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0:40:02

기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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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talian_Knight.jpg
14세기 이탈리아 왕국의 기사를 표현한 그림

1. 개요2. 어원3. 역사
3.1. 형성3.2. 8~12세기3.3. 12세기~14세기3.4. 퇴장
4. 무기5. 정체성
5.1. 입론: 기사라고 다 귀족이 아니다.5.2. 반론: 기사는 귀족이 맞다.5.3. 총론: 도식화할 수 없다.
6. 분류
6.1. 과정별
6.1.1. 페이지(Page) / 스콰이어(Squire)6.1.2. 나이트 배철러(knight bachelor)6.1.3. 나이트 배너렛(Knight banneret)
6.2. 소속별
6.2.1. 소속기사
6.2.1.1. 왕실6.2.1.2. 교회
6.2.2. 편력기사(나이트 에런트)6.2.3. 전례/재판
6.3. 지역별
6.3.1. 서유럽6.3.2. 동유럽6.3.3. 오스만 제국
7. 문화
7.1. 기사도7.2. 기사문학7.3. 심상
7.3.1. 환상과 현실
8. 변용: 현대의 기사
8.1. 작위/상훈체계8.2. 와인 기사?
8.2.1. 진실8.2.2. 대표적 예8.2.3. 대상자
9. 창작물10. 유관 개념

[clearfix]

1. 개요

"기사"는 중세 유럽병과 중 하나다. "을 탄 무사"라는 뜻이며 비슷한 말 또는 같은 말은 "기병"이다.

봉건제에서는 군주가 가신에게 봉토를 수여하여 군사적 충성을 약속받고 숙련된 병력을 조달하였기 때문에 중장기병이라는 병종이 하나의 사회적 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사가 병종보다는 사회적 계층으로 자리잡자, 기병뿐만이 아니라 다른 하급 귀족에게도 기사 작위를 주는 경우가 생겼다. 또한 서유럽의 봉건제가 점점 해체되고 중앙집권화되자, 봉토보다는 화폐를 통해서 급여를 주고, 종사의 군사적 봉사보다는 용병을 쓰고, 군사적으로도 기병이 파이크 방진을 돌파하기 힘들어지는 등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엄격한 의미의 봉건제가 해체된 시기를 보통 13세기 초반쯤으로 보지만 봉건제의 전성기로 여겨지는 12세기 초반에도 쇠퇴의 징후가 나타난다. 다만 '작위로서 기사'만큼은 현대까지 살아남아 영국 등 일부 왕정제 국가에서 주는 명예직으로 남았다.

동유럽에서는 저러한 군사적/사회적 변화가 서유럽에 비해 늦었기에, 서유럽에서 기사 계급이 해체된 이후에도 기사에 대응하는 봉건 지배층인 보야르가 있었다.

중세 후기에는 기사 계급의 규율인 기사도라는 개념이 나타났다.

2. 어원

언어별 명칭
라틴어 miles주격 단수/milites주격 복수
eques주격 단수/equetes주격 복수
프랑스어 Chevalier
스페인어 Caballero
독일어 Ritter
영어 Knight
한국어 기사(騎士)
라틴어의 'miles'는 싸우는 자, 군인을 뜻하며, 'eques'는 말 탄 자를 의미하였는데, 흔히 직업으로써의 기사를 지칭할 때는 주로 miles를 사용하고 신분 계층의 의미로 사용될 때 종종 고대 로마 에퀴테스의 전례에 따라 eques로 부르기도 하였으나 전자 쪽 용례가 압도적이었다.[1] 라틴어는 당대 법률용어로서 권위를 지녔고, 지방어로서 프랑스어를 쓰든 독일어를 쓰든 영어를 쓰든 간에 기록에는 miles로 적었다. 이는 곧 당대 유럽인이 보기에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쟁수행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독일어 등에서는 말 탄 자라는 의미에서 비롯하였는데, 이를 현대 영어로 번역 차용하면 'chevalier'/'caballero'와 'ritter'는 각각 'horseman'과 'rider' 정도로 옮길 수 있다.[2] 이는 봉건제의 전형을 만든 프랑크 왕국 내에서 차츰 자유민 보병대를 정예 가신 기병대로 전환하면서 "무릇 전사는 말을 타고 싸워야한다."라는 심상(image)이 두드러졌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영어에도 일정 수준 영향을 주어서, 'Cavalier'가 같은 어원을 두고 있으며, 기사도를 뜻하는 Chivalry 혹은 Code of chivalry 역시 '말을 타는 자들의 규칙'이라는 뜻이다.

반면 영어의 'knight'는 고대 영어에서는 'cniht'라 썼고, 본래 소년 혹은 청년, 미성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곧 섬기는 자, 시동, 시종, 종자, 종사, 가신 등을 가리는 말로 변모하였다.[3][4] 이는 원래 누군가를 섬기는 자는 사회적으로 볼 때는 온전한 상류층에 비하여 미숙한 존재로 취급되었으므로 그로부터 어의가 확장된 것이다. 즉, 연령으로서의 미성년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의 미성년도 포함하는 것이다.[5] 이 말은 차츰 왕의 부관을 뜻하는 등 격이 높아졌는데,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대륙의 기마군사문화 도입과 함께 그 전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하였다.

각국 어휘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서 '말을 타는 자'로서의 의미가 강조되는 반면, 영어만 그러한 의미 없이 '섬기는 자'라는 뜻을 가리킨다. 이는 영국에서 기사가 어떻게 도입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우선 앵글로색슨 사회가 게르만의 전통적인 보병 중심 군사문화를 더 오래 유지하였던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도 노르드인대침공을 겪으면서 봉건적 전사귀족(thegn)이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으나, 군사문화는 여전히 보병 중심이었고, 앵글로-노르드 왕조가 성립하였던 시기에도 역시 보병대 중심이었던 노르드인의 후스카를(huscarl)을 도입하여 기존 앵글로색슨 전사와 병존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도 앵글로색슨 군대는 여전히 발로 뛰는, 일반적인 자유민 부대(fyrd)와 전사 가신군(selected fyrd)으로 구성되었다. 바로 이 앵글로색슨 시대에 "cniht"(knight)는 궁정의 하인이나 고용인, 가신을 의미하거나 무장한 부하를 뜻하였다. 이러한 보병군사문화는 노르만 정복으로 앵글로-노르만 문화가 탄생하고, 노르만인이 지배계급으로서 자신들 문화를 전파하고서야 기병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노르만 왕조 이래 잉글랜드 왕국은 정복이라는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면서 많은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동시에 새롭게 통치구조를 구성할 기회가 생겼다. 그 결과 기존 앵글로색슨 사회와 앵글로-노르드 사회의 유산에 대륙 사회의 방식을 취사선택하고 조율하여, 강력한 관료제 국가에 가까운 영역을 만들어냈다. 백작(earl)과 셰리프(sheriff)를 비롯한 각 관료와 귀족은 그 권리나 권한, 의무가 잘 분할되어 권력에 제약을 가하였으므로, 국왕의 통제력이 아주 강하게 미쳤다. 그 결과 시골의 아주 영세한 영주와 기사들에도 국왕의 손길이 닿았다. 그 결과, 노르만 정복 이후로도 기마전사를 가리키는 말을 대륙에서 들여오기보다는 그냥 종래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한 Knight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그 영향으로 knight 자체도 '섬기는 자'라는 뜻에 '기마전사'라는 의미가 덧붙여지다 못해 아예 그쪽이 원뜻을 밀어내고 중심 의미가 된 것이다.

동양권 역시 가끔이나마 한자 고서에서 언급된 단어인 '기사(騎士)'라는 말은 ' 타고 싸우는 무사(武士)'라는 뜻이다. 고전 동아시아 기록에서 기사(騎士)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아니나, 아예 없는 단어는 아니었다. 한 예로, 조선 후기에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고급 기병을 두고 기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려 때 쓰인 책인 삼국유사에, 신라 기사가 어쩌구 하는 얘기가 나온다. 흔히들 '거문고 갑을 쏴라.'라고 하면 다들 아는 그 사금갑 얘기. 삼국지에서 황조를 벤 풍칙 역시 기사라고 서술된다.

3. 역사

3.1. 형성

로마 제국 후기 (3/4세기)부터 게르만/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기병대가 중요시 되고 전신을 비늘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귀족 계급으로서의 기사는 중세 초기 (6~10세기)에 생성되었다. 일반적으로 프랑크 왕국에서 사라센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전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그 땅에서 말 좀 키워서 전쟁 때 타고 나와라.''라고 한 게 중세 기사의 효시가 되었다는 게 고전적인 중세기사론이다.

그 후에는 사라센 기병은 소수였고, 그나마도 프랑크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6] 여기에 덧붙여 봉토를 받은 기병의 양성은 등자가 8세기 초엽 서유럽으로 전래되면서부터 군사적인 이용가치가 늘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1950년대 이래로 유력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또 최근에는 서유럽의 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는 9세기 이후이고, 봉토 분배 이전에도 프랑크에는 다수의 승마전사들을 운영했음을 이유로 등자가 기사계급 등장의 절대적인 요인임을 부정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 설에 따르면 기사 계급의 등장은 등자보다는 8~9세기 이후의 농업생산력 증대, 샤를마뉴의 친 귀족정책 및 확장 정책에 따른 약탈로 인한 경제적 부흥, '마자르족'의 침입과 '바이킹'의 약탈에 대한 빠른 대응의 필요성, 그리고 각 지역의 고립으로 인한 인구급감으로 대규모 중보병대보다는 소수정예의 필요성[7]에 의해 말을 탄 기사 계층 및 기병 위주의 전술이 대두되었고, 이후 중세 농업혁명과 등자 및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으로 기사의 초기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즉, 하나의 이유만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복합적 이유 때문에 고대의 대규모 중보병대에서 중세의 소규모 중기병대로 편제가 변화한 것이고, 여기에 등자와 랜스가 중기병대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착화 되었다는 것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세 기사의 시초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부터 시작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전까지 프랑크 왕국의 병사들은 '자유민 보병'이었다는 증거가 많다.

3.2. 8~12세기

상기한 야만족들의 침입과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서유럽은 전쟁이 상시화되었다. 왕과 황제는 야만족의 침입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었고, 각지의 유력자에게 관직을 주고 알아서 대응하게 했다. 이 유력자들은 로마의 유산으로써는 대규모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게르만의 유산으로써는 수 많은 솔거 가신(Gefolgschaft, retinue)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솔거 가신의 성격을 한국인들 입장에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자면, 머슴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관직을 부여 받은 현지 유력자들은 법적으로는 자신의 영역에서 자유민들을 1년에 40일간 소집하여 군무에 동원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시대 야만족의 침입에 대한 대응에는 1년에 40일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중세 시대의 교통 수송 기술로는, 겨우 40일짜리 의무로 전국의 자유민 인구를 병사로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자기 비용으로 무장하는 것이 당연했던 전근대에는 쓸만한 무장을 잘 갖춘 자유민이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물론 장원을 가진 유력자가 전부 관직을 받은 건 아니고, 관직을 받진 않았지만 대토지를 가지고 솔거 가신들도 있고 본인들도 중기병으로 무장 가능한 이들도 있긴 했다. 하여간 그에 따라 자유민 보병들은 점차 도태되고[8], 유력자들은 그냥 자기네 집에 있던 머슴들을 무장시켜서 전투의 주력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유럽의 기사 형성 초기에는, 오히려 귀족이라기보다도, 안 좋게 말하면 머슴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기사들의 대부분은 농노와 마찬가지로 주군에 종속되는 비자유민으로 분류되었으며, 이들을 가르키는 단어 라틴어 ministerialis 라는 단어는 "cniht"(knight)와 마찬가지로 궁정의 하인이나 고용인, 가신을 의미하거나 무장한 부하를 의미했다. 기사(Ritter)라는 단어가 '말 탄 병사'라는 직업적 의미를 담는다면, ministerialis 는 종속민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가르키는 단어인 셈이다. 한편으로는 배신(陪臣), 즉 가신의 가신이라는 단어 Vavasour 역시 비슷한 계층을 가르켰다. 밑에 종사를 두고 있지 않은 최하급 병사라는 뜻이었다. 종속민인 특성 상 기사들은 결혼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주군 선택의 자유 등이 제약되었으며 종속 신분이 세습되었다.

10세기 이후 중세의 봉건주의가 심화되면서, 급여를 받는 직업들은 전부 사람딸린 토지를 수여 받아 그 급여로 삼는 일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봉토를 수여받는 직업에는 행정관보좌직, 대장장이, 화가, 집사, 병사 등의 전문직이 있었으며, 당연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안에 솔거하던 가신들이 대부분이었던 기사들은 봉토를 분배받는 형식으로 변하여 외거하는 존재들로 변하였다. 하지만 기사라고 해서 다들 봉토를 수여 받은 것은 아니며, 여전히 주군의 집에서 솔거한채로 남은 이들도 많았다. 노르만 기사들조차 영국을 정복하고도 봉토를 못 받고 주군의 집에 솔거해야하는 신세인 기사들이 잔뜩 있었다.

그 외에도 자유민들 역시 무기와 갑옷과 말을 지니고 무사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높은 훈련을 거친 인물이라면 누구든지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자유민들 역시 스스로 영주들에게 충성 서약을 맺고 후원을 받아 중기병으로 무장하여 군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서전트 역시 이러한 비자유민 내지 자유민이면서 봉토를 수여받아 전문직 및 군사적 직무를 수여하는 전문적인 군인들을 말했다.

