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9:50:48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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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치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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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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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colcolor=#fff> 수원 화성
水原 華城 | Hwaseong Fortress, Suwon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411,534㎡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age(1963-01-21)]주년)
시대 조선 정조 20년 1796
소유단체 수원시
관리단체 수원시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수원화성.jpg
[[화서문|{{{#fff 화서문}}}]]과 [[서북공심돈|{{{#fff 서북공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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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수문인 [[화홍문|{{{#fff 화홍문}}}]]
1. 개요2. 가치3. 명칭4. 역사
4.1. 건축 배경4.2. 남한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성전4.3. 전후 복원4.4. 복원 이후
5. 구조와 특징6. 지세7. 관광8. 여담9. 관련 영상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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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조선 시대성곽으로, 정식 명칭은 화성(華城), 별칭으로는 수원성(水原城)으로 불린다.[3] 1963년 1월 21일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고[4] 또한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개최된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5]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6]

2. 가치

수원화성은 1794년(정조 18년) 2월에 착공하여 1796년(정조 20년)에 축성된 것으로, 성곽의 총 길이는 5.74km에 달한다.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융건릉을 조성하면서 그 일대에 있던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만든 계획도시로, 화성의 축조는 정조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참고하여 축조하였다. 특히 당시에 거중기와 같은 신기술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건축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축성 이후 수 차례의 자연재해[7]일제강점기, 한국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었으나, 축성 당시에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본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만 등재가 가능했으나, 기록물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는 점이 인정되어 이례적으로 등재되었다. 이후 화성성역의궤조선왕조의궤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또한 설계도와 작업 진행 기록이 온전히 남아있는 덕분에 현대에 유지보수를 해도 세계유산 자격을 그대로 유지가 가능하다. 한 마디로 세계기록유산인 설계도와 작업진행기록의 존재로 온전히 유지보수가 가능한 세계유산이다.

오늘날에는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수원시의 휘장은 수원화성의 서북공심돈을 형상화한 것이며, 수원을 연고로 한 축구 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 FC의 엠블럼 역시 화성에서 따 왔다. 수원 연고의 야구 구단 kt wiz의 홈구장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 전광판 위에도 수원화성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고 야구장 건물의 일부분[8] 또한 수원화성 성벽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며, 제10전투비행단의 정문도 이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3. 명칭

본래 수원의 읍치는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화산(華山)에 있었는데, 융건릉이 그곳에 조성되면서 그곳에 살던 백성들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에 새로 지은 성의 이름을 본래 읍치가 있던 화산에서 유래하여 '화성(華城)'으로 정하고,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하였다. 본래 읍성이 있던 자리는 수원 고읍성(水原古邑城)이라고 하여 지금의 화성과 구분한다.

화성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는데, 정조장자의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에서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이 내용은 화성시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것인데, 화성시에서 수원화성이 시명의 유래라고 명시하지만 않았을 뿐, '수원부 읍치와 현륭원을 위호할 성곽의 터를 둘러보면서'라는 내용이 앞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성곽이 바로 수원화성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이름이 화성으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수원이라는 지명은 혼용되었는데, 화성유수부를 가리켜 수원유수부라고 하는 기록도 많다. 1895년갑오개혁이 단행되며 전국의 부목군현이 모두 이 될 때, 화성유수부도 수원군이 되면서 100년 만에 명칭이 환원되었고, 화성은 수원의 별호가 되었다.

1949년에는 지금의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그 밖의 수원군 지역은 수원의 별호인 화성에서 따와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화성군의 이름은 관내에 화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상관 없이 수원의 별호를 따서 지었을 뿐이지만,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화성군 안에 화성이 없는 어색한 상황이 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1914년대구부와 분리되면서 관내에 달성이 없게 된 달성군1955년경주시와 분리되면서 관내에 월성이 없게 된 월성군[9]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된 현재까지도 수원과 화성의 행정구역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SBS 드라마 은실이에서는 이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상의 행정구역 화산군이 등장한다.

4. 역사

4.1. 건축 배경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며 철저하게 서로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10]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한다.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은 바로 이들 지역의 상당한 군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즉,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인 셈이다.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11]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 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다. 성벽의 길이로 따지면 한양도성의 총 길이가 약 18.6 km인데 수원화성은 총 길이가 약 5.5 km이다. 또 화성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 때문에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 이 시기에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 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리 일대에서 수원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고, 더군다나 조선의 도로사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4.2. 남한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성전

수원화성은 남한에서 마지막 공성전이 벌어진 장소다. 그것도 현대전이었다.

