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12:41:08

명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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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3대 국왕
明宗
명종
묘호 명종(明宗)
시호 조선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공헌(恭憲)
출생 1534년 7월 3일 (음력 1534년 5월 22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사망 1567년 8월 2일 (음력 1567년 6월 28일)
(33년 30일, 1만 2,083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양심당
능묘 강릉(康陵)
재위 조선 국왕
1545년 8월 12일 ~ 1567년 8월 2일
(음력 1545년 7월 6일 ~ 1567년 6월 28일)
(21년 11개월 20일, 8,0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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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환(峘)
군호 경원대군(慶源大君)
전호 모의전(慕義殿)
부모 부왕 중종, 모후 문정왕후
부인 인순왕후 }}}}}}}}}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즉위2.2. 친정2.3. 치세
3. 가족4. 평가5. 능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7. 같이보기

1. 개요

조선의 제13대 . 묘호는 명종(明宗), 시호는 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휘는 이환(李峘). 자는 대양(對陽).

2. 생애

2.1. 출생과 즉위

중종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에는 경원대군(慶源大君)[1] 이었으며, 인종이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전왕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인 인종의 이복동생일 뿐이었으나,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급사함으로써 왕이 되었다. 어릴 때 양눈에 안질이 있었다는데, 인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윤임이 "경원대군은 안질 때문에 눈이 안 보이니 왕을 못한다"는 핑계로 그를 후계 선상에서 제외시켜 보려 했지만, 이언적 등이 경원대군의 승계를 지지하고 문정왕후가 강력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포기하게 됐다.

따라서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을사사화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권세를 얻은 소윤(왕의 외숙부 윤원형) 일파의 부정부패는 엄청나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덤으로 보우를 통한 불교 중흥은 유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그야말로 사대부 입장에서는 외척 + 사화 + 불교 + 여자의 막장 4종 세트.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의적(?) 임꺽정의 활약도 바로 이 명종 재위 기간이었다.

2.2. 친정

20세가 되어 문정왕후가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친정이 시작된다. 야사에선 문정왕후의 간섭이 심하였으며, 심지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일까지 있었다고. 그리고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의 뺨까지 때렸다고 하며, 또 명종의 행동을 궁녀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을 욕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불러 야단을 쳤다고도 하는데, 이건 그냥 야사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의 죽음 이후론 신하들 없는 곳에선 상당히 성격이 괴팍해져서, 명종실록에는 "명종이 조울증홧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기록이나 야사때문에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하지만, 정사상으로는 근거가 없다.[2]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긴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치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개입한 예를 문정왕후를 까기 위해 사관들이 안 실었을 리가 없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3] 그 뒤로 손꼽히는 개입이라 해봐야 명종이 윤원형을 지칭하여 "외척이 대죄를 입으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말하자 명종을 불러 "주상, 이 어미와 외숙이 없었으면 왕이 됐을 것 같습니까?"라고 나무란 정도가 고작이다.[4]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이유가 될 만한 사건을 들자면, 문정왕후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댄 모습 정도. 문정왕후가 청정을 거둔다고 한 해인 1553년에 명종은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저건 일상적인 수렴 거부의 쇼이고,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2.3. 치세

다만 재정은 어려움이 많았다. 외척의 득세도 득세이지만, 친정을 시작한 1553년, 경복궁근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게다가 1550년에는 더이상 줄 땅이 없어 직전법을 폐지해야했다. 좋게 보면 공신, 대신들의 땅 불리기가 공적으로는 중단된 거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미 그러지 않아도 될만큼 부패가 극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명종은 경복궁 재건을 엄청나게 닥달함으로써, 불과 1년 만에 모두 복원해낸다.

명종은 주로 내시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문제는 명종이 조울증을 앓다 보니, 기분에 따라 총애하는 내시가 툭하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외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은 이후로 더 심해졌다. 단순히 총애의 정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서 하옥시키고 국문해서, 내시들이 "신하들에게는 성군이면서 우리들에게는 나 다름 없다"고 투덜거렸을 정도라고.

1555년 왜구전라남도 서남 해안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는데, 이게 왜변 중 가장 규모가 큼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외변인 을묘왜변이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을 파견하여, 진압에 어려움을 겪긴 했어도 결국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삼포왜란 이후 생겨난 비상기관인 비변사는 이때부터 상설 정치 기구화한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을묘왜변 이후 조선해군력을 크게 강화하게 되고, 판옥선의 도입, 총통의 개량, 수군의 정비, 권관제의 도입 등의 개혁을 추진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된다. 또 줄어든 군마를 명나라에서 수입하려고 해서 사림 계열 신하들의 비판을 심하게 받는 등, 알고보면 명종도 밀덕후 기질이 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억불 정책에 돌입하는 등 정치를 안정시키나, 1567년 명종도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신의 정치는 물론, 후사를 구상하기에도 너무 짧은 2년이었다.[5]

한편, 계속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방에서 힘을 기르던 사림은, 문정왕후윤원형 등의 척신들이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는 성종 때처럼 훈구파도, 연산군 때처럼 반사림적인 임금도, 중종 때처럼 신진 사림을 제어할 세력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순수 지방 사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조정을 가득 채운 사림은 조광조 일파처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성종 시절의 따박따박이 부활하게 되었으므로, 명종은 이래저래 힘을 쓸 수 없었다.

