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9:32:15

샤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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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 왕조 제3대 국왕
샤를 5세
Charles V
파일:Saint-Èvre_-_Charles_V_of_France.jpg
출생 1338년 1월 21일
프랑스 왕국 뱅센
사망 1380년 9월 16일 (향년 42세)
프랑스 왕국 보테쉬르마르느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364년 4월 8일 ~ 1380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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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발루아 가문
이름 샤를 드 프랑스
(Charles de France)
아버지 장 2세
어머니 보헤미아의 보나
형제자매 루이 1세, , 필리프 2세, 잔, 마리, 이자벨
배우자 부르봉의 잔 (1350년 결혼 / 1378년 사망)
자녀 샤를 6세, 루이 1세, 카트린
종교 가톨릭
별칭 현명왕 (le Sage)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아버지와의 갈등2.3. 카를로스 2세 체포 사건2.4. 프랑스의 섭정
2.4.1. 에티엔 마르셀의 득세2.4.2. 카를로스 2세의 도전2.4.3. 에티엔 마르셀의 난2.4.4. 샤를의 반격과 자크리의 난2.4.5. 에티엔 마르셀의 몰락2.4.6. 에드워드 3세의 침공과 브레티니 조약
2.5. 노르망디 공작2.6. 잉글랜드의 포로로 돌아간 아버지2.7. 코르슈렐 전투2.8. 프랑스 국왕
2.8.1. 카를로스 2세와의 화해2.8.2.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의 종결2.8.3. 카스티야 내전 개입2.8.4. 군사 개혁2.8.5. 외교 정책2.8.6. 프랑스의 재정복을 이끌다
2.8.6.1. 전쟁의 발발2.8.6.2. 프랑스군의 파상 공세2.8.6.3. 퐁발랭 전투2.8.6.4. 라 로셸 해전2.8.6.5. 브르타뉴 정복2.8.6.6. 곤트의 존의 슈보시2.8.6.7. 브뤼헤 휴전2.8.6.8. 해상 및 육상 공세
2.8.7. 내치
2.8.7.1. 경제 회복2.8.7.2. 정부 개편2.8.7.3. '현명한 왕'2.8.7.4. 건축과 문학
2.8.8. 말년
2.8.8.1. 카를 4세의 방문2.8.8.2. 카를로스 2세의 몰락2.8.8.3. 브르타뉴의 상실2.8.8.4. 서방교회 대분열2.8.8.5. 최후
3. 가족4. 평가5. 현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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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3대 국왕이다. 필리프 6세장 2세 치세에 잉글랜드 왕국의 침략으로 방대한 영토를 빼앗기고 쇠락한 프랑스의 부활을 이끈 명군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338년 1월 21일, 프랑스 왕국 뱅센에서 프랑스 왕위 후계자이자 노르망디 공작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이며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될 카렐 왕자의 누이인 보헤미아의 보나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1] 어린 시절 궁정에서 자란 그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아버지 필리프 6세와 할머니 나바라의 블랑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장 왕자는 자식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아들들에게 보낸 서신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훗날 그가 푸아티에 전투 후 잉글랜드로 끌려갔을 때도 사냥개와 매 사냥에 관한 컬렉션을 편집하는 데 관심을 보일 뿐 아들들에게 안부를 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선량한 성격이었던 어머니 보나가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시인 기욤 드 마쇼에 따르면 보나 왕비는 자녀 양육이 자신의 삶의 소명이라고 여기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는 궁정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친하게 지내면서 라틴어문법을 가르쳤던 실베스트르 드 라 세르벨 등 프랑스의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고급 교육을 받았다. 1349년 7월 16일, 비에누아의 도팽이었던 움베르 2세 드라투르뒤팽이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데다 외아들이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프랑스 왕국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 영토였던 도피네를 양도했다. 이때 체결된 로망스 조약에 따르면, 도피네는 미래에 프랑스 국왕이 될 장 왕자의 아들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따라서 도팽이 될 인물은 장 왕자의 장남인 샤를 왕자였다. 그는 이때부터 '샤를 도팽'으로 일컬어졌으며, 도팽은 프랑스 왕세자의 칭호가 되었다.

샤를은 12살 때인 1349년 12월 10일 도피네의 수도인 그르노블에 도착한 뒤 1350년 3월까지 그곳에서 머무르며 처음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경험을 했다. 그가 도착한 지 며칠 후, 그르노블 주민들은 무대가 설치된 노트르담 광장으로 초대되었다. 샤를은 장 드 시세 주교 옆에 앉아서 주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그는 그 대가로 도시의 자치 헌장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고, 움베르 2세가 퇴위하기 전에 공포한 법령에 따라 그들의 특권을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사면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두 가신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침착하게 중재하는 모습을 보여 사람들의 호의를 얻었다.

1350년 4월 8일, 샤를 왕자는 탱 에르미타주에서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누이인 발루아의 이자벨의 딸인 부르봉의 잔과 결혼했다. 결혼은 어머니 보헤미아의 보나와 할머니 보르고뉴의 잔이 1349년에 중세 흑사병에 걸려 잇따라 사망하면서 미뤄졌다가 이때 거행되었다. 샤를 본인도 1349년 8월부터 12월까지 중병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신체가 허약해져 사망할 때까지 온갖 잔병에 시달렸다. 당시 유럽 전역에 퍼지고 있던 흑사병의 확산을 늦추기 위해 모임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비밀리에 소규모로 이뤄졌다.

2.2. 아버지와의 갈등

1350년 8월 22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사망했다. 이후 샤를은 파리로 소환되었고, 1350년 9월 26일 랭스에서 열린 아버지 장 2세대관식에 참석한 뒤 별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부자 관계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외교 정책을 놓고 악화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프랑스가 부르고뉴, 도피네 등지를 통제해 제국 서부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것을 염려해 장 2세에게 부르고뉴의 영역 관리에 대해 재협상하자고 요청했다. 그는 장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에 공동으로 맞설 의향이 있다면서, 그 대가로 부르고뉴의 어린 공작 필리프 1세가 가지고 있으며 장 2세의 섭정을 받고 있는 제국의 영토(부르고뉴 백국)를 자신이 통치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도피네에 대한 주권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장 2세는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고유한 영토라면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도피네를 다스리던 샤를 도팽은 아버지가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에 인접한 자신의 영지가 위협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랑의 주교이며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있던 로베르 르콕이 장 2세가 그를 도피네에서 배제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 주장하자, 샤를 왕자는 가족에게 살갑게 군 적이 없던 아버지라면 분명 그럴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는 나바라 파벌의 도움을 받아 자신만의 조직을 세웠고, 카를 4세를 찾아가서 경의를 표해 제국군이 도피네를 침공할 위험을 없애려 했다.

나중에 아들의 계획을 눈치챈 장 2세는 아들을 안심시키기로 했다. 1355년 1월, 장 2세는 샤를 도팽에게 노르망디 방어 조직을 개편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금을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샤를 도팽은 지시에 따라 루앙에서 영주들을 초대한 뒤 세금을 거두는 데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노르만 귀족의 지도자였던 조프루아 다르쿠르는 노르만인에 대한 헌장을 샤를 도팽에게 제시하고 이렇게 외쳤다.
"주군이시여, 여기 노르만인에 대한 헌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서명하시면,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샤를 도팽이 서명을 거절하자, 그는 생소뵈르 자작으로서 샤를 왕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 떠났다. 그럼에도 샤를 도팽은 그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했고, 나중에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355년 12월 7일, 장 2세는 샤를 도팽을 정식으로 노르망디 공작에 세우고 노르망디를 영지로 줬다. 그는 아들이 노르망디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카를로스 2세를 견제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샤를 도팽은 아버지의 의도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카를로스 2세 및 나바라파 인사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그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1356년 2월, 장 2세는 르 보드뢰유에서 노르만 귀족들을 소집한 뒤 잉글랜드와의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와 장 5세 다르쿠르 등 노르망디 영주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와 장 5세 다르쿠르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또한 장남 샤를과도 친분을 다지는 것을 보고, 저들이 장차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샤를을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박탈하려 들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결국 장 2세는 그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2.3. 카를로스 2세 체포 사건

파일:John_the_Good_king_of_Fra_ordering_the_arrest_of_Charles_the_Bad_king_of_Navarre.jpg

1356년 4월 5일, 샤를 도팽이 노르망디 영주들을 루앙에 초대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카를로스 2세와 장 5세 다르쿠르 역시 이 연회에 참석해 샤를 왕자의 옆에 앉았다. 연회가 한창일 때, 장 2세가 투구를 쓰고 손에 검을 쥔 채 나타나 외쳤다.
"이 검에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그 직후, 장 2세의 동생 필리프 도를레앙과 차남 루이 1세를 비롯한 국왕을 따르는 인사들과 무사들이 연회장에 난입해 카를로스 2세와 그를 추종하던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이때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의 멱살을 잡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며 외쳤다.
"이 배신자! 너는 내 아들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

카를로스 2세의 종자 콜린 더블레(Colin Doublet)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왕실 근위대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샤를 도팽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장 2세는 묵살하고 카를로스 2세와 장 5세 다르쿠르를 비롯한 세 명의 귀족, 그리고 콜린 더블레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날 저녁, 아르쿠르 백작과 다른 세 명의 사형수는 루앙 인근의 샹 뒤 파르동으로 끌려간 뒤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몸통은 루앙의 교수대에 내걸렸다. 카를로스 2세는 파리의 대샤틀레 요새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아를뢰 성으로 이송되었다.

카를로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에브뢰 가문과 노르망디 귀족들은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필리프 드 나바르의 주도하에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장 2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노르망디로 출진했고, 샤를 도팽은 아버지의 원정에 동행했다. 그러다가 1356년 8월 아키텐에서 프랑스 중부로 북상하며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고 있는 흑태자 에드워드를 물리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장 2세는 중무장한 기병대를 이끌고 에드워드를 맹추격했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보르도로 퇴각하려 했지만, 푸아티에 인근에서 프랑스 기병대에 거의 따라잡혔다. 그는 이대로 진군했다간 진군 도중에 프랑스 기병대의 급습을 받고 전군이 궤멸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푸아티에 인근의 모페르튀스 언덕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샤를 도팽은 2번째 부대를 이끌었다. 선봉에 선 프랑스 기병 300명이 좁은 길을 통과하여 영국군 진지를 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들에게 궤멸된 뒤, 맨앳암즈와 독일 용병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전신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언덕을 오르느라 지칠대로 지쳤고, 말을 탄 궁수들과 이들을 보호하는 맨앳암즈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언덕을 돌아 내려와서 프랑스군 측면에 자리를 잡고 화살을 퍼부었다. 프랑스군 제2 부대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인근에 뒀던 말을 타고 언덕 아래로 돌격했다. 샤를 도팽은 휘하 부대가 적 기병대의 돌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와해되자 파리로 도주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완패했고, 장 2세는 막내아들 필리프와 함께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2.4. 프랑스의 섭정

2.4.1. 에티엔 마르셀의 득세

샤를 도팽은 파리에 도착한 뒤 잉글랜드군에 붙잡힌 아버지를 대신해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와 휴전 협상을 벌이는 한편, 용병대를 해산해 군비를 절감하려 했다. 그러나 동원 해제된 용병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결성해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샤를 도팽은 용병대를 토벌하기 위해 30,000명의 영구 군대를 창설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삼부회를 소집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는 이제 겨우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필리프와는 달리 푸아티에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부왕을 버리고 달아난 왕자"라는 불신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1356년 10월 17일에 개최된 삼부회는 패배를 초래한 장 2세의 측근들을 성토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파리 상인의 장관을 맡고 있던 에티엔 마르셀은 랑의 대주교 로베르 르콕과 동맹을 맺었고, 당시 장 2세에 의해 두에의 아를뢰 요새에 수감된 카를로스 2세의 추종자들과 결탁했다. 에티엔을 비롯한 삼부회 인사들은 샤를 도팽에게 통화 가치를 위험한 수준으로 평가절하한 왕실 고문들을 해고하고, 국왕을 돕는 의회를 정기적으로 선출하고 개최하도록 허용하며, 카를로스 2세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샤를 도팽은 현 상황에서 왕권을 다소 통제하는 건 받아들일만 하다고 여겼지만, 카를로스 2세의 석방은 발루아 왕조를 위험에 빠뜨릴 게 분명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제안을 즉시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던 그는 아버지의 의향을 물어봐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응답을 미루다가 삼부회를 해산시켰다.

