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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0F25><colcolor=#fff> 노르망디 공작 주장자 플란데런 백작 기욤 클리토 Guillaume Cliton | ||
이름 | 기욤(Guillaume) | |
별명 | 클리토(Cliton, 왕족의 혈통) | |
출생 | 1102년 10월 25일 | |
노르망디 공국 루앙 | ||
사망 | 1128년 7월 28일 (향년 25세) | |
플란데런 백국 알스트 | ||
지위 | 노르망디 공작위 주장자 | |
1118년 ~ 1128년 | ||
플란데런 백작 | ||
1127년 ~ 1128년 | ||
배우자 | 앙주의 시빌 (1123년 결혼 / 1124년 결혼 무효) | |
몬페라토의 조안나 (1127년 결혼) | ||
아버지 | 로베르 2세 | |
어머니 | 콘베르사노의 시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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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망디 공국 공작위 주장자, 플란데런 백국 백작.2. 생애
1102년 10월 25일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에서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와 콘베르사노의 영주 고프레도의 딸인 시빌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별명인 클리토(Cliton)는 왕족의 혈통을 의미한다. 어머니 시빌은 그를 낳은지 5개월 만에 사망했다. 1106년 9월 28일, 아버지 로베르 2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를 상대로 탕슈브레이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노르망디 전역이 헨리 1세의 수중에 넘어갔고, 당시 4살이었던 기욤은 헨리 1세에 의해 아크라 백작이며 로베르 2세의 사생아이자 기욤의 이복누이와 결혼한 엘리아 드 생상스에게 보내졌다.1110년, 헨리 1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대적하면서 노르망디의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전임 공작의 아들로서 정통성이 있는 조카 기욤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겨 그를 붙잡아두기로 하고, 엘리아에게 기욤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이 전해졌을 때 엘리아는 마침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엘리아의 측근 및 기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복 누이는 기욤을 노르망디에서 페르슈로 보내서 대영주 로베르 드 벨렘의 보호를 받도록 했다. 이에 분노한 헨리 1세는 엘리아를 반역죄로 기소해 노르망디 영지를 몰수했다. 이후 기욤은 노르망디 내 반 헨리 성향 영주들과 주변 국가로부터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잠재적인 계승자로 인식되었다.
1112년, 로베르 드 벨렘이 헨리 1세와의 전쟁에서 생포되자, 기욤은 플란데런 백국으로 망명해 보두앵 7세의 보호를 받았다. 1118년, 헨리 1세의 엄격한 중앙집권제 추진에 분노한 노르망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보두앵 7세가 파견한 군대와 합세해 노르망디 동부 전역을 휩쓸었으며, 기욤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보두앵 7세는 아크라 요새를 포위공격하던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듬해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가 꺾였다. 1119년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그 해 8월 20일 헨리 1세와 브레뮐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패배했다. 당시 루이 6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기욤은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프랑스군이 패배한 후 전장에서 탈출했다. 이때 그는 말을 잃어버렸는데, 헨리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윌리엄 애설링이 다음날 기욤에게 말을 돌려줬다. 프랑스의 개입이 실패하면서, 헨리 1세는 마침내 노르망디의 반항적인 귀족들을 물리치고 노르망디 공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 후 기욤은 루이 6세와 함께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노르망디 권리에 대한 합법성을 인정받으려 했지만, 헨리 1세의 6촌이었던 교황 갈리스토 2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노르망디 정복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루이 6세에게 기욤 지지를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결국 루이 6세는 헨리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기욤은 프랑스에서 잠자코 지내야 했다. 그러던 1120년 11월 25일, 헨리 1세의 유일한 합법적인 아들이자 후게자였던 윌리엄 애설링이 노르망디 해안에서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인해 익사했다. 이리하여 기욤은 윌리엄 1세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노르망디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의 상속인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나 헨리 1세는 기욤이 잉글랜드-노르망디 연합의 군주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의 누이 아델의 아들인 에티엔을 후계자로 선포하려 했다.
