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3 02:43:03

안평대군

파일:Joseon_little_white_minimal.png 조선 4대 명필
사자관체 예서체 인수체 초서체
석봉 한호 비해당 이용 자암 김구 봉래 양사언


安平大君
1418년(태종 18년) 음력 9월 19일 ~ 1453년(단종 1년) 음력 10월 18일

1. 개요2. 생애
2.1. 먼치킨 문인 왕자2.2. 계유정난과 죽음2.3. 사후와 후사(?)
3. 대중 문화에서의 안평대군

1. 개요

이름 용(瑢). 자 청지(淸之). 호 비해당(匪懈堂)[1]·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군호는 충남 홍성군의 옛 지명인 안평(安平)에서 유래했다. 조선 세종소헌왕후 심씨의 셋째아들.

2. 생애

2.1. 먼치킨 문인 왕자

3살 때, 14살에 요절한 작은아버지 성녕대군(태종의 막내아들)의 양자로 들어간다.

서예, 시문, 그림에 뛰어나 삼절이라고 불렸다. 특히 중국의 고서화를 수집했는데, 조맹부와 소식(소동파) 등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의 서예들을 수집해서 보고 많이 연마했는지 중국에서도 사라진 조맹부체를 가장 잘 구사하는 명필로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안평대군에게 달려가서 글을 써달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고.

이외에도 가야금 등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등,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랐다고 한다.

그의 작품으로 몽유도원도 발문 등이 유명한데, 몽유도원도는 그가 꾼 꿈을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안견은 유일하게 안평대군이 총애한 조선화가였다고. 때문에, 안평대군은 자신이 소장한 중국 전통화단 대가들의 그림을 안견에게 많이 보여주며 익힐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한편 안견은 보신을 위해 안평대군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2]

또한 제주도 제주시에 위치한 관덕정에는 그가 썼던 현판이 걸렸으나 불에 타 사라지고, 이후 선조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쓴 현판이 남아 전한다.출처

그의 글씨 중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본으로 국보 238호로 지정된 소원화개첩이 있었으나, 2001년 도난당하였다.

2.2. 계유정난과 죽음

단종 때는 종친과 문사를 바탕으로 힘 있는 종친으로서 수양대군, 황보인이나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과 3각 구도를 이뤄서 한가락을 하였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안평대군을 끌어들이면서 다수파의 한축으로서 사실상 형보다 앞서나갔다. 하지만 계유정난에서 이복동생 계양군 이증의 무고로 인하여, 형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일 때 강화도로 귀양을 갔으며, 그 후 교동도로 이배되고 36세에 사약을 받았다.

계유정난의 명분이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모반을 꾀한 걸 미리 때려잡았다...라는 것이지만, 안평대군이 그랬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게 대체적인 견해다.[3] 결국 형의 앞길에 방해가 되어서 제거된 것. 할아버지도 친형제는 안 죽였는데...

한편 성녕대군의 부인, 즉 양어머니인 삼한국대부인 성씨는, 훗날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이 유배 및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폐출되고 경주로 귀양가게 되었다. 몇년 뒤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본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가 죽었다. 그후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편과 같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2.3. 사후와 후사(?)

생전에 시문서화에 능통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여러 작품을 남겼을 듯 하지만, 역사의 패배자인 탓인지 안평대군이 수집한 고서화나 그의 서예 작품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문이나 글씨교본, 그리고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 뿐이다. 그나마도 몽유도원도의 발문은 일본 덴리대학에 전시되어 있으며, 소원화개첩은 2001년 소장자가 도둑맞은 이후 10여 년간 경찰의 수사가 이뤄졌지만, 끝내 범인은 물론 소원화개첩의 행방도 묘연해, 결국 지난 2010년 이 작품을 인터폴에 국제 수배하는 선에서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겨졌으니, 안평대군이 주목을 받을 날은 요원한 듯. 그나마 그와 친밀한 사이였다가 돌아서버린[4] 신숙주가 자신의 문집에 안평대군이 수집했던 고서화의 목록을 남기고 있어서, 그가 어떤 작품들을 모았는지는 알 수 있긴 하지만.

영조 23년(1747년) 때야 복호되어 장소(章昭)라는 시호를 받았다.

똑같이 친형의 쿠데타에 반기를 든 금성대군은 그 후손이 현재에도 남아 있어 금성대군파를 형성하고 있다.[5] 그러나 안평대군은 딸 하나를 제외하고 아들들도 주멸되는 바람에 후사가 완전히 끊어져, 현재 직계 후손이 공식적으로 없다.[6]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안평대군파보[7]를 보면, 안평대군의 맏아들인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에게 이운생(李雲生)[8]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계유정난으로 인해서 평안도 태천으로 은거했다고 한다.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숙종 이후에 사후복권이 이루어졌지만, 1930년대까지 약 230년 간 안평대군의 자손임을 숨기고 살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전주이씨대동종약원 홈페이지에 안평대군에 대한 정보는 없다.[9]

아내 정씨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바로 죽는 해인 1453년 1월 28일(1452년 음력 12월 19일) 아들 이우량(友諒)이 병사하였고, 1453년 5월 31일(음력 4월 23일) 그의 아내가 죽자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하였다.
내가 불사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세종대왕소헌왕후문종(文宗) 대행왕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 아들 우량도 또 따라서 죽고, 이제 또 아내도 죽으니 비로소 불사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덕을 드리는 것을 중단한다. 어쩜 죽음을 예견한 것일지도? 하지만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이라 욕을 꽤나 먹었다.

