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8 06:23:20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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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1. 설명2. 기준3. 붕괴
3.1. 전통적 학설3.2. 반론
4. 현대인의 시각5. 현대 한국어에서6. 기타7. 관련 문서

1. 설명

兩班
조선시대에 완전히 정립된, 귀족적 성격과 단순 관료적 성격이 섞인 상류 계층. 용어 자체는 무반(武班)과 문반(文班)을 함께 부르는 말.[1]

일반적으로 말하는 귀족 체계에 비해서 비유동적인 계층으로, 양반에 포함되고 퇴출되고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한정된 용어로 알기 쉽지만, 개념 자체는 고려시대에서도 있었다.

본래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북쪽에는 이 앉고, 동쪽에는 문관들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남쪽에는 남반이라는 궁내 실무직들이 앉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중 남반은 조선시대에 들어 사라졌고, 동반(문반)과 서반(무반)만 남아 양(兩)반이 된 것. 양반의 기준은 후술.

신분제 폐지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양반은 양반처럼 계속 살았고, 평민과 천민은 점차 일반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호구 조사에 의하면 약 1.9%가 전체 인구의 양반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들어 족보를 사고 팔거나 위조하는 것이 전국적으로 성행하여 현대에는 너도 나도 양반 가문이라 떠벌리는 어처구니 없는 양상을 띄기도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성씨는 수십만에서 수백만이라는 말도 안되는 인구 분포를 보인다. 한마디로 성씨가 없던 계층이 타인의 성씨를 사칭하거나 가짜 성씨를 만들어 양반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한국의 문화 현상이라 하지만, 이러한 행태는 조금 엽기적이다.

현대에는 이러한 양반 의식이 천민 자본주의와 섞여 돈이 많거나, 지위가 있거나 하면 스스로가 양반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풍토도 생기게 되었다. 돈이 많던 평민, 천민들이 족보를 사서 스스로 양반이 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데서 나온 발상이다.

2. 기준

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는 본래의 양반 개념은 고려·조선시대의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양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반 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가족 구성과 공동체적인 친족 관계 때문에 양반 관료의 가족과 친족도 양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법제적으로 시작된 문,무반이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혈통화 되어 사회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는 혈통이 쉽게 변하지 않았던 시대의 신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동양의 신분 (혈통)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유대관계도 이들이 양반임을 규정하는 하나의 장치로 기능했다. 예를 들어 지역마다 양반 집단에서 동류 의식으로 결합되었고 이는 누구와 통혼하고 있었는지로 확인된다. 조선시대 풍헌안, 향안 등을 다룬 연구에서도 확인되지만 동류로 인식된 집단에서만 배우자를 찾고 다른 지역의 양반으로 행세했던 사람도 쉽게 동류로 끼워주지 않았다. 심지어 국왕의 호소도 먹히지 않을 정도로 이러한 동류 의식은 강력한 것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에 양반이 인구의 몇 %였네 하는 통계는, 이러한 면을 감안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3. 붕괴

3.1. 전통적 학설

백성들 가운데 사족(士族)이란 명색(名色)의 사람이 거의 5분의 2나 됩니다.
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윤6월 23일 신사 2번째기사, 대사성 유당이 올린 상소 中

