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12:44:09

양녕대군

조선의 역대 왕세자
태종 이방원 양녕대군 이제 세종 이도
讓寧大君
양녕대군
이름 제(禔)
후백(厚伯)
시호 강정(剛靖)
세자 책봉 1404년(태종 4년)
폐위 1418년(태종 18년)
생몰년 1394년(태조 3년) ~
1462년 9월 7일(세조 8년)

1. 개요2. 생애3. 여담
3.1. 명필3.2. 일화
4. 평가5. 후손6. 대중 문화에서

1. 개요

조선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맏아들이자 세종의 큰 형. 엄밀히 따지면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의 넷째 아들이다.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 3명을 더 두었지만,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1]요절했기 때문.

아동용 역사만화, 교과서 등에선 최대한 건전하게, 본인이 능력이 모자라고 동생인 충녕대군의 능력이 더 뛰어남을 알게 되어, 일부러 놀고 날뛰면서 폐세자가 된 뒤,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대인배 정도로 미화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동생 세종의 장손인 단종을 몰아낸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소인배에 불과한 인간이다. 후술하겠지만, 세종이 자신의 비행을 끝까지 눈감아준 것을 감안하면 이성계의 무인 기질의 유전자를 너무 많이 가지고 태어난 왕족 수준이 미화의 한계다. 하지만 이것도 애써 미화한 것이고 딱잘라 말해서 그냥 망나니. 사실 이러한 미화는 세자가 개망나니라 폐위되었다는 흑역사를 덮기 위해 조선 왕조 시절부터 벌인 역사 깊은 행동이었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자식 셋을 낳자마자 잃었던 이방원민씨 내외에게 왕자 이전에 너무나 특별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해서 교육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주로 제기된다.

양녕대군은 세종이 인내심 많고 성정이 어진 인물이라 예외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케이스이다. 왕정국가의 후계자가 폐위되어 낙마하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숨죽여 살면서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도세자나 광해군의 폐세자 이지의 경우처럼 즉각 유배 혹은 제거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는 반대파에 의해 옹립되어 반역의 빌미가 되는 등 후환이 되기 때문. 실제로 태종은 양녕대군이 후환이 될 것 같으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고 양녕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사고를 쳐서 신하들로부터 양녕을 벌주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참고로 세자 시절에는 양녕대군으로 불리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대군(大君)은 '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적자들에게 내려지는 작위이므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되면서 봉해진 봉호이다.[2] 봉호에 있는 '양(讓)'도 세자 자리를 양보·양도했다는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을 두고 태종이나 효령대군, 충녕대군이 “양녕” 또는 “양녕 형님” 운운하는 모습을 그린 매체는 모조리 틀린 것이다.

2. 생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여담

3.1. 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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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의 글씨는 조선조에 나온 명필들 중에서도 최고봉이라 친다. 옛날 붓글씨나 그림 등은 임진왜란 전의 것은 무진장 비싼데, 그것도 양녕대군 글씨쯤 되면 억 단위를 가볍게 호가할 수 있다. 아니, 그 전에 애당초 물건이 없다.

숭례문의 현판도 양녕대군의 작품. 숭례문 현판을 써서 옮길 때, 개와 소도 하례하고, 마소가 머리를 숙였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 최고 명필 중 하나. 임진왜란 이후에 현판이 없어진 적이 있는데, 남지(南池)에서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나서 파봤더니, 현판이 있어서 명필의 글씨는 땅에 묻혀도 빛이 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2008년 2월 10일에 벌어진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에는 문루까지 화재가 번지자 현판만이라도 지키려고 떼어내다가 떨어뜨렸다.[3] 떨어진 현판은 장성삼 당시 중구청 공무원 등에 의해 끄집어내져서 살아남았다.

