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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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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colcolor=#fff> 종묘
宗廟
Jongmyo Shrine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서울 종로구 종로 157 (훈정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사우
수량/면적 200,545㎡
지정일 1963년 1월 18일
시대 조선 태조 4년(1396년)
소유단체 대한민국(국가유산청)
관리단체 국가유산청 종묘관리소
링크 공식 홈페이지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종묘
Jongmyo Shrine
Sanctuaire de Jongmyo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서울특별시 종로구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738
등재연도 1995년
등재기준 (ⅳ)[1] }}}
파일:attachment/jongmyopicturesmall.jpg
<colbgcolor=#bf1400> 조선왕조의 종묘 정전(宗廟 正殿) 전경
파일:external/jm.cha.go.kr/jm01_01_01_01.gif
종묘 안내도

1. 개요2. 조선의 종묘
2.1. 역사
2.1.1. 창건과 정립2.1.2. 증축과 중건2.1.3. 일제강점기2.1.4. 대한민국 시기
2.2. 건축
2.2.1. 정문
2.2.1.1. 종묘 어정
2.2.2. 향대청 일원2.2.3. 어숙실2.2.4. 정전 주변2.2.5. 악공청2.2.6. 영녕전 주변
2.3. 신주 배치도
2.3.1. 정전2.3.2. 영녕전
2.3.2.1. 중앙2.3.2.2. 서쪽 협실2.3.2.3. 동쪽 협실
2.4. 종묘제례2.5. 종묘 묘현례2.6. 관람 안내
3. 이야깃거리
3.1. 기원과 맥3.2. 한국사의 시조묘3.3. 한국사의 유교적 종묘
4. 논란 및 사건사고5. 여담6. 같이보기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2] 1-2번지에 자리한 조선 시대 역대 왕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유교 사당. 면적은 186,786 ㎡.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1963년 1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3] 1995년 12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9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4]

2. 조선의 종묘

파일:종묘_정전_2007년_촬영(출처___문화재청_대변인실).jpg
<colbgcolor=#bf1400> 조선왕조의 종묘
출처: 문화재청#
<colbgcolor=#bf1400> EBS에서 제작한〈문화유산 코리아 - 조선왕도 갈 수 없는 길? 종묘〉 영상

2.1. 역사

유교 국가에서 도읍에 갖춰져야 할 국가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궁궐, 종묘, 사직이 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사직은 땅과 곡식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종묘와 사직은 제례 공간으로서 엄격하게 정해진 조영 원리(이론)에 입각하여 조성해야 하는데, 이 원리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의 종묘는 중국에서의 제도 변화에 영향을 받거나, 고려 등 전조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 발전시키면서 현재는 중국, 베트남 등과 여러 면에서 다른 제도를 띠게 되었다.

우선, 도시 계획 상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궁궐에서 남면하는 임금을 기준으로 왼쪽(동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서쪽)에는 사직을 두어야 한다.[5] 우리나라에서는 지리법 등의 원리와 결합하여 중국 베이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격한 대칭성을 이루지 않고 각각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에 기대어 공간을 조성하면서 종묘가 경복궁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종묘의 조영 원리에는 먼저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라는 대원칙이 있다. 각각은 종묘에서 자신으로부터 몇 대까지(같은 항렬은 보통 1대로 친다.) 제사를 지내느냐를 나타낸다. 이에 맞추어 건물의 수나 신실(神室)의 수를 조정하여야 한다. 태조를 제외하고 대수(代數)가 다한 왕은 친진(親盡)이라 하여 신위를 종묘에서 빼내어 매안(埋安), 즉 땅에 묻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세실(世室) 또는 불천위(不遷位), 즉 업적이 큰 왕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종묘에 제사지내는 제도나 별묘(別廟)를 조성하여 그곳에 신위를 옮겨 다시 모시는 제도 등 대안적인 제도들이 등장하였다. 조선의 종묘는 둘을 적절히 조합하는 형태를 띠어 결과적으로 매안되는 신위는 (처음부터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폐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는 7실이었으나 세실이 누적되면서 세 차례 종묘가 증축된 결과로 현재는 19실이라는 유례없는 긴 사당이 완성되었다. 현재 종묘는 대한제국 이후로 7묘 형태이다. 고려 종묘는 제도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주로 9실을 기준으로 여러차례 신위 목록이 바뀌었다.

다음으로 소목제와 서상제가 있다. 전통적인 소목제(昭穆制)는 시조묘(始祖廟)를 중심으로 1대, 3대 등 홀수째 세대는 목(穆), 2대, 4대 등 짝수째 세대는 소(昭)라 하여 좌우에 번갈아가며 별도의 사당을 배치하는 제도이다. 이는 시조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으나 세실을 위한 공간이 애매해지고 부지를 많이 차지하여 훗날 사당 건물을 하나만 두고 그 안에 신실을 여럿 두는 동당이실(同堂異室) 제도가 들어섰는데, 여기에서는 서쪽에서부터 (태조부터) 순서대로 신위를 모셔서 서상제(西上制)가 된다. 조선 종묘는 고려 종묘 때처럼 서상제이다.

2.1.1. 창건과 정립

1. 태조 & 정종
새 왕조의 태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새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태조의 즉위 교서 제 1항이 바로 종묘와 사직의 제도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이었으며[6], 이는 옛 제도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새 왕조의 종묘사직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태조는 처음부터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천도 계획이 미뤄지자,[7] 태조는 개경 내에서(당시 종묘는 성 밖에 있었다.) 새로운 입지를 찾아 지으려 하였다. 이마저도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하자[8] 결국 기존의 태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다.[9] 그러나,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천도가 확정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궁궐(경복궁), 사직과 함께 태조 4년 9월 새로운 종묘가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담 안쪽에 대실 7칸[10],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이 있었고 담 바깥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 5칸, 남행랑 9칸, 재궁 5칸 규모였다.[11]

제도적으로는 5묘(시조묘 + 당대 군주의 4대조)였으며, 고려 종묘의 전통을 이어받아 동당이실(同堂異室)[12], 서상(西上)[13] 제도를 취했다. 이 때 종묘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14]을 모셨다.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은 당시 여론 등을 반영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종묘를 한양에 두고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경에 다시 종묘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대신 매번 대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15] 이러한 상황은 태종이 다시 한양에 환도하면서 해소되었다.

2. 태종
태종은 조선 종묘의 건축적 특성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하였다. 태종은 종묘 앞에 인공으로 가산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한 뒤 一자 형식의 종묘 정전에 양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월랑을 잇대어 건축해 가운데가 길쭉한 ㄷ자 형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월랑을 대는 것은 옛 제도(중화식)에 어긋나며 중국 사신들이 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웃을지 모른다고 대언 김여지가 간언하자[16] 태종은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느냐? 혹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러한가 보다 하겠지, 어찌 비난하고 웃겠느냐?"하고는 그대로 월랑(越廊)을 짓게 했다. 또한, 공신당이 비루하다 하여 크게 수리하였다.[17]

3. 세종
세종은 조선 종묘의 시조묘를 확정하는 등 제도 상 주요 원칙을 마련하였다. 즉위 초만 해도 종묘에는 정전(正殿)만 있었으나 세종 2년(1419년)에 정종(당시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 신위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 기존의 정전 5실이 만원[18]이 되자, 예조에서 조사한 결과
(1) 목조를 시조묘로 삼고, 익조의 신위를 협실(夾室)에 옮길 것 (송나라 신종[神宗]의 예)
(2) 별묘를 지어 태조 4대조의 신위를 하나씩 이안(移安: 신위를 옮김)할 것 (당나라 덕종[德宗], 송나라 영종[寧宗]의 예)
(3) 별묘를 짓지 않고 매안(埋安: 땅에 신위를 묻음)할 것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원칙)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으며[19], 대신들의 최종 검토 결과 다음과 같이 (송나라 영종의 예를 따른) 의견이 모이자 세종은 이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1) 조선의 시조묘는 태조이다.
(2) 태조의 4대조는 별묘(영녕전永寧殿)에 모신다.
이로써 조선 종묘 제도의 중요한 원칙이 확립되었다.[20]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21]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22]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명나라, 청나라는 별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종묘-별묘 체제는 현 조선 종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2.1.2. 증축과 중건

4. 연산군
시간이 지나면서 종묘의 신실은 점차 채워져 연산군 1년에는

[태조|태종|세종|문종|세조|덕종|예종]

과 같이 모든 대실(大室)이 가득찼고, 태조 1세, 태종 1세, 세종 1세, 문종·세조 1세, 덕종[23]·예종 1세로 5세(5묘 원칙)가 가득차 다음 대인 성종을 모시는 데 문제가 발생하였다.[24] 예조에서는 원래 태종을 옮길 차례(친진親盡)이나 대업을 세운 태종을 옮길 수 없으므로 문종을 협실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불천지주(不遷之主: 옮기거나 묻지 않고 종묘에 계속 모시는 신위)가 탄생하였다.[25] 시간이 흐르면서, 불천지주는 대업을 이룬 군주에게 해당된다는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 직계를 따라 모두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


5. 명종
중종이 승하했을 당시, 종묘는 다음과 같이 채워져 있었다.