조선 초에는 양반을 보는 사회적 기준이 곧 법제적 기준과 같았기에, 사회에서 통용되는 양반의 수가 약 1% 미만이었다. 따라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기준과 법제적 기준의 갭이 어마어마하게 커치게 된다.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는 일본 학자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2]의 통계는 조선시대 호적에서 유학호로 기재된 것을 양반으로 취급한 것으로, 실제 사회에서 통용되던 양반의 수가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 [3] 다만 송준호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모칭유학'이라고 하여 호적에 유학이라고 칭하는 것이 행정상 가능했으며 여간한 사람은 다 유학으로 직역에 기재되었지만 이것이 그 사람이 양반임을 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민 취급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법제적인 의미에서 양반의 기준은 조선 초중기에는 과거를 치를 수 있는 신분 자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 조차 평민, 천민도 치를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법제적인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만 구별하며 양반은 사회적 신분의 범주에서만 인정될 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과거 시험에 대한 사항을 무시한 결과이다..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양반 통계이다.[4]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다음으로는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강원도(1.1%) 순이었다. 그 뒤로는 전라북도(1%), 경기도(0.8%), 함경북도(0.8%), 전라남도(0.5%), 경상남도(0.4%), 함경남도(0.4%) 순이며 최하위는 황해도(0.3%), 평안북도(0.2%), 평안남도(0.1%)였다.[5]

군현을 단위로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상북도 경주군(2,599호), 충청남도 목천군[6](2,388호), 경상북도 풍기군[7](2,294호), 충청남도 공주군(2,238호), 경상북도 봉화군(2,213호) 순이었다. 인구 대비로 봤을 때는 충남의 상당수 지역은 양반의 비중이 20 ~ 30% 대였으며[8] 충북 일부 지역, 안동 일대는 10% 후반 ~ 20대 중반 대였으며 경주가 11.5%로 여기까지의 지역이 10%를 넘었으며 이외 나머지 지역은 10%를 넘지 못했다.

양반이 많은 지역들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충청도경상북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소위 서울 장의동(장동)에 세거하던 김상헌의 안동김씨인 이른바 '장동 김씨', 서울 정동에 세거하던 이상의의 여주 이씨인 이른바 '정동이씨' 등 한성의 경화세족은 급격한 변화로 무너지고,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안동, 그리고 충청도를 양반의 고장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주의 경우 이언적의 후손인 여주 이씨의 토대 양동마을, 안동의 경우 류성룡의 후손인 풍산 류씨의 하회마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이라 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양반의 비율을 언급할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단지 4대 무현관만 인정한다면, 당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양반 개념을 모조리 무시해버릴 수 있고, 신분제가 혼란하던[9]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완전히 부정해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단지 사회적인 통용 기준만을 밀고 나간다면, '지배 계층의 숫자가 7할이었다'[10]는 이상한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조선시대 때 양반의 의미는 두 가지로 쓰였다. 좁은 의미로는 4대 무현관만을 양반으로 인정한다. 이 정의는 조선 초중기에는 엄격히 지켜졌을 것이다. 바로 위의 지역별 통계는 그 정의를 따른 것이다. 반면 넓은 의미로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통용되기 시작한 의미로, 심화된 신분격차로 벼슬을 지낸 관리의 후손들을 폭 넓게 지칭하는 말이었다. 특히 전란 중에 공명첩 등으로 양반이 크게 늘자, 그 정통성을 따진답시고 족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이러면서 양반은 사회적 계급이 아닌 세습 계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납속을 통해서 가선대부니 통정대부와 같은 품계를 받은 '납속품관'은 명예직이라 받아도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양반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화폐의 상용화 등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됐고 벼슬자리보다도 지주로서의 지위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들은 족보를 들이밀어 자신들이 과거 벼슬을 지낸 사람의 후손이니 자신 또한 양반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심지어 부를 쌓았으나 조상 중에 벼슬을 지낸 사람이 없는 경우는 돈을 주고 족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회 경제적 상류층을 일컫는 말로서의 양반이라는 의미가 조선 후기에는 거의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양반의 정의는 이 후자 쪽에 훨씬 가깝다.

