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5 20:22:35

제2차 남작 전쟁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잉글랜드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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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작 전쟁
영어: Second Barons' War
파일:Civil_War_in_England.jpg
기간
서기 1263년 ~ 1267년
장소
잉글랜드
원인
헨리 3세의 옥스포드 조례 무효화.
교전국 및 교전세력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의회파 귀족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 3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1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먼드[1]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리처드[2]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3]
파일:800px-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4]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
파일:노퍽 백작의 문장.png 로저 비고드
파일:300px-Arms_of_John_de_Warenne,_6th_Earl_of_Surrey_(d.1304).svg.png 존 드 워렌
파일:Blason_Guillaume_de_Valence.svg.png 기욤 드 발랑스
파일:330px-Arms_of_the_House_of_Mortimer.svg.png 로저 모티머
필립 바셋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시몽 드 몽포르
파일:800px-CoA_Gilbert_de_Clare.svg.png 길버트 드 클레어[5]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앙리 드 몽포르[6]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소 시몽 드 몽포르[7]
파일:165px-Armoiries_seigneurs_Montfort.png 기 드 몽포르[8]
파일:135px-Arms_of_Mountford_(of_Beaudesert,_Warwickshire).png 피에르 드 몽포르[9]
파일:800px-Arms_of_the_House_of_de_Bohun.svg.png 험프리 드 보훈[10]
파일:300px-Arms_of_John_Segrave,_2nd_Baron_Segrave_(d.1325).svg.png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파일:330px-Blason_Thomas_Le_Despencer.svg.png 휴 르 디스펜서
파일:로버트 드 페러스의 문장.png 로버트 드 페러스
파일:헤이스팅스 남작 문장.png 헨리 드 헤이스팅스
결과
잉글랜드 왕실의 승리
의회민주주의의 초석
에드워드 1세의 왕권강화.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시몽 드 몽포르의 런던 진군과 루이 9세의 중재3.2. 루이스 전투3.3. 시몽 드 몽포르의 의회 정치3.4. 왕당파의 반격과 이브샴 전투3.5. 헨리 3세의 보복과 이후의 내전
4. 의의5.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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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남작 전쟁(1263-1267)은 처음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자신이 이끌고 나중에는 그의 아들인 미래의 왕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왕실 세력과 그에 대항하여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의회파 귀족군 간의 내전이다.

2. 배경

1258년, 잉글랜드 귀족들은 헨리 3세의 관리들이 자금을 강압적으로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지에 손을 함부로 대고, 뤼지낭 가문 등 푸아투 출신 귀족들이 궁정에서 설치며, 시칠리아 국왕에 차남 랭커스터의 에드먼드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콘월의 리처드를 세우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유대인들에게 과도한 재정 압박을 가해 그들이 빚 독촉을 심하게 하게 한 것에 반발했다. 여기에 잉글랜드 고위 성직자들도 왕이 자기네 교구 자금을 무제한으로 각출하는 현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그해 4월, 시몽 드 몽포르, 로저 비고드, 존 피츠조프리, 피에르 드 몽포르, 피에트로 2세, 리처드 드 클레어 등 대영주 7명이 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뤼지냥 가문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4월 30일, 로저 비고드는 공모자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가 열리던 웨스트민스터로 진군했다. 이러다가 체포될 걸 두려워 한 헨리 3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중지하고, 그 대신 국왕이 절반을, 귀족들이 절반을 선출한, 귀족과 성직자 2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통치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뤼지냥 가문 인사들이 왕의 선택을 받고 의회에 자리를 계속 잡자, 공모자들은 더 많은 조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해 6월, 새 의회가 소집되어 <옥스퍼드 조례>로 알려진 일련의 조치를 통과했다. 헨리 3세는 압력에 직면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고, 에드워드 왕자도 따라서 맹세했다. 그 후 귀족에서만 선출되는 15명의 소규모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사법관, 수상, 재무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3년마다 열리는 의회를 통해 감시되었다. 옥스퍼드에 있는 하급 귀족과 신사들의 압력은 헨리 3세의 관리들과 대귀족들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출된 위원회에는 사보이아 출신 인사들이 포함되었지만, 뤼지냥 가문 등 푸아투 출신 인사는 없었다. 뤼지냥 가문의 대표인 기욤 드 발랑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추종자들과 함께 윈체스터 주교이자 자기 형제인 에메르 소유의 울브시 성으로 피신했지만, 그 해 7월 5일 귀족들의 사병대에게 포위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한 뒤 7월 14일 가족들과 함께 추방되었다.

