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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5세의 황후 | ||||
잉글랜드 왕국의 여군주 마틸다 Matilda | ||||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마틸다 (Matilda) | |||
출생 | 1102년 2월 7일 | |||
잉글랜드 왕국 윈체스터 또는 서튼 코트니 | ||||
사망 | 1167년 9월 10일 (향년 65세) | |||
프랑스 왕국 루앙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후 | |||
1114년 1월 7일 ~ 1125년 5월 23일 | ||||
잉글랜드의 왕 | ||||
1141년 4월 7일 ~ 1148년[1]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 영어 | Matilda (마틸다) | |
프랑스어 | Mathilde (마틸드) | |||
독일어 | Mathilde (마틸데) | |||
라틴어 | Mathildis (마틸디스) | |||
배우자 | 하인리히 5세 (1114년 결혼/1125년 사망) | |||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1128년 결혼/1151년 사망) | ||||
자녀 | 헨리 2세, 조프루아, 기욤 | |||
아버지 | 헨리 1세 | |||
어머니 |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 |||
형제 | 윌리엄 애설링 | |||
종교 | 가톨릭 (세례명:마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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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자 잉글랜드 왕국의 여성 군주. 무정부시대 시기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스티븐 왕을 상대로 대결한 것으로 유명하다.2. 생애
2.1. 초년기
1102년 2월 7일,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와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마틸다의 딸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윌리엄 애설링이 있었으며, 아버지가 여러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제 20여 명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아마도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책을 읽고 종교적 도덕에 대해 교육받았을 것이다. 1108년, 헨리 1세는 마틸다와 윌리엄 애설링을 당대 잉글랜드의 저명한 지식인이었던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에게 맡겼다. 마틸다의 외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당대 사람들은 마틸다가 매우 아름답다고 묘사했지만, 이는 연대기 작가들이 관례상 밝히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2.2. 첫번째 결혼
<colcolor=#fadb43> |
<colbgcolor=#810000> 첫번째 남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 |
1108년 말이나 1109년 초, 독일왕 하인리히 5세는 노르망디에 사절을 보내 마틸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이 결혼은 헨리 1세에게 무척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하인리히 5세가 속한 잘리어 왕조는 유럽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가문 중 하나였으니, 딸의 위신을 드높일 수 있었다.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기욤 클리토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을 압박하는 프랑스 왕국을 견제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 5세는 마틸다의 지참금으로 10,000 마르크를 받기로 했는데, 이는 하인리히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원정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었다. 이 거래의 마지막 세부 사항은 1109년 6월 웨스트민스터에서 합의되었고, 마틸다는 1110년 2월에 잉글랜드를 떠나 독일로 향했다.
마틸다와 하인리히 5세는 리에주에서 처음 대면한 뒤 위트레흐트로 여행을 떠났고, 1110년 4월 10일에 공식적으로 약혼했다. 7월 25일, 마틸다는 마인츠에서 열린 의식에서 독일 왕비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당시 마틸다는 겨우 8살이었고, 하인리히 5세는 24살이었다. 그녀는 약혼 후 트리어의 브루노 대주교의 보호를 받아 그로부터 독일 문화, 예절, 정치에 대해 교육받았다. 1114년 1월, 마틸다와 하인리히 5세의 결혼식이 웜스에서 열렸다. 이후 마틸다는 독일에서 왕비로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결혼 직후, 하인리히 5세가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와 다른 여러 독일 공작들을 체포한 것에 반발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교황 파스칼 2세가 이에 호응해 하인리히 5세를 파문했다. 이에 하인리히 5세는 반란을 진압한 뒤 1116년 초 마틸다와 함께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마틸다는 이 시기에 왕실 보조금을 후원하고, 청원자들을 상대했으며, 의례에 참여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이탈리아 북부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힘을 기울인 뒤 1117년 초 로마로 진군했다. 파스칼 2세는 제국군을 피해 달아났고, 교황 특사 모리스 부르댕이 로마에 입성한 두 사람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왕관을 씌웠다. 이리하여 하인리히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칭했고, 마틸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를 칭했다. 마틸다는 평생 자신의 인장과 헌장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후를 칭할 정도로 이 칭호를 애지중지했다. 그러나 모리스 부르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집전할 자격이 있는지는 논란이 있었고, 파스칼 2세는 모리스 부르댕을 파문했다. 훗날 부르댕은 새 교황 갈리스토 2세에 의해 폐위된 뒤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118년, 하인리히 5세는 독일에서 발발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돌아갔고, 마틸다는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섭정으로 남았다. 이후 2년간 어떻게 통치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상당한 정무 경험을 했을 것이다. 1119년, 마틸다는 북쪽으로 돌아가 로타링기아에서 하인리히 5세를 만났다. 당시 하인리히 5세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과 타협점을 찾느라 바빴다. 1122년, 하인리히 5세와 마틸다는 웜스 공의회에 참여했다. 이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5세는 주교에게 주교 휘장을 수여하는 권리를 포기하기로 하면서, 교회와의 오랜 분쟁을 해결했다. 그 해 마틸다는 잉글랜드에 있는 아버지를 방문하려 했지만, 플란데런 백작 샤를 1세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1125년 5월 23일, 하인리히 5세가 위트레흐트에서 암에 걸려 사망했다. 마틸다는 하인리히 5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후 마틸다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보호를 받았고, 한때 제국의 휘장을 소유했다가 아달베르트 대주교의 설득을 받고 그에게 휘장을 건넸다. 이제 23세가 된 마틸다는 자녀가 없기 때문에 제국의 섭정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수녀가 되거나 재혼하는 두 가지 선택지만 남았다. 여러 독일 공작들이 그녀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노르망디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제국 내의 영지를 포기하고 개인 보석 컬렉션, 황후의 휘장, 하인리히 5세의 개인 왕관 2개, 대야고보의 손 등 여러 성유물을 가져갔다.
