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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의 역대 종주 | ||||||||||||||||||||||||||||||||||||||||||||||||||||||||||||||||||||||||||
양녕대군파 역사 시작 | → | 1대 양녕대군 이제 | → | 2대 함양군 이포[1] | }}}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태종조 폐세자 양녕대군 | 讓寧大君 | |||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초대 종주 | |||
양녕대군묘 전경 | |||
출생 | 1394년[2] | ||
한성부 정안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사망 | 1462년 10월 8일[3] (향년 68세) |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묘소 | 양녕대군묘(讓寧大君墓)[4] | ||
재위기간 | 조선 원자 | ||
1402년 5월 19일 ~ 1404년 9월 19일 | |||
조선 왕세자 | |||
1404년 9월 19일 ~ 1418년 7월 15일 | |||
조선 양녕대군 | |||
1418년 7월 15일 ~ 1462년 10월 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제(禔) | ||
부모 | 부왕 태종 모후 원경왕후 | ||
형제자매 | 부왕 기준 12남 17녀 중 장남 모후 기준 8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 수성부부인 광산 김씨 (隨城府夫人 光山 金氏, ? ~ 1456) | ||
자녀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후백(厚伯) | ||
봉호 | 원자(元子) → 왕세자(王世子) → 양녕대군(讓寧大君) | ||
시호 | 강정공(剛靖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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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정치인, 화가, 시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이자 세종의 큰형. 엄밀히 따지면 태종과 원경왕후의 4남이긴 하지만, 양녕대군 위 아들 3명이 모두 어린 시절[5]에 요절했기 때문이다.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여담
- 양녕대군은 친동생 세종이 인내심 많고 성정이 어진 인물이라 예외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경우에 속한다. 왕정 국가의 후계자가 낙마하면 운좋게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숨죽여 살면서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도세자나 광해군의 폐세자 이지의 경우처럼 즉각 유배 혹은 제거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대파에 의해 옹립되어 반역의 빌미가 되는 등 좋은 후환이 되기 때문이다.[6] 실제로 태종은 "나는 결코 양녕을 죽일 수 없지만, 네게 정녕 양녕이 후환이 될 것 같으면 처형해도 좋다."는 식의 유언을 세종에게 남겼고 양녕대군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사고를 쳐서 신하들로부터 양녕대군을 벌주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고 한번은 화가 난 세종이 그 상소들을 불질러버리라고 했다가 명령을 철회한 적도 있을 정도다.
-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망나니긴 하지만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면모도 있었다. 명나라에 갔을 때 참여했던 의식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치에 맞게 상향 조정해달라고 논리 정연하게 요청했다는 일화나 태종의 숙청 때 재빨리 부왕의 편에 서서 외숙부들의 처벌을 찬성하는 등 지능이 떨어지는 인물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걸 다 뒤엎을만큼 도저히 자기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 세자 시절에는 양녕대군으로 불리지 않았는데 당연한 것이 대군(大君)은 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적자들에게 내려지는 작위이므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되면서 봉해진 봉호이다. 봉호에 있는 '양(讓)'도 세자 자리를 양보·양도했다는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을 두고 태종이나 효령대군, 충녕대군이 “양녕” 또는 “양녕 형님” 운운하는 모습을 그린 한국 드라마들은 고증이 틀린 것이다. 이후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정확한 시점, 즉 폐세자된 후 경기광주로 쫒겨나기 전에 양녕이라는 봉호를 받았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이를 제대로 고증했다.
- 태종은 자신 이후에 정통성 있는 왕가를 세우기 위해 끝까지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망설인 만큼, 양녕을 폐위할 때에는 충녕대군이 아니라 양녕의 장자 이개를 왕세손(혹은 왕태손)으로 책봉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한 목소리로 이를 반대했는데, 아버지가 살아서 폐해졌는데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전례에도 없고 도리에도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사실 태종의 나이를 생각하면 분명히 폐세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세손이 즉위할 터인데, 이러면 아버지의 폐위를 지지했던 대신들에게 무슨 보복을 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반도 역사에서 비슷한 사례가 하필 조선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트라우마가 될 우왕-창왕 사례인지라[7] 아직 여말 관료 출신이 대다수였던 조선 조정의 대신들로써는 더더욱 수용이 어려웠을 것이다.