이전 성들과는 달리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지만 정작 조선시대 내내 수원화성이 실전에서 방어에 활용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12]에서도 비껴갔고 구한말 의병들은 일본군 상대로 게릴라전 형태의 투쟁을 해서 공성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면서 수원화성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어용으로 쓰이게 된다. 문제는 수원화성은 처음 쌓을 당시 기준에는 가히 우주방어급 요새로 지었지만 6.25 전쟁은 20세기 중반에 벌어진 전쟁이었으며,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요새는 물론이고 같은 철판으로 두른 전차까지 뚫는 화포 앞에서[13] 수원화성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14]

일제도 태평양 전쟁 말기 북한산성과 더불어서 수원화성에도 대공포를 설치하고 요새화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둘 다 현대전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한 적이 있다.[15]

개전 후 사흘만에 북한군에게 서울을 함락당하고 이후 한강 방어선도 뚫린 상태에서 미군이 증원군으로 올 때까지 어떻게든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해야만 했던 국군은 수원화성을 방어 요새로 활용해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하여 수원화성에서 북한군의 T-34 한 대를 파괴하고[16] 북한군을 하루 정도 수원화성에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이튿날 T-34의 포격에 장안문과 성벽 일부가 파괴되고 국군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성 밖으로 탈출하여 후퇴했다. 결국 고폭탄 같은 현대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쌓은 수원화성은 전투가 벌어지자 고작 하루만 버티고 북한군에게 함락당한다.[17] 어차피 국군도 200여 년 전에 지은 성이 현대전에서 효용이 있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당시 국군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미군이 올 때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것이지 행주산성 전투안시성 전투처럼 수원화성을 사수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으므로 수원화성은 그러한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남한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식 공성전이다.[18]

4.3. 전후 복원

파일:attachment/수원화성/Suwon.jpg
6.25 전쟁 당시 반파당한 장안문의 모습
윗 사진은 6.25 전쟁 당시에 반파당한 장안문의 모습이다.[19] 전쟁의 참화를 워낙 심하게 겪은 나머지, 복원 전에는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았는데, 동문은 도망가고 북문은 부서졌네"라는 노래까지 있을 정도였다.

참고로 저 반파된 장안문의 모습은 1951년 1월경의 모습이고, 1년 뒤인 1952년에는 반파된 문루는 무너지고 홍예의 형태까지 더 심하게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참고 한국전쟁 당시 수원화성의 4대 문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게 장안문이다.

다행히 《화성성역의궤》가 온전히 남아있어, 성이 완전히 무너져도 복원할 수 있다. 현재 화성은 복원물이나, 철저히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기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복원물, 혹은 최근에 건축된 건물은 극히 적은데 수원화성이 지정된 이유는, 원래 설계 도면과 건축 방법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과거 건축 방법 그대로 재연해서 복원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즉 이론상으로는 완전 복원이 가능한 성이다. 일제강점기에 거의 반 해체된 상태였고,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거의 복원됐다.

팔달문은 1975년 복원을 했는데 처음에는 공사가 잘못 진행되었다고 한다. 당시 책임을 맡은 대목장 신응수의 말로는, 기둥의 굵기가 미묘하게 가늘어 문화재청 측에 계속해서 굵기를 굵게 해야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결국 복원 중에 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고 기둥의 치수를 확인하니 대목장의 말이 옳았다고. 결국 후손들에게 '나는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니 너희가 지혜롭게 해결해 달라'고 기둥에 먹칼로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문화재청 정밀 진단조사 결과, 들보 등에 심한 균열과 뒤틀림이 생겨, 2011년부터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해서 원래대로 복원 공사를 해, 2013년 초에 다시 완공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성곽 근처에 많은 이들이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꾸준히 문화재 구역 안의 사유 주택들을 매입해서 허물고 문화재 구역으로 바꾸는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화성 인근지역은 건축 규제가 심한 편으로 많은 주민들의 불만사항이기도 하다. 현재는 남공심돈으로 대표되는 팔달문 주변 일부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복원되지 못했다. 정확히는 팔달문 기준 서남암문쪽으로 95m, 남수문쪽으로 160m 정도가 건물이 들어선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따라서 팔달문 좌우에 있어야하는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도 복원되지 못했다. 참고로 적대는 장안문 좌우와 팔달문 좌우에만 있다. 현재는 팔달문시장의 일부가 철거되는 등 복원의 기초가 다져지고 있다.
수원화성 복원과 《화성성역의궤》의 상관관계에 착안해 진행된 프로젝트
([[http://trich.or.kr/portfolio/hwaseongar|{{{#fff
문화유산기술연구소}}}]])