[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

태조, 태종, 세종은 불천지주였으며 세조, 덕종/예종, 성종은 각각 1세대를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을 모실 공간이 없었다. 조선은 5묘제였으므로 불천지주는 옮기지 못하고, 그 이하도 아직 옮길 차례(친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종묘 증축이 이루어졌다.[26] 이로써 종묘는 11칸이 되었으며, 조선 종묘가 지금처럼 크게 길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제도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웠으며 명백히 종묘 제도의 "이론"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종묘 제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러한 논란은 종묘가 한 번 불타는 선조 대에 가장 크게 일어났다.

6. 선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양으로 들어온 왜군들 중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 내 종묘에 집결,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갑자기 비명횡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였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키고 남별궁[27]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종묘를 제외한 궁궐들(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방화 시기와 주체는 명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에 반해, 종묘는 그 방화 시기와 주체가 명확하다.

한양을 수복한 후 종묘를 재건하는 논의의 일부로서, 선조의 발제 하에 홍문관, 예조 등을 중심으로 조선 종묘의 기존 제도를 역대 왕조의 종묘 제도와 비교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28]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 종묘는 수많은 변칙을 수용하면서 운용되었기에 이를 계기로 고제(특히, 주나라)를 회복할지, 혹은 지금까지 조선의 전통을 유지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29]

(1)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이는 주나라 본래의 제도인 각 항렬[30]을 다른 건물에 모시는 방식(일세일묘一世一廟)[31]에서 벗어나 한명제(漢明帝)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희가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주나라 제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해(예조, 홍문관), 기존 제도가 오래되었고 종묘 외에 영녕전까지 모두 고쳐야 하며 지형을 살폈을 때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이항복, 심희수 등 대신)가 충돌하였다.

(2) 제사를 지내는 전(殿)이 없는 것 역시 논란이었다. 명·청 태묘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건물(전殿)과 신주를 모시는 건물(침寢)이 따로 있어서 제사 때마다 신주를 옮겨다 치렀다(전전후침前殿後寢). 조선의 경우엔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실내에서 바로 제사를 치렀다.

(3) 조선의 종묘는 신주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서상(西上)제와 결합하여 같은 당(堂) 안에서 태조가 가장 뒤에 위치한 형세가 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논란이 매우 거셌으나 선조는 결국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32] 다만 신주를 남향으로 고치는 것, 제사 공간을 넓히는 것 등의 작은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시 11칸짜리 종묘를 짓기로 결정되었으며.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겨우 끝났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에 4칸을, 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이것이 정전의 마지막 증축이다.

영녕전은 선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후 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파일:종묘 정전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정.jpg
<colbgcolor=#bf1400> 1909년 종묘 정전[33]

7. 고종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조선 종묘는 5묘제에서 7묘제로 바뀌었으며, 시조묘인 태조는 태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할 시점에는 정말 우연히도 영녕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실에 의민태자자행비의 신위를 모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전과 영녕전의 감실이 정확히 딱 채워져서 감실이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되었다. 영친왕 내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위를 추가할 일도 없기 때문에 마치 딱 맞춘 것처럼 일이 된 것.

[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선조|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

현재 조선의 종묘는 형식적으로는 태조 + 순조~순종의 7묘제를 따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천위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나머지 신위 또한 영녕전에 따로 모시므로, 매안(埋安)되는 신위 없이 전부 종묘에 그대로 모시는 형태가 되었다.

한편,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는 임금이 아닌 일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므로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숙종대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숭 복위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왕조 재위 임금 신위 총 25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정식으로 재위한 임금은 아니지만 덕종, 원종, 장조, 문조추존 임금들도 종묘에 모셔져 있다.

2.1.3. 일제강점기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경성부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는 목적으로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도로를 개통하려 했다. 그러나 순종이 그것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결사반대해 조선총독부도 어쩌지 못하다가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마자 영친왕의 동의를 얻어 바로 착공하고 완공시켜버렸다. 이 도로가 바로 지금의 율곡로.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는 콘크리트 육교로 연결되었는데, 2011년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이 구간을 복원하면서 육교를 철거했다. 이때 끊어져 버린 구간이 다시 이어지는 데까지는 90년이나 걸렸다.

조선총독부에서 종묘 담장에 새긴 '쇼와 8년 3월 개축'(1933년)이라는 문구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이후, 안내판을 붙인채 존치하는 쪽으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모든 문구 위치에 붙은 것은 아니라 이후 국감에서 다시 문제제기가 되었다. #

2.1.4. 대한민국 시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종묘에 보관되던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 왕실의 어보들이 유실되었다. 국새 29과, 어보 47과가 도난당했다. 일부는 한국인들이 훔쳐가고 나머지는 미군이 약탈해갔다.[34]

1985년 종묘광장공원(宗廟廣場公圓)이 조성되었다.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한 정리 사업이었다. 그리고 1991년 민자 유치로 종묘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면서 임금이 종묘에 배향할 때 쓰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마르고 상당한 지하 유물이 멸실되었다. 당시 관점에는 비는 공간을 실용적으로 쓰자는 목적이었겠지만, 현재 기준에서 보면 세계유산 종묘 권역에 주차장을 건설한 것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2011년 5월 3일부터 853억 원을 들여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율곡로를 지하화하여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2010년 10월 착공한 율곡로 구조개선 공사 과정에서 문화재인 궁궐 담장 기초석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해 공사가 연기되어 2014년말 복원 완료 예정이었다. 그러나 설계, 공사 방식 변경으로 2020년 12월로 연기되었다.

종묘의 정문 바로 앞에는 1985년부터 종묘광장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탑골공원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들의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각종 집회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어서 종묘 방문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었다. 1985년 공원 조성 당시 부터 공연장인 국악정, 대형버스 주차장, 무료급식소 등의 시설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데다가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들이 등장하면서 각종 소음과 고성방가, 무료급식소로 인해 꼬이는 노숙자들[35]로 난장판이었다. 종묘가 일종의 성역인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었을 정도. 결국 서울시가 2007년 종묘광장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국악정 및 매점, 자판기 등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시설을 일부 철거하고 광장 내부의 버스 주차장과 무료급식소를 외부로 이전했다. 그리고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등의 불법 상행위를 단속했다. 이어서 성역화 사업으로 어도, 홍살문, 하마비, 어정, 피맛길, 순라길 등의 문화재를 원형 복원 예정이며 발굴 조사 중이다. 원래 계획은 2010년경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종묘 앞 발굴 조사에서 예상 이상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와 2010년 발굴 조사 지역을 한 차례 확대하면서 2014년까지도 계속 발굴 조사 중이다. 유물 발굴로 종묘광장 정비사업은 2016년 12월까지 계획 된 상태다.

2016년 3월 말 종묘전교 복원 및 제세동천 복원 및 녹지 정비를 완료한 종묘 서측 광장을 개방했다. 이후 2016년 말까지 종묘 동측 광장을 신성림 조성 및 정비를 진행 했다.

