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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이인인 성우에 대한 내용은 김정희(성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Kim_Jeong-hui.jpg[1]

金正喜
1786년 6월 3일 ~ 1856년 11월 7일

1. 개요2. 생애3. 업적 및 일화4. 기타5.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6. 관련 항목

1. 개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고증학자·서예가·역사학자·금석학자이다. 추사체라는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 정도로 많이 알려졌으나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 가장 유명한건 역시 추사지만 실제로 많이 사용한 아호는 완당[2]. 말년에는 노과를 즐겨 썼다. 확인된 것만 총 72개로 한국사에서 아호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꼽힌다. 이름이 많은 이유는 그림마다 매번 다른 별명을 썼기 때문이라고.

본관은 노론 벽파 명가인 경주 김씨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주인데 화순옹주는 자식이 없었고 김정희의 조부가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직접 피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와는 아주 먼 친척뻘인데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정순왕후의 7촌 숙부이다.

2. 생애

1786년(정조 10년)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혹은 1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갓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는데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 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쥐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도.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상대 당파 남인 영수) 채제공이 보고는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 영재. 그의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에게 가르침 받았다. 정조 때 집안 친척들이 제법 죽었지만, 그가 승하하고 순조가 오르자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아버지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채제공과 관련한 관련된 야사가 있는데, 정치적 반대파라 평상시에 말도 섞지 않던 채제공이 자신의 집에 온 것에 놀라서 추사의 아버지가 그 연유를 물으니 체재공은 추사의 글을 보고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오. 허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 예언이 적중하기라도 했을까.. 추사는 부모를 일찍 잃고 귀양을 두번이나 가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를 결혼 직후인 16살(1800년)에 잃고, 20살 때 아내를 잃고, 계모도 잃고, 스승 박제가도 잃었다. 3년상 후 순조 9년(1809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한다. 다음해에는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 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했다. 이후 벼슬에 나오지 않으면서 <실사구시론>과 같은 책을 썼다. (본격 성리학 관념론 비판서) 1816년에는 무학대사고려 태조 왕건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비를 신라 시대의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으로 고증해냈다.[3]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 사위인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1827년). 하지만 효명 세자가 죽고 나자(1830년) 안동 김씨인 김우명의 탄핵으로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간다. 아마도 김우명이 공주목 비인 현감으로 있을 때 파직된 것의 복수로 여겨진다. 이 때 그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나름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순조가 죽던 해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온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도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 거밖에 없구나"라는 식의 말을 했다. 안동 김씨 기세에 눌렸지 그다지 내키진 않았다는 이야기.

1835년(헌종 1년)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복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가 이조판서 자리에 오른다.[4] 하지만 5년 후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는다. 이 때 고문을 심하게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달라'는 상소를 올려 죽음을 면한 대신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이후 8년간 유배당하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저번에 보내온 음식들은 태반이 썩었다. 좋은 음식 좀 보내라."고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5] 유배 중간에 재혼한 부인도 죽었다(1842년 11월). 부인이 병들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그가 그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부인이 죽은 뒤였다. 2달 뒤 뒤늦게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매우 슬퍼하며 내생에 다시 부부가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는 애절한 시를 쓰기도 하였다. 유배 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다.

안동 김씨 - 풍양 조씨 대립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을 하던 영의정 권돈인과도 친했는데, 헌종의 묘지 옮기는 문제로 1851년 같이 파직되고[6]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간다. 본격 남북 순례. 67살의 늙은 나이였는데, 유배 기간동안 고대 석기를 연구했다.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돌도끼나 돌화살촉을 생활 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고, 토성 유적과 갈라서 보기를 주장했다. 본격 고고학자 [7] 다만 2년 만에(1852년 겨울) 풀려난다. 이로서 도합 3 년 + 8년 + 2년 = 13년 유배.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71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이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쓴 글로 알려져 있다. 칠십 평생동안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내고 붓 천 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

3. 업적 및 일화

한국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서예하면 대중적인 인지도는 떡과 관련된 일화 덕분에, 석봉 한호가 가장 유명하지만, 한호의 글씨는 긴 사자관 생활로 인해 단정하고 품위가 있기는 하나 예술성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관계로 글씨 자체의 예술성과 독창성 면에서는 단연코 추사 김정희가 독보적이다. 가장 많이 배우며, 쓰이는 서체이기도 하다. 제사 지낼때 쓰이는 병풍 등을 보면, 추사체로 쓰여진 병풍이 많다. 난초 그림 역시 독보적인 수준으로 '석파란'으로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직접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다.[8][9]