즉 이 시대의 기사란 직업의 일종이었다. 12세기 정도까지는 기사가 되는데 딱히 고귀한 태생일 필요가 없었고, 딱히 귀족이나 왕이 기사 직위를 하사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봉토를 하사받아 왕을 섬기는 기사가 될 수도 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독학으로 무술을 익히고, 열심히 쇠고리 뜨개질을 해서 자작 사슬 갑옷을 만들어 입고, 야생마 한 마리 길들여서 올라타곤 "나는 기사요."라고 자칭해도 그는 기사일 수 있었다. 물론 홀로서기는 힘드니까 대체로 마스터(스승 기사)를 모시면서 무술을 배우고 충분히 장비를 장만한 다음, 마스터가 "너도 이제 당당한 기사다."라면서 죽빵을 갈기면 기사가 만들어지는(나이트 배철로), 기사가 기사를 키우는 전통을 따랐다. 자유민 중에도 봉토 받고 주군 모셔서 귀족 사회에 편입되고 싶다! 하는 인물은 충분히 많아서 이렇게 기사가 탄생하곤 했으며, 이들은 주군 없이 방랑하다가 운이 좋으면 주군을 찾아 신종 계약을 맺고 봉토도 받아 성공하기도 했다.

물론 중세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를 섬기느냐?는 매우 중요한 관념이었고, 농업보다 전투가 고귀한 것이라는 관념 등이 얽혀서, 이 기사들이 법적인 신분이 부자유민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3. 12세기~14세기

이후로 중세 전성기부터 기사가 가문이나 혈통에 주어지는 계승 직위가 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라는 것이 준귀족화 하기 시작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152년 농부들이 기사들의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지했고, 1187년 프리드리히 1세는 농민의 아들이 기사로 서임되는 것을 금지했다.

이때부터 기사는 기사로 태어나는 것, 또는 군주가 하사하는 것이 된다. 군주는 기사의 직위를 준귀족의 개념으로도 하사하기 시작하며, 귀족도 자신의 가신에게 반영구적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기사위를 부여하여 하우스홀드 나이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기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는 아버지의 기사 직위를 물려받아 기사가 되었다. 즉 기사 가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때문에 출신만 된다면 기사로서 훈련을 쌓지 않아도 명목상 기사로 불릴 수는 있었다. 장자상속에 따라 작위를 얻지 못한 귀족의 차남 등등은 대신에 기사를 타이틀로 얻는 일도 빈번했다.

기사하면 생각나는 '칼이나 주먹으로 구타하는 서임식'이나, '칼을 들고 밤샘 기도를 해서 신앙심을 증명하는 의식' 등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불과 13세기 말이면 이미 기사서임식이 간결화되고 그저 형식적인 의식으로만 여겨진다.

'다른 사람을 기사로 서임할 자격'은 서임된 기사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 데다가, 기사라는 타이틀 정도는 있어야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갈 수 있다는 관념이 동시에 있었다. 따라서 저 '혈통이 있어야 기사'라는 관념이 무시 당하는 경우는 꽤나 빈번했다. 군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말과 무장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평민'이 있다면 지역 군주의 필요에 따라 바로 서임되었다.[9] '혈통이 없으면 기사 금지'라는 법률은, 그게 엄격하게 지켜지기는커녕 빈번하게 무시된 일이라서 오히려 강조해서 금지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에는 이론으로서의 봉건제가 절정에 이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농노제장원이 슬슬 쇠퇴의 조짐이 나타났고, 봉토 수여에 의한 새로운 기사의 출현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기사들에게 수여할 봉토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사가 최소한의 군역을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봉토 규모(기사봉)를 규정하고, 기사봉 이하의 토지는 더 분할할 수 없게 하는 법령도 제정되었다. 귀족과 평민을 가르는 법안들은 봉건제가 스스로의 문제로 해체되기 시작하는 경향을 막고자 한 구시대의 특권층들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존의 '비귀족 기사 계층'들은 점점 봉토 대신 봉급을 수여 받기 시작했다.

기사라는 단어에 귀족적 성격이 부여되면서, 평민 기사(milites gregarii) - 귀족 기사(milites nobiles)로 구분되던 단어에서 오로지 귀족 기사만을 가리키는 단어로 변했다. 그에 따라 기존의 평민기사를 포괄해서 지칭할 호칭이 필요했고, 이런 평민 중장기병과 기사를 합쳐서 맨앳암즈(Men-at-Arms)라고 부르게 된다. 중세의 전장에서 나온 기병의 절대 다수는 진짜 '기사'가 아니라 평민 중장기병 맨앳암즈였고, 나이트 베너렛은 그 기병 부대의 지휘관이다.

3.4. 퇴장

중세 후기인 13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중앙집권화로 왕의 사법권과 행정권이 확대되면서, 기사들은 이전까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다양한 행정직에 임명되어 지방 사법행정의 주역이 되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과거의 '중무장 기병'으로서의 기사는 연 5~10 파운드의 수입으로도 충분했으나, '지역 유지이자 왕의 관료이자 전문군인이자 치안 책임자'인 13세기 기사에게는 적어도 연 20~40 파운드가 필요했다. 13세기 초 잉글랜드에서 (각종 행정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는) '기사'의 수는 4,000명에 달했으나, 이러한 '구조 조정'이 진행되면서 13세기 말에는 1,200명 이하로 떨어졌다. 잉글랜드 기사의 2/3가 증발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는 중하층 기사에 속했을 기사들이 더는 기사라고 불리지 않게 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듯 기사의 지위가 소수의 부유하고 명예욕 있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 되면서 기사의 숫자는 계속 감소되었다.

군사적으로도 카롤링 제국 시대의 신민소집령이 14세기에 부활하여 잉글랜드나 프랑스 같이 중앙집권화된 국가들의 왕은 이른바 '왕국의 방어를 위한(ad deffensionem regni)' '명백한 필요(necessitas evidens)'가 존재할 때 15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자유민 남성을 징병하거나 전쟁세를 징수할 권리를 얻었으며, 귀족 장교나 중기병 같은 고급 전력도 봉건적인 신서를 요구하지 않는 임시적인 고용계약(indenture 또는 endenture)을 통해 모집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고전적인 기사가 무너진 것은 총화기의 도입 같은 무기의 변화가 아니라 봉토를 내림으로써 성립되는 봉건제가 무너진 사회적 변화, 귀족 계급만이 아닌 모든 국민을 징병하는 국민병 제도로의 이행 등 복합적인 사회적 변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병종으로써 기병은 훨씬 후대인 20세기까지도 계속 활용되었다. 중세에 '기사'라고 부르는 조건인 '영지를 가지고, 주군에게 충성하고, 기사도를 지키고' 같은 요소들이 사회적 변화로 인해 전부 붕괴되면서 기사라고 부를만한 사회적 계층이 소멸했기 때문에 기사가 무너졌다고 표현되는 것이다.[10]

이리하여 병종으로서의 기사는 소멸하였으나, 중세 동안 기사 개념의 사회 계급화와 함께 작위로서의 기사는 살아남게 되었다. 이는 봉건기사 뿐만 아니라 기사단 수도기사의 전통까지 합류하면서 공화제와 군주제를 막론하고 훈장 제도의 원형이 되어 명칭으로서 살아남았으며, 영국처럼 명목상으로나마 신분제가 남아있는 경우 훈장과는 별개의 작위 수여 또한 지속되고 있다.

4. 무기

파일:external/s13.postimg.org/1227-23_larg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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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기사라 하면 떠오르는 무기는 랜스다. 특히 검은 기사의 상징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사서임할 때나 맹세할 때를 비롯한 의례용품으로도 중요했다. 특히 중세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십자가의 형태와 비슷한 디자인의 장검은 상징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를 대신해 검신에 키스하는 등의 관습은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기사의 검은 롱소드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롱소드라는 단어를 한손검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 잘못된 인식이다. 도검사에서 롱소드는 한손반-양손검을 말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기사의 부무장인 검은 한손검인 아밍 소드다. 그래서 아밍 소드를 나이틀리 소드(기사검)라고 부르기도 한다. 판금갑옷의 대두로 양손무기가 주력이 되면서 롱소드의 비중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상 사용과 지상 사용, 일상의 무장과 전쟁용 무장 모두를 겸할 수 있는 한손검인 아밍 소드와 그 후계 도검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꾸준히 애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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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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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돌격 이후 롱소드와 런들 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기병들을 묘사한 14세기 후반 그림
검은 중장갑에 비효율적이라 실제 전장에선 도끼메이스 같은 둔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일부의 편견이 있지만, 기사의 무장과 전투방식을 묘사한 당대의 군사 관련 기록들이나 유물 연구에서 얻은 자료를 종합한 결과 전장에서도 검의 비중은 컸다.

검은 무게중심이 손잡이 부분에 있어서 다루기가 쉽고[11], 적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그에 비해 공격거리 역시 길다. 둔기는 헤드에 무게를 집중시키느라 무게 효율이 좋지 않아서 같은 무게의 검에 비해 리치가 짧다.

또한 칼집과 소드벨트를 이용해 패용하므로 부무장으로 휴대하기도 좋았다. 게다가 검술을 익혔거나 이 기술을 방패. 갑옷과\ 함께 사용하면 폴암 같은 장병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주무장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손 반 그립을 가진 장은 방패를 버리고 양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기술을 충분히 익히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대처 가능하다는 장점까지 있었다.

중세 검술에서는 맨몸의 상대를 대적하는 평복 검술과 갑옷을 입은 상대를 대적하는 갑주 검술의 기법이 서로 달랐다. 갑주 전투 시에는 칼끝으로 갑옷의 틈새를 찌르거나, 폼멜이나 가드를 망치처럼 휘둘러 둔격으로 쓰러트리거나, 혹은 전투 레슬링을 걸어서 쓰러트리고 미저리코드와 런들 대거 같은 갑옷의 빈 틈을 찌르는 데 특화된 송곳형 단검을 갑옷의 틈새에 쑤셔 넣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사의 부무장으로 런들 대거 타입의 단검이 널리 쓰였다.

이 시기의 검 역시 그런 용법을 부응하기 위해 뻣뻣하고 뾰족한 찌르기에 적합한 검 형태가 유행했다. 즉, 한국 양판소처럼 풀 플레이트 입은 기사를 검으로 베거나 '몽둥이 같이 두꺼운 칼날로 갑옷째 뭉개'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판금갑옷은 양판소 작가나 독자들의 생각보다 굉장히 튼튼하다. 판금 갑옷이 총기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갔다는 건 역으로 그 이하의 파괴력으로 플레이트를 뚫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12] 실제로도 이 문제로 총기가 나올 때까지 파이크 같은 창류에 속하는 무장들은 철퇴나 플레일 같은 둔기는 물론 할버드, 폴액스 같은 폴암이나 롱소드 같은 도검류들에게 밀려 잘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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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iath Fechtbuch (MS Germ.Quart.2020)
16세기 이베리아인 기사 돈 후안 퀴사다는 백병전에 돌입하면 첫 번째로 에스터크를 뽑아 들어야 하며, 즉시 적의 약점인 얼굴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버렸든 놓쳤든 부러졌든) 에스터크를 잃어버릴 경우 아밍소드를 들고 싸우며, 아밍소드마저 잃어버린 기사는 워해머와 단검으로 싸운다.

기사들끼리 죽이기는 힘들었지만, 기사들에게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세 기사들은 사로잡은 다음 몸값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기에, 굳이 죽일 필요 없이 무기를 날리고 상대 기사가 전의를 잃을 때까지 적당히 구타 혹은 부상을 입혀 항복을 받은 다음 구속하여 몸값을 받는 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고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평민 병사나 중장병은 무자비하게 죽였다. 때문에 맨앳암즈로 불리는 중세 중~후기의 중장병들은 무장으로만 보면 기사나 다름없었으며 잡히면 살해당하기에, 보통 기사 이상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일이 빈번했고 기사들은 갑주 입은 상대를 끝장내는 기법을 잘 알아야 했다.

그리고 기사들끼리 서로 죽이지 않는 것도 관례가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격렬한 상황인 전장에서 여유롭게 항복 받을 상황이 그리 쉽게 나오지 않았고, 아래에도 얘기가 나올 기사가 강도로 전업하는 도둑기사나, 산적단으로 변한 프리 컴퍼니 등 예의 차리고 몸값 받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에서도 전황이 극히 불리하다 판단한 영국군이 포로로 잡은 기사와 귀족을 참살했고, 그 때문에 후대 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부모나 친척을 잃은 프랑스 기사들이 복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었다.

중세 후기에 장창대열이 생기고 나서는 투핸디드 소드(츠바이헨더) 같은 양손으로만 쓸 수 있는 거대한 검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대검은 장창을 쳐내고 파고들기에 좋았다. 물론 이쯤 되면 [피]와 마찬가지로 폴암과 검 사이에 경계선에 있는 수준일 정도의 무기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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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드 랜스 자세로 동시에 격돌한 순간을 묘사한 그림
마상창으로 잘 알려진 랜스는 형태상 크게 보병 창이나 별 다름없는 라이트 랜스와, 흔히 기사의 거창 하면 생각나는 둥근 손보호대가 달린 헤비 랜스로 나뉜다. 물론 창의 길이나, 무게추 등으로 다양하게 바리에이션이 있다. 기마 중에 투창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우치드 랜스가 대세가 된 이후에도 스페인에서는 기마 투창질이 꽤나 애용됐다.