2.3.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1120년 11월 25일, 마틸다의 남동생 윌리엄 애설링이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합법적인 후계자를 잃어버린 헨리 1세는 아들을 낳기 위해 하부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루뱅, 브뤼셀,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딸인 루뱅의 아델리자와 재혼했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 후 프랑스 국왕 루이 6세, 앙주 백작 풀크 5세가 기욤 클리토를 내세우며 노르망디 공국을 공략하려 들고, 노르망디 귀족 상당수도 기욤 클리토를 옹립하고자 봉기를 일으키자, 헨리 1세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125년 조카인 에티엔 드 블루아와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에티엔을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그러던 중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 1세는 하인리히 5세의 황후였던 딸 마틸다를 소환한 뒤 마틸다를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차기 군주로 내세우기로 마음먹었다. 1126년 크리스마스, 잉글랜드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초대되어 마틸다와 그녀의 미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여자가 왕위 계승 후보로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궁정 신하 상당수는 여왕의 등극에 반대했고, 루이 6세는 마틸다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에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헨리 1세는 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결혼 상대를 물색했다.
2.4. 재혼
<colcolor=#fadb43> | |
<colbgcolor=#810000> 두번째 남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
헨리 1세는 1127년 초부터 공식적으로 마틸다의 새 남편을 물색한 끝에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장남 조프루아 5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당시 헨리 1세의 끈질긴 적수였던 기욤 클리토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지원으로 플란데런 백작이 된 뒤 군대를 대폭 증강해 노르망디 공국을 공략하려 들었다. 여기에 앙주 백국도 기욤 클리토를 지지해 헨리 1세를 노르망디에서 축출하려 했다. 헨리 1세는 이런 상황에서 앙주 백작의 아들과 자기 딸을 결혼시키면 앙주 백국이 침략할 생각을 접을 테니 양면전선을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조프루아 5세는 당대 유럽 최고의 미남으로 추앙받았고, 마틸다보다 11살 연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하는 것을 껄끄러워 했다. 그녀는 한때 신성 로마 황후였던 자신이 일개 백작의 아내가 되는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투르 대주교 힐데베르트 드 라바르댕이 헨리 1세의 부탁에 따라 마틸다를 설득했고, 결국 그녀는 동의했다. 1127년 5월, 마틸다는 이복 오빠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브라이언 피츠카운트와 함께 루앙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조프루아 5세와 약혼했다. 1128년, 풀크 5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 레반트로 떠나면서, 자신의 영지를 아들 조프루아 5세에게 넘겼다. 헨리 1세는 미래의 사위를 기사로 선임했고, 마틸다와 조프루아는 1128년 6월 17일 르망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은 처음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듯했다. 부부는 잘 지내지 못했고, 마틸다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내지 않아 조프루아 5세를 떠나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또한 마틸다가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할 노르만 요새들은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는 1131년에 화해했고, 그 해 9월에 열린 국왕 평의회에서 조프루아 5세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때 귀족들은 마틸다를 헨리 1세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기 위한 집단 충성 서약을 했다.
1133년 3월, 마틸다는 르망에서 미래에 헨리 2세가 될 첫 아들을 낳았다. 헨리 1세는 이 소식에 크게 기뻐해 루앙에서 르망으로 곧장 달려가서 그녀에게 축하를 건넸다. 1134년 오순절에 두번째 아들 제프리가 루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산은 극도로 힘들었고, 마틸다는 죽음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 그녀는 베크 수도원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헨리 1세는 루앙 대성당에 묻히길 바랐기에 한동안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마틸다가 나중에 회복되면서 이 논쟁은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1135년 초,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는 헨리 1세와 갈등을 벌였다.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왕실 성을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금 즉시 자신과 조프루아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1세는 이걸 받아들일 경우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영구적으로 확립할 것을 우려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얼마 후, 노르망디 공국 남부에서 퐁티외 백작 기욤 1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가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헨리 1세는 그 해 가을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곧바로 노르망디로 향했다. 그러던 1135년 11월, 헨리 1세는 리용라포레에서 사냥하다가 급병에 걸렸고 11월 1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헨리 1세가 죽기 전에 왕위 계승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마틸다를 옹호하는 연대기 작가들은 헨리 1세가 자신의 모든 영지를 딸에게 하사하겠다는 의도를 재확인했다고 밝혔지만, 마틸다에게 적대적인 연대기 작가들은 헨리 1세가 이전의 계획을 포기하고 귀족들에게 마틸다에게 충성서약을 하도록 강요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고 주장했다.
