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로 농가(農家)에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과 잡일을 해 주고 대가를 받는 사내'이다.농가 혹은 양반의 집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며 품삯을 받으며 일하고 사는 남성이다. 남성만을 가리키는 말로 여성은 머슴이라고 하지 않는다.
천민인 노비와는 달리 양인이 자발적으로 부유한 집에 들어가 급여와 숙식을 제공받고 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동지에 일년치 봉급을 한꺼번에 받는데 이를 새경이라 한다. 행랑아범, 행랑어멈은 행랑채에 얹혀사는 더부살이들을 일컫는 말이라 머슴과는 다르다.
2. 신분
앞서 말했듯 노비와는 신분이 다르다. 타인에게 고용된 노동자이며 신분상으로 엄연한 양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때에 따라서는 조락한 명문가 출신 양반들도 제법 있었다. 현재로 따지면 막노동 정도일 것이다. 고용주 일가에 대한 호칭도 연령에 따라 탄력적이었다. 가령 노비라면 그 집안의 나이 어린 소년도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했지만 머슴은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소년 쪽에서도 머슴이 나이가 많으면 당연히 존대했다. 머슴을 자기 딸이랑 혼인시키고 하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머슴이 노비와 혼동되는 것은 노비제도가 혁파된 이후에도 예전에 노비였던 장정들이 여전히 머슴으로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노비 신분에서는 벗어났어도 빈곤에서는 벗어날 수 없어 일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3. 역사
머슴은 중종 대에 나온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도 언급되는 등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갑오개혁 이후 많아졌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노비들이 해방되자, 양반가나 시골의 대지주들은 일을 시키기 위해 머슴을 고용했고, 많은 노비들도 머슴으로 전환되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는 농업노동의 주요 원천이었으며[1] 1930년 통계로 보면 고용주 44만2908명에게 머슴 53만7432명이 고용되었다.링크. 머슴들은 대개 1년을 단위로 고용주와 구두계약을 맺었는데 농번기에 필요에 따라 2~3개월만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이 시기 보수는 숙련도와 체력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1년 기준으로 보통 30~40원대, 하루 보수는 20~30전 정도였다. 이는 굉장히 낮은 수준의 임금으로 당시 국밥 한그릇이 25~30전 정도였으니 하루벌어 먹기도 힘든정도였다. 배성룡의 평가에 따르면 5~10년 고용살이를 하고도 한 푼의 재산이라고는 가지지 못하고 그 일생은 간소한 식사 하나 먹기위해 남의집과 일터를 전전하는 일생이었으며 경제적 수탈로 돈을 벌수도, 할줄아는 일도 없기 때문에 수십년 간 혹은 대를 이어 계층 이동 조차 불가능하였다. 간혹가다가 고용주가 신뢰관계에 있는 머슴을 자식의 딸과 혼인 시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봄의 주인공이 데릴사위를 명목으로 머슴일을 하며 부려먹히는게 이런 경우라 할수 있겠다.
독립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인 1960년대쯤까지 머슴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광복 후에도 머슴은 존속되어 1950년에는 남한에 270,578명의 머슴이 있었다. 심지어 1960년에도 머슴의 수가 244,557명에 달할 만큼, 여전히 많았다.링크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났던 무렵에도 여전히 시골에서는 머슴들이 많았다. 이 머슴들은 공교롭게도 토지 분배를 받지 못해서 불만이 높았는데, 때마침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머슴들한테도 땅을 나눠준다고 약속하자 많은 수가 북한군에 협력하였다. 링크 아울러 한국전쟁 무렵, 황해도 신천군에서도 빈민층과 머슴들이 북한군에게 협력했다고 한다. 링크
1960년대를 전후해서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에도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건설붐이 일자 머슴들도 농촌보다는 도시로 취직하는것을 선호하였고, 이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지속되어서 머슴 고용비는 나날히 상승하여, 머슴이 급속히 줄어나갔다. 1970년대 후반에는 농업노동력 전체의 1% 남짓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1980년대에는 농업노동력 전체의 0.5% 이하로 줄어들면서 소멸했다. 마찬가지로 같은 계층의 식모 역시 1980년대 초반까지 유입이 존재하였다가 현재는 소멸되었다.