1356년 12월 10일, 샤를 도팽은 삼부회를 거치지 않고도 금고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통화를 제정한다는 내용의 조례를 반포했다. 이후 그는 형제 루이에게 파리를 맡기고 메츠로 떠났다. 그는 메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접견한 뒤 도피네의 영주로서 카를 4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제국의 지원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파리 상인들은 샤를 도팽가 제정한 조례에 격분했고, 에티엔은 소규모 장인과 직공들을 선동해 시위를 일으키게 했다. 시위대는 파리에 남아있던 루이가 있는 궁정을 에워싸고 칙령을 취소하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루이는 형 샤를에게 결정권이 있으며 자신이 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며 시간을 끌었다. 그 후 파리로 서둘러 돌아온 샤를은 칙령을 취소했다.

1357년 3월, 에티엔은 통제된 군주제와 행정 재편을 위한 광범위한 개혁안인 <1357년 대조례(Grande ordonnance de 1357)>를 작성하고, 샤를 도팽에게 대조례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했다. 샤를 도팽은 그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감독 위원회가 설립되어 잘못을 저지른 공무원, 특히 부도덕한 세금 징수원들을 해고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샤를 도팽의 고문 9명이 해고되었는데, 그중에는 에티엔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던 로베르 드 로리스도 있었다. 여기에 6명의 대표가 왕의 평의회에 참여해 국정을 함께 논의하게 되었으며, 재정, 특히 금전적 변화와 특별 보조금은 위원회에 의해 통제되도록 했다. 이제 프랑스에는 샤를 도팽이 이끄는 섭정 정부와 삼부회의 2개 국가 기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2.4.2. 카를로스 2세의 도전

푸아티에 전투 이후 프랑스 각지는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고, 카를로스의 추종자들은 카를로스를 석방하라고 압박했다. 특히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필리프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힘을 합쳐 노르망디 전역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샤를 도팽은 1357년 11월 9일 카를로스를 아를뢰 성에서 석방시키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아미앵에 잠시 들렀다가 삼부회의 초대를 받아 파리로 갔다. 1357년 11월 30일, 파리에 도착한 카를로스는 민중들에게 자신을 투옥시킨 자들을 규탄하는 연설을 감행했다. 이에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파리 시민들이 "나바라 국왕을 부당하게 대우한 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도팽은 일단 카를로스와 협상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영지에 가해진 모든 피해를 보상할 것, 자신과 추종자들을 사면할 것, 장 2세에 의해 처형된 동료들을 명에롭게 매장할 것 등을 요구했으며, 이와 더불어 노르망디 공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신에게 정식으로 넘기라고 촉구했다. 샤를 도팽은 이를 거부할 수 없었고, 카를로스와 나바라인에 대한 사면령에 서명했다. 이후 샤를 도팽은 급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프랑스 각지를 약탈하는 용병대로부터 파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2,000명의 병사들을 파리에 끌어들였다. 이 군대의 존재로 인해 파리 시민들은 압박감을 느꼈다. 1358년 1월 11일, 샤를 도팽은 레 알 드 파리에서 시민들에게 자신이 군대를 모집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삼부회가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맡게 되었는데도 국가의 방어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358년 1월 14일, 삼부회는 통제된 왕권 문제와 새로운 세금 부과에 대해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이에 여론은 삼부회를 무능하다고 질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357년 대조례의 집행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삼부회가 임명한 세금 징수원들은 가난한 농민과 장인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감독 위원회에 들어간 6명의 대표는 지극히 소수였으며, 도팽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통제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자연히 공무원들은 그들 대신 샤를 도팽을 지지했다. 또한 당시에는 여행길이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했기 때문에, 지방 의원들이 파리로 가는 건 매우 힘들었다. 결국 프랑스 각지에서 뽑은 의원이 삼부회를 구성한다는 기존의 발상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고, 곧 파리의 부르주아들만이 삼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런던에 억류되어 있던 장 2세가 1357년 대조례의 적용을 금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생포되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잉글랜드에 끌려가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그의 지시는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여기에 장 2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평화 협정에 합의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에 카를로스는 평화 협정이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에티엔에게 이대로 대조례가 무산되는 걸 좌시하지 말고 거사를 단행하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장 2세가 합의한 평화 협정에 프랑스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기옌, 생통주, 푸아투, 리무쟁, 쿠에르시, 페리고르, 루에르그 및 비고르가 잉글랜드에 넘어간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확인한 파리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자, 에티엔은 이를 이용해 거사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2.4.3. 에티엔 마르셀의 난

1358년 1월 10일, 카를로스 2세는 루앙 대성당에서 장 2세에게 처형된 추종자 4명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을 거행한 뒤 이들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1월 24일, 샤를 도팽의 재무관인 장 바예가 파리 환전소의 하인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하인은 교회에 피신하던 중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이후 2개의 장례 행렬이 거행되었는데, 하나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렬로 샤를 도팽이 이끌었고, 다른 한쪽에는 살인자의 행렬로 에티엔을 비롯한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이끌었다. 이후 샤를 도팽의 측근들이 곧 숙청을 단행할 거라는 소문이 횡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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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장관 에티엔 마르셀과 샤를 도팽>, 루시앙-에티엔 멜랭, 1879년.

1358년 2월 22일, 에티엔은 마침내 민중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고 파리에 수감된 죄수들을 풀어주고 도팽의 군대에 맞섰다. 이내 3,000명에 달하는 무리가 집결했고, 일전에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간의 합의안을 도출하고 파리에 보고했던 르노 다시(Regnault d'Acy)는 이들에게 체포된 뒤 목이 베어진 후 장대에 꽂혔다. 이후 에티엔은 군중을 이끌고 샤를 도팽이 있던 팔레 드 라 시테 궁전으로 쳐들어가 샤를 도팽을 따르던 장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샤를이 있던 방에 난입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티엔은 샤를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전하, 이제 보시는 일로 인해 놀라지 마십시오. 이 일들은 우리가 정한 것이요, 그 일이 이뤄지는 것은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직후,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샤를 도팽 앞에서 피살당했고, 그들의 피가 샤를 도팽의 옷에 묻었다. 에티엔은 샤를에게 폭도들이 입고 있던 빨간색과 파란색 후드를 착용하라고 강요했고, 자신은 도팽의 모자를 썼다. 그러면서 1357년 대조례를 갱신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도팽은 공포에 질린 채 받아들였다. 그 후 플레이스 드 글레브(Place de Grève) 광장으로 가서 '왕국의 반역자'를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한 군중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방 정부에 서신을 보냈지만, 오직 아미앵과 아라스만이 지지를 표했다.

2.4.4. 샤를의 반격과 자크리의 난

이제 샤를 도팽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에티엔 마르셀이 주도하는 삼부회가 행정과 재정을 주관했다. 여기에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평화 협약은 무효로 간주되었다. 이 새로운 조례를 비준하려면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파리에서 모이기를 거부하고 상리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샤를 도팽은 이들과 회담을 가진 후 파리로 돌아올 테니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에티엔은 10명의 부르주아를 대표단으로 선임하고 그들의 감시를 받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파리에서 나온 샤를 도팽은 4월 9일 프로뱅에서 열린 상파뉴 삼부회에 참석해 그곳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던 10명의 대표단을 구금했다. 이후 샤를을 추종하는 기사단은 몽뜨호와 모 요새를 점거했다.

샤를에게 속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에티엔은 카를로스에게 속히 파리로 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카를로스는 파리로 가려던 중에 병에 걸려 몸져누웠다. 그 사이에 샤를은 프랑스 동부에서 병력을 규합해 반격에 착수했다. 이후 파리 주변의 영토는 카를로스가 파견한 노르망디군과 샤를 왕자가 보낸 선봉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에티엔은 카를로스에게 샤를 왕자와 협상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4월 18일, 에티엔은 샤를 도팽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파리 시 주변의 도랑을 파고 제방을 설치해 포병 사격을 방어하는 공살을 실시했다. 이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화페 가치를 떨어뜨리고 세금을 인상하는 것으로 충당했는데, 이로 인해 에티엔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지지도가 떨어졌다.

1358년 5월, 샤를 도팽은 콩피에뉴에서 세네샬들을 소집했다. 그는 횡령을 저지른 재무관들을 처벌하고, 무역을 보호하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섬유 재료나 제조품에 대한 많은 통행료와 세금을 제거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소금세를 절반으로 줄이고 세무 사무원의 임금과 면제 수를 줄이는 조건으로 새로운 세금을 상설하고 1359년까지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통화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 법령이 공표되자, 크레유 인근의 생뢰데세링 농민들이 가뜩이나 곤궁한 처지에 놓인 자신들에게 또다른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에 격분해 반란을 일으켰다.

기욤 칼레[2]가 이끄는 농민 반란군은 귀족 경호원과 가신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보베 일대를 장악한 뒤 수백 명의 귀족, 가신, 그들의 아내와 가족을 살해했다. 이후 상리스, 클레르몽, 크레유 마을의 반란군과 합류해 총 5,000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는데, 이중엔 지난날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파산해버린 하급 귀족들도 일부 있었다. 에티엔은 이들과 손 잡으면 샤를 도팽에 대적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농민들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고 장 베일런트가 지휘하는 300 가량의 민병대를 파견해 그들과 합세하도록 했다.

1358년 6월 8일 멜루 언덕에 집결한 농민 반란군은 6월 9일 파리 외곽의 모앙브리 요새로 쳐들어갔다. 당시 그곳에는 루이 왕자와 왕실 및 귀족 여인들이 피신해 있었다. 왕자와 왕녀, 귀부인들이 반란군에게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 출신 잉글랜드 장성 장 3세 드 그레일리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는 그들을 돕기로 하고, 40명의 기사와 함께 모앙브리로 질주했다. 그들은 모앙브리를 포위하고 있던 농민 1,000명을 격파하고 귀족 여인들을 구원했다. 한편,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북부 기사들로부터 농민 반란군 토벌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따르기로 했다. 그는 6월 10일 멜루 전투에서 기욤 칼레를 포함한 농민 반란군을 모조리 학살해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파리로 들어와서 민중을 소집한 뒤 자신을 "파리의 대장"으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자크리와 손잡았던 에티엔 마르셀을 토벌하지 않고 손잡는 것에 반감을 품고 샤를 왕자 쪽으로 등을 돌렸다.

2.4.5. 에티엔 마르셀의 몰락

1358년 6월 29일, 에티엔은 카를로스 2세 진영에서 이탈한 기사들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잉글랜드 궁수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파리를 방어하는 잉글랜드 용병들은 파리 시민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샤를 도팽은 파리를 강제로 공략할 경우 학살이 벌어져서 자신의 평판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질 것을 우려해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그는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며 파리를 공격하지 않고 봉쇄를 이어갔고, 카를로스 2세와 에티엔은 이에 맞서 군대를 종종 출격시켜 샤를 도팽의 군대와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다.

그러던 1358년 7월 21일, 파리의 한 술집에서 벌어진 사소한 싸움이 시가전으로 변질되면서 34명의 잉글랜드 궁수들이 학살당했다. 다음날, 에티엔과 로베르 르콕, 카를로스 2세는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플레이스 드 글레브에 군중을 집결시켰다. 군중들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때, 동료를 살해한 파리 시민들에게 분노한 용병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을 가하면서 시가전이 또 벌어졌다. 이로 인해 600~700명이 피살당했고, 파리 시민들은 카를로스가 용병들에게 자신들을 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카를로스의 형제인 필리프가 10,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은 도시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할 것을 우려했다.