또한 랜스의 사용법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는데, 투창 하듯이 어깨 위에 들고 가다가 내리찍는 방식과, 허리쯤 아래에 한 손으로 들고 찌르는 방식, 양손으로 창을 잡고 휘두르는 방식, 그리고 중세 기사 하면 딱 대표되는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이 있었다. 이 방식을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라 한다.

각 기법마다 다양한 장단점이 있으나, 기수가 어지간한 충격을 받아도 낙마하지 않게 해 주는 등자와 전투용 안장, 그리고 창의 리치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한데 뭉치면 말의 운동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냉병기로서는 어마어마한 공격 거리에서 극대화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므로, 이 콤보가 중세 중기부터 유럽의 대세가 되었다. 중무장한 기사가 밀집대형으로 랜스 차징을 하면 그 자체가 보병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양에서도 유목민족 기병들이 비슷하게 운용한 기록이 있으며, 말과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렇게 연결하는 경우에는 집단 돌격 시의 템포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13] 랜스 차징은 대열을 맞추어서 일사불란하게 동시에 들이박는 조직력 중시 방식과, 대충 각개 돌격으로 최고 속력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두 방식 공히 동서양에 모두 혼재했다.

십자군 전쟁 때 기사들을 상대한 아랍 측의 기록으로는 돌격하는 기사들을 '쏘아진 화살과 같다'라고 평했으며 장창이 등장하기 전까진 정면에서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였다. 기사의 랜스 차징 자체는 매우 강력했지만 랜스는 대부분 1회용이라 차징이 끝나면 부러지거나 해서 재사용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이 끝나면 랜스를 버리고 검이나 보조무기를 꺼내 들고 싸운다.

이러한 기사들의 랜스차징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의 궁병들은 말뚝을 들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뚝을 적 방향으로 박아 넣기도 하였고, 스코틀랜드는 기마돌격에 부적합한 험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하거나, 윌리엄 월레스는 보병대가 팔랑크스와 흡사한 장창의 벽 쉴트론(schiltron)을 만들어 돌격을 저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창 전술은 중세 말에 보병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그리고 총이 나오면서 장창진으로 보호받는 총병대가 원거리에서 사격을 가하는 파이크 앤 샷 전술이 장창전술의 후계를 잇고, 랜스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기병들이 이제 권총 들고 마상총질을 하다가, 결국 권총보다 강한 머스킷의 화력에 밀려 중장기병의 시대가 저물고 엽병 같은 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토너먼트 경기에서 쓰는 랜스는 끝이 뭉툭하고 더욱 잘 부러지게 개조한 토너먼트 전용 랜스이다. 기사 윌리엄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토너먼트 경기를 보면 랜스가 스치기만 해도 와자작 부서지는 이유가 그 때문. 이 때문에 토너먼트 경기에서 주인공을 쓰러뜨리려는 악역들은 랜스 끝을 뾰족하게 하고 잘 안 부러지는 재질로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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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고, 폴액스할버드 같은 폴암류부터 마상창, 단검, 한손검, 양손검, 도끼, 철퇴, 레슬링, 갑옷, 방패, 기마술 등 사실상 보편적인 무기는 두루 다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격 무기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대체로 중세 기사들은 사격 무기를 천시하거나 비겁한 무기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주로 징집된 평민이나 용기병들이 사격무기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얘기로, 급하면 아무 무기나 쓰게 되어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궁술은 이것 하나에만 매진하는 다년간의 단련이 필요한 전문분야이고, 쇠뇌는 그것 자체로도 엄청나게 비싼 전문 무기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는 전문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유럽의 중장기병들은 보통 기마돌격과 근접전을 담당하기 때문에 궁술을 뽐낼 장면은 그다지 없었고, 그런 것은 전문 궁병에게 맡기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기사 중에도 궁술을 아는 자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의 그림을 보면 맨앳암즈나 기사가 사격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도 곧잘 등장하고, 중세 무술서적에서는 말을 타고 달아나면서 등 뒤로 쇠뇌를 쏘는 파르티안 사법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기사들이 평시에 심심하면 하던 스포츠가 사냥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14], 활 다루는 것의 기본기 정도는 하는 기사가 많았을 것이다.

단지, 기사 말고도 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많은 기회비용을 주고 키워서 근접 전을 담당해야 하는 기사가 궁술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을 따름이다. 전쟁은 상대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가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얼마나 적은 피해를 입는가 역시 중요한데 본인의 역할이 다른 부대의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근접 전투임에도 전장에서 원거리 무기에 의존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전장에서의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 즉 권리만 받아 챙기고 의무는 행사하지 않는 비겁자 취급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며 따라서 이 때문에 '원거리 무기=비겁자'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에 타고 돌격하는 중기병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지형 등의 문제로 말 타고 싸우기 힘든 상황이라면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싸우기도 했다. 또 평야가 많은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귀족이나 기사가 순수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은 수치지만, 산이 많은 스페인 같은 지역에서는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도 별 문제로 여기지 않는 등 환경, 지역적인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15]

5. 정체성

기사는 병종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이 양면적으로 존재한 계급으로, 중세 당대는 물론이었고, 놀랍게도 현대까지도[16] 그 정체성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단어다.

아주 짧게 정리하면, '병종으로서의 기사'가 먼저 출현(8~9세기)했으나, 병종으로서의 기사가 오래 간 세습되자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기사'가 등장(11~12세기)하여 두 정체성이 한동안 공존(12~15세기)했고, 다시 사회적 변화로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기사'가 몰락(16세기 이후)하고 '병종으로서의 기'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5.1. 입론: 기사라고 다 귀족이 아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일단 '기사 = 귀족'은 올바른 등식은 아니다. 기사는 작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의 봉건제에서 평민과 구분되는 귀족은 분봉을 받아 해당 영지를 다스리고 그 산출물을 관리/분배 할 권력과, 그러한 권력을 가문에 세습할 수 있게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데 이러한 신분을 통칭 '귀족'이라고 하며, 그 귀족의 등급은 (동양의 오등작위의 명칭을 차용하여) 대개 공작(duke/prince), 후작(marquis), 백작(earl/count), 남작(baron) 등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귀족위는 세습작위(hereditary title)라고 부르며, 이에 해당하는 신분이 곧 세습귀족이다.

그런데, '기사(knight/chevalier)'는 원래 이 세습작위의 일부가 아니다. 기사는 혈통에 따른 사회적 신분제의 일부가 아니라 종사하는 직업과(즉, 군무와) 관련되어 있는 칭호다. 적어도 중세 기준으로는, 귀족으로서 분봉받은 하나의 봉지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작위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노섬브리아 백작"인 사람은 동시에 "노섬브리아 남작"일 수는 없다.[17][18] 이미 해당 봉토의 백작위를 받은 이상 노섬브리아는 백작령이지 남작령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섬브리아 공작"인 동시에 "기사"일 수는 있다. "기사"는 봉토와 관련된 세습작위가 아니라 직무이기 때문이다.

즉, 기사는 작위가 아니며 또한 세습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래 항목에서 사용된 "기사작위"라는 말도 사실은 잘못된 말이다. '작위' 자체가 세습적 지위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서임'되는 기사는 '작위'가 아니라 사실은 '직위'다.[19] 그리고 기사직은 세습되지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엄밀한 구분은 중세사회가 전성기에 들어가는 12~13세기 무렵이 되면 정작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도 모호해진 상태가 된다. 이미 신분질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신분으로 제한이 되기 때문에 으레 기사는 곧 귀족과 동일시 되었다. 게다가, 르네상스근세사회로 들어가게 되면 이미 전적으로 귀족들만 고급의 기병을 이루던 시대는 지나가고 처음에는 용병으로서, 후에는 대규모로 확충되기 시작한 상비군의 일부로서 평민들도 기병이 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군무에 대대로 종사하는 평민들 중 일부도 전통적인 세습귀족은 아니지만 신진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기사'라는 중세적 직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고, 종국에는 그냥 '기병(cavalry)'이 되어갔다. 결국, 근대 영국에 들어와 "기사"라는 직위는 실력있고 부유한 부르주아들에게 일종의 포상으로 수여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명예직이 된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귀족" 신분은 아니다. 오늘날 영국에서도 전통적 의미에서 "귀족"은 과거 세습귀족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왕실로만 제한된다.

5.2. 반론: 기사는 귀족이 맞다.

우선 귀족이라는 말은 말그대로 귀한 혈통을 말하는 것으로 영어의 번역어로 쓰일 때는 Nobility, Aristocrat, peerage[20] 등을 의미한다. 즉, "귀한 혈통"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작위가 있고 없고는 관계없다. 남작의 다섯번째 아들은 작위를 받을 확률이 거의 없겠지만, 작위가 없어도 그는 귀족이다. 귀한 혈통이니까. 물론 세습작위가 없으니 사회적인 대우는 크게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다.

둘째, 기사도 세습이 가능하다. 더 정확히는 잉글랜드의 기사가 세습직이 아니었던 것뿐이다.[21] 잉글랜드의 기사가 귀족이 아닌 건 맞지만[22], 잉글랜드의 귀족 제도는 유럽 표준이 아니므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세습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유럽 표준 같은 건 없어서 각 나라마다 귀족 제도가 제각각이다. 영국이 특히 귀족에 엄격해서 작위를 받은 당사자에 한해 귀족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카스티야 왕국 같은 경우는 귀족이 전체 인구의 10% 가까이 된다.

네덜란드, 덴마크의 Ridder, 폴란드의 Rycerz, 벨기에의 Chevalier는 전부 영어로 Knight이지만 세습직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방에 따라 세습이 되는 기사도 있고 안 되는 기사도 있고[23],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기사 작위가 세습이 되는 가문이 따로 있고[24] 나머지는 안 되는 등 나라마다 제도가 제각각이다. 스페인 같은 경우는 더 복잡해서 기사인 Caballero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Caballero와, 레콘키스타 과정에서 받아낸 Caballero는 세습이 되고 나머지는 안 되는 등 제멋대로다.

이는 근본적으로 "작위"와 "귀족"은 서로 다른 개념이고, "귀족"의 정의도 영국과 대륙 간에 차이가 있었음을 고려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젠트리 문서나 작위/유럽 문서의 기타 문단 등에서 설명하듯, 대륙국가들은 혈통으로써 귀족 여부를 판별하였으나 영국에서는 작위 보유로써 이를 결정하였다.[25] 심지어 대륙에서는 작위는커녕 변변찮은 칭호가 없어도 하급일지언정 귀족 신분인 사례가 존재하였고, 당연히 나라에 따라서는 세습 기사(Hereditary knight)도 하급 귀족으로 인정받는다. 영국에서조차 오늘날 상훈체계에서의 "knight bechelor"는 명백히 훈장이 아닌 작위에 해당하여 훈장들과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5.3. 총론: 도식화할 수 없다.

사실 이상의 논의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데, 기사가 유럽 전역에 걸쳐서 중세부터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사용되는 개념어로서 시·공간적 변화를 겪어왔다는 점이다. "기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의미하는 바가 달랐으며, 한 시대의 한 공간에서조차 어떤 문서상에서나 법률상으로 완벽한 정의가 이루어진 적 없는 모호한 통칭이므로, 무엇에 중점을 두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기사를 귀족과 동일시 할 수도, 구분할 수도 있다. 즉, 정답이 없다.

이 모든 문제는 그 '기사'가 출현하는 시기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있다. 기사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비유하자면 동네 대감집네 머슴이 무장하여 편성된 가별초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원 목차에서도 언급하였듯, 특히 기사라는 뜻의 영어 Knight에서 노골적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으며, 원래 머슴이라는 단어에 가깝던 Knight가 기병을 의미하게 변화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카롤링거 제국이 분열되고 현지에서 야만족을 알아서 막아야 하는 시대가 되자, 시시때때로 빠르게 쳐들어오고 빠지는 바이킹마자르족에 대응하는데에는 카롤링거 시대의 군제인 자유민 보병보다는 정예 기병대가 유용하였다. 이 정예 기병대의 대다수는 자유민이 아니라 장원을 보유한 현지 유력자의 가신이자, 예속민이고, 사병(私兵)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군주들은 그러한 정예 기병대를 가진 현지 유력자들에게 지방관직을 맡겼다.

봉건시대, 더 나아가 전근대 신분제 사회의 관념에서 "누구를 섬기느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비자유민과 자유민으로 나눠서 무조건 자유민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은 현대적인 관점이고, 비자유민이더라도 누구를 모시느냐, 그 모시는 방법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자유민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을 수 있었다.[26] 자유민은 이론적으로야 황제나 왕의 신하일 수 있지만, 왕은 멀고 영주는 가까웠다. 더군다나 영주가 곧 그 지방의 지방관인 경우는 너무나 흔했다. 봉건 계약으로 얽히고 섥힌 구조 속에서 가장 고귀한 의무는 군사적 의무였으며, 귀족을 섬긴다는 것은 곧 귀족 사회에 편입된다는 의미였다. 반면, 농노는 자유민에게 부과되는 군사적 의무를 질 수 없는 이들이었으므로, 군사적 의무를 하지 못하고 농사만 짓는 것은 곧 치욕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기사들의 대다수는 원칙상으로는 농노들과 마찬가지로 비자유민 혹은 반자유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이 다른 존재로 여겨졌으며, 상위 귀족들 역시 군주 앞에서 기병으로써 종사했기에 기사는 귀족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동시에 봉건제는 사회의 많은 구조로 확대되었다. 나름대로의 대토지를 가져 스스로 정예 기병으로 무장할 수 있는 자유민은 남작이 되었으며, 이런 이들 중에서도 백작 등 작위를 부여받아 합법적 권력을 가지게 된 이들도 있었다. 또 저렇게 권력을 획득한 이들은 주변의 자유민 농민 중에 징집령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농노로 가신 밑에 강제로 편입 시키기도 했다. 또 자유민 중에서도 이런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계속 홀로서기를 하느니 차라리 유력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이들은 스스로 예속민으로 들어가, 서전트나 미니스테리알리스(ministerialis) 등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런 이들 중에서도 또 일부는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말과 갑주와 봉토를 갖춰 군무에 종사하게 되기도 했다. 또한 봉건제의 확대로, 이전에는 유력자의 집에서 식솔로 살던 사병들에게도 봉토가 따로 주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한국사로 치면 솔거 노비들이 외거 노비로 변한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 '잘 무장하고 말 타고 나가 싸우는 사람들'은 밀리테스(milites)라고 불렸는데, 문제는 벌써 12세기면 milites gregarii와 milites nobiles라는 구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라틴어 'gregarius'는 '일반적인, 평범한'을 뜻하고, 'nobiles'는 '고귀한'을 뜻한다. 즉, 프랑크 왕국 시절에 기사의 원형이 등장한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기사'들이 등장한 고중세에 이르면 벌써부터 평민기사(milites gregarii)귀족기사(milites nobiles)를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것.