4.4. 복원 이후

복원 이후 현대에도 은근히 수난을 겪고 있다. 2006년 5월 화성 서장대에서 20대 청년이 술을 마시고 서장대 안에서 자다가 술김에 추워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불을 질러 태워먹었다. # 이 바람에 정조어필인 서장대 현판까지 전부 다 불타버렸는데, 지금 있는 서장대는 새로 지은 것이다. 이미 불타버린 서장대도 1990년대 말 에 복원한 것이었고 96년에 불태워먹은 서장대도 73년에 벼락을 맞아 파괴된 걸 복원한 것이며 그 서장대 조차도 6.25전쟁에 휘말려 파괴된 것을 1963년 복원한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에도 누군가가 불을 지르려 한 적도 있었다. 문에 불을 질렀는데, 다행히 서장대 사고 이후 방화 창호지를 썼기 때문에 큰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2013년에는 한 중학생이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겠답시고 성벽 바로 옆 억새밭에다 불을 질러서 하마터면 성곽 구조물로 옮겨 붙을 뻔한 아찔한 일도 있었다.#

2011년 이후 팔달문 좌우 및 남수문 일대를 제외한 성곽 전 노선이 연결되었다. 이로써 팔달문을 기-종점으로 삼아 화성 일주가 가능해졌다. 화성 일주는 성인 기준으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팔달문과 같은 이유로 성벽 좌우측이 절단된 장안문 및 성벽 일부가 헐린 창룡문의 경우 육교를 통해 도로를 건널 수 있게 연결되어 있는데[20], 팔달문 인근은 단순 도로만 있는게 아니라 못골시장, 영동시장 등을 비롯한 재래시장 및 상가들이 밀집한 상태라서 육교 형식으로 연결할 수도 없다 보니 복원이 어려운 실정이다.

2012년 6월 9일, 1922년 대홍수 때 파괴된 남수문의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수원천 복개구간 철거 공사와 맞물려 이루어진 공사인데, 상부의 여장은 화성성역의궤에 근거하여 복원되었으나, 하부의 수문은 9개의 수문은 유지하되 홍수 대비를 위해 세부는 상당히 다르게 복원되었다. 원래의 수문은 오각형 기둥이 이중으로 배열되고, 전/후열의 기둥 사이가 비어있었으나, 복원된 남수문은 일자형 기둥으로 건설되었다. 이는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향후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 여하튼 현재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을 제외한 전 성벽이 연결된 상태다.

한편 흙을 조달하고자 팠던 연못들(상남지, 하남지, 상동지, 하동지, 북지)은 아직도 복원되지 않았다. 현재 남지와 북지는 복원 예정이다.

5. 구조와 특징

군사적으로도 이전보다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치성[21]의 활용으로, 성벽 전체 구간에 치성을 갖추어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게 사각 없이 서로를 엄호할 수 있는 성형 요새의 삼각형 포루(砲樓)다.

다만 세간에 퍼진 화포에 대비하여 성벽을 낮게 쌓고 뒤쪽에 언덕을 덧대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낮다. 이런 방식은 내탁외축이라고 하여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전통의 축성방식이다. 오히려 이렇게 안 지은 성을 찾는 게 어렵다. 당시 조선은 화포에 대비하여 특별히 새로운 설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성벽이 화력을 견디지 못해 성형요새가 등장하는 유럽이라면 모를까, 19세기 이전에 화포로 성벽을 완전히 때려부수는 것은 대형 화포 사용 비중이 극도로 낮은 동아시아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껏해야 성첩(성 위에 병사들의 엄폐물로 쌓은 담장)을 무너뜨리거나 외벽을 일부 파손해서 기어올라갈 만한 틈을 만드는 게 전부였다. 평지에 쌓은 전축성은 홍이포쯤 되는 화포로 집중 사격하면 벽 일부를 뚫을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런 성은 다중성벽이 기본이라 효율적인 짓은 아니었다.