2.5. 내전으로 가는 길
헨리 1세가 사망했을 무렵, 마틸다는 남편과 함께 앙주에 있었으며,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기에 거동이 불편했다. 또한 두 사람은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반란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기에 노르만 귀족들에게 경원시되었다. 더욱이, 헨리 1세의 원정에 동행했던 귀족들은 고인이 된 왕이 매장될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겠다고 맹세했고, 이 때문에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부 노르만 귀족은 블루아 백작 티보 4세를 왕으로 옹립할 지를 논의했다.헨리 1세의 조카이자 티보 4세의 동생인 에티엔 드 블루아는 당시 불로뉴에 있다가 헨리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군대와 함께 영국해협을 항해해 런던 외곽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도착했다. 1135년 12월 22일, 에티엔은 윈체스터 주교인 남동생 앙리 드 블루아와 노퍽 백작 휴 비고드의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으로 등극했다. 스티븐은 교회에 더 많은 자유와 특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해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냈다. 헨리 1세 생전에 그가 마틸다의 여왕 등극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한 점이 문제였지만, 앙리 드 블루아는 헨리 1세가 궁정에 그 맹세를 하도록 강요한 것은 잘못 되었으며, 스티븐이 등극해야 잉글랜드 왕실이 안정될 거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휴 비고드도 헨리 1세가 임종하기 직전에 왕위 계승자를 마틸다에서 스티븐으로 바꿨다고 주장했다. 이에 귀족들은 스티븐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다.
1136년 초,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아내 마틸다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도록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해 아르장탕 주변의 여러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앙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노르만 귀족들의 저항이 심화되자, 그는 더 이상의 공세를 그만두고 앙주로 철수했다. 스티븐은 내란과 스코틀랜드의 침공, 웨일스인들의 봉기에 대처하느라 노르망디로 갈 여유가 없었기에, 심복인 갈레랑 4세 드 묄룬을 노르망디 왕실 보안관으로 선임했다. 갈레랑 4세는 노르망디 공국 방어 조직을 맡았고, 1136년 9월 조프루아 5세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마틸다 지지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로저 드 토스니를 체포했다. 한편, 마틸다는 1136년 7월 22일 아르장탕에서 셋째 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1137년, 노르망디로 이동한 스티븐 왕은 프랑스 국왕 루이 6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 만났다. 루이 6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슈 4세가 차기 노르망디 공작이 되는 걸 인정했고, 위세를 떨치는 앙주 백국을 견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스티븐은 1135년 말부터 조프루아 5세가 지배하는 노르망디와 앙주 국경 요충지인 아르장탕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가 최근에 고용한 플란데런 용병대장인 기욤 디프르와 현지 노르만 남작들이 지휘하는 플란데런 용병들 사이에 마찰이 벌어졌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대로는 원정을 벌여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스티븐 왕은 조프루아 5세와 협의한 끝에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연간 2,000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2.6. 내전(1138 ~ 1153)
2.6.1.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반란과 마틸다의 잉글랜드행
헨리 1세의 사생아이며 글로스터 백작인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글로스터셔와 웨일스 국경지대의 여러 주에서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했으며, 카디프 성과 사우스 웨일스의 글래모건 일대의 영주로 군림했다. 그는 스티븐 왕이 웨일스인들의 봉기에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며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스티븐 왕이 플란데런 용병대장 기욤 디프르와 쌍둥이 형제 로베르 드 보몽, 갈레랑 4세 드 묄룬을 총애하면서 자신의 권력이 축소되자, 그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고 이복 여동생인 마틸다를 옹립하기로 마음먹었다.1138년, 로버트는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고 찬탈자 스티븐을 물리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합류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마틸다 지지 세력의 입지를 급격히 강화했다. 잉글랜드 서부 및 남부 주의 앵글로색슨-노르만 귀족 상당수가 마틸다 편으로 넘어갔다. 스티븐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맞대응했다. 그는 헤리퍼드와 슈루즈버리, 바스를 접수했다. 로버트가 왕실군에게 밀려 브리스톨로 후퇴하자, 스티븐 왕은 브리스톨 시를 포위했지만 공략하기에는 방비가 너무 탄탄한 걸 확인하고 주변 지역을 습격하고 약탈한 뒤 런던으로 귀환했다. 그 후 로버트는 노르망디로 이동하여 갈레랑 4세 드 묄룬과 대적하면서, 마틸다에게 잉글랜드로 직접 와달라고 청했다.