사실 12세기에도 여전히 기사의 상당수는 서전트나 미니스테리알리스(ministerialis), 혹은 가신에서 유래된 계층이었으나, 기사의 의무가 고귀하다는 관념 덕분에 귀족 계층의 방계들이 꾸준히 기사로써 편입되었고, (비록 그 규모가 매우 작은 경우가 많았으나)귀족적인 특권이라고 간주된 봉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으며, 서전트나 미니스테리알리스 계층 역시 전문직으로써 일하는 계층이 많다보니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기 용이했다. 결국 이들은 법적으로도 '고귀한 계층'으로 편입되었으며, 조선 시대의 비유를 한 번 더 사용하자면 중인의 신분 상승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12세기에는 사회제도가 심화되고 신분제가 발전하면서, "귀족"이라는 신분제적 질서가 완성되었고, 작위명으로 널리 대표되는 세습적 지위가 탄생하였다. 즉, 이 시점부터 "귀족"이라는 것은 새로이 정립된 세습귀족위를 뜻하게 된 것이다.

상기 "반론: 기사는 귀족이 맞다."에 서술된 바와 같이 국가와 지역마다 뒤죽박죽 되는 경향이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중세가 심화되고 귀족 신분제가 정립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기사였던 이들의 지위가 높아지는 동시에 새로운 기사 계층의 편입을 막기 위한 법이 생겨났다. 하지만 전쟁은 계속 일어났고, 군무를 이행할 사람들은 계속 충당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중세 말부터는 소위 보병 혁명이라고 불리는 군사적 변화가 일어나서 대규모의 보병을 운용할 필요가 생겨났고, 이들이 기사와 동일한 단어인 밀리테스(milites)로 불리는 것은 당대인들 관점에서 매우 헷갈리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말을 타고 싸우는 이들을 뜻하던 단어'인 기사(Knight, Ritter, Chevalier)는 귀족 계층의 신분으로 바뀌었고, 계속 충원되는 비귀족 군인들은 맨 앳 암즈라는 단어로 불리게 되었다. 고중세를 지나가고 15, 16세기에 들어오게 되면 군무와 신분의 분리는 더욱 뚜렷해진다.

11세기에서 12세기 언저리의 제1차 십자군 언저리의 기사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말 타고 싸울 수 있을 것"이었다고 한다.[27] 여기서 말 타고 싸울 수 있는 능력이란 직접 말을 소유했다는 의미이며, 예비용까지 최소한 2필 이상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많은 기사들이 전쟁 중 "말을 잃고 보병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사'란 '잘 싸우는 기병'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당연히 말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싸울 수도 있었으므로 기사였던 것이고, 말이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 생계를 보장함으로써 휘하에 기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 당시 기사들은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가신들일 수도 있었지만 자기 농장을 가지고 말을 키울만큼 여유로운 부농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28] 반드시 기사가 귀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정리하자면 '기사의 원형'이 제시된 프랑크 왕국에서는 정작 '기사'가 아직 없었고, 익숙한 '기사'가 등장하는 시절이 오면,
  1. 대중은 잡졸과는 달리 잘 무장하고 싸우는 무사들이면 누구나 다 그냥 '기사'로 여겼고,
  2. 기사인 동시에 명백한 세습 귀족이기도 한 체제의 수혜자들은 '우리만이 진정한 기사'라며 군무에 종사하는 평민이나 하급귀족 기사들을 디스했고, 귀족 작위와 기사 직위를 상호불가결의 것으로 묶어놓으려 했으며,
  3. 굳이 그런 것 신경 안 쓰는 지방에서는 '진정한 기사든 말든'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군무와 신분제가 서서히 분리되면서 명백한 통일된 원칙 없이 각자의 이해관계와 명예심, 입장에 따라 귀족과 기사가 같은 것이냐, 아니면 상호 구분되는 것이냐를 알아서 설정놀음 했던 것.

즉, 무사이자 고귀한 혈통이며 군무에 종사하는 의미로 한정한 좁은 의미에서 '기사'의 수는 매우 적었고, 그 시대는 생각보다 매우 짧았다고 할 수 있으며, 중세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10세기에서 14세기까지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일반 병사나 징집병과는 달리 전문적 군사훈련을 받는 엘리트 전투요원으로서 중장기병이라는 의미에서 '기사'의 수와 그 시대는 좀 더 길었으나, 이 경우에는 '군무'로서 기사지 '고귀한 혈통의 무사'로서 기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세유럽의 병과 직종으로서 '기사'인가, 아니면 중세유럽의 사회적 신분으로서 '기사'인가, 어느 쪽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나온다.

6. 분류

6.1. 과정별

6.1.1. 페이지(Page) / 스콰이어(Squire)

먼저 기사 가문 출신이나 귀족 태생, 혹은 귀족의 봉신 출신인 어린 소년이 페이지라는 시동이 되어[29], 그가 스승으로 모실 기사 혹은 장차 섬길 영주의 성에 들어가 기사와 영주를 위한 온갖 잡일을 하면서 예법을 익히고 틈틈이 기초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 페이지 과정은 관습적으로 7년이 보통이다.

보통은 친구나 친척처럼 가까운 사람 아이를 들여오거나 기사들끼리 서로 아이를 교환해 맡았다. 힘 있는 귀족이나 대영주들은 중요한 가신, 다른 유력귀족이나 영주 등 좋은 가문의 아이를 들여와 다른 관료나 귀족에게 심부름, 전언 등을 전달하는데 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가문 간의 친목질에 더해 아이들에게 정치/행정 등의 실무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유사시에는 인질로 쓸 수도 있었다.

페이지 상태로 나이 좀 먹고 청소년기가 되면, 견습기사인 스콰이어가 되며[30], 전장에 직접 기사를 따라다니며 무기갑옷을 손질하고, 승마술, 무기를 다루는 법, 맨손격투술, 기초적인 전법 등의 전투기술, 기사의 복장을 챙기고 말을 손질하는 등의 잡일, 그리고 노래와 춤과 악기 다루는 법을 익힌다.[31] 전장에서 기사에게 시중을 들어주는 건 대부분이 스콰이어다. 단순히 시중만 드는 게 아니라 전장에서 스승의 등도 지켜주고, 스승이 포로로 잡혔다면 그를 구출하러 나서기도 하는 등 전투 임무도 수행했다.

6.1.2. 나이트 배철러(knight bachelor)

스콰이어 상태로 충분히 교육을 받아[32] 20~21세가 되거나, 혹시라도 따라나간 전쟁터에서 무공이라도 세워서 "고놈 기사 시켜볼 만하군!"하고 기사가 될 만한 용기와 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인정받으면, 자신이 모시던 마스터, 혹은 가신 기사의 경우 영주에게 가서, 기사 서임하고 몽둥이 찜질 등 신고식까지 받으면[33] 정식 기사가 된다. 이 때 기사로 임명하는 주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봉신이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오마주이다.

이 정식 기사에 해당하는 계급은 그냥 기사라고만 부르거나, 영국식으로는 나이트 배철러라고 한다. "Bachelor"는 원래 "졸업생", "수료자"를 뜻하는 말로서 여기서 "애송이", "신참"이라는 뜻이 파생되어 knight에 붙은 것이다.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이를 "하급기사"라고 번역한다.[34] 영국에서는 지금도 1920년대에 창설된 하급기사협회가 하급기사들을 관리한다. 이러한 "신참 기사"들은 보통 가진 것이 변변찮기 마련이어서 따로 봉신을 두지 못하고 그 자신이 봉건적 계서제의 최말단 봉신/가신이 되었는데, 그래서 종종 "봉신의 봉신"이라는 뜻을 지닌 "Vavasour"와 상통하는 말로도 쓰였다.[35]

영국식 배철러 및 그에 상응하는 대륙의 기사는 기사단식 기사가 아니라 봉건적 기사 전통으로서 왕으로부터 전쟁터에서의 무력을 인정받아 직접 기사 직위를 수여받은 초창기 형태의 기사, 혹은 그런 기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다른 기사를 마스터로 섬기면서 전통적인 페이지-스콰이어-기사 과정을 거쳐 인정받은 토종 기사들에 붙는 말이다. 귀족이나 영주 가문을 반영구적으로 봉신으로 섬기기로 맹세하고 기사위를 수여받은 하우스홀드 나이트(가신 기사) 역시 배철러라고 불린다.

그래서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으로 기사가 되는 경우는 배철러라고 부르지 않는다. 기사단 출신 기사의 원형은 십자군 원정 시기의 군사적 기사수도회이며, 그때만 해도 기사단에 드는 것에는 신분의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기사 계급이 경직되고 기사도적 이상을 숭상하기 위한 기사단이 생겨나면서, 종전의 기사수도회를 제외하고[36] 새로 탄생한 세속 기사단에서의 기사는 귀족 전용으로 변했다. 이런 기사단은 사실상 상류층 귀족들을 위한 정원수가 한정된 귀족 클럽이었으므로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전통 방식을 거치지 않고도 기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귀족 출신 기사는 태생이 좋다 보니 (하급 귀족인) 기사 가문 출신의 배철러를 좀 얕잡아보기도 하지만, 기사의 본질로 보자면 배철러야말로 진짜 원조의 전통을 지켜온 쪽이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를 생업으로 알고 어릴 때부터 부단히 수련을 거쳐온 쪽과 귀족 도련님 간에 실력 차이는 뻔하지 않겠는가. 물론 차남이나 서자로 태어나서 장래에 상속 받을 게 없는 귀족 자제들도 전통 방식을 거쳐서 제대로 직업 기사로 나서기도 했으니, 귀족 출신이라고 항상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6.1.3. 나이트 배너렛(Knight banneret)

나이트 배너렛은 흔히 상급기사 등으로 번역하는데,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나 일정 병력을 지휘하는 단대 지휘관 급의 기사를 말한다. 상비군 제도가 없어서 군제가 느슨했던 중세 시대에 부대를 지휘하는 전문 장교가 있을 리가 만무하므로, 기사 중에 실력이 있고 지휘력이 있는 경력있는 기사 혹은 전장에서 실제 용맹을 보인 기사를 배너렛으로 임명하여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일반 기사가 호봉수 찼다고 저절로 배너렛으로 승급하는 것은 아니다. 배너렛은 반드시 전시에 전장에서 군주가 임명해야하는 직위이다. 고로 평시에는 배너렛이 임명되지 않으며, 군주에게 직접 임명받지 않으면 배너렛이 될 수도 없다. 약간 편법으로 군주의 깃발을 전령이 챙겨가서 '여기 전하의 깃발이 있으므로 어전인 것으로 치고 원격 임명(?)하겠소.'하는 경우는 있으나, 평시에 호봉수 높은 기사랍시고 배너렛으로 붙여주는 법은 없었다. 애초에 평시에 기사와 기병 지휘관이 필요할 정도로 대규모의 기사를 측근으로 두는 일이 없기도 하고.

이러한 점들로 인해 전시만 되면 베너렛 자리를 두고 경쟁률이 높았다. 배너렛이 되면 한 개의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자리를 넘어 일신의 영광이 될 수 있었는데, 전투 후 군주에게 수여받은 베너를 해당 전투에 지휘관으로서 참전한 트로피로 가보에 가깝게 전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족의 차남 이하는 기사 서임을 받자마자 배너렛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이다 보니 부모님이 붙여준 가신 기사나 부하들 수십을 이끌고 전쟁터에 출진하면 왕은 많은 부하를 끌고 힘을 보태러 온 기특한 기사를 보고 "네가 데려온 애들 네가 지휘해라."라면서 배너렛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귀족 장남은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영주의 후계자니 배너렛보다 높았다.

6.2. 소속별

6.2.1. 소속기사

  • 나이트 배철러(하급 기사)
  • 하우스홀드 나이트(가신 기사)
6.2.1.1.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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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2.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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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편력기사(나이트 에런트)

나이트-에런트(Knight-errant)는 기사의 계급이 아니다. 나이트 에런트 자체가 편력 기사라는 뜻인데, 말 뜻을 잘 생각해보면 기사 계급이 아니라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편력(遍歷, errant)이란 여기저기 쏘다니는 방랑을 뜻하는 단어로 그냥 떠돌이 기사라는 의미에 가깝다.