3.2. 반론

2000년 대 이전의 조선시대 호적연구의 특징은 현재 발견되는 조선시대 호적의 직역을 보고 신분을 추정한 것인데, 2000년대 이후의 호적 연구에서는 직역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본다. 간단하게 말해 직역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노동력 수취를 위해 정한 개념이다. 그러나 신분은 조상의 신분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가는 본다. 즉 관직의 유무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누구와 동류였는가, 누구와 통혼하고 있었는가가 중요 요소가 된다. 따라서 신분에는 직역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11]

조선시대 호적 연구는 '시카다' 이래로 직역과 신분이 일치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고 그 이후로 김용섭, 이영훈 등의 대가들이 전제를 그대로 따랐지만 양반의 직역으로 언급되었던 유학, 업유, 교생 등은 군역 수취에서 면제대상이었음을 의미할 뿐 신분적 의미는 알 수 없다.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이성무와 한영우의 논쟁은 조선시대 신분을 두고 일어났다. 이성무는 사회적 신분에 주목하여 사농공상의 하나로 양반을 지배신분으로 간주했고, 한영우는 법제적 의미에서 접근하여 양인과 천인으로만 구별하는 양천제가 조선시대의 신분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을 거치면서 현재 조선시대사 학계에서는 법제적 신분인 양천제와 사회적 신분을 다른 범주로 정리한다.

즉 사회적 신분이었던 양반은 법제적으로 의미가 없고 마찬가지로 법제적 신분이었던 양인과 천인은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

4. 현대인의 시각

조선시대 사회상에 대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과거에는 조선을 삼국시대 수준의 극단적인 신분제 사회로 해석하여, 상민은 글을 못 배우게 했다느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막았다느니, 양반이 상민을 재미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고, 글을 아는 상민은 역적이 될 놈이라고 처참하게 죽였다는 둥 황당한 묘사가 많았지만(이건 양반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실이 아니다.[12] 양반들의 멸시와 억압은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상민이나 남의 노비는 물론이고 자기 소유의 노비를 함부로 죽였을 때도 관청의 조사를 받았다 또 한 벼슬에 있을때 혹형으로 노비를 업무상 과실치사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극형만 면했을 뿐이지 저런 범죄 저지르면 곤장 100대에 푸짐하게 얻어맞고 멀리 변방지역으로 유배형이고 벼슬도 파직되었다.

이러한 몰락 양반들은 잔반이라 불렸는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스스로 농사나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13] 자기 소유의 토지나 장사 밑천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으로, 상민이나 외거 노비 출신으로 땅부자인 천민에게 소작을 해 되려 이들에게 수확물을 갖다 바치며 연명하게 되면 아예 양반으로서의 존대나 해 주면 다행이었다. 그 외 글공부한 걸 바탕으로 서당훈장[14]이 되거나[15], 중인들이 주로 하는 송사의 소송서를 써주거나, 의약업 등을 하며 간신히 손에 흙은 안 묻히고 체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날로 치면 법무사행정사 세무사변호사약사의사같은 전문직과 비슷하다. 최악의 상황으로 가면 족보를 팔거나 족보에 신분상승한 사람을 넣어주고 돈을 받는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결국 돈과 관직 그리고 가문이 진정한 신분을 좌지우지 했다. 다만 몰락양반들도 일반적인 경우에는 하찮은 대우를 받고 다니진 않았다. 자수성가 문서 참조.

양반이라 해도 3대에 한번은 초시라도 합격해야 양반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벼슬에 뜻이 없고 학문에 힘쓰는 산림 처사라도 초시나 향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해야만 했다. 그래야 군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학문에 힘쓸 수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공무원 시험을 볼 생각 없는 사람이 대학교수나 학자가 되기 위해 또는 생계를 위해 국가전문자격증과 석박사학위를 딸려고 하는 것이다.