그러나 공모자들 사이에서 개혁의 방향을 놓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시몽 드 몽포르는 대영주와 왕실의 권위와 권력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선호했고, 로저 비고드는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으며, 리처드 드 클레어 등은 왕의 권력을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게다가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인의 공세로 고전하는 리처드를 도와주지 않았고, 리처드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1260년 4월, 리처드와 시몽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콘월의 리처드가 중재해 양자를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시몽이 주도하는 개혁에 가담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리처드 드 클레어는 왕당파로 돌아섰다.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비밀리에 교황 우르바노 4세에게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다. 1261년 6월, 헨리 3세는 교황이 자신을 맹세에서 풀어주었다고 선언하고, 즉시 에드워드 왕자의 지원을 받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모자들을 보안관 직위에서 해임하고 여러 왕궁의 통제권을 탈환했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와 리처드 드 클레어는 일시적으로 화해한 뒤, 왕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들만의 의회를 소집해 잉글랜드 전역에 경쟁적인 지방 정부 체계를 세웠다. 헨리 3세는 엘레오노르 왕비의 협조를 받아 프로방스에서 대규모 용병대를 데려와서 이에 맞섰다. 이제 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게 몹시 껄끄러웠던 귀족들은 한 발 물러섰다. 리처드 드 클레어는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고, 시몽은 프랑스로 자진해서 망명했으며, 귀족 위원회는 붕괴하였다.

이리하여 왕권 회복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헨리 3세는 귀족들에게 <킹스턴 조례>에 동의하라고 강요했다. 이 조약은 콘월 백작 리처드를 감독관으로 선임하고, 리처드가 타협을 끌어내지 못하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지원하는 중재 시스템을 도입해 왕과 귀족들 간의 미해결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귀족들이 이렇게 하면 프랑스 왕실의 간섭이 심해지니 철회해달라고 청하자, 헨리 3세는 킹스턴 조례를 완화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곧 아들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위에 올리려는 인기없는 정책을 재개했고, 자기에게 대항했던 귀족들에게서 자금을 뜯어내려 했다. 이에 귀족들은 왕에게 강한 불신을 품었다.

그러던 1262년 7월 14일, 리처드 드 클레어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당시 18살로, 자신이 21세가 되는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국왕 헨리 3세가 즉시 자신을 성인으로 인정하고 모든 영지의 주인으로 인정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는 헨리 3세가 있던 불로뉴로 갔지만, 헨리 3세는 다소 거친 어투로 거부했다. 당시 왕실은 클레어 가문의 광대한 영지에 대한 후견권을 가짐으로써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기에, 헨리 3세로서는 그의 요청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헨리 3세는 전임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가 생전에 왕실의 특정 권리를 강탈했는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했으며, 웨일스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2개 성과 클레어 가문의 본가인 클레어 성 등을 길버트의 어머니 모드에게 "미망인의 몫"으로 부여했다. 길버트는 이를 굴욕이라 여기고, 헨리 3세에게 깊은 불만을 품었다.

얼마 후, 웨일스인들이 대거 봉기하면서 헨리 3세가 웨일스 일대에 확보했던 영토의 통제력을 상당히 잃어버렸고, 교황청마저 입장을 뒤집어서 옥스퍼드 조례가 합법적이라고 판정해 버리면서, 헨리 3세의 입지가 난처해졌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가 1263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옥스퍼드에서 왕실에 대항하는 귀족 의회를 소집한 후 푸아투 인사를 추방하는 안건을 제시했다. 헨리 3세가 받아들이지 않자, 시몽 드 몽포르는 왕이 푸아투 출신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국정을 잘못 이끌었으니,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선언하고, 길버트 드 클레어 등 급진파 인사들과 함께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이리하여 제2차 남작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3.1. 시몽 드 몽포르의 런던 진군과 루이 9세의 중재