친한 사람이 많아서 제자로 민태호(민영익의 아버지) - 민규호 형제, 최초의 개화 사상가로 알려진 역관 출신의 오경석, 시, 서, 화에 능한 소치 허련[10] 등을 두어, 중인사대부 가리지 않고 키웠다. 최대 3천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를 좋아했고 다산 정약용의 친구로도 알려진 초의선사와도 깊은 친교를 다지기도 했다. 다만 이렇게 승려들과 친했기 때문에 양반가에서 기피당하는 인물이였다. 아무튼 세대로 보면 정약용은 추사나 초의선사의 한 세대 위 정도의 선배이긴 하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야이 차덕후야! 나좀 보러 오라고! 내 지금 말을 몰고 가서 스님의 차밭을 다 날려 버리겠어!' '난 스님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으니 차만 보내달라'는 식으로 떼쓰는 글도 많다.

워낙에 명문가의 자손인 것도 있고 학문과 예술에 성취가 큰 인물이었던 탓인지 예술에 대해 자부심이 높고 까다로운 성격이었던 것 같다. 부친인 오경석이 김정희의 제자였기 때문에 부친을 통해 생전의 김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위창 오세창의 회고[11]도 그렇거니와,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들어봐도 성깔(...)이 보통 아니셨던 듯. 아예 묘비의 공덕문에 옳고 그름을 따질 때는 우뢰와 같았다고 표현을 하는데, 보통 좋은 이야기만 쓰는 공덕문에도 그 정도로 쓸 정도면 짐작이 간다.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 교수는 이런 인물의 경우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싫어하게 된다고 평하고 있다.

일례로 초의선사가 주지로 있던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은 동국진체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가 쓴 작품인데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는 이 현판을 보고는 초의선사에게 자신이 새로 써줄터이니 저딴 거는 떼어버리라고 하고 새로 현판을 써줬다. 김정희는 평소에 조선의 글씨는 이광사가 망쳤다'라면서 이광사의 작품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김정희의 서예론은 금석문을 통해 옛 진적을 공부해야 비로소 새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어서 향토성이 짙은 동국진체를 사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광사는 소론, 그것도 그냥 소론도 아니고 양명학자였던 하곡 정제두의 제자였다.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퇴계 이황이 <전습록변>을 저술해서 양명학을 까버린 이후로 양명학은 당연히 이단 취급을 받았다. 꽤 많은 성리학자들이 양주음왕[12]이단이라고 까일까봐. 숨기고 몰래 공부했다는 이야기.]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노론 명가의 후예인 김정희가 이광사를 싫어할 이유는 생각보다 꽤 많았다.

그러나 8년여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자신의 편액을 떼고 다시 원교의 편액을 걸어줄 것을 부탁하며 새로 무량수각의 현판을 써주는데 현재도 대흥사에 가면 원교와 추사의 편액이 한 공간에 걸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은 거만했던 천재가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 예술적 깊이와 안목이 넓어지고 태도도 겸허해졌다... 라는 훈훈한 이야기로 해석하는 에피소드.

물이 흐르는 것 같이 자유분방한 '유수체'로 유명한 전주 지방의 명필인 창암 이삼만(1770년 ~ 1847년)과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13] 이쪽은 창암의 글씨를 보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 살만한 서생의 글씨라고 면전에서 무시했다가(창암이 16살이나 연상이다!) 나중에야 창암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고 제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일을 사과하러 들렀더니 창암은 이미 죽은 뒤더라 하는 이야기. 그 인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완주군 용진면에 소재한 정부인 광산 김씨 묘비에는 창암과 완당 두 사람의 글씨가 앞뒤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굳이 이 일화들을 해석하자면 이광사나 이삼만의 공통점이라면 향토색이 짙고 조선의 독자적인 서체를 추구하려 했다는 점이 있는데, 김정희는 일신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젊어서부터 청나라에 오가며 청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많은 비문과 진적들을 보며 공부한 사람이다보니 예술 면에서도 국제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향토적인 서체가 그의 세련된 감각에는 '촌스럽다'고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유배 기간 동안에 공부를 거듭하여 안목이 더 넓어지면서 그런 향토적인 서체에도 나름의 예술적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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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제주도 유배 시절 겨울철 소나무를 그렸는데, 그것이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이다. 이 그림은 추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갖다준 것에 감명해 그려준 그림이라고 전한다. 사실 그림을 보면, 원근법도 맞지 않으며, 잘 그렸다고 볼 수는 없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한데, 사의란,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이다.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김정희 미술관인 추사관 건물은 이 세한도의 건물을 본따서 만들었다. 여담으로 세한도에 얽힌 일화가 있는데,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흘러흘러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매니아(...) 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 1902년 ~ 1981년)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고 난 3달 뒤인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앙대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손재형은 이 작품을 매우 귀하게 여겼으나 정치에 입문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이를 매각했다고. 현재는 당시 이를 매입했던 개성 출신의 부호이자 고미술 수집가였던 손세기의 아들인 손창근 옹이 물려받아 소장하고 있는데 2011년에는 세한도를 국립 중앙 박물관에 2년간 기탁 보관한 일이 뉴스를 타기도 했다. [14]

