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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발루아 왕조 제5대 국왕 샤를 7세 Charles V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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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푸케(Jean Fouquet)가 1450년에 남긴 초상화[1] | |||
출생 | 1403년 2월 22일 |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461년 7월 22일 (향년 58세) | ||
프랑스 왕국 므욍쉬르예브르 | |||
재위기간 | 프랑스 국왕 | ||
1422년 10월 21일 ~ 1461년 7월 22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 발루아 가문 | |
이름 | 샤를 드 프랑스 (Charles de France) | ||
배우자 | 앙주의 마리 (1422년 결혼) | ||
자녀 | 루이 11세, 라드공드, 카트린, 욜랑드[2], 잔, 마들렌, 샤를, 마리(사생아), 샤를로트(사생아), 잔(사생아) | ||
아버지 | 샤를 6세 | ||
어머니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 ||
형제 | 이자벨, 잔, 샤를, 마리, 미셸, 루이, 장, 카트린 | ||
종교 | 가톨릭 | }}}}}}}}} |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5대 왕으로 샤를 6세와 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사이에서 태어났다.프랑스의 멸망 위기까지 몰리던 백년전쟁을 결국 승리로 종결시켰으며, 귀족들이 강세를 보이던 중세시대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중앙집권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승리왕(le Victorieux)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백성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과 귀족들간의 갈등은 상당했고, 자신의 목적과 이익 달성을 위해서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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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가족
3.1. 왕비
3.2. 정부
- 앙투아네트 드 마젤레(1434 ~ 1474): 아녜스 소렐의 사촌. 1450년 아녜스 소렐이 급사한 후 16세의 나이에 왕실 침실 관리인을 맡던 빌르키에 남작 앙드레와 결혼했지만 실제로는 사촌의 뒤를 이어 샤를 7세의 정부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앙투아네트는 부르고뉴에 망명 중이던 도팽 루이에게 샤를 7세에 대한 정보를 은밀히 보냈다고 한다.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정부가 되었다. 도팽 시절 앙투아네트의 도움을 받았던 루이 11세는 이번에도 그녀가 프랑수아 2세의 정보를 자신에게 넘기길 바랐고 앙투아네트도 초반에는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하지만 나중에는 프랑수아 2세에게 진심으로 빠져들어, 프랑스에 대항하는 브르타뉴군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보석을 팔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이 11세는 프랑스에 있는 앙투아네트 드 마젤레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3.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앙주의 마리 (Marie of Anjou) | ||||
1남 | 루이 11세 (Louis XI) | 1423년 7월 3일 | 1483년 8월 30일 | 스코틀랜드의 마거릿[3] |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슬하 6남 3녀[4] | ||||
1녀 | 발루아의 라드공드 (Radegonde of Valois) | 1425년 혹은 1428년 8월 | 1445년 3월 19일 | |
2녀 | 샤를루아 백작부인 카트린 (Catherine, Countess of Charolais) | 1428년 | 1446년 7월 13일 | 용담공 샤를 |
2남 | 발루아의 자크 (Jacque of Valois) | 1432년 | 1437년 3월 2일 | |
3녀 | 사보이아 공작부인 욜란다 (Yolande, Duchess of Savoy) | 1434년 9월 23일 | 1478년 8월 23일 | 아메데오 9세 슬하 6남 4녀[5] |