- 양녕대군의 글씨는 조선조에 나온 명필들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 옛날 붓글씨나 그림 등은 임진왜란 전의 것은 무진장 비싼데 양녕대군 글씨쯤 되면 부르는게 값일 정도.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판을 직접 써서 옮길 때 개와 소도 하례하고 마소가 머리를 숙였다는 전설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현판이 없어졌는데 남지(南池)에서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나서 파봤더니 현판이 있어서 명필의 글씨는 땅에 묻혀도 빛이 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 활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용의 눈물〉에선 당대의 명궁이었던 할아버지 이성계가 자신이 쓰던 활을 양녕에게 선물로 주는 장면이 있었고, 태종 이방원에선 밤에 활쏘기가 금지된 궁에서 활을 쏘면서 태종에게 세자 자리에서 명예롭게 물러나겠다고 반항하는 장면이 들어갔다.
- 후손들을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라고 한다. 본부인 수성부부인 김씨에게서 3남 5녀, 첩실에게서 7남 12녀[8] 등 총 10남 17녀를 두었다. 효령대군 다음으로 자손이 번성하였는데 후손 중에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 수하로 이순신이 생전 가장 아끼고 믿던 장수로 알려진 무의공 이순신[9]이 있었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난중일기에도 여러 번 나올만큼 아주 절친한 데다가 이순신이 죽은 직후 군사들을 이끌어 승리한 인물. 그리고,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10] 그래서 미국에서 독립운동할 때 '프린스 리'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왕족이라고 하면 현지 엘리트층도 무시하지 않고 관심을 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어에서 프린스는 한국의 왕자와 다른 개념[11][12]이라서 저렇게 얘기해도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다. 이승만은 자신이 전주 이씨 왕가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 전체를 말아먹은 대한제국 황실 자체에 대해선 대단히도 싫어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철저히 냉혹하게 박대했다. 제1공화국 시절의 정치인인 이기붕은 효령대군의 후손[13]인데 그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들여 족보가 꼬였다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14] 하지만 이강석은 자식 없이 4.19때 이기붕 일가를 죽이고 자살하여 꼬인 족보는 자연히 해결되었고, 이후 양녕대군파에서 다시 양자를 들였다. 이외에도 이교선 전 상공부 장관[15], 이유선 전 국회의원[16], 이한기 전 국무총리가 있으며[17] 문화예술계에는 배우 이지훈[18], 시인 이외수[19], 가수 이승기, 가수 이상민이 있다.
-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왕형불형,王兄佛兄)"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가 처음 나온 것은 《세종실록》인데 《성종실록》의 효령대군 졸기와 《선조실록》에도 비슷한 일화가 언급된다.
처음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岩寺)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역시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절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20]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富貴)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세종 28년(1446 병인) 4월 23일(경신) 3번째 기사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오뉴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20]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富貴)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세종 28년(1446 병인) 4월 23일(경신) 3번째 기사
- 여러 모로 유고슬라비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전 왕자였던 조르제와 비슷한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큰아들이었음에도 성정이 방탕하고 폭력적인 성격을 지녔던 점도 비슷하고 아버지, 어머니와 대립이 심했던 점도 비슷하고 이러한 연유로 언제 터질지 모를 불안정한 상태에서 왕세자 신분를 유지하다가 종국에 수습 불가한 사고(조르제는 시종을 살해, 양녕은 어리와의 간통 사건)를 거대하게 저지르면서 이로 인해 왕가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폐세자를 당하고 이후에 남동생인 알렉산다르 1세와 세종에게 세자의 직위를 빼앗겨 국왕이 되지 못한 것도 비슷하다. 그리고 패악질을 저질러 세자 지위에서 쫒겨난 형이 장수하고, 세자와 왕이 된 동생이 40대와 50대에 사망한 점에서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5. 대중매체
5.1. 소설
- 월탄 박종화는 소설 《세종대왕》을 쓰면서 양녕대군을 상당히 부각시켰고 소설 《양녕대군》을 따로 쓸 정도로 권력을 스스로 버린 호남아 이미지를 널리 퍼트렸다. 다만 소설 양녕대군은 양녕대군의 어린 시절과 노년 정도 빼면 대부분 《세종대왕》과 겹치니 구태여 전편을 다 볼 필요는 없다.
- 김동인 또한 단편 <광공자(狂公子)>에서 양녕대군이 원래 동생 못지않은 현명한 세자감이었으나 부왕(태종)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며 대신 동생 충렬대군을 세자로 옹립하고 싶어 함을 알아차린 후부터 일부러 미친 척을 하고 주색을 부려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여생을 살아가는 의리남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 김진명의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에서는 《태조실록》의 고증성과 고사성어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속뜻을 연결시켜 양녕대군의 존재를 아버지의 쿠데타를 괴로워하다 일생을 마친 유교적 의인(義人)으로 묘사하여 풀어내고 있다.
