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시칠리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랭커스터 백작 레스터 백작 더비 백작 랭커스터의 에드먼드 Edmund, 1st Earl of Lancaster | |
이름 | 랭커스터의 에드먼드 (Edmund of Lancaster) |
출생 | 1245년 1월 16일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궐 | |
사망 | 1296년 6월 5일 (향년 51세) |
아키텐 공국 바욘 | |
장례식 | 1301년 3월 24일 |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 |
배우자 | 아벨린 드 포르츠 (1269년 결혼 / 1274년 사망) |
블랑슈 다르투아 (1275년 결혼) | |
자녀 | 토머스, 헨리, 존, 메리 |
아버지 | 헨리 3세 |
어머니 |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
형제 | 에드워드 1세, 마거릿, 베아트리스, 캐서린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플랜태저넷 왕조 왕족이자 레스터, 더비, 랭커스터, 샹파뉴 백작, 시칠리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차남이다.2. 생애
2.1. 초년기
1245년 1월 16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트민스터 궁궐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헨리 3세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왕비의 순산과 건강 유지를 위해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교회에 촛불 수천 개를 켜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아들이 무사히 태어나자, 헨리 3세는 크게 기뻐하며 수놓은 제의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높은 제단에 바쳤고,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수도원장의 제안에 따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성인 중 한 사람인 동앵글리아의 왕 순교왕 에드먼드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에드먼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그는 1246년 10월부터 형 에드워드, 누이들과 함께 윈저 성에서 살았으며, 윈저 성 순경 이몬 서버(Eamon Thurber)의 후견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읽기, 쓰기, 승마술 등을 익혔다. 1255년경 이몬 서버가 그의 개인 기사가 되었으며, 여종 2명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그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얼마나 자주 성 밖을 여행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254년 5월에 부모님과 ㅎ마께 가스코뉴로 여행했고, 그곳에서 12월까지 머물렀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2.2. 시칠리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1250년 12월 13일에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콘라트 4세는 교황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싶어했지만, 인노첸시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동시에 시칠리아 왕으로 남아 있는 한 화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 국왕이 될 후보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1252년, 인노첸시오 4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과 헨리 3세의 형제인 콘월의 리처드에게 시칠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동시에 요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제안을 따르기엔 만프레디가 시칠리아에서 잘 버티고 있기에 여건이 좋지 않다고 여기고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헨리 3세는 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한 풍요로운 섬 시칠리아를 확보하면 플랜태저넷 왕조의 위세를 드높일 수 있으며, 교황청의 협력을 전폭적으로 받을 수 있을 거로 판단하고, 인노첸시오 4세에게 둘째 아들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국왕으로 세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1254년 3월 6일, 잉글랜드의 교황 특사인 파르마의 알베르토가 공식적으로 에드먼드가 시칠리아 국왕이 되어달라고 청했고, 인노첸시오 4세는 이를 승인했다. 에드먼드는 그 해 5월 14일에 시칠리아 국왕 대관식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했고, 그 해 10월 30일 보르도에서 어머니의 삼촌인 사보이아의 토마에게 카푸아 공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255년 5월 25일, 헨리 3세는 시칠리아 국왕이 된 아들을 위해 거대한 인장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 후 1255년 4월 9일, 새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에드먼드가 시칠리아 국왕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대가로 아래의 조건을 제시했다.
1. 에드먼드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칠리아 왕국을 분할하지 않는다.
2. 에드먼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 에드먼드는 시칠리아를 교황청에 봉헌하고, 매년 2천 온스의 금을 교황청에 헌납한다.
4. 에드먼드는 교황이 필요할 때마다 기사 300명을 3개월 동안 이탈리아 전역에서 봉사하도록 파견해야 한다.
5. 헨리 3세는 에드먼드를 대신해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며, 에드먼드 본인도 15살이 되었을 때 그 의식을 반복한다.
2. 에드먼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 에드먼드는 시칠리아를 교황청에 봉헌하고, 매년 2천 온스의 금을 교황청에 헌납한다.
4. 에드먼드는 교황이 필요할 때마다 기사 300명을 3개월 동안 이탈리아 전역에서 봉사하도록 파견해야 한다.