한편, 에티엔은 나바르군의 입성을 준비하는 한편, 7월 30일부터 31일까지의 밤에 샤를 도팽을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 행위는 곧 발각되었고, 에티엔이 잉글랜드군에 파리를 넘겨주려 한다는 의혹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부르주아들 역시 에티엔을 더 이상 따랐다가는 자신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워진다고 확신하고, 에티엔을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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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마르셀 암살.

1358년 7월 31일 새벽, 에티엔은 카를로스 2세의 재무관과 함께 삼부회 의원 장 마이야르에게 생데니스 성문 열쇠를 주려 했다. 그러나 장 마이야르는 이를 거부했고, 에티엔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 하는 순간에 경보를 울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모았다. 그들은 깜짝 놀란 에티엔에게 이렇게 외치라고 요구했다.
"Montjoie au roi et au duc!(왕과 공작에게 몽주아!)"

에티엔은 망설이다가 따라 외쳤다.
"Montjoie au roi.(왕에게 몽주아)"

이후 에티엔이 "이게 무슨 소리죠?라고 묻는 순간, 군중이 무기를 들어 그를 포함한 친 잉글랜드, 친 나바라 성향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고, 카를로스 2세는 파리 외곽의 생드니 수도원에 숨었다가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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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작, <황태자, 미래의 샤를 5세의 파리 입성>, 1821년.

샤를 도팽은 1358년 8월 2일에 파리에 입성한 뒤 에티엔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한 주동자 15명만 처형하고 파리 시민들을 사면했으며, 반역죄로 처형된 이들의 친척들을 약탈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파리는 안정되었고, 샤를 도팽은 프랑스의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카를로스 2세는 노르망디로 피신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를 침공해 샤를 왕자를 격파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르망디, 피카르디, 샹파뉴, 브리의 영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형제 필리프가 데려온 잉글랜드-나바라 용병대를 이끌고 8월 3일 생드니를 약탈한 뒤 파리로 이어지는 센 강 계곡에 근거지를 세우고, 우아즈 강변의 크레유, 마른 강변의 멜룬을 점령해 파리로 향하는 수상 운송을 막음으로써 파리를 굶주림에 처하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샤를 도팽이 반격에 나서 멜룬을 포위하자, 그가 이끌던 용병대는 그동안 급여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터라 샤를 도팽에게 쉽게 항복했다. 카를로스 2세는 간신히 탈출한 뒤 8월 19일 퐁투아즈에서 샤를 도팽과 협상해 평화 협약을 맺고 강변 요새들에 주둔한 병력을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용병대는 그들이 통제하는 요새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그곳에 계속 남아서 해상 운송을 허용하는 대가로 선박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뜯어냈다.

2.4.6. 에드워드 3세의 침공과 브레티니 조약

1359년 3월 24일,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는 런던에서 제2차 협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아키텐 공국의 이전 소유물에 더해 메인, 투렌, 앙주 및 노르망디도 에드워드 3세와 후계자들에게 넘어간다.
2. 브르타뉴 공작으로는 샤를 드 블루아가 아니라 장 드 몽포르의 아들 이 선임되며, 잉글랜드 국왕은 브르타뉴 공작으로부터 경의를 받는다.
3. 장 2세는 인질들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환한 뒤 400만 크라운의 몸값을 더 짧은 기한 내에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삼부회는 협약 내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샤를 왕자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고, 샤를 왕자 역시 받아들였다. 샤를 왕자와 삼부회의 입장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재차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1359년 늦여름, 4,000명의 맨앳암즈, 700명의 대륙 용병, 5,000명의 장궁병을 칼레에 집결시킨 그는 랭스로 진격해 5주 동안 랭스를 포위했지만 방어 태세가 워낙 굳건해서 함락이 어려워지자 1360년 봄 포위를 해제하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로 진격했다. 파리 교외는 철저하게 약탈당했지만, 샤를 왕자와 수비대는 파리 성에서 끝까지 버텼다. 천혜의 요새인 파리 성을 무력으로 공략하는 건 무리었고, 프랑스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먹을 것을 구할 길이 막막해지고 곳곳에서 적군이 튀어나와 치고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급기야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들이 죽자, 에드워드는 다른 곳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1360년 4월 13일,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대성당이 있는 도시인 샤르트르에 도착했다. 클리니 수도원장 앙드루앵 드 라 로슈가 이끄는 수비대는 요새 뒤에 숨어서 농성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요새를 포위해 공성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날 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맹렬한 폭풍우가 잉글랜드 진영을 강타했다. 우박이 사람과 짐승을 죽일 만큼 컸고 수없이 떨어졌기에 가장 용감한 자도 겁을 먹었다.

조슈아 반스의 <가장 성공한 군주 에드워드 3세>에 따르면, 이날 6000마리의 말과 거의 1000명의 병사가 우박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다른 사료에는 수치가 확인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고위급 기사인 기 드 뷰챔프 2세가 우박에 맞아 3주간 고통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을 볼 때 피해가 심히 큰 건 사실로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하느님이 프랑스 왕국과 완전한 화해를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해 징벌을 내렸다고 여기고, 샤르트르에 있는 성모 교회 쪽으로 몸을 돌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성모 마리아에게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인 4월 14일, 앙드루앵이 잉글랜드 진영에 찾아와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에드워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샤르트르 공방전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한편, 장 2세는 제2차 런던 조약이 삼부회에게 거부된 뒤 경비병 69명의 감시 하에 가택 연금을 당했고, 서머튼으로 옮겨졌다가 1360년 봄에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상스 대주교 기욤 2세 드 멜룬에게 조속히 에드워드 3세와 협상을 완료하고 샤를 왕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 것을 촉구하게 했다. 이후 양국이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360년 10월 24일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직위를 주장하는 것을 그만둔다. 그 대신 기옌, 가스코뉴, 아키텐, 아르마냐크 등지의 영주권을 인정받으며, 프랑스 국왕은 이에 대해 명목상의 주권만 가진다.
2. 제2차 런던 조약에서 잉글랜드 왕국이 가지기로 했던 노르망디, 투렌, 앙주, 메인, 브르타뉴, 플란데런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
3. 장 2세는 300만 에쿠스를 몸값으로 지불하기로 약조하고 석방하되, 두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 그리고 여러 명의 왕자와 귀족, 파리 주민들을 인질로 보낸다.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를 해방시키는 조건으로 60만 크라운의 보증금을 즉시 지불하고, 1년 이내에 40만 크라운을 추가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샤를 도팽은 프랑스 국민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겨우 40만 크라운만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장 2세는 딸 이자벨을 밀라노 공국의 통치자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결혼시키고, 그 대가로 60만 크라운의 지참금을 받아낸 뒤 이를 잉글랜드에 넘기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합의를 이룬 그는 귀국길에 올랐고, 1360년 12월 5일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한편,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칼레에서 장 2세와 만나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고 추종자 300명과 함께 사면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재차 맺었고, 프랑스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잉글랜드-나바라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2.5. 노르망디 공작

장 2세는 파리로 귀환한 뒤 샤를을 노르망디로 파견해 그곳을 관리하게 했다. 그는 노르망디의 여러 마을과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는 자유 용병대를 토벌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직접세인 푸아지를 부과했다. 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협력을 받으며 로어 노르망디의 방어를 구축했으며,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센 강을 통제하는 롤부아즈 성채를 점령하고 있던 잉글랜드 용병대장 존 주엘로부터 상당한 돈을 주고 성채를 구입했다.

가장 큰 위협은 나바라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였다. 그는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자신이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고 그 후에는 장 2세의 막내 아들 필리프가 물려받을 거라고 선언하자 이에 반발해 1362년 5월 추종자들을 부추겨 노르망디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이에 샤를 도팽은 게클랭을 시켜 나바라 왕국을 지지하는 영주들을 공격하게 했고, 게클랭은 공세를 개시해 망테스와 뮬랑을 점령하고 센 강을 장악했다.

이후 샤를 도팽은 여기에 카를로스 2세의 누이인 나바르의 블랑슈가 베르농, 퐁투아즈, 노플스, 샤토누프 드 랭쿠르, 기조르, 구르네 요새를 잉글랜드군이나 나바라군에게 넘기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르농으로 진군한 뒤 블랑슈와 협상한 끝에 각 성을 다스릴 대장을 선임하고 카를로스 2세를 따르지 않으며, 자신에게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대가로 그녀가 자율적으로 통치를 행사하는 걸 보장하기로 했다.

2.6. 잉글랜드의 포로로 돌아간 아버지

1363년 7월, 잉글랜드에 인질로 가 있던 루이 왕자가 아내 마리 드 블루아와 함께 불로뉴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순례하는 것을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반드시 런던으로 돌아온다"는 조건하에 허락받은 뒤, 1363년 7월 1일 불로뉴에 도착하자마자 잉글랜드 호위대를 제압한 후 아내 마리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 있는 기즈성으로 달아난 것이다. 장 2세는 아들에게 당장 런던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루이는 이를 무시하고 여차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외삼촌인 카를 4세의 궁정에 피신하려 했다.

몸값 마련은 가망이 없어지고 인질이었던 루이가 도망쳐버리면서 기사도를 준수하는 국왕으로서의 긍지에 상처를 입은 데다, 이로 인해 전쟁이 또다시 발발하면 프랑스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한 장 2세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1363년 12월, 그는 아미앵에 삼부회를 소집한 뒤 왕국의 파멸을 막기 위해 장남 샤를을 프랑스의 섭정이자 총독으로 선임해 통치를 맡기고 잉글랜드에 가서 포로로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장 2세는 잉글랜드로 떠나 1364년 1월 런던에 들어갔고, 샤를 왕자는 또다시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2.7. 코르슈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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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필리프 라리비에르 작, <장 3세 드 그레일리를 사로잡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 1839년.

1364년 1월, 카를로스 2세는 아헨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나 잉글랜드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아키텐 공국에 나바라 왕국군이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고, 샤를 왕자는 카를로스를 응징하기 위해 노르망디를 공격할 병력을 모집했다. 1364년 3월, 가스코뉴 귀족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나바라 왕국-가스코뉴 연합군을 이끌고 나바르에서 아키텐을 거쳐 북부 프랑스로 행진했다. 한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 1,200명은 노르망디의 롤부아즈를 공격해 4월에 함락시키고 뒤이어 망트, 베르누이, 묄렁을 잇따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 3세는 카를로스에게 복종하는 도시들이 더 이상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게클랭을 격파하기로 하고, 노르망디 서부의 수비대, 메인,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용병대 등을 규합해 총 1,500명을 규합한 후 게클랭에게 접근했다.

이후 벌어진 코르슈렐 전투에서,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나바라 왕국군과 잉글랜드 용병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장 3세 드 그레일리를 생포했다. 그 직후 장 2세가 1364년 4월 8일 런던의 사부아 궁전에서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샤를 왕자는 1364년 5월 19일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는 코르슈렐에서 적군의 편에 섰다가 사로잡힌 프랑스인들을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왕에 대한 사적인 전쟁은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메시지를 모두에게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형제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확정해, 카를로스 2세가 두번 다시 부르고뉴 공국에 도전하지 못하게 했다.

2.8. 프랑스 국왕

2.8.1. 카를로스 2세와의 화해

1364년 8월, 로드리고 데 우리즈가 이끄는 소규모 나바라군이 바욘에서 세르부르로 항해했고, 노르망디의 카를로스 추종자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카를로스 2세의 동생 루이는 아키텐 공국을 지나 가스코뉴군과 합세한 후 9월 23일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러나 9월 29일 코르슈렐 전투 소식을 전해들은 루이는 부르고뉴 침공을 포기하고 코탕탱 반도를 탈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러나 루이는 부하들이 프랑스 마을들을 심하게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카를로스에게 등을 돌렸다. 여기에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국경지대인 앙스 마을을 초토화한 루이의 부하 세갱 드 바드폴을 파문하는 등 교회마저 등을 돌리자, 카를로스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샤를 5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365년 5월, 카를로스 2세와 샤를 5세는 아비뇽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카를로스 2세는 정복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추종자들의 사면을 받아냈으며, 처형된 나바라인들의 유해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포로들이 몸값없이 상호 석방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영토는 하나같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익이 없었으며, 부르고뉴 공작위에 대한 요구는 교황의 중재에 회부되기로 했지만 교황청이 이에 대해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 후 카를로스는 다시는 프랑스 왕위를 탐하거나 영지를 늘리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나바라 왕국에 머물렀다.