시몽 드 몽포르의 주도하에 결성된 반란군은 런던으로 진군하면서 유대인 대출자에게 진 빚 기록을 고의로 파괴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1263년 6월, 런던 시민들이 반란에 호응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 500명을 학살했다.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는 반란군에 의해 런던 탑에 갇혔다. 엘레오노르는 윈저에 있는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도중에 런던 군중에게 발각되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1263년 7월 15일, 시몽 드 몽포르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다. 그는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를 억류한 뒤, 헨리 3세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몽 드 몽포르의 급진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통치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런던 탑에서 풀려난 헨리 3세는 킹스턴 조약에 규정한 대로 루이 9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은 킹스턴 조례를 받아들인 적 없다며 이를 따르길 기피했지만,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건 싫었기에 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사절단[11]과 함께 루이 9세가 있던 아미앵에 친히 찾아갔다.

헨리 3세는 아미앵에서 자신이 장관과 관리를 임명할 권리가 있는데 귀족들이 이를 거부했으며, 왕의 성이 파괴되고 왕의 땅이 황무지로 변해버렸다고 호소했다. 그는 귀족들이 자신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30만 파운드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황이 맹세를 취소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으니, 귀족들이 조항을 강요하는 걸 못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귀족들은 분쟁의 배경을 설명했고, 헨리 3세 본인이 옥스퍼드 조례를 수락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자신들이 실시한 개혁은 왕국에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헨리 3세 본인이 과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둬들이는 바람에 왕의 영지가 황폐해지고 성이 파괴된 것이며,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고, 마그나 카르타를 위반했으며, 정의를 타락시켰다고 규탄했다.

루이 9세는 1264년 1월 23일에 판결을 내렸다. 그는 잉글랜드가 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어려움을 언급하며 결의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황이 이미 조항들을 무효로 했기에, 왕이 이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귀족들에게 넘겨진 성은 왕에게 돌려줘야 하며, 헨리 3세는 장관들을 자유롭게 임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다만 갈등에 연루된 귀족들은 전원 사면받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루이 9세는 귀족들이 왕의 권한을 침해하는 선례가 세워진다면 자신과 후손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않을 거라 보고, 헨리 3세 편을 들기로 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 등은 루이 9세의 판결이 왕에게 유리하고 귀족에게 불리한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여기고,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다.

3.2. 루이스 전투

1264년 2월,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아들 앙리시몽이 웨일스 변경지대에 있는 왕당파 귀족 로저 모티머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헨리 3세는 잉글랜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자, 엘레오노르를 파리에 남겨둬서 용병 지원군을 추가로 모집하게 한 뒤, 본인은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갔다. 1264년 4월 3일, 헨리 3세는 옥스퍼드에 왕의 깃발을 계양한 뒤 부하들을 소집했다. 그 후 노샘프턴으로 진군한 왕실군은 4월 5일 노샘프턴 공방전을 하룻동안 치른 끝에 함락하고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인 소 시몽 드 몽포르를 생포했다.

헨리 3세는 노샘프턴을 공략한 뒤 프랑스로 가는 잉글랜드 남동부의 5개 항구를 점거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진군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우스터, 런던, 캔터베리 및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후 로체스터 성을 포위했지만 8일 만에 왕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1264년 5월 초, 헨리 3세의 군대는 서식스의 루이스에 도착한 뒤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국왕은 보병대와 함께 세인트 판크라스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고, 에드워드 왕자는 북쪽으로 500야드(460m) 떨어진 루이스 성에서 기병대와 함께 휴식을 취했다. 얼마 후 시몽 드 몽포르가 사절을 보내 옥스퍼드 조례를 왕에게 좀더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할 의사가 있으니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헨리 3세는 시몽의 반역을 용납할 수 없다고 봤기에 거부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는 런던에서 파견한 시민 의용대와 합세한 뒤 왕과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1264년 5월 14일, 잉글랜드 왕실군과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 의회파는 루이스 전투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 의회파가 대승을 거뒀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 왕족들과 휘하 귀족들이 대거 생포되었다. 그 후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협의한 끝에 루이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사면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복원해야 했으며, 왕으로서 군림하는 걸 보장받는 대가로 에드워드 왕자가 시몽 드 몽포르의 인질이 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시몽 드 몽포르는 유대인들에게 지니고 있던 많은 빚과 이자를 모조리 취소했다.

