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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추존 황제 진종 소황제 | 眞宗 昭皇帝 | }}}}}}}}} | ||
영릉 능침 | |||
출생 | 1719년 4월 4일 (음력 숙종 45년 2월 15일) | ||
한성부 순화방 연잉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728년 12월 16일 (향년 9세) (음력 영조 4년 11월 16일) | ||
한성부 창경궁 진수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영릉(永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725년 4월 7일 ~ 1728년 12월 16일 (음력 영조 1년 2월 25일 ~ 영조 4년 11월 1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만복(萬福) → 행(緈) | ||
부모 | 부왕 영조 모후 정성왕후, 생모 온희정빈 | ||
형제자매 | 2남 7녀 중 장남 | ||
배우자 | 효순빈(효순왕후, 효순소황후) | ||
자녀 | 양자 1남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성경(聖敬) | ||
군호 | 경의군(敬義君) | ||
묘호 | 진종(眞宗) | ||
시호 | 조선: 효장세자(孝章世子) → 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 (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 대한제국: 온량예명철문효장소황제 (溫良睿明哲文孝章昭皇帝) 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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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세자. 묘호는 진종(眞宗), 시호는 소황제(昭皇帝). 세자로서 받은 시호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이다. 휘는 행(緈), 자는 성경(聖敬). 영조의 장남이며, 사도세자의 이복형, 정조의 양아버지 겸 큰아버지다. 만 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지만 뜻하지 않게 정조가 그의 양자가 되면서 추존왕으로, 뒤에 정조의 계통상 4대손이 되는 순종에 의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서자(모: 정빈이씨)이기는 했지만, 숙종이 생전에 본 유일한 친손자이기도 하다.[2]2. 생애
2.1. 영조의 서장자
조선 영조의 서장자로, 생모는 후궁 정빈 이씨다. 동복 형제로는 화억옹주와 화순옹주가 있다. 1719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영조의 생모이자 효장세자의 할머니 숙빈 최씨의 상중이었기 때문인지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는 기록 자체가 없다.[3]2.2. 왕세자 책봉
영조가 즉위한 1724년에는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그 다음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7년 조문명의 딸과 가례(혼인)를 올렸다.[4]2.3. 안타까운 죽음
하지만 1728년, 영조가 35살이던 해에 갑자기 병에 걸려 9세의 어린 나이에 단명했다. 영조는 친히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효장세자는 '효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4세의 나이에 청상 과부가 된 현빈 조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영조의 병수발을 들면서 홀로 살아야 했는데 영조는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1752년에 그녀 역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야사에 독살설이 있고 이 설에 따르면 배후로서 경종비 경순왕대비(선의왕후) 어씨가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영조 6년 3월 9일 2번째 기사) 세자와 옹주를 매흉(埋凶)[5]한 궁인들을 친국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독살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6][7]
일부 현대 역사 입문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독살을 사실로 보고 있지만, 큰 옥사로 발전하지 않고 관련자들의 처형으로 끝난 것으로 미루어[8] 의심스러운 정황에서 그쳤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배후가 정말 경순대비라면 영조가 옥사를 크게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다. 대비이자 형수인 경순대비를 대놓고 처벌하려다가는 폐모살제 때문에 폐위된 광해군처럼 명분을 얻은 소론과 남인의 대대적인 반란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그래서 일단은 관련자들의 처형으로 덮어두고, 손발이 잘린 대비에게는 나중에 조용히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선의왕후 항목에도 나왔듯이 대비의 죽음 또한 석연치 않은 정황이 많다. 다만 대비는 세자가 죽은 지 2년 뒤에야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어떻더라도 효장세자 사건 하나만이 원인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효장세자 사후 7년 뒤에야 겨우 다시 아들을 얻었는데, 이 어렵게 본 아들이 그 유명한 사도세자이다. 여기까지였으면 어린 나이에 죽은 그다지 존재감 없는 왕자였겠으나...
3. 사후
3.1. 정조의 양부가 되다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으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영조는 그 아들인 왕세손(정조)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9]이었지만, 명색이 죄인인 사도세자[10]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에 죽은 효장세자를 끌고 와서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든 뒤에야 후계자로 삼았다.정조는 졸지에 당시 자기 나이보다도 일찍 죽은 이복 백부의 아들이 되어버렸다.[11] 이는 세손이 역적의 아들이라 하여 노론의 공격을 당할 것을 우려한 영조가 취한 조치이기도 하다.[12] 이 때문에 정조는 죽을 때까지 친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했지만, 양부인 효장세자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국왕으로 추존하였다.