교과서나 일반적인 서적에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명종은 그것을 지원했다"는 식으로 나와있지만, 그것이 명종 자신의 색깔인지, 아니면 주위에 휘둘린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례로, 당시 관료들은 "진정한 현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고 보고 대학자 이황을 등용하기를 줄기차게 간청했는데, 나중에는 "뭐 적당한 자리 있음 알아보든가"라는 식으로 나왔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는 '현자를 초대하나 오지를 않는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불러도 오지 않는 이황에 대한 섭섭함은, 사림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볼 여지가 있다.

3. 가족

왕비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순회세자를 낳았지만, 순회세자는 명종 18년(1563)에 중병에 걸려 14살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그리하여 중종의 7남 덕흥대원군[6]의 3남이자, 명종 입장에선 조카인 하성군이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어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되었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죽은 뒤 다시 아들을 보기 위해 노력했는데, 꿈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어느 여자를 얻으면 아들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 여자를 후궁으로 삼았지만,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명종은 생전에 하성군을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확정하지는 않았으나 묵시적인 동의 정도는 한 것으로 추정한다. 명종은 일찍부터 하성군을 비롯한 덕흥군의 아들들을 수시로 궁에 불러 만나며 관계를 쌓아갔다. 또한 1565년(명종 20년) 9월에 명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이준경은 후계자 문제를 거론했다. 인순왕후 심씨는 평소 명종이 아끼던 하성군을 불러다가 병간호를 맡겼는데, 본래 국왕의 간호는 왕세자에게 맡겼으므로 이는 사실상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본래 이렇게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고, 조선시대에는 신하들이 멋대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은, 자칫하면 '택군'이라 하여 역모에 준하는 중죄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종은 의식을 회복한 뒤에도 딱히 이를 문제삼지 않았고, 이준경 등이 후계자 문제를 또 거론했을 때도 "당장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볼 때 명종 역시 하성군의 계승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하성군으로 확실하게 공인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는 불확실하다. 단순히 공인할 시기를 놓쳤을 뿐인지, 아니면 하성군의 계승 자체는 인정하되 '혹시라도 세자가 새로 태어날 수 있으니 좀 더 기다려 보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하성군으로 하자'라는 차선책의 일환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명종이 사망하기 직전, 이준경이 후계자를 누구로 할 지 묻자, 인순왕후는 '을축년에 결정한 대로 한다'라며 하성군으로 후계자를 최종 결정했다. 이 때 명종은 이미 병세가 깊어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인순왕후가 결정한 것이다. 여기서 인순왕후가 말한 '을축년의 결정'은 앞서 말한 하성군이 병간호를 했을 때를 말한다. 즉 인순왕후 또한 그 일을 계기로 이미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하들 또한 하성군의 승계에 대해선 큰 반발이 없이 순순히 수용했다. 또한 마침 하성군의 친부인 덕흥대원군은 일찍 사망했고 친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하성군이 공식 즉위하기 1달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게다가 정씨의 친정, 즉 하성군의 외가 역시 권세가 큰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척신들이 딱히 발호할 여지도 적었기 때문에 하성군에 대한 반발도 크지 않았던 것.

여담으로 순회세자의 정실 공회빈 윤씨는 남편이 가례를 올린 지 2년 만에 죽어 그 후 30여 년을 청상과부로 살아야 했다. 윤씨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임진년 3월 3일 죽어 남편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역 내에 위치한 순창원(順昌園)에 묻힐 예정이었지만, 그해 4월 말 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어가가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가다가 벽제관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내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왔을 때, 왜군에 의해 가매장한 무덤은 파헤쳐졌고 시신은 없었는데, 궁궐이 불에 탔을 때 같이 타버린 듯하다. 또 병자호란 때는 종묘에 있던 신주마저 없어진 불행한 여인이었다.

가족은 아니지만 정철과는 어린 시절 친구였다. 하지만 정철의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7]

4. 평가

명종은 조선의 정식 국왕 중 짧거나 임금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종묘 정전(正殿)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지지 못한 왕이기도 하다. 대신 한 단계 급이 낮은 영녕전(永寧殿) 동협에 위패가 경종, 추촌왕인 원종, 진종, 장조, 그리고 의민태자와 함께 있다.