5. 헨리 3세는 에드먼드를 대신해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며, 에드먼드 본인도 15살이 되었을 때 그 의식을 반복한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위에 에드먼드를 세우기 위한 작전은 잉글랜드 왕국에 상당한 부담을 안겼다. 헨리 3세는 에드먼드를 교황의 가신으로 인정한 것 외에도 교황에게 135,541 마크(90,360 파운드)를 헌납해야 했다. 이 돈은 교황청이 만프레디를 축출하기 위해 일으킨 군대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그리 부유하지 않은 데다, 헨리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과 가스코뉴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막대한 돈을 허비했던 터라 재정난에 허덕였다. 1255년, 헨리 3세는 의회를 소집해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위에 올리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원들은 시칠리아 왕위에 에드먼드를 세우는 건 공연한 짓이라며 거부했다.
의원들이 전혀 따라주지 않자, 헨리 3세는 알렉산데르 4세에게 십자군을 조직하기 위해 모집한 십일조를 시칠리아 원정에 사용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알렉산데르 4세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1255년 10월 18일 교황 특사 올반디니 추기경은 공식적으로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부여한다고 선언한 뒤, 에드먼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이후 교황 특사들의 주도로 잉글랜드인들에 대한 추가 과세가 부과되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는 교황 특사들의 탐욕이 잉글랜드인 사이에 깊은 슬픔과 원망을 야기했다고 비판했다.
헨리 3세는 아들을 시칠리아에 정착한 뒤 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력을 지중해 전역으로 확대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는 키프로스 왕국의 전임 국왕 보에몽 5세의 왕비이자 현 국왕 위그 2세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맡았던 플레장스에게 사절을 보내, 그녀는 에드먼드와 결혼하고 위그 2세는 자신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이와 동시에, 시칠리아의 통치자 만프레디를 회유하는 작업도 실행되었다. 이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만프레디의 딸과 결혼하고, 만프레디는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양도해야 했다. 그러나 두 제안 모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55년 10월 18일, 의회는 시칠리아 원정을 위한 군자금을 모아달라는 헨리 3세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후에도 1257년까지 매년 계속 요청했지만, 얼마 안 되는 지원금만 받을 수 있었다. 1258년, 만프레디는 교황청의 반대를 무시하고 시칠리아 국왕에 등극했고, 시칠리아 귀족과 백성 모두 교황청이 국왕에 앉히려는 외국인 왕자를 거부하고 만프레디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교황 특사 러스텐드는 만프레디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잉글랜드에 찾아가서 수도자들과 주교들에게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교황청의 부당한 요구로 간주하고 따르기를 거부했다.
1258년 4월, 시몽 드 몽포르, 휴 비고드, 존 피츠조프리, 피터 드 몽포르, 피터 드 사보이, 리처드 드 클레어 등 대영주 7명이 헨리 3세의 정책에 반대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그해 4월 30일, 로저 비고드는 공모자들의 지원을 받아 의회가 열리던 웨스트민스터로 진군했다. 이러다가 체포될 걸 두려워 한 헨리 3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옥스퍼드에서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중지하고 통치자의 정책을 심의, 집행할 위원회를 결성하는 걸 받아들였다. 위원회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헨리 3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기로 한 결정은 영주들의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정해졌다고 비난하며, 교황청이 시칠리아 국왕에 잉글랜드 왕자를 세우기 위한 조건을 완화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이를 거부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비난했다.
헨리 3세는 여전히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위로 세우고 싶었고, 에드먼드도 1261년 3월에 시칠리아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신민들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 해 11월, 헨리 3세는 프랑스 국왕과 왕비, 나바라 국왕과 왕비에게 사절을 보내 에드먼드를 대신해 교황에게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건 수포로 돌아갔고, 새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3년 7월 28일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국왕에 세우는 걸 수락한다고 했던 교령을 취소했다. 그 후 앙주의 샤를이 1266년 만프레디를 꺾고 시칠리아 국왕이 되었다.