3. 대중 문화에서의 안평대군

묘하게도 안평대군을 우호적으로 그린 사극은 없다시피 하다. 그럼 공주의 남자는?

우선 사육신 쪽을 띄워주는 방향으로 보면, 초기에 수양대군과 같이 종친으로서 권력을 탐하는 속성을 보인 부분을 커버쳐 줄 방법이 없다. 나중에 김종서와 손잡은 부분을 개과천선이라고 부르면 또 너무 막나가는 거고... 반대로 세조와 계유정난을 우호적으로 그린 경우에는 안평대군은 빼도 박도 못하고 권력을 탐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특히 왕과 비에서는 악역 전문 배우인 정성모가 안평대군을 연기했으니 말 다했다(...). 세종의 왕자들 배역.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신검 이광기가 연기하였다. 책사인 이현로는 김규철(...). 노영국이 드라마 한명회에서 분하기도 했다. 대왕 세종에도 나오긴 한다. 1990년도에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파천무에서는 현직 동신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차두옥 씨가 안평대군을 연기한 적이 있다.

세조가 악역인 공주의 남자에서 취급이 그나마 나았던 듯... 이기는 한데, 이주석이란 배우가 분위기나 비중이 상당히 약해서 그랬다는 것이 문제. 위키에 추가도 안 됐다. 여기도 금성대군 포스가 더 크다.

고전소설인 운영전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배경이 되는 수성궁의 주인이다. 운영을 비롯하여 자신이 데리고 있는 궁녀들에게 각종 재주들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연애를 금지하여 운영을 죽게 만드는 엄하고 못된 주인으로 나온다.[10] 그나마 운영전이 예술가적 기질이 있던 안평대군을 어느정도 묘사했다는 점에선 사극들 보단 낫나?

어린이 과학동아에 연재된 만화 조선 과학 삼총사에서는 5살 꼬마로 등장한다. 어린 나이지만 서화에 관심이 많아 부왕을 졸라서 명나라행을 허락받았다.

영화 관상에선 문종이 역모를 일으킬만한 인물들 리스트안에 있었으나, 왕가에서 태어났지만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해를 품은 달과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작가 정은궐 씨의 소설 홍천기에서는 제법 비중있게 나온다.


[1] 원래 안평대군의 군호가 안평(安平)이라 게을러질 것을 염려한 세종대왕이 게으름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비해당이라고 호를 내려주었다고 한다.[2] 안평대군이 아끼던 용매묵이라는 비싼 먹을 훔치려다 들켜서 눈 밖에 나고, 대군을 볼 낯이 없다며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그 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과 친했던 사람들은 봉변을 당했는데, 안견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3] 왜냐하면 다수파였던 김종서, 황보인 세력과 합작한 것이 결국 숙이고 들어간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난하게 잘나가는 종친의 위치가 바뀌기 어렵다. 왕이 되면 오히려 신하들이 옹립한 휘둘리는 왕이 되니 더 괴로워질 것이고. 또 김종서와 황보인 등 신하들도 안평대군을 옹립할 이유가 없는 게, 어린 단종과 다르게 안평대군은 성인이라 친정을 할 수 있으므로, 신하들에게 좋을 게 없다.[4] 신숙주는 물론이고 사육신들까지 포함해서 집현전 소장학자들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노대신들이 고명대신으로서 정사를 좌우하는 것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계유정난은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소장학자들과,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포섭되지 않은 종친세력이 서로 손을 잡고 김종서 세력을 쳐버린 것이라는 평이 많다.[5] 세조가 금성대군의 아들들은 죽이지 않고 관노로 삼아서, 어찌어찌 대를 잇는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면, 이복동생인 영풍군은?[6] 조선왕조실록 1518년(중종 13년) 6월 7일 2번째 기사.[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에도 소장돼 있다.[8]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구글링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9] 안평대군의 이복동생으로 역시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영풍군에 대한 정보는 존재한다.[10] 그렇지만 사실 궁녀들과 외간남자와의 연애는 원래부터 금지된 사항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냥 궁궐 내의 규칙을 잘 준수하는 주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솔까말 궁녀들은 거의 왕의 여자 취급인데, 외간남자가 궁녀를 건드리면 그야말로 난리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