나이트-에런트라는 단어는 실제로 존재하던 공식적인 직함이나 직위, 작위 같은게 아니고 기사도 문학에서 나온 말이다. '어디 먼 동네에 있는 악당을 혼내주러 다닌다든지 물질적 이득을 외면하고 명성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레이디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 한다.'는 편력 기사의 이미지는 중세가 아니라 근대에 나온 기사도 로망스를 통해 생긴 것이다. 기사도 로망스에서 나온 단어이므로 드래곤을 때려잡거나 악당들을 혼내주는 등 떠돌아다니는 기사라면 그냥 나이트-에런트라고 불러도 맞다. 한마디로 RPG게임의 모험가 같은 기사라는 뜻이지 실질적인 어떤 직함이나 지위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단어의 기원은 문학이지만 이런 편력기사들이 현실에도 존재했는데 그 대부분은 어디에도 소속해있지 않은 낭인이었다.

중세 초기라면 몰라도 영지나 작위란 게 한정돼있어서 그리 쉽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나눠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닥치다 보니 나중에는 기사로 서임받더라도 영지나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래서 기사로 태어났으되 물려받은 재산과 봉토가 없는 많은 가난한 기사들은 편력기사(遍歷騎士)가 되어 떠돌면서 마치 용병처럼 생활하거나[37] 자신을 고용해줄 영주를 찾다가 적당한 조건에 동네 영주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즉 방랑 기사, 편력 행위를 하는 떠돌이 기사 자체는 실존했다. 그러나 실제로 편력 행위를 하는 경우는 숭고한 이상이나 정의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냥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라서 어디 토너먼트나 껀수 없을까, 높은 사람들과 인맥 만들 수 없을까, 어느 가문 아래 들어갈 수 없을까 등등 온갖 이유로 쑤시고 다니는 것이었다.

편력기사가 좀 악랄하게 굴자면, 괜히 지나가는 다른 기사나 상인한테 시비 걸어서 자기 솜씨를 뽐내고 장비를 빼앗아 한밑천 삼으려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건전한 이유를 꼽자면 자기 동네를 위협하는 산적이나 강도 따위를 처리하기 위해서 그 동네 기사가 발벗고 나선 치안 행위 같은 것이 해당된다.[38] 즉 실제의 편력 행위는 봉건 기사의 위치를 탈피한 숭고한 무언가라기보다는 봉건 기사의 위치로 가려는 발버둥에 가까웠다.[39]

다만, 모든 편력 기사가 낭인인 것은 아니고, 예를들어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들에겐 주군이 있으니 낭인이 아니지만 성배를 찾아 각지를 떠돌아 다니므로 나이트-에런트로 불린다. 대표적인 나이트-에런드의 예시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원탁의 기사이다. 역사적인 예를 들면 청년왕 헨리의 경우 잉글랜드의 공동왕이었으나 왕으로서 실권은 전혀 없었으며 유럽을 떠돌며 마상창시합에 몰두했는데 청년왕 헨리를 따라다니는 기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윌리엄 마셜이 나이트-에런트로 유명하다.[40] 즉, 편력 기사 대부분은 낭인이 맞지만, 드물게 특별한 임무나 목적을 갖고 외지를 떠돌 경우에도 편력기사라 부를 수 있다.

아무 기사나 방패에 문양을 새길 수 없다는 속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에런트든 아니든 간에 방패에 자기 가문이나 개인의 문장을 그리는 것은 제한이 없다. 앞서 언급된 윌리엄 마샬은 자신이 신세졌던 가문의 문장을 좀 더 써먹으려고 갖고 다니기도 했다. 색깔로 의미가 부여된 흑기사나 백기사 역시도 아서 왕의 죽음 같은 기사도 로망스에서 만들어낸 허구이자 상징. 작중 등장인물의 역할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에 불과하지, 딱히 실제 관습과는 관련없는 것이다. 기사가 창끝에 달던 작은 삼각형이나 제비꼬리형 깃발은 페넌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으로, 기사라면 아무나 페넌을 쓸 수 있었다.

아무나 달지 못하는 깃발은 배너라는 것인데,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제법 큰 깃발이다. 배너를 소유할 수 있는 기사를 두고 베너렛 기사라고 부른다. 배너는 일종의 지휘기, 부대기라서 전장에서 배너를 사용하는 것은 배너렛 기사, 그리고 부대를 지휘하는 귀족에게만 허용되었다.

6.2.3. 전례/재판

6.3. 지역별

6.3.1. 서유럽

6.3.2. 동유럽

6.3.3. 오스만 제국

7. 문화

7.1. 기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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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기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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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심상

전술적인 측면에서 현대의 기사는 공군해군항공대전투기 파일럿과, 기병의 직접적인 후예인 육군전차장, 헬리콥터 조종 병과로 옮겨갔다. 특히 전투기 파일럿의 경우 보통 1:1로 하늘에서 맞붙어 싸우다보니, 첫 공중전이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스스로를 '하늘의 기사'라고 자칭하며 탈출하는 적 조종사는 쏘지 않는 등으로 나름대로의 기사도를 지키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붉은 남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독일군공군 에이스인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이다. 한편 그는 격추되는 전투기에서 탈출하는 조종사를 공격하지 않는 매우 신사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격추한 비행기의 잔해를 주워다가 자기 에 장식하는 악취미가 있어서, 적군 조종사들을 피꺼솟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41] 이 시기의 전투기 조종사들의 기사도적인 로망을 다룬 작품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붉은 돼지다. 작중의 시점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지만, 이 시기에도 어느 정도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남아 있어서, 조종사들 사이에서 기사도를 지키지 않는 자를 비신사적인 사람으로 취급했다. 현대에도 제네바 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이런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국제법상 공수부대가 아닌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할 목적으로 낙하산을 편 사람을 공격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7.3.1. 환상과 현실

기사도의 환상 때문인지 기사들이 명예를 소중히 하고 자신만의 레이디를 두는 등 낭만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42], 이런 의미의 기사도는 늦어도 12세기 후반에야 정립된 개념이다.

상기 문단 등에서도 언급하지만, 초기 기사 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귀족이 아닌 평민 기사로, 소위 배신(Vavasour) 계층이었다. 가신 밑의 가신이라는 의미인 이 단어는, 그 휘하에 다른 전사 계급을 두지 못한 최하급 전사 계층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기사들은 부유하지 못했지만 농사 따위 농노들이나 하는 천한 일이랍시고 일 따위 안 했다. 이런 인식은 기사들만 가진 건 아니라서 기사가 직접 농사 짓는다 하면 기사들 내에서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별종 취급했다.[43] 만지는 게 너무 좋아서 토너먼트에 나가지도 않고 농사만 짓는 기사를 보고 레이디가 "그런 남자는 싫어요." 했더니 토너먼트로 나가서 훌륭한 성적을 거둬오더라 하는 옛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지의 평화나 약자 보호를 위해서 평소에 뭔가 헌신하는 이들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세의 일화들을 보면 강도나 양아치, 조폭에 가까운 기사들이 수두룩했다.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나 상인들에게 '수금(?)'을 하는 경우는 흔했고, 이들을 가리키는 덤불 기사도적 기사라는 용어가 따로 나올 정도였다.[44] 지금의 독일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대공위 시대에 많이 출몰했고, 영방으로 쪼개진 덕에 직접적인 제제를 가할 수단이 부족한 관계로 당시 관세 사무소를 습격하거나 강가의 화물선을 나포하는 등 무법 행위를 자행했다. 괴테의 희곡으로 유명한 실존인물 괴츠 폰 베를리힝엔 역시 도적 기사였다. 봉건 시대 초기 프랑스 남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극치였는데, 이런 도적 때 기사들이 자체적으로 성을 쌓거나 이미 있던 성을 점령한 다음 주변 마을들을 멋대로 자기 휘하 영지로 삼는 성주라는 존재들이 난립하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이런 양아치가 대다수인 기사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고, 프랑스의 몇몇 수도원은 자기네 장원에 속한 기사들에게 '평시에는 무장 금지' 같은 명령을 내리거나 '너무 비싼 무기를 들고 다닌다.'라는 이상한 이유로 처벌하기도 하는 등 교회와 기사는 은근한 갈등 관계였다. 기사도 로망스 따위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기사 따위는 기사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교회와 왕실 등에서 좀 도덕적으로 교화시켜보고자 만든 일종의 줄 같은 개념이고, 실제 기사는 훨씬 현실적이고 돈벌이에 민감했다.# 모시는 주군을 뒤치기한 기사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국왕이나 대영주들은 부하 기사를 신뢰하지 못했다.

물론 모든 기사가 그런 강도 무리는 아니어서, 형편이 극도로 나빠졌지만 그리스도교적/인간적 양심이 있는 가난한 기사들은 강도짓이라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경제가 나빠지는 경우 영지를 반납하거나 교회에 봉헌하고 십자군을 떠나거나 수도원 소속 기사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대기근이나 전염병 등이 대유행했을 때 볼 수 있는 모습이고, 노후가 불안정하고 영지가 없는 노기사/병사들도 흔히 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가난한 기사들은 장가도 못 가고 늙어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이들도 결혼도 하고 싶고, 후임 기사들이나 부하 기사들도 데리고 다니고, 제대로 된 영지도 거느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기사들은 싸움이라면 환장을 했다. 주군이 소집한 전쟁에 나서면 주군이 봉급도 챙겨주고, 전리품도 얻을 수 있고, 공성에 성공하면 사흘 동안 약탈도 가능했기에 기사들에게 전쟁은 곧 생계였다. 잘 싸우면 주군 눈에 띄어서 더 많은 봉토를 얻을 수도 있고, 그러면 결혼하거나 부하 기사를 거느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사가 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기간은 겨우 1년에 40일 일 정도로 짧았다. 이것은 고전 게르만족의 관습법에서 주군을 위해 종사가 복무해야 하는 날을 '1년에 중에 40밤을 자는 동안'으로 규정해왔던 것에서 유래했다. 물론 전쟁이 FM대로 40일만에 끝낼 수 있는 건 절대 아닌지라 실제 복무 기간은 40일을 넘기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중세에는 이미 40일을 넘겨서 봉사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는 법이 각지에서 제정되었을 정도로 저 고대법은 무시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저 규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고, 40일 이상 복무할 경우 이나 으로 추가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주군 관점에서는 40일을 넘겨서 계속 봉급을 쳐먹는 기사들을 계속 붙드는 것도 나름 힘겨웠던 관계로, 주군 입장에서도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려 했다. 그래서 기사 입장에서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 다른 귀족 눈에 띄어서 그 귀족과 계약을 추가로 맺어서 조금이라도 일을 더 뛰는 투잡, 쓰리잡(?) 기사들도 흔했다.

물론 다른 주군과 계약을 맺으려면 뭔가 커리어가 있어서 명망이 좀 있어야 스카웃이 들어오는 법. 그렇기에 토너먼트는 기사들이 활동하며 눈에 띌 수 있는 중세판 프로듀스 101(?) 쯤 되는 빅이벤트였다. 토너먼트에 나가서 체면은 세우고 싶지만 괜히 져서 쪽팔리는 건 싫던 왕이나 이름난 귀족들은 승률 높은 기사를 고용해서 호위로 두곤 했다. 이때 이렇게 용병으로 팔려다닌 기사들의 모습에서 따온 단어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프리랜서(Free Lancer)다. 토너먼트 밀리 경기에서 승자는 패자를 잡고 몸값을 요구하거나 갑옷을 벗겨서 자기가 가질 수 있으니, 가진 게 말 한필과 갑옷에 창검뿐인 가난한 기사는 돈 놓고 돈 먹기 한다는 생각으로 토너먼트에 나가 다른 기사를 털어먹었다. 사실 말과 무기, 갑주의 유지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다 보니 가난한 기사들로선 돈을 벌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밀리 경기는 1 대 1이 아니라 전쟁처럼 꽤 규모가 큰 팀전이라, 아예 이 길로 나섰다가 크게 대성해서 토너먼트 전문 기사단을 꾸린 기사도 있다. 사자심왕을 이긴 사나이로 유명한 윌리엄 마셜이 대표적인 케이스.

한 일본 학습만화의 묘사에 따르면[45], 십자군 전쟁 이후 몇몇 타락한 무술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모시는 주인도 없이 기마창 시합마다 돌아다니며 영주들로부터 알바를 하며 상금에 눈이 먼 것으로 묘사된다. 영주들은 왕이나 주교 같은 높은 사람들 앞에서 그 기사가 자기네 가신이라고 뻥치고 다니면서 체면을 유지한다.

최소 12세기까지 유럽이 군소 제후와 귀족들에 의해서 상시적인 내전 상태였던 것에는 이런 기사들의 존재도 한 몫 했다. 기사들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어떤 형태나 이유에서든 전쟁이 필요했고, 기사들의 주군인 영주/왕들 역시 기사들 앞에서 위신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했다.

한편 저런 극히 가난한 기사들 외에도, 백작, 공작, 심지어 왕까지도 전장터에서는 한 명의 기사였던 중세의 특성상, 전장에 나섰다가 그런 명망 높은 귀족도 한 방에 골로 가는 사례는 무척 흔했다. 심지어 프로방스 백작가나 바르셀로나 백작가의 경우는 기사서임식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징크스 탓에 귀족이면서도 기사 서임식을 최대한 미루는 특이한 가풍도 있었다.