2.8.2.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의 종결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한 뒤 장 3세의 조카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장 3세의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가 공작위를 놓고 대립하면서 벌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대결인 백년전쟁에 휘말리면서 23년째 결판이 나지 않았고, 브르타뉴 전역은 군소 군벌간의 분쟁과 도적떼의 창궐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1364년 7월, 잉글랜드에서 용병대를 모집한 장 4세 드 브르타뉴[3]는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들 중 블루아 가문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오레를 포위했다. 잔 드 팡티에브르의 남편으로서 23년간 아내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몽포르 가문 및 잉글랜드군과 항전했던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진군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외곽 북동쪽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 4세 드 몽포르의 포위군은 마을 북쪽에 있는 호수를 옆에 낀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익을 맡았고, 장 4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으며, 로버트 놀스의 또다른 잉글랜드군은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휴 칼블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 역시 3개 대열을 결성했다. 샤를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고, 게클랭은 중앙을 이끌었으며, 오세르 백작 장 3세는 좌익을 이끌었다. 누가 프랑스군 예비대를 이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 4세와 샤를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랜 내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브르타뉴를 나눠 가지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군들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샤를이 추가 제안을 하려 한다면 그가 보낸 사절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게클랭을 비롯한 블루아 지지자들 역시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이 잘 돼서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랐던 양측의 많은 브르타뉴인들은 이에 실망해 탈영했다.

이후 벌어진 오레 전투에서, 장 드 몽포르를 받든 잉글랜드군이 승리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고, 게클랭은 생포되었다.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상당량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종식되었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받고 포로들을 풀어준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게클랭 역시 프랑스 왕이 10만 프랑을 친히 지불한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2.8.3. 카스티야 내전 개입

1360년 10월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종식되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쪽에 고용되었던 용병대는 급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었는데, 그 숫자는 15,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며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이 골치아픈 용병대를 내버려두면 프랑스가 재기 불능이 될 거라 보고 토벌을 시도했지만 1362년 4월 브리네 전투에서 진압을 시도한 프랑스군이 오히려 참패하고 말았다.

샤를 5세는 왕위에 오른 뒤 프랑스가 더 이상 약탈자들의 안식처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약탈자들을 잡는 대로 사형에 처한다는 국법을 제정, 집행했고, 마을을 점거하고 마을을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그들과 가능한 한 협상하지 않으려 했다. 샤를 5세와 그의 형제들은 각 공국 내에서 군대를 일으켜 용병대 토벌에 나섰고, 하급 기사들을 각지로 보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용병대를 물리치게 했다. 용병대에 가담하여 약탈을 자행한 프랑스인들은 잡히는 대로 처형했고, 외국인들은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엄중히 감금되었다.

이러한 강경책에도 용병대는 계속 극성을 부렸고,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종결된 뒤에는 많은 브르타뉴인들이 용병대에 가담하기까지 해, 프랑스 정부는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이때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를 놓고 페드로와 내전을 벌이다가 밀려난 엔리케 왕자가 깃발 색깔 때문에 소위 "백인 중대"라고 불리는 용병들을 고용한 뒤, 샤를 5세에게 프랑스에게 막대한 이권을 넘겨줄 테니 자신을 복위시켜 달라고 청했다. 샤를 5세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자국의 편에 끌어들이면 이로운 점이 많다고 여겼고, 용병대를 이베리아 반도로 보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흔쾌히 수작했다.

1365년 3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엔리케와 함께 카스티야로 진군했다. 그는 프랑스와 카스티야 사이의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으로 가려 하니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 2세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통과시켰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부르고스에서 머물고 있던 페드로는 엔리케가 용병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톨레도로 돌아간 뒤 아라곤의 정복지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고 엔리케와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귀족과 장군들이 잇따라 엔리케에게 귀순하고 아빌라, 세고비아, 탈라베라, 마드리드, 쿠엥카 등 여러 도시가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페드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366년 초 세비야를 떠나 포르투갈 왕국에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가 망명을 거부하자, 그는 알부케르케로 피신하려 했지만 그곳 시민들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입성을 거부하자 갈리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갈리시아까지 쳐들어오는 엔리케 2세를 피해 가스코뉴로 달아난 뒤 바욘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났다.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1366년 12월 엔리케 2세와 로그로뇨에서 만나서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7년 2월, 흑태자 에드워드는 심복들과 함께 6,000가량의 아키텐 병사, 2,000 가량의 잉글랜드군, 잉글랜드 병사 1,000명, 나바라 군인 300명 등 10,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에 진입했다. 엔리케 2세는 이에 맞서고자 병력 소집령을 내렸지만, 그를 위해 푸아티에 전투의 영웅인 에드워드와 싸우려는 카스티야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4월까지 모인 병력은 2,500명에 불과했고, 프랑스 용병 1,000명과 아라곤 출신 귀족들이 제공한 1,2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전력상 절대 불리했기에, 게클랭 등 많은 장교들은 엔리케 2세에게 전투를 피하라고 충고했다. 샤를 5세 역시 압도적으로 유리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군과 회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신하들은 그가 침략자와 싸우지 않는다면 카스티야에 남아있는 지지자들이 뿔뿔이 사라질 거라고 충고했다. 여기에 흑태자 에드워드가 일부러 엔리케 2세를 깔아뭉개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엔리케 2세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벌어진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은 흑태자 에드워드의 군대에게 참패했다. 게클랭은 생포되었고, 엔리케 2세는 프랑스로 도주했다. 이후 게클랭은 보르도로 끌려갔다가 샤를 5세가 그의 몸값으로 책정된 6만 프랑을 또다시 지불해준 덕분에 1367년 12월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페드로는 나헤라 전투 승리 후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카스티야인들은 그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에게 많은 영토를 넘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재정이 파탄난 지 오래라서 사전에 보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에드워드와 맺은 약속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실현시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라곤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에드워드는 이베리아 반도에 더 있어봐야 답이 없다고 여기고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며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페드로가 빚을 갚게 할 보증인으로 삼고자 페드로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이리하여 페드로와 잉글랜드간의 연합이 끊어지자,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1368년 9월 군대를 일으켜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했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나스르 왕조에 지원을 요청했다. 백년전쟁 초기에 관한 주요 정보를 제공한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2만에 달하는 무어인이 이에 응해 페드로에게 가담하면서, 페드로의 군세가 4만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에 엔리케 2세가 1355년 톨레도에서 페드로를 따르던 유대인 1,200명을 학살한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던 세파르딤이 대거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페드로를 끝까지 따르는 톨레도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엔리케 2세는 페드로가 대군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게클랭은 일부 병력만 남겨서 톨레도를 그대로 포위하게 하고, 주력군은 페드로를 향해 진군하면서 첩자들을 사방에 보내 페드로의 군대에 대한 정확하고 세세한 정보를 파악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엔리케 2세는 그의 제안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이후 벌어진 몬티엘 전투에서, 엔키레 2세와 게클랭이 이끄는 군대가 페드로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페드로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몬티엘의 한 요새로 피신한 후 그곳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충실한 기사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엔리케 2세와 함께 있던 게클랭에게 보내 그에게 여러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클랭은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3월 22일 밤에 변장한 채 몬티엘 성을 빠져나오게 했다. 페드로는 몇몇 수행원만 대동해 성밖으로 나온 뒤 게클랭의 안내를 받으며 한 천막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엔리케 2세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페드로는 엔리케 2세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엔리케 2세는 페드로의 수급을 벤 뒤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성채와 마을에 널리 보여주며 항복을 유도했다. 이에 몬티엘과 톨레도 등 페드로를 따랐던 도시들이 항복하면서, 카스티야 내전이 막을 내렸다. 게클랭은 페드로를 끝장내고 엔리케 2세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복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엔리케 2세로부터 몰리나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연간 2만 리브르에 달하는 수입을 받게 되었다. 이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프랑스 왕국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어 프랑스 왕국에 우수한 해군을 지원했다.

2.8.4. 군사 개혁

샤를 5세는 그랑 콩파니를 토벌하는 작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새로운 군대 조직을 개발했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루이 드 상세르 등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고 신뢰할 수 있는 장군들을 발굴했다. 그는 1364년 1월 아미앵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그랑 콩파니 토벌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직접세를 부과하는 안건이 통과하면서 확보한 자금을 토대로 약 100명의 용병대장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들을 돈으로 끌어들였고, 정규군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5,000 ~ 6,000명에 달하는 상비군이 양성되었는데, 이들은 하급 귀족 출신의 지휘관이 이끄는 민병대와 이탈리아 석궁병,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샤를 5세는 군대의 역량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활약상을 똑똑히 목도한 그는 잉글랜드 국왕들이 했던 대로 양궁 대회를 장려했으며, 1364년에서 1369년 사이에 수많은 석궁병을 고용했다. 또한 각 부대의 수와 장비의 품질을 수시로 점검했으며, 급여는 점검 시 장비가 충실히 갖춘 게 확인된 경우에먄 한 달에 한 번씩 지급되었다. 또한 상비군은 언제나 말을 타고 이동해 어디서든 신속하게 가서 적을 상대해야 했으며, 왕과 전선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하는 기수들을 위한 역관을 도로망 마다 설치하도록 했다. 여기에 요새를 빠르게 공략하기 위한 포병 양성에 힘을 기울여, 1375년경엔 40문 가량의 공성포를 갖췄다.

2.8.5. 외교 정책

샤를 5세는 잉글랜드를 외교로 고립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며 외삼촌인 카를 4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를 통해 독일 출신 용병이 잉글랜드군에 입대하는 걸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또한 프랑스군의 지원 덕분에 카스티야 국왕이 될 수 있었던 엔리케 2세와 확고한 동맹을 맺었으며, 스코틀랜드 왕국과도 그들의 동의 없이는 더 이상 평화 협약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들과의 동맹을 갱신했다. 한편, 자신의 궁정에 피신해 있던 웨일스 공작위 주장자 오와인 로고크를 지원해, 웨일스에서 반 잉글랜드 봉기를 유발해 잉글랜드 당국이 프랑스 쪽에 전념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한편, 그동안 장 2세와 샤를 5세 부자를 상대로 오래도록 투쟁했던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카스티야 연합이 현실이 되자 심한 압박감을 느켰다. 그는 1369년 낭트로 가서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만나서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동시에 사절을 보냈다. 그는 양측에 노르망디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르고뉴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몽펠리에를 관장할 권리를 주라고 요구하면서, 에드워드 3세에게는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샤를 5세에게는 "잉글랜드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력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샤를 5세는 그의 제안을 노골적으로 거절했고, 에드워드 3세는 카를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의 전황이 잉글랜드에게 급격하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카를로스 2세는 이러다가 노르망디 내 자신의 영지마저 모조리 몰수당할 것을 우려해 샤를 5세와 협상을 벌였다. 1371년 3월 29일, 카를로스 2세는 1365년에 맺었던 협약 대로 프랑스에서 소유한 모든 땅에 대해 샤를 5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를 주권자로 받들겠다고 서약했다. 샤를 5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자기 영지에서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플란데런의 경제 부흥을 위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1364년 10월 10일 플란데런의 상속녀인 딸 마르그리트를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약혼시켰다. 하지만 에드먼드와 마르그리트는 친족 관계였기에, 그 결혼이 성사되려면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샤를 5세는 플란데런 백국이 잉글랜드와 이대로 결혼 동맹을 맺게 하면, 잉글랜드군이 저지대 국가를 확고히 장악해 프랑스에 두고두고 큰 우환이 되리라 여기고 교황 우르바노 5세를 압박한 끝에 마르그리트와 에드먼드의 결혼을 불허하게 했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이며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어머니였던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가 아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샤를 5세가 릴, 두에, 오르키에 시를 플란데런 백국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하자, 루이 2세는 마음을 돌려 프랑스와 손잡기로 했다. 1367년, 샤를 5세의 막내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루이 2세의 딸 마르그리트가 결혼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국은 급한 불을 끌 수 있었지만, 이 일은 장차 프랑스 왕국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부르고뉴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2.8.6. 프랑스의 재정복을 이끌다