성벽 높이도 삼년산성 같은 삼국시대의 거대 성벽이나 해외의 거성과 비교하여 낮은 것이지 조선시대의 읍성치고는 그렇게 낮지도 않다. 수원화성의 성벽이 낮은 직접적인 원인은 예산 부족이다. 원안은 성벽을 25척 높이로 쌓는 것이었는데 예산이 부족하여 20척 높이로 낮춰 쌓았다고 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수원화성은 실제로 어떤 공성전을 상정하고 지은 성은 아니었으며, 무기 체계의 변화로 인해 혁신이 필요했던 조선의 축성술에서 여러 가지 시험적인 시도를 적용시킨 거대한 실험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수원 화성은 해자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공성전이 불가능한 성이었다.[22] 그리고 수원 화성의 위치상 이곳이 적의 공격에 노출되면 사실 이미 전쟁은 끝난 것으로, 조정이 급히 달아난다 해도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으로 도주하면 했지, 방어력은 낮고 거리는 멀리 있는 수원화성으로 도주할 일은 없다.
파일:수원화성 모형2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수원화성 모형
성벽 자체가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점을 들어 동양 성곽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23]로 쌓았으며, 망루 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화공을 위한 장치와 화재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되어 있으며, 성벽 뒷쪽에 파낸 흙으로 둔덕을 쌓아 약식이나마 대포에 대한 대비도 되어있는 등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형태다.

특이점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정문이 아니다.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이다. 일반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화성에서는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므로 임금이 들어오는 문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안문이 팔달문보다 더 크다.

간혹 팔달문=수원화성으로 아는 사람이 있으나 팔달문은 화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양도성숭례문/남대문과 마찬가지로 교통을 이유로 좌우의 성벽이 헐린 상태라서 독립적인 건축으로 보일 뿐이다.

수원화성을 짓는 중에 정조가 수원유수부 관아를 화성행궁에 위치시켰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면서 1912년 수원유수부를 철폐하여 관아가 폐지되었다. 이후 수원부청이 세워졌으나 조선총독부의 결정으로 수원부청은 수원화성 바깥으로 나가게 됐다. 결국 현대에 와서 수원화성 내부에는 오랫동안 수원시청 등 수원시 관련 행정관청이 단 하나도 없었다. 2014년 4월, 팔달구청이 수원화성 내부 종로사거리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102년 만에 수원화성 내부에 수원시 지방관청이 처음으로 복귀했다.

6. 지세

수원화성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진산으로 삼아 화성행궁이 동쪽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었다. 성의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산성의 형태를 띄는 반면, 동쪽은 평지에 걸쳐 평지성의 형태를 띄고 있다. 성 내부로는 수원천이 흘러 화홍문남수문의 2개 수문이 만들어졌다.

7. 관광

성벽을 따라 산책로가 매우 잘 조성되어 있어 걸어서 관람도 가능하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경치나 소소한 볼거리도 훌륭한 편이다. 특히 한양도성의 구조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종로라든가, 종로 옆의 수원천이라든가. 한양도성으로 치면 종로청계천이 나란히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특히 화서문-장안문-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국궁터)까지 이르는 성벽길은 조명도 꽤 괜찮게 해놓아서, 해진 저녁에 연인과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추천하는 코스다. 화홍문 옆의 호수인 용연 옆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수원에서 숨겨진 데이트 핫플레이스. 방화수류정에서 보이는 화성 전체의 경관도 좋고, 용연에 조성된 공원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도 아름답다. 관광열차[24]를 사용하여 관람도 가능하다.

수원문화재단에서는 팔달문에서 시계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일주하는 소요시간을 3시간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성벽을 일주하는 경로는 내벽을 따라간다는 전제로 길이 평탄해서 걷기 어렵지 않다. 다만 시계방향으로 도는 경우 팔달문 안내소에서 서남암문까지 가는 경로는 꽤 오랫동안 급경사로 팔달산을 올라야 해서 힘든 편.

화성 관람 시 관람료는 2022년 4월 7일자로 무료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1,000원의 관람료를 받았으나 개방형 시설로 인한 매표 및 검표의 어려움으로 인해 결국 무료 입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화성행궁의 입장료는 유지하였다.