4. 기타

2011년 11월, 추사학 연구자인 김규선 선문대학교 교양 대학 교수는 학술지 '한민족 문화 연구' 제38집에 기고한 <새로 발굴된 추사 김정희 암행보고서>라는 책에서 추사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활동할 때 쓴 친필 보고서를 공개하였다.

추사는 말년에 다산 정약용의 아들들인 정학연과 정학유와 교류를 맺고 있었고 그래서 정학연의 회혼례 때에는 축하 편지를 보내며 과천에 초대하기도 했다. 정약용과도 교류 관계가 있었는데 나이 차이가 24살이나 되었던 만큼 몇번의 편지를 주고 받는 정도였다. 다산 초당의 현판이 추사의 작품. 서로 생각의 차이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정희가 주역(周易)에 대해 논한 편지글에서는 자신이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나 의문점들을 직접적으로 묻고 있다. 또 김정희는 30대에 평양에서 고려청자 화분에 수선화를 심어서 선학에 대한 존경심으로 정약용에게 선물한 적이 있는데 정약용은 꽃을 선물로 받은 후 답시를 썼는데 약간 희화화하면서 비틀었다.
仙風道骨水仙花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三十年過到我家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茯老曾携使車至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秋史今移浿水衙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으로 옮기었다오
窮村絶峽少所見 외딴 마을 동떨어진 골짝에서는 보기 드문
得未曾有爭喧譁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한다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손자는 처음으로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小婢翻驚蒜早芽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싹이라며 놀란다
縞衣靑ㅇ相對立 흰 꽃과 푸른 잎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玉骨香肌猶自浥 옥 같은 골격 향그런 살결에서 향내가 절로 풍기는데
淸水一盌碁數枚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라
微塵不雜何所吸 티끌조차 섞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마시는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정희는 정학연이 아버지 정약용의 여유당집 발간을 위해 교열을 부탁하자 자신은 할 수 없으니 양웅과 같은 이를 기다리라며 거절했다.

또한 임상옥과도 인연이 있었는데, 임상옥과 같이 연행사로 갔을 때 임상옥이 인삼을 불태우는 계책을 쓰도록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유학자였던 것에 묻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불교에 대한 신심과 수준이 높았던 거사[15]이기도 했다. 특히 당시의 선승 백파긍선이나 초의선사 등과 교류하면서 불교학에 대한 많은 논의를 나누기도 했는데, 한때는 유학자의 시각으로 불교를 폄하한다는 잘못된 연구도 있었지만[16] 후속 연구가 이루어진 지금은 추사가 당시 선불교 위주인 상태에서 교학 연구보다는 선문답이나 경전 외 선종의 문헌 교육의 치우침과 막행막식이 범람하던 조선의 불교계에 경종을 울렸다는 시각이 정론이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 옹정제의 선불교 비판 문서를 인용하는 등[17] 청나라의 학자들과의 교류 역시 깊었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훗날 백파긍선이 입적하자 그의 비문을 써준 것도 추사.

중국 원산의 소나무 중 하나인 백송을 엄청 좋아했는데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 밖에 없었지만 연경에서는 지천으로 널려있는것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그 백송 덕후 기질을 못 이겨 씨앗을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의 묘소 앞에 심었고 현재 천연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살 무렵인 1845년에 영국의 에드워드 벨처 함장이 이끈 사마랑호가 제주도 우도에 정박한 일이 있었고, 이양선의 등장에 주민들이 놀라 도망가는 것을 보고 추사는 서양 사정에 몽매한 당시 현실을 개탄하는 글을 영의정 권돈인에게 보냈는데, 그가 가장 놀란 것은 그들이 떠나다 두고 간 지도였다고 한다. 추사는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상세하게 측량한 지도를 보고 얼마나 많이 왔으면 이렇게 정확한 지도를 그릴 수 있었겠냐고 개탄하였다.

5.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김정희 선생의 고택이 남아 유적지로 관리되고 있다.[18] 주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간단 안내 이 고택은 증조부였던 월성위 김한신이 170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53칸의 규모(304m2)로 조성되어있다. 중부, 영남 지역에 만들어진 소위 대갓집 형태인 ㅁ자 형의 구조로 되어 주변에 묘소들이 위치해 있다.

