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남작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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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64년 4월 5월, 헨리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왕실군이 시몽 드 몽포르의 영지에 속한 노샘프턴을 공략한 공방전.2. 배경
1258년, 잉글랜드 귀족들은 헨리 3세의 관리들이 자금을 강압적으로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영지에 손을 함부로 대고, 뤼지낭 가문 등 푸아투 출신 귀족들이 궁정에서 설치며, 시칠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문제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유대인들에게 과도한 재정 압박을 가해 그들이 빚 독촉을 심하게 하게 한 것에 반발했다. 여기에 잉글랜드 고위 성직자들도 왕이 자기네 교구 자금을 무제한으로 각출하는 현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그해 4월, 시몽 드 몽포르, 휴 비고드, 존 피츠조프리, 피터 드 몽포르, 피터 드 사보이, 리처드 드 클레어 등 대영주 7명이 왕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뤼지냥 가문을 타도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1258년 4월 30일, 로저 비고드는 공모자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가 열리던 웨스트민스터로 진군했다. 이러다가 체포될 걸 두려워 한 헨리 3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중지하고, 그 대신 국왕이 절반을, 귀족들이 절반을 선출한, 귀족과 성직자 2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통치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뤼지냥 가문 인사들이 왕의 선택을 받고 의회에 자리를 계속 잡자, 공모자들은 더 많은 조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해 6월, 새 의회가 소집되어 <옥스퍼드 조례>로 알려진 일련의 조치를 통과했으며, 헨리 3세는 압력에 직면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이제 귀족에서만 선출되는 15명의 소규모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사법관, 수상, 재무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3년마다 열리는 의회를 통해 감시되었다. 옥스퍼드에 있는 하급 귀족과 신사들의 압력은 헨리 3세의 관리들과 대귀족들의 권력 남용을 제한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출된 위원회에는 사보이아 출신 인사들이 포함되었지만, 푸아투 출신 인사는 없었다. 그 후 위원회는 주요 뤼지냥파 인사들을 궁정에서 추방하고 전국의 주요 요새를 확보했다.
그러나 공모자들 사이에서 개혁의 방향을 놓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시몽 드 몽포르는 대영주와 왕실의 권위와 권력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선호했고, 휴 비고드는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으며, 리처드 드 클레어 등은 왕의 권력을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급기야 1260년 4월 리처드 드 클레어와 시몽 드 몽포르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가 당사자들을 중재해 화해시킴으로써 수그러들었다.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비밀리에 교황 우르바노 4세에게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다. 1261년 6월, 헨리 3세는 교황이 자신을 맹세에서 풀어주었다고 선언하고, 즉시 에드워드 왕자의 지원을 받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모자들을 보안관 직위에서 해임하고 여러 왕궁의 통제권을 탈환했다. 시몽과 리처드가 이끄는 반대 세력은 일시적으로 연합해 왕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들만의 의회를 소집해 잉글랜드 전역에 경쟁적인 지방 정부 체계를 세웠다. 헨리 3세는 엘레오노르 왕비의 협조를 받아 프로방스에서 대규모 용병대를 데려와서 이에 맞섰다. 이제 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게 몹시 껄끄러웠던 귀족들은 한 발 물러섰다. 리처드 드 클레어는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고, 시몽은 프랑스로 자진해서 망명했으며, 귀족 위원회는 붕괴하였다.
이리하여 왕권 회복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헨리 3세는 귀족들에게 <킹스턴 조례>에 동의하라고 강요했다. 이 조약은 콘월 백작 리처드를 감독관으로 선임하고, 리처드가 타협을 끌어내지 못하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지원하는 중재 시스템을 도입해 왕과 귀족들 간의 미해결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귀족들이 이렇게 하면 프랑스 왕실의 간섭이 심해지니 철회해달라고 청하자, 헨리 3세는 킹스턴 조례를 완화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곧 인기 없는 시칠리아 정책을 재개했고, 자기에게 대항했던 귀족들에게서 자금을 뜯어내려 했다. 이에 귀족들은 왕에게 강한 불신을 품었다.
그러던 1262년 7월 14일, 리처드 드 클레어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는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끌었던 급진파 편을 들었다. 여기에 웨일스인들이 대거 봉기하면서 헨리 3세가 웨일스 일대에 확보했던 영토의 통제력을 상당히 잃어버렸고, 교황청마저 입장을 뒤집어서 옥스퍼드 조례가 합법적이라고 판정해 버리면서, 헨리 3세의 입지가 난처해졌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가 1263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옥스퍼드에서 왕실에 대항하는 귀족 의회를 소집한 후 푸아투 인사를 추방하는 안건을 제시했다.
헨리 3세가 받아들이지 않자, 시몽 드 몽포르는 왕이 푸아투 출신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국정을 잘못 이끌었으니,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선언하고, 길버트 드 클레어 등 급진파 인사들과 함께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그와 함께 한 반란군은 유대인 대출자에게 진 빚 기록을 고의로 파괴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1263년 6월, 런던 시민들이 반란에 호응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 500명을 학살했다.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는 반란군에 의해 런던 탑에 갇혔다. 엘레오노르는 윈저에 있는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도중에 런던 군중에게 발각되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1263년 7월 15일, 시몽 드 몽포르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했다. 그는 헨리 3세와 엘레오노르를 억류한 뒤, 헨리 3세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몽 드 몽포르의 급진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통치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런던 탑에서 풀려난 헨리 3세는 킹스턴 조약에 규정한 대로 루이 9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은 킹스턴 조례를 받아들인 적 없다며 이를 따르길 기피했지만,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건 싫었기에 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사절단[1]과 함께 루이 9세가 있던 아미앵에 친히 찾아갔다.