2.8.6.1. 전쟁의 발발
1367년 카스티야 원정을 수행하고 귀환한 흑태자 에드워드는 원정 도중에 얻은 이질에 시달리다가 보르도에 몸져누웠고, 카스티야 원정을 치르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전비를 메꾸기 위해 그가 다스리는 가스코뉴, 아키텐 등지의 세금을 대폭 늘려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1368년 1월 난로세를 강제 징수하기로 한 조치는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에드워드의 심복인 존 헤어웰 주교는 니오르에서 회의를 열어 푸아투, 생통주, 리모주, 루에르그 남작들을 설득해 이 세금을 받아들이게 했지만,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코밍즈, 알브레 영주들은 이에 복종하지 않았다. 여기에 에드워드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존 챈더스는 난로세를 부과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르망디 영지로 은퇴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강압적인 세금 징수에 반감을 품은 알브레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다르마냐크 등 수많은 아키텐 영주들은 처음에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버지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시정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가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자, 그들은 1368년 5월부터 샤를 5세에게 개입해줄 것을 청원했다. 브레티니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 왕국은 영토가 이전되고 몸값이 지불된 뒤 아키텐의 주권이 프랑스 왕국에서 잉글랜드 왕국에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이 명목상으로나마 아키텐의 주권자로 남아 있었다.

샤를 5세는 이 점을 이용해 아키텐을 프랑스에 도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1368년 5월 20일 자신의 친척이자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와 결혼시켰다. 그해 6월 30일, 샤를 5세는 자신에게 청원한 아키텐 영주들과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프랑스 국왕의 가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했고, 그 대가로 현재 가지고 있는 영지를 인정받으며,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이렇게 준비를 갖춘 뒤, 1369년 1월 25일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사촌, 에두아르 다키텐 공작이여. 파리로 와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프랑스의 왕이신 샤를의 허락 없이 세금을 부과한 것에 대해 변호하시오.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에 분개해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기꺼이 파리로 가겠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에 투구를 쓰고 6만 병사들과 함께 갈 것이다."

이후 양자는 전쟁을 재개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을 프랑스의 국왕으로 칭했다. 이에 샤를 5세는 같은 해 11월 30일에 주군에게 반역을 저지른 아키텐 공작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잉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이 현명하고 뛰어난 지도자라며 주의하라고 권하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이 얼굴을 붉히며 경멸조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요? 그는 그저 변호사일 뿐이오!"

샤를 5세는 나중에 곤트의 존이 자기를 가리켜 그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빙긋 웃으며 즐거운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좋다! 만약 내가 변호사라면, 그들이 후회할 판결을 내릴 사건을 만들어 주겠다!"
2.8.6.2. 프랑스군의 파상 공세
샤를 5세는 1349년 흑사병에 걸린 이래로 건강이 항상 좋지 않고, 자신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 자신은 파리에서 통치를 이어가고 전쟁은 유능한 지휘관과 형제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동안 샤를 5세에 의해 육성된 프랑스군이 유능한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으며 아키텐으로 밀려오고, 사전에 샤를 5세와 비밀 협의를 맺었던 아키텐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게다가 흑태자 에드워드의 건강이 너무 약해져서 말을 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전쟁을 대신 이끌어야 했는데, 이들은 탁월한 지휘관이었던 에드워드를 대체하지 못했고, 900개 이상의 마을 성, 요새들이 샤를 5세에게 귀순했다. 이에 흑태자 에드워드는 노르망디의 영지로 은퇴했던 존 챈더스를 급히 소환해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게 했지만, 존 챈더스는 1369년 12월 말에 루삭 다리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1370년 봄, 2개의 프랑스 군대가 아키텐을 전격 침공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라 레울과 베르주라크를 거쳐 기옌으로 진격했고, 베리 공작 이 이끄는 군대는 리모주를 향해 진격했다. 두 군대는 앙굴렘에서 합류한 뒤 에드워드를 포위 공격하기로 했다. 에드워드는 이에 맞서기 위해 병상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마차에 의지한 채 코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푸아투 남작, 생통주 남자, 케임브리지 백작, 랭커스터 백작, 펨브로크 백작과 합류했다.

그런데 에드워드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리모주 주교이자 에드워드의 절친한 친구였던 장 드 무라 드 크로스가 프랑스군이 리모주를 포위한 지 사흘만에 항복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이에 격분해 자신과 아버지의 영혼을 걸고 그곳을 탈환한 뒤 주민들에게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코냑에서 리모주로 출진했다. 프랑스군은 일찌감치 리모주를 떠난 뒤였고, 리모주에 남겨진 수비대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잉글랜드군은 9월 14일 리모주에 당도하여 포위 공격을 개시했고 9월 19일 잉글랜드 광부들이 도시 외벽을 철거하는 데 성공하자 도시 안으로 쏟아져들어갔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3,000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를 모조리 학살하고 리모주를 초토화했다고 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하고, 실제로는 300명 가량의 민간인과 수비대가 피살되었다고 추정한다. 에드워드는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2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밝히면서도 민간인 사망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리모주가 에드워드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만은 분명하며, 이곳이 재건되려면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에드워드는 리모주 공방전에서 리모주를 초토화한 뒤 보르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부재 중에 큰아들인 에드워드가 6살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비탄에 잠겼고, 형제인 곤트의 존에게 가스코뉴와 아키텐의 수비를 맡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존은 6개월간 프랑스로부터 아키텐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다가, 그해 7월에 아키텐 보안관 직위를 장 3세 드 그레일리에게 넘겼다. 그러나 리모주가 에드워드에게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인들은 잉글랜드인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한층 더 강하게 품고 샤를 5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2.8.6.3. 퐁발랭 전투
1370년 8월,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6,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상륙했다. 놀스는 솜 일대를 진군하며 약탈을 자행하다가 랭스 시 외곽에서 무력행진을 벌였고, 뒤이어 트루아를 위협한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느무르에서 파리로 접근했다. 그의 군대는 많은 마을을 점령하고 몸값 지불을 거부하는 도시들을 파괴했다. 9월 24일 파리에 도착했지만 수비가 매우 견고해 공략이 불가능하자 파리 주변의 수많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해 수비대가 격분하여 요새 바깥으로 나오게 해 회전을 벌이려 했으나, 샤를 5세가 군대에 적의 도발에 일절 응하지 말고 수비에 전념하라고 엄히 명령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파리 공략을 포기한 놀스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루아르 강변의 여러 성과 수도원을 점령하고 푸아투나 노르망디 남부로 진군할 수 있는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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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무관장의 검을 수여하는 샤를 5세.

1370년 10월 2일, 샤를 5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했다. 게클랭은 즉시 전국에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내렸고, 11월 6일 캉에서 집결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얼마 후 장 4세 드 모켄시 휘하의 브르타뉴 분견대와 합세해 4,000명을 확보했으며, 뒤이어 샤텔로에 집결한 루이 드 상세르 휘하 1,200명과 합류했다. 12월 1일 캉을 출발한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여 르망에 이르렀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겨울 숙영지를 어느 곳에 건설할 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놀스는 프랑스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브르타뉴 서부로 철수한 뒤 고지대에 숙영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척박한 브르타뉴 서부에서 약탈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여기에 머물면서 주변 마을을 계속해서 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공격해오더라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시 잉글랜드 정부는 그들에게 급료를 13주분만 지급했기 때문에, 약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매우 컸다.

놀스는 이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하자 2,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 서부로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남은 4,000명은 3개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토머스 그랜디슨휴 칼블리의 이중 지휘를 받았고, 나머지 두 부대는 월터 피츠월터존 민스터워스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진군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12월 3일, 토머스 그랜디슨의 600~1200명은 퐁발랭에 주둔했고,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는 남쪽으로 몇 마일 떨어져 있었다. 존 민스터워스의 부대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듯 적이 멀리 분산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게클랭은 이 호기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12월 3일 밤, 게클랭은 이틀 만에 160km를 주파하느라 지친 병사들을 독촉하여 야간 행군을 시작해 12월 4일 이른 아침에 퐁발랭에 도착했다. 토머스 그랜디슨의 잉글랜드군은 적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서둘러 전투 대형을 결성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프랑스 중기병들이 달려들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화살 몇 발만 쏜 뒤 숲으로 도주했지만, 적의 맹추격으로 인해 대거 학살되었다. 그랜디슨의 부대는 샤토 드 라 페뉴 성벽 아래로 피신했다가 적이 쫓아오자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끝내 섬멸되었다. 퐁발랭 전투에서 살아남아 생포된 이는 이는 토머스 그랜디슨 외 몇몇 고위급 장교 뿐이었다.

게클랭은 퐁발랭 전투에서 적군을 섬멸한 뒤 퐁발랭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던 피츠월터 쪽으로 향했고, 일부 병력에겐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의 행방을 수색하게 했다. 피츠월터는 아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스 수도원 내로 피신한 뒤 그곳을 요새화하여 버텨보려 했다. 그러나 루이 드 상세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피츠월터의 잉글랜드군과 거의 동시에 수도원에 도착했고, 수비대는 상세르의 즉각적인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적절한 방어를 조직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압도되었고, 게클랭이 뒤이어 도착한 뒤 패주하는 잉글랜드군을 대거 사로잡았다. 피츠월터를 비롯한 몇몇 고위급 장교들이 생포되었고, 대부분의 잉글랜드 장병은 섬멸되었다.

퐁발랭과 바즈에서 용케 빠져나왔거나 다른 곳에서 약탈하느라 합류하지 못했던 잉글랜드인들은 루아르 남쪽의 생소뵈르로 향했다. 약 3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사토 드 쿠르시용 성을 점거했지만, 곧 그곳을 떠나 생모르르루아르라는 여울목으로 이동했다. 그곳 너머에는 잉글랜드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화된 수도원이 있었다. 이후 수도원의 잉글랜드군과 합세한 그들은 보르도로 향했지만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자 샤토 드 브레수아르 성으로 피신했다. 그곳 역시 잉글랜드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바짝 추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보고 겁에 질러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결국 패잔병들은 성 아래에서 프랑스군에게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 후 게클랭과 상세르는 놀스가 약탈 행진 동안 점령했던 모든 마을과 성들을 탈환한 뒤 놀스와 민스터워스의 영국군을 추격했다. 놀스와 민스터워스는 곧 합세한 뒤 1371년 초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고, 병사들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단 탈영하기 일쑤였다. 마침내 푸앵트 생마티외 항구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이용 가능한 배는 단 2척 뿐이어서 당시 수백명으로 줄어든 잉글랜드군을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놀스, 민스터워스를 비롯한 간부들만 배를 타고 탈출했고, 남은 이들은 그들을 따라잡은 프랑스군에게 학살되었다.
2.8.6.4. 라 로셸 해전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6,000명을 궤멸시킨 뒤, 프랑스군의 공세는 더욱 매서워졌다. 1372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전설적인 승리를 거뒀던 푸아티에가 게클랭에게 넘어갔다. 뒤이어 아키텐의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이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포위되었다. 이곳이 함락된다면, 아키텐과 잉글랜드 간의 해상 보급이 끊어질 공산이 컸다. 에드워드 3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팸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를 지휘관으로 삼은 잉글랜드 육군 및 해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팸브로크 백작의 함대는 3척의 대형 전함과 14척의 소형 전함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사 160~400명과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을 실은 수송선 50여 척이 뒤따랐다. 여기에 가스코뉴에 복무하는 잉글랜드군의 6개월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12,000 파운드도 실렸다. 팸브로크의 함대는 6월 초 플리머스에서 출항해 라 로셸로 항해했다.