1139년,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는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해 상당한 지역을 공략했다. 이후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너고자 대규모 함대를 건설했다. 또한 마틸다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 왕위는 자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초 스티븐 왕이 등극했을 때 이를 승인했던 인노첸시오 2세는 스티븐 왕을 이미 인정했는데 섣불리 바꾸는 건 어렵다며, 그녀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교황청이 확실히 거절한 것도 아니었기에, 마틸다 측은 교황청이 자신의 주장을 고려할 만하다고 여긴다고 확신했다.
1139년 8월, 볼드윈 드 레비에르가 마틸다가 잉글랜드로 건너갈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도싯 주의 웨어햄을 침공했다. 그러나 스티븐 측 수비대가 그를 격퇴해 남서쪽으로 밀어냈다. 그 해 9월 30일, 마틸다는 헨리 1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자신의 계모인 루뱅의 아델리자의 초대를 받아 아룬델로 건너간 뒤,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기사 140명의 호위를 받았다. 마틸다가 아룬델 성에 머무는 가운데, 로버트는 반란에 대한 지원을 모으고 스티븐 왕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걸 고려하던 헤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즈와 접촉하기 위해 월링포드와 브리스톨로 이동했다.
그 사이,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이끌고 아룬델 성을 포위했다. 이제 아룬델 성을 함락하고 마틸다를 생포한다면, 반란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형제 앙리 드 블루아가 제시한 휴전 조약에 동의하기로 했다. 휴전 조약의 전체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티븐 왕이 아룬델 포위를 풀었고, 마틸다는 아룬델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해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재회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스티븐이 마틸다를 놓아준 이유는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기사도를 신봉하던 스티븐 왕이 여자를 괴롭히는 건 기사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고 풀어줬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아룬델 성이 거의 난공불락이라 공략이 쉽지 않으니, 마틸다를 풀어주는 대신 로버트를 무너뜨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마틸다는 로버트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브리스톨에 도착했고,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그녀에게 가세했다. 이제 마틸다는 글로스터 남서부와 브리스톨, 데본, 콘월, 웨일스 국경지대, 옥스퍼드와 월링포드에 이르는 잉글랜드 남서부 일대를 지배했으며, 브리스톨에 궁정을 세웠다. 스티븐은 마틸다 세력의 동쪽 끝 거점인 월링포드를 포위했지만, 성의 방비가 너무 견고한 데다 상당한 양의 보급품이 성에 쌓여 있어서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공성용 성 2개를 인근에 세워서 월링포드를 봉쇄한 뒤 서쪽으로 이동했다. 1140년, 헤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월링포드 외부의 공성용 성 중 하나를 공략한 뒤 파괴했다.
1140년 초, 지난 해에 스티븐에게 성을 몰수당했던 엘리 주교 나이젤이 케임브리지셔의 펜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스티븐은 즉시 펜랜드에 군대를 파견했다. 펜랜드는 이스트 미들랜드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잉글랜드 동부의 천연 습지 지역이라고 군대가 진군하기 까다로웠지만, 스티븐은 부교를 사용해 둑길을 세움으로써 병사들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나이젤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그 사이,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이끄는 군대가 잉글랜드 서부의 워햄, 우스터 및 보몽 가문의 영지를 대거 접수했고, 도싯, 윌트셔, 버크셔 및 옥스퍼드셔에 있는 스티븐 왕과 추종자들의 영지를 습격해 주민들을 학살하고 농촌을 파괴했다. 내전은 곧 다양한 봉건 영주들이 적의 땅에 대한 지속적인 약탈전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국가가 황폐해지고 행정부가 붕괴되었다.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 백작이 통치하는 영토의 경계는 코츠월드 언덕을 따라 이어졌는데, 언덕의 양쪽 땅은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점차 버려졌다. 양자는 바스에서 평화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입장차가 너무 컸기에 결렬되었다.
2.6.2. 마틸다의 런던 입성과 축출
1141년 2월 2일, 스티븐 왕이 링컨 전투에서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이끄는 적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스티븐 왕은 글로스터로 이송되어 마틸다를 만났고, 고위 포로들이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브리스톨 성으로 옮겨졌다. 그는 처음에는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감금되었지만, 탈출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지면서 사슬에 묶였다. 이제 마틸다는 잉글랜드 여왕으로 등극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동의와 웨스트민스터에서의 대관식이 필요했다. 1141년 3월 3일, 마틸다는 윈체스터 주교이자 잉글랜드의 교황 특사이며, 스티븐 왕의 형제인 앙리 드 블루아와 접촉했다. 앙리는 마틸다와 협의한 끝에, 잉글랜드 성직자들을 이끌 권리를 자기에게 주는 대가로 마틸다를 "Domina Anglorum(잉글랜드의 여군주)"로 받들기로 했다. 그는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각지의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을 초빙한 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틸다에게 왕실의 금고를 여는 열쇠를 넘기고 주교와 대수원장들이 그녀에게 복종하도록 했으며, 그녀에게 여전히 대적하는 자들을 파문하기 시작했다.스티븐 왕에 의해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임되었던 베크의 테오발드는 윈체스터 주교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지만, 마틸다에게 즉시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충성 서약을 바꾸기 전에 스티븐 왕과 이야기하기를 고집했다. 이후 수도자들과 함께 브리스톨로 찾아간 그는 감옥에 갇혀 있던 스티븐과 상의했다. 스티븐은 그가 새 여왕에게 충성하는 걸 허가하기로 했고, 테오발드는 4월에 윈체스터로 가서 윈체스터 대주교와 합류한 뒤 부활절 이후 스티븐을 폐위하고 마틸다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마틸다는 이 자리에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여군주"로 선포되었다. 이후 열린 행사에서 그녀의 추종자들이 충성을 바쳤지만, 상당수 대영주들은 그녀를 따르길 꺼려서 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스티븐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런던 시민들도 마틸다 여왕에게 복종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겨서 사절을 일부러 늦게 보냈다.
