어난 처세술을 보이는 영리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4. 기타

서양에서는 모두 바리 부인의 이름을 잔 베퀴(Jeanne Bécu)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왜인지 한국에서는 한국어 위키백과를 필두로 바리 부인의 이름을 잔 앙투아네트 베퀴(Jeanne Antoinette Bécu)라고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퐁파두르 부인과 혼동한 게 아닌가 의문인 부분.[30]


[1] 너무 사치스러운 물건이어서,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도 그 목걸이를 사지 않았다.[2]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루이 14세 등의 경우[3] 그래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자식들 중 하나는 왕의 아이가 아닌 페르젠의 아이가 아닌가?!"라는 루머가 있었다.[4] 정작 퐁파두르 부인의 전임자였던 마이넬 자매들(…)이나 선왕 루이 14세의 마지막 로얄 미스트리스인 맹트농 부인 같은 경우 당대의 평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5] 반면 애첩이 없었던 루이 16세의 시대에는, 200년간 치고 받고 싸우던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약점이 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대상이 되어 수많은 외설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6]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4녀로 루이 왕세자의 아내이자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어머니다.[7]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기도 했다.[8] 다만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오는 것처럼, 마리 앙투아네트가 바리 부인에게 억지로 말을 건 뒤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달려가 우는 장면은 어디까지나 창작이다. 1938년에 제작된 노마 쉬어러(Norma Shearer) 주연의 헐리우드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역사와는 달리 바리 부인이 먼저 말을 걸고 서로 안부인사를 묻지만, 그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신과 두 번 다시 상종할 일 없을 겁니다"라고 못을 박는다.[9] 이에 가장 가까운 사건은 루이 15세 못지않게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프랑수아 1세 사망 이후, 그의 애첩 에탕프 공작부인과 사이가 나빴던 아들 앙리 2세가 그녀를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한 사건인데, 당연하지만 아버지의 애첩이라는 이유로 고발할 수는 없어서 그녀의 법적 남편이 이단이라는 혐의로 고발하는 방식으로 투옥했지만, 결국 얼마 안 가 풀어줬으며 그녀는 이후에도 부유한 삶을 영위했다. 또 앙리 2세의 애첩 디안 드 푸아티에도 재산과 성을 몰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완전몰수는 아니고 다른 성으로 교환하는 수준에서 끝났다.[10] 베르사유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파리에서 좀 떨어진 외곽이다.[11]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위에 나왔듯 마리에게 함부로 덤빌 정도의 사람이 정치적 음모를 꾸밀만한 정치적 능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시도를 하더라도 정치적 능력이 떨어져서 금방 들통나거나 했을 것이고...[12] 왕대비도 아닌 바리 부인이 현역 애첩이 아니게 된 이상, 베르사유 궁전에서 나가는 것은 보복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13] 처형 당시 뒤바리 부인은 50세였는데, 21세기 현재는 중년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노인으로 취급받는 나이였다.[14] 혹은 "난 할 말이 있소. 잠시만 시간을 주시오!"[15] 당시 프랑스에서 사형수들이 묻히는 묘지였다.[16] 초반 보스로써의 강렬하고 화려한 존재감이나 캐릭터성이 뚜렷한 것과는 별개로, 고증이 매우 철저한 이 만화에서 몇 안되게 고증오류가 매우 심각한 실존인물이다. 만화에선 온갖 음모를 꾸미는 진성 악녀로 나오지만 실제 성격은 그와 거리가 먼, 오히려 선량하며 정치권력에도 관심 없고 자선활동에도 힘쓴 선한 사람이었다.[17] 이때 바리 부인을 본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경이 쓰여서 오스칼에게 "저 여자는 누구냐?"고 묻자, 오스칼은 "왕세자비께서 크게 신경쓰실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스칼은 정치판에 별 관심도 없었고 무엇보다 일단 공식적인 왕실 내 서열은 왕세자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바리 부인보다는 확연히 높으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18] 한편 애니에선 오를레앙 공작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바리 부인의 신경전을 이용해 루이 15세의 후계자인 루이 16세를 처리하고, 자신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바리 부인과 손을 잡았던 적도 있었다.물론 이들의 관계는 오월동주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실패했다.[19] 전술했듯이 뒤바리 부인은 그냥 애첩이 아닌 왕의 공식 애첩인 메트레상티트르(maîteesse-en-titre)이다. 즉 공식 애첩을 무시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국왕을 무시하는 언행으로 비춰질 수 있고 실제로 루이 15세마저 점점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다는 걸 여러번 암시했다. 