2020년 5월부터 종묘 정전이 30년 만에 보수공사를 가지면서, 2022년에 재개방을 할 예정이다.# 이번 공사는 2015년 안전 점검 당시에 일부에서 물이 새거나 파손이 된 부분이 많아서 전면 보수를 할 예정이다.[36] 이 때문에 정전에 모셔져 있던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가 2021년 6월 5일창덕궁구 선원전으로 이전하는 이안식을 거행했다.[37] 관련 기사 1관련 기사 2

2022년 7월 20일,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이 시작(2011년 5월)된 지 11년, 율곡로가 개통된 지 90년 만에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로 8천㎡ 가량 수풀을 덮어 끊어졌던 녹지 축을 잇는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2일에 개방되었다. 새로 조성한 녹지공간엔 참나무와 소나무, 국수나무 등, 우리 고유의 나무를 심었으며 왕이 종묘를 방문할 때 이용했던 ′북신문′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위로 길이 나 있어서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 사이에는 개방되어 들어갈 수 있으며, 북신문 앞에서는 철담장 너머로 작게 창경궁이 내다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를 오가듯 창경궁과 종묘 사이도 바로 오갈 수 있도록 할 듯. 참고로 창경궁에 일제가 설치한 위락 시설을 철거하 이름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공사 완료하여 재 개방 된 이후, 율곡로가 아래 있고 다리로 연결 되었던 시절에도 종묘와 창경궁이 모두 개방된 시간에 한해서 어느 쪽에서든 자유롭게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다. 통로 개방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달랐지만 대략 일몰 전이었으므로, 그 이후엔 종묘 또는 창경궁 안에 더 머물러 있을 수는 있었다. 통로(=육교)그냥 열려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한 쪽에 철문은 있었다. 당시엔 상시 입장이었고, 입장료도 무료였다.

2.2. 건축

2.2.1. 정문

사진 설명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3.jpg
외대문(外大門)
종묘의 정문이다.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어 있고 그 좌우로는 종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판문의 상부에는 높은 홍살을 설치하고 하부에는 X자 모양의 가래를 덧대어 이 너머가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냈다.

원래 외대문은 전면 중앙에 난 돌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노면이 높아져 땅속에 묻히고 한동안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었다. 이후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매몰된 외대문의 계단을 발굴하면서#, 외대문 주변을 전체적으로 낮춤으로써 외대문의 계단을 노출시켰다. 따라서 현재 외대문으로 입장할 때엔 돌계단을 이용한다.#

창엽문(蒼葉門)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종묘의궤』 등 조선시대 공식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고종 시기에 활동한 역술가 정환덕(鄭煥悳)이 지은 남가몽(南柯夢)에서 한 설화에 엮인 형태로 처음 발견되는데, 창엽(蒼葉)은 이름 그대로는 "왕조가 푸른 잎처럼 무성하게 번성하라"는 뜻이지만 두 글자를 파자(破字)할 시 각각 28임금(二十八君), 20세(二十世)가 되어 왕조의 수명이 곧 다함을 예견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로부터 "창엽문"은 왕조 말기에 흔히 나타나는 왕조의 운명과 관련된 도참(圖讖) 사상과 연관되어 나타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실제 조선 왕조는 영친왕까지 합하면 총 28명의 왕이 재위했으며, 20대(代)로 끝이 났다. 이외에 정전의 칸 수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처럼 종묘와 관련해서는 왕조의 역사나 운명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2.2.1.1. 종묘 어정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55호 56호 57호
정간공 이명 묘역 종묘 어정 우암 송시열 집터

사진 설명
파일:종묘 어정.jpg
어정(御井)
종묘 앞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로, 왕들이 종묘를 참배하러 올 때 마셨던 우물이라 해서 어정이라 불린다.

2.2.2. 향대청 일원

사진 설명
파일:external/dunggu.com/jongmyo2.jpg
망묘루(望廟樓)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 평소에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파일:종묘_향대청 문화재청.jpg
향대청(香大廳)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향, 축, 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 원래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각각의 향청이 따로 있었는데, 현재는 정전의 향청만 남아 있음.
파일:종묘_공민왕_신당 문화재청.jpg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공민왕노국대장공주를 모신 신당. 망묘루 동쪽에 있다. 하나의 종이에 두 위의 초상화를 같이 그려 놓았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명령을 내려 같이 세웠다고 한다. 신당 내부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駿馬圖) 세 점도 같이 있다. 사진 링크

2.2.3. 어숙실

사진 설명
파일:종묘_재궁 문화재청.jpg
어숙실(御肅室)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왕세자 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2.2.4. 정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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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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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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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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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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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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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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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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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천마총 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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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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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1991)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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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파일:종묘_정전_전경(여름) 문화재청.jpg
정전(正殿)
대한민국의 국보 제227호이다.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좁은 의미로는 이 건물이 곧 종묘이다. 태조를 비롯하여 임금의 신주 19위, 왕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남쪽 중앙에는 혼과 향로를 모시는 신문(神門)이,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東門)이, 서쪽에는 악공, 일무원, 종사원 등이 출입하는 서문(西門)이 있다.

정전의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를 조성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정전의 신실로 통하는 신로(神路)가 남북으로 나 있어 사묘 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낸다.

정전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이며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단청도 최소화해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길이가 101 m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단일 목조건축으로는 가장 길다.[38] 신주로 모시는 임금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계속 방이 증축되어서[39] 이러한 길어졌는데, 건축물의 조성 방법 중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전의 기둥을 잘 보면 미묘하게 오래된 정도가 다르다. 서쪽이 오래된 것. 신위는 가운데에 태조를 모시고 좌우에 후대 임금을 소(昭)와 목(穆)으로 삼아 배치하는 소목 제도가 아니라 서상(西上)의 원칙에 따라 서쪽부터 태조 이하 후대 임금을 모셨다.

'정전'이라는 이름은 여러 채로 구성된 건물군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지만, 종묘의 정전은 특정한 이름 없이 그냥 정전이다. 종묘의 정전에는 현판이 없다.[40]

여담이지만 굉장히 큰 건물이라 어지간한 전문가용 렌즈로도 정전의 전체 모습 촬영이 불가능하다. 건물 크기도 크기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거리가 내삼문까지로 한정되어서 그렇다. 위의 사진처럼 건물 전체가 나온 사진들은 따로 찍어서 현상하며 이은 것들이다.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12.jpg
칠사당(七祀堂)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서쪽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국행지신(國行之神, 도로를 주관하는 신), 공려지신(公厲之神, 후사가 없는 제후의 신), 국문지신(國門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중류지신(中霤之神, 당실과 거처를 주관하는 신), 사조지신(司竈之神, 음식의 일을 주관하는 신), 사호지신(司戶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사명지신(司命之神, 사람의 선악에 따라 응보하는 신) 일곱 소신의 위패를 모시고 사계절에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계절에 따라 봄에는 사명과 호,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문과 여, 겨울에는 행과 중류를 모신다. 이들 중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五祀)라고 한다.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13.jpg
공신당(功臣堂)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자리한 정면 1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시간이 흐르면서 정전이 증축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신당 또한 증축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임금의 생존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제1대 태조의 공신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의 공신 효문공(孝文公) 서정순(徐正淳)까지 모두 제왕 19위에 공신 83위의 위패가 모셔졌다.

종묘의 공신당에 모셔지는 공신은 '배향공신'이라 해서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공을 세운 28종류 공신과 성격이 다르다. 생전에 공적이 많은 사람을 해당 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선정한 건데, 이완용이 순종 묘정에 배향된 적도 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배향공신 문서 참조.

정전과는 달리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다.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추존 임금이기 때문에 배향공신이 없는데, 영녕전에 모셔지는 후대 임금들이 공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조상에게 올리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공신당이 없다고 해도 엄연히 영녕전에 모셔진 임금의 배향공신까지 포함하여 총 92명을 종묘 배향공신으로 간주한다.
파일:external/www.heritage.go.kr/t01h02a000_m012a.jpg
수복방(守僕房)
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 방향으로 지어진 4칸짜리 맞배지붕 건물. 수복(守僕)이란 조선시대 종묘서(宗廟署)나 향실을 관장하던 교서관을 비롯해 단(壇), 능(陵), 궁(宮) 등에 소속되어 청소하는 일을 담당한 잡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수복방이란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 수복방의 앞에는 제사 때 음식 차림을 하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파일:external/mw2.google.com/16820034.jpg
전사청(典祀廳)
정전의 동북쪽에 자리하며 종묘의 제사에 사용되는 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곳. 부엌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주(神廚)라고도 부른다. 마당을 중심으로 주위에 ㅁ자형 건물을 배치했다. 마당에는 제수를 준비하던 돌절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정전에 올릴 제수음식을 미리 검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 행각에는 온돌과 마루방이 있다.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9.jpg
제정(祭井)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 전사청 동쪽에 자리하며, 네 면을 담장으로 두르고 남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일각문이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갑다고 한다.