2.3. 제2차 남작 전쟁
에드먼드는 1259년 11월부터 1260년 4월까지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1259년에 체결된 파리 조약의 조건에 따라 노르망디, 앙주, 멘, 투렌에 대한 헨리 3세의 권리를 포기하고 본인 역시 그 직책을 상속받지 않엤다고 서약했다. 1262년 여름, 에드먼드는 다시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갔으며, 9월에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아버지로부터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리퍼드의 위협에 대응해 왕실군 대장에 선임되었으며, 본인이 해외에 있는 동안 의회를 열지 말라는 지시도 받았다.1263년 여름, 에드먼드는 아버지 헨리 3세, 형 에드드와 함께 옥스퍼드 조례를 폐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해 7월 22일, 그는 잉글랜드 귀족들에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던 헨리 3세와 함께 프랑스로 향했다. 루이 9세는 헨리 3세 및 반군 귀족들의 입장을 들어본 뒤, 1264년 1월 23일에 헨리 3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귀족들에게 사면받는 대가로 옥스퍼드 조례를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시몽 드 몽포르를 비롯한 귀족들은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먼드는 즉시 런던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버 성채로 서둘러 향했다. 1264년 7월 10일, 루이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포된 헨리 3세는 에드먼드와 도버 성의 순경인 로버트 드 글래스턴에게 서신을 보내 도버 성을 반란에 가담한 런던 주교 샌드위치의 헨리에게 넘기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7월 28일에 평화 협약이 정식으로 체결되기 전에 도버 성을 넘기는 건 왕실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거라며 거부했다. 이에 헨리 3세는 직접 도버 성으로 가서 항복을 권고했고, 에드먼드와 로버트 드 글래스턴은 그제야 도버성을 넘겨줬다.
이후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피신한 뒤 플란데런 및 여러 지역에서 용병대를 모집해 시몽 드 몽포르를 무지르려 했지만, 급료를 지불할 만한 충분한 자금을 모집하지 못했기에 용병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던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형 에드워드가 시몽드 몽포르를 처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먼드는 그 해 10월 30일에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헨리 3세와 그의 조언자들은 시몽 드 몽포르 편에서 싸운 모든 귀족의 소유물을 몰수하는 정책을 벌였고, 이에 분노한 잔당들이 케닐워스 성을 기반으로 항전하면서 내전이 이어졌다.
에드먼드는 이렇듯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는 동안 큰 역할을 맡지 못했다. 1265년 크리스마스 직후, 헨리 3세는 엑홀름 성에 틀어박힌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가 항복하면 생명을 건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이를 보증하기 위해 에드먼드 등을 인질로 보냈다.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는 이를 믿고 항복했지만, 엑홀름에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윈첼시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 프랑스로 탈출했다. 1266년 여름, 에드먼드는 케닐워스 성에 할거하는 반란군이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걸 막는 임무를 맡아 워릭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그의 방어를 뚫고 약탈을 단행했으며, 심지어 워릭을 침입해 곳곳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에드먼드는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요격해 펨브릿지의 헨리를 포함한 일부 반란군을 생포했고, 나머지를 케닐워스 성으로 몰아낸 뒤 포위했다.
1266년 6월25일부터 12월 14일까지 지속된 케닐워스 공방전 동안, 어드먼드는 4개 왕실 부대 중 하나를 지휘했다. 반란군은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지만, 식량난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은 끝에 12월 14일에 항복했다. 그 후 헨리 3세는 케닐워스 성을 에드먼드에게 넘겨줬다. 1267년 2월, 에드먼드는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평화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결과 1267년 9월 25일 몽고메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웨일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분란은 종식되었다.
2.4. 레스터, 더비, 랭커스터 백작
1265년 10월 26일, 헨리 3세는 반란군 지도자 시몽 드 몽포르와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로부터 몰수한 모든 성 및 재산을 에드먼드에게 양도하고 레스터 백작에 선임했다. 다만 레스터 백작이라는 칭호는 1267년 1월이 되어서야 공식적응로 부여되었다. 12월 26일, 이전에 몽포르와 세그레이브에 속했던 영지의 모든 세입자는 에드먼드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라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1266년 6월 28일, 에드먼드는 제6대 더비 백작 로버트 페러스로부터 압수된 성과 토지를 부여받았으며, 7월 12일에 더비 백작 칭호를 받았다. 1266년 10월 30일 반란에 가담했던 모든 이가 벌금을 납부하면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케닐워스 칙령이 내려짐에 따라, 로버트 페러스는 더비 백작을 맡은 에드먼드에게 50,000 파운드를 지불하는 대가로 영지 및 작위 반환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페러스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기에, 자신과 상속인을 위한 일부 영지만 회수할 수 있었다.1267년 6월 30일, 헨리 3세는 랭커스터의 모든 왕실 영지와 도시, 성, 마을들의 권리를 에드먼드에 넘기고 랭커스터 백작에 선임했다. 그는 1276년 12월부터 랭커스터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랭커스터 일대 뿐만 아니라 몬머스셔의 3개 성(그로스몬트, 스켄프리트 및 화이트캐슬), 몬머스 성, 뉴캐슬언더라임, 피커링 성 등 타 지역의 영지도 물려받았다. 1269년 4월 8일, 에드먼드는 홀더니스, 데본 및 와이트 섬의 지도자인 제4대 앨버말 백작 윌리엄 드 포르츠의 딸 아벨린과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홀더니스, 데본 및 와이트 섬을 물려받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아벨린은 1274년 11월 11일에 먼저 사망했고, 둘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에 다른 상속인이 그 재산을 물려받았다.