여러모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력과 처세술이 미숙하다는 게 드러나는 부분이다.[20] 두 나라간의 전쟁이 벌어지면 단순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만 싸우는 게 아니라, 주변 나라들도 당연히 참전하여 국제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어느 나라가 이기든 피로스의 승리가 될 게 뻔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이미 과거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적군으로 싸우다가 7년 전쟁 때 아군으로 만났지만, 양국 모두가 두 전쟁에서 큰 피해를 겪었고 특히 프랑스는 상처뿐인 승리만 얻었던 전적이 있다. 행여나 다른 나라들이 참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중 하나는 파멸하거나, 둘 다 피해가 클 뿐이니 러시아 제국이나 프로이센 같은 이웃 강대국들만 좋아할 일이다.[21] 바리의 '인사 받아내기'와 마리의 '바리 씹어대기'가 반복되면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평화가 흔들리는 상황으로까지 흘러갔으니 실로 엄청난 나비효과이다. 실제로 메르시 백작은 "여자들의 신경전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싸울 지경까지 갔다니, 이게 뭔 일이냐"고 경악한다.[22] 이때 바리 부인도 그간의 짜증과 분함이 풀려 엄청 호쾌하게 웃어제끼고 마리는 왕세자비이자 오스트리아의 황녀인 자신이 애첩에게 졌다는 분함에 자리를 박치고 나간다.[23]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만큼은 서로 견제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루이 15세의 세 딸들과 일심동체해서 루이 15세가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만 바리 부인과 루이 15세의 딸들이 루이 15세를 진심으로 생각하기보단, 그가 죽으면 자신들의 취급이 영 좋지 않게 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24] 특히 뒤바리는 오스칼의 어머니에게 독살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다가 오스칼을 분노케했다. 그래놓고 저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뻔뻔스러운 짓이었다.[25] 애초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바리 부인의 출신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제대로 대화를 하기도 전에 선입견부터 가지고 먼저 거절했으며, 억지로 바리 부인에게 말을 건넨 이후에도 '두 번 다시 저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엄청나게 억울해할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물론 초기엔 루이 15세의 세 딸들이 부추긴 탓도 있지만, 이후엔 그런 것도 상관 없이 그냥 자기가 싫다고 할 정도. 실제 역사에서도 바리 부인은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야심도 없었고 무난한 성품이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바리 부인의 출신을 문제삼으며 그녀와의 친교를 무조건 거절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게다가 바리 부인과 손을 잡는가 싶었던 오를레앙 공마저 바리 부인의 뒷배인 루이 15세가 다 죽어가며 권좌가 위태로워지자, 바리 부인이 자기 저택 앞에 찾아와 애걸복걸해도 '죽어가는 왕의 정부가 무슨 힘이 있다고' 라고 말하면서 바로 손절태세를 취했다.[26] 유치원생 무렵에 부모를 잃고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서 빵같은 먹을 것을 닥치는대로 모으다가, 그것이 루이 15세의 정부가 된 뒤 보석이며 드레스를 닥치는 대로 모으는 습관으로 이어졌다고. 이를 밝히면서 오스칼에게 "당신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한 적이 없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동안 보여왔던 화려한 모습과는 완전 딴판인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 여러모로 평민과 귀족의 빈부격차가 극대화되었던 앙시앵 레짐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27] 그리고 "나는 뒤끝이 길지 않은 사람이라서, 지난 일은 금방 잊어버려요"라고 한 걸 보면,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기싸움에 대한 미련은 내던진 듯하다.[28] 확실히 자신과 철저히 대립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상전으로 모시며, 충성했던 오스칼이 자신을 안전히 호위해주며 배웅까지 해줬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 했다.[29] 바리 부인은 퇴장하면서 자신이 지금은 철 지난 해바라기 신세지만 언젠가는 다시 화려하게 부활할 걸 호언장담했는데 끝내 그녀의 결말은 처형이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까지 고려해보면 그녀는 과거 그녀의 노예였던 자코뱅파의 누명 섞인 밀고로 처형당하는 셈이 된다. 게다가 루이 16세가 즉위할 당시 백성들이 ''전 국왕은 우리들의 세금을 모두 바리 부인에게 갖다 받쳤다."라는 말하는 걸로 보아, 라이벌인 마리 앙투아네트 못지않게 백성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의 바리 부인은 사치가 심하다고 명확히 묘사되었고, 실제 역사에서도 바리 부인은 선량한 성품이었을지언정 드레스와 보석 같은 사치품을 굉장히 좋아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에선 국왕의 애첩을 욕하는 게 거의 국민 스포츠였을 정도로 당연시 되었으니 악명이 높은 것도 당연하다.[30] 퐁파두르 부인의 이름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 Antoinette Poiss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