3.3. 시몽 드 몽포르의 의회 정치

시몽 드 몽포르는 루이스 전투에서 승리해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주에 평화 유지군을 보냈고, 1264년 6월 23일에 런던에서 새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귀족과 성직자뿐만 아니라 각 주의 기사 4명과 전국의 모든 공동체 대표단도 참석했다. 그는 왕과 국민 사이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향후 의회에서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고, 9명으로 구성된 감독 기관을 구축하여 왕을 대신해 법령을 내리도록 했으며, 오직 의회 만이 이들 위원회 인사를 변경할 수 있었다. 위원회에는 시몽 드 몽포르 본인 외에도 체스터 주교 스티븐 버스티드 주교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선임되었다.

이 무렵, 웨일스 변경 지대의 영주 로저 모티머와 로저 클리퍼드는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길버트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다. 길버트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글로스터, 브리지노스, 말버러를 상실했고, 1264년 3월 헤일리 성에서 포위되었다. 그해 12월, 시몽 드 몽포르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고, 길버트는 그와 함께 적군을 몰아붙인 끝에 글로스터를 탈환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시몽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시몽은 웨일스 국경지대를 안정시키기 위해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었다.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1258년부터 잉글랜드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켜 클레어 가문의 웨일스 영지 상당수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길버트는 시몽이 허웰린과 손잡은 것에 반감을 품었다.

길버트 드 클레어는 시몽에 의해 축출된 로저 모티머와 로저 클리퍼드를 자기 영지에서 은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몽 드 몽포르는 1265년 1월 14일에 런던에서 새 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길버트가 반역자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길버트는 시몽이 루이스 전투에서 포획한 모든 전리품을 빼돌렸으며, 왕국의 주요한 성들에 외국 출신 수비대를 배치해 나라를 좌지우지하려 든다고 맞받아쳤다. 두 사람은 주변 의원들의 중재로 일시적으로 화해했지만, 길버트는 시몽과 한배를 함께 탈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상대로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헨리 3세의 왕비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에서 루이 9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세웠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캔터베리 근처에 군대를 모집했고, 불로뉴에서 프랑스 사절단과 접견해 새 정부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교황청은 1264년 10월 20일 시몽 드 몽포르와 길버트 드 클레어, 그리고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를 파문했다. 1264년 겨울, 웨일스 변경 지대에 배치된 일부 기사가 월링포드 감옥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왕자를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시도했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에드워드를 케닐워스로 이송해 자기 아내의 감독을 받게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압력을 받고 1265년 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새 의회를 소집하는 데 동의했다. 의원들은 주로 교회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요크와 링컨의 각 주와 도시에서 각각 백작 5명과 기사 2명, 그리고 다른 모든 '자치지역'에서 각각 시민 2명이 선임되었고,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에서 각각 4명이 선임되었다. 잉글랜드 의회에서 귀족과 성직자 외에 하급 기사 및 평민들이 활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역사가들은 이를 '하원'의 창립으로 간주한다. 이 의회는 포로 상태에 놓인 에드워드 왕자의 석방 문제를 다뤘다. 3월 31일, 에드워드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과 런던 시민들을 사면하고 향후에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주교 10명 등은 더 이상 외국인 남자를 고문으로 두지 않으며, 교황이 잉글랜드 문제에 개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3.4. 왕당파의 반격과 이브샴 전투

1265년 2월 17일에서 24일 사이, 웨일스 변경지대로 이동한 길버트 드 클레어는 공개적으로 로저 모티머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다. 그해 4월 말, 시몽 드 몽포르는 군대를 이끌고 길버트를 공격하면서,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길버트는 초대 기퍼드 남작 존 기퍼드를 회유해 글로스터에서 헤리퍼드로 가는 도중에 헨리 3세를 구출하도록 했지만 실패했다. 그 해 5월, 기욤 드 발랑스존 드 워렌 및 많은 뤼지냥 가문 인사들과 함께 사병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상륙했다. 이들이 상륙하자, 시몽 드 몽포르에게 불만을 품었던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1265년 5월 28일, 케닐워스 성에 억류되었던 에드워드 왕자가 말을 훈련 시겠다는 핑계를 대고 헤리퍼드로 갔다가 도중에 말을 급히 몰아서 호위병의 추격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위그모어 성으로 가서 그곳의 성주인 로저 모티머의 영접을 받은 뒤, 러들로 성에서 길버트와 합세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좋은 옛 법"을 준수하고 외국인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맹세했고, 길버트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265년 6월 8일, 옥스퍼드 의회는 시몽 드 몽포르의 요구에 따라 길버트와 에드워드 왕자를 반역자로 낙인찍었다. 그 후 시몽 드 몽포르는 군대를 이끌고 뉴포트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브리스톨에서 파견한 함대를 타고 세번강 어귀를 건너서 에드워드 왕자와 대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 배들은 글로스터에서 파견된 왕실 함대에 의해 침몰했다. 여기에 더해, 길버트는 체스터, 슈루즈버리 및 브리지노스를 점령하고 세번강을 건너는 모든 다리를 파괴했다. 그 결과,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는 잉글랜드의 주요 지역에서 단절되어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렸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헤리퍼드로 진군해 1265년 7월 말에 도착했다.

