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이덕무(李德懋) |
본관 | 전주 이씨 |
출생 | 1741년(영조 17) 7월 23일[1] |
사망 | 1793년(정조 17) 3월 7일[2] (향년 52세) |
국적 | 조선 |
자 | 무관(懋官) |
호 |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3] |
별칭 | 선귤자(蟬橘子), 간서치(看書痴) |
가족관계 | 조부 이필익 아버지 이성호 아들 이광규 손자 이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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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전주.[4]정조 집권기 실학자[5] 중 출생연도 순으로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정약용, 서유구 등에서 2번째이며 높이 쳐주는 인물이다. 실제로 역대 실학자들 중에서 제일 박식했다고 한다.[6] 박지원의 제자이자 친구 사이로 박지원의 글 중 훌륭하다 생각하는 것들을 몇 개 추려내어 각각 그 글에 대한 비평을 달아 놓은 <종북소선>이라는 책을 쓰기도 할 정도였다.
별명으로는 간서치(看書痴)가 있는데,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자서전 격인 '간서치전'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2. 생애
어렸을 때도 다방면에서 큰 재능을 보였지만 서얼인 관계로 벼슬직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조 대에 이르러 박제가와 함께 서얼 출신임에도 중용되었고 박제가와 함께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청나라에서 여러 문학 자료와 고증학 자료를 가져와 학문을 발전시키고 귀국 후 북학을 제창하였다. 청나라에서 자료만 수입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청나라 사행 전후로 계속 청나라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인연은 훗날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인정을 받고 명성을 떨치는 것으로까지 이어지는 긴 흐름의 한 부분이 되었다. 아들로는 이광규가 있는데 훗날 이광규가 이덕무의 저술을 묶어 <청장관전서>를 펴냈다. 손자 이규경 역시 뛰어난 학자로 문집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남겼다.3. 여담
- 단 것이 귀하던 시절 이덕무는 유독 단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자기 말로는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사족을 못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제가가 염치없이 세 번이나 단 것을 먹으면서 자기에게는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예전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먹으라고 줬던 단 것까지 몰래 훔쳐 먹었으니 이서구에게 대신 꾸짖어 달라고 편지까지 쓴 기록이 남아 있다.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狌狌)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모두 단 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 것이 있으면 나를 주곤 하는데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만은 그렇지 못하오. 그는 세 차례나 단 것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 않고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로 훔쳐먹곤 하오. 친구의 의리에 있어 허물이 있으면 규계하는 법이니, 족하는 초정을 깊이 책망해 주기 바라오.-간본 아정유고 권6 문(文)-서(書)-
- 책덕후로서의 면모를 보면 무척 가난한 삶을 보낸 것과 어우러져서 읽는 사람을 눈물짓게 하는 면이 있다. 방이 너무 추워서 이불 위에 <논어>를 펼쳐서 덮고 바람은 한서를 병풍처럼 펼쳐세워 막아 겨울을 났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또한 책을 살 수가 없어서 책을 빌려온 뒤 그걸 베끼고 돌려주는 식으로 소장 도서를 늘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훗날 정조가 그를 중용하여 류득공, 박제가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최초로 초대 검서관의 자리를 주었는데[7] 검서관이라는 자리는 쉽게 말해 학술적인 업무를 담당하여 경연을 기록하거나 자료를 찾는 등의 일을 하는 직위인데 규장각의 희귀한 책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8] 후일 박지원이 말하길 이덕무가 평생토록 읽은 책이 거의 2만여 권이 넘는다고 했다. 그에 걸맞게 별명도 '간서치(看書痴)'라 해석하면 '책만 보는 바보'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다 보면 배고픔도 아픈 것도 더운 것도 추운 것도 잊을 수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비교불가한 진성 책덕후로 서재 이름도 '구서재(九書齋)'라 지었다. 이덕무는 1761년 <간서치전(책만 보는 바보 이야기)>라는 짧은 자서전을 남겼는데 이를 현대말로 다듬어서 낸 책(책만 보는 바보, 2005년 보림출판사 발행)도 있다.自塗鴉之年1, 至二十一歲, 手未嘗一日釋古書.어릴 때부터 21살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일찍이 하루도 옛 책을 놓지 않았다.其室甚小, 然有東牕, 有南牕, 有西牕焉,그의 집은 매우 작았지만 동쪽과 남쪽과 서쪽에 창이 있으니,隨其日之東西, 受明看書.해가 동서로 가는 것에 따라서 빛을 받아 책을 보았다.
