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 상태의 상황에 대한 내용은 무정부 상태 문서 참고하십시오.
잉글랜드의 내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ddd>전쟁 | 교전세력 |
무정부시대 1135 ~ 1153 | 스티븐 왕 VS 마틸다 | |
제1차 남작 전쟁 1215 ~ 1217 | 잉글랜드 왕실 VS 신성교회군 | |
제2차 남작 전쟁 1263 ~ 1267 | 잉글랜드 왕실 VS 의회파 귀족군 | |
장미 전쟁 1455 ~ 1487 | 요크 가문 VS 랭커스터 가문 | |
청교도 혁명 1642 ~ 1651 | 왕당파 VS 의회파 | |
명예혁명 1688 | 제임스 2세 VS 윌리엄 3세&메리 2세 |
<colbgcolor=#C0C0FF,#334> 무정부시대 영어: The Anarchy | ||
1140년경 스티븐 왕(빨간색)과 마틸다(파란색)를 추종하는 지역을 표시한 잉글랜드 남부와 웨일스 지도. | ||
시기 | 1138년 ~ 1153년 11월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 | |
원인 | 스티븐 왕과 마틸다의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분쟁 | |
교전국 | 스티븐 왕 지지 세력 | 마틸다와 헨리 플랜태저넷 지지 세력 앙주 백국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스코틀랜드 왕국 |
지휘관 | 스티븐 왕 불로뉴의 마틸다 외스타슈 4세 클레어의 볼드윈 윌리엄 르 그로스 기욤 디프르 윌리엄 마르텔 갈레랑 4세 드 묄룬 → 로베르 드 보몽 → 알란 드 팡티에브르 제프리 드 맨더빌 → 휴 비고드 → 사이먼 2세 드 상리스 윌리엄 드 워렌 앙리 드 블루아 | 마틸다 글로스터의 로버트 글로스터의 마일즈 로저 피츠마일즈 볼드윈 드 레비에르 브라이언 피츠카운트 엘리 주교 나이젤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 라눌프 드 제농 조프루아 5세 헨리 플랜태저넷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다비드 1세 |
결과 | 스티븐은 왕으로 남지만 마틸다의 아들 헨리 플랜태저넷이 후계자로 지명되는 월링포드 조약 체결. | |
영향 | 잉글랜드 왕국의 황폐화, 플랜태저넷 왕조의 탄생. |
[clearfix]
1. 개요
언어별 표기 | |
한국어 | 무정부시대 |
영어 | The Anarchy |
2. 배경
1120년 11월 25일,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3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익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때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장자였던 윌리엄 애설링도 익사했다. 당시엔 헨리 1세의 형이자 전임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로베르 2세의 유일한 아들인 기욤 클리토가 있었지만, 헨리 1세는 노르망디 공작이 되기 위해 프랑스 왕국, 플란데런 백국, 앙주 백국, 노르망디 내 불만 세력과 결탁하여 사사건건 자신과 맞섰던 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누이 아델과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의 아들인 에티엔 드 블루아를 후계자로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많은 노르망디 귀족들은 기욤의 권리를 지지하기로 했는데, 에브뢰 백작 아이머리 3세 드 몽포르, 멜룬 백작 갈레랑 4세 드 묄룬이 대표적인 기욤 지지파였다. 1122년,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딸 마틸드와 결혼했던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드의 지참금으로 보낸 자금과 멘에 있는 요새의 반환을 요구했다. 헨리1세는 마틸드를 보내줬지만 지참금과 요새를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풀크 5세는 1123년 또다른 딸 시빌과 기욤 클리토의 결혼을 주선했고, 기욤 클리토를 멘 백작으로 내세웠다. 헨리 1세는 교황청에 시빌과 기욤이 가까운 친족이니 근친혼이므로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고, 갈리스토 2세는 1124년에 이를 받아들였다.
1123년, 노르망디에서 기욤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 내부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구심점이 될 만할 인물이 없어서 분열되었다. 1124년 3월, 헨리 1세가 파견한 왕실군은 루앙 남동쪽 부르크테롤드에서 전투를 벌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주동자들을 생포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는 반란군을 지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반란군이 소멸되면서 무산되었다. 1124년 여름, 프랑스 왕국은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공격을 받았다. 루이 6세는 제국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기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걸 포기했다.
1125년, 헨리 1세는 조카 에티엔 드 블루아와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에티엔을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던 1125년 5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1세는 이듬해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소환한 뒤 자신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죽는다면 마틸다가 자신을 계승할 거라고 선언했다. 1126년 크리스마스, 잉글랜드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초대되어 마틸다와 그녀의 미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여자가 왕위 계승 후보로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궁정 신하 상당수는 여왕의 등극에 반대했고, 루이 6세는 마틸다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에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1127년, 플란데런 백작 샤를 1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루이 6세는 기욤 클리토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선임했다. 그 후 기욤은 헨리 1세로부터 노르망디를 되찾기 위해 부유한 플란데런 도시들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잉글랜드군과의 전쟁을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이때 그는 건물에 대한 새로운 세금과 박람회 거래 수수료를 부과했으며, 각 도시의 정치에 깊게 간섭하려 했다. 이에 시민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무역 상품인 직물 제조업에 가장 중요한 원재로인 양모를 공급하는 국가인 잉글랜드에 대한 기욤의 적대 행위는 플란데런 상인들의 이권을 위협했다. 이에 플란데런인들은 티에리 드 알자스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세우기로 마음먹었고, 헨리 1세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얻었다.
1128년 2월, 생오메르와 겐트 주민들이 기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브뤼헤가 3월에 반기를 들었고, 릴도 5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직 플란데런 백국 남쪽의 소규모 지역만이 기욤의 통제하에 남았다. 이에 기욤은 브뤼헤를 공격했고, 6월 21일 악풀 전투에서 티에리 드 알자스의 노르만-로렌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브라반트 변경백 조프루아 1세의 군대와 합세한 뒤 7월 12일 티에리 드 알자스가 피신한 알스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기욤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석궁에 치명상을 입었고, 1128년 7월 28일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욤 클리토가 이렇게 죽어버리자, 헨리 1세는 루이 6세와 평화 협정을 맺고 1123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이때까지 수감 중이던 노르망디 귀족들을 석방했다.
1128년 6월 17일,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장남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사실 마틸다는 한때 신성 로마 황후였던 자신이 일개 백작의 아내가 된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하길 무척 꺼렸지만, 마틸다가 여왕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려면 앙주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확신한 헨리 1세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은 처음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듯했다. 부부는 잘 지내지 못했고, 마틸다가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할 노르만 요새들은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133년과 1134년에 두 아들 헨리와 제프리가 각각 출생하면서, 헨리 1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 1세의 통치 마지막 몇 달은 헨리 1세와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 부부 간의 관계 악화로 점철되었다. 1135년 초,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왕실 성을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금 즉시 자신과 조프루아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1세는 이걸 받아들일 경우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영구적으로 확립할 것을 우려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얼마 후, 노르망디 공국 남부에서 퐁티외 백작 기욤 1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가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헨리 1세는 그 해 가을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곧바로 노르망디로 향했다.