한편, 스티븐 왕의 왕비로서 런던에 군림했던 불로뉴의 마틸다는 남편을 풀어주고 아들 외스타슈 4세가 영지를 물려받는 걸 허락해 준다면, 남편이 잉글랜드 왕위를 완전히 포기하고 순례자로 살도록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틸다 여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6월에 런던으로 향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켄트 지방으로 피신했고, 마틸다 여왕은 윈저 성에 자리잡은 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를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였던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런던 사절단에게 몹시 오만하게 대했고, 높은 세금을 즉시 납부하라고 명령했다. 가뜩이나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런던 시민들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얼마 후,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가 기욤 디프르와 플란데런 용병대, 그리고 켄트 출신 민병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해 인근 농촌을 약탈했다. 이에 시민들은 그녀에게 호응하기로 마음먹었고, 당초 마틸다 여왕을 추대하기로 했지만 형제를 풀어주길 거부하고 조카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걸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었던 앙리 드 블루아 주교도 여기에 가세했다. 6월 24일, 런던 수비대가 봉기를 일으켜 윈저 성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마틸다 여왕은 가까스로 탈출해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2.6.3. 윈체스터 전투
1141년 8월 21일, 마틸다와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자기들을 배신한 윈체스터 주교 앙리 드 블루아에게 복수하고 다시 한 번 영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기로 마음먹고 윈체스터로 진군했다.(윈체스터 전투) 그들은 윈체스터 시를 장악했고, 앙리 드 블루아는 올베시에 있는 성채로 피신했다. 마틸다는 당장 성채를 포위해서 공략할 수 있었지만, 그러는 대신 앙리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가기를 거부하고 런던으로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즉시 윈체스터로 가기로 하고, 기욤 디프르와 함께 군대를 일으켰다. 9월 중순, 불로뉴의 마틸다가 이끄는 군대가 윈체스터 외곽에 자리잡았다. 이리하여 윈체스터 성채를 포위하는 윈체스터 시의 마틸다 여왕 군대가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의 군대에게 포위당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당초 마틸다 왕비의 편에 섰던 에식스 백작 제프리 드 맨더빌과 펨브로크 백작 길베르트 드 클레어는 전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불로뉴의 마틸다에게 귀순했다. 여기에 기욤 디프르가 윈체스터 북족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옥스퍼드와 글로스터로 향하는 경로를 차단했으며, 런던 민병대가 추가로 윈체스터로 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9월 14일에 윈체스터를 탈출하기로 했다. 그는 마틸다 여왕의 탈출을 지켜주기 위해 후방에 남기로 했고, 콘월 백작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이 정예병으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고 앞서 가기로 했다. 그들은 윈체스터 서쪽 문에서 몰래 나와서 솔즈베리로 향했다.