- 선비의 일상 생활에 대해 서술한 <사소절>을 보면 굉장히 꼼꼼한 성격으로 보이며 지금 눈으로는 '뭐 이런 거까지 신경 쓰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일에도 예절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추락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북한산 백운대를 오르지 않았으며 복어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9] 위험한 곳을 일부러 찾아가지 말고 음식으로 목숨을 시험하지 말라는 이유에서였다. 상추를 싸먹는 모습 또한 선비스럽게 싸서 먹으라고 말할 정도였다.[10] <사소절>에 실린 몇몇 어록만 봐도 깐깐한 선비로서의 의식이 그야말로 팍팍 느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남을 부를 때 ‘이놈, 저놈’ 또는 ‘이것, 저것’이라 하지 말라. 화가 난다 해서 '도적’이니 ‘개돼지’니 ‘원수’니, 또 거기에다 ‘죽일 놈’이라 욕하거나 ‘왜 안 죽니’라고도 하지 말라. 그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이것이 교양인(선비)의 예절이다.""남의 말을 들을 때 비록 내가 아는 것과 다르다 해도 내가 아는 것을 고집하여 핏대를 올리며 남을 꺾으려 들지 말라. 남의 연회에 참석했을 때도 음식이 시다느니 짜다느니 평하지 말라. 돌아와서 음식이 맛나지 않은 것을 흉보지 말라. 남의 집에 갔을 때 머리를 돌리고 눈알을 굴리며 사방 벽을 바삐 보거나 책을 마구 빼 보고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 이것이 교양인(선비)의 예절이다.""요새 사람들이 온종일 모여서 지껄이는 말이 농담, 바둑이나 장기 이야기, 여색 이야기, 술과 음식 이야기, 아니면 벼슬에 관한 이야기나 가문의 자랑에 대한 것에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 역시 민망스럽다. 이런 말을 즐겨하는 사람들이 남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는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상추를 싸 먹을 때 직접 손을 대서 싸 먹어서는 안된다. 너무 크게 싸서 입안이 다 보이게 벌리고 먹는 것은 상스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요즘 조선 부녀들의 옷은 요사스럽기 그지 없다. 과거에는 여인들이 모두 옷을 펑퍼짐하게 입었다. 허나 지금의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치마는 너무 길고 넓다. 적삼의 옷깃을 줄이고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며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지기까지 한다. 치마는 폭을 팽팽하게 붙여 둔부를 강조해 요망하다. 저 복장의 유행은 모두 아양떠는 기생들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의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처에게 권하고 아녀자끼리 본받게 하고 있으니 이는 심히 우려되는 일임에 틀림없다."[11]「사소절(士小節)」, 사전(士典)」
- 이덕무는 같은 책을 5번씩 읽는 공부법을 이용해 1번 정독한 후 반드시 느끼고 깨우친 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책을 읽는 횟수와 시간을 정해놓고 그 이상 초과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아플 때가 아니면 꼭 지켰다고 한다.
- 밀랍으로 만든 인조 매화인 윤회매를 만들었다.
4. 대중매체
- 2012년 개봉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배우 차태현이 연기했다. 이덕무는 책을 좋아하고 재치있는 성격의 소유자로 절친한 벗 양씨를 역모죄에 엮이게 만들어 죽이고 부친 이성호 대감[13]을 귀양보낸 좌의정 조명수의 권력 원천을 제거하기 위해 동서양의 지혜를 결합한 독특한 계략을 짜서 서빙고의 얼음을 순식간에 털어낸다.
[1] 음력 6월 11일.[2] 음력 1월 25일.[3] 알바트로스에서 따온 호이다[4] 정종의 왕자 무림군의 10대손인데 보통 왕이나 왕자의 후손들이 서얼 금고법에서 예외인데 비해서 그의 경우 조상인 무림군이 <선원록>이 아닌 종친의 딸이나 서얼을 기록하는 <유부록>에 올랐던데다가 왕자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까닭에 그는 왕의 후손임에도 서얼 취급을 받아야 했다.[5] 성호 이익, 유수원, 홍대용은 영조 때 실학자에 해당된다.[6]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덕무를 조선 최고의 박물학자라고 평가한다. 3세기 말 고대 중국에서 편찬한 《박물지》부터 18세기 일본의 《화한삼재도회》까지 당대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지식 정보를 모두 소장하고 열독하는 학자였다.[7] 영조 때부터 서얼 출신도 문과 실시가 가능했고, 정조 때부터는 청요직인 규장각 검서관까지 진출을 하였다.[8] 하지만 일로 책을 접하는 것이다보니 자신의 집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편하지 않다는 기록 역시 남겼다.[9] 이는 다른 실학자들도 마찬가지라 '독극물이 있어 젓가락을 대기도 전에 소름이 돋는다', '복어 따위에 목숨 걸지 마라' 등으로 경계했다.[10] 조선 시대에도 상추에 싸서 먹는 쌈요리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11] 해당 내용을 묘사한 만화 작가는 누나향이다.[12] 18세기 말 정조 시절 무예 비급을 사이에 둔 청나라-조선-일본의 무사들이 벌이는 대결이 펼쳐지는 드라마이다.[13] 영화에서는 우의정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정5품 통도랑까지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