그러던 1135년 11월, 헨리 1세는 리용라포레에서 사냥하다가 급병에 걸렸고 12월 1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헨리 1세의 사망이 공표되었을 때,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는 앙주에 있었고, 마틸다는 삼남 제프리를 임신 중이어서 거동이 불편했다. 또한 두 사람은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반란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기에 노르만 귀족들에게 경원시되었다. 더욱이, 헨리 1세의 원정에 동행했던 귀족들은 고인이 된 왕이 매장될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겠다고 맹세했고, 이 때문에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부 노르만 귀족은 블루아 백작 티보 4세를 왕으로 옹립할 지를 논의했다.
그러던 중 티보 4세의 형제이며 한때 헨리 1세에 의해 왕위 계승 후보로 고려되었던 에티엔 드 블루아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불로뉴에서 영국 해협을 건넌 뒤 런던에 입성했고, 1135년 12월 22일 윈체스터 주교인 남동생 앙리 드 블루아와 노퍽 백작 휴 비고드의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으로 즉위했다. 스티븐은 교회에 더 많은 자유와 특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해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냈다. 헨리 1세 생전에 그가 마틸다의 여왕 등극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한 점이 문제였지만, 앙리 드 블루아는 헨리 1세가 궁정에 그 맹세를 하도록 강요한 것은 잘못 되었으며, 스티븐이 등극해야 잉글랜드 왕실이 안정될 거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휴 비고드도 헨리 1세가 임종하기 직전에 왕위 계승자를 마틸다에서 스티븐으로 바꿨다고 주장했다. 이에 귀족들은 스티븐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다. 이에 마틸다를 여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이 반발하면서,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3. 내전으로 가는 길
3.1. 스코틀랜드 왕국의 침공
1124년에 등극한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는 일찍이 런던에서 공부하고 잉글랜드 귀족 가문 여식을 아내로 삼는 등 잉글랜드 왕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수많은 앵글로-노르만 기사들을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땅을 부여하고 스코틀랜드의 국가 및 사회 시스템을 잉글랜드 봉건제로 개편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노르망디 전선에 직접 가서 헨리 1세를 도왔으며, 그의 아내인 헌팅던의 마틸다의 권리로 잉글랜드에서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하고 헌팅던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 1127년 헨리 1세가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세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외조카인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군림하도록 전적으로 돕겠다고 맹세했다.그러다가 헨리 1세가 죽고 스티븐 왕이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비드 1세는 스티븐 왕의 즉위를 찬탈로 단정하고, 1136년 1월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북부로 침공해 1월 말까지 칼라일, 워크, 알닉, 노럼, 뉴캐슬 성을 함락했다. 하지만 그 해 2월 스티븐 왕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하자, 다비드 1세는 그와 대결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제안했다. 스티븐 역시 갓 즉위해서 불안정한 왕권을 다질 여유가 필요했기에 받아들였다.
이때 체결된 더럼 조약에 따르면, 다비드 1세는 칼라일을 유지하는 대신 다른 성은 반납하고,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는 스티븐 왕이 다비드 1세의 침공에 보복하고자 몰수했던 헌팅던 백작에 선임되고 헌팅던의 절반을 돌려받는 조약을 맺었다. 또한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지만, 헨리는 칼라일과 다른 잉글랜드 영토의 영주로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합의를 맺은 후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티븐의 궁정으로 떠난 헨리가 그곳에서 모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다비드 1세는 분노해 아들을 스코틀랜드로 귀국시켰다. 1137년 봄,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를 다시 침공하기로 마음먹고 노섬벌랜드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잉글랜드 측은 이에 대응해 뉴캐슬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후 양자는 서로 대치했고 소규모 접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지만 대규모 회전은 피했다. 그러다가 양자가 12월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하면서, 스티븐 왕은 어떻게든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3.2. 웨일스의 봉기
사우스 웨일스는 헨리 1세 치세 때 잉글랜드 왕국에게 공략되었다. 세레디기온은 1110년 제2대 클레어 경 길버트 피츠리처드의 통치를 받았고, 브렉녹은 잉글랜드의 고위 순찰대장인 해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스의 소유가 되었다. 글래모건은 로버트 피츠하몬에게 정복되었으며, 1107년 로버트 피츠하몬이 사망한 뒤 헨리 1세의 사생아인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맡았다. 현지 웨일스 귀족의 통제하에 유지되는 지역은 캔트레브[1] 몇 개로 축소되었다. 이렇듯 사우스 웨일즈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지방이 되었다.그러던 1136년 1월, 헨리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브리체이니오그의 군주 하이웰 압 마레두드가 브레체이니오그 출신 병사들과 사우스 웨일스가 이대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는 걸 달가워하지 않은 노스 웨일스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웨일스군을 규합해 봉기를 일으켰다. 현지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은 그들을 도적떼라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진했지만, 로거와 스완지 사이의 루크흐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500명을 잃고 패주했다. 이에 고무된 웨일스인들이 봉기에 가담하자, 제3대 서퍽주의 클레어 남작 리처드 피츠길버트 드 클레어가 토벌군을 이끌고 진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해 4월 15일, 에버게이브니 북쪽의 란토니 수도원 인근 숲에서 이오워스 압 오와인과 동생 모건 압 오와인이 이끄는 궨트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패사했다.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귀네드 왕국의 군주 오와인 그위네드와 데후바르트(Deheubarth) 왕국의 그루퍼드 압 라이스는 잉글랜드군이 약해진 틈을 타 동맹을 맺고 공세를 개시해, 1136년 9월이나 10월에 카디건 외곽의 크루그모어 전투에서 데후바르트의 다이페드 주 케메스의 영주 로버트 피츠마틴, 카디건 성주 로버트 피츠스티븐, 랜스테판 영주 윌리엄과 모리스 피츠제럴드 형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3,000명을 사살하고 상당히 많은 인원을 생포했고, 카디건 일대는 웨일스군의 심각한 약탈과 파괴로 초토화되었다. 이후 반란의 물결은 급속도로 확대되어 1137년 사우스 웨일스 전역으로 퍼졌고, 잉글랜드 왕국이 지배하던 영지를 모조리 석권했다. 스티븐 왕은 웨일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에와스의 기사 로버트 피츠헤롤드를 웨일스로 보내 반란군을 저지하게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스티븐은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에게 지역 귀족들과 함께 웨일스인들을 저지하도록 했다. 로버트는 글래모건에 대한 웨일스인들의 침공을 격퇴했지만, 웨일스 내부로 진군하지는 못했다.
스티븐은 웨일스를 탈환할 가망은 없다고 보고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 자기를 상대로 데본에서 봉기를 일으켜 엑서터를 접수한 볼드윈 드 레비에르를 응징하기로 했다. 스티븐이 파견한 토벌대가 엑서터를 포위하자, 볼드윈은 이에 맞서 싸우다가 1136년 말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한 뒤 해외로 떠났고, 스티븐 왕은 그의 영지를 몰수했다. 그 후 볼드윈은 앙주 백국에 있는 마틸다의 궁정에 도착한 뒤, 스티븐 왕에 대적하고자 노르망디 귀족들을 부추겨서 반기를 들도록 했다.