8. 여담

  • 사실 화성 건설이 정조때의 기획만은 아니었고, 정조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실학자로 익히 알려진 유형원이 철저한 계산 하에 현재 화성 부지에 성을 건설하면 적절할 것이라는 안을 낸 바 있었다. 이 안건의 적절성이 후에 정조와 당시 노론 대신들 사이에서 검토, 수용되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거두게 되자, 화성 건설 시에 유형원은 죽은 뒤에나마 이조참판을 제수받는 등 크게 찬탄받았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유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바로 정조 때인데, 유형원의 생애(1622년 ~ 1673년)와는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유형원이 처음 정계에 언급된 것도 죽은 뒤인 숙종 때인데 말 그대로 무시당했고, 영조 대에 들어서야 겨우 《반계수록》의 종합적 시각이 주목받으면서 일종의 고전과 같이 주목받게 된다.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것이 정조 때. 근래 학계에서는 '실학'의 실체에 대한 회의가 많이 일고 있지만, 유형원의 삶은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실학'의 언급과 빼닮아 있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실학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면도 많지만, '뛰어난 저술 → 그러나 생전에는 무시당함 → 영조·정조 시기 발굴되어 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 타 지역 시민들은 수원시민들도 자주 가는 관광지라 생각할 수 있는데, 사람이 많아 행궁동 카페거리 같은 곳은 조금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평일 늦은 저녁 때나 밤 늦은 때 사람 없이 조용한 성곽길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수원시민의 특권이다. 관광지로서의 목적 외에도 실제로는 생활에 밀접하게 존재하는 편이다. 빠르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데 보통 1시간 30분 컷 난다.
  • 화성에서 보이는 시설 중 하나인 포루(砲樓) 역시 정조나 정약용의 독창적인 기획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포루를 기획한 사람은 서애 류성룡으로, 《징비록》에 따르면 1592년 중양절(음력 9월 9일) 포루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과 구조를 적고 있는데, 수원화성의 포루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대에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6년 모형을 만들다 중단하였으며, 지인 김사순에게 편지를 통해 설계를 보내자 김사순이 포루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지역 주민들이 '전에는 이런 거 없어도 적을 잘 막았는데 왜 이런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가'하며 반발했고, 김사순은 강행하였으나 병으로 눕자 작업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터진 게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유형원처럼 정조 대에 재조명받거나 하진 못했지만 이외에도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훗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한번 활용해보라'고 하거나, 《설책지법》[25]에서 총포를 설치하는 형태의 목책도나 성을 고안하는 등 총포로 아군을 방어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 정조는 측근들에게 화성을 이름 그대로 아름답게 지으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성이 완공된 뒤 정조가 친히 와서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대동했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정조에게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드는 성을 굳이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 "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실제 정조가 한 주장은 성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면 보는 사람의 기를 꺾으므로, 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이다. 《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12월 8일(정묘) 1번째 기사. 확실히 수원화성은 유달리 미적인 측면에도 많은 신경을 쓴 건축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말은 21세기에 광교신도시를 지으면서 다시 거론된 적도 있다.
  •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달리, 정약용은 다른 업무들이 많아 수원화성 건설을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그는 수원화성 공사가 끝난 이후에야 수원성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성이 지어지지 않았음에 한탄했다. 하지만 만일 정약용의 주장대로 성을 지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 당시 정약용은 수원화성 전체를 중국식 벽돌성으로 지을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와 다른 대신들은 당시 조선이 벽돌 제작 및 건축 기술이 부족하고,[26] 근처에 석재 광산이 발견[27]되었으니, 기존 방식대로 쌓기로 결정하고 진행했다. 그러다 수원화성 공사 후반부부터 벽돌 건축 노하우가 쌓이면서 옹성이나 포루, 공심돈 등 부가적인 구조물에 한해 벽돌 위주로 지은 구조물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 지은 곳들은 횡력에 약한 벽돌의 특성상 후대에 무너져서 다시 쌓은 기록이 심심찮게 실록에 나온다.