4녀 | 부르봉 공작부인 잔 (Jeanne, Duchess of Bourbon) | 1435년 5월 4일 | 1482년 5월 4일 | 장 2세 드 부르봉 |
3남 | 발루아의 필리프 (Philip of Valois) | 1436년 2월 4일 | 1437년 6월 11일 | |
5녀 |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Margaret of Valois) | 1437년 5월 | 1438년 7월 24일 | |
6녀 | 발루아의 잔[6] (Jeanne of Valois) | 1438년 9월 7일 | 1446년 12월 26일 | |
7녀 | 발루아의 마리[7] (Marie of Valois) | 1438년 9월 7일 | 1439년 2월 14일 | |
8녀 | 발루아의 이자벨 (Isabella of Valois) | 1441년 | 1441년 | |
9녀 | 비아나 공비 마들렌 (Madeleine, Princess of Viana) | 1443년 12월 1일 | 1495년 1월 21일 | 비아나 공 가스통 드 푸아[8] 슬하 1남 1녀[9] |
4남 | 베리 공작 샤를[10] (Charles, Duke of Berry) | 1446년 12월 26일 | 1472년 5월 24일 혹은 5월 25일 | |
아녜스 소렐 (Agnès Sorel) | ||||
1녀 | 타이르부르 백작부인 마리 드 코에티비 (Marie de Coétivy, Countess of Taillebourg) | 1444년 | 1473년 | 타이르부르 백작 올리비에 드 코에티비 |
2녀 | 몰레브리에 백작부인 샤를로트 드 브레제[11] (Charlotte de Brézé, Countess of Maulévrier) | 1446년 | 1477년 6월 1일 | 몰레브리에 백작 자크 드 브레제[12] 슬하 1남 |
3녀 | 발루아의 잔 (Jeanne of Valois) | 1438년 9월 7일 | 1439년 2월 14일 |
4. 평가
대다수의 한국 위인전에는 대개 운좋게 잔 다르크를 얻어 위기에서 벗어나자, 그녀를 질투해 발목만 잡다가 토사구팽해버린 배은망덕한 왕으로 적혀있지만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잔 다르크 덕만 보지도 않았다. 샤를 7세는 아주 유능한 정치가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하나의 프랑스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사실 잔 다르크의 경우도 필요성이 있을 때까지는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잔과 갈라진 건에 대해서도 최소한 전쟁 수행 측면에선 비판받지 않는다. 잔이 내세운 강경책에 제동을 건게 옳은 선택이었음을 현대 역사가들에게 인정받고 있기 때문.샤를은 딱히 잔 다르크만 배신한 것이 아니라 평생 수많은 신하들을 이용해먹다가 나중에는 토사구팽했으니 정적으로 여겼다고 할 순 있어도 질투하거나 차별했다고 할 순 없다.[13] 잔 다르크와 방향성의 차이는 있었으나 어쨌든 샤를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판을 짰고,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완승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 모든게 잔 다르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잔 다르크의 위업 역시 샤를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백년전쟁의 승리는 샤를과 잔 두 사람이 함께 거둔 업적이지 누구 한 명이 일방적으로 업혀간 게 아니다.
백년전쟁의 승리로 얻은 권위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이고 조세를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을 펴서 프랑스의 봉건시대를 사실상 끝내게 만들고 근대로 나아가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계산적인 행보로 부하들을 이용하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나중에는 매몰차게 버렸기에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끊이지 않아서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평가는 낮다.[14]
외침으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으나 신하들의 분전으로 극복해냈고, 그 신하들을 견제했다는 점, 유능한 정치가지만 지독하게 의심이 많아 아무도 믿지 않으며 신하들을 토사구팽했다는 점, 후계자인 왕세자와 관계가 좋지못해 항상 견제하며 갈등했다는 점, 조국의 국민으로부터 널리 사랑받는 구국 영웅을 후원하면서도 견제하다가 끝내 배신하고 토사구팽하는 관계로 파국에 치달은 점, 구국 영웅을 필요할 때에는 거침없이 이용하면서도 억압한 점 때문에 국민적 인기와 호감도가 현저히 낮은 점에서 1세기 후 지구 반대편에 태어날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와 자주 비교되는 군주.