3.3. 노르망디 전역
1136년 초,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가 아내 마틸다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도록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해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스티븐은 내란과 스코틀랜드의 침공, 웨일스인들의 봉기에 대처하느라 노르망디로 갈 여유가 없었기에, 심복인 갈레랑 4세 드 묄룬을 노르망디 왕실 보안관으로 선임했다. 갈레랑 4세는 노르망디 공국 방어 조직을 맡았고, 1136년 9월 조프루아 5세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마틸다 지지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로저 드 토스니를 체포했다.1137년, 노르망디로 이동한 스티븐 왕은 프랑스 국왕 루이 6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 만났다. 루이 6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슈 4세가 차기 노르망디 공작이 되는 걸 인정했고, 위세를 떨치는 앙주 백국을 견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스티븐은 1135년 말부터 조프루아 5세가 지배하는 노르망디와 앙주 국경 요충지인 아르장탕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가 최근에 고용한 플란데런 용병대장인 기욤 디프르와 현지 노르만 남작들이 지휘하는 플란데런 용병들 사이에 마찰이 벌어졌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대로는 원정을 벌여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스티븐 왕은 조프루아 5세와 협의한 끝에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연간 2,000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스티븐 왕의 통치 초년기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스코틀랜드와의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고, 노르망디에서 조프루아 5세의 공격을 봉쇄했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또한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잉글랜드 북부는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와 그의 아들인 헨리 왕자가 거진반 통제했고, 사우스 웨일스에 대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력은 소멸했으며, 노르망디에서의 전쟁은 공국을 상당히 불안정하게 했고, 많은 귀족들은 스티븐이 자기들에게 합당한 칭호와 땅을 부여하지 않거나 이미 자기들에게 속한 영지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스티븐 왕은 헨리 1세가 비축해 놓은 국고를 호화로운 궁정 비용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 상당한 용병 부대를 두느라 거의 써 버렸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반란이 발발하면서, 무정부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4. 경과
4.1.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반란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재침
헨리 1세의 사생아이며 글로스터 백작인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글로스터셔와 웨일스 국경지대의 여러 주에서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했으며, 카디프 성과 사우스 웨일스의 글래모건 일대의 영주로 군림했다. 그는 스티븐 왕이 웨일스인들의 봉기에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며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스티븐 왕이 플란데런 용병대장 기욤 디프르와 쌍둥이 형제 로베르 드 보몽, 갈레랑 4세 드 묄룬을 총애하면서 자신의 권력이 축소되자, 그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고 이복 여동생인 마틸다를 옹립하기로 마음먹었다.1138년, 로버트는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고 찬탈자 스티븐을 물리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합류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마틸다 지지 세력의 입지를 급격히 강화했다. 잉글랜드 서부 및 남부 주의 앵글로색슨-노르만 귀족 상당수가 마틸다 편으로 넘어갔다. 스티븐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맞대응했다. 그는 헤리퍼드와 슈루즈버리, 바스를 접수했다. 로버트가 왕실군에게 밀려 브리스톨로 후퇴하자, 스티븐 왕은 브리스톨 시를 포위했지만 공략하기에는 방비가 너무 탄탄한 걸 확인하고 주변 지역을 습격하고 약탈한 뒤 런던으로 귀환했다. 그 후 로버트는 노르망디로 이동하여 갈레랑 4세 드 묄룬과 대적하면서, 마틸다에게 잉글랜드로 직접 와달라고 청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는 휴전 조약이 만료된 1137년 12월에 스티븐 왕에게 옛 노섬벌랜드 백작령 전체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스티븐이 거부하자, 다비드 1세는 1138년 1월 3번째 침공을 감행했다. 헥섬 수도원장이자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인 헥섬의 리처드는 그의 군대가 노섬벌랜드 전 지방을 공격하고 남녀노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도처에서 학살하고 마을, 교회, 집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면서, "신이나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이교도 종족보다 더 잔인한 저주받을 군대"라고 비난했다.
이렇듯 행군하면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던 다비드 1세는 1138년 1월 10일부터 3주간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했다. 그러다가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우세한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을 피하기 위해 국내로 철수했다. 그 후 스티븐은 스코틀랜드에 보복하고자 로디언 해안 지대로 진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다가 돌연 잉글랜드로 귀환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른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헥섬의 존은 그가 군대 내부 인사들의 충성심을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얼마 후, 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마틸다를 지지하는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란군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의 알윅 영지에서 군림하던 유스타스 피츠 존은 다비드 1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다비드 1세는 4월 8일 노섬벌랜드로 재차 진군했고, 유스타스는 동생 윌리엄에게 군대를 맡겨 다비드 1세와 합세하도록 했다.
1138년 5월, 다비드 1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군 보급선을 지속적으로 습격하던 워크온트위드 성을 포위했다. 헥섬의 리처드는 공방전 초기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스코틀랜드인들이 공성추와 기타 공성 무기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코틀랜드군의 사상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다비드 1세는 남작 2명에게 성을 계속 봉쇄하도록 한 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해 6월 10일 클리더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다비드 1세는 여세를 이어가 계속 남하했지만, 8월 22일 스탠더드 전투에서 요크 백작 윌리엄 르 그로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상당한 전력을 보존한 채 칼라일로 후퇴한 다비드 1세는 스티븐이 국내의 반란군에게 관심을 돌린 틈을 타 군대를 재편했다.
이후 1138년 9월 말 교황 특사인 오스티아 주교 알베릭과 만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휴전을 협상한 그는 원정 중에 끌려간 모든 여성들을 돌려보내고 1139년 11월 11일 이전에는 잉글랜드를 다시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워크 성은 이러한 조건에서 명시적으로 면제되었고, 다비드 1세는 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수비대와 주민들은 결사 항전했고, 스코틀랜드 공성 장비 대부분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이 성을 봉쇄해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11월에 리보의 수도원장이 다비드 1세를 찾아가서 협상한 끝에 수비군이 명예롭게 무장하고 떠나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워크 성을 접수한 다비드 1세는 성을 모조리 허물도록 했다.
이후 노럼 성을 짧은 포위 끝에 공략하고, 유스타스 피츠 존이 스코틀랜드에 넘긴 알닉 성을 점유하면서, 다비드 1세는 스탠더드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섬벌랜드 점유권 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1139년 4월 9일, 다비드 1세는 스티븐과 더럼 조약을 체결했다. 스티븐은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헌팅던 백작의 명예를 계속 누리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노섬벌랜드 전체를 다비드 1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 후 다비드 1세는 스티븐과 종종 소규모 전쟁을 치르면서도 노섬벌랜드와 컴벌랜드 지방을 계속 손아귀에 쥐었고, 칼라일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4.2. 마틸다의 잉글랜드행과 스티븐 왕의 대응
1139년,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는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해 상당한 지역을 공략했다. 이후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너고자 대규모 함대를 건설했다. 또한 마틸다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 왕위는 자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초 스티븐 왕이 등극했을 때 이를 승인했던 인노첸시오 2세는 스티븐 왕을 이미 인정했는데 섣불리 바꾸는 건 어렵다며, 그녀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교황청이 확실히 거절한 것도 아니었기에, 마틸다 측은 교황청이 자신의 주장을 고려할 만하다고 여긴다고 확신했다.한편, 스티븐 왕은 우스터, 레스터, 헤리퍼드, 워릭, 펨브로크 백작령에 추종자들을 세움으로써 기반을 다지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쌍둥이 형제 갈레랑 4세 드 묄룬과 로베르 드 보몽이 솔즈베리 주교이자 잉글랜드 왕국 대법원장인 로저와 그의 조카인 엘리 주교 나이젤, 링컨 주교 알렉산더가 마틸다에게 귀순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여기에 옥스퍼드 거리에서 솔즈베리 주교의 부하들이 연루된 무력 충돌이 벌어지자, 스티븐 왕은 1139년 6월 두 사람에게 로저를 체포하고 로저와 그의 가족이 통제하는 성을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공세를 개시해 디비시스 성을 공략하고 로저가 보유하던 막대한 부를 탈취했다. 로저는 스티븐 왕이 자기 형제인 윈체스터 주교 앙리의 설득을 받아들이면서 석방되었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 일은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분노를 초대했고, 상당수가 마틸다 편에 섰다.