이 무렵,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도 잉글랜드 남부와 중부 전역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뒤 워릭 인근의 케닐워스 성으로 진군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 소식을 접하자, 길버트와 함께 우스터에 군대를 집결한 뒤 1265년 8월 1일 이른 아침 케닐워스로 진군했다. 시몽의 군대는 곧 에드워드 왕자를 따르는 부하들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유력 귀족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왕실군은 주요 반군 지도자들의 군기를 확보했고, 이제 막 케닐워스에 도착했던 반군의 물자 운송용 수레들을 탈취했다. 시몽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케닐워스 성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에드워드 왕자와 길버트의 군대가 케닐워스에서 성공을 거둔 후 우스터로 돌아올 때, 시몽 드 몽포르는 세번강 건널목을 지키는 적 경비병이 더 이상 없다는 걸 눈치채고 우스터에서 남쪽으로 4마일 떨어진 켐프 시 교두보를 건넌 뒤 케닐워스에서 아들이 모은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1265년 8월 3일 이브샴으로 진군했다. 같은 날 저녁, 에드워드 왕자는 우스터에 도착했다가 시몽 드 몽포르가 이브샴으로 향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출진해 밤새도록 행군한 끝에 이브샴에서 케닐워스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 에드워드 왕자는 이브샴을 향해 에이번강을 따라 곧장 진군했고, 길버트 드 클레어는 분견대를 이끌고 에이번강을 건넌 뒤 에드워드 왕자와 평행하게 진군했다. 그리고 로저 모티머는 에이번강 동쪽 기슭을 따라 내려가서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 후방으로 은밀히 진군했다. 그 후 1265년 8월 4일에 벌어진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의회파 귀족군은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이는 왕실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끝내 궤멸되었고, 시몽 드 몽포르는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말이 죽어서 낙마한 뒤 많은 기사들에게 공격받아 머리, 손, 발, 고환이 잘려나가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장남 앙리 드 몽포르, 친족 피에르 드 몽포르, 초대 디스펜서 남작 휴 르 디스펜서 등도 전사했고, 시몽 드 몽포르의 넷째 아들 기 드 몽포르험프리 드 보훈 등은 생포되었으며, 기사 160명, 시종 220명, 보병 수천 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왕 실군에서는 기사 2명이 죽고 보병 2,000명이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한편,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진영에 끌려왔다가 전투가 끝난 뒤 진영을 약탈하는 에드워드 측 병사들과 마주쳤다. 그는 빌린 갑옷을 입고 있다가 하마터면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에드워드의 장병들에게 사살될 뻔했지만, 그를 감시하던 반군 측 기사 로저 드 레이본이 그의 정체를 밝힌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에드워드 왕자 앞으로 모셔졌다.

3.5. 헨리 3세의 보복과 이후의 내전

헨리 3세와 왕당파 귀족들은 반군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9월 윈체스터 의회를 소집한 뒤 반란에 가담한 모든 귀족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반군 귀족의 영지를 압류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의 영지를 대상으로 약탈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이렇게 영지를 잃고 목숨을 위협받은 반란 잔당 세력은 헤이스팅스 남작 헨리 드 헤이스팅스의 인솔하에 케닐워스 성으로 가서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과 합류했다. 케닐워스 성의 구조는 상당히 독특했고, 무거운 방어 시설을 갖췄다. 가장 주목할 만한 방어 시설은 성 남쪽에 있는 댐으로, 댐을 건너 성벽과 망루 입구에서 보도가 이어졌다. 댐 뒤에는 성의 남쪽과 서쪽을 따라 인공 호수가 있어 육지 접근을 차단했다. 또한 보도의 북쪽을 따라 있는 도랑과 동쪽에 있는 두 번째 웅덩이는 성을 둘러싼 물 보호 구역을 확장했다.