2.2.5. 악공청

사진 설명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21.jpg
악공청(樂工廳)
종묘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준비, 연습하고 대기하는 곳. 정전과 영녕전 바깥 서남쪽에 각각 있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있다.[41]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보다 규모가 작은 편.

2.2.6. 영녕전 주변

사진 설명
파일:종묘_영녕전 문화재청.jpg
영녕전(永寧殿)
대한민국의 보물이다. 정전에서 옮겨진 제왕과 왕후, 그리고 추존된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별묘(別廟)로 정면 16칸, 측면 4칸의 건물.

영녕전(永寧殿)이라는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國以永寧 爰及苗裔(나라가 길이 평안하게 후손에게 물려지리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세종 3년(1421년)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42]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조금 덜 중요한 임금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 재위 중인 임금을 기준으로 5대 이전의 임금들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 원칙이고, 그 중 공적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인정된 임금들만 예외적으로 정전에 계속 모셔두는 것이다. 영녕전에는 제왕의 신주 16위, 왕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의 부재 처리나 건물 규모는 정전보다 약간 작지만 전반적인 공간 구성은 정전과 비슷하다.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20.jpg
제기고(祭器庫)
제례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영녕전 동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2.3. 신주 배치도

부묘일은 양력으로 환산. 참고. 배향공신 문서 참조.

2.3.1. 정전

묘실 인물 출생 사망 부묘
1실 제왕 태조(太祖)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1335.10.27. 1408.06.18. 1410.08.26.
왕후 승인순성신의고황후(承仁順聖神懿高皇后) 1337.09. 1391.10.21. 1410.08.26.
순원현경신덕고황후(順元顯敬神德高皇后) 1356.07.12. 1396.09.15. 166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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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 1346 1405.07.23. 1410.08.12.
경무공(景武公)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1340. 1408.10.24. 1410.08.26.
충경공(忠景公) 영의정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 1351. 1419.12.30. 1421.12.03.
경무공(景武公)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 1398.10.06. 1421.12.03.
양렬공(襄烈公)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 1331. 1402.05.10. 1410.08.26.
강무공(剛武公) 의령군(宜寧君) 남은(南誾) 1354. 1398.10.06. 1421.12.03.
충정공(忠靖公)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1347. 1396.10.16. 1410.08.26. }}}}}}}}}
2실 제왕 태종(太宗)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1367.06.13. 1422.05.30. 1424.08.06.
왕후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1365.07.29. 1420.08.18. 142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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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 1347. 1416.
충무공(忠武公)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 1414.
익경공(翼景公) 우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鄭擢) 1363. 1423.
양도공(襄度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43] ? 1417.
경절공(景節公) 계성군(鷄城君) 이내(李來) 1362. 1416. }}}}}}}}}
3실 제왕 세종(世宗)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1452.04.29.
왕후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145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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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익성공(翼成公) 영의정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희(黃喜) 1363. 1452.
정렬공(貞烈公) 영중추부사 최윤덕(崔潤德) 1376. 1445.
문경공(文敬公) 좌의정 허조(許稠) 1369. 1439.
문희공(文僖公) 좌의정 신개(申槩) 1374. 1446.
문정공(文靖公) 이조판서 이수(李隨) 1374. 1430.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1394. 1462.
정효공(靖孝公)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 1396. 1486. }}}}}}}}}
4실 제왕 세조(世祖)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1471.01.06
왕후 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 148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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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익평공(翼平公) 좌의정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람(權擥) 1416. 1465.
양절공(襄節公)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 1403. 1456.
충성공(忠成公)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1415. 1487. }}}}}}}}}
5실 제왕 성종(成宗)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1497.03.14.
왕후 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1497.03.14.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153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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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 1417. 1475.
충정공(忠貞公) 영의정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1402. 1487.
충정공(忠貞公) 좌의정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응(洪應) 1428. 1492. }}}}}}}}}
6실 제왕 중종(中宗)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1547.02.02.
왕후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1739.06.11.
선소의숙장경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1547.02.02.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156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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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무열공(武烈公) 영의정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박원종(朴元宗) 1467. 1510.
충정공(忠定公) 영의정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1461. 1513.
문정공(文定公) 영의정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유순정(柳順汀) 1459. 1512.
문익공(文翼公)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 1538. }}}}}}}}}
7실 제왕 선조(宣祖)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1610.06.02.
왕후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1610.06.02.
소성정의명렬정숙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正肅光淑莊定仁穆王后) 163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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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충정공(忠正公)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1499. 1572.
문순공(文純公) 좌찬성 이황(李滉) 1501. 1570.
문성공(文成公) 우찬성 이이(李珥) 1536. 1584. }}}}}}}}}
8실 제왕 인조(仁祖)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1651.08.21.
왕후 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 1651.08.21.
자의공신휘헌강인숙목정숙온혜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淑穆貞肅溫惠莊烈王后) 169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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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1547. 1634.
문정공(文貞公) 영의정 신흠(申欽) 1566. 1628.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 1571. 1648.
충정공(忠定公)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1557. 1633.
충익공(忠翼公) 영의정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 1575. 1643.
충정공(忠正公)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44] 1580. 1637.
정효공(貞孝公)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 1592. 1656. }}}}}}}}}
9실 제왕 효종(孝宗)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1661.08.02.
왕후 효숙정범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貞範敬烈明獻仁宣王后) 167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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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정공(文正公)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1570. 1652. 1661.08.02.
문경공(文敬公) 예조판서 김집(金集) 1574. 1656. 1661.08.02.
문정공(文正公) 좌의정 송시열(宋時烈) 1607. 1689.
충경공(忠敬公)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1622. 1658.
문충공(文忠公)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1628. 1692.
문정공(文貞公)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1630. 1687. }}}}}}}}}
10실 제왕 현종(顯宗) 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1676.11.20.
왕후 현열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168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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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충익공(忠翼公)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1602. 1673.
충숙공(忠肅公) 병조판서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 김좌명(金佐明) 1616. 1671.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1629. 1689.
문충공(文忠公)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1633. 1687. }}}}}}}}}
11실 제왕 숙종(肅宗)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協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1722.09.21.
왕후 광렬선목혜성순의효장명현인경왕후(光烈宣穆惠聖純懿孝莊明顯仁敬王后) 1722.09.21.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1722.09.21.
혜순자경헌열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휘정정운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正運定懿章穆仁元王后) 175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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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1629. 1711.
문순공(文純公) 좌의정 박세채(朴世采) 1631. 1695.
충정공(忠正公) 우의정 윤지완(尹趾完) 1635. 1718.
문정공(文貞公)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1646. 1715.
문충공(文忠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 1634. 1684.
문효공(文孝公) 우의정 김만중(金萬重) 1637. 1692. }}}}}}}}}
12실 제왕 영조(英祖)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1778.05.27.
왕후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원렬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元烈端穆章和貞聖王后) 1778.05.27.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禧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 18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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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충헌공(忠獻公)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1648. 1722.
충정공(忠貞公)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1650. 1735.
문충공(文忠公)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1664. 1736.
문충공(文忠公) 좌의정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 1680. 1732.
충정공(忠靖公)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1682. 1759. }}}}}}}}}
13실 제왕 정조(正祖)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선무열성인장효선황제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1802.09.05.
왕후 장휘예경자수효의선황후(莊徽睿敬慈粹孝懿宣皇后) 18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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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충공(文忠公)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1728. 1799.
충문공(忠文公)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1730. 1796.
충문공(忠文公) 영돈녕부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 1832. }}}}}}}}}
14실 제왕 순조(純祖)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1837.02.11.