한편,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제노바 출신의 제독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휘하의 함대를 아키텐으로 파견했다. 함대 규모는 갤리선 12척, 범선 8~10척이었는데, 하나같이 잉글랜드 선박보다 훨씬 컸으며 적 선박에 큰 돌을 던질 수 있는 투석기가 장착되었다. 또한 카스티야 선원들의 항해술은 탁월해서, 적보다 큰 배를 가지고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1372년 6월 22일 늦은 오후, 팸브로크 백작은 강력한 카스티야 함대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라 로셸 항구 외곽에 도착했다. 카스티야 함대는 즉시 잉글랜드 함대를 향해 달려들어 적선 2~4척을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우수한 장궁병들이 높은 위치에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정확히 쏘며 분전했고, 잉글랜드 전사들은 적이 배를 건너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싸웠기에, 카스티야군은 그들을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조수가 높아지자, 두 함대는 전장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팸브로크 백작은 항구에서 다소 떨어진 해안으로 철수했고, 카스티야 함대는 항구로 돌아갔다.

그날 밤, 라 로셸 수비대의 기사인 존 하피든이 바지선 몇 척에 소규모 병력을 태운 뒤 잉글랜드 함대에 몰래 가담했다. 그들은 라 로셸 수비대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 조속히 적을 물리쳐달라고 호소했다. 부하들은 카스티야 함대의 강력한 전투력을 당해낼 공산이 없다고 보고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팸브로크 백작은 존 하피든의 설득에 넘어가 해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리하여 6월 23일 아침, 두 함대는 다시 라 로셸 항구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이때 카스티야 함대는 적선의 갑판과 장비에 기름을 뿌리고 불화살로 불을 붙였다. 그러자 수많은 잉글랜드 선박들이 화염에 휩싸였고, 다음 몇 시간 동안 잉글랜드 함대 전체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팸브로크 백작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생포되었고, 존 하피든은 동료 기사들과 함께 최후까지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이날 생포된 기사는 총 140~400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전원이 사슬에 묶인 채 카스티야 항구인 산탄데르로 끌려갔다.

한편, 아키텐의 수비를 맡고 있던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라 로셸을 구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러나 수비즈 요새를 포위하던 프랑스군을 공격했다가 오웨인 로고치가 이끄는 웨일스 용병대의 역습으로 패배를 면치 못하고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함께 생포되었다. 토머스 퍼시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었지만,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그를 풀어주면 위험하다고 여긴 샤를 5세가 몸값을 받고 풀어주길 거부하는 바람에 파리의 템플 탑에 감금되었다. 결국 구원의 희망을 잃어버린 라 로셸 수비대는 1372년 9월 7일에 항복했다.[4] 게클랭은 라 로셸을 점령한 뒤 공세를 이어가 앙굴렘과 생장당젤리를 9월 20일에 점령했고, 생트를 9월 24일에 공략했다.

1373년 3월 21일, 게클랭은 푸아투의 시세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다. 이후 수개월간 작전을 이어간 끝에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에 할양되었던 푸아투 대부분을 석권했다. 다만 푸아투 완전 재패는 1375년 2월 최후의 잉글랜드군 거점인 겐카이 요새가 함락되면서 완수되었다.
2.8.6.5. 브르타뉴 정복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는 잉글랜드의 지원 덕분에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돕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샤를 5세는 그가 잉글랜드와 연합할 가능성이 높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게클랭과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을 비롯한 샤를 5세의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브르타뉴 인사들은 장 4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 샤를 드 블루아가 죽은 후에도 브르타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잔 드 팡티에브르 역시 장 4세와 대립했다.

1372년 10월,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렌을 포위했다. 렌에 있었던 브르타뉴 공작부인은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부르봉 공작의 병사들은 공작부인의 짐을 수색해 브르타뉴 공작이 에드워드 3세와 체결한 비밀 조약의 사본을 발견했다. 이에 장 4세는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잉글랜드군을 끌어들인 것은 인정하지만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등 반항적인 귀족들에 맞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협상 끝에 브르타뉴 공작은 공국에서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은 렌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를 맺었다.

그러던 1373년 3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생말로 항구에 상륙해 카스티야 선박 7척을 격파하고 2,000명의 맨앳암즈와 2,000명의 궁수병을 육지에 내려보내 브레스트를 구원했다. 샤를 5세는 장 4세가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동의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하고, 게클랭에게 브르타뉴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게클랭은 기다렸다는 듯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2달 만에 브르타뉴 대부분이 프랑스에 넘어갔고, 브르타뉴 서부 해안 요새들인 브레스트, 오레, 베세렐, 데르발만이 프랑스군에 넘어가지 않았다. 장 4세는 4월 28일 브르타뉴를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2.8.6.6. 곤트의 존의 슈보시
1372년 말, 전쟁 재개 이래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아키텐을 구원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연이어 실패하자, 잉글랜드 의회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아키텐 수비를 맡다가 잉글랜드로 소환된 곤트의 존에게 4,000명의 원정군을 맡기고 브르타뉴에 상륙하여 샤를 5세에 의해 브르타뉴를 빼앗긴 장 4세를 복위시킨 뒤 낭트에서 루아르 강을 따라 이동해 푸아투를 거쳐 아키텐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그러나 1373년 전반기에 브르타뉴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프랑스군이 낭트를 탈환했고, 브레스트, 데르발, 오레를 제외한 브르타뉴 전역이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따라서 브르타뉴를 통해 아키텐으로 진군하는 계획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대서양을 통해 아키텐으로 가자니, 카스티야 해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해군이 철저히 막고 있어서 역시 힘들었다. 결국 잉글랜드 정부는 칼레에서 출발해 파리를 우회하며 아키텐으로 이동하는, 1,500km에 달하는 행군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계획이 세워진 뒤, 1373년 전반기 동안 동원가능한 잉글랜드 전사 및 병사들이 칼레로 대거 집결했다. 플란데런 백국에서 차출된 100척 이상의 수송선들이 칼레와 잉글랜드 사이의 영국 해협을 수없이 왕래하며 이들을 실어날랐다. 그 결과, 8월 9일에 집결 완료된 원정군 규모는 맨앳암즈 3,000명, 장궁병 6,000명, 비전투원 2,000명에 달했다. 총사령관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3남 곤트의 존이 맡았고,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서퍽 백작 윌리엄 우퍼드, 디스펜서 남작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 저명한 기사 휴 칼블리 등 에드워드 3세 휘하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맹활약했던 장군들이 원정에 가담했다.

8월 9일 칼레에서 출진한 원정군은 하루에 약 10km를 전진하면서 20km 이내의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며칠 후 아르투아 외곽의 에어 쉬르 라 리스와 생폴쉬르테르누아즈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둘렌 요새를 습격해 거의 함락시킬 뻔했으나 수비대의 분전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8월 19일 솜 강에 교두보를 확보한 뒤 아라스를 우회한 후 브레 쉬르 솜을 찔러봤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한편, 부르고뉴 공작인 용감공 필리프 2세가 아미앵에서 군대를 조직해 적의 뒤를 추격했다. 또한 샤를 5세는 푸아투 정복을 완료한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지원 병력을 줘서 잉글랜드군의 진군에 대응하게 했으며, 로한 자작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장 3세 드 뷔에이에게도 군대를 맡겼다. 이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식량 수급 부대를 연이어 습격해 전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군의 진군로에 있는 주민들을 근처의 성이나 요새화된 수도원으로 대피시키고, 잉글랜드군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등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9월 3일 랑 교외의 보 쉬르 랑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프랑스 농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한 곤트의 존은 수아송으로 향했고, 필리프 2세가 이끄는 2,400명의 프랑스군이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수차례 그들과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샤를 5세의 권고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오직 식량 수급을 목적으로 분산된 적군을 사살하고 낙오된 적병들을 사로잡았다. 9월 9일, 프랑스군은 토머스 디스펜서가 이끄는 분견대를 습격해 궤멸시키고 기사 월터 휴이트 등 수많은 병사를 사살하고 디스펜서 등 몇몇 기사와 종자를 생포했다.

곤트의 존과 장 4세는 이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계속 진군하면서 에르몽빌, 발돔망주, 에페르네, 샬롱앙샹파뉴 등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9월 22일 잉글랜드군이 트루아 외곽에 도착했을 때, 게클랭,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루이 2세 드 부르봉, 필리프 2세가 연합한 7,000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트루아 인근 케아에 주둔해 있었다. 곤트의 존은 프랑스군 진영에 전령을 보내 전투를 신청했지만 묵살당하자 센 강으로 이동한 뒤 9월 말에 제쉬르센을 통해 센 강을 건넌 후 니베르네로 향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두 개의 종대를 형성하여 평행하게 행군하면서 적의 진군을 따라갔다. 그들은 성이나 요새화된 도시에서 매일 밤을 보내면서 적군이 야영을 반복하도록 강요했다.

이렇듯 프랑스군이 바짝 뒤를 쫓으면서도 전투에 절대로 응하지 않고 식량 수급 부대를 끊임없이 공격하자,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급락했고 행군을 이탈하는 자들이 갈수록 늘어났으며, 수많은 보급 마차를 버려야 했다. 급기야 11월에 꽁브하이으, 리무쟁 상부 지역을 지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 지역은 숲이 울창했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 추위를 피할 거주지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말에게 먹일 곡물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계다가 이 시기에 폭우가 내리면서 도로는 늪으로 바뀌고 하천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여기에 프랑스 기병대는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꾸준히 공격해 피해를 누적시켰다.

1373년 12월 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왕의 권위에 적대적인 지역인 리무쟁 하부 지역에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비로소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곤트의 존은 이 지역에서 3주 동안 휴식을 취한 뒤 1373년 마지막 날에 보르도에 입성했다. 4개월 동안 1,500km를 강행군한 대가는 참혹했다. 원정에 동원된 30,000마리의 말 중 절반이 죽었고, 수송 마차의 3분의 2가 버려졌으며, 3,000명이 추위, 질병, 기아로 사망했고 3,000명은 프랑스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더욱이 보르도에 도착한 많은 이가 며칠 또는 몇 달 후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보르도에 입성한 후의 상황도 심각했다. 그 해 겨울 동안 페스트가 돌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몇몇 기사들은 거리에서 음식을 달라고 구걸했다.
2.8.6.7. 브뤼헤 휴전
1375년 3월 25일, 브뤼헤의 성 도나티아 대성당에서 프랑스 측과 잉글랜드 측 사절단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자는 먼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1375년 7월 1일부터 1377년 6월까지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때 그레고리오 11세의 사절단은 잉글랜드 측 협상 대표 곤트의 존에게 잉글랜드의 소유를 포기하고 프랑스 국왕의 명목상 가신이자 독립적인 아키텐 공작이 될 것을 제안했다. 존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잉글랜드 의회가 아키텐이 자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추가 협상에서 현재의 영토 상황을 토대로 40년간 휴전 협정을 맺는 안건이 제시되었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자 모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오면서 역시 무산되었다.