1265년 12월, 에드워드 왕자는 소 시몽 드 몽포르와 헨리 드 헤이스팅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두 사람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 후 잉글랜드 당국은 이들을 진압하기로 했지만, 공세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는 사이, 반란군은 케닐워스 주변 지역을 수시로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랭커스터의 에드먼드 왕자가 이들을 막기 위해 워릭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그의 방어를 뚫고 약탈을 단행했으며, 심지어 워릭을 침입해 곳곳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에드먼드는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요격해 펨브릿지의 헨리를 포함한 일부 반란군을 생포했고, 나머지를 케닐워스 성으로 몰아낸 뒤 1266년 6월 21일부터 포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성 수비대 1,200명은 여기마저 잃으면 오직 죽음 뿐이라는 절박감을 품고 강력히 항전했다. 왕실군은 투석기를 대거 동원해 성벽을 부셔보려 했고, 나무 탑을 연이어 제작하여 성벽에 붙였으며, 궁수를 위한 별도의 격실이 있는 탑도 건설되었다. 여기에 체스터에서 임시 상륙선을 보내 호수를 통해 성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반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요새의 강력한 방어력으로 인해 많은 피해만 볼 뿐 공략할 기미가 없자, 헨리 3세는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란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준다는 내용의 케닐워스 칙령을 반포했다. 케닐워스 성에 숨은 반군은 처음에는 제안을 거부했지만, 12월에 식량이 고갈되고 전염병이 창궐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2월 13일에 항복했다.

한편, 제6대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스는 내전이 발발했을 때 에드워드 왕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지만, 1265년 1월 시몽 드 몽포르가 소집한 의회에 소환된 뒤 에드워드 왕자의 영지에 속했지만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그가 탈취했던 페베렐 성을 왕실에 돌려주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가 불법으로 왕실의 영지를 빼앗은 혐의로 고발된 뒤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 후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를 꺾은 에드워드 왕자에 의해 풀려난 뒤 반란에 가담한 책임으로 1,500 마크를 지불한 후 사면되었고, 재산 유지를 보장받았다. 당시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은 영지를 모조리 몰수당했던 것에 비하면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266년 초 체스터필드 영주 볼드윈 드 웨이크를 포함한 이전의 몽포르 지지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더필드 성에서 견고한 방어를 갖추며 토벌대를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이에 헨리 3세의 조카이며 콘월 백작 리처드의 아들인 알메인의 헨리와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왕실군은 터트버리에서 더필드 성을 우회해 체스터필드로 진군해, 북쪽에 있는 반군 지휘관 존 데이빌의 부대를 격파하려 했다. 이 움직임을 알게 된 로버트는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고, 당시 범람했던 엠버 강을 어렵게 건너 1266년 5월 15일 체스터필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존 데이빌은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더필드 성으로 남하했고, 두 군대의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중도에서 마주치지 못했다.

그 후 반군이 체스터필드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이리하여 벌어진 체스터필드 전투에서, 반란군은 별다른 저항을 못해보고 궤멸되었고, 로버트 드 페러스는 체포된 뒤 쇠사슬에 묶인 채 런던으로 끌려갔고, 1266년 말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석방되는 대가로 상속권을 몰수당했다. 그 후 로버트 드 페러스는 케닐워스 공방전에 반군 편에서 참여했지만, 나중에 토지 가치의 5배를 벌금으로 지불한 후 영지 소유를 인정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로버트는 더비 백작을 맡은 에드먼드에게 50,000파운드를 지불하는 대가로 영지 및 작위 반환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기에, 자신과 상속인을 위한 일부 영지만 회수할 수 있었고, 에드먼드는 더비 백작 직위를 유지했다.