왕후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숙황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肅皇后) 185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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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충정공(忠正公) 영의정 이시수(李時秀) 1745. 1821.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김재찬(金載瓚) 1746. 1827.
문정공(文貞公) 우의정 김이교(金履喬) 1764. 1832.
문충공(文充公) 이조판서 조득영(趙得永) 1762. 1824.
충정공(忠正公)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 1788. 1836.
충경공(忠敬公) 영동녕부사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1776. 1846. }}}}}}}}}
15실 제왕 문조(文祖)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령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1837.02.11.
왕후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익황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翼皇后) 1892.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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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헌공(文獻公)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1760. 1840.
문헌공(文獻公) 이조판서 김로(金鏴) 1783. ?
문숙공(文肅公) 이조판서 조병구(趙秉龜) 1801. 1845. }}}}}}}}}
16실 제왕 헌종(憲宗)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1851.09.01.
왕후 단성수원경혜정순효현성황후(端聖粹元敬惠靖順孝顯成皇后) 1851.09.01
명헌숙경예인정목홍성장순정징장소단희수현의헌강수유령자온공안효정성황후(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徵莊昭端禧粹顯懿獻康粹裕寧慈溫恭安孝定成皇后) 190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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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익공(文翼公) 영의정 이상황(李相璜)[45] 1763. 1842.02.06.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조인영(趙寅永) 1782. 1851.01.07. }}}}}}}}}
17실 제왕 철종(哲宗)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1866.03.22.
왕후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장황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章皇后) 188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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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정문공(正文公) 증 영의정 김수근(金洙根) 1798. 1854.12.23.
충간공(忠簡公) 좌의정 이헌구(李憲球) 1784. 1858.07.07.
효희공(孝僖公) 익평군(益平君) 이희(李曦) 1824. 1863. }}}}}}}}}
18실 제왕 고종(高宗)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1921.03.31.
왕후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 19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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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충정공(忠正公) 증 의정대신 민영환(閔泳煥) 1861.08.07. 1905.11.30.
문익공(文翼公)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1807.10.27. 1877.02.09.
문경공(文敬公) 우의정 신응조(申應朝) 1804. 1899.10.23.
문정공(文貞公) 행 좌찬성 이돈우(李敦宇)[46] 1801. 1884. }}}}}}}}}
19실 제왕 순종(純宗) 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1874.03.25. 1926.04.25. 1928.07.06.
왕후 경현성휘순명효황후(敬顯誠徽純明孝皇后) 1872.11.20. 1904.11.05. 1928.07.06.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 1894.09.19. 1966.02.03. 196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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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헌공(文獻公) 봉조하 송근수(宋近洙) 1818 1903.01.08. 1940.03.11.
효문공(孝文公) 중추원의장 서정순(徐正淳) 1835. 1908.10.01. 1940.03.13.
충문공(忠文公) 궁내부 특진관 김병시(金炳始) 1832. 1898.09.16. [47]
충숙공(忠肅公)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 1895.10.08. [48]
(시호 없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49] 1858.07.17. 1926.02.12. 1940.03.12. }}}}}}}}}

2.3.2. 영녕전

2.3.2.1. 중앙
묘실 인물 출생 사망 부묘
1실 제왕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
왕후 효공왕후(孝恭王后)
2실 제왕 익조(翼祖) 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
왕후 정숙왕후(貞淑王后)
3실 제왕 도조(度祖)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
왕후 경순왕후(敬順王后)
4실 제왕 환조(桓祖)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
왕후 의혜왕후(懿惠王后)
2.3.2.2. 서쪽 협실
묘실 인물 출생 사망 부묘
5실 제왕 정종(定宗)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1422.01.11.
왕후 순덕온명장의정안왕후(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 14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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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안양공(安襄公)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 1404. 1422.01.11. }}}}}}}}}
6실 제왕 문종(文宗)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1454.08.09.
왕후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 1454.08.09.
151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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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효공(文孝公) 영의정 하연(河演) 1376. 1453. }}}}}}}}}
7실 제왕 단종(端宗)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1699.01.27.
왕후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 1699.01.27.
8실 제왕 덕종(德宗)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1476.02.05.
왕후 인수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 1506.
9실 제왕 예종(睿宗)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1472.02.20.
왕후 휘인소덕장순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 1472.02.20.
인혜소휘제숙안순왕후(仁惠昭徽齊淑安順王后) 150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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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헌공(文憲公) 영의정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박원형(朴元亨) 1411 1469. }}}}}}}}}
10실 제왕 인종(仁宗)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1547.09.30.
왕후 효순공의인성왕후(孝順恭懿仁聖王后) 158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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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문희공(文僖公)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1476. 1549.
문경공(文敬公) 좌의정 김안국(金安國) 1478. 1543. }}}}}}}}}
2.3.2.3. 동쪽 협실
묘실 인물 출생 사망 부묘
11실 제왕 명종(明宗)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1534.07.03. 1567.08.02. 1569.10.01.
왕후 선열의성인순왕후(宣烈懿聖仁順王后) 1532.06.27. 1575.02.12. 1577.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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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충혜공(忠惠公) 영의정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沈連源) 1491. 1558.
문원공(文元公) 좌의정 여성군(驪城君) 이언적(李彦迪) 1491. 1553. }}}}}}}}}
12실 제왕 원종(元宗) 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1635.05.06.
왕후 경의정정인헌왕후(敬懿貞靖仁獻王后) 1635.05.06.
13실 제왕 경종(景宗)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1726.11.06.
왕후 공효정목단의왕후(恭孝定穆端懿王后) 1726.11.06.
경순효인혜목선의왕후(敬純孝仁惠穆宣懿王后) 173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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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혜정공(惠定公) 영의정 이유(李濡) 1645. 1721. 1726.11.06.
충문공(忠文公) 병조판서 민진후(閔鎭厚) 1659. 1720. 1726.11.06. }}}}}}}}}
14실 제왕 진종(眞宗) 온량예명철문효장소황제(溫良睿明哲文孝章昭皇帝) 1778.05.27.
왕후 휘정현숙효순소황후(徽貞賢淑孝純昭皇后) 1778.05.27.
15실 제왕 장조(莊祖)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 1899.11.25.
왕후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의황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懿皇后) 189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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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인물 출생 사망 배향
정헌공(正獻公) 우의정 민백상(閔百祥) 1711. 1761. 1899.12.07.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이종성(李宗城) 1692. 1759. 1899.12.07. }}}}}}}}}
16실 제왕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 영왕(文仁武章至孝明暉懿愍皇太子 英王) 1897.10.20. 1970.05.01. 1973.05.06.
왕후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 1901.11.04. 1989.04.30. 1991.

2.4. 종묘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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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종묘 묘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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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관람 안내

관람일 및 휴관일
자유 관람일 매주 토, 일요일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
공휴일
일요일,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평일과 동일하게 해설 진행
토요일, 공휴일: 한국어 해설만 진행
시간제 관람일 자유관람일, 휴관일 外 입장 3일 전 ~ 1개월 전 예약 가능 해설 필수
휴관일 매주 화요일[50]
비고 정전(正殿) 영역 관람 불가 (사유: 보수공사, 기간: 2024년 하반기까지)
월별 매표 및 관람 시간대
2월~5월 매표 09:00~17:00 관람 09:00~18:00
6월~8월 매표 09:00~17:30 관람 09:00~18:30
9월~10월 매표 09:00~17:00 관람 09:00~18:00
11월~1월 매표 09:00~16:30 관람 09:00~17:30
관람 요금
내국인 만 25세 ~ 만 64세 이하 1,000 원
만 24세 이하 또는 만 64세 이상 무료
신분증 지참 필수
외국인 만 19세 이상 ~ 만 64세 이하 1,000 원
만 7세 이상 ~ 만 18세 이하 500 원
※ 단체 할인은 없으며, 상단 표는 2022년 6월 기준.

평일에는 1시간 간격으로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반드시 단체 인원을 꾸려야 하는 건 아니고, 해당 시간대에 입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같이 들어가고 나오는 방식이다. 물론 단체 인원을 꾸려도 관계 없다.

시간제 관람은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12월 말부터 중단되었다가 2022년 6월 1일부터 거리두기 해제와 함께 재개되었다. #, 자유관람일도 개방하고 있으므로 시간대와 휴관일을 잘 보고 방문하여야 한다.