12~13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내부가 좀 평화로워지자 저런 무식한 식충이 강도 기사들의 입지가 점점 줄어든다. 전쟁이 줄어든 유럽에서 저런 하급 기사들이 몰린 곳은 다름 아닌 용병이었다.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리, 스페인의 콩퀴스타도르를 구성한 인물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저런 한미한 귀족 출신 가문이었다. 그런데 용병 문서에서 보다시피 저런 초기 용병들도 결국 평시엔 도적떼가 되어서 약탈을 하고 다니느라 골칫덩어리였다. 한편 군주나 영역제후들도 소집하는 봉신들 대신 용병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지며, 복무를 대신하는 세금인 Scutage(영: shield pay, 방패세)가 정착하게 된다. 이전 시대의 관습이었던 '기사는 농사 일을 해서는 안된다.'가 이 시대에 이르러 법으로 확정되는 바람에, 형식적인 기사 타이틀을 단 한미한 귀족들은 군주와 영역제후들이 고용하는 용병으로써 먹고 살았다.

한편 저런 하류 기사들 외에, 중소 귀족으로서 그나마 성공했던 기사들도 나름 다른 길을 찾았다. 이들은 자기 영지와 재산을 굴려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거느린 식충이 기사들을 영지에 붙들어 두기보다는 용병으로 내보냈으며, 기사들 중에서도 행정 능력이나 소양이 좀 있는 이들은 미니스테알리(ministeriales)로[46] 고용해서 영지의 경영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남작 쯤 되는 이들은 왕에게 관료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는 분할 상속 경향도 점점 줄어서, 영주들도 장남 미만의 아들들은 용병으로 방출해버리거나 교회로 보내거나 대학에 보내 교육 시켜 관료로 만들곤 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위에서도 상기했듯 '혈통으로써 기사들'은 꼭 말타고 싸우는 계층이라기보다는 그냥 귀족층이면 으레 붙은 타이틀로 변해갔다.[47]

이 시기 쯤이면 그 전처럼 진짜로 무식한 기사들은 찾기 힘들고, 문학이나 시에 조예 깊은 인물들도 흔히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2~13세기 고명한 기사이자 미네징거인[48] 볼프람 폰 에센바흐는[49] 작품 내에서 "나는 글도 모르는 야인입니다." 운운하면서 구술로 썼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진짜로 글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글월 깨나 읽는답시고 시건방지고 콧대높게 굴던 학자들이나 라틴어를 포함한 정규 교육을 받은 메이저 작가들에 대한 빈정거림 내지는 자신은 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하므로 저런 자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의 상징적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볼프람의 글은 작가의 폭넓은 지식문학적 시도가 있는 만큼 그가 문맹일 리는 없다.

라틴어를 못해서 을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세 시대 식자들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대부분의 책을 라틴어로 썼으며 De Re Militari 같은 군사서도 라틴어로 적혀있다 보니 그걸 못 읽는 군주가 전쟁터에서 글(라틴어)을 아는 기사를 불러다가 해석을 시켜 군략의 조언을 얻곤 했다. 하지만 그 군주도 평상시에 자기네 말로 편지 쓰고 사무 보고 할 거 잘만 했다.

중세의 끝물인 16세기면 슬슬 보병전술과 총병 전술의 발달, 용병으로 대체 추세가 완연해져서 기사가 플레이트 아머 입고서 말타고 돌격할 전장은 없어졌지만, 한미한 수 많은 귀족 가문들이 대대로 이어진 기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가 끝난지 한창 된 17세기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도 하급귀족 타이틀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기한 12~13세기 이래로의 변화, 즉 방패세로 봉건 소집을 대체하던 경향을 비롯한 사회적 변화는 이미 진행될대로 진행되어서, 심지어 걸치는 옷과 휘두르는 무기만 바뀌었을 뿐 계속 전장에 나서는 신세였는데도, 아무리 귀족 작위를 단 사람이라 해도 주군을 찾는다면서 떠돌아다닌다 한들 봉토를 내려주고 기사 서임식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다만 월급을 줄 고용주를 찾아야 할 시대였던 것이다.[50]

기사단도 실존하긴 했지만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 중세 유럽에서 기사단의 시작은 구호기사단이나 성전기사단처럼 십자군 원정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 조직이었고, 수도회에 바탕을 둔 집단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기사라는 돈 잡아 먹는 중기병을 부대 단위로 상설 유지하는 일은 필요성도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십자군 시절의 기사단 역시 종교의 적과 싸운다는 대의명분 하에 세워진 경향이 있어서 절대적 필요성 자체는 글쎄올시다 싶은 수준이었는데, 그나마 예루살렘 왕국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왕국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가치가 있었으나 멸망 후에는 상당히 애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들 기사단은 근대까지도 원래 목적에 걸맞게 오스만 제국이나 바르바리 해적 등 이슬람 세력과의 싸움을 이어나갔으나, 십자군 이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유럽 각국의 국가/사설 기사단은 대개 소수의 자격을 갖춘 기사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귀족 클럽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보통 생각하는 기사 무력 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다만 무슬림 정복 이래 꾸준히 무슬림과 싸울 필요가 있었던 스페인 쪽 기사단은 유럽 내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다.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라는 구심점을 들기는 했으나, 스페인 기사들은 실제로 자기 땅을 침략한 적과 싸워야 한다는 절실하고도 실질적인 목표가 있었고, 그래서 종교보다는 충성을 바치는 군주를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에까지 남아 있는 유명 스페인 기사단들의 건립 연혁은 12~13세기까지 올라가고, 하나같이 실제 무력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쳤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예루살렘 쪽과는 달리 목표 달성에 성공하였는데, 그 후에는 다른 유럽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기사단도 중세 말로 가면서 귀족 집단화하게 된다.

8. 변용: 현대의 기사

8.1. 작위/상훈체계

작위로서의 기사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유럽의 일부 국가에 남아있다. 현대 유럽 국가들은 큰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기사 칭호를 주는데, 이 칭호가 기사작위(Knighthood/Damehood)로 통용된다. 옛날의 기사와 차이가 있다면, 꼭 군인이 아니더라도 스포츠 선수나, 학자, 정치인에게도 이런 작위가 주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51]

대표적으로 영연방에서는 2등급 이상(1, 2등급)의 훈장을 받거나 Knight Bachelor를 받으면 이름 앞에 'Sir(경)'을 붙일 수 있게 된다. 여성이 2등급 이상의 훈장을 받을 경우 'Dame(여사: 女士)'을 이름 앞에 붙인다. 이러한 기사작위는 기본적으로 비세습이라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52] 또한 중세처럼 땅을 준다거나 정치적 입지[53]를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장(coat of arms)에 기사의 상징을 쓸 수 있는 등 명예 차원의 여러 의전이 따라 붙는다. 유서 깊은 전통이 있기도 하거니와 영국 사회가 아직 말투로도 암묵적으로 계층을 나누는 철저한 명예 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공인하는 이런 경칭은 자국민 입장에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Honours System, 그러니까 훈장 체계는 크게 Chivalric Order(기사단 작위) - Decorations(큰 공이 있어서 주는 훈장) - Medal(공이 있기는 한데 좀 격이 낮은 훈장) 정도로 나뉠 수 있는데 기사가 되려면 기사단에 일원으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기사라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영국에서, 영국 여왕이 군주(Sovereign)로 있는 기사단은 총 10개가 있다.
  • 가터 기사단(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영국 기사단 중에서도 제일 서열이 높은 기사단이다. 주로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스에 관련된 사람들(많이 높으신 분들)한테 주는 기사단 자리. 주로 영국 합참의장이나, 나토 사무총장, 전 국무총리, 대법원장 같은 고위인사들에게 수여된다. 후술할 티슬 기사단과 유이하게 군주인 현 영국 왕 찰스 3세가 준다고 하면 그냥 줄 수 있는 훈장이다. 의회나 정부등의 조언 같은 거 필요없다.

    이 기사단의 단원이 되면, 파란색 가터벨트를 진짜로 수여받고, 본인의 문장(Coat of Arms)에 저 가터 기사단의 표식을 넣는 것이 허용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 기사단에 들어가는 거 자체로 일단 Sir 칭호는 당연히 따라 붙는다고 할 수 있다.
  • 티슬 기사단(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이 기사단은 가터 기사단과 동급이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람들에게 주는 기사단 자리다. 영국은 4개 왕국이 모여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특히나 독립하려고 애쓰는 동네 사람들이니, 이런 훈장에서도 차별화된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티슬은, 스코틀랜드의 상징 중 하나인 엉겅퀴를 뜻한다.

    이 기사단에 들어갈 시에도 당연히 가터 기사단과 같이 Sir 칭호를 받을 수 있다. 가터 기사단 처럼 문장에 로고도 넣을 수 있다.
  • 바스 기사단(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바스 기사단은 기사단 랭킹 4위로 이 단계에서 부터는 정부의 조언을 받아 국왕이 승인을 하는 형태를 띄게된다. 정부의 조언을 받는다는 소리는 결국 입헌군주제 시스템하에 영국 정부에서 리스트 뽑아 올리면 군주가 군말없이 사인해주는 형식으로, 군주가 거부할 수 없다. 이 기사단 부터는 Sir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계급이랑 받을 수 없는 계급이 나뉜다.
  • GCB(Knights/Dames Grand Cross) 120명
  • KCB(Knights Commander)/DCB(Dames Commander) 355명
    등급은 SIr 칭호를 받을 수 있고[54], CB(Companion) 등급 1925명은 아쉽게도 Sir 칭호를 받을 수 없다. 이 기사단의 자리는 앞에서 소개했던 기사단보다는 확실히 격이 낮다. 단적인 예로, 바스 기사단은 인원 제한이 120+355+1925명인 데 반해서, 가터 기사단은 총원 24명을 넘을 수 없고, 티슬 기사단은 16명을 넘을 수 없다. 그래도 문장에 로고 넣게 해주는 건 여기도 같다.
  • 성 미카엘과 성 조지 기사단(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기사단 훈격 6위에 위치한 훈장이다. 이 기사단은 주로 고위급 외교관들에게만 주는 훈장이다. 예를 들어 각국으로 보내는 대사들한테 이 훈장을 하나씩 줘서 보내는데 특히 미국이나 프랑스, 유엔 같은 큰 나라에 보내는 외교관들은 주로 이 기사단의 높은 자리를 줘서 보낸다. 이 기사단도 바스 기사단처럼 등급이 정해져 있다.
  • Knight/Dame Grand Cross(GCMG)
  • Knight(KCMG) / Dame(DCMG) Commander
    이들은 Sir 칭호를 붙일 수 있고 CMG(Companion)은 붙일 수 없다. 그래도 문장에 로고 넣어주는 건 가능하다.
  • 빅토리아 기사단(Royal Victorian Order)
    훈격 랭킹 7위에 있는 빅토리아 기사단이다. 이 기사단은 아주 특이한데, 군주가 100% 개인의 의지로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사작위다. 이 작위는 군주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그러니까 궁전에서 일하는 비서들이나 시종들에게 근속을 기념한다거나 하는 느낌으로 주는 훈장이기 때문에, 받은 사람들도 전부 다 군주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기사단부터는 등급이 좀 많아지는데 총 6개 중에서 상위 2개 등급만 Sir/Dame 칭호를 붙일 수 있다.
  • 대영제국 기사단(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이 기사단이 대영제국 훈장이다. 여기는 주로 평민들이 특출한 일을 했을 때 "너 기사." 하면서 주는 느낌. 그래서 축구선수와 감독들은 공을 세우면 주로 이 기사단 작위를 받는 편이다. 적어도 훈장을 주는 기준에서 보면, 귀족 출신들은 위와 같이 세세하게 나눠서 기사작위를 주지만 평민들은 거의 이 기사단에 넣는다. 이 기사단도 상위 2개 등급만 Sir/Dame 칭호를 붙일 수 있다.
  • 번외 1: Knight Bachelor
    이 기사작위는 기사단에는 속해 있지 않은데 군주에게 "어디 가서 기사라고 하고 다녀도 된다."라고 인증받은 기사들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프리랜서 기사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앞에 Sir를 붙일 수 있다. Sir 칭호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도 항상 적어야 하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Sir만 있으면 이 Knight Bachelor를 받은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물리학자 안드레 가임.
  • 번외 2: 휴면 기사단(Dormant Orders)
    이 기사단들은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회원이 없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수여된 적이 없어서 묻혀버린 기사단이다.
  • 성 패트릭 기사단
    가터 기사단이 잉글랜드, 웨일즈. 그리고 티슬 기사단이 스코틀랜드 출신 사람들이 들어가는 기사단이라면 이 기사단은 아일랜드 출신의 사람들이 들어가던 곳이다. 물론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더 이상 충원이 안 되는 상황이며, 북아일랜드는 가터 기사단으로 편입되었다. 이 기사단이 원래 훈격 3위에 있었던 기사단이다.
  • 인도에 관련된 기사단(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패트릭 기사단과 같은 의미로 인도가 대영제국의 일부였을 때 만들어놓은 기사단이지만 인도가 독립하면서 더 이상 수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서류상으로는 살아 있는 기사단이다.

한편 프랑스 공화국에서도 레지옹 도뇌르 훈장, 문예공로훈장(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등의 훈장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칭호를 기사라는 의미의 '슈발리에' 칭호로 부른다.