케닐워스 공방전이 한창이던 1266년 가을,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항복 조건을 결정하는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반군 영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그가 정력적으로 반군 영주들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로저 모티머는 격분해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길버트는 이러다가 살해당할 것을 우려해 영지로 떠났다. 12월에 케닐워스에 고립된 반군의 항복을 받아낸 헨리 3세는 모든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영주들을 옥스퍼드로 소환했다. 그러나 길버트는 모티머 가문에 대한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으느라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다.

1267년 1월 20일, 길버트는 외국 고문을 추방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이행하며, 반군 영주들에게서 몰수한 땅을 돌려주라는 요구서를 헨리 3세에게 발송했다. 아무런 응답도 없자, 길버트는 4월에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점거했고, 정부에 불만을 품던 귀족들이 대거 합류했다. 헨리 3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지만, 길버트의 위세가 강한 데다 왕실군의 사기가 떨어졌던 터라 감히 전투를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6월 16일 콘월의 리처드의 중재로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길버트는 군대를 철수했고, 반군 귀족들은 사면되었으며,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1266년 12월 케닐워스 공방전에서 항복한 뒤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했던 헨리 드 헤이스팅스는 약속을 깨고 엘리 섬으로 피신한 뒤 그곳에 있던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엘리 섬에 할거한 잔당 반란군은 한동안 주변 지역을 노략질했지만, 1267년 6월 토벌대가 엘리 섬을 대대적으로 정복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모조리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즉시 헨리 3세에게 항복하고 케닐워스 협정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제2차 남작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의의

시몽 드 몽포르가 왕을 포로로 잡고 짧게나마 의회를 최초로 연 것을 영국 민주주의사의 중요한 발전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몽포르의 개혁에는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비자유민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몽포르와 반란군은 그들의 관리들이 "자유민이나 농노"에게서 부당하게 아무것도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마찬가지로 개혁으로 임명된 사법관은 "부자와 가난한 자, 농노와 자유민" 모두에게 정의를 실현할 것을 맹세했다. 1215년과는 대조적으로 1258년의 주요 개혁은 프랑스어와 라틴어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선포되었다.

몽포르 정권 몰락 이후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반란군에는 농민 의용병들이 있었다. 1265년 이브샴 전투 직후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으로, 당시 왕령지에 속한 레스터셔의 피틀링 마그나(Peatling Magna)의 농민들이 왕당파가 "왕국의 공동체의 복지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방해했다. 확실히 농민들은 자신이 왕국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꼈고, 남작 반란군이 국민 모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시몽 드 몽포르가 전사하고 역적으로 낙인찍힌 뒤에도,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몽포르는 일종의 성인으로 여겨져 그의 무덤이 순례지가 되었고, 글로스터셔 버클랜드의 로저 호스먼과 워릭셔 던처치의 한 여성이 시몽 드 몽포르의 무덤을 방문한 후 마비가 치료되는 등 기적이 일어났는 소문이 퍼졌다.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그때는 이미 사회의 최상층부터 최하층까지 마그나 카르타를 자의적인 통치에 대한 보호 장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 결과 1260년대부터 잉글랜드에 의회 제도가 정착되며 이론적으로 국왕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의 법에 종속되는 입장이 된다. 그러나 그 대가로 국왕은 의회의 동의를 받아 이전보다 더 많은 액수의 '합법적인' 세금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징수할 수 있었고, 이는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3세와 같이 의원들을 설득하고 달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과 인내심을 가진 왕들에게는 성공적인 대외 정복 활동과 왕권 강화의 기반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원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였지만 이후로는 국왕끼리의 주종 관계만 유지할 뿐 완전히 별개의 역사를 걷게 된다.

5. 주요 전투

제2차 남작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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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리 3세의 차남[2] 헨리 3세의 동생, 콘월 공작, 독일왕[3] 리처드의 아들[4] 1265~1267[5] 1263~1265[6] 시몽 드 몽포르의 장남[7]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8] 시몽 드 몽포르의 사남[9] 시몽 드 몽포르의 가문과는 별개의 가문이다. 레스터를 영지로 둔 몽포르 가문과 달리 이 몽포르 가문은 워릭셔 근처의 보데저트 성을 영지로 두었다.[10] 험프리 드 보훈의 장남[11] 시몽 드 몽포르 본인은 낙마 사고로 중상을 입어서 함께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