1296년 에드먼드 사후 조사에 따르면, 에드먼드의 영지는 632개의 개별 장소에 있었고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25개 주에 걸쳐 분포되었는데, 특히 더비셔, 링컨셔, 레스터셔, 스태퍼드셔, 노샘프턴셔에 집중되었으며, 16개의 성을 손에 쥐었다. 이러한 막대한 영지는 그가 1260년대에 아버지를 변함없이 지원한 데 대한 보상이었으며, 시칠리아 왕국을 획득하지 못한 데 대한 부분적인 보상이기도 했다. 그의 연간 수입은 약 4,500파운드였으며, 이는 그를 13세기 영국의 가장 부유한 거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한 어머니의 삼촌인 사보이아의 피에르가 소유했던 사보이 궁전을 인수해, 런던에 살 때 거주지로 삼았다.
2.5. 십자군
잉글랜드에 평화가 찾아온 후, 에드먼드는 십자군에 뛰어들 마음을 품었다. 이보다 앞서, 헨리 3세는 1250년에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맹세했지만, 그 서약은 아직 이행되지 않았다. 1268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잉글랜드에 있는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에게 에드먼드가 아버지의 맹세를 이행할 경우 적절한 금액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헨리 3세의 장남인 에드워드 왕자가 십자군에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곧 폐기되었다.두 형제는 1268년 6월 노샘프턴에서 열린 의회에서 부하들과 함께 십자군에 가담하겠다고 서약했다. 1270년, 에드워드가 먼저 출발했다. 에드먼드는 형을 섬기기로 하고, 1만 파운드를 개인적으로 지불하며, 기사 100명을 형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이후 1271년 2월 또는 3월에 어머니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에게 자기 영지를 대신 관리하도록 한 뒤 형의 뒤를 따라 출진했다. 그는 1271년 8월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형과 합류했다. 이후 아크레에서 형과 함께 거주하면서, 군자금 마련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형이 십자군 지도자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동안, 에드먼드가 뭘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1272년 5월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렀다가 1727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형보다 먼저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에드먼드는 다시 십자군에 나설 의향이 있었다. 1276년 12월, 잉글랜드 국왕으로 막 즉위한 에드워드 1세는 교황청에 있는 대사들에게 자신이나 그의 형제가 다음 번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갈 거라고 약속하게 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1280년 8월, 1281년 4월, 1282년 1월에 교황 니콜라오 3세와 마르티노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에드먼드가 자신을 대신해 십자군을 이끄는 계획을 추진하는 동시에 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에게 자신을 대신해 교황청에서 로비를 펼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교황들은 에드워드 1세가 개인적으로 십자군을 이끌어야 한다고 못 밖았다. 결국 에드워드 1세는 1287년 6월에 십자군을 이끌기로 맹세했다. 1289년 11월자 교황 교서에 따르면, 에드먼드 역시 형을 따라 십자군에 함께 하겠다고 서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서약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행되지 못했다.