가톨릭 교회에도 교황이 훈장을 내려주는 성좌 고유 기사단이 존재한다. 교황 훈장 항목 참조. 링크

8.1.1. 보유자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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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튼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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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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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이안 맥켈런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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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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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리
(2009)
브래들리 위긴스
(2013)
존 허트
(2015)
칼 젠킨스
(2015)
로드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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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수셰이
(2020)
샘 멘데스
(2020)
스티브 맥퀸
(2020)
로저 디킨스
(2021)
조너선 프라이스
(2021)
존 부어만
(2022)
브라이언 메이
(2023)
O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어니스트 섀클턴
(1909)
윌리엄 브래그
(1941)
리처드 돌
(1971)
잭 브라밤
(1978)
지미 새빌
(1990)
클리프 리처드
(1995)
트레버 맥도날드
(1999)
스털링 모스
(2000)
재키 스튜어트
(2001)
톰 존스
(2006)
테리 프래쳇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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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모리슨
(2015)
앤디 머리
(2017)
가즈오 이시구로
(2018)
마이클 모퍼고
(2018)
M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폴 매카트니
(1997)
제프 허스트
(1998)
나이젤 쇼트
(1999)
니콜라스 윈턴
(2003)
닉 팔도
(2009)
링고 스타
(2018)
케니 달글리시
(2018)
루이스 해밀턴
(2021)
}}}}}}}}}}}} ||

여기 없는 인물은 보통 아니라고 보면 된다. 낮은 등급 훈장만 받았든지, 영국인이 아니라서 명예 훈장을 받았든지, 그도 아니면 벨기에[55]나 덴마크, 태국 같은 다른 국가의 기사이든지 셋 중 하나다. 한글 위키피디아에 문서가 개설되지 않은 인물은, 영어 위키피디아 항목에서 이름 앞에 'Sir'가 붙는지 아닌지로 쉽게 판단할 수 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훈장(상훈)/영국 문서
번 문단을
기사 작위와 훈장의 차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기사작위 서임자 중, 자주 언급되는 경우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름(first name) 기준 가나다 순.

8.1.2. 초소형국민체

일부 관심종자나 설정덕후들의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세운 유사 국가 체제인 초소형국민체의 경우는, 실존했던 군주제 국가들의 귀족 제도를 모방해서 몇몇 사람을 귀족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좀 있다. 이 경우, 일정 금액을 기부하면 임명장을 받고 기사나 귀족이 될 수 있지만, 당연하게도 특혜나 명예는 딱히 없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8.2. 와인 기사?

기사와 기사단의 전통적 의식과 이미지를 차용해 온 것들일 뿐, 실제 위상은 기사작위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8.2.1. 진실

모르고 보면 영국의 기사작위와 같은 급처럼 보일 수 있지만, 와인스쿨 졸업하면 주기도 하는 게 바로 이 소위 '와인 기사작위'다. 관련기사 와인스쿨 교육을 받는 데 드는 어려움과 비용이 웬만한 박사과정의 뺨을 치기라도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박사도 치우고 영국에서 날고 긴다는 교수들도 석학급에 다다른 뒤에야 받는 것이 기사작위다.

'와인 기사작위'의 가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싼 식대와 와인값을 지불하면 기사작위를 받을 수 있다는 현지의 안내를 받았다기사도 올라왔다.

이것들은 애초에 국가적 공헌에 대한 심사를 정부 주관으로 거쳐서 주는 것이 아니라, 각 와인 생산자 협의회가 '와인' 생산과 홍보에 도움이 되었는가를 기준으로 심사하여 주는 것이다. 심사의 권위도 권위지만 취지도 애초에 다른 것이다.

기사단의 전통과 이미지를 비슷하게 쓰다 보니 언론을 통해 겉보여지는 행사들의 이미지가 기사단과 엇비슷해졌고, 그러다 보니 대외적으로 '기사작위' 또는 '기사단'이라 알리는 것일 뿐이다.

진짜 기사작위는 본인의 전문 분야에서의 명망은 기본으로 있어야 하고, 이것이 국가적으로[63] 어떤 공헌이 되었는지 전문 공훈 심사단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자선 활동 등 공익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했는지가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며, 사생활 문제가 드러나기라도 하면 후보에 들었다가도 취소된다.

8.2.2. 대표적 예

1) 쥐라드 드 생테밀리옹(Jurade[64] de Saint-Emilion)

2) 론 와인 기사단(Cotes du Rhone Chevalier d'anthelme)[65]

3) 메독그라브 봉탕 사단(Commanderie du Bontemps de Medoc et des Graves)[66] → 일명 '코망드리 와인 기사단'

4) 슈발리에 뒤 타스트뱅 조합(La Confrerie des Chevaliers du Tastevin) → 일명 '부르고뉴 기사작위'

5) 포므롤 오스피탈리에 조합(La Confrerie des Hospitaliers de Pomerol)

6) 포르투갈 형제애 조합(Federacao das Confrarias Baquicas de Portugal)

7) KOV 와인기사단(The Brotherhood of the Knights of the Vine)

8.2.3. 대상자

고재윤, 공승식, 김기원, 김덕현, 김동준[67], 김양한, 김준철, 김형곤[68], 문병욱, 박재범[69], 박찬준, 박철호, 박현진[70], 배도환, 배형근[71], 서성호, 신근중, 심재혁, 엄수진, 유안근, 유영진, 유지인, 윤홍근[72], 이경희[73], 이다도시, 이동현, 이수만, 이영하, 이제춘[74], 이프로, 이훈[75], 이희상, 임권택, 장미화(가수), 정준호, 정하봉, 정회영, 조용학, 조현준 박사, 지니 조 리, 차진선, 최병호, 추교진[76], 하시모토 켄이치, 한관규, 함현진, 황영조

9. 창작물

"나이트", "리터", "슈발리에"로 표기되는 내용에 대해서는 각각의 문서를 참조할 것.

별개로 유럽 지역에서는 기사 vs 사무라이 떡밥이 단순한 비교부터 기사와 사무라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에 대한 논쟁까지 아주 유명하다.

9.1. 별도 문서가 있는 작품

9.2.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시리즈

베르카식 마법(고대, 근대 가라지 않고)에 능숙한 마도사를 부르는 호칭. 작중 대사로 보아 별도로 치르는 시험이 있는 것 같다.

9.3.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기사 작위를 가진 마술사들이 기사라고 불리는 것 같다.

지금까지 등장한 기사들은 로마 정교 소속의 기사들과 영국 기사파 소속의 기사들이 있다.[77] 강력한 신체능력과 그 신체능력을 강화해주는 마술병장을 기본무장으로 한다.

영국 기사파 소속 기사들은 검은색의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나오는 것이 특징. 다만 나이트 리더윌리엄 오웰 같은 경우는 갑옷을 입지 않고 평복 차림으로 싸운다. 무기로는 주로 도검 형태의 마술병장을 사용하는 편으로, 이것을 통해 마술의 행사 외에도 단병접전도 실시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마법사'보다는 백병전을 주로 수행하면서 보조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기사' 내지는 '마검사' 쪽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말하자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적마도사 같은 하이브리드 클래스로, 덕분에 설정상 엄연히 마술사임에도 마술사로서의 이미지는 별로 없는 편.

기사 중 비중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나이트 리더. 과거 기사였던 인물들까지 합치면 윌리엄 오웰. 그 외의 기사는 이름도 안 나온다. 작중 취급도 나이트 리더나 윌리엄 오웰 같은 최강자들은 정말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만, 나머지 다른 기사들은 거의 잡몹 수준의 취급.

9.4. 코드 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시리즈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의 지위이다. 나이트메어 프레임의 조종을 담당하며, 귀족이 아니라도 기사 작위는 얻을 수 있다. 넘버즈는 기사가 될 수 없었지만 쿠루루기 스자쿠의 등장으로 불문율은 깨졌다. 브리타니아 황제(=98대 샤를 지 브리타니아)의 직속 기사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 불린다.

9.5. 템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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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관 개념