1139년 8월, 볼드윈 드 레비에르가 마틸다가 잉글랜드로 건너갈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도싯 주의 웨어햄을 침공했다. 그러나 스티븐 측 수비대가 그를 격퇴해 남서쪽으로 밀어냈다. 그 해 9월 30일, 마틸다는 헨리 1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자신의 계모인 루뱅의 아델리자의 초대를 받아 아룬델로 건너간 뒤,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기사 140명의 호위를 받았다. 마틸다가 아룬델 성에 머무는 가운데, 로버트는 반란에 대한 지원을 모으고 스티븐 왕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걸 고려하던 헤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즈와 접촉하기 위해 월링포드와 브리스톨로 이동했다.
그 사이,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이끌고 아룬델 성을 포위했다. 이제 아룬델 성을 함락하고 마틸다를 생포한다면, 반란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형제 앙리 드 블루아가 제시한 휴전 조약에 동의하기로 했다. 휴전 조약의 전체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티븐 왕이 아룬델 포위를 풀었고, 마틸다는 아룬델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해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재회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스티븐이 마틸다를 놓아준 이유는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기사도를 신봉하던 스티븐 왕이 여자를 괴롭히는 건 기사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고 풀어줬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아룬델 성이 거의 난공불락이라 공략이 쉽지 않으니, 마틸다를 풀어주는 대신 로버트를 무너뜨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마틸다는 로버트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브리스톨에 도착했고,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그녀에게 가세했다. 이제 마틸다는 글로스터 남서부와 브리스톨, 데본, 콘월, 웨일스 국경지대, 옥스퍼드와 월링포드에 이르는 잉글랜드 남서부 일대를 지배했으며, 브리스톨에 궁정을 세웠다. 스티븐은 마틸다 세력의 동쪽 끝 거점인 월링포드를 포위했지만, 성의 방비가 너무 견고한 데다 상당한 양의 보급품이 성에 쌓여 있어서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공성용 성 2개를 인근에 세워서 월링포드를 봉쇄한 뒤 서쪽으로 이동했다. 1140년, 헤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월링포드 외부의 공성용 성 중 하나를 공략한 뒤 파괴했다.
1140년 초, 지난 해에 스티븐에게 성을 몰수당했던 엘리 주교 나이젤이 케임브리지셔의 펜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스티븐은 즉시 펜랜드에 군대를 파견했다. 펜랜드는 이스트 미들랜드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잉글랜드 동부의 천연 습지 지역이라고 군대가 진군하기 까다로웠지만, 스티븐은 부교를 사용해 둑길을 세움으로써 병사들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나이젤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그 사이,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이끄는 군대가 잉글랜드 서부의 워햄, 우스터 및 보몽 가문의 영지를 대거 접수했고, 도싯, 윌트셔, 버크셔 및 옥스퍼드셔에 있는 스티븐 왕과 추종자들의 영지를 습격해 주민들을 학살하고 농촌을 파괴했다. 내전은 곧 다양한 봉건 영주들이 적의 땅에 대한 지속적인 약탈전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국가가 황폐해지고 행정부가 붕괴되었다.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 백작이 통치하는 영토의 경계는 코츠월드 언덕을 따라 이어졌는데, 언덕의 양쪽 땅은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점차 버려졌다. 양자는 바스에서 평화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입장차가 너무 컸기에 결렬되었다.
4.3. 링컨 전투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제농은 아버지 라눌프 르 메신으로부터 하부 노르망디(아브랑슈, 베생)과 잉글랜드 왕국(체셔, 랭커스터셔, 링컨셔) 등지에 광범위한 영지를 물려받은 거물이었으며, 웨일스 국경에 배치된 정예군을 통솔했다. 또한 체셔 북쪽의 잉글랜드 북서부 전체(랭커셔, 컴벌랜드)는 비록 아버지 대에 잉글랜드 왕실에 양도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따르는 영주들이 많았다. 이렇듯 라눌프는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 내 귀족 중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러던 1139년 더럼 조약에서, 스티븐 왕은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가 마틸다를 더 이상 돕지 않는 조건으로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헌팅던 백작이 되는 걸 받아들이고, 노섬벌랜드 전체를 다비드 1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라눌프의 영향력은 약화했다.라눌프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가 잉글랜드 왕실에 헌납했던 칼라일을 비롯해 자신과 연관 있는 북부 잉글랜드 상당수가 스코틀랜드 왕자에게 넘어간 것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1140년 9월 말, 라눌프는 스티븐의 궁정에 머물던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 왕자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조직했다. 그는 이복형인 윌리엄 드 루마와 함께 헨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길목인 링컨 성을 접수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헨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하던 스티븐 왕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티븐 왕은 라눌프와 타협하기로 하고, 링컨과 더비 영지와 링컨셔 보안관 작위를 라눌프에게 양도하는 대신 헨리가 스코틀랜드로 무사히 돌아가는 걸 보장받았다.
그러나 링컨 주민들은 라눌프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감을 품고, 스티븐 왕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라눌프가 방심하고 있다면서, 지금 링컨으로 와주면 성문을 열고 귀순하겠으며, 라눌프를 스티븐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41년 1월 6일, 스티븐 왕이 이끄는 왕실군이 링컨에 도착한 뒤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무혈 입성한 뒤 라눌프의 수비대가 숨은 성을 포위했다. 라눌프는 아내 글로스터의 마틸다를 성에 남겨둔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라눌프는 마틸다 진영으로 귀순하기로 하고, 체셔 지역과 웨일즈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면서,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잉글랜드 북부 최대의 거물을 끌어들임으로써 내전을 유리하게 이끌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링컨으로 진격했다.
1141년 2월 1일,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라눌프 드 게르손이 링컨 시 인근 외곽에 도착하여 숙영지를 세웠다. 당시 성을 포위 중이던 스티븐 왕은 적군이 근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여러 측근이 적군이 멀리서 달려오느라 지쳤고, 도시 주변 늪지대에 포진해 기동이 어려우니, 지금 당장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스티븐은 기사도에 따라 공정한 전투를 하겠다며 거부하고 다음날 오전에 평원으로 나아가 적과 전면전을 벌이기로 했다.
2월 2일, 스티븐 왕의 군대가 평원에 포진했다. 스티븐 본인은 중앙에 배치된 보병대를 이끌었고, 좌익과 우익에는 기병대가 배치되었으며, 오른쪽 측면에는 리치먼드 백작이자 콘월 백작 알란 르 루, 노퍽 백작 휴 비고드, 우스터 백작 갈레랑 4세 드 묄룬, 노샘프턴 백작 사이먼 2세 드 상리스,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의 부대가 포진했고, 좌측 측면에는 기욤 디프르가 이끄는 플란데런 백국 용병대와 기사들, 오말레 백작 윌리엄 르 그로스의 분견대가 배치되었다.