  • 수원화성을 소개하는 곳에 보면, 성문의 화공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소화전인 오성지(五星池)를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실제 중국의 오성지를 살펴봤던 정약용이 건설에 참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적당히 만들다 보니, 실제 오성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벽돌 사용과는 반대되는 사례이다. 이 말은 정약용 본인이 공사 이후 성을 둘러보며 남긴 한탄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벽돌 사용이다.
  • 수원화성 이후에 축성된 성은 덕진진이나 초지진같은 강화도에 있는 돈대 정도인데 훼손 정도가 심해서 성곽사 연구에 화성이 결국 그 끝을 장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산성[28]에선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이은 완성형으로 보아 비교 연구하거나, 성곽 축조 양식의 마지막 단계로 연구하고 있다.
  •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곳은 원래 효종의 묫자리가 될 예정이었지만, 당시에는 민가(즉, 옛 수원 시가지) 철거 문제 때문에 취소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민가들을 모두 허물고(이에 대한 대책이 바로 수원화성 건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신도시를 건설해 개발구역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것), 현륭원 조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 수원화성의 완공되기 까지의 기간은 불과 34개월로 《화성성역의궤》에 건설과정과 그림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부역으로 동원된 백성들은 이전에는 보수를 주지 않아 백성들이 부역을 피해 숨거나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정조는 수원화성의 축조를 위해 참여한 모든 일꾼들에게 일한 만큼의 임금을 주기로 명했고 일당을 주는 것은 물론 반나절만 일한 일꾼들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거나 일하다가 다친 사람에게도 치료와 함께 일당의 50%를 지급해 줬고 이로 인해 자발적으로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유례없는 폭염이 닥쳐 정조는 날이 서늘해질 때까지 수원화성 축조를 중단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부역 수당으로 생계유지를 했던 백성들은 부역을 중단하게되면 먹고 살 방법이 없어지므로 정조의 말을 거역한 채 계속해서 부역에 참여했고 결국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정조는 이에 서병(暑病)[29]을 치료하는 약 '척서단' 4000정을 하사했고 이후 서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또 겨울날에 극심한 한파가 닥쳤을 때는 건설에 참여 중인 모든 이에게 털모자를 하사하라고 명해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당시 털모자는 정 3품 당상관 이상의 신분들만 가질 수 있는 귀한 물건으로 일반 백성들이 털모자를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모자 지급을 강행해서 결국 정조의 깊은 배려에 감명받은 백성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며 단 34개월만에 수원화성이 완공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조의 화성 건설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면모이기도 하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499회(2012년 1월 8일 방송분, '내 마음을 하사하노라')에서도 이 과정을 배경으로 재현했다. 이 방송을 본 네티즌들은 "배려는 기적을 만드는구나", "이렇게 감동적인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 "정조를 청와대로" 등 다양한 의견이 이어졌다.
  • 수원시의 랜드마크이다보니 수원시와 관련된 것에는 꼭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수원시의 로고도 버들잎 모양의 전체 성곽 형태와 가장 높은 구조물인 서북공심돈을 나타낸 것이다.
  • 2015년, 수원시에서 수원화성 축조 22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지정과 동시에 약간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문인 창룡문을 비롯하여 성곽을 전반적으로 보수하는 한편 장안문 근처의 건물들의 벽을 정조와 화성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채워넣고 있다. 팔달문 쪽은 접근성 때문에[30] 그런 그림을 넣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 그냥 두고 있다.
  • 수원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 FC의 엠블럼에 수원 화성 로고가 새겨져 있다. 여담으로, 수원 FC가 1부 리그로 승격하여 수원 더비가 성사되었을 때에 만든 기념 로고에는 두 구단 엠블럼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수원 화성이 로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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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로고 수원 FC 로고 수원 더비 기념 로고
이후 K리그1 2020시즌공식 인트로에서도 수원 삼성을 상징하는 건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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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의 전광판 2015 KBO 올스타전 로고
  • 대전노은고등학교가 수원화성을 모티브로 하여 지어졌다. 아름다운 학교 건물상도 받았다.
  • 수원화성 북수문인 화홍문은 〈KOF 96〉에서 한국팀 스테이지로 쓰였다. 한국팀 BGM은 〈서울로 가자(Seoul Road)인데 정작 수원화성이 배경 스테이지인 점이 뭔가 이상하나 배경 고증과 BGM은 훌륭하다.
  • 뜬금없지만 《삼국지연의》 기반 에로게인 〈삼극희〉에서 성을 그릴때 수원화성 디자인을 카피했다.