3.2. 추존
죽은 지 10년도 더 지나서 갑자기 효장세자는 '승통세자(承統世子)'라는 칭호를 얻었다. 게다가 영조는 죽기 전에 세손에게 효장세자를 추존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정작 세손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하도록 방치한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어쨌건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는 진종(眞宗)이라 했다. 현빈 조씨도 남편이 추존되자 효순왕후(孝順王后)가 된다. 무덤도 정조가 새로 왕릉의 격식으로 만들었고 비명(碑銘)까지 정조가 직접 썼다.하지만 정조의 추존은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고 겨우 10살에 죽은 큰아버지 겸 양아버지에게 감정 이입이 될 리도 없었고[13], 영조의 유언만 아니었으면 저렇게도 안 했을 것이다. 실제로 새로이 만든 왕릉도 실제로 보면 다른 왕릉들과 달리 상당히 초라한 편이다.
반세기쯤 지나고 철종이 조선을 다스릴 때쯤에 이르러서는 사도세자에 대한 조정의 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정조가 진종의 양아들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친아들로 여겨졌다. 정조가 진종에게 출계한 것이 법적으로 확고했다면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사도세자의 장남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나, 『은언군 신도비』에서는 그를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신의 법적 조상을 추존할 때 황제의 고조부 자격으로서 황제로 추존된 이는 정조의 양아버지인 진종이 아니라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였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고종의 법적 4대조이자 정조의 친아버지로 인정받으며 장조(莊祖) 의황제(懿皇帝)로 추존되었고, 진종은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뒤에야 비로소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 이때 헌종과 철종도 함께 황제로 추존되었는데, 이는 황제의 조상 자격이 아니라 그저 장조와 항렬이 같거나 낮은 모든 왕들을 황제로 일괄 추존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장조, 정조와 달리 묘호도 ‘조’로 승격되지 못했다.
3.3. 능묘
진종의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파주삼릉(공순영릉)'[14]의 하나인 영릉(永陵)[15]이다. 부인 현빈 조씨도 1751년 승하한 후 어렸을 때 죽은 남편 옆에 묻혔다.능의 형태는 나란히 묻힌 쌍릉. 이 능의 비석은 3개인데 진종 부부는 세자, 세자빈에서 정조 때 왕, 왕비로 추존되었고 이후 대한제국 때인 1908년에 다시 황제와 황후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추존할 때마다 비를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다만 정조가 좀 꾸미기는 했는데 처음부터 왕자 묘의 형태로 조성되어서 왕릉에 있는 무인석이나 난간석이 없다. 그래서 상술된 대로 여기 가보면 왕릉이라기에는 초라하고 허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엄연히 들어가는 능이다.
3.4. 여담
- 만약 진종이 영조가 죽을 때까지 생존했다면 자그마치 만 57세였을 것이란 계산이 나온다.[16] 참고로 할아버지 숙종도 당시 기준으로 장수했다고 하나 만 58세[17]에 죽었다. 고려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즉위한 강종보다 2년 덜 살았다(강종은 사망시 나이가 만 61세). 살았어도 이래저래 아버지 재위 기간 중에 죽었을 가능성도 높고 설령 즉위했어도 길지 못했을 것이라는 슬픈 예측이 가능하다.[18]
- 생모 정빈 이씨와 기일이 같다.[19] 부인인 효순왕후는 효장세자와 정빈 이씨의 기일 하루 전에 사망했다.