잔 다르크가 유명해서 샤를 7세는 그냥 무능한 왕, 배은망덕한 왕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인물들이 재평가되고 이것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시대에 들어서면서, 잔 다르크 역시 결점이나 실수를 했음이 알려지고, 동시의 샤를 7세의 업적이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실 이전부터 전문가들은 샤를 7세를 무능한 왕이 아니라 교활하고 날카로운 정치가, 위기를 겪고 패배할 뻔 했지만 운과 기회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써먹은 계산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서 일반인들에게도 퍼진 것. 그는 4대에 걸쳐서 선대 왕들이 해내고자 했지만 실패한 일을 자기 대에 이루어 프랑스를 강하게 만들었고, 로마시대 이후 프랑스 왕 최초로 상비군을 만들어 이를 굳히는 데 성공했으며, 왕권을 강화했다. 즉 샤를 7세는 유럽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 중 하나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능력과 업적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재평가가 이루어졌지만 이것과 별개로 현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샤를 7세 개인의 대중적 인식과 인기, 매력과 호감도는 역대 프랑스 왕들을 통틀어 여전히 매우 나쁘다. 존재 자체만으로 신화 같은 삶과 존재감을 뿜어낸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국 영웅이자 성녀인 잔 다르크를 재판에서 구해주지 않고 단물을 쏙쏙 빼버리고 버리면서 그대로 방치한 모습은 어떤 사연이 있든지 간에 토사구팽 그 자체라서 개인의 인상 자체는 비호감에 머무르고 있다. 생전에 그려진 프로필 상단의 초상화와 어진도 객관적으로 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교활하고 얍삽해 보이는 못생긴 비주얼도 샤를 7세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데에 적지 않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누구 하나 구해주는 이 없이 잔혹하게 화형당해 잿더미로 사라진 잔 다르크의 최후와 희생이 철저히 이득을 거머쥐며 계산적으로 다른 이들을 가지고 노는 어두운 면과 재능 있는 신하에 대한 인정사정없고 냉혹한 모습을 한층 더 부각시켰기 때문에 그의 뒤늦은 사후 명예회복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를 대한민국의 이순신과 맞먹는 위대한 성웅으로 추앙하는 프랑스 내에서 가장 미움 받고 인기 없는 왕으로 꼽히고 있다.[15]
5. 기타
샤를 7세의 치세는 조선의 세종 ~ 세조의 재위기간과 겹친다.생전 영조처럼 선왕의 소생이 아니라는 루머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버지 샤를 6세의 초상화만 봐도 샤를 7세와 붕어빵처럼 닮아서(창백한 피부와 길쭉한 코) 어디까지나 반대파의 악선전일뿐이다.
프랑스 국왕 중 처음으로 공식적인 정부를 두었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었던 서양에서는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삼아 첩이나 후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왕이 왕비 이외에 다른 여성을 애인으로 두기는 했지만 원론적으로 그런 행위는 부정한 불륜이자 죄악으로 여겨져 터부시됐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라 해도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애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아녜스 소렐이란 여성을 애인으로 삼고 궁에 두어 보란 듯이 총애를 퍼부었으며, 소렐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얻었다.[16]
6. 대중 매체
냉혹하지만 유능한 정치가였고 인간적으로도 복잡한 인물이었음에도 대중 매체에선 잔 다르크를 일방적으로 배신한 것때문에 소인배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일본 라이트노벨 및 애니메이션인 율리시스: 잔 다르크와 연금의 기사에서 샤를로트란 캐릭터로 TS당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잔 다르크 캠페인에선 프랑스의 왕세자의 칭호였던 도팽으로 언급된다. 이후 중반후에 잔느가 랑스를 점령하면서 대관식을 올려 왕위에 즉위한다. 이후 파리 공성전에서 지원 병력을 보내준다면서 시민군과 정찰기병 달랑 1명만 보내는 짓을 한다. 이후 결정판 DLC로 추가된 부르고뉴쪽 캠페인에서 부르고뉴에게 붙잡힌 잔을 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의 백년 전쟁 캠페인에선 역시 잔 다르크가 붙잡혔을 때 돕지 않는다. 잔 다르크가 죽은 후 20년간 프랑스군을 개혁하여 새로운 정예부대와 대포를 이용해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백년 전쟁을 끝낸다.