이에 마틸다 진영에서도 맞은편 평원에 포진했다. 중앙에는 라눌프 르 제농의 분견대가 포진했고, 좌측에는 스티븐 왕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한 잉글랜드 기사들로 구성되었고, 우익에는 포이스 왕국의 마도그 압 마레두드와 귀네드 왕국의 왕자 카드왈라드르 압 그루피드가 지휘하는 웨일스 분견대가 포진했다. 후방 예비대는 총사령관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지휘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스티븐 왕의 병력은 1,250명이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1,000명을 지휘했으며, 스티븐 왕은 좀더 많은 보병을 지휘했지만 기병의 전투력은 상대방보다 열세했다고 한다.
스티븐 왕은 전투 전에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연설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약해서 장병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기에, 대신 목소리가 무척 큰 부하 클레어의 볼드윈에게 맡겼다.[2] 볼드윈은 이 연설에서 스티븐의 대의의 선함과 그의 적들의 사악한 면모를 설명했고,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토끼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던 중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스티븐은 적이 몰려오자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해 적군이 마을 주위를 가로지르는 위담 강을 도하하는 걸 저지하도록 했지만, 웨일스 경보병대가 우수한 궁술을 발휘해 많은 적병이 사살되자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
그 후 로버트의 군대는 강을 도하하자마자 적을 몰아붙였다. 기욤 디프르와 윌리엄 르 그로스가 이끄는 좌익 부대는 무장 수준이 떨어지는 라눌프의 웨일스 부대를 밀어냈지만, 로버트가 급파한 강력한 기사들은 스티븐 왕의 우측면을 돌파했고, 그곳에 있던 알란 르 루, 휴 비고드, 갈레랑 4세 드 묄룬, 사이먼 2세 드 상리스, 윌리엄 드 워렌이 모두 생포되거나 전장을 이탈했다. 그 후 기사들은 후방을 돌아가서 기욤 디프르와 윌리엄 르 그로스의 적 좌익 부대를 공격했고, 결국 그들 역시 패주했다. 이제 스티븐 왕이 직접 이끄는 기사들로 구성된 중앙 부대만이 계속 저항했다. 로버트는 이들을 에워싸도록 했고, 왕실군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스티븐은 어느덧 자기가 홀로 남아서 적에게 둘러싸인 걸 알게 되자 "사자처럼" 싸웠다. 일부 기록에는 자기 검이 부러지자 양손 덴마크 도끼를 들고 계속 싸웠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는 처음에는 도끼를 휘두르다가 도끼 자루가 부러지자 검을 빼들어 계속 분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침내 돌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뒤 생포되었다.
4.4. 마틸다의 런던 입성과 축출
스티븐 왕은 링컨 전투에서 생포된 뒤 글로스터로 이송되어 마틸다를 만났고, 고위 포로들이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브리스톨 성으로 옮겨졌다. 그는 처음에는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감금되었지만, 탈출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지면서 사슬에 묶였다. 한편, 마틸다는 잉글랜드 여왕으로 등극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동의와 웨스트민스터에서의 대관식이 필요했다. 1141년 3월 3일, 마틸다는 윈체스터 주교이자 잉글랜드의 교황 특사이며, 스티븐 왕의 형제인 앙리 드 블루아와 접촉했다. 앙리는 마틸다와 협의한 끝에, 잉글랜드 성직자들을 이끌 권리를 자기에게 주는 대가로 마틸다를 "Domina Anglorum(잉글랜드의 여군주)"로 받들기로 했다. 그는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각지의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을 초빙한 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틸다에게 왕실의 금고를 여는 열쇠를 넘기고 주교와 대수원장들이 그녀에게 복종하도록 했으며, 그녀에게 여전히 대적하는 자들을 파문하기 시작했다.스티븐 왕에 의해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임되었던 베크의 테오발드는 윈체스터 주교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지만, 마틸다에게 즉시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충성 서약을 바꾸기 전에 스티븐 왕과 이야기하기를 고집했다. 이후 수도자들과 함께 브리스톨로 찾아간 그는 감옥에 갇혀 있던 스티븐과 상의했다. 스티븐은 그가 새 여왕에게 충성하는 걸 허가하기로 했고, 테오발드는 4월에 윈체스터로 가서 윈체스터 대주교와 합류한 뒤 부활절 이후 스티븐을 폐위하고 마틸다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마틸다는 이 자리에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여군주"로 선포되었다. 이후 열린 행사에서 그녀의 추종자들이 충성을 바쳤지만, 상당수 대영주들은 그녀를 따르길 꺼려서 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스티븐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런던 시민들도 마틸다 여왕에게 복종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겨서 사절을 일부러 늦게 보냈다.
한편, 스티븐 왕의 왕비로서 런던에 군림했던 불로뉴의 마틸다는 남편을 풀어주고 아들 외스타슈 4세가 영지를 물려받는 걸 허락해 준다면, 남편이 잉글랜드 왕위를 완전히 포기하고 순례자로 살도록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틸다 여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6월에 런던으로 향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켄트 지방으로 피신했고, 마틸다 여왕은 윈저 성에 자리잡은 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를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였던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런던 사절단에게 몹시 오만하게 대했고, 높은 세금을 즉시 납부하라고 명령했다. 가뜩이나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런던 시민들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얼마 후,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가 기욤 디프르와 플란데런 용병대, 그리고 켄트 출신 민병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해 인근 농촌을 약탈했다. 이에 시민들은 그녀에게 호응하기로 마음먹었고, 당초 마틸다 여왕을 추대하기로 했지만 형제를 풀어주길 거부하고 조카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걸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었던 앙리 드 블루아 주교도 여기에 가세했다. 6월 24일, 런던 수비대가 봉기를 일으켜 윈저 성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마틸다 여왕은 가까스로 탈출해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이 무렵,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노르망디를 재침해 센 강 남쪽과 리슬강 동쪽의 하부 노르망디 일대를 석권했다. 이에 노르망디에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조프루아 5세에게 모든 걸 잃을 것을 우려해 스티븐 세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왕의 친구이자 고문이며, 노르망디 보안관이었던 갈레랑 4세 드 묄룬은 1141년 중반에 마틸다에게 귀순한 뒤 자기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건너갔고, 잉글랜드 내 자기 영지인 우스터셔를 마틸다에게 넘겼다. 갈레랑 4세 드 묄룬의 쌍둥이 형제인 로베르 드 보몽도 비슷한 시기에 전장에서 물러났다. 여기에 주화 주조에 대한 왕실의 통제가 무너지면서 지역 귀족과 주교가 생산한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했다.
4.5. 윈체스터 전투
1141년 8월 21일, 마틸다와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자기들을 배신한 윈체스터 주교 앙리 드 블루아에게 복수하고 다시 한 번 영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기로 마음먹고 윈체스터로 진군했다. 그들은 윈체스터 시를 장악했고, 앙리 드 블루아는 올베시에 있는 성채로 피신했다. 마틸다는 당장 성채를 포위해서 공략할 수 있었지만, 그러는 대신 앙리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가기를 거부하고 런던으로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즉시 윈체스터로 가기로 하고, 기욤 디프르와 함께 군대를 일으켰다. 9월 중순, 불로뉴의 마틸다가 이끄는 군대가 윈체스터 외곽에 자리잡았다. 이리하여 윈체스터 성채를 포위하는 윈체스터 시의 마틸다 여왕 군대가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의 군대에게 포위당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당초 마틸다 왕비의 편에 섰던 에식스 백작 제프리 드 맨더빌과 펨브로크 백작 길베르트 드 클레어는 전황이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불로뉴의 마틸다에게 귀순했다. 여기에 기욤 디프르가 윈체스터 북족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옥스퍼드와 글로스터로 향하는 경로를 차단했으며, 런던 민병대가 추가로 윈체스터로 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9월 14일에 윈체스터를 탈출하기로 했다. 그는 마틸다 여왕의 탈출을 지켜주기 위해 후방에 남기로 했고, 콘월 백작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이 정예병으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고 앞서 가기로 했다. 그들은 윈체스터 서쪽 문에서 몰래 나와서 솔즈베리로 향했다.