양반이 세금을 안냈다하는데 세금은 냈다. 다만 오늘날로 치면 예비군 훈련과 국가 봉사와 국방세와 같은 군포와 부역을 하지 않았고, 재산세, 종부세와 비슷한 토지세를 납부하였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양반 의식이 잔존하고 있었다. 신분제도는 갑오개혁으로 사라졌지만 일제시기 작위 귀족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일본 역시 왕정이었으니 신분제는 사실상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의식에서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유교적 가치가 멸시를 당하면서 정통 양반 의식은 슬슬 힘을 잃어갔고,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공화주의가 정착되고, 지주 양반들이 토지개혁, 인민재판 등을 겪음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인구이동과 경제적 격변이 일어나 양반의 전통은 많이 사그라들었다.[16]

다만 현대에도 족보를 통해 항렬을 따지며 종중을 유지하는 집안, 양반의 학문적 전통이 남아 교수,학자의 신분을 이어간 집안, 그리고 종갓집 같은 곳엔 양반의 전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특히 한국전쟁의 피해가 그나마 덜했던 경상도 지역에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런 전통이 여전히 강하며 집안이 한미한 경우 그런걸 못느낄 수도 있으나 상류층 집안, 가풍이 엄격한 집안, 지역 토호 같은 경우 양반의 전통은 지금도 잘살아남아 결혼만 할려고 해도 가문을 따지고 지금도 족보에 좀 넣어달라고(=양반가로 인정해달라) 청탁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그 전통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17]

유홍준의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만 봐도 경상도 안동 지역의 어른신이 방문객을 보고 자넨 어디 집안사람인가? 라고 묻자 "은진송씨" 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크흠 하면서 말도 걸지 않았다라는 묘사가 나온다.[18] 은진 송가면 송가지 송씨 운운도 가당찮은데 저자는 필시 노론 송시열의 후손이구나 하고 단칼에 알아차리고 말도 걸지 않은 것이다. 양반의 필수덕목인 보학에 능통하지 않으면 이런 장면은 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그걸 보고 있던 유홍준이 자기를 낮춰가면서 말하자 그 안동 양반의 후예 어른은 유홍준을 보고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장면이 나온다.[19] 관련 책 내용 이런 전통은 80년대를 다룬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도 나와있듯이 집안 어른인 대부님의 영향력과 인맥이 종중 전체에 미치는 등, 가문과 양반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 지역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90년대~2000년대를 거쳐 약화되었을지언정 결코 붕괴되지 않고 아직도 잘 살아 남아 있다.

한편 가짜 성씨를 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멋대로 만든 양반 의식이 오늘날에 이르러 팽배하게 되었다. 진짜 양반처럼 돈이 많거나 혹은 특정 지위가 있거나 떵떵거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스스로를 양반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5. 현대 한국어에서

현재에는 그저 남에 대한 존칭[20]또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살짝 비꼬는 말이다. 가령 자주 쓰이는 예문으로 '에라 이 양반아'가 있는데, 이는 존칭이기 보단 '놈'이라는 단어보단 그냥 듣기 덜 기분나쁘기에 부르는 듯 하다. 영감과 비슷한 사례. 자기 손아래 사람에게 '에라 이 양반아'라는 말과 '에라 이 놈아'라고 불러 보자. 반응이 꽤 다를 것이다. 친한 사람끼리 장난삼아 서로 부를 때는 그리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분위기에서는 놈이라는 말 또한 시비조나 심지어 욕설이 된다.

이외에도 점잖은 사람을 비유할 때나 어떠한 상황보다 낫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 단어인데도 뜻이 완전히 정반대인 경우다. '차라리 양반'이라는 말을 쓰는데, 못마땅할 때 그나마 낫다는 의미이지 완전한 칭찬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치중립적인 지칭어나 친근함이나 호의를 담은 존칭으로도 쓰이곤 한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의사양반!