- 대체역사소설인 《근육조선》에선 서산군의 첩을 강간하려다 수양대군이 가르쳐놓은 호신술에 역관광당해 앞니 2개가 나가고 술에 빠져 살다가 원래 역사보다 이른 시기에 죽는다.
- 대체역사소설인 《마지막 바이킹》에서도 등장한다. 빈란디아(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즈텍과 명나라를 거쳐 조선까지 온 비요른의 딸 시그리드 리프트라사의 미모에 빠져서 숙소 담장을 넘었다가 라이플 경고사격에 혼쭐이 나고,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려서 귀국하는 시그리드 일행을 따라가다가 태평양 건너 빈란디아까지 가는 줄을 뒤늦게 깨닫는다.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전라도 앞바다에 대충 내릴 생각이었지만, 범선이 근해가 아닌 원양을 항해하기 위한 것이라 속도가 비범하게 빠른 줄을 몰라 내릴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자가 추방(...)이라는 현실에 좌절하다가, 명나라에서 시그리드를 모함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배에 오른 황희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눈새 기질을 아낌없이 뽐낸다.
- 대체역사소설인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서는 진양대군 이유와 함께 주인공 이향을 저주한 역적으로 몰리고 일전에 지은 죄까지 책임을 물어 아예 폐서인당한 뒤 사사되는 최후를 맞는다.
- 대체역사 소설인 《내 조선에 세종은 없다》에선 주인공이 양녕대군으로 빙의하고 조선을 완전히 바꾼다.
5.2. 드라마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에서는 배우 송기윤이 〈1부 - 추동궁마마〉, 〈2부 - 뿌리깊은 나무〉, 〈3부 - 설중매〉까지 무려 3편에 걸쳐 연기했다. 방탕한 모습은 왕이 되기 싫어 일부러 그런 것이란 설정으로 나온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유배지 탈출 및 기방 출입 등으로 여전히 말썽부리는 이미지로 나온다. 대신들은 그 때마다 벌 줄 것을 청하나 세종의 비호로 위기를 넘긴다. 한 번은 다시 기방을 찾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세종(한인수 분)의 권유로 평양에 갔을 때 과부로 변장한 평양 제일의 명기 정향을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동생이자 왕인 세종하고 한 약속을 어긴 일이라 크게 걱정한다. 이후 세종이 추궁할 때 그런 일 없다고 발뺌하자 자신이 정향의 속치마에 써준 시와 정향을 보고 멘붕. 그제서야 모든 게 사실 세종이 자신을 떠보려고 한 것임을 알게 되었는데 세종의 명으로 정향을 측실로 맞는다. 〈설중매〉에서는 문종(임정하 분) 사후 혜빈 양씨가 어린 단종(신성균 분)을 챙기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수양대군(남성우 분)에게 왕실을 지키라고 하고 안평대군을 사사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등 확실하게 수양대군의 편에 선다. 한확이 죽고 슬픔에 빠져 궁을 비우고 한명회(정진 분)와 같이 술을 마시는 세조를 찾아가 환궁하라고 간언하며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 세종에 버금가는 위업을 남기라고 한 뒤 나오면서 한명회에게 "그렇게 보필할 거면 관복 던지라!"고 꾸짖는 등 왕실 어른으로서 나름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이민우가 연기했다. 왕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할아버지 태조(김무생 분)와 척을 지는 것은 물론 왕으로 등극하는데 적극 동참했던 외숙부들조차 가차없이 죽여 없애는 아버지 태종(유동근 분)의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며 권력의 무상함과 무서움을 알고 일부러 이렇게 반미치광이를 가장해 기행을 했다는 식으로 그려졌다.[23] 심지어 어렸을 때는 피비린내나는 골육간의 권력 투쟁이 싫다며[24] 세자 책봉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극중 등장하는 태종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아버지와 닮은 아들이 아버지를 거부하면서 속을 썩이는 장면은 태종이 즉위 전 아버지인 태조의 속을 썩인 것과 겹치며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데 기여하기도 했는데 어찌보면 태종 인생의 진정한 최종 보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민우의 명연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에게 양녕대군의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놓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나마 남의 첩을 빼앗거나 절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등의 미친 짓도 충분히 묘사되기는 한 것이 다행인 부분. 