1376년 7월, 이번에는 샤를 5세의 사절인 샤르트르 주교 장 르 페브르가 에드워드 3세에게 제안했다. 그는 도르도뉴 강 남쪽에 위치한 기옌 일대에 대한 에드워드 3세의 영주권을 인정하고, 장 2세의 몸값 중 여전히 지불되지 않은 1,200,000 프랑을 지불할 테니, 아쟁, 비고르, 케르시, 바자데이스를 프랑스 왕국에 반환하고 기옌 공작으로서 샤를 5세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최종 평화 협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2.8.6.8. 해상 및 육상 공세
1377년 7월 브뤼헤 휴전이 만료되자, 게클랭은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함께 브르타뉴와 기옌에서 잉글랜드군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가론 강변의 베르주라크, 리부른, 생테밀리옹, 블라예를 탈환했다. 그러나 11~12월에 감행된 셰르부르 공방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샤를 5세는 1373년 장 드 비엔을 프랑스 해군 제독에 선임하고, 해군의 수장인 프랑스 제독의 지위를 육군 대원수와 동등하게 해주어 해군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장 드 비엔은 왕국의 모든 항구에 선박을 구매, 건설 및 유지 관리를 담당하는 기구인 클로 오 갈레(clos aux galées)를 신설하고 마스터를 선임했다. 이후 건조에 공을 들인 결과, 프랑스 함대는 1377년에 중포를 갖춘 35척의 고속선을 포함한 120척에 달하는 전함을 보유했다.

장 드 비엔은 이렇게 육성한 함대를 이끌고 1377년부터 1380년까지 플리머스, 와이트 섬, 라이 등 잉글랜드 남부 해안과 10개의 잉글랜드 항구를 지속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런던은 여러 차례 적 함대의 습격에 대비하라는 경보를 발령했고, 잉글랜드 백성들은 이 상황에 몹시 동요했으며,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플란데런 백국간의 물자 교류는 매우 악화되어 잉글랜드 정부의 재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2.8.7. 내치

2.8.7.1. 경제 회복
장 2세는 런던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프랑스 화폐를 개혁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1360년 12월 프랑스에 돌아오자마자 프랑화를 도입했다. 이 화폐는 매우 높은 금 함량(순금 3.88g)을 함유한 통화로 1 파운드 의 가치가 있었다. 화폐에는 말을 타고 돌진하는 왕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 신 화폐를 도입함으로써 14세기 전반에 걸쳐 수많은 평가 절하로 인해 가치가 유명무실해진 기존의 에퀴화를 대체하길 희망했다. '프랑'이라는 이름의 선택은 프랑스 왕국에 대한 애국심을 대중에 각인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화를 창설한 뒤, 장 2세는 공무원 수를 줄이고 인기가 별로 없던 금융계 직원들을 해고했으며, 샤를 도팽의 친척 대부분을 내보냈다. 샤를 도팽은 노르망디로 보내져서 그곳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왕실 추밀원은 재정을 충당해 장 2세의 몸값을 마련하는 걸 목표로 삼고 모든 화폐 교환에 부과되는 5%의 세금을 설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무역, 농업, 상업은 심각한 불이익을 받았고, 경제 활동이 둔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샤를 5세는 프랑화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무역 촉진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랑 콩파니 토벌을 위한 군자금을 상시 확보하기 위해 각 지방에 파견된 왕실 보안관이 통제하는 세금 시스템의 창설을 수락했다. 그는 이후에도 치세 내내 통화 안정 정책을 꾸준히 이어갔고, 매년 삼부회에서 재협상되었던 조세 제도를 영구적인 것으로 만듬으로써 혼란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여기에 백년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유랑민들을 재정착시키고 각 마을의 방어력을 강화해 약탈자들의 습격으로부터 재산을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프랑스의 경제는 수년 만에 부활했고, 프랑스 왕실은 연간 160만 프랑이라는 매우 풍부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2.8.7.2. 정부 개편
샤를 5세는 아버지가 친정에 나섰다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로잡힌 뒤 왕국에 불행이 닥친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고,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되는 걸 기필코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국왕이 군대를 직접 지휘하지 않는 것을 법으로 제정했고, 왕궁 깊숙한 곳에서 정무를 총괄했다. 그 대신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베르트랑 뒤 게클랭, 장 1세 르 맹그르, 루이 드 상세르 등 유능한 지휘관들과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 드 베리 등 형제들에게 전쟁을 위임했다.

여기에 기욤 드 도르망, 피에르 도르주몽 등 유능한 관료들을 발탁해 프랑스 총리로 삼음으로써 내치를 다지도록 했으며, 경제학자 니콜 오렘에게 프랑스의 경제를 되살리는 안건에 대해 조언을 여러 차례 구했으며, 금융가 니콜라 브라크를 재무관으로 삼아 프랑스 왕실의 재정이 부실해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게 했다. 느베르 주교 피에르 아이슬랭 드 몽타구도 샤를 5세의 주요 고문으로, 샤를 5세가 서방교회 대분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조언했다.

샤를 5세는 법을 자신의 통치 방식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자신 주변에 법학자들을 항상 두었고, 파리 법정에 프랑스 제일의 법률 전문가들을 배치해 가능한 한 형평성이 있는 판결을 내리도록 해, 백성들의 신뢰를 회복하도록 했다. 여기에 호텔 생폴, 루브르, 벵센 성에 별개의 궁정을 둬서, 파리 당국과 행정부 사이의 권력 분리를 구체화했다. 이는 아버지 장 2세가 통치를 자의적으로 내리고 법원의 판결 없이 숙청을 단행해 대귀족들의 반발을 샀던 것을 반면교사로 삼은 조치였다.
2.8.7.3. '현명한 왕'
당시엔 국왕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침으로써 자신이 수많은 귀족과 백성의 주인이 될 능력이 있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는 관념이 깊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샤를 5세는 1349년 흑사병에 걸린 이래 줄곧 질병에 시달렸고,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부리지 못하면서 전장에서 무용을 선보일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에게 통치할 자격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탁월한 지혜를 갖췄다고 홍보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그의 전임 국왕들이 전장에서 잃은 것을 지혜를 통해 탈환한 '현명한 왕'으로서 그를 치켜세웠다. 장 프루아사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샤를 왕은 지극히 현명하고 섬세했고, 살아 있는 동안 그 모습을 잘 보여줬다. 그는 자신의 방에 있으면서 추론을 하면서 머리를 무장하고 손에 칼을 들고 그의 전임자들이 들판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 그는 이 때문에 크게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탈리아 태생의 여성 시인이자 철학자 크리스틴 드 피잔은 샤를 5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왕은 감각과 관대함, 힘, 관대함, 관대함으로 인해 적들이 더 이상 그곳으로 향하지 않는 한 그의 나라에서 적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궁전과 왕실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전에 무기를 들고 매우 기사도가 높은 그의 전임자들에 의해 황폐하고 상실되고 폐위되었던 그의 왕국을 다시 정복하고 재건하고 확장했다. "

샤를 5세는 자신을 성 루이 왕의 신성한 피를 물려받았다고 홍보했고, 그를 따르는 성직자들은 대관식의 종교적 측면을 강조했고, 이 사상이 낳은 기적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퍼뜨렸다. 그의 다양한 주거지 장식에는 많은 신성한 이미지가 사용되었으며, 방은 성모 또는 성인을 나타내는 성물함, 조각상 또는 그림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이 행사하는 왕권은 신성한 기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두가 확실하게 인식하길 바랐다. 그는 프랑스 왕실 문장에도 손을 댔다. 본래 프랑스의 왕실 문장은 백합의 묘목이었는데, 그 수는 결정되지 않았다. 샤를 5세는 그것을 단순화했고, 백합꽃 3개로 수를 확정했다. 이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과 연계된 것이었다.
2.8.7.4. 건축과 문학
샤를 5세는 치세 동안 파리 시를 중점으로 건설 사업을 전폭적으로 시행했다. 벵센 성에 강력하고 높은 성채를 건설하고 그 내부에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모사한 관이 있는 예배당을 세웠다. 여기에 루브르 궁, 샤틀레 성, 바스티유 요새, 셀레스틴 요새에서 주권자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는 여기에 더해 파리 시를 더 이상 상스 대주교에 의존하는 주교구가 아니라 독립된 대주교구가 되도록 노력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그걸 허용했다가는 갈리아 교회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잡아 교황으로부터 독립해버릴 것을 우려해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샤를 5세가 특히 심혈을 기울인 건축은 바로 파리 시의 방어를 위한 요새 건설이었다. 그는 잉글랜드군의 위협으로부터 파리를 완벽하게 지키기 위해 에티엔 마르셀이 건설하려다가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던 새로운 성벽 건설 작업을 이어가게 했다. 왼쪽 강둑에서는 영국군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소위 "필리프 아우구스투스(Philippe Augustus)"라고 불리는 성벽에 흉벽을 씌웠다. 오른쪽 강둑에는 "샤를 5세"로 불리는 새로운 성벽을 건설했다. 이 건설 작업은 그가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1383년에 완료되었다. 그가 파리 주변에 세운 요새들은 각각 하나 또는 두 개의 도랑, 첫 번째 흙 제방, 물로 채워진 폭 12m x 깊이 4m의 큰 도랑, 마지막으로 폭 25m의 흙 제방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요새의 높이는 90m에 달했다.

그 유명한 바스티유 요새도 샤를 5세 시대인 1370년에 건설되었다. 이 요새는 적군이 생 앙투안 성문을 통한 침입을 방지하고, 왕실이 가장 좋아하는 별궁인 생폴 호텔을 보호했으며, 파리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경우 파리 외곽에 왕의 거주지로 사용되는 뱅센 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샤를 5세의 거점인 도피네로 빠져나갈 수 있는 도주로가 마련되었다. 그 외에도 생투앙쉬르센, 크레유, 멜룬, 몽타르지, 생제르맹앙레 등 다양한 왕실 거주지가 개조되었으며, 1373년 또는 1375년에 마른 강둑에 샤토 드 보테를 재건했다.

샤를 5세는 문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1367년 루브르 궁을 재건축하는 동안 최초의 왕립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는 이 도서관에 수많은 서적들을 보관하게 했는데, 그 중에는 과학 및 기술 작품, 점성술 및 역사에 관한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이나 《정치학》, 《윤리학》, 《경제학》 등을 니콜 오렘이 프랑스어로 번역한 서적, 솔즈베리의 존의 《폴리크라티쿠스(Policraticus)》의 프랑스어판 번역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프랑스 법학자 라울 드 프레슬이 프랑스어로 번역한 서적들이 있었다. 샤를 5세는 이 책들에 전임 국왕들과 자신이 직접 집필한 논평을 추가했다. 왕립 도서관은 프랑스 혁명 때 프랑스 왕립도서관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 문화부가 직접 관리하는 프랑스 최대의 도서관으로, 한국에서 귀중히 여기는 《직지심체요절》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2.8.8. 말년

2.8.8.1. 카를 4세의 방문
1378년 1월,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샤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외삼촌인 카를 4세를 파리에서 영접했다. 그는 연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왕국이 굴복하겠다는 뜻을 보이지 않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승리를 인정받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또한 샤를 5세는 저지대 국가로의 진출에도 관심이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 영토였던 도피네와 부르고뉴 공국 내 제국의 영토가 있는 문제 등을 말끔히 해결하기를 바랐다. 한편, 카를 4세는 자신의 외아들 바츨라프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되는 것에 샤를 5세가 전적으로 도와주기를 희망했다.