4. 창작물에서의 등장
사극에서는 주요 목격자로 나오면서 사건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하는데, 꼭 이 드립이 나올 때는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머슴이 충청도 사투리를 써줘야 하는게 불문율이다.[2][3]
주로 젊은 과부나 마님이나 새색시, 아씨가 춘정을 이기지 못하고 건장하고 힘쎈 머슴에게 쌀밥을 먹인후 불륜을 벌인다는 전통적인 성인물 음란 형식으로 1980년대 에로 영화의 단골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유명 개드립으로는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었을까."가 있다.[4]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마님이 "돌쇠야, 이리 와서 쌀밥 좀 먹으려무나."와 같이 하대를 한다면 이들은 머슴이 아닌 천민인 노비일 가능성이 크다. 머슴일 경우엔 마님이 같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부터 봐온 사이라든가, 머슴의 나이가 훨씬 어린 경우와 같이 특수한 관계가 아니면 원칙적으로는 고용주 집안의 젊은 여성이 함부로 하대할 수 없었다.
소설 봄·봄의 주인공은 주인집 딸을 아내로 맞기 위해 3년 7개월이나 새경도 받지 않고 머슴일을 한다.
5. 여담
그 집에 나이든 노인이 없을 경우 그 집에서 가장 잘먹을 뿐만 아니라 농번기 같은 경우 유일하게 쌀밥을 먹는 존재일 수도 있었다. 머슴은 고된 육체 노동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잘 먹어야 했고 고용주가 같이 중노동을 하지 않는 경우 머슴만 쌀밥을 먹고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 심지어 가장조차 잡곡밥을 먹었다 하는 경우는 아주 흔했다. 토지를 가지고 있지만 집안에 농사일을 할 장정이 없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머슴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게 되는 데 이런 경우 그 집안에서 머슴이 밥을 가장 잘 먹었다. 식사가 나쁘게 나오면 다음 해 부터 머슴을 고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잘 먹여야하는 점도 있었다. 이것이 유래가 된 단어가 머슴밥이다. 간혹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걸 들을수 있는데, 주로 큰 밥그릇에 하얀 쌀밥을 고봉밥으로 채운 걸 말한다.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서울구치소에서 있었던 한보사태 청문회에서 임원급 직원을 머슴이라 불러 물의를 빚은 적 있었다.#
현대에는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말이 취준생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이 시대에는 전체 인구의 80%가 농민일 만큼 농촌 사회였다.[2] 실제로는 안동을 제외한 경상도, 함경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앞선 두 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땅이 농사 짓기로는 척박했기 때문에 남성들은 곡창지대인 전라도, 충청남도로 많이 이주하여 머슴살이를 했고, 여성들은 방물장사를 했다고 한다.[3] 상단의 사진이 아주 대표적인 짤방이지만, 실제 장면은 머슴이 아닌 막내 약초꾼인 '영달'이 약초를 캐러 갔다가 허준이 함안 관아에 체포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것을 임오근에게 보고하는 장면으로 표준어(제가 두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요)로 말한다! 영상[4] 돌쇠나 마당쇠 같은 쇠자 돌림 이름을 가진 사람이 노비라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은 아니다. 돌쇠는 한자로 돌쇠(突衰), 석을금(石乙金), 이두로 돌금(乭金)이라고도 쓰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노비 이름으로도 나오지만 엄연히 일반 백성의 이름으로도 쓰였고 북쪽으로 수자리 떠나는 포수 박돌금(朴乭金)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수자리를 떠나는 포수면 엄연히 군역을 지는 양인이다. 심지어는 석을금의 경우 여성의 이름으로도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