하지만 많은 노르망디 귀족들은 기욤의 권리를 지지하기로 했는데, 에브뢰 백작 아마우리 3세 드 몽포르, 멜룬 백작 갈레랑 4세 드 묄룬이 대표적인 기욤 지지파였다. 여기에 1122년 십자군에서 막 돌아온 앙주 백작 풀크 5세도 기욤을 지지했다. 그는 자기 딸 시빌과 기욤을 1123년에 결혼시키고, 멘 백작으로 세웠다. 그러나 헨리 1세는 교황청에 시빌과 기욤이 가까운 친족이니 근친혼이므로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고, 갈리스토 2세는 1124년에 이를 받아들였다. 1123년, 노르망디에서 기욤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 내부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구심점이 될 만할 인물이 없어서 분열되었다. 1124년 3월, 헨리 1세가 파견한 왕실군은 루앙 남동쪽 부르크테롤드에서 전투를 벌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주동자들을 생포했다. 루이 6세는 반란군을 지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반란군이 소멸되면서 무산되었다.
1124년 여름, 프랑스 왕국은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공격을 받았다. 루이 6세는 제국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기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걸 포기했다. 1127년, 기욤은 루이 6세의 왕비인 모리엔의 아델라이드의 이복누이인 몬페라토의 조안나와 결혼했다. 프랑스 국왕은 그에게 지참금으로 노르망디 국경에 있는 중요한 요새인 퐁투아즈, 쇼몽, 망트를 포함한 벡생 일대를 선물했다. 이제 벡생은 기욤이 노르망디를 공략하는 거점이 되었다. 여기에 1127년 3월 2일, 플란데런 백작 샤를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피살당하자, 루이 6세는 기욤의 할머니가 플랑드르의 마틸다 이니 기욤이 플란데런 백국의 계승권이 있다며 그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세웠다. 기욤은 1127년 3월 23일 아라스에서 플란데런 백작으로 취임했다.
1127년 5월 말, 기욤은 프랑스군과 함께 플란데런에 입성했다. 이후 국내 무역 및 수입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고, 국법과 도시의 특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생오메르 시에 공동 헌장을 부여했다. 그러나 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아들이었던 그의 삼촌 헨리 1세, 플란데런 귀족 기욤 드 이프르, 에노 백작 보두앵 4세, 티에리 드 알자스, 덴마크의 아르눌프 등 플란데런 백국 계승권이 있는 이들은 기욤의 집권에 반발해 군사 활동을 벌였다. 기욤은 이들의 공세를 순조롭게 물리쳤다. 생오메르에서 덴마크의 아르눌프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고, 루이 6세의 도움으로 에노 백작 보두앵 4세와 기욤 드 이프르를 플란데런에서 추방했다.
그 후 기욤은 헨리 1세로부터 노르망디를 되찾기 위해 부유한 플란데런 도시들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잉글랜드군과의 전쟁을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이때 그는 건물에 대한 새로운 세금과 박람회 거래 수수료를 부과했으며, 각 도시의 정치에 깊게 간섭하려 했다. 이에 시민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무역 상품인 직물 제조업에 가장 중요한 원재로인 양모를 공급하는 국가인 잉글랜드에 대한 기욤의 적대 행위는 플란데런 상인들의 이권을 위협했다. 이에 플란데런인들은 티에리 드 알자스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세우기로 마음먹었고, 헨리 1세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얻었다.
1128년 2월, 생오메르와 겐트 주민들이 기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브뤼헤가 3월에 반기를 들었고, 릴도 5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직 플란데런 백국 남쪽의 소규모 지역만이 기욤의 통제하에 남았다. 이에 기욤은 브뤼헤를 공격했고, 6월 21일 악풀 전투에서 티에리 드 알자스의 노르만-로렌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브라반트 변경백 조프루아 1세의 군대와 합세한 뒤 7월 12일 티에리 드 알자스가 피신한 알스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기욤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석궁에 치명상을 입었고, 1128년 7월 28일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생오메르의 베틴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티에리 드 알자스가 플란데런 백작으로 등극했다. 기욤 클리토는 생전에 두 차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