[1] 보통 말을 탄 군인이면 그냥 "군인"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miles"라고만 지칭하였고, 오히려 말을 안 탄 군인 쪽을 따로 "miles pedes(milites pedites)"(도보 군인)라고 불렀다. 만약 knight가 eques로 옮겨진다면 그것은 당대의 용례라기보다는 역으로 고대 로마사의 에퀴테스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거나 그냥 체스 용어로서 기물 나이트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2] 다만,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는 라틴어에서 비롯하였으되 'Eques'가 아닌 'Caballo'에서 파생한 말로, 이는 후기 라틴어에서 말(馬)을 뜻한다. 조어 방식도 동일하게 '말'+'사람' 꼴. 물론 둘 다 인도유럽조어로 말을 뜻하는 *h1éḱwos-에서 온 단어이니만큼, 궁극적으로는 어원이 같긴 하다.[3] 사무라이도 정확히 같은 의미다. 사무라이를 한문으로 쓰면 ""(모실 시)이다. 참고로 원래부터 "섬기는 자"라는 뜻으로 시작한 말은 "Thegn"(Thane)인데, 이는 앵글로색슨시대 영어 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회구조를 보였던 노르드에서도 나타난다.[4] 고대 영어의 화자인 앵글로색슨인은 게르만족의 일파였기에 어원이 같은 독일어 말이 많다. knight의 경우, 독일어에서는 'Knecht'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knecht는 ritter에 밀려 격이 낮은 사용인이나 한시적 용병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중세 말~근대 초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도 '토지(land)'+'병사(knecht)' 꼴로 조어한 것이다.[5] 이러한 방향의 파생은 꽤 많다. 대표적으로 영어 "yeoman"이나 독일어 "junker", 고대 영어 "dreng"(군인), 고대 노르드어 "drengr"(청년, 용사) 등이 있다.[6] 실제로 푸아티에 전투 1년 전인 732년에 교회령을 몰수하여 봉토를 내렸으며, 명분도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로였다는 증거도 나와 있다.[7] 단순 전력만 비교할 땐 보병보다 기병이 더 우월하니[8] 이런 자유민 징집병들은 지역 사회에서 그냥 순찰병 정도의 의무, 전시에 수송 보급임무, 우연히 전투가 근처에서 벌어지면 즉흥적으로 징집되는 식으로 동원되었다.[9] 기사 세 명이 법정에 가는 길에 자기들 편을 들어줄 기사 증인이 한명 더 필요해지나가던 농부를 붙잡아 목덜미를 칼등으로 두들기며 기사로 서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몰래 저지른 불법행위이며 결국에는 들켜서 넷 다 처벌받았기 때문에 군주의 독점적 서임권이 엄격히 지켜진 사례에 해당한다.[10] 전근대 일본의 사무라이도 마찬가지로 영지를 잃고, 충성할 주군이 사라지고(교토의 사무라이들은 천황이 주군이었으므로 제외), 부시도를 못 지키게 되는 사회적 변화로 인해 몰락했다. 그래서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기사와 사무라이의 역사에 대해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11] 도끼나 메이스 같은 둔기는 무게중심이 머리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민첩하게 다루기 힘들었다.[12] 초기형 머스킷으로도 잘 뚫리지 않았다. 갑옷 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갑옷이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증거로 갑옷에 실제로 총을 쏴서 총알 자국을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때도 사기치는 인간들은 있기 마련이라서 일부러 화약을 적게 넣고 쏴 흔적을 남겼던 이들도 있었다.[13] 다만 최근 들어서는 쇠사슬로 말을 연결하는 것은 한 마리라도 쓰러지면 전체 대형 붕괴라는 결과로 초래되기에 원래는 한 몸인 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병들을 쇠사슬로 연결한 것으로 묘사한 것이 후대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14] 당장 사냥을 할 때 사용하는 무기가 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물론 보어스피어 같은 것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만 말이다.[15] 복잡한 예로 잉글랜드의 경우 브리튼섬은 평야가 많다고 보기 애매했고 실제로 잉글랜드 기사들도 보병으로서 자주 싸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절대 순수 보병으로서 복무하진 않았다. 본디 잉글랜드의 기사 자체가 기병의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개념이기도 했고 기사계급이 보통 노르망디 혈통의 앵글로-노르만이었으며 나름 다수의 프랑스 영지를 소유했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백년전쟁 당시 기사들을 보병으로 전환시키는 전술을 매우 자주 사용했음에도 기마전투를 고도로 훈련했다고 한다.[16] 본 문서와 같은 역사학으로써 논할 때는 물론이고, 중세 서양에 대한 심상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장르 판타지 작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17] 물론 노섬브리아 백작이면서 렐름 자작일 수는 있다. 백작령과 자작령 두 개를 봉작 받거나 백작이 자작령을 점령하면 작위는 영지에 귀속되는 것이기에 두 개 세 개의 작위를 가질 순 있다. 하나의 영지에서 두개의 작위를 가질 수 없는 것뿐이다.[18] 그러나 영역 통치자로서의 특성이 사라진 근현대의 작위체계에서는 승작을 하여도 기존 작위를 삭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므로, 하나의 봉지에 여러 개의 다른 격을 지닌 작위가 공존할 수도 있다. 특히 정식 작위 및 칭호를 표시할 때는 온갖 작위와 경칭이 다 열거되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봉지에 여러 다른 격의 작위들이 부여되었다면 격에 맞추어 순서대로 나열한다. 대표적으로 아서 웰즐리의 최종 작위인 웰링턴 공작도 최초에는 자작으로 시작해서 백작과 후작까지 모두 거쳐가며 공작까지 승격한 것인데, 장례식에서 그의 정식 칭호를 모두 나열할 때에도 이 네 가지 작위가 모두 언급되었다.[19] 다만, 영국에는 일대귀족이라 하여, 작위를 받은 진짜 귀족이라도 그 작위의 세습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20] 이들 중에서는 보통 peerage가 많이 쓰인다. Nobility는 좀 더 일반개념적인 어감이고, Aristocrat은 정치사회체제로서 귀족정 등의 지배계급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짙다.[21] 사실, 잉글랜드가 아닌 영국 전체를 보면 세습되는 기사가 있긴하다. 아일랜드에선 흑기사, 백기사, 녹기사의 세 세습 기사가 있었다. 백기사는 17세기에 대가 끊기고, 흑기사는 2011년 대가 끊기면서 현재 남은 건 녹기사뿐이다. (이 녹기사 가문은 19대 당주 때 준남작을 수여받았다.)[22] 잉글랜드는 비단 기사만 귀족이 아닌 게 아니라, 대륙에서는 귀족이었을 작위 보유자의 친족들도 전부 법적으로는 평민 취급(젠트리)이었다. 그래서 남작 이상의 다른 작위 없이 기사 작위만 갖고 있다면 보통 젠트리로 분류된다.[23] 독일의 Ritter는 대개 세습이었지만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에서는 비세습 Ritter가 혼재되어 있었다.[24] 피츠제랄드 가문이 갖고 있는 Knight of Kerry, Knight of Glin, White Knight는 세습기사작위이고 나머지는 세습이 안 된다. 참고로 현재는 Knight of Kerry만 대가 끊기지 않고 외롭게 남아 있다.[25] 이 까닭에 아직 신분제 사회였던 중세 말~근대 초에는 영국의 귀족 인구가 대륙권보다 훨씬 적었다. 다만, 막상 영국의 젠트리들도 어디까지나 법적으로는 귀족이 아니었던 것이지 사회적으로는 귀족으로 취급되었고 실제 사회경제적 지위나 생활상 등 여러 면에서도 대륙의 장티욤 등 혈통귀족들과 그다지 구분되지 않았다.[26] 꼭 군사적 봉사가 아니더라도 농사 지어 바치는 외의 다른 특수한 봉사를 하는 이들, 예컨대 "서전트" 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좀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쉬웠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도 주군과 따로 떨어져서 봉사하는 자들보다는 측근으로서 가까이서 직접 모시는 자들의 지위가 더 높았고, 나중에 가서는 그 봉사로써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신분 덕에 곁에서 모시는 직책을 얻기까지도 하였다. 예컨대 초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경우 원래 몰락한 젠트리 가문 출신이었으나 자신과 아내 사라가 각각 제임스 2세앤 여왕 등 군주 일가의 시종·시녀가 되어 친분과 인맥을 쌓고 능력을 펼칠 기회를 잡으면서 크게 출세한 바 있다.[27] 출처: Thomas Asbridge, The First Crusade.[28] 영주가 전투에 참여한 가신들이나 부농들의 농장을 대신 경작해주는 식이었다.[29] 나이대는 보통 7~8세 정도이다.[30] 통상 14~16세 정도에 되며, 관습에 따라 페이지를 시작한 지 7년 후에 스콰이어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원래 뜻은 "방패잡이"이다.[31] 이러한 정형화된 훈육체계 자체가 지배층의 교육체계와 기사의 양성체계가 결합한 것이었으므로, 단순히 싸우는 법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각종 기술이나 지식, 미덕, 품행, 교양 등을 배운 것이다. 그래서 중세 음유시인 중에는 귀족 및 기사였던 이들도 많다.[32] 관습적으로는 페이지에서 스콰이어가 되기까지의 기간과 마찬가지로 4~7년의 훈련과정을 겪었다.[33] 영화 등에서 칼이나 권장 등으로 어깨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은 이것을 간소화한 것이다. 몽둥이 찜질이 아닌 경우 보통 따귀를 때려서 코피를 보았다. 실제로 몽둥이 찜질로 죽은 기사 후보생도 종종 있었다고 하며, 기사서임식에서 쳐맞고 뻗는 신참 기사가 나오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두들겨 패는 것이 너무 심해서 부상자랑 사망자가 많이 나온 나머지, 지역에 따라 따귀 한 대 치는 걸로 간략화 되거나, 하룻밤 정결하게 지내면서 의식을 거치거나, 칼로 어깨와 머리를 두드리는 정도로 변형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훌륭히 고증된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주인공 발리앙의 아버지 고드프리가 죽기 전에 그를 기사로 임명하면서 따귀를 후려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한다. 또 나중에 벨리안도 예루살렘 방어전에서 성 안의 모든 남성들에게 기사 직위를 내릴 때 대표 중 한 청년의 뺨을 후려치면서 똑같이 하는 장면이 나온다.[34] 근대 일본에서 기사와 상응하도록 설정된 훈위는 "훈작사"였는데, 그 영향으로 knight bachelor를 "최하위 훈작사"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의미상으로는 오히려 "기사" 및 "하급 기사"가 더 정확하다.[35] knight bachelor 및 Vavasour의 용법이나 신분으로서의 내용은 작위/유럽의 기사 문단, 서전트, 배신 등의 문서를 참고할 것.[36] 근대에도 구호기사단, 튜튼 기사단이나 구출기사단, 성전기사단 같이 현장에서 직접 구르는 기사단은 여전히 군사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아무래도 외적과 직접 맞붙는 입장인 만큼, 후방에 본부가 있는 다른 기사단처럼 귀족 클럽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기는 어렵고, 숙련된 무사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37] 실제로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이런 편력 기사가 진짜로 용병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잉글랜드 출신 용병대장인 존 호크우드다.[38] 대부분은 그 지역의 영주 본인이나, 그 부하인 기사들이 범죄자 토벌에 나선 경우다.[39] 일본낭인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무사도를 실천하는 진정한 무사의 길을 걷고자 방랑하는 사무라이라는 인식은 근현대, 또는 빨라도 전국시대의 혼란상이 끝난 에도 막부 시기부터 나온 것이다. 원래 낭인들은 주군으로 모시던 다이묘가 패망했거나, 모종의 이유로 소속 번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탈번한 사무라이들이 일거리와 새로 모실 주군을 찾아 방랑하는 이들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생계 유지에 허덕이느라고 무사도 따위는 알 게 뭐야로 일관했다. 그래서 명색이 사무라이라는 자들이 다이묘들마다 찾아다니면서 용병 일을 하거나, 아예 도적이 되어서 지나가는 상인이나 농부들을 털어먹는 짓거리를 일삼으면서 살았다. 특히 일본은 섬나라라서 유럽의 기사들과는 다르게, 낭인들은 배타는 데도 익숙한 사람이 많다 보니, 직접 배타고 바다로 나가서 해적질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들이 바로 소위 말하는 왜구다.[40] 나이트-에런트라는 단어는 16세기 이후 기사도 문학에서 주로 나오는 말이므로 윌리엄 마셜의 생전에 편력기사라 불렸다는 뜻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편력기사라 불렀다는 말이다.[41]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세 유럽의 기사도 체포된 적군이나 주스트 경기에서 패한 기사의 갑옷이나 무기를 압수해서, 시장에 내다 팔거나 전리품으로서 자기 에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리히트호펜의 악취미도 따지고보면, 중세 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인 셈이다. 리히트호펜의 이런 악취미에 피꺼솟하던 연합군 조종사들도 그가 격추되자 일제히 착륙해서 그의 비행기를 분해하여 각자 기념품으로 삼았다.[42] 사실 오늘날에는 레이디라는 단어의 관념을 제대로 몰라서 연인 관계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대의 레이디는 로드(lord)에 대응하는 단어이며, 귀족 여성으로서 기사의 여주군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모시는 존재이다.[43] 사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정치나 군사 이외의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것을 품위가 떨어진다고 여겼다.[44] 19-20세기 자본가들을 뜻하는 영어 Robber Baron의 유래 역시 이런 깡패 기사들을 부르던 독일어 Raubritter(Raub 강도 + Ritter 기사)이다.[45] 슈에이샤(集英社)가 1980년대에 내놓은 시리즈. 국내에서 해적판으로 상당히 많이 나왔다.[46] 오늘날 장관을 뜻하는 영단어 minister의 어원이기도 하다.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해방농노가 미니스테알리가 되어 귀족 영주나 주교의 행정관이 되는 일이 많았다.[47] 그 결과 역으로 기사 사이에서의 관습이 귀족에게로 흡수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전통적인 기사 양성 방식(페이지-스콰이어-나이트)은 귀족 남성의 교육과정으로 자리잡는 동시에 귀족가문 간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관계가 좋은 주군과 봉신의 가문이 서로 자식을 맡기기도 했고, 긴밀한 관계를 맺은 동격의 가문하고도 피교육자를 교환하고는 했다.[48] 중세 독일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성행한 '미네장(연애시)'을 지은 시인들.[49] 유명한 파르지발이 볼프람의 작품이다.[50] 무장 면에서는 이미 16세기 즈음 갑옷은 대부분 사라지고 가벼운 버프 코트군복 등을 입은 채 머스킷 총과 휠락 피스톨, 카빈, 브로드소드, 행어, 세이버 같은 것을 썼으나,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다 할 영지도 재산도 없는 하급귀족도 많았다. 그러한 실상을 반영한 대표적 문학작품으로는 삼총사가 있다.[51] 영국 왕실이 축구선수인 바비 찰튼이나 물리학자제임스 채드윅, 가수인 폴 매카트니를 기사에 봉한 것이 그 예다.[52] 준남작(Baronet) 작위를 받아도 Sir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는 세습할 수 있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는 이런 세습작위가 새로 주어지지 않는 추세라 마가렛 대처 전 총리의 남편 데니스 대처가 90년대 초에 받은 게 유일하다. 데니스 대처도 고인이 됐기 때문에, 현재 실존하는 준남작들은 모두 오래 전부터 세습되어온 작위를 승계한 2대 준남작, 3대 준남작 등등이다. 이렇게 준남작이 새로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준남작이 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제도 자체가 휴면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기사작위를 받은 이후에도 공헌을 꾸준히 쌓은 인물에게는 요즘엔 '메리트 훈장(OM)'이나 '컴패니언 오브 아너(CH)' 등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있다. 현대 사회에 맞게 서훈제도가 바뀌어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53] 정치적 입지는 남작 이상 작위의 이야기다. 20세기 중반부터 세습 작위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 추세지만, 영국의 의회 중 상원은 이름부터가 여전히 'House of Lords'다. 그래서 지금도 여기 들어오려면 Lord, 즉 남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영국에서 정치인이 상원에 진입하고자 하거나 다른 분야의 유명인사가 정치를 하게 될 경우, 현대에는 형식적으로 비세습 작위(Life peer)를 받은 이후 들어오게 된다. 이 경우 대부분 비세습 남작 작위가 주어진다. 그래서 남작이라 하면 의전상 기사보다 높은 작위임은 사실이지만, 현대에는 정치적 성격도 강한 타이틀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공헌 인정 성격이 강한 기사작위와는 성격이 좀 다른 타이틀이라고도 할 수 있다.[54] Dame은 여성에게 주는 기사작위. 여성이면 그냥 Sir 대신에 Dame을 넣으면 된다.[55]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56] 의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기사로 서임된 인물이다.[57]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주디 덴치도 그렇고, 여자들은 Knight와 동급인 Dame(女士) 이라는 작위를 받는다.[58] 1992년 예술에 대한 공로로 Knight Bachelor를 받아 기사가 되었다. 지금은 'Sir'이 아니라 'Lord'라고 불리는데, 상원의원으로서 당연직으로 따라붙는 일대귀족(life peerage) 남작이라서 그렇다. 1988년에 하원의원이 되는 등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97년 상원에 진입하면서 남작이 되었다.[59]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때 가터 훈장을 받으면서 서임되었다.[60] 1997년 3월 11일에 비틀즈 멤버 중 단독으로 받았다.[61] 뉴질랜드인이라서 대영제국 훈장이 아니라 뉴질랜드 메리트 훈장이라는 걸 받았다. 2010년에 2등급으로 승급돼서 기사가 됨.[62] 정원 외로 주어지며, Sir 칭호가 안 붙음.[63] 심사 결과 국가 수준이 아니라 지역 수준의 공헌으로 봐야 한다 인정되면, 기사작위가 아니라 하급 훈장 수훈자로 선정된다.[64] '기사(Knight)'를 뜻하는 불어는 Chevalier라고 따로 있고, 이 쥐라드(Jurade)는 Jurat라는 단어의 복수 형태로 의미가 시정관(市政官)에 더 가깝다. 사전링크[65] 이는 16세기에 론 와인을 생산하던 생산자들이 사업과 농지를 지키기 위해 결성한 기사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부터 오는 그 전통만은 인정하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5등급 슈발리에와 엇비슷한 권위를 현지에선 인정해 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도 업적을 엄격히 심사한 뒤 정부에서 이를 공인하며 범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기사작위'는 절대 아닌 것은 마찬가지.[66] 보르도의 메독(Médoc)과 그라브(Graves) 지역의 와인 생산과 홍보에 공헌해 '봉탕(Bontemps)' 칭호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67] 영남이공대학교 호텔관광전공 교수.[68] 세종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과 교수.[69] 금양인터내셔날 대표.[70] 고려대학교 식품공학과 교수.[71] 백석예술대학교 외식산업학부 겸임교수.[72] 제너시스BBQ 회장.[73] 대유와인 대표.[74] 더젤(The Jell) 대표.[75]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교수.[76]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핀란드 헬싱키 지회장.[77] 그런데 작가가 까먹은 건지 설정이 바뀐건지 2권 이후로는 기사는 영국 기사파 소속의 기사만 나온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도 프랑스 소속의 기사는 한명도 안 나오는 등, 기사가 영국의 전유물인 듯이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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