하지만 "경복궁 경회루의 현판을 직접 적어놓다."는 내레이션의 해설 장면이 등장하며, 이에 태종이 칭찬하여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였다. 맨 마지막 화에 일부러 놀아제끼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있는데 이 길을 찾다 보니 본작에 나오는 캐릭터가 되었다고 보면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1995년 나온 실록 CD롬을 참고해가며 쓴 사극이기 때문에 이전에 나온 사극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고증이 잘된 본작에서 사료 대비 가장 미화된 인물로 이 작품의 대표적인 옥의 티로 꼽힌다.[25]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신구[26]가 연기했다. 강력한 왕실을 추구하는 왕권주의자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언행이든 서슴치 않고 그에 따라 광인이니 노망이니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는 것이 특징. 세종(송재호 분)에게 왕위를 넘긴데 후회는 없지만 세종이 유약한 문종(전무송 분)에게 후사를 맡기고 그가 다시 어린 단종(정태우 분)을 후계로 임명한 것을 상당히 원망했고 결국 조카 수양대군을 부추겨서 조선의 왕실이 다시한번 콩가루 집안이 되는데 일조하였다. 마지막까지 단종을 죽이라며 세조와 독대하며 거의 깽판을 친다. 제89회에서 제90회로 넘어가는 사이 9년이 지나 사망하는 신이 나오지 않고 권람(김갑수 분)이 죽는 것만 나왔다.[27] 이 모습은 양녕대군이 권력을 스스로 멀리한 태백과 같은 캐릭터로 미화되기 일쑤인 한국 사극들 중 가장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 가장 충실하게 양녕대군을 묘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흔히 생각되는 젊은 시절 '피비린내 나는 정치를 애써 멀리하던 광인'으로서의 양녕이 그려질 시기가 아니라서 수양대군의 가장 큰 지지자인 냉혹한 백부로 묘사되었기 때문. 여기에 양녕대군이 단순히 폐세자되고 전국을 떠돌았다 정도만 알고 세종의 큰형이니 세종 시절에 죽었겠지 정도로 지레짐작하던 시청자들이 세종의 사후에도 정정하게 살아서 계유정난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놀라는 경우도 꽤 많았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박상민(청소년 시절: 이인)이 연기했다. 주색잡기 부분은 어리(오연서 분) 사건과 정종(노영국 분)을 모시던 기생인 초궁장(강경헌 분)과 밀통을 한 점을 제외하면 적당히 풍류를 즐긴 것 정도로 묘사한다. 대신 요동 정벌을 주장하고 직접 왜구와 전투를 하거나 신하들까지 속이고 중앙군을 이끌고 함경도까지 가서 여진 정벌까지 시도할 정도의 대책없는 전쟁광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실록을 비롯해 남아 있는 기록 어디에도 이런 묘사는 없다.[28]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나 내정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시피하며 작중의 충녕대군(김상경 분)과 대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 후에는 언급조차 없다가 상왕 태종(김영철 분)이 조말생(정동환 분)에게 병권을 뺏기고 병이 깊어졌을 때 재등장한다. 실수로 세종을 능멸하는 발언을 해버린 조말생에게 한방 먹여준 뒤에, 술에 취한 채로 태종에게 찾아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빈다.[29]
-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생략당했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양녕대군의 포지션은 온녕군(윤승원 분)이 대신하는데 온녕군은 계유정난 얼마 후에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각색을 가해서 나중에 김승유(박시후 분)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성우 박웅이 연기했다. 행패남이지만 "할 줄 아는 건 효도밖에 없다"고 문종(선우재덕 분)을 까도 생각보다 행패가 덜하다.[30][31] 되레 김종서(한인수 분)가 사망 직전의 문종을 보려는 걸 막자 분통 터져 쓰러지는 수준. 다만 계유정난 이후 어서 단종(채상우 분)을 폐위시켜야 한다고 꼬장을 부리다가[32] 이번에는 명나라의 녹을 받는다며 인수대비(함은정 분)의 친정아버지 한확의 뺨을 친다.[33] 그래서 한확은 "이런 치욕을 다시 당하지 않도록 좋은 왕비가 되어달라"고 인수대비에게 말한다.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마지막화에서 태종과 충녕대군의 대화로 잠시 언급된다. 대화에 따르면 세자가 6년이 걸린 서책을 충녕은 2개월 만에 돌파하였다고 한다.