3. 이야깃거리

3.1. 기원과 맥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묘의 시초는 옛 중화권 국가인 (은)나라에서 처음 그 개념을 정립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주나라 대에 이르러 《예기》에 실린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의 개념이 잡혔다.[51]

주나라식 왕실 예법을 기록한 예기에는 "천자(天子)는 7묘, 제후(諸侯)는 5묘, 대부(가신)는 3묘, 그 밑에는 따로 사당을 두지 않는다." 라고 되어있다. 종묘의 세부 규칙은 더 많지만 기본적으로 이 문장이 종묘의 대표적 규칙이 되었다. 종묘에 안치된 천자는 묘호시호를 올려 찬양한다. 제후와 대부는 천자가 내려준 시호로만 공덕을 찬양한다. 묘호는 당나라 이전까지는 큰 공이 있는 천자에게만 올렸는데, 당 이후로는 모든 천자가 가지게 되었다. 천자의 공덕을 후대가 감히 논한다는 것이 맘에 안 들었던 진시황은 시호 제도를 없애 버린 적이 있다.[52]

그렇게 중국왕조들은 주나라 예법에 따라 전부 7묘제를 따랐고 명나라 때는 9묘제로 바뀌었다. 청나라도 9묘제를 따랐는지는 불명.

현재 중국 자금성 앞에 자리한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태묘는 1924년 화평공원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공원화되었다가 1949년 중국공산당이 지배하기 시작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면서 황실의 제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본고장에서 말살된 전통의 명맥을 어찌보면 한국의 종묘가 잇고 있는 셈이다. 결국 중국의 종묘제도가 구시대 착취의 상징으로 몰려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며 박살난지라 중국학자들이 이 부분을 연구하려면 한국의 종묘를 연구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53]

3.2. 한국사의 시조묘

고대의 한국 왕조 또한 전통적인 시조묘(始祖廟)/조상숭배 신앙이 존재했다. 이런 시조묘, 시조상 등은 사서에서 중국의 종묘와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고조선 건국신화에서 건국자와 천신을 혈연적 관계로 묶은 것에 기초해 신단수를 천신 제사와 더불어 조상 제사를 지낸 성지로 보며, 고조선 때부터 시조 숭배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후 삼국시대 각 나라의 관련 기록에서 초기부터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든다.

'종묘(宗廟)'라는 단어가 한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였다. 동천왕위나라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평양성을 새로 쌓으면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에 3세기까지 종묘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나와, 종묘라는 시설의 존재를 확실히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종묘는 이후 왕조처럼 완전한 유교식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시조묘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왕실이 아닌 유력 귀족 가문에서도 자신들만의 종묘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다른 근거로는 647년(보장왕 5년)에 동명왕모의 소상이 3일이나 눈에서 피를 흘렸다는 기록인데, 위패가 아닌 신상을 모셨다는 것 역시 중국식 유교의 종묘는 아니다.[54]

백제의 경우 동명묘와 구태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 사서인 《책부원귀》, 《수서》에서는 구태설을 채택하여 '백제에서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시조 구태묘를 세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설을 채택하고 있으며, 온조왕 때 동명왕과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백제는 시조신 제사를 지내면서 동시에 천지신 제사를 올렸는데, 백제 법왕 때부터는 천지신 제사나 시조신 제사보다 불교의례가 중시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후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제사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멸망 당시 부여풍이 제사권만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짤막하게 나오는 것이 전부다.

신라에서도 초기부터 전통적 시조묘가 존재했으며, 이는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역할로 추정된다. 6세기에 시조묘를 대체하는 신궁(神宮)을 짓고 4계절마다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신궁은 신라 말기까지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제사를 크게 지내는 장소였다.[55]

덧붙여, 조선 이전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경주 황복사와 같은 불교 사찰이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종묘 기능을 명시한 황복사지 사리함 하지만 삼국의 어느 기록이나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는 아니다.

3.3. 한국사의 유교적 종묘

3.3.1. 신라

이후 고려조선의 종묘로 이어지는 중국식 유교적 형태의 종묘 제도의 도입은 통일신라 초기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통적 시조묘-신궁과 별개의 추모시설로 공존했으며, 상세한 기록을 통해 후대에 이어지는 완전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유교적 종묘시설의 위치는 경주 월성 북쪽, 첨성대 남쪽, 황남동 123-2번지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앞서서,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665년에 당나라에서 주도, 사실상 강요한 백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간의 취리산에서의 회맹을 기록한 금서철계(단서철권)의 반쪽을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게 했다고 하는데, 신문왕 이전에 이미 신라에 종묘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기록상 명확하게' 등장하는 건 좀 더 시간이 지나서 687년 신문왕태조, 진지왕, 문흥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5위를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ㆍ진지대왕(眞智大王)ㆍ문흥대왕(文興大王)ㆍ태종대왕(太宗大王)ㆍ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보살핌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의 할 도리를 잃어서 정의가 하늘의 뜻에 어긋났는지, 별의 형상이 괴이하고 해는 빛을 잃어가니, 두려워 몸이 벌벌 떨려옴이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듯하옵니다. 모모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제물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 신령 앞에 정성을 드리며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자그마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몸을 가련히 여기시어, 사철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자손들에게 넉넉히 남겨 오래도록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뢰옵니다.”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신문왕조 7년(687) 4월

혜공왕(765 ~ 780) 때 이르러서 미추왕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삼고, 태종 무열왕문무왕의 2위를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불천위로 정하는 동시에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제후식 오묘제 종묘를 만들었음에도 태조, 태종 같은 천자식 묘호를 올린 것 또한 신라 종묘의 특이점이다.[56][57]
...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비로소 5묘(五廟)를 제정했는데, 미추왕(味鄒王)을 김씨의 시조로 세우고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불천위)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五廟)를 만들었다....
- 《삼국사기》 잡지 제사

신라 하대를 연 선덕왕은 경덕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부친 김효방을 개성왕으로 추존한 뒤 부묘했다. 성덕왕의 신위를 그대로 둔 이유는 선덕왕의 어머니 정의태후가 성덕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외가 쪽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성덕왕과 개성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조부 김위문과 부친 김효양을 각각 흥평왕과 명덕왕으로 추존한 뒤 부묘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했으며 이후 애장왕 때는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혜충태자 김인겸, 부친 소성왕을 부묘했다. 부묘 이전에 혜충태자는 혜충왕으로 추존되었다. 애장왕 이후의 부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없다.[58]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rowcolor=#fbe673> 시기 5묘[59] 비고
신문왕 7년(687) 태조성한왕(시조?) 진지왕(고조부) 문흥왕(증조부) 태종무열왕(조부) 문무왕(부)
혜공왕대(765~780) 미추왕(시조) 태종무열왕(불천위) 문무왕(불천위) 성덕왕(조부) 경덕왕(부)
선덕왕대(780~785) 미추왕(시조) 태종무열왕(불천위) 문무왕(불천위) 성덕왕(외조부) 개성왕(부)
원성왕 원년(785) 미추왕(시조) 태종무열왕(불천위) 문무왕(불천위) 흥평왕(조부) 명덕왕(부)
애장왕 2년(801) 미추왕(시조) 명덕왕(고조부) 원성왕(증조부) 혜충왕(조부) 소성왕(부) [60]

또한 경주 황복사(皇福寺)지 삼층석탑의 1942년 해체 수리 중 발견된 사리함에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고 적힌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불교를 국가차원에서 숭상했던 나라답게 사찰이 종묘의 기능을 맡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특정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또는 창건주가 자신의 개인적인 소원 성취를 위해 발원해 짓는 절을 원찰(願刹)이라고 불렀고, 신라에서 국왕들은 물론 고위 귀족들도 모두 이러한 원찰을 가지고 있었다. 원찰(원당)은 고려 시대는 물론 숭유억불을 기조로 삼았던 조선 시대까지 근근히 이어졌는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왕릉 관리를 맡기기 위해 지었던 흥천사나 왕실로부터 영녕릉광릉을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맡게 된 신륵사봉선사, 정릉 관리를 맡은 봉은사, 조선 정조현륭원 관리 및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창한 용주사도 원찰에 속한다.# 왕실에서 발원해 지은 원찰(원당)의 경우는 사실상 '불교화된 종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61]