양자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협상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카를 4세는 샤를 5세로부터 잉글랜드와의 전쟁 과정을 쭉 전해들은 뒤 샤를 5세의 입장을 지지하고 잉글랜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프랑스군의 원정을 '재정복'이라고 칭했다. 도피네와 부르고뉴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왕국이 그 영토에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문제삼지 않을 의사를 내비쳤다. 한편, 샤를 5세는 카를 4세가 젊은 시절의 자신을 도와줬듯이 자신도 카를 4세의 후계자 바츨라프 4세의 성공적인 집권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2.8.8.2. 카를로스 2세의 몰락
1377년,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잉글랜드에 자신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항구와 성들을 그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샤를 5세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게 해주고 카스티야군과 맞서 싸우는 것을 도울 병력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시종장 자크 드 루를 요리사로 위장시켜서 파리의 프랑스 왕궁에 잠입시킨 뒤 샤를 5세를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진입하자마자 군대를 출동시켜 적이 더 해안 요새에서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게 묶어놓았다. 또한 노르망디에 파견되었던 아들 카를로스는 샤를 5세의 군대에게 패배해 항복한 후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 또한 자크 드 루는 1378년 3월 25일 코르베유에서 체포된 뒤 카를로스의 지시를 받들어 샤를 5세를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자백한 후 레스 할레스에서 공범자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1378년 6~7월, 샤를 5세로부터 카를로스의 음모를 전해들은 엔리케 2세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나바라 왕국을 전격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카를로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생장 피에 드 포르로 도주한 후 보르도로 가서 잉글랜드 장군 존 네빌에게 원조를 간청했다. 네빌은 토마스 트리벳 휘하의 소규모 병력을 나바라 왕국에 파견했지만, 그들은 나바라 왕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의사가 없었기에 얼마 안가 되돌아왔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카를로스는 1379년 3월 31일 투델라를 포함한 나바라 왕국 남부의 20개 요새를 카스티야 왕국에 넘겨주고 잉글랜드에 맞서 카스티야-프랑스 왕국과 군사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오네스 협약에 서명했다. 이후 카를로스 2세가 노르망디에 가지고 있던 에브뢰 백국을 포함한 모든 영지가 샤를 5세에게 몰수되었고, 오랜 세월 프랑스 왕실을 괴롭혔던 카를로스 2세는 더 이상 프랑스 문제에 관여하지 못했다.
2.8.8.3. 브르타뉴의 상실
1378년경, 잉글랜드군은 칼레, 보르도, 바욘 등 몇몇 항구만을 확고하게 통제했다. 반면, 그들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브레스트 등 여러 요새를 장악했고, 생 말로 항구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에서 새로운 항구를 확보하기 전에 브르타뉴를 확실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1378년 12월 18일 잉글랜드에 망명하고 있던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모든 영지를 몰수하고 브르타뉴를 왕실의 직할지로 삼겠으며,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브르타뉴의 총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지난날 장 4세와 오랜 세월 내전을 치러가며 대립했던 잔 드 팡티에브르는 프랑스 왕실이 브르타뉴 전역을 직할지로 삼아 자치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다수 브르타뉴 영주들 역시 여기에 동감했다. 그들은 1379년 4월 25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장 4세를 브르타뉴에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 대적하기로 결의했다. 임시 정부는 4명의 원수와 4명의 민정 수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국을 방어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구당 1프랑의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장 4세는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1379년 8월 3일 셍쎄흐벙에 상륙해 브르타뉴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때 프랑스 무관장 게클랭은 장 4세를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브르타뉴인인 그가 브르타뉴 영주들의 뜻에 동조하고 자신에게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게클랭은 왕이 자신에게 그런 의혹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격분해 무관장의 검을 왕에게 반환하고 카스티야로 가려 했다. 그러다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개입으로 샤를 5세의 신임을 되찾았다. 이후 샤를 5세는 브르타뉴 민심이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에서 무력을 앞세워 그곳을 평정한들 장기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장 4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망했고, 그의 형제들이 1381년 4월 4일 제2차 게랑드 조약을 체결하면서 브르타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의 화해가 이뤄졌다.
2.8.8.4. 서방교회 대분열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이동하면서 68년간 이어진 아비뇽 유수가 마무리되었다. 이후 그레고리오 11세가 1378년 3월 26일에서 27일 사이의 밤에 로마에서 선종했고,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놓고 로마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프랑스인 교황이 아비뇽에서 교회를 오랫동안 이끄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이탈리아인 추기경, 사제, 귀족, 그리고 시민들은 이번에야말로 로마 시민 또는 이탈리아인 교황이 선출되기를 바랬다. 1378년 4월 7일 로마에서 교황 선출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로마인들은 회의장 주위를 둘러싸고 추기경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4월 8일, 16명의 추기경들은 바리의 대주교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를 새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추기경들이 지나치게 세속적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며 강하게 비난했고, 공개 장소에서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이에 추기경 13명은 1378년 8월 2일 그에게 퇴위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9월 20일 폰디에 집결한 뒤 새 교황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들은 자신이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우르바노 6세 선출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클레멘스 7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다. 그들은 처음에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로부터 지지를 확보했고, 뒤이어 샤를 5세를 설득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샤를 5세는 전적으로 신뢰하는 고문인 느베르 주교 피에르 아이슬랭 드 몽타구의 설득을 받아들여 1378년 10월 6일에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자리를 잡았고,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부르고뉴,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키프로스, 사보이아 백국, 포르투갈 왕국 등 여러 국가가 잇따라 그를 지지했다. 반면에 잉글랜드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아일랜드 영지, 플랑드르,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은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이후 샤를 5세는 후대의 여러 신학자로부터 대분열을 초래한 인물로 규탄받았다.
2.8.8.5. 최후
1379년 8월, 랑그독 주민들이 가구당 12프랑의 난로세를 징수하는 것에 반발해 샤를 5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했다. 여기에 10월 21일 랑그독 총독 루이 1세를 따르는 원들이 몽펠리에에 도착했다가 주민들의 폭동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루이는 즉각 토벌대를 파견해 몽펠리에와 님스를 장악하고,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130,000 프랑의 벌금을 부과했다. 한편 샤를 5세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난로세를 폐지했다. 그 결과 군자금을 모을 재원이 부족해지면서, 프랑스 왕국의 재정복 정책은 둔화되었다.

1380년 7월 13일, 샤를 5세에 의해 무관장에 선임된 이래 130여개의 성과 마을을 재정복한 위업을 거뒀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샤토네프 드 랑동을 포위 공격하던 중 고열로 쓰러져 사망했다. 샤를 5세는 게클랭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신체를 심장, 내장, 살 및 뼈로 분할하여 4중으로 매장하는 특권을 내렸다. 그 후 루이 드 상세르 원수의 주관하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 행렬이 퓌앙블레에서 멈추는 동안, 시신은 적출된 뒤 첫 번째 방부처리를 거쳤으며, 내장은 그곳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며칠 후 몽페랑에 이르러 뼈에서 살을 분리하기 위해 향료로 맛을 낸 포도주 냄비에 시신을 삶았고, 살이 몽페랑의 코르들리에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해골과 심장은 브르타뉴를 향해 계속 향했다. 그러다가 샤를 5세로부터 고인의 유골을 생드니 대성당에 묻으라는 특명이 내려지면서 유골이 도로 파리로 향했고, 심장만이 브르타뉴에 이르러 디낭에 있는 자코뱅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게클랭이 사망한 지 2달 후인 1380년 9월 16일, 샤를 5세는 보테쉬르마르느에서 급사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급성 관상동맥 질환으로 인해 죽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의 유해는 3부분으로 나뉘었다. 시체는 생드니 대성당에 보내져 2년 전인 1378년에 사망한 아내 부르봉의 잔과 함께 묻혔으며, 내장은 모뷔송 수도원에 보내져 어머니 보헤미아의 보나 곁에 묻혔고, 심장은 루앙 대성당에 보내졌다. 이후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12살 밖에 안 되었기에, 그의 형제들이 권력을 공유했다.

3. 가족

  • 부르봉의 잔(1338 ~ 1378):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의 딸.
    • 잔(1357 ~ 1360): 요절.
    • 본(1358 ~ 1360): 요절.
    • 잔(1366): 요절.
    • 샤를 6세(1368 ~ 1422): 프랑스 국왕.
    • 마리(1370 ~ 1377): 요절.
    • 루이(1372 ~ 1407): 오를레앙 공작.
    • 이자벨(1373 ~ 1378): 요절.
    • 장(1374~1376): 요절.
    • 카트린(1378 ~ 1388): 숙부 베리 공작 장의 아들로 친사촌인 몽팡시에 백작 베리의 샤를과 약혼했으나 1383년 베리의 샤를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고 본인도 일찍 죽음.

4. 평가

백년전쟁을 시작한 이후 잉글랜드가 23년 동안 어질러놓은 것을, 겨우 6년 만에 원상복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복구해낸 명군이다. 부왕인 장 2세가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자신의 몸값을 프랑스 국민에게 부담시키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국왕 스스로 포로가 되었다. 당시 왕태자였던 샤를 5세는 국왕의 부재로 정치적 위기에 시달린 프랑스를 바로잡은 인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과 문화, 정치, 경제적 업적 등으로 인해 생전에 이미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현명왕(Charles le Sage)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역사가이자 군인인 필리프 드 메지에르(Philippe de Mézières, 1327?~1405)라는 인물은 샤를 5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샤를 6세에게 '무릇 정사를 돌보실 때에는, 부왕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십시오' 라는 말을 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현명왕'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중세 프랑스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나 해군제독 장 드 비엔, 대학자 니콜 오렘[5] 등을 등용한 것에서 보이듯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던 군주였다.

한국사로 치면 묘하게 고구려소수림왕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둘 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패하는 등 전란으로 피폐했던 나라를 재건해서 또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굳건히 다졌다는 점, 거기에 이들의 라이벌까지도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소수림왕의 경우 후계자인 동생조카 때에 국가가 폭발적으로 팽창했지만, 샤를 5세는 후계자가 부실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샤를 5세의 치적이 뒷날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게 되었지만.

참고지만 이 사람의 직계이자 발루아 왕조의 직계는 현손인 샤를 8세가 사망하면서 단절된다. 그래서 방계 집안인 발루아-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12세와 그의 5촌 조카이자 발루아-앙굴렘 가문의 프랑수아 1세가 뒤를 잇는데 그들도 모두 샤를 5세의 후손이다. 장남 샤를 6세는 그의 뒤를 이었고, 차남 오를레앙 공작 루이에게서 발루아-오를레앙 가문과 발루아-앙굴렘 가문이 분기된 것이다.

5. 현대 매체에서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PK 시나리오 4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등장한다. 전투는 평범하지만 지모와 정치력이 우수하며, 부하로 니콜 오렘과 뒤 게클랭이 포진하고 있다. 비록 영국에 전투 기계 흑태자가 있고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능력치도 우수하지만 영국왕 부자가 수명 때문에 얼마 못가 병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에 매우 유리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나리오 1 필리프 2세 치하의 프랑스보다도 플레이하기 더 쉬운 세력.

문제는 국왕 샤를 5세의 수명 역시 타국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길지는 않다는 점이고, 샤를 6세가 등장하지 않아서 사실상에서의 후계자는 없다. 그래도 샤를 5세의 능력치가 우수하고 도시 파리도 꽤 문화치가 좋은 곳이므로 충분히 우수한 후계자를 생산할 수 있다.

여담으로 상술된 대로 같은 시나리오에도 등장하는 신성 로마 제국 카를 4세의 외조카지만, 게임 시스템 상으로는 숙질관계가 구현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혈연관계가 구현되지 않았다.[6]


[1] 카를 4세와 룩셈부르크의 본의 아들들인 지기스문트 황제와 샤를 5세가 서로 5촌 친척이었다. 지기스문트(샤를 5세의 5촌 당숙), 샤를 5세(지기스문트의 5촌 조카)[2] Guillaume Caillet, 선한 사람을 약탈하고 잡아먹은 자라는 멸칭인 '자크 봉옴므(Jacqu' Bon-Homme)'로도 일컬어진다.[3] 장 3세 드 브르타뉴의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의 아들로, 아버지 장 드 몽포르는 1345년에 사망했다.[4] 샤를 5세는 장 3세 드 그레일리에게 자신을 섬기겠다고 맹세하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장 3세는 자신은 잉글랜드를 위해 무기를 들기로 맹세했다며 거부했다. 그렇게 수년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1376년 6월 8일에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살아갈 의지를 잃고 음식을 거부한 끝에 1376년 9월 7일에 옥사했다.[5] Nicole Oresme. 1325~1382. 본업은 신부였지만 과학, 경제학, 수학 등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중세 프랑스 최대의 학자 중 한 명. 한국으로 치면 정약용과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6] 비슷한 예로 같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있다. 여기도 똑같이 외삼촌-조카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