헨리 3세는 아미앵에서 자신이 장관과 관리를 임명할 권리가 있는데 귀족들이 이를 거부했으며, 왕의 성이 파괴되고 왕의 땅이 황무지로 변해버렸다고 호소했다. 그는 귀족들이 자신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30만 파운드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교황이 맹세를 취소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으니, 귀족들이 조항을 강요하는 걸 못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응해, 귀족들은 분쟁의 배경을 설명했고, 헨리 3세 본인이 옥스퍼드 조례를 수락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자신들이 실시한 개혁은 왕국에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헨리 3세 본인이 과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둬들이는 바람에 왕의 영지가 황폐해지고 성이 파괴된 것이며,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고, 마그나 카르타를 위반했으며, 정의를 타락시켰다고 규탄했다.
루이 9세는 1264년 1월 23일에 판결을 내렸다. 그는 잉글랜드가 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어려움을 언급하며 결의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교황이 이미 조항들을 무효로 했기에, 왕이 이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귀족들에게 넘겨진 성은 왕에게 돌려줘야 하며, 헨리 3세는 장관들을 자유롭게 임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다만 갈등에 연루된 귀족들은 전원 사면받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루이 9세는 귀족들이 왕의 권한을 침해하는 선례가 세워진다면 자신과 후손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않을 거라 보고, 헨리 3세 편을 들기로 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 등은 루이 9세의 판결이 왕에게 유리하고 귀족에게 불리한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여기고,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다. 1264년 2월,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아들 앙리와 시몽이 마르케에 있는 왕당파 귀족 로저 모티머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헨리 3세는 잉글랜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자, 엘레오노르를 파리에 남겨둬서 용병 지원군을 추가로 모집하게 한 뒤, 본인은 잉글랜드로 급히 돌아갔다.
3. 전투 경과
1264년 4월 3일, 헨리 3세는 옥스퍼드에 왕의 깃발을 계양한 뒤 부하들을 소집했다. 그 후 노샘프턴으로 진군한 왕실군 선봉대는 긴 공방전에 대비하고자 다양한 공성 무기를 가져와 노샘프턴 마을 남쪽의 평원(현재 베켓스 파크)에 설치했다. 당시 노샘프턴에는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과 반군 귀족 80명과 그들의 수하들이 있었으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생들도 의용병을 결성해 노샘프턴을 사수했다. 이들은 3년전인 1261년부터 자기네 대학을 떠나서 노샘프턴에 자리를 잡고 독자적인 대학을 세운 뒤 시몽 드 몽포르의 개혁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1264년 4월 5일, 새벽, 왕실군은 노샘프턴의 남문을 공격했다. 이때 에드워드 왕자는 필립 바셋과 함께 많은 병력을 이끌고 노샘프턴 주변을 돌아가다가, 세인트 앤드류스 수도원의 북쪽 모퉁이를 급습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쪽 성벽이 제대로 수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연대기에 따르면, 성벽은 본래 탄탄했지만 수도원이 설치되면서 약해졌다고 한다. 아무튼 성벽은 금세 무너져 틈이 생겼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틈은 말 40 마리가 나란히 지나갈 만큼 넓었다고 한다.
적군이 성내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젊은 시몽 드 몽포르는 그쪽으로 달려가서 적군을 2차례 저지했다. 그러나 적군이 3번째 돌격을 감행했을 때, 그는 말에서 떨어진 뒤 생포되었다. 방어는 빠르게 무너졌고, 왕실군 보병대가 노샘프턴 마을로 쏟아졌다. 수비대 일부는 교회로 도주했지만 곧 생포되었고, 대부분은 내성으로 후퇴했다. 왕실군은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많은 주민을 학살했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노샘프턴 내성으로 들어간 수비대는 항복을 선언했다.
젊은 시몽 드 몽포르는 간이 재판을 받고 1년간 추방당하는 형벌에 처해졌고, 다른 여러 귀족들은 감옥에 갇혔다. 학생들은 처형될 위기에 몰렸지만, 대부분 귀족 가문의 자제였기 때문에 부하들이 헨리 3세를 설득해서 그러지 않도록 했다. 대신 몸값을 낼 때까지 감금되었으며, 노샘프턴에 다시는 어떤 대학도 설립하지 못한다는칙령이 반포되었다.
헨리 3세는 노샘프턴을 공략한 뒤 프랑스로 가는 잉글랜드 남동부의 5개 항구를 점거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진군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대응해 우스터, 런던, 캔터베리 및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했으며, 로체스터 성을 포위했지만 8일 만에 왕실군이 접근하자 철수했다. 이후 양자는 루이스 평원에서 격돌했다.
[1] 시몽 드 몽포르 본인은 낙마 사고로 중상을 입어서 함께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