2.6. 에드워드 1세의 협력자
에드먼드는 형 에드워드 1세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들은 거의 다투지 않았으며, 십자군 원정에서 함께 했다. 다만 1274년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단행했을 때, 자신을 잉글랜드의 종신 세네샬로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에드먼드가 1275년 2월에 에드먼드를 종신 세네샬로 세우는 걸 승인하면서 해결되었다. 1275년 헨리 3세와 교황청이 십자군 참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할당한 돈을 놓고 갈등이 잠시 일어나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 해결되었다.1277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정복전을 단행했을 때, 에드먼드는 웨일스 변경지대의 가장 중요한 영주 중 한 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276년 12월 12일 워체스터로 가서 에드워드 1세에게 현지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으며, 1277년 원정 중에 분견대 하나를 이끌었다. 이후 에버리스위스 성을 건설해, 웨일스인들의 입지를 약화했다. 1282~1283년의 제2차 웨일스 전쟁에서, 에드먼드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사우스 웨일스로 진군했다. 1283년 6월 웨일스군 최후의 대공 다비드 압 그루퍼드가 체포되면서 웨일스의 저항이 종식되었고, 에드먼드는 슈루즈버리에서 열린 의회에 소환되어 다비드 압 그루퍼드를 처형하는 걸 지지했다. 1294년 11월부터 1295년 5월까지 웨일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마독 압 허웰린의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2.7. 프랑스에서의 재혼과 외교 활동
1275년 12월 18일, 에드먼드는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 다르투아의 딸이자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인 헨리케 1세의 미망인인 블랑슈 다르투아와 재혼했다. 그 후 그는 아내를 대신해 프랑스의 주요 영지 중 하나인 샹파뉴를 8년 동안 통치했으며, 블랑슈가 헨리케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호아나 1세는 128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결혼했다. 에드먼드는 한동안 샹파뉴와 브리의 궁정백이라는 칭호를 누리다가 필리프 4세에게 상당한 돈을 받고 팔았고, 이후에는 아내를 대신해 보포르와 노장쉬르마른 등 다양한 프랑스 영지를 계속 소유했다. 그는 1287년 샹파뉴의 공식 문서에서 백작으로 언급되었으며, 잉글랜드 왕실 기록에서도 랭커스터 백작이자 샹파뉴 백작으로 언급되었다.에드먼드는 1276~1278년과 1281~1282년에 잉글랜드와 샹파뉴 사이를 정기적으로 여행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프로방스에서 보냈다. 그는 이렇듯 프랑스에 자주 머물고 프랑스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외교관으로서 에드워드 1세에게 매우 유용했다. 그래서 에드먼드는 1279년에 아게누아와 퀘르시에 대한 잉글랜드 왕의 권리와 퐁티외에 대한 에드워드 1세의 왕비 카스티야의 레오노르의 권리를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에게 주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1291년, 에드먼드는 미래의 에드워드 2세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를 대신해 퐁티외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에드먼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129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외교 활동이었다. 1294년 초, 에드워드 1세는 아키텐에 대한 양국의 입장차를 해결하기 위해 에드먼드를 사절단과 함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보냈다. 에드워드1세는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싶어씩에, 에드먼드에게 프랑스 국왕의 주장을 웬만하면 들어주라고 지시했다. 1294년 2월, 아키텐에서 잉글랜드 국왕의 지위로 인해 발생한 국가 간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비밀 협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이 협약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고, 필리프 4세는 그 해 5월 아키텐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에드먼드는 필리프 4세에 대한 봉건 서약을 파기하고 아내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8. 프랑스와의 전쟁 참여와 최후
1294년 9월 1일, 에드워드 1세는 가스코뉴의 봉건 영주들에게 에드먼드를 파견해 그들을 돕도록 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294 11월에 발발한 웨일스 반란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그 사이, 에드먼드는 병에 걸려 앓아누웠고, 1926년 1월이 되어서야 병세가 회복된 뒤 링컨 백작 헨리 드 랑시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가스코뉴로 향했다. 이때 그는 군대를 쉬게 해주고 식량을 수집하기 위해, 브르타뉴 공국에 그곳에 잠시 정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사절은 브르타뉴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에 분노한 에드먼드는 브르타뉴에 상륙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그 후 지롱드 강을 따라 부르그와 블라이로 이동한 에드먼드는 현지인 및 용병대를 끌어모아 2,000명에 달하는 군인을 구성했다. 그해 3월 보르도로 이동하다가 도중에 작은 마을 2개를 접수했고, 3월 28일 보르도 외곽에 도착했다. 이후 보르도를 접수한 프랑스군을 포위하고 보르도 주민들에게 뇌물을 줘서 성문을 몰래 열게 하려 시도했지만, 프랑스군이 계획을 눈치채면서 실패했다. 이후 대규모 프랑스 군이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의 지휘하에 보르도로 행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먼드는 보르도 포위를 해제하고 바욘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중병에 걸렸고, 1296년 6월 5일에 사망했다.
에드먼드의 유해는 방부 처리되어 바욘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보관되었다가, 1297년이 되어서야 잉글랜드로 보내졌고, 1301년 3월 24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뒤 그곳에 안장되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그의 석관은 에드워드 1세의 석관 옆에 위치했다.
3. 가족 관계
- 아벨린 드 포르츠(1259 ~ 1274): 제4대 앨버말 백작 윌리엄 드 포르츠의 딸.
- 블랑슈 다르투아(1248 ~ 1302):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의 딸. 에드먼드와 결혼하기 전에 나바라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 헨리케 1세와 결혼해 아들 티발트와 딸 호아나 1세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