22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동안 왕위에 있었는데도 심지어 추존왕인 문조(효명세자)나 망국의 군주인 순종에게도 밀리는[8] 등 존재감이 없다. 원래 위패를 옮기지 않고 매년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9] 신하들이 "☆☆대왕께오서는 나라에 큰 공이 있으므로 정전에 불천위로 모시옵소서."라고 주창하고, 왕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결정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명종이 후대의 신하들이나 임금에게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10]

2010년대에야 드러나는 인식은 "어쩌면 문정왕후윤원형의 실정이라고 간주한 것이 사실은 명종이 방치, 동조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 쉴드로 잊혀진 진정한 암군이 아니었느냐는 것. 명종이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싶을 때쯤 승하해버렸기 때문에 확실히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1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친정을 했으며, 건강 문제도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나 생긴 점 등으로 보아, 사관들이 명종의 실정을 직접 공격하긴 곤란해서 행실이 좋지 못했던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명종의 실정까지 모조리 떠넘겨 버렸을 가능성도 생각보다 높은 편이다. 종묘에서의 대접을 생각해 보면, 당대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리 좋은 임금으로 기억되지는 못했던 듯. 남긴 행적만 봤을 때도 괜찮은 왕이었다고 여길만한 실적도 거의 없다.

5.

파일:강릉.jpg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으로, 중전 인순왕후 심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자세한 것은 강릉 항목 참고.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신상옥 감독의 영화 내시에서는 후궁을 밤마다 갈아치우고 경복궁 지하에 고문실을 운영하는 변태 폭군으로 나온다. 배우는 남궁원. 역사 고증과 무관한데 대비가 고승이랑 가까웠다는 설정과 대비와 주상이 억울한 선비들을 도륙했다.는 설정 및 갑자기 죽어서 세자 없이 다른 종손이 이었다는 설정을 넣기 위해서 일부러 명종으로 하였다.
  • 남궁원이 내시감으로 나온 이두용 감독의 리메이크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명종이 아닌 가상의 조선 왕 길용우로 설정한다.
  • 대체역사물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는 주인공이 포함된 잉글랜드 사신단을 맞이해 임꺽정 토벌을 한 것을 치하하고, 조선 청자산삼을 구해주며, 그와 동시에 동래에서 1년에 1번 무역선이 와서 교역하는 걸 허가했으며, 명나라에 대한 조공사신이라는 증서를 발급해준다.[11] 결정적으로 이율곡이 포함된 사신단을 잉글랜드로 보낸다. 이를 통해 후일의 조선사에 영향을 끼칠지가 주목되는 요소.

7. 같이보기


[1] 군호는 인천의 옛 지명인 경원군(慶源郡)에서 유래했다[2]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허자 등 소윤 일파의 좌장들 중에서 윤원형과 이기를 제외한 소윤들은 "윤임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환상에 시달리다가 명종 즉위 3년도 못 되어 다 죽어버렸다. 유일한 생존자 허자의 경우엔,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을 탄핵했다가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숙청당했다. 윤원형 급의 세도를 누린 이기는, 그 존재가 윤원형에 묻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윤 유인숙, 유관 등을 죽인 명종 집권의 주역 중의 주역이다. 77세까지 장수하며 권세를 누렸지만, 명종의 친정 전에 죽었다. 명종이 본격적으로 무엇을 하기 시작한 당시에 남은 사람은 윤원형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종은 이량을 등용해 윤원형을 견제하는 등, 윤원형의 권세를 이미 문정왕후가 죽기 전에 많이 약화시켜 놓았다.[3] 근데 이량은 스스로 부패하여 전횡을 부리며 다른 외척들을 해치려다가, 열받은 명종에게 윤원형보다도 먼저 숙청당했다.[4] 그러나 왕의 말이 바로 대비에게 전해졌다는 건 그만큼 왕권이 약했다는 뜻이기는 하다.[5] 승하하기 전부터 유성이 떨어지는 등 갖은 징조가 있었다. 시약청을 설치하자마자 다음 날 새벽에 훙했다. 워낙 갑작스러워 대신은 물론, 어의들도 제대로 병석에 입시하지 못해, 명종실록의 이 부분을 보면, 사관의 신랄한 비판이 가득하다.[6] 덕흥대원군의 생모는 창빈 안씨. 생전의 군호는 덕흥군(德興君)이고 '대원군' 칭호는 선조 2년(1569)에 선조가 생부를 추증한 것이다.[7] 정철 항목을 보면, 본인의 누이가 명종의 형 인종후궁일 정도로 권세 있는 집안이다.[8] 다만 본래 정전에는 현 왕의 5대조까지는 모셔둔다.[9] 퇴계 이황 종가는 놀랍게도 500년(!)이 지난 지금도 퇴계의 제사를 모신다. 사실 경상북도 안동시에는 그런 불천위 제사가 한두 건이 아니다.[10] 이게 왜 문제냐면 명종 시절에도 을묘왜변이라는 (당시로서는) 대형 침공이 있었다. 굳이 불천위로 모시자면 이걸 가지고 밀어붙이면 되는데 안 했다는건 진짜 인정을 못 받았다는 거다. 다른 왕들의 경우엔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핑계를 써가지고 불천위에 모시는 것과 비교해보면 판이한 부분.[11] 이 시기의 조공은 공무역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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