- 2016년 MBC 드라마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2 - 조선왕조실톡〉에서는 배우 권혁수가 연기했다. 정성호가 분한 황재근과 시간을 넘나들며 톡을 한다. 헌팅을 하다가 황석정을 구해줬지만 황석정을 마음에 안 들어했으나 황석정은 그에게 꽂힌다. 결혼 못한 모태솔로들을 짝지어 주지만 남의 첩을 궁녀로 들였다 결국 태종에게 찍혀[34] 폐세자가 되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다.
- 2018년 TV조선 드라마 〈대군 - 사랑을 그리다〉에서는 배우 손병호가 연기했다. 작중 양안대군은 양녕대군을 모티브로 하였으며 세조에 해당하는 진양대군(주상욱 분)을 끊임없이 획책하고 선동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절 앞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스님을 조롱하였다는 등의 야사도 반영한 장면이 나왔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13회부터 등장했는데 어린 시절은 김준의와 김인우, 26회 후반부터 나오는 성인기는 배우 이태리가 연기했다. 본작에서는 그간과는 다르게 거의 미화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실록을 충실히 반영한 망나니 그 자체의 양녕대군을 그려냈다.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태종 이방원) 문서 참조.
5.3. 게임
5.4. 영화
- 2012년 개봉한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배우 백도빈[35]이 연기한다. 이 영화의 양녕대군은 그야말로 역사 속의 방탕한 양녕대군 그 자체. 첫 장면에서부터 주색잡기에 땡깡을 부리다 아버지 태종(박영규 분)에게 분노의 이단옆차기를 맞고 폐위당한다. 이후 세자가 된 충녕대군(주지훈 분)에게 찾아와 2차 땡깡을 시전하나, 실은 세자와 바꿔치기된 거지 덕칠(주지훈 분)에게 "누구세요?"를 시전당하고 이내 열받은 덕칠에게 두들겨 맞는다.
5.5. 만화
- 웹툰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올곧은 세자였지만 (고종의 혼이 들어간) 태종에게 푸대접을 받자 쿠데타를 준비하다가 양녕대군이 고용했던 산적이 반역 모의를 밀고해 국문을 받은 뒤 죽임을 당할 뻔했지만 충녕대군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다. 38화 끝부분에서는 어린 시절의 진평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조선에서는 마땅히 어질고 현명한 이가 왕이 되어야 한다"면서 "만약 왕이 어질고 현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숙부의 말뜻을 깨닫고 "아..."라고 말하는 진평대군이 압권.
-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 나올 때마다 날라리 짓으로 아버지 이방원의 속을 썩여 결국 아버지에게 혼나는게 다반사다.
- 탑툰과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하는 성인 웹툰인 〈용포철인〉의 주인공인데 무려 마물과 싸우며 조선의 밤을 수호하는 슈퍼히어로로 나온다. 조연인 세종대왕은 뒤에서 양녕대군을 지원하다가 심심하면 형의 사이드킥으로 활동.
- 네이버 웹툰 〈호랑이 형님〉의 홍의부가 까치목골로 오기 전 모셨던 폐세자로 언급으로만 등장. 대놓고 양녕이라고 나오지는 않았으나 세종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 확실하기에 홍의부가 모셨던 폐세자도 확실히 양녕이다.
6. 가족 관계
본부인 수성부부인 광산 김씨에게서 3남 5녀, 첩실에게서 7남 12녀 등 총 10남 17녀를 두었다.- 정부인 : 수성부부인 광산 김씨(隨城府夫人 光山 金氏) - 광산군 김한로(光山君 金漢老)의 딸
- 적장남 : 순성군 희안공 이개(順成君 僖安公 李豈, 1414 ~ 1462)
- 적차남 : 함양군 이안공 이포(咸陽君 夷安公 李布, 1417 ~ 1475)
- 며느리 : 태인군부인 고성 이씨(泰仁郡夫人 鐵城 李氏) - 이대(李臺)의 딸
- 손자 : 부원군 이진(富原君 李鎭)
- 손자 : 호산군 이현(湖山君 李鉉)
- 손자 : 봉양수 이종남(鳳陽守 李終南)
- 손자 : 파징수 이종암(波澄守 李終巖)
- 손자 : 관산수 이종석(管山守 李終石)
- 손자 : 화천군 이종근(和川君 李終瑾)
- 적3남 :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 ~ 1451)
- 손자 : 학림군 이이(鶴林君 李頤)
- 손자 : 취성군 이빈(鷲城君 李頻)
- 적장녀 : 재령군주(載寧郡主, ? ~ 1444) - 지돈령 이자(知敦寧 李孜)에게 출가
- 적차녀 : 현주(縣主) - 중추부사 이번(李蕃)에게 출가
- 적3녀 : 영평현주(永平縣主) - 주부 김철균(主簿 金哲勻)에게 출가
- 적4녀 : 현주(縣主) - 군수 박수종(郡守 朴壽宗)에게 출가
- 적5녀 : 영천군주(永川郡主, 1412 ~ 1442)
- 첩부인 : 기생 봉지련(鳳池蓮) - 양녕대군이 혼인하고 4년후 정을 통했던 기생이다.