9. 관련 영상

EBS에서 제작한 수원화성 영상 KBS 〈역사스페셜〉에서 다룬 수원화성 영상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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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수원 토박이들은 수원화성이라고 부른다.[4]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5] 1997년 12월 1일~12월 6일[6] 당시에 함께 등재된 문화유산으로는 창덕궁이 있다.[7] 주로 남수문이 수해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8] 내야 1루 끝쪽 어퍼덱부터 외야 1루 어퍼덱까지 이어지는 외벽[9] 다만 이쪽은 1989년에 경주군으로 바뀌었다.[10] 추존왕 장조. 사실 정조는 아버지를 높이긴 했지만 왕으로까지 추존하진 못했다. 장헌세자가 왕(장종)으로 추존된 건 대한제국 고종 때인 1899년의 일이다. 1901년에는 다시 황제(장조 의황제)로 추존된다.[11] 사도세자가 사후 추증이 됐긴 하지만, 어쨌든 정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 정도 대우였다.[12] 공식적으로 조선시대 마지막 공성전은 청일전쟁의 평양성 전투다.[13]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요새 류의 고정 방어시설이 모조리 쇠퇴하게 된다. 막대한 화력도 화력이지만 전차항공기 등으로 진격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진 것이 이유다.[14] 정확히는 T-34의 전차포를 '옹성과 성벽'은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성문은 아니었고, 정작 이 튼튼한 성벽과 옹성에 배치할 대전차무기가 얼마 없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성문을 박살내면 어차피 돌파는 가능했다. 물론 당시 국군도 이를 알고 있었다.[15] 당시 일제는 일본 본토의 나고야 성오사카 성도 비슷하게 현대전에 대비한 요새로 개조하려 했으나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을 경험한 후 쓸모없는 계획이라며 포기했었다. 비슷한 이유로 식민지 조선의 성들도 요새화를 포기한 것이다.[16] 공식적으로 국군이 최초로 T-34-85를 격파한 전과다. 그 이전 춘천 전투 때 이미 T-34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춘천에서 국군이 격파한 것은 SU-76이다.[17] 참고: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220471[18] 공식적으로 한반도 전체에서 벌어진 마지막 공성전은 평양 탈환작전 당시 평양성에서 저항하는 북한군 잔당을 소탕한 소탕전이다.[19] 문 앞에 세워진 수원시 경계 표지판(This is Suwon)이 눈에 띈다. 왜 경계판이 여기 있었냐면, 한국전쟁 당시에는 아직 장안구 중북부 지역(정자동, 송죽동, 조원동 등)이 수원시에 편입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당시 화성군 일왕면). 이 지역은 1963년 수원시에 편입되었다. 현재도 이 일대는 성곽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다. 현재는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357번지다.[20] 도로 위로 육교를 만든 뒤 성벽을 육교로 연결시킨 구조로 만들어놨다.[21] 성벽 중간중간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는 구조물을 말한다. 치성에 병사들의 감시초소를 지어 올린 것은 포루(鋪樓), 여기에 휴식처로서의 기능을 더한 게 각루이다. 또한 총포를 활용하기 위해 치성을 개조한 것은 포루(砲樓), 아예 벽돌로 작은 요새를 지어올린 것이 공심돈이다.[22] 당장 수원 화성과 비교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이자 철옹성으로 유명했던 천하의 오사카 성이 해자 한번 메우자 하룻밤에 무너졌다. 해자는 사실상 공성전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23] 일반적으로 벽돌 양식은 중국풍으로 한국에서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은 희소하다. 광주 왕륜동(618여 눌, 61만 8천여 개), 북성 밖 가마(37여 눌, 3만 7천여 개), 서봉동 가마(39여 눌, 3만 9천여 개)에서 조달되었다.출처[24] 노면전차는 아니고, 서울대공원의 코끼리열차와 같은 형식이다.[25] 《만기요람》에 실려 있다.[26] 한반도의 토질은 전반적으로 중국 벽돌 건축의 중심이 된 북중국 지역의 것에 비해 습기가 많아, 벽돌 제작뿐만 아니라 전축성 건축에도 별로 적합하지 않다. 대신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해, 돌을 통짜로 이용해 만든 건축물이 많다. 이는 '중국은 전탑, 한국은 석탑, 일본은 목탑'이라는 개략적 비교로도 알 수 있다.[27] 화서문 밖 인근의 숙지산(熟知山)이 대표적인 석재 광산이었다. 당시 숙지산은 돌 뜨는 터(부석소 浮石所)로 불렸다.[28] 성이 팔달산에 걸치고 있어서 평산성으로 구분한다.[29] 여름에 날씨가 몹시 더워서 생기는 병. 흔히 "더위 먹다"라고 하는 증상의 병이다. 고열로 목이 마르고 땀이 많이 나며 거품 섞인 대변을 본다.[30] 육로가 연결된 장안문과 달리 팔달문은 사방이 이미 상권이 형성되어있어 완전히 단절되어 있어 화성문화제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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