얼마 후,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는 적이 달아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각 윈체스터 시로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장병들은 곧장 윈체스터 시로 진입했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이들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천천히 후퇴했다. 선봉대는 윈체스터에서 북서쪽에서 약 8.5마일(13.7km) 떨어진 곳에서 테스트 강을 무사히 도하한 뒤 마틸다를 글로스터로 데려다줬지만, 나머지 부대는 적군에게 궤멸되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테스트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적군에게 에워싸인 채 분전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불로뉴의 마틸다는 생포된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회유했지만, 로버트는 자신은 끝까지 마틸다 여왕을 따를 거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불로뉴의 마틸다는 마틸다 여왕에게 자기 남편인 스티븐 왕을 풀어주면 로버트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로버트 없이는 군대를 이끌 지휘관이 딱히 없었던 마틸다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1141년 11월, 양측은 스티븐 왕과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교환했다. 그 후 윈체스터 대주교 앙리는 회의를 소집한 뒤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했던 결정을 뒤집고 스티븐의 통치 합법성을 재확인했고, 1141년 크리스마스에 스티븐 왕과 불로뉴의 마틸다 왕비의 새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스티븐은 곧장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일전에 링컨 전투 때 자기에게 대적했던 라눌프 드 제농을 자기 편으로 도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4.6. 옥스퍼드 공방전과 윌튼 전투
로버트와 스티븐 왕의 교환이 이뤄진 뒤, 마틸다는 옥스퍼드에 자리를 잡고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옥스퍼드는 왕궁이 별도로 있고, 강과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했으며,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사우샘프턴에서 북쪽으로 가는 주요 경로의 교차점에 있어 큰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옥스퍼드를 통제한 이는 런던과 북부로의 접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마틸다가 옥스퍼드로 데려간 군대의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소규모 왕실 의회를 주기적으로 열었고,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주민들의 청원을 접수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런던과 가까운 이곳에서 병력을 끌어모은 뒤 런던을 도모하려는 계획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1142년 6월 24일, 마틸다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좀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남편에게 보내 대규모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당시 스티븐은 1142년 부활절부터 중병에 시달렸고,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마틸다는 로버트가 앙주로 잠시 떠나도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티븐은 이 무렵에 건강을 회복했고, 곧바로 군대를 소집해 마틸다 세력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항구 도시인 웨어햄을 공략해, 마틸다가 앙주 백국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을 끊었다. 뒤이어 시렌세스터, 램턴, 그리고 뱀튼 성을 확보했다. 이 성들을 공략하면서, 옥스퍼드와 잉글랜드 남서부 사이의 연락망이 끊어졌고, 옥스퍼드로 진군할 길이 열렸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갖춘 뒤, 스티븐은 옥스퍼드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1142년 9월 26일, 스티븐 왕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옥스퍼드 인근 강둑에 도착했다. 이들이 옥스퍼드로 진군하려면, 여러 수로를 도하해야 했다. 수비대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지만, 스티븐의 군대는 악착같이 밀어붙인 끝에 성 가까이 이동했다. 한 부대가 뒷문으로 옥스퍼드에 진입하자,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했던 옥스퍼드 수비대는 도시를 버리고 성채로 도주했다. 도시는 철저히 약탈당하고 불태워졌고, 수많은 시민이 살해당했거나 몸값을 위해 잡혔다. 마틸다는 얼마 안 남은 병력만 거느린 채 옥스퍼드 성에서 외롭게 농성해야 했다.
옥스퍼드 성에는 식량이 충분했고 방어 시설도 튼튼했기에 장기 포위가 불가피했다. 스티븐은 주변 지역을 직접 약탈해 포위된 자들이 식량을 찾는 걸 막았고, 종탑, 공성추, 투석기를 포함한 다양한 공성 무기들을 제작해, 성벽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보몬트 궁전을 본부로 삼고 성채를 쭉 살펴본 그는 북쪽 성벽과 보몬트 궁전 사이에 위치한 언덕 2개에 투석기를 가져온 뒤 북쪽 성벽에 큰 바위를 퍼붓도록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성에 피해를 입히는 것 외에도 주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 했다. 이 무렵 옥스퍼드에서 약 13마일(21km) 떨어진 월링포드 성에 마틸다의 추종자들이 사병들을 데리고 집결했지만,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적군을 어찌할 엄두를 못 내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래도 옥스퍼드 수비대는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12월이 다가왔을 때 식량이 부족해져 기아의 위협을 받았다.
1142년 12월,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300~400명 가량의 병사와 52척의 함선에 탑승한 기사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여기엔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도 동행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 본인은 현재 지배하고 있는 노르망디 공국에서 잉글랜드로 가기를 거부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옥스퍼드에서의 소식을 전해듣자 웨어햄을 포위 공격했느데, 아마도 스티븐 왕이 포위를 풀고 웨어햄을 구출하려고 달려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이를 무시하고 옥스퍼드 공방전을 이어갔다.
그러던 12월 초 어느 날 밤, 마틸다는 기사 4명과 함께 변장한 채 성 조지 타워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당시 공방전이 오래 지속되면서 스티븐 군대 내부의 많은 병사가 탈영하고 다른 이들은 경계를 게을리 했다. 그녀는 방심한 적군 진영을 몰래 지나간 뒤 추종자들이 모여 있던 월링포드에 도착했다. 그녀의 탈출은 하느님이 그녀에게 행운을 안겼다는 풍문이 퍼질 정도로 기적적인 일로 여겨졌다. 옥스퍼드 성채는 마틸다가 탈출한 다음 날 항복했고, 스티븐은 그곳에 새 수비대를 배치했다.
장기간 포위전을 이어간 끝에 옥스퍼드를 공략했지만, 스티븐 왕은 옥스퍼드에 있을 줄 알았던 마틸다가 월링포드로 탈출한 걸 알게 되자 낙담했다. 그는 월링포드로 진군해 또다른 포위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1143년 초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 후 전력을 보충하며 원정을 재개할 준비를 한 그는 마틸다를 여전히 따르는 잉글랜드 서부 지방을 평정하기 위한 새로운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마틸다의 군대가 접수한 항구도시 웨어햄을 탈환하려 했지만, 수비대가 강력한 방어 시설에 힘입어 굳건히 버티자 대신 솔즈베리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던 중 윈체스터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리기로 하고, 윌튼 수도원에 한동안 주둔했다.