얼마 후,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는 적이 달아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각 윈체스터 시로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장병들은 곧장 윈체스터 시로 진입했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이들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천천히 후퇴했다. 선봉대는 윈체스터에서 북서쪽에서 약 8.5마일(13.7km) 떨어진 곳에서 테스트 강을 무사히 도하한 뒤 마틸다를 글로스터로 데려다줬지만, 나머지 부대는 적군에게 궤멸되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테스트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적군에게 에워싸인 채 분전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생포된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회유했지만, 로버트는 자신은 끝까지 마틸다 여왕을 따를 거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불로뉴의 마틸다는 마틸다 여왕에게 자기 남편인 스티븐 왕을 풀어주면 로버트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로버트 없이는 군대를 이끌 지휘관이 딱히 없었던 마틸다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1141년 11월, 양측은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교환했다. 그 후 윈체스터 대주교 앙리는 회의를 소집한 뒤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했던 결정을 뒤집고 스티븐의 통치 합법성을 재확인했고, 1141년 크리스마스에 스티븐 왕과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의 새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2.6.4. 옥스퍼드 공방전과 윌튼 전투
로버트와 스티븐 왕의 교환이 이뤄진 뒤, 마틸다는 옥스퍼드에 자리를 잡고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옥스퍼드는 왕궁이 별도로 있고, 강과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했으며,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사우샘프턴에서 북쪽으로 가는 주요 경로의 교차점에 있어 큰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옥스퍼드를 통제한 이는 런던과 북부로의 접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마틸다가 옥스퍼드로 데려간 군대의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소규모 왕실 의회를 주기적으로 열었고,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주민들의 청원을 접수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런던과 가까운 이곳에서 병력을 끌어모은 뒤 런던을 도모하려는 계획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1142년 6월 24일, 마틸다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좀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남편에게 보내 대규모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당시 스티븐은 1142년 부활절부터 중병에 시달렸고,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마틸다는 로버트가 앙주로 잠시 떠나도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티븐은 이 무렵에 건강을 회복했고, 곧바로 군대를 소집해 마틸다 세력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항구 도시인 웨어햄을 공략해, 마틸다가 앙주 백국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을 끊었다. 뒤이어 시렌세스터, 램턴, 그리고 뱀튼 성을 확보했다. 이 성들을 공략하면서, 옥스퍼드와 잉글랜드 남서부 사이의 연락망이 끊어졌고, 옥스퍼드로 진군할 길이 열렸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갖춘 뒤, 스티븐은 옥스퍼드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1142년 9월 26일, 스티븐 왕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옥스퍼드 인근 강둑에 도착했다. 이들이 옥스퍼드로 진군하려면, 여러 수로를 도하해야 했다. 수비대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지만, 스티븐의 군대는 악착같이 밀어붙인 끝에 성 가까이 이동했다. 한 부대가 뒷문으로 옥스퍼드에 진입하자,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했던 옥스퍼드 수비대는 도시를 버리고 성채로 도주했다. 도시는 철저히 약탈당하고 불태워졌고, 수많은 시민이 살해당했거나 몸값을 위해 잡혔다. 마틸다는 얼마 안 남은 병력만 거느린 채 옥스퍼드 성에서 외롭게 농성해야 했다.
옥스퍼드 성에는 식량이 충분했고 방어 시설도 튼튼했기에 장기 포위가 불가피했다. 스티븐은 주변 지역을 직접 약탈해 포위된 자들이 식량을 찾는 걸 막았고, 종탑, 공성추, 투석기를 포함한 다양한 공성 무기들을 제작해, 성벽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보몬트 궁전을 본부로 삼고 성채를 쭉 살펴본 그는 북쪽 성벽과 보몬트 궁전 사이에 위치한 언덕 2개에 투석기를 가져온 뒤 북쪽 성벽에 큰 바위를 퍼붓도록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성에 피해를 입히는 것 외에도 주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했다. 이 무렵 옥스퍼드에서 약 13마일(21km) 떨어진 월링포드 성에 마틸다의 추종자들이 사병들을 데리고 집결했지만,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적군을 어찌할 엄두를 못 내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래도 옥스퍼드 수비대는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12월이 다가왔을 때 식량이 부족해져 기아의 위협을 받았다.
1142년 12월,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300~400명 가량의 병사와 52척의 함선에 탑승한 기사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여기엔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도 동행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 본인은 현재 지배하고 있는 노르망디 공국에서 잉글랜드로 가기를 거부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옥스퍼드에서의 소식을 전해듣자 웨어햄을 포위 공격했느데, 아마도 스티븐 왕이 포위를 풀고 웨어햄을 구출하려고 달려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이를 무시하고 옥스퍼드 공방전을 이어갔다.
그러던 12월 초 어느 날 밤, 마틸다는 기사 4명과 함께 변장한 채 성 조지 타워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당시 공방전이 오래 지속되면서 스티븐 군대 내부의 많은 병사가 탈영하고 다른 이들은 경계를 게을리 했다. 그녀는 방심한 적군 진영을 몰래 지나간 뒤 추종자들이 모여 있던 월링포드에 도착했다. 그녀의 탈출은 하느님이 그녀에게 행운을 안겼다는 풍문이 퍼질 정도로 기적적인 일로 여겨졌다. 옥스퍼드 성채는 마틸다가 탈출한 다음 날 항복했고, 스티븐은 그곳에 새 수비대를 배치했다.
장기간 포위전을 이어간 끝에 옥스퍼드를 공략했지만, 스티븐 왕은 옥스퍼드에 있을 줄 알았던 마틸다가 월링포드로 탈출한 걸 알게 되자 낙담했다. 그는 월링포드로 진군해 또다른 포위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1143년 초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 후 전력을 보충하며 원정을 재개할 준비를 한 그는 마틸다를 여전히 따르는 잉글랜드 서부 지방을 평정하기 위한 새로운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마틸다의 군대가 접수한 항구도시 웨어햄을 탈환하려 했지만, 수비대가 강력한 방어 시설에 힘입어 굳건히 버티자 대신 솔즈베리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던 중 윈체스터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리기로 하고, 윌튼 수도원에 한동안 주둔했다.