3.2. 일화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王兄佛兄)"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가 처음 나온 것은 《세종실록》이다.
세종 112권, 28년(1446 병인 / 정통(正統) 11년) 4월 23일(경신) 3번째 기사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짓다
처음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岩寺)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역시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4]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또한 《성종실록》의 효령대군의 졸기에도 비슷한 일화가 등장한다.
이보(李補)가 일찍이 에 예불(禮佛)하러 나아갔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개를 끌고 팔에는 매를 받치고는, 희첩(姬妾)을 싣고 가서 절의 뜰에다 여우와 토끼를 낭자하게 여기저기 흩어 놓으니, 이보(李補)가 마음에 언짢게 여겨, 이에 말하기를,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하니, 이제(李禔)가 말하기를,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의 형이 될 것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성종 17년 병오(1486,성화 22) 5월11일 (을묘)

당시에 이미 이런 일화가 널리 퍼져 있었던 듯하다.

용재총화》에도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일찍이 뜰에 새 잡는 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서연(書筵)에서 빈객과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학문에 뜻이 없고, 새가 틀에 걸리면 달려가서 잡았다. 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가 빈객이 되어, 하루는 궁문 밖에 이르렀다가, 안에서 매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세자가 하는 짓인 줄로 알았다. 세자가 서연에 앉아 있거늘 이래가, “전하께서 매 부르는 소리를 하시는데 이는 차마 하실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뜻을 학문에 두시고 다시는 이런 소리를 하지 마시옵소서” 하니, 세자는 거짓으로 놀라면서 말하기를, “평생에 매를 보지 못했거늘 어찌 매 소리를 할 수 있겠느뇨” 하였다. 이래가 말하기를, “사냥할 때에 팔뚝에 올려놓고 토끼를 쫓게 하는 것이 매이온데, 전하께서 어찌 보지 못했나이까” 하였다. 무릇 과실이 있으면 이래는 반드시 반복하여 극간(極諫)하니, 세자가 이래를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하여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계성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지며, 꿈속에라도 보면 그날에는 반드시 오한(惡寒)이 난다” 하였다.
태종(太宗)께서 궁중에 감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무척 사랑하였는데, 새가 쪼아 먹으므로 태종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구하여 새를 쏘게 하자, 좌우에 모신 사람들이 모두, “조정 가운데 무사로서는 합당한 자가 없고, 오직 세자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곧 세자에게 명하니, 번번이 맞혔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경하하고 태종도 항상 세자의 행실을 미워하여 오래 보지 않다가 이날 비로소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

4. 평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후손

본부인 수성부부인 김씨에게서 3남 5녀, 첩실에게서 7남 12녀[5] 등 총 10남 17녀를 두었다.[6]

효령대군 다음으로 자손이 제법 번성하였는데 임진왜란 발발 당시, 충무공 이순신 수하에 있던 무의공 이순신[7]이 있었다[8].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먼후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독립운동할 때 명함에 prince라고 파서 다녔다고 한다.[9].이승만대한제국 황실 일가를 박대했는데, 이를 왕실에 대한 방계 컴플렉스로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10]

여담으로 제1공화국 시절의 정치인인 이기붕효령대군의 후손[11]인데 그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들여 족보가 꼬였다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12]

이외에 전 해군참모총장 이맹기가 있고 연예계에는 가수 이홍기와 가수 겸 배우 이승기, 그리고 배우 이준기와 아이돌 가수 샤이니의 온유(본명 이진기)[13]가 있으며 시인 이외수와 야구선수 이대수도 양녕대군의 후손이다[14]. 배우 서강준(본명 이승환)과 프로게이머 Whoru(본명 이승준)[15], 그리고 가수 이상민도 양녕대군파이다.