6. 기타

선비와도 관련이 많다. 옛날 이야기에서는 아주 선하거나 아주 나쁘거나 하는 극단적인 캐릭터상을 보여주거나 하지만 대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한 주인공의 돈줄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양반은 두가지 의무가 있었다. 소위 봉제사 접빈객으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 이는 박지원허생전양반전을 보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 두가지 의무는 숨을 거둘때까지 지속된다. 또한 제사를 잘 지내고 손님을 잘 맞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 대한 비용을 많이 쓰게 된다. 즉 경제적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과시적인 소비를 계속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의미에서 '양반'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양반이기때문에 불필요한 논쟁이나 번잡한 예절을 고수한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다.[21]

양반에게는 본래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22] 제사에는 봉사대수라는 것이 있는데, 쉽게 말해 몇 대 조상까지 제사를 모실 수 있나 하는 것. 원래는 신분에 따라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조상의 대수가 달랐으나 후기로 갈수록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4대까지 지내게 되었다.## 상민 역시 1대까지는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 구휼 정책 중에 돈이 없어서 제사를 못 지내는 양민들을 지원하기가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이러한 제사는 양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서양 귀족들이 자기들을 차별화할 때 고상한 언어와 깍듯한 에티켓,그리고 복장 등으로 구분한 것과 같이 조선의 양반은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준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베푸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제사가 있었다.

복잡한 제사 절차와 화려한 제삿상 등 우리가 아는 제사는 바로 주자가례에 따른 제사이자 양반층의 제사로 제사는 양반만 지내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 복잡한 절차를 완벽히 숙지하고, 온갖 화려한 음식을 상에 차리는 건 당시 평민들은 하기 힘들다. 따라서 당시 양반의 제사는 그저 고인을 추모하는 것 뿐만이 아닌 온 고을의 소문거리로 아예 기안이라고 해서 마을 내의 양반들의 제사를 모아 놓은 달력도 있을 정도.

양반들은 이 복잡하고 화려한 제사 행위를 지내는 걸 과시해서 자신의 지위를 각인시키고 동류에게 인정받았고, 평민들은 그 제사에서 음복이라는 명목으로 그 제삿상을 먹고 즐길 수 있었다. 제공되는 음식은 제사용이다 보니 정성이 들어가고 고기생선, 과일, 적전, 한과 등 귀한 음식들이었고, 양반집에서 먹기에는 너무나 양이 많았으니 양반들은 민심을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인심 좋게 나눠준 경우도 많았던 것.

이러면서 점점 과시를 위해 제사 음식은 더 많고 화려해지고 절차도 복잡화되어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사란 명목으로 모여서 서로 그 제삿밥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제삿상을 차린 집은 일종의 카페 역할도 어느 정도 했다.

이들 양반이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또 다른 방법은 접객. 그냥 손님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아무나 숙박할 곳이 필요하다면 양반집 대문을 두들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양반들 또한 이들을 접대함으로서 지역사회에 인정을 받고 하층민에게 존경을 받았다. 또 타 지역에서 온 이들을 통해 새로운 정보 또한 얻는 것으로 경제적 이득을 보거나 손해을 줄이는 등의 밥값을 얻기도 했다. 양반이 접객에 얼마나 신경을 썼냐면, 1년 수입의 30%를 접객에 사용했으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제사만큼 손님 대접을 제사와 동급으로 여겼다는 게 나타난다.

양반에 관한 역사학 이론 중 조선이 완전한 신분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23] 그 주장은 양반과 고관대직이 세습되지 않으며 단지 양반의 경우 권세와 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편히 할 수 있었고 때문에 유학을 공부하며 관직에 진출하기 쉬워 기득권층을 계속해서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순조 때 시작된 세도정치 시기에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특정 성씨만 과거에 합격하는게 여러 사람에 걸쳐서 폐단으로 지적되었으나 끝끝내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 지역차별과 겹쳐져 조선 최대의 민란으로 부를 수 있는 홍경래의 난까지 불러왔을 정도니...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양반은 계급이 아니라 그저 신분일 뿐이다. 그것도 제도적으로 공인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만 통용되었고, 특정 시대에만 의미가 있었을 뿐 오늘날에는 과거의 유산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역사학 전공자들이라면 다 아는 얘기겠지만 계급은 경제적인 범주이다. 신분은 현대 사회에서 법제적으로 완전히 부정되고 사회적으로 아직도 양반이라고 주장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7. 관련 문서