Fate/Apocrypha에선 룰러로 참전한 잔 다르크가 셰익스피어의 보구인 '퍼스트 폴리오'를 통해 재현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카리스마 능력에 대해 "너는 허무맹랑한 계시를 믿게 할 수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그러지 않았냐. 날 설득할 수 있었는데 안 했으니 네가 날 배신한 거다" 라고 적반하장으로 개소리를 하는 배은망덕하고 찌질한 개쓰레기로 묘사된다(...).[17] 그리고 Fate/Grand Order에서는 당연하게도 업보를 받아서 1장에서 잔 다르크 얼터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특이점으로 변하기 전의 세계에서 죄를 쌓기 전의 유령 상태로 지내다 칼데아의 서번트가 된 잔느 얼터가 자신의 막간에서 이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청산하고 이들이 죄를 쌓아 악령이 되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샤를 7세들을 포함한 유령들을 퇴치한다.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 The Legend of Jeanne d'Arc에서도 등장. 원 역사처럼 주인공 잔 다르크(타루토)의 조력자였다가 배신하는 건 같지만, 막장 어머니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 때문에 그랬기에 참작의 여지가 있으며 이후 자신의 잘못과 실정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타루토를 복권시킨다. 이자보의 기질을 물려받은 악인들인 그의 자매들에 비하면 인간성과 양심은 있다. 오히려 실제 역사보다 더욱 인간미 있게 그려진 편.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에서도 자매인 라핀의 마법소녀 스토리에서 라핀이 직접 "피가 이어진 형제" 라며 샤를 7세의 존재를 언급한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시작 시점 1444년에 능력치 4/2/4의 평범한 왕으로 등장.
대체역사소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는 부르고뉴에 가담한 주인공과 잔 다르크에 의해 오를레앙이 함락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플레잉 카드 속 K♡의 모티브로 알려져있다.
7. 둘러보기
프랑스 도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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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를 7세부터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비공식적으로 그린 상상화나, 후대의 상상화나, 조각상 또는 인장 등이 전부였다.[2]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9세와 결혼.[3]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딸.[4] 프랑스의 왕비 잔, 샤를 8세 등[5] 필리베르토 1세, 카를로 1세 등[6] 바로 아래의 마리와 쌍둥이.[7] 바로 위의 잔과 쌍둥이.[8]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와 레오노르 1세의 아들.[9]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 카탈리나 1세[10] 베리 공작, 노르망디 공작에 봉해졌다. 루이 11세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한 뒤 형과 화해하고 기옌 공작이 되었다.[11] 1477년 6월 1일 루브르 성에서 사냥꾼인 피에르 드 라베르뉴와 간통하다가 남편 자크 드 브레제에게 살해되었다. 자크는 샤를로트를 살해한 뒤 파리 의회에 소환되어 100,000리브르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뒤 1477년부터 1481년까지 투옥되었고 영지는 몰수되어 장남 루이 드 브레제에게 넘어갔다. 본래라면 왕의 이복 여동생을 살해한 것이니 처형되어야 했지만 루이 11세가 아녜스 소렐과 그녀 소생의 이복동생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였기에 이 정도로 감형되었다. 루이 11세 사후 유죄 판결이 억울하다며 항소했고, 1486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사면되었다.[12] 피에르 드 브레제의 외아들.[13] 그리고 샤를 7세는 25년이 지난 후이긴 했지만 어쨌든 잔 다르크를 복권시켜 줬다. 다른 토사구팽한 신하들과는 차별 대우를 해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14] 그리고 이 때문에 샤를이 말년에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및 복권을 꾀하려한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리고 알려져봤자 오로지 정치적인 목적의 복권이었다고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리고 샤를 7세의 인생을 봤을 때 아마 그게 맞을 가능성이 크다.[15]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는 9대조인 필리프 2세와 나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인간적인 매력으로는 필리프 2세쪽이 평가가 더 좋다.[16] 이렇게 프랑스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왕의 정부를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라고 한다. 국왕이 수많은 정부를 거느리고 있어도 메트레상티트르의 지위는 단 한 명의 정부만이 가질 수 있었다.[17] 여담으로 셰익스피어는 실제로 헨리 6세 1부에서 잔다르크를 마녀로 묘사한 실제 전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