참고로, 양녕대군파의 항렬은 수도군[16]파 항렬하고 똑같다. 이는 수도군의 7대손인 증(贈) 이조참판 이민후(李敏厚)가 양녕대군의 서5남인 안창부정(安昌副正) 이심(李諶)의 6대 종손으로 입계(入系)한 게 시작으로, 후에 수도군파에서 양녕대군파로 양자로 들어간 흔적이 나타면서부터[17] 같은 항렬제차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양녕대군파 종회는 상도동에 땅과 빌딩을 보유하고 있으며, 시세는 약 1,600억에 달한다. 양녕대군묘가 상도동에 있으므로, 사실상 선산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

6. 대중 문화에서

  • 월탄 박종화는 《세종대왕》 소설을 쓰면서 양녕대군을 상당히 부각시켰고, 소설 《양녕대군》을 따로 쓸 정도로 권력을 스스로 버린 호남아 이미지를 널리 퍼트렸다. 다만 소설 양녕대군은 양녕의 어린시절과 노년 정도 빼면 대부분 세종대왕과 겹치니 구태여 전편을 다 볼 필요는 없다.
  • 태종이 주인공이었던 사극 《용의 눈물[18]세종이 주인공인 《대왕 세종》에서 나오는 세종과 양녕대군의 모습은 차이가 많아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용의 눈물》은 거의 《연려실기술[19]의 서술에 가깝게 진행되었지만, 《대왕 세종》은 이 둘이 정치적인 생각 등에서 대립했었다는 쪽을 택했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 용의 눈물에서 이민우가 맡은 양녕대군은, 왕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할아버지 태조와 척을 지는 것은 물론, 왕으로 등극하는데 적극동참했던 외숙부들조차 가차없이 죽여 없애는 아버지 태종의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며 권력의 무상함과 무서움을 알고, 일부러 이렇게 반미치광이를 가장해 기행을 했다는 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극 중 등장하는 태종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태종을 닮은 아들이 아버지를 거부하면서 아버지의 속을 썩이는 장면은, 태종이 즉위 전 아버지인 태조의 속을 썩인 것과 겹치며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용의 눈물에서 가장 이미지로 득을 본 등장인물은 양녕대군이며, 용의 눈물의 대표적 옥에 티. 그렇긴 한데 그 원조가 되는 양녕대군이 남의 을 빼앗거나 절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등의 무개념짓을 하는 장면도 빠짐없이 묘사되어서, 미화가 되긴 했어도 꽤 무개념처럼 보이기는 한다.
  • 대왕 세종에서는 박상민이 양녕대군을 맡았다. 주색잡기 부분은 어리 사건과 정종을 모시던 기생인 초궁장과 밀통을 한 점을 제외하면 적당한(?) 풍류 정도로 묘사한다. 대신 요동 정벌을 주장하고 직접 왜구와 전투를 하거나 신하들까지 속이고 중앙군을 이끌고 함경도까지 가서 여진 정벌까지 시도할 정도의 대책없는 전쟁광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백성 및 내정에 대한 관심은 강경 일변도로만 흐른다. 이는 작중 충녕대군과 대립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 왕과 비》에선 신구가 노년의 양녕대군을 맡아[20],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 연기를 훌륭히 보여주었다. 아버지 태종을 원망하진 않지만, 자신의 자리를 대신해 오른 세종대왕문종, 단종을 상당히 원망하였고, 결국 조카 수양대군을 부추겨서 조선의 왕실이 다시 한 번 콩가루 집안이 되는 데 일조하였다. 1회에서부터 세종대왕(송재호)과 왕실 관련 키배를 떴다.