그러는 사이, 마틸다의 군사령관인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스티븐을 기습할 준비를 했다. 1143년 7월 1일 일몰 무렵, 윌튼 수도원 주위를 에워싼 그는 공격을 감행했다. 스티븐 왕은 뒤늦게 적이 포위했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로버트가 기병대를 이끌고 연이어 돌격하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했고, 그의 군대는 사분오열되었다. 그러다가 스티븐은 어둠을 틈타 불타는 수도원에서 탈출했고, 집사 윌리엄 마르텔은 후위대를 이끌고 로버트에 대적하다가 생포되었다. 로버트의 군대는 전투가 끝난 뒤 윌튼 일대의 여러 집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온 스티븐 왕은 윌리엄 마르텔을 돌려받는 대가로 서본 성을 로버트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로버트의 세력은 브리스톨 해협에서 도싯 남쪽 해안까지 확대되었다.
2.6.5. 전황 악화
1141년,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를 재침해 센 강 남쪽과 리슬강 동쪽의 하부 노르망디 일대를 석권했다. 이에 노르망디에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조프루아 5세에게 모든 걸 잃을 것을 우려해 스티븐 세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왕의 친구이자 고문이며, 노르망디 보안관이었던 갈레랑 4세 드 묄룬은 1141년 중반에 마틸다에게 귀순한 뒤 자기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건너갔고, 잉글랜드 내 자기 영지인 우스터셔를 마틸다에게 넘겼다. 갈레랑 4세 드 묄룬의 쌍둥이 형제인 로베르 드 보몽도 비슷한 시기에 전장에서 물러났다. 여기에 주화 주조에 대한 왕실의 통제가 무너지면서 지역 귀족과 주교가 생산한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했다.1143년 12월 24일, 마틸다 세력의 주요 장성인 헤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사냥하던 중 한 부하가 사슴을 향해 쏜 화살이 자기한테 날아와서 박히는 바람에 사망하는 악재에 직면해야 했다. 1144년 1월,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에 입성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프루아 5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했다. 1145년, 스티븐 왕이 잉글랜드 서부로 공세를 개시해 옥스퍼드셔의 패링던 성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해 말,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막내아들이자 크리클레이드의 영주인 필립 피츠로버트가 대세가 스티븐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스티븐 왕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때 그는 초대 콘월 백작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과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를 기습해 체포한 뒤 스티븐 왕에게 넘겼다. 하지만 스티븐 왕은 비열한 방식으로 이득을 챙길 수 없다며 몸값도 받지 않고 그들을 풀어줬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레지널드는 스티븐 왕과 화해했고, 스티븐으로부터 콘월 백작 작위를 인정받았다. 그 후 스티븐 왕은 파링턴에서 마틸다 추종 세력을 물리치고 월링포드와 템즈강 계곡의 마틸다 세력을 잉글랜드 서부의 주력군으로부터 차단했다. 또한 로버트의 영지인 글로스터와 브리스톨이 스티븐 왕이 파견한 기병대의 습격으로 황폐해지자, 로버트는 스티븐 왕과 휴전 협상을 해야 했다.
1147년,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서리의 파넘을 공략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브리스톨로 돌아갔지만 열병에 걸려 1147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마틸다 진영의 핵심 장성이었던 로버트가 사망하자, , 많은 귀족들이 스티븐 왕의 편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스티븐은 거듭된 반란에 시달리는 데다 많은 귀족들이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자 잉글랜드를 떠나면서 마틸다를 여전히 따르는 성들을 공략하기 위한 군대를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다.
1147년 말,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이 용병 부대를 기반으로 삼아 잉글랜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용병대에게 급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기에, 군사 작전을 수행하긴 커녕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스티븐 왕이 급료를 대신 지불해주는 대신 헨리가 잉글랜드를 떠나도록 했다. 그가 기사도 정신을 또 발휘했을 수도 있고, 전쟁을 평화롭게 끝내기 위해 헨리와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걸 고려했을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2.6.6. 마틸다의 노르망디행과 내전 종결
마틸다는 내전이 한창이던 1142년 전략적으로 중요한 데비지스 성을 점령해 그곳에서 궁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데비지스 성은 솔즈베리 주교인 조셀린 드 보훈의 영지였다. 이 때문에 마틸다는 조셀린과 갈등을 벌여야 했고, 1146년 후반기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로부터 성을 돌려주지 않겠다면 파문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마틸다는 시간을 벌기 위해 1148년 초 노르망디로 떠나면서, 데비지스 성을 아들 헨리에게 맡겼다. 이후 헨리는 수년간 데비지스 성을 돌려주는 걸 미뤘다.노르망디로 향한 마틸다는 루앙에 궁정을 다시 세웠고, 그곳에서 남편 및 자식들과 재회했다. 마틸다는 루앙 바로 남쪽에 위치한 노트르담 뒤 프레 수도원에 딸린 개인 거주지와 헨리의 궁전 근처에서 살았다. 그 후 그녀는 노르망디 행정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잉글랜드 여왕이 되려는 뜻을 접는 대신 아들 헨리를 지원했다. 1148년, 테루안의 주교를 로마로 보내 헨리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남편 조프루아 5세와 함께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51년, 조프루아 5세가 사망했고 헨리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153년 초, 헨리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1152년부터 월링포드 공방전을 치르던 스티븐 왕의 군대에 접근해 공성용 성 하나를 포위했다. 당시 옥스퍼드에 있던 스티븐 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헨리를 쳐부수려고 진군했다. 그 후 양측은 템즈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제 전쟁이 곧 벌어지려 했을 때, 오랫동안 이어지는 내전이 지긋지긋해진 귀족들이 협상하자고 간청했고, 성직자들도 휴전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 왕과 헨리 모두 자신들을 위해 싸우길 바라지 않는 귀족들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그들의 호응 없이는 전쟁을 이어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협상하기로 했다. 윈체스터 주교 앙리 드 블루아와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의 중재 끝에, 헨리 왕자와 스티븐 왕은 11월에 월링포드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 서로 키스했다. 협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스티븐 왕은 헨리 왕자를 후계자로 인정하며, 헨리는 스티븐 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유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유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1154년 10월 스티븐 왕이 사망하고 헨리 왕자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로 등극했다. 그의 대관식에는 마틸다가 1125년 독일에서 가져온 2개의 왕관 중 더 웅장한 왕관이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마틸다의 오랜 숙원이 이뤄졌다.