- 첩부인 : 성씨 미상
- 서장남 : 고정부정 이겸(古丁副正 李謙)
- 며느리 : 함평 노씨(咸平 魯氏) - 노길창(魯吉昌)의 딸
- 손자 : 태성수 이정(駘城守 李靖)
- 손녀 : 봉사 오계선(奉事 吳繼善)의 처
- 서차남 : 장평부정 이흔(長平副正 李訢) - 사후 도정으로 추증됨. 무의공 이순신의 5대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조상.
- 며느리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손녀 : 첨정 이신손(僉正 李信孫)의 처
- 손녀 : 부호군 유귀손(副護軍 劉貴孫)의 처
- 며느리 : 진주 강씨(晉州 姜氏) - 강위(姜偉)의 딸
- 손자 : 부림령 이순(富林令 李順) - 이승만의 13대조
- 손자 : 우성령 이석(牛城令 李碩)
- 손녀 : 3명
- 서3남 : 계천도정 이성(溪川都正 李誠)
- 며느리 : 의령 남씨(宜寧 南氏) - 남척(南倜)
- 손녀 : 현령 박욱(縣令 朴頊)의 처
- 서4남 : 봉산부정 이순(蓬山副正 李諄)
- 며느리 : 전주 최씨(全州 崔氏) - 최윤형(崔允衡)의 딸
- 손녀 : 군수 류인유(郡守 柳仁濡)의 처
- 서5남 : 안창정 이심(安昌正 李諶)
- 며느리 : 진주 강씨(晉州 姜氏) - 강처정(姜處貞)의 딸
- 손자 : 임회수 이수(臨淮守 李樹)
- 손자 : 사천수 이식(沙川守 李植)
- 손자 : 서천수 이□(舒川守 李□)
- 서6남 : 돌산부정 이광석[36](突山副正 李廣石)
- 며느리 : 여흥 민씨(驪興 閔氏) - 민담(閔憺)의 딸
- 손자 : 영덕수 이□□(盈德守 李□□)
- 손자 : 익안수 이신손(翼安守 李信孫)
- 손자 : 금사수 이□□(金沙守 李□□)
- 손자 : 금주부수 이□□(錦州副守 李□□)
- 손자 : 가연부수 이인손(加淵副守 李仁孫)
- 손자 : 장림령 이진손(長臨令 李眞孫)
- 손녀 : 생원 성량(生員 成諒)의 처
- 손녀 : 류완(柳浣)의 처
- 서7남 : 금지부정 이광근(金池副正 李廣根)
- 며느리 : 현풍 곽씨(玄風 郭氏) - 곽항(郭恒)의 딸
- 손자 : 광산수 이□(光山守 李□)
- 손녀 : 공승조(孔承祖)의 처
- 첩부인 : 기생 어리(於里)
- 서장녀 : 이애중(李愛重, 1451 ~ ?) - 상장 이종경(上將 李宗慶)과 혼인
- 첩부인 : 기생 초궁장(楚宮粧) - 백부 정종의 애첩
- 첩부인 : 기생 정향(丁香)
- 첩부인 : 기생 칠점생(七點生) - 청평부원군 이백강[37](淸平府院君 李伯剛)의 첩
- 첩부인 : 성씨 미상 - 노비 출신
- 서차녀 : 부령 김암(部令 金巖)과 혼인
- 첩부인 : 성씨 미상
- 서4녀 : 현감 김승간(縣監 金承幹)과 혼인
- 서5녀 : 사직 김오(司直 金澳)와 혼인
- 서6녀 : 현령 김원(縣令 金瑗)과 혼인
- 서7녀 : 청성부원군 한치형[38](淸城府院君 韓致亨)의 초취
- 첩부인 : 성씨 미상 - 노비 출신
- 첩부인 : 성씨 미상
- 서9녀 : 창승 유석번(倉承 兪碩蕃)과 혼인
- 서10녀 : 봉사 김의(奉事 金儀)와 혼인
- 서11녀 : 임중(林重)과 혼인
- 서12녀 : 현주 이건이
6.1. 역대 종주(宗主)
양녕대군의 종가는 차남 함양군 이포의 가계로 이어진다. 장남 순성군 이개가 양녕대군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예법대로라면, 순성군이 일찍 세상을 뜬 경우, 그의 장남(오천군)이 종가를 물려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양녕대군이 순성군보다 불과 5일 뒤에 세상을 떠나면서, 오천군의 입장에서는 조부-부친상을 한꺼번에 치러야 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또한 함양군이 순성군 대신 양녕대군을 모시고 살았는데, 부양한 아들이 상주가 되는 것이 당시에는 용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종가도 함양군의 후손들이 물려받았다.[A]성종 대를 거치며 성리학적 예법이 완전히 자리잡자, 순성군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장자 계통이니 종손 자격을 회복시켜줄 것을 연산군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9대손 이형까지 종가 직계가 내려오다가, 이형이 후사가 없어 양녕대군의 3남 서산군 이혜의 8대손인 이인망이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그런데 이형과 항렬이 같아 문제가 되었고, 이때 순성군의 후손으로 다시 종통을 세우자는 논의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은 이인망을 파양하되, 이인망의 아들 이한보를 이형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여 항렬 문제를 정리하였고, 이후 이한보의 후손들로 지금까지 종가 직계가 이어진다.[A] 따라서 현재 양녕대군의 종가는 혈통상으로 서산군의 후손들이다.
- 1.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禔)