그러는 사이, 마틸다의 군사령관인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스티븐을 기습할 준비를 했다. 1143년 7월 1일 일몰 무렵, 윌튼 수도원 주위를 에워싼 그는 공격을 감행했다. 스티븐 왕은 뒤늦게 적이 포위했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로버트가 기병대를 이끌고 연이어 돌격하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했고, 그의 군대는 사분오열되었다. 그러다가 스티븐은 어둠을 틈타 불타는 수도원에서 탈출했고, 집사 윌리엄 마르텔은 후위대를 이끌고 로버트에 대적하다가 생포되었다. 로버트의 군대는 전투가 끝난 뒤 윌튼 일대의 여러 집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온 스티븐 왕은 윌리엄 마르텔을 돌려받는 대가로 서본 성을 로버트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로버트의 세력은 브리스톨 해협에서 도싯 남쪽 해안까지 확대되었다.
4.7. 내전의 교착화
1143년 초, 초대 에식스 백작 제프리 드 맨더빌이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스티븐 왕을 상대로 반란을 기획하고 있다는 정보가 스티븐 왕에게 접수되었다. 이에 스티븐 왕은 세인트 올번스에서 제프리 드 맨더빌을 소환한 뒤 그가 오자 긴급 체포했다. 이후 제프리는 반역죄로 기소된 뒤 교수형에 처하거나 에식스 성과 런던 탑 순경 직을 헌납하는 선택 중 하나를 택하라는 지시를 받고 후자를 택했다. 그렇게 풀려난 제프리는 케임브리지셔로 도주한뒤 엘리 섬에 강도 은신처를 세웠다. 그는 램지 수도원을 점령해 주변 땅을 습격하기 위한 요새 기지로 만들었다. 그가 이끄는 갱단은 들판과 마을을 파괴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수도원을 파괴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제프리의 추종자들은 렘지 주변 30마일 반경 내에서 모든 사람을 죽이거나 인질로 잡았으며, 농작물은 수확되지 않거나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에 교회 측은 그를 파문했고, 왕실군이 그를 잡으려 했다. 제프리는 군대를 엘리 섬의 늪 깊숙한 곳으로 철수한 뒤 토벌대와 맞서 싸웠지만, 1144년 9월 버빌 공방전 도중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1144년 1월,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에 입성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프루아 5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했다. 이리하여 노르망디를 상실한 스티븐 왕은 기욤 드 이프르 등 용병대 및 가장 가까운 측근들에게 점점 더 의존했다. 하지만 마틸다 세력 역시 1143년 12월 24일에 주요 장성인 헤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사냥하던 중 한 부하가 사슴을 향해 화살이 자기한테 날아와서 박히는 바람에 사망하는 악재에 직면해야 했다. 1145년, 스티븐 왕이 잉글랜드 서부로 공세를 개시해 옥스퍼드셔의 패링던 성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1145년 말,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막내아들이자 크리클레이드의 영주인 필립 피츠로버트가 대세가 스티븐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스티븐 왕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때 그는 초대 콘월 백작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과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를 기습해 체포한 뒤 스티븐 왕에게 넘겼다. 하지만 스티븐 왕은 비열한 방식으로 이득을 챙길 수 없다며 몸값도 받지 않고 그들을 풀어줬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레지널드는 스티븐 왕과 화해했고, 스티븐으로부터 콘월 백작 작위를 인정받았다. 그 후 스티븐 왕은 파링턴에서 마틸다 추종 세력을 물리치고 월링포드와 템즈강 계곡의 마틸다 세력을 잉글랜드 서부의 주력군으로부터 차단했다. 또한 로버트의 영지인 글로스터와 브리스톨이 스티븐 왕이 파견한 기병대의 습격으로 황폐해지자, 로버트는 스티븐 왕과 휴전 협상을 해야 했다.
1145년 말 또는 1146년 초, 스티븐 왕은 라눌프 드 제농과 합의를 맺었다. 이에 따르면, 라눌프는 스티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링컨에 대한 주권을 스티븐으로부터 확인받는 대가로 스티븐의 전쟁을 지원하기로 했다. 1146년, 라눌프의 군대는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마틸다에 대한 스티븐 왕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그의 기사들은 스티븐 왕이 베드퍼드 성을 점령하고 월링포드 공방전을 이끄는 걸 도왔다. 그러나 스티븐 왕과 라눌프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이는 왕과 더 가까운 다른 귀족들이 북부 영토에서 자기들의 땅의 일부를 강점하는 라눌프가 스티븐 왕에게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품고 스티븐 왕에게 라눌프를 믿지 말라고 꼬드겼기 때문이다.
급기야 라눌프는 노샘프턴에서 스티븐의 부하들에게 급습당해 체포된 뒤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 라눌프는 스티븐에게 링컨을 포함해 무정부시대 동안 뺴앗았던 모든 왕실 영지와 성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복수심에 가득찬 라눌프는 체셔로 돌아오자마자 스티븐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코벤트리와 링컨을 습격해, 비록 함락시키진 못했지만 주변 일대를 약탈했으며, 뒤이어 스티븐과 그의 추종자들의 영지를 수시로 습격하여 황폐화했다. 워릭셔는 라눌프의 습격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내전이 끝날 무렵, 주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워릭셔는 잉글랜드 주 중에서 납부하는 세금 금액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한편, 귀족들은 거물을 궁정에 초대한 뒤 체포하는 스티븐의 행태를 지켜보고 그에게 강한 불신을 품었다.
1147년,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서리의 파넘을 공략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브리스톨로 돌아갔지만 열병에 걸려 1147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마틸다 진영의 핵심 장성이었던 로버트가 사망하자, , 많은 귀족들이 스티븐 왕의 편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스티븐은 거듭된 반란에 시달리는 데다 많은 귀족들이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자 잉글랜드를 떠나면서 마틸다를 여전히 따르는 성들을 공략하기 위한 군대를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다.