2.7. 말년
마틸다는 남은 생애를 노르망디에서 보냈고, 종종 헨리 2세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공국 정부를 주재했다. 마틸다와 그녀의 아들은 전쟁 중에 발생한 다양한 토지 청구를 처리하면서 공동 명의로 영국과 노르망디에서 헌장을 발행했다. 헨리 2세는 정책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종종 그녀에게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1155년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정복한 뒤 막내 동생 윌리엄에게 그곳을 영지로 주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 대신, 윌리엄은 잉글랜드에서 많은 영지를 부여받았다.1160년대에 헨리 2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마틸다는 중재를 시도했다. 몽 생 자크 수도원장이 베켓을 대신해 그녀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비공개 면담을 가졌을 때, 마틸다는 온건한 관점을 제시했다. 그녀는 헨리 1세가 잉글랜드의 관습을 자기 뜻대로 체계화하려는 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도, 잉글랜드 교회의 행정이 부실한 건 문제 있으며 베켓 본인이 너무 고집스럽게 행동한다고 비판했다.
마틸다는 여러 외교적 위기를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마틸다가 지난날 가져간 성 야고보의 손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마틸다는 헨리와 함께 이 손이 레딩 수도원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 대신, 프리드리히 1세는 잉글랜드에서 보내온 값비싼 선물들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거대하고 호화로운 텐트가 포함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에 만족하고 물러났다. 또한 그녀는 1164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접근해 십자군 자금 처리에 대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외교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167년 9월 10일, 마틸다는 루앙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남은 재산은 교회에 기부되었고, 루앙 대주교 로트루가 주관한 장례식에서 베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비문에는 "출생으로 위대했고, 결혼으로 더 위대했으며, 자식으로 가장 위대했다. 헨리의 딸, 아내, 어머니 마틸다가 여기에 잠들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 무덤은 1263년 화재로 손상되었지만 나중에 1282년에 복원되었고, 백년전쟁 기간인 1421년에 약탈에 눈이 먼 잉글랜드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684년 그녀의 남아 있는 뼈 일부가 발견되어 새로운 관에 담겨져 베크 수도원에 다시 매장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베크 수도원을 헐어버린 후 그 관은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846년에 다시 발견되어 루앙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Geoffrey V, Count of Anjou) | ||||
1남 | 헨리 2세 (Henry II, King of England) | 1133년 3월 5일 | 1189년 7월 6일 | 엘레오노르 다키텐 슬하 4남 3녀[2] |
2남 | 낭트 백작 조프루아 (Geoffrey, Count of Nantes) | 1134년 6월 1일 | 1158년 7월 27일 | |
3남 | 디에프 자작 기욤 (William, Viscount of Dieppe) | 1136년 7월 22일 | 1164년 1월 30일 |
4. 여담
- '모드 황후(Empress Maud)'라는 호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모드(Maud)는 마틸다(Matilda)라는 이름의 앵글로노르만어 형태이다.
-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인정할지 말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 정확히 말해 마틸다는 내전의 혼란 와중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기에 여왕을 자칭하지 않았다. 대신 잉글랜드의 국왕(Rex Anglorum)을 칭하는 스티븐에 대항하여 라틴어 Domina Anglorum을 칭했는데 이는 '잉글랜드의 여군주'(Lady of England)라는 뜻이었다.
- 마틸다의 어머니인 스코틀랜드의 마틸다는 모계로 웨식스 왕조의 피를 물려받았기에[3] 그녀도 앵글로색슨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다. 이 피는 마틸다의 장남 헨리 2세와 그 이후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들에게 계속 계승되었고, 프랑스 왕 성 루이 9세에게까지 이어졌다.[4] 즉, 현재 영국 왕실에도 알프레드 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