(…) 세종이 적자 승계원칙을 이야기하자, "주상, 부왕께서 32년 전에 이 몸을 쳐내고 주상으로 대신하게 하신 일 기억 안 나시오?" 이러면서 엄청 돌려 깠다.[21] 3회에서, 문종의 시신을 수양과 같이 친견한 뒤엔, "어째서 (내관들에게) 묻지 않으시는가? 전하의 고명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라며, 방금 전에 형 죽은 사람에다가 지 큰 조카에게까지 po패드립wer. 16회에서는, 단종을 말로 조지면서 수양을 비호하다, 세종대왕후궁혜빈 양씨한테 쳐발렸다. 덕택에 내관들에게 끌려갈 뻔 하질 않나… 그래서인지 최후가 은근 안습한데, 89회에서 90회로 넘어가는 사이 9년이 지나, 양녕대군 사망은 바로 버로우 타고, 권람이 죽는 것만 나왔다. 근데 마지막 화까지 단종을 죽이라며 세조와 독대, 완전 깽판이다.[22] 하지만 이 모습이 한국 사극 사상 가장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 충실하게 양녕을 묘사한 것이라는 게 무서울 따름.
  • 공주의 남자》에선 생략되어버렸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양녕대군의 포지션은 온녕군이 대신한다. 다만 온녕군은 계유정난 얼마 후에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을 가해서, 김승유에게 살해당한다.
  • 왕과 비》와 같은 작가인 정하연이 극본을 쓴 리메이크 격인 《인수대비》에서는 역시 행패남. 하지만 "할 줄 아는 건 효도밖에 없다"고 문종을 까도 생각보다 행패가 덜하다.[23] 되레 김종서가 사망 직전의 문종을 보려는 걸 막자 분통 터져 쓰러지는 수준. 다만 계유정난 이후, 어서 단종을 폐위시켜야 한다고 꼬장을 부리다가[24] 이번엔 명나라의 녹을 받는다며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한확의 뺨을 친다(…). # 그래서 한확은, "이런 치욕을 다시 당하지 않도록 좋은 왕비가 되어달라"고 인수대비(함은정 분)에게 말한다… 안습.
  • 김진명의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에서는, 《태조실록》의 고증성과 고사성어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속뜻을 연결시켜, 양녕대군의 존재를 아버지의 쿠데타를 괴로워하다 일생을 마친 유교적 의인(義人)으로 묘사하여 풀어내고 있다.
  • 웹툰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올곧은 세자였지만 (고종의 혼이 들어간) 태종에게 푸대접을 받자 쿠데타를 준비하다가 양녕대군이 고용했던 산적이 반역모의를 밀고해 국문을 받은 뒤 죽임을 당할 뻔했지만 충녕대군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세자자리에서 쫓겨난다. 38화 끝부분에서는 어린시절의 진평대군안평대군에게 "조선에서는 마땅히 어질고 현명한 이가 왕이 되어야 한다"면서 "만약 왕이 어질고 현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숙부의 말뜻을 깨닫고 "아..."라고 말하는 진평대군이 압권.
  • 탑툰과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하는 성인 웹툰인 용포철인의 주인공인데, 무려 마물과 싸우며 조선의 밤을 수호하는 슈퍼히어로로 나온다. 조연인 세종대왕은 뒤에서 양녕대군을 지원하다가 심심하면 형의 사이드킥으로 활동.
  • 드라마 대군 사랑을 그리다에 등장하는 양안대군은 양녕대군을 모티브로 하였다. 세조에 해당하는 진양대군을 끊임없이 획책하고 선동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절 앞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스님을 조롱하였다는 등의 야사도 반영되었다. 배우는 손병호.