- 2. 함양군 이포(咸陽君 李𧦞)
- 3. 부원군 이진(富原君 李鎭)
- 4. 구산군 이계남(龜山君 李繼男)
- 5. 이의손(李義孫)
- 6. 이상(李祥)
- 7. 이팽년(李彭年)
- 8. 이일증(李一曾)
- 9. 이수겸(李守謙)
- 10. 이형(李炯)
- 11. 이한보(李漢輔)[41]
- 12. 이제형(李齊衡)
- 13. 이정윤(李靖胤)
- 14. 이지광(李趾光)
- 15. 이원규(李遠揆)
- 16. 이해선(李海善)
- 17. 이승보(李承輔)[42]
- 18. 이근수(李根秀)[43]
- 19. 이병주(李丙胄)
- 20. 이재기(李在基)
- 21. 이황(李鍠)
- 22. 이정원 - 현재 봉사손
[1] 양녕대군의 차남이나, 봉사손으로 임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 음력 태조 3년[3] 음력 세조 8년 9월 7일[4]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5] 다들 조선 건국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조선 왕조 공식 기록에는 그 3명이 없고 오직 태종의 언급만 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장자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일부러 기록하게 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다 못해 실록에 쓰지 말라는 일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쓴 것으로 유명한 그 민인생이 끼어 있었을 당시 사관(史官)의 꼬장꼬장함을 감안하면 "주상께서 일찍 보내신 아들 3명은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기록했으면 했지 쓰지 말란다고 안 썼을 가능성은 적다.[6] 특히 세종은 자기 아버지 태종처럼 장자가 뒤를 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깬 인물이었다. 아버지 태종은 자신이 왕자의 난에 승리하여 쟁취한 만큼 정통성은 약했지만 그것을 메꿀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있었다. 왕자의 난을 예방할 겸 자신의 후임자는 자신과 달리 정통성이 충분한 장자 양녕대군으로 삼은 것도 그 이유였다.[7] 우왕이 폐위된 후 우선은 당시까지 왕씨로 인정되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으나, 왕우는 여전히 상왕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이성계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며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되어 결국 우창비왕설에 근거한 폐가입진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게 되었다.[8] 스캔들이 있었던 기생 어리의 딸도 포함한다.[9]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5대손.[10] 장평도정(長平都正)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고, 임진왜란 때에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10대손이다.[11] 왕자만이 아니라, 공작 등 고위귀족도 포함되는 개념[12] 실제로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에 갔을 때 프린스 민으로 소개됐었다.[13]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었다.[14] 이 입양의 문제는 무려 3가지나 있었다. 첫 번째, 장자는 집안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집에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는 법을 어긴 입양이었다. 두 번째, 입양 당시에 파가 다르면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외했는데 이를 무시했다. 세 번째, 파가 달라도 항렬이 맞으면 모르겠는데,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 항렬이다.(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이승만이 이방원의 17대손이고 이강석이 19대손이다.) 즉, 여러 모로 꼬인 입양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 역시 아들뻘이라기 보다는 손자뻘에 더 가까웠다.[15] 전주 이씨 양녕대군 16세손, 시조 39세손 '善'자 항렬이다.[16] 전주 이씨 양녕대군 16세손, 시조 39세손 '善'자 항렬이다.[17] 전주 이씨 양녕대군 20세손, 시조 43세손 '基'자 항렬이다.