4. 대중매체
<colbgcolor=#1b0e64> 〈대박〉의 효장세자 |
[1] 1908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2] 숙종의 자녀 중 어린 시절 사망하지 않고 성인으로 자란 사람은 경종, 영조, 연령군 등 아들 3형제다. 이중 첫째인 경종과 셋째인 연령군은 자손을 남기지 못했고 둘째인 영조만 여러 자식을 보았다.[3] 성리학이 국가통치 뿐 아니라 사회규범으로도 완전히 뿌리내린 뒤라, 부모가 사망하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부부간이라도 성관계를 갖는 것은 부도덕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어머니 상중에 아들이 아내와 성관계를 해도 문제가 되는데 첩과 성관계를 해서 임신시켰다는 것은 그 시대 사대부 사이에서는 손가락질 받을 일이었다.[4] 조선의 왕족 혼인 사례로는 제법 이른 사례. 만 10세에 혼인한 세종보다 2년 빨랐다.[5] 특정인이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리도록 저주하는 의미로 흉한 물건을 만들어 일정한 곳에 파묻는 것.[6] "세자가 점점 장성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또 다시 흉악한 짓을 하였고, 강보(襁褓)에 있는 아이인 4왕녀(영조와 영빈 이씨의 일찍 죽은 딸)에게도 또한 모두 독약을 썼다."[7] 당시 왕녀인 화순옹주도 흉악한 피해를 입어 하혈을 했던것으로 기록되어 있다.[8] 사실 저주 자체만으로도 이미 죽을 죄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저주 행위는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로 다스렸고 왕실에 대한 저주는 반역죄로 다스려 해당 당사자는 이유불문하고 거열형에 처해지고 일족까지 연좌로 처벌할 정도였다.[9] 영조의 친손자들은 다 사도세자의 아들들이었다. 당시 영조의 나이상 아들이든 딸이든 아이가 더 태어날 가능성은 낮았으니, 손자에게 물려주지 않을 거면 먼 친척 중에서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10]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마자 복권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도 내렸지만, 폐서인은 거두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여전히 죄인이었다.[11] 다만 정조와 효장세자의 나이 차이는 생각보다 작은 33세다. 사도세자와 효장세자의 나이 차이는 16세고, 사도세자가 겨우 17살에 정조를 낳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물론 사춘기가 오면 바로 결혼하던 당시(보통 10대 중반에 혼인)로서는 부자지간에 나이 차이가 그 정도인 건 흔한 일이었다. 음? 그럼 할아버지 뻘 아니냐?[12] 다만 실제 상황을 본다면 노론이 사도세자&정조 부자와 거리가 멀었다기보다는 왕위를 계승하는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경향이 더 강한 편이었다. 노론 강경파인 벽파도 사도세자의 추숭을 인정하면 반대파인 소론이나 남인에게 꼬투리를 잡혀 몰락하게 되니까 반대하는 것이었지, 정치적 견해로 따지자면 사도세자와 적대 관계는 아니었고 전신이 되는 노론 대신 대다수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덮거나 옹호했다. 노론 음모론과 달리 영조가 사도세자를 제거했던 진짜 이유는 사도세자가 제왕학에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서, 아예 사람을 죽이는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신하와 백성들을 통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이 정신병은 사도세자를 노골적으로 박대한 영조 탓도 컸다.) 반대로 손자인 세손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무까지 겸비하여 훌륭한 후계자로서 영조를 크게 만족시켰다. 결국 영조는 정신병자인 아들보다 자신의 기준에 딱 맞는 훌륭한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계획을 세운 것. 실제로 영조는 세손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여, 철저히 보호해 무사히 왕위를 계승하게 해주었다. 애초에 노론 벽파가 사도세자에게 개기기 힘든 것이 영조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손자를 낳아준 아들은 사도세자뿐이라 개겨서 어떻게든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해도 그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될 것이고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개긴 불충한' 노론 벽파들을 가만히 냅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 최악은 이때까지도 살아남은 사도세자가 아들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직접 박살내는 것. 그렇다고 먼 친척중에 모셔오는 짓을 하기엔 명분이 없고 이미 수십년 전에 그런 음모를 꾸몄다는 명분으로 아작난 적도 있어서 쉽게 시도할 일이 아니다.[13] 진종은 정조는커녕 사도세자가 태어나기도 몇 년 전에 죽었다.[14] 나머지인 '공릉'과 '순릉'은 각각 한명회의 딸인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의 능이다.[15] 세종대왕의 영(英)릉과 효종의 영(寧)릉과는 다르다.[16] 건국자인 태조의 나이가 즉위했을 때는 만 57세이므로 진종이 생존했다면 태조와 같은 57세지만, 8개월 빨리 태어난 관계로 진종이 좀 더 고령의 즉위 임금이 되는 셈이다.[17] 정확히는 58년 9개월.[18] 물론 영조는 사도세자가 5살이 되었을 때 벌인 선위 파동 때도 효장세자의 나이를 들먹이곤 했다. 살아 있었다면 20살이니 일찌감치 양위했을 거라고.[19] 둘 다 음력 11월 16일에 사망했다.[20] 〈다시, 첫사랑〉에서 차도윤(김승수 분)의 아들 가온 역을, 〈태양의 계절〉에서 김유월(오창석 분)의 아역 및 그 아들 장지민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