6. 관련 항목


[1] 당대 명화가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이한철이 그린 초상화. 보물 547호. 이한철은 이외에도 철종과 헌종, 고종의 어진을 담당했으며 대원군의 초상화도 그렸다. 특유의 단아하면서 부드러운 모습이 일품인데 윤승운 화백은 이 초상화를 보며 평생 고생은 하나도 안하신 듯한 얼굴이라며 촌평을 내렸다.[2] 존경했던 청나라의 학자인 완원(阮元)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라고 한다. 유홍준이 쓴 김정희 평전의 제목도 '완당평전'.[3] 이때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의 탁본을 떠서 금석과안록에 해석문을 첨부하기도 했으며, 비석의 옆면에는 자신이 해석해냈다는 것을 기록했는데.. 지금 관점에서 보면 빼도박도 못할 문화재 훼손이였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원본 옆면을 보면 당시에 새긴 기록이 남아있다.[4] 1837년에는 아들과 함께 고생했던 아버지 김노경이 사망한다. 그런데 두산백과에는 김노경이 뜬금 1840년 유배 후 사사당했다고 나오는데 사실은 멀쩡히 죽고 나서 다른 사건에 연루돼 그해 관작이 추탈된다. 다른 사전인 위키백과나 한민족문화대백과에는 1837년에 사망했다고 제대로 명시되어있다.[5] 그도 그럴게 먼 제주도까지 보내야 했으니 음식이 제까닥 도착하는게 이상하다.[6] 사실 권돈인은 이것 뿐 아니라 진종 조천 문제에서 의견을 낸 것도 문제가 되었다.[7] 실제로 북한의 도유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시각을 가진 고고학자로 김정희를 제시했고, 이는 남한 학계에서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사실 추사는 북청에서의 조사만이 아니라 이전 경주의 신라 왕릉에 대한 인식에서도 보면 상당한 고고학적 재능을 보여준다[8] 사실 이하응과 김정희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족보 상으로 5촌 진이당숙(아버지의 이종 사촌)과 조카 사이였다. 김정희의 양어머니(실제로는 큰어머니) 홍씨와 은신군의 부인이자 이하응의 양할머니 홍씨가 서로 자매이기 때문.[9] 그리고 김정희와 이하응이 5촌의 관계인 것은 남양 홍씨 집안 기준이며 김정희의 양증조모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이기 때문에 전주 이씨 집안 기준으로 볼 때는, 족보 상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고손자인 이하응과 10촌 형제가 된다.[10] 스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보필했던 제자로 근대 남도 화단의 태두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이름을 련(鍊)에서 유(維)로 개명하여 허유라고 불리기도 한다.[11]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에는 그의 은사인 동주 이용희 교수의 강연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김정희는 까다로와도 보통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면서 강연을 시작한다. 유홍준 교수가 이용희 교수에게 물으니, 위창 노인이 역매(오경석의 호) 어르신 에게 들었다고 했다고.[12] 陽朱陰王. 낮에는 주자(=성리학)를 따르지만 밤에는 왕수인(=양명학)을 따른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속으로는 양명학에 동의하면서[13] 이삼만은 어릴적 부유한 집안이였으나 아버지가 뱀에 물려 불의의 사고로 죽자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그후 이삼만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뱀만 보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려 그 살기에 눌린 뱀들도 얼씬하지 못했다. 전주 지방에서는 뱀을 퇴치하기 위해 이삼만의 이름이 씌여진 종이를 부적삼아 문에 붙이고 그의 이름을 3번 외치면 뱀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었다.[14] 손창근 옹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화재 소장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1,000억원 상당의 임야를 국가에 기부했다던지 현금 1억원을 "갑자기 1억원이 생겼으니 통장 번호를 부르시오"(...)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부했다던지 하는 이야기가 들리는 걸 보면 이 분도 꽤나 비범한 분인 듯.[15] 남성 불교 신도. 흔히 매체에 쓰이는 처사는 잘못된 표현이다. 처사는 서경덕이니 조식같은, 초야에 묻혀사는 학식높은 선비를 이르는 말로 불교와 사이가 나빴던 유학자들이 알면 펄쩍 뛸 일.[16] 근데 그럴 만도 한게 추사의 비판 발언 중 백파에게 '망증' 운운하고 백파는 아몰랑하는 등 상당히 거친 면도 있었다(...) 현대로 치면 키배하다 불붙은 격.[17] 다만 추사 본인은 후폭풍을 우려해서인지 옹정제가 쓴 글이라는 것은 숨겼다.[18] 충남 유형 문화제 43호, 1976년 1월 8일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