1147년 말,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이 용병 부대를 기반으로 삼아 잉글랜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용병대에게 급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기에, 군사 작전을 수행하긴 커녕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스티븐 왕이 급료를 대신 지불해주는 대신 헨리가 잉글랜드를 떠나도록 했다. 그가 기사도 정신을 또 발휘했을 수도 있고, 전쟁을 평화롭게 끝내기 위해 헨리와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걸 고려했을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틸다와 헨리는 1148년 2월 잉글랜드를 떠나 노르망디로 이동했다. 이후 많은 저명한 귀족은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성의 수를 제한하거나 군대 규모를 줄이겠다는 상호 약속이 포함된 평화 협약을 스티븐 왕의 허가 없이 맺었다. 이는 잉글랜드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회수를 줄일 수 있었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4.8. 내전의 마지막 단계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 5세가 장악한 노르망디에 남아서 공국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자기가 여왕이 되려는 뜻을 접는 대신 아들 헨리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전력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1149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헨리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스티븐 왕과 대적하던 라눌프 드 제농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라눌프는 이 시점에서 스코틀랜드 왕 다비드 1세와의 분쟁을 해결했다. 다비드 1세는 리베 강 남쪽의 랭커스텨셔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고, 라눌프는 컴벌랜드와 칼라일이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 왕자의 소유임을 인정했다. 이후 헨리와 라눌프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지원을 받아 요크를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스티븐 왕이 요크를 향해 빠르게 북상했고, 결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헨리는 노르망디로 돌아간 뒤 그의 아버지에 의해 노르망디 공작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아직 어렸지만 유능하고 활력이 넘치는 지도자로서 빠르게 명성을 쌓았다. 여기에 1152년 아키텐 여공작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왕비였다가 결혼 무효 처분을 받으면서 루이 7세와 헤어진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하면서, 프랑스 남부의 강력한 영주 가문인 아키텐 공국의 후원까지 얻게 되었다. 한편, 스티븐 왕은 1152년 부활절에 장남 외스타슈 4세를 잉글랜드 왕국의 공동 국왕으로 지명함으로써 왕위 계승을 보장하려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와 여러 주교들이 전례가 없는 일인데다 외스타슈의 성품이 잔혹하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스티븐은 그를 주교들과 함께 감금하고 외스타슈를 왕으로 봉헌하기로 동의하지 않는 한 석방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테오발드는 가까스로 탈출해 플란데런으로 망명했고,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스티븐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
1153년 초, 헨리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 스티븐 왕의 핵심 지지자였지만 최근 스티븐의 행보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휴 비고드가 즉시 헨리에게 가담했다. 이에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일으켜 휴가 자리잡은 입스위치를 포위하자 곧바로 항복했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영지 소유를 인정받았다. 한편 헨리는 맘스버리에 있는 스티븐 왕의 성을 포위했다. 스티븐은 휴를 굴복시킨 뒤 에이번 강을 따라 진군해 헨리의 군대를 격멸하려 했지만, 헨리가 즉각 물러나면서 실패했다. 이후 겨울 추위가 심하자 헨리와 임시 휴전을 맺고 런던으로 돌아갔고, 헨리는 미들랜드를 거쳐 북쪽으로 진군해, 그 해 5월 레스터 백작 로베르 드 보몽의 영접을 받았으며, 라눌프 드 제농의 지원도 받았다. 헨리는 이때까지 별다른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잉글랜드 남서부, 미들랜드 및 잉글랜드 북부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한편, 스티븐 왕의 주력군은 1152년부터 마틸다와 헨리 세력의 동쪽 요충지인 월링포드를 포위해 월링포드 공방전을 벌였다. 그는 크로마시 기포드에 세웠던 공성용 성을 재건하고, 월링포드 다리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성을 건설한 뒤, 병력을 재배치해 월링포드 성내에 보급품이 전달하지 못하게 했다. 성 수비대는 어떻게든 봉쇄를 돌파하려 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이내 식량이 바닥나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1153년 7월, 헨리가 구원군을 이끌고 월링포드로 진군해, 공성용 성 하나를 포위했다. 당시 옥스퍼드에 있던 스티븐 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헨리를 쳐부수려고 진군했다. 그 후 양측은 템즈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제 전쟁이 곧 벌어지려 했을 때, 오랫동안 이어지는 내전이 지긋지긋해진 귀족들이 협상하자고 간청했고, 성직자들도 휴전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 왕과 헨리 모두 자신들을 위해 싸우길 바라지 않는 귀족들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그들의 호응 없이는 전쟁을 이어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협상하기로 했다. 양자는 일단 휴전을 맺고 공방전을 중단하기로 했다.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슈 4세는 휴전이 체결된 것에 분노해 전쟁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이동한 뒤 새로운 원정을 벌이기 위해 자금을 끌어모으려 했다. 그러던 1153년 8월 중순, 그는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 인근의 교회 영지를 약탈하던 중 급사했다. 후계자로 정해뒀던 아들의 급사로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진 스티븐 왕은 평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티븐 왕의 동생인 윈체스터 대주교 앙리 드 블루아와 켄터베리 대주교 테오볼드의 중재하에, 스티븐 왕과 헨리 왕자는 월링포드에서 다시 만나 긴 협상을 벌인 끝에 11월에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 서로 키스했다. 협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스티븐 왕은 헨리 왕자를 후계자로 인정하며, 헨리는 스티븐 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유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유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5. 결과
잉글랜드 왕국은 무정부시대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소동과 사악함과 강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잉글랜드 남서부, 템스 강 계곡, 동앵글리아 등 여러 지역은 전쟁과 약탈로 인해 심각한 파괴가 발생했다. 이전에 중앙 집권적이었던 왕실 주화 체계는 분열되어 스티븐 왕, 마틸다, 지방 영주 모두 자체 주화를 주조했으며, 왕의 주화 통제는 잉글랜드 남동부와 동앵글리아를 제외하고는 제한적으로 유지되었다. 왕립 산림법은 대부분 지역에서 무시되어 나무들이 무단으로 벌채되었다. 다만 일부 지역은 내전의 영향을 그렇게 심하게 겪지 않았다. 예를 들어 켄트주 등 스티븐에게 속한 잉글랜드 남동부와 글로스터와 브리스톨 주변 지역은 약탈자들이 미치지 않았고, 다비드 1세는 효과적으로 잉글랜드 북부를 통치했다. 왕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무정부시대 기간 동안 심각하게 감소했다.스티븐 왕이 헨리를 자기 후계자로 인정하기로 하면서 내전이 일단 종식되었지만, 이것이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지는 불확실했다. 스티븐 왕의 아들 기욤은 1153년 당시엔 어렸고, 왕위를 놓고 헨리에게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스티븐 왕이 좀더 오래 살면서 기욤이 충분한 나이가 된다면 스티븐 왕이 기욤을 차기 국왕으로 앉히기 위해 내전을 재개할 수도 있었다. 1154년에는 기욤이 헨리 암살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잉글랜드 각지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스티븐 왕이 잉글랜드 각지를 돌며 왕권을 재건하려고 애쓰다가 위장병으로 쓰러져 1154년 10월 25일에 사망하면서 사그라들었다.
1154년 12월 8일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한 헨리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함께 대관식을 치렀다. 1155년 4월 왕실 의회가 소집되었고, 귀족들은 왕과 그의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제 헨리 2세를 칭한 그는 자신을 헨리 1세의 합법적 상속인으로 내세웠고, 그의 이미지로 왕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티븐의 통치 19년을 혼란스럽고 곤경에 처한 기간으로 규정하면서, 이 모든 문제는 스티븐이 왕위를 찬탈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유능한 인사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으면서 필요한 조치를 단행했다. 남아 있는 외국 용병을 추방하고 허가받지 않은 성을 철거하거나 버려뒀으며, 왕실 재정을 회복하고 헨리 1세의 재정 계정을 되살리고 회계 기준을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내전 기간 동안 잉글랜드 영토를 잠식한 스코틀랜드 왕국과 웨일스 지방 통치자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한 끝에 자신을 주권자로 인정하도록 했다. 그 후 그는 뛰어난 통치력과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걸쳐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고, 플랜태저넷 왕조는 그의 치세 아래 전성기를 구가했다.
6. 주요 전투
무정부시대의 전투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워크 공방전 | 클리더로 전투 | 스탠더드 전투 | 링컨 전투 |
윈체스터 전투 | 옥스퍼드 공방전 | 윌튼 전투 | 월링포드 공방전 | }}}}}}}}} |
- 워크 공방전(1138)
- 클리더로 전투(1138)
- 스탠더드 전투(1138)
- 링컨 전투(1141)
- 윈체스터 전투(1141)
- 옥스퍼드 공방전(1142)
- 윌튼 전투(1143)
- 월링포드 공방전(1152~1153)
7. 창작물에서
- 《얼음과 불의 노래》의 과거사인 《불과 피》와 드라마화인 《하우스 오브 드래곤》에 나오는 내전 용들의 춤의 모티브이다. 라에니라 타르가르옌은 마틸다, 아에곤 2세는 스티븐에 대입된다.
- 켄 폴릿의 소설 《대지의 기둥》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 시루즈베리[3]를 무대로 진행되는 수도자의 추리극인 <캐드펠 시리즈>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