[1] 다들 조선건국 이전에 태어나고 죽은 걸로 추정된다. 그래서 조선왕조 공식기록에는 그 3명이 없다. 태종의 언급만 있을 뿐. 태종이 양녕의 장자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일부러 기록하게 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사관(史官)의 꼬장꼬장함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낮은 편.[2] "세자(世子)에게 관교(官敎)를 내려주고, 심씨(沈氏)를 봉(封)하여 경빈(敬嬪)으로 삼고, 제(禔, 양녕대군의 본명)를 강봉(降封)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삼고…(후략)", 《태종대왕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5일 기사[3] 크기만 큰 줄 알았지 무게가 150kg인건 몰랐다고[4] 이엄이란 귀를 가리는 방한구로, 지금의 귀마개 같은 물건. 효령대군은 귓병을 앓고 있어서, 양녕대군 말대로 초여름에도 이엄을 쓰고 다니고 있었다. 고로 '부처님이 그렇게 잘났다면, 왜 니 귓병은 못 고쳐주냐?' 라는 뜻이다. 이 뒤의 이어질 말과 합쳐서 양녕대군의 호쾌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기록.[5] 스캔들이 있었던 기생 어리의 딸도 포함한다.[6] 아들 10명 + 딸 17명 = 도합 27명의 자식(...)이라는 계산결과가 나온다.[7]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5대손.[8] 예전에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억기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적혀 있었으나 사실 이억기는 덕천군의 후손이다.[9] 장평도정(長平都正)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의 10대손이었다. 예전에는 직계 9대조로 적혀 있었으나 사실은 방계 10대조이다.[10] 국민들이 옛 황실에 대한 향수로 대통령제를 부정하여 왕정복고가 될까 염려했기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왕실에 대한 시기라고 해도 이미 400년 전 왕위계승권과는 멀어진 사이라 사적 질투라고 봐야겠지만..[11]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었다.[12] 이 입양의 문제는 무려 3가지나 있었다. 첫 번째, 장자는 집안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집에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는 법을 어긴 입양이었다. 두 번째, 입양 당시에 파가 다르면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외되었는데 이를 무시했다. 세 번째, 파가 달라도 항렬이 맞으면 모르겠는데,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이승만이 이방원의 17대손이고 이강석이 19대손으로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 항렬이다. 즉, 여러 모로 꼬인 입양이었다.[13] 5명 모두 전주 이씨 양녕대군 20세손, 시조 43세손 基자 항렬이다.[14] 2명 모두 전주 이씨 양녕대군 18세손, 시조 41세손 秀자 항렬이다.[15] 서강준과 Whoru는 앞의 사람들보다 윗 항렬인 양녕대군 17세손, 시조 40세손 承자 항렬. 나이 대에 비해서 항렬이 상당히 높은데 일단 앞에 언급된 사람들보다 한참 어리고(각각 1993년, 2001년생이다). 이승만의 동생 뻘이다.[16] 조선 정종의 7남[17] 거꾸로 양녕대군파에서 수도군파로 입계한 경우도 있다.[18] 상술했듯, 원작이 박종화의 소설 《세종대왕》이다. 소설 자체가 위화도 회군조선 건국부터 다루고 있다. 이방원이나 정도전의 묘사는 원작과 많이 다르지만, 양녕대군의 묘사는 원작과 거의 비슷하다.[19] 숙종까지 조선 국왕의 일대기와 관련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26] 사서(史書).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와 임금의 계보가 정리되어 있기에, 실록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많은 사극이 이 책을 참조했다. 실록이 완전히 보급된 현재에는 사료적 가치는 사실상 없다. 교수님들이 이 책을 보신다면, 수업 시간에 재밌는 얘기를 해주기 위해서일 듯. 이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야심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20] 다음 작품인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 역할을 맡았는데, 우습게도 왕륭이 아들 왕건으로부터 추존받은 묘호가 바로 세조이다.[21] 우연히도 《왕과 비》의 양녕대군이 이 말을 하기 4주 전에 방영된 《용의 눈물》에서는 세자에서 폐위되어 쫓겨났다. 동회에서 (당시는 왕비가 아니었지만) 인수대비에게, "어느 종년이 주인 말을 엿들어??" 운운하다 수양대군 앞에서 개쪽만 당하질 않나…[22] 직후, 지친 기색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힘빠진 표정으로 하늘을 보는 장면이 있었다.[23] 하지만 굉장히 어이없는 대사인 것이, 문종은 세자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유능함을 입증한데다가 효도도 잘한 것이고,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은 효도도 못했다. 문종을 대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비판이고, 특히 양녕대군이라면 더더욱 할 수 없는 말이다. 사실 정하연이 수양대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수양대군의 정치적 적들을 비하하는 성향이 있는데 왕과 비가 방영했을 때와 달리 현재 세태는 수양대군에 대한 부정적인 재평가가 대세라 괴리감을 일으킨다.[24] 그래도 나름 "주상이 나이 어리다고 얕보지 마시게.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자네 목을 내놓으라고 하게 되어 있어. 김종서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오게 된다" 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한다.(…)[25] 기생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을 태종이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