[1] 양반의 양은 둘 량(兩)이다.(양쪽 할 때의 그 양이다.) 즉, 문반과 무반 두 개의 신분이 합쳐서 양반인 것.[2] 도쿄대학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의 교수를 역임했으며, 일본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마이너에 속하는 한국사를 전공하였다.[3] 조선시대 호적에서 호주의 직역으로 신분을 추정하기도 하지만 현재 호적 연구에서 직역과 신분은 무관하다는 견해도 있다.[4] 통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5] 정작 평안도는 조선 중기때부터 과거 합격자수가 증가하기 시작해서 조선 후기에는 합격자율 1위 지역이었는데 양반수는 가장 적었다.[6]천안시 동남구 동부. 중심지는 현재의 목천읍.[7]영주시 북서부. 중심지는 현재의 풍기읍[8] 한 예로 연산군(오늘날 논산시 동부, 계룡시 일대)의 경우 3명 중 한명 꼴로 양반이었다.[9] 나쁘게 말하면 신분질서가 문란한 것이고, 좋게 보면 해체되어 가던[10] 사실 이 '양반이 전체 인구의 7할'이라는 얘기는 잘못된 통계로 보인다.[11] 물론 법제적인 의미에서 신분은 있지만 여기선 양반이라는 신분 자체를 부정한다.[12] 다만 신분의 영향이 없던 것은 아니다. 금계공 노인의 일기를 보면, 길에서 마주친 양반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천민을 하인들을 시켜서 묶어놓고 때려죽이는 게 예의의 나라인 조선의 미풍양속이라고 중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다.[13] 대동법으로 유명한 김육 역시 후일 영의정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지만 젋은 시절에는 생계를 위해 화전민 생활을 했다.[14] 그나마 스승이 존경받는 조선 사회다 보니 웬만큼 막장이 아니면 이 직업으로 먹고 사는 이상 적어도 지방에선 개무시당할 일은 별로 없었으며, 귀양이나 파직 등으로 물러나 내려온 전직 관리가 훈장을 한다면 되려 주변에서 "우리 아이들 좀 가르쳐 달라"고 몰려오는, 요즘의 명문입시학원 스타강사 같은 대우를 받았다.[15] 이러한 몰락 양반의 후손들은 근현대기에 가서도 비록 영세 농부 신분이었을지라도 문맹퇴치 차원에서 야학을 가르치기도 그리고 이에 대한 공로로 문교부 장관 표창을 타기도 했다. 몰락 양반 가문이 아닌 진짜 평민, 천민 가문 출신이었다면 영세농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16] 6.25 이후로 노비제도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고 본다. 법제적으로는 갑오개혁 이후 사라졌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법 오랫동안 사회 의식 면에서 살아남아 있었다고.[17] 다만 경상도 지역만 그런 모습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 양반들도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양반 출신 사람들은 다 똑같다.[18] 한국사에 관심많은 사람이면 알만한 내용이지만, 송시열로 대표되는 충청 노론과 이황, 유성룡으로 대표되는 영남 남인은 앙숙관계다. 경북 안동은 영남 남인 양반의 대표적인 본거지인데, 그쪽 어르신이 송시열의 후손을 적대시한 것이 이상한 건 아니다.[19] 참고로 이 책 3권은 1997년에 나왔다. 즉 지금으로부터 겨우 20년 전 이야기라는것.[20] 존칭 쪽은 "선생님"으로 하는 게 대다수이므로, 현재 "양반"이라는 말은 비꼬는게 대부분[21] 젯상을 차리는데 제물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논하고, 함부로 자기 이름을 아랫사람이 부르면 무례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이에 해당된다.[22] 양반이 법제적으로 의미가 없었다는 주장이 틀린 이유가 이러한 특권 때문이다.[23] 미야지마 히로시, 「호적대장에 나타나는 사람들 ;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 42,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