[18] 전주 이씨 양녕대군 17세손, 시조 40세손 '承'자 항렬이다.[19] 전주 이씨 양녕대군 18세손, 시조 41세손 '秀'자 항렬이다.[20] 이엄이란 귀를 가리는 방한구로, 지금의 귀마개 같은 물건. 남바위를 이엄이라고도 한다. 효령대군은 귓병을 앓고 있어서, 양녕대군 말대로 초여름(6~7월)에도 이엄을 쓰고 다니고 있었다. 고로 '부처님이 그렇게 잘났다면, 왜 니 귓병은 못 고쳐주냐?' 라는 뜻이다. 이 뒤의 이어질 말과 합쳐서 양녕대군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기록.[21] 참고로 당시 연기했을 때 MBC 드라마 〈수사반장〉 범인 역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방송국으로 찾아와 항의할 정도였다.[22]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무학대사 역.[23] 어릴 때 조사의의 난 때는 할아버지가 그 배후에 있음을 알 정도로 영특해서 아버지를 말리려고까지 했지만, 아버지가 칼까지 꺼내들며 충격을 줬으니 어릴 때부터 그 영향을 받아 변해왔다는 것으로 묘사된다.[24] 직접 권력 투쟁의 마당에 뛰어들기 싫다는 것이었지 그 필요성 자체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25] 다만 작품의 완성도와 설명이 너무나도 권력을 거부하고 혐오하게 되는 이유를 생생히 겪고 PTSD 와도 같은 설명이 너무 잘 되어서 왜곡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쉽게 된 영향이 컸다.[26]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 역할을 맡았는데 왕륭이 아들 왕건으로부터 추존받은 묘호가 바로 세조이다.[27] 이 작품은 국왕 이외의 인물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퇴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람의 죽음을 지켜본 신숙주(이정길 분)도 한명회(최종원 분)의 대사로 "범옹이 죽었을 때 나도 같이 가야 했다"라고 언급될 뿐이며 효령대군(김인태 분)이나 월산대군(송호섭 분) 등의 왕족들, 한명회처럼 이름이 알려진 인물조차 예외가 아니다.[28] 활을 잘 쏘았다는 묘사 정도는 있는데 이나마도 정신 수양의 일환으로 무관은 물론 문관들에게까지 널리 인기가 있었으니 양녕대군이 특별히 무술에 능했다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한다.[29] 이때 황희(김갑수 분)에게 여전히 "저하"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작가의 실수인 듯하다.[30] 하지만 어이없는 대사인 것이 문종은 세자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재능을 입증한데다가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은 효도라도 잘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31] 혜빈 양씨를 대놓고 멸시하는 부분은 정희왕후에게 옮겨졌다.[32] 그래도 나름 "주상이 나이 어리다고 얕보지 마시게. 조금이라도 힘이 생기면 자네 목을 내놓으라고 하게 되어 있어. 김종서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오게 된다" 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한다.[33] 흥미로운 건, 양녕대군 역의 박웅이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바로 한확 역으로 출연했다는 것. 옛날에 한확 역을 맡았던 배우가 늙어서 과거에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뺨을 친다는 상당한 수준의 배우개그이다.[34] 기생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을 태종이 보고 말았다.[35] 아버지인 배우 백윤식은 양녕대군을 옹호하다 파직된 황희 역을 맡았다.[36] 선원계보에는 밀산(密山)부정으로 쓰여 있으나, 실록에는 돌산(突山)부정으로 기록됨[37] 정순공주의 남편[38] 인수대비의 사촌오빠[A] 출처: 〈양녕대군가, 지덕사 600년 종통 잇는 봉사손의 50가지 인생 풀 스토리〉, 《세종대왕신문》 2023.02.13.[A] [41] 양녕대군의 3남 서산군의 9대손으로, 10대 종주 이형과는 혈연상 19촌 숙질간이다.[42] 고종 시기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43]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이승만이 유년 시절에 수학했던 도동서당의 주인이었다. 다만, 항렬은 이승만보다 한 항렬 낮아서, 33촌 조카 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