3.3.2. 발해

발해도 3성6부제와 같이 당의 제도를 다방면에서 수용한 나라이므로 종묘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발해라는 나라가 워낙에 자체적으로 남긴 문헌 자료가 없는 데다 관련 유적 발굴 결과도 발해의 종묘 흔적을 보여주는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2011년에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연해주 콕샤로브카 1평지성터[62]에 대한 네 번째 발굴조사에서 '종묘'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발해 당대의 것이 아니라 10세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뒤에 현지에서 일어난 부흥세력이 지은 종묘의 흔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63] 송기호 교수에 따르면 해당 유적은 7묘제, 그러니까 천자국의 제도를 따라서 지어져 있다고 하며, 같은 시기 당나라(그리고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와 조선)에서 후한 명제 이래의 동당이실(同堂異室)[64]에 따라 종묘를 지었던 것과는 달리 고대 주나라의 제도를 본떠서 동당동실(同堂同室)[65] 형식으로 태묘를 가운데 두고 그 앞으로 세로 2열로 소목을 배치한 구조였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유적에서는 쪽구들을 배치한 흔적도 확인되었는데,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처럼 모셔지는 공간이라서 살림집처럼 온돌을 설치한 것이라고.[66] 중국의 주례 고공기에 따르면 종묘는 좌묘우사(左廟右社)[67]라는 원칙에 따라 왕이 거주하는 궁성 동쪽에 짓도록 되어 있어서 발해에서 한때, 혹은 멸망 직전까지 수도로 기능했던 상경이나 동경 등의 유적에서 실제 발해 당시의 종묘 흔적이 발견된다면 동부 구역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3.3.3. 고려

고려 시대에 들어서 최초의 종묘 기록은 성종 7년 처음 오묘제(五廟祭)를 정하고 묘호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음 해 4월에 종묘 건설공사를 시작해 3년 뒤 공사를 마쳤다.[68]

본격적인 종묘제례가 시작되었으며, 처음엔 신라의 1세대당 1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였다. 하지만 성종 9년에 5묘 9실제를 채택하여 종묘에 9실을 설치하고 네 위패는 불천위로, 나머지 다섯 위패는 세대가 지날 때마다 옛 신위를 옮겼다.

지속적으로 9실제를 이용하다가 덕종 때 태조, 혜종, 현종 세 군주를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정했다. 예종 대엔 9실제를 썼다. 인종 대에 잠시 5묘제로 바뀌었지만 의종 대에 들어서서 천자식 7묘제로 개편, 구실을 만들어 신위를 보관한다. 또한 별묘를 만들어서 다른 군주들을 섬겼다.

이후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태묘를 재정비하게 되는데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경(개성)의 종묘는 무너져 버렸고 강도(江都)에 태묘를 다시 짓는다. 고려 고종은 태조, 혜종, 현종, 선종, 숙종, 예종, 인종, 신종, 강종 9명을 다시 모셨다.

이후 원종이 1270년 개경 환도하면서 7묘제 종묘를 재건설한다. 하지만 묘호 같은 천자식 예법은 아들 충렬왕 대부터 쓰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충렬왕 때 다시 5묘제로 바뀐다.

충선왕 때는 기존의 5실 외에 동서에 협실을 하나씩 두고 동실에는 문종명종을, 서실에는 혜종현종을 모셨다. 또한 공민왕 시기 이제현의 상소를 보면 강화도에서 나온 후 형식적으로는 1당 5실의 제도지만 실제로는 22개의 신주를 일렬로 모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의 종묘 건물을 3개의 실로 나누고, 실은 다시 방으로 나누는 동당이실이방 제도로서 조선의 종묘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고려사》엔 군주가 태묘에 제사 지내러 갈 때의 예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고려사 악지엔 태묘 악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종, 공민왕 대의 악장만이 남아있다.

예종은 태조, 혜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숙종 아홉 명을 모셨고 공민왕은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아홉 명을 모셨다.

고려의 종묘는 고려왕조가 멸망한뒤 새로운 왕조의 종묘 부지가 되어 헐리고 태조 이하 고려 국왕들의 위패는 배에 실어서 강에 띄웠는데, 강물에 떠내려가서 도착한 곳에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위패를 맡아 보관하게 된 것이 연천 숭의전(崇義殿)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이 숭의전도 현존하는 것은 6.25 전쟁 때 불타서 다시 지은 것.

4. 논란 및 사건사고

  • 김건희 여사의 사적 이용과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용 당시 종묘 관리소 측은 김건희 여사의 방문 목적 등을 확인하지 않았고, 여사는 이곳에서 외국인과 종교인 등과 함께 차담회를 가졌다고 한다. # 외국인은 화가 아들로 코바나 시절 전시회 주관으로 맺은 것이다.#

5. 여담

  • 종묘는 다른 궁들에 비해 대중의 관심을 덜 받지만 건축의 권위자들에게는 반대로 반드시 방문하는 한국 대표 건축물로 자주 언급된다. 대표적으로 일본 현대건축의 거장 시라이 세이이치는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동아시아)에는 종묘가 있다."며 종묘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고,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세계 최고의 건물 중 하나이며,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며 15년 만에 한국에 왔을 때도 가족들과 다시 종묘에 방문하고,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라고 말했다.## 거기에 이미 한국에서 작업을 했던 렘 콜하스, 장 누벨, 자하 하디드 처럼 건축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들은 한번씩 다녀갔고 건축 사진작가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헬렌 비네는 오직 종묘, 병산서원, 소쇄원의 사진만 찍어 책[69]으로 출간하는 등 건축가들에게는 조선 궁궐보다 더 높은 취급을 받고는 한다.
  • 여기에도 연못이 세 개가 있는데 주변에는 향나무와 같은 수목이 식재되어 있는 편이며 후원에는 화계(花階)[70]가 있으나 궁궐 화계들이 기본적으로 상당히 화려한 걸 감안하면 수수한 걸 떠나서 상당히 살풍경스러운데, 그 이유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신성한 공간이므로 그냥 이런 화계는 구색 맞추기용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7월 말이나 8월 초쯤에 가면 습도와 온도 조절을 위해 정전과 영녕전 묘실의 문을 모두 열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꽤 볼만한 광경이니 그쯤 가는 것도 추천한다.
  • 구글 코리아에 서울특별시 관광명소로 검색하면 신전(神殿)으로 표기된다. 대한민국으로 체제가 전환된 지금이야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를 모셔놓은 사당이지만 사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신전이 맞다고 할 수 있다.

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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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동무종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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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 법정동 전체가 종묘와 종묘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종묘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종로3가역 3호선 출구는 종로구 묘동 소재인데, 정작 종묘는 묘동 소재가 아니다.[3]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4] 당시에 함께 등재된 문화유산으로는 석굴암불국사,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 있다.[5] 종묘의 위치가 밝혀져 있는 신라의 종묘(황남동 123-2번지) 역시 왕궁인 경주 월성 기준으로 이 원칙대로 정면 좌측에 배치되어 있다. 다만 월성은 경복궁과 달리 북문이 정문이라서 종묘가 월성의 북서쪽에 있다.[6] 태조 실록의 즉위 교서 1.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전조(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7] 태조 1년 8월 13일 태조 1년 9월 3일[8] 태조 1년 9월 30일[9] 태조 1년 10월 13일[10] 이 "대실"(태실 - 영인본에는 "대"인바, 해당 편집자는 이를 "태"로 수정했다.)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신주를 모시는 곳은 "석실"로서 이는 실록에는 5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처음에는 5인용이었다.[11] 태조 4년 9월 왕위를 미리 예상했는지 정도전이 24칸으로 정전 건물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성계가 더 늘려 달라고 졸라서 반 칸을 더 늘려 24칸 반으로 제일 처음부터 지었다는 설이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인 1990년대까지는 사실 마냥 매우 유명했다.[12] 후한 명제(明帝) 이후 보급된 양식, 단일 건물에 신위를 모아 모시되, 각 신위는 분리된 방(신실)에 모시는 것[13]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음, 원래는 소목제(昭穆制) - 시조 신위를 중앙에, 2대/4대를 소위(昭位), 1대/3대를 목위(穆位)로 좌우로 나누어 배열[14] 태종 11년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격상태종 11년 4월 22일[15] 정종 1년 6월 27일 예시1예시2[16] "동서 이방(東西耳房)에 허청(虛廳)을 짓는 것은 종묘 제도가 아닙니다. 후일(後日)에 상국(上國)의 사신(使臣)이 보게 되면 어떻다 하겠습니까?"[17] 태종 10년 5월 13일[18]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이 당시에는 아직 태종이 생존한 상태였다.[19] 세종 3년 4월 26일[20] 세종 3년 7월 18일[21] 세종 3년 10월 9일[22] 세종 3년 12월 16일[23] 추존된 왕[24] 5세는 세대 별로 셈한다.[25] 연산군 1년 10월 2일[26] 명종 1년 4월 8일[27] 지금의 서울 남산 혹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부근[28] 선조 40년 2월 14일[29] 선조 40년 2월 19일, 선조 40년 3월 17일 홍문관의 발의, 선조 40년 4월 7일 예조의 발의, 선조 40년 4월 14일 예조가 정리한 대신들의 의견, 선조 40년 4월 17일, 선조 40년 4월 22일, 선조 40년 4월 26일[30] 5묘의 경우 시조·2소(2,4대)·2목(1,3대)[31] 시조가 중앙에, 소(昭)는 좌편에, 목(穆)은 우편에 차례로 배열됨[32] "종묘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니 구애될 것이 없다. 태묘(太廟)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당초에도 의논이 동일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억지로 분부할 것까지는 없다. 무사한 가운데 한바탕 번잡한 변설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선조 40년 4월 26일)[33]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했다.[34] 대표적으로 1408년에 만든 태조 금보가 도난당했다. 태조, 정종, 태종의 어보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용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중 태조의 어보는 일제강점기에도 보존되어왔으나 미군의 약탈로 사라졌다. 태종과 세조의 어보는 전부 도난당했다. 대한제국의 국새인 대한국새도 도난당했다. 맥아더가 일본이 가져간 대한제국 국새를 돌려줬지만 다시 미군이 훔쳐갔다. 대군주보, 황제지보, 황제어새, 장렬왕후 어보, 효종 어보등 일부를 회수하였으나 아직 대부분 행방이 묘연하다.[35] 종묘 성역화 사업 이전까지만해도 종묘도 은근히 노숙자들이 많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어떤 풍수관련 서적에서는 종묘에서 은근슬쩍 거지들이 꼬이는 이유가 조선시대 때 종묘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거지들이 종묘를 찾아와서 동냥한 풍경에서 연원하고, 그 원인이 종묘의 풍수특성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다.[36] 이 때, 정전 지붕의 기와를 숭례문 복원 때처럼 수제 기와로 교체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정전의 기와들은 1990년대 수리할 당시 사용했던 공장제 기와로서 이번 수리의 배경이 된 셈.[37] 이번 이안식은 1870년(고종 7)에 이안한 지 151년만에 치르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당시에도 종묘의 수리 때문에 진행되었다.관련 사료 1관련 사료 2[38]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긴 편이다. 가장 큰 목조건축물이라고 할 때 '가장 큰'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의 후보에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39] 증축하는 것도 큰 일이다보니 한 번에 하나씩 늘리지 않고 네 개씩 증축했다. 만약 대한제국 황실이 현재까지 존속했다면 건물이 더 길게 늘어났을 수도 있다.[40] 종묘 정전 및 영녕전 그리고 기타 모든 종묘 내 건물에는 현판이 없다.[41] 그래서 종묘대제 때에는 악공청 기둥 사이에 막을 쳐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 하게 한다.[42] 이를 조천(祧遷)이라고 한다.[43] 태조의 조카이자 태종의 사촌.[44] 효령대군의 7대손.[45] 효령대군의 14대손.[46] 효령대군의 15대손.[47] 1928년 5월 3일 배향공신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동월 9일 이왕직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의해 명단에서 제외됨, 배향의식 거행 여부 불분명[48] 1928년 5월 3일 배향공신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동월 9일 이왕직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의해 명단에서 제외됨, 배향의식 거행 여부 불분명[49] 1928년 5월 9일 이왕직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의해 배향공신 명단에 포함됨, 1940년 3월 12일 배향의식 거행, 1945년 해방 후 종묘에서 출향[50] 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개방하며 그 다음 비공휴일이 휴관일이 된다.[51] 유교는 당시에 없었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가 주대의 문화, 예법을 기준으로 삼았기에 유교의 예법은 자연히 주대의 문물을 따르는 것이다.[52] 시황제이세황제가 이렇게 불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보면 이세황제 다음에 진나라 황제가 있었다면 삼세황제가 되었을 거라는 말이 된다. 사실 이세황제 이후에 부소태자의 아들인 자영이 즉위하긴 했는데 황제를 포기하고 을 칭한지라.[53] 이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도 마찬가지 상황이다.[54] 유교에서도 소상을 모시는 예가 없지는 않다. 공자를 모신 공묘 대성전이 대표적인 사례.[55] 신라의 신궁에서 모셔지던 신의 위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56] 이에 대해서는 천자가 7묘, 제후가 5묘를 두도록 한 기존의 예법과의 절충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당의 제후국을 자처하고는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천자로써 행세하면서(외왕내제) 천자국 제도에도 맞고 제후국으로써의 제도에서도 벗어나지 않는 중간 즈음의 형식(나중에 당에서 제동걸 때를 대비해서도)을 취했었다. 고려 후기 공민왕도 반원 자주개혁을 하면서 관제를 황제국식으로 복구하고 7묘제 태묘를 만들었지만 원종 이후의 왕에게는 묘호를 따로 올리지 않았다.[57]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모든 제도란 항상 엄격한 구속력을 가지고 적용되는 게 아니라 그때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단편적 사례를 끄집어 와서 천자제후를 구별짓고 단정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겠다. 전혀 특이하지 않은 것도 선입견을 가지고 끼워 맞추면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중국에서도 천자의 6군(5군) 체제와 제후의 3군 체제를 군력의 필요 여부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했던 것을 들 수 있으며, 심지어 황제를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殿下)로 부른 기록도 있다.[58] 애장왕이 굳이 종묘에 조부와 부친을 모신 것은 왕위가 불안정한 가운데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노력이었으며 이후 애장왕이 피살된 뒤 거기 모신 부왕(소성왕)이 종묘에서 쫓겨났을 확률은 100%이다. 단 혜충태자는 숙질상잔으로 집권한 헌덕왕ㆍ흥덕왕에게도 당연히 아버지이므로 혜충계가 집권하는 동안에는 계옥 모셔져 있었을 확률이 높다.[59] 선정 당시 국왕과의 관계[60] 무열왕, 문무왕을 봉안한 별묘 운영[61] 고구려정릉사는 아예 이름부터 그랬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불교화된 종묘의 전통은 불교가 전래된 당대인 삼국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갈 정도로 굉장히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62] 발해 5경 15부 62주 가운데 안변부(安邊府)의 부성(府城)으로 추정되고 있다.[63] 그나마도 지어놓고도 오랫동안 쓴 흔적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이곳을 세운 세력(즉 안변부를 중심으로 발해 부흥운동을 일으킨 세력)이 얼마 못 가서 진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64] 같은 건물에 방만 다르게 해서 신주를 모신다는 의미. 현존하는 한국의 종묘 역시 하나의 건물(同堂) 옆으로 후대 왕들의 묘실을 붙여 짓느라고(異室) 하나의 건물로 늘어난 것이다.[65] 신주 하나마다 독립된 건물을 한 채씩 더 지어서 신주를 모신다는 의미.[66] 출처: 송기호 <발해건축사 연구동향과 콕샤로브카 1성터 건물지의 성격>[67] 종묘는 왕이 거주하는 궁성에서(왕이 남쪽을 보고 앉은 것을 기준으로) 보아 왼쪽, 사직은 궁성 오른쪽에 배치하도록 규정한 것.[68] 고려사 성종 세가엔 성종이 공사 현장에 가 자재 운반을 '직접' 도왔다고 한다.[69] <The Intimacy of Making: Three Historical Sites in Korea>[70] 돌로 만든 계단으로, 계단 위에 수목이나 굴뚝, 기암괴석 등을 설치하거나 채소, 장독 등을 놔두는 곳이다. 주로 여성들이 거처하는 안채 후원에 설치하며 민간 양반가 등에서는 1~2단 정도이지만 궁궐 같은 경우에는 3단 이상을 많이 쓴다. 거기에 사용되는 돌도 잘 다듬은 긴 돌을 의미하는 장대석은 궁궐 등에서, 다듬지 않은 일반 돌은 일반 민가에서 사용하는 식으로 취급하지만 가끔 장대석으로 화계를 만드는 집도 있으니 주의할 것.[71] 1주차 방영분 때에 방문한 곳은 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