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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강도의 군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ffffff> 삼수군 三水郡 Samsu County | }}} | |||
군청 소재지 | 삼수읍 | ||||
지역 | 관북 | ||||
면적 | 886.98㎢ | ||||
행정구역 | 1읍 1구 23리 | ||||
시간대 | UTC+9 | ||||
인구 | 40,311명 (2008년) | ||||
인구밀도 | 46/km2 | ||||
군당 책임비서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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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량강도의 군.2. 역사
북옥저의 영역이던 것이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고, 해모수가 드나든다는 전설도 있었으나 발해가 망하고 나선 여진의 영토가 되었다. 조선 세종 대에 4군 지역을 개척하면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4군과 갑산군 사이 공백지역에 삼수보(三水堡)를 설치하였고, 이 삼수보가 군으로 승격되어 삼수군이 되었다. '삼수(三水)'라는 지명은 어떤 3가지의 물줄기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압록강·허천강·장진강에서 따왔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삼수'가 백두산과 장백산과 부전고원의 물이 모인 것을 나타낸다는 말도 있다.#이 당시 삼수군은 고종 대에 장진군이 신설되기 전까지 장진군 전역과 신흥군 동상면, 혜산군 별동면까지 관할하던, 지금보다 훨씬 넓은 고을이었는데, 옆 동네 갑산군[1]과 묶여서 삼수갑산(三水甲山)이라는 이름의 오지로 유명했다. '삼수갑산'의 유명세답게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유배보내는 유배지로 그만이었으며[2] 실제로 유배를 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여기로 귀양 가서 살아돌아온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당대 조선의 키워로 손꼽히는 윤선도로 74세의 노령에 귀양을 가서 5년을 버틴 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4년을 더 귀양살이했다. 때문에 이 삼수와 인근의 갑산에서 유래한 '삼수갑산을 가다'는 말의 뜻이 바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거나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원래 군청소재지는 금수(襟水)면 성내리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의병장 차도선(車道善)의 항쟁으로 삼수면 중평장리로 옮겼다. 그리고 북한에서 군청을 옮기면서 원래 소재지인 성내리로 되돌아온 것. 이 때문에 옛 지도에서는 삼수군의 군청을 표시하면서 중평장이라고 적어 놓는 경우가 많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군 서부 지역이 신파군(김정숙군)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1954년 량강도 신설로 함경남도에서 량강도로 이관되어 지금에 이른다.
3. 인근 행정구역
중 국 | ||
김정숙군 | 삼수군 | 혜산시 |
갑산군 | ||
부전군 | 풍서군 |
■ 량강도 소속 ■ 함경남도 소속
4. 교통편
철도 | 혜산만포청년선 | 삼수역 |
도로 | 10번 국도 | 온성군 - 혜산시 - 포성로동자구 - 김정숙군 - 신의주시 |
그야말로 답이 없다. 북부내륙선이 개통되기 이전까지는 아예 역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나마도 김정숙군으로 편입된 역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국도 또한 달랑 압록강변을 따라 삼수군을 살짝 잘라내면서 지나가고 땡.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지금의 삼수읍으로 가던지 구 중평장읍으로 가던지간에 국도는커녕 지방도를 타야 접근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북한에서는 1급도로를 이 삼수읍을 통과하도록 설계한 모양이긴 한데, 암만 생각해 봐도 그 쪽 사정을 고려해 보면 제대로 개·보수가 되어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지금은 북한 안에서 뒤에서 1등 하는 최악의 오지급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 비교대상이 남한이라면 오지인 건 맞지만, 북한 안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압록강이 가까워 중국 밀무역 같은 나름대로의 밥벌이 수단도 있고, 북한에는 교통 인프라가 아예 없다시피한 동네도 많은데 여긴 그래도 북부내륙선 같은 철도도 있다. 북한에선 오히려 여기처럼 중국과 가까운 지역보단 살짝 남쪽의 내륙 안쪽에 더 심각한 낙후지역이 많다고 한다.
5. 기후
삼수갑산이란 말답게 갑산군과 더불어 끝내주는 오지로 겨울이 매우 추운 곳이다. 연평균기온이 고작 2.1도 밖에 안된다. 기후대는 냉대기후이며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교차가 무려 36℃나 될 정도다. 거기에 9월 30일쯤에 첫 얼음이 얼고 4월 29일쯤에 얼음이 녹는다. 평균기온이 이정도니 겨울에 얼마나 추울지는 말 안해도 알만하다.최한월인 1월의 평균기온은 -18.2℃로 삼지연시, 대홍단군, 갑산군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이다. 북위 64°50'에 위치한 알래스카 놈(Nome)의 1월 평균기온이 -15℃로 삼수군보다 더 높다. 미 대륙에서 겨울에 혹한으로 악명높은 노스다코타나 미네소타조차 이 동네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삼수군의 위도는 북위 41°18'으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보다 약간 더 낮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의 1월 평균기온은 8.9℃로 삼수군보다 27℃나 더 따뜻하다.
삼수군이 위도에 비해 지나치게 추운 이유는 개마고원 일대라 고도가 높고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위도에 있는 함경북도 어랑군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어랑군의 1월 평균기온은 -9.0℃로 꽤 춥긴 하지만 삼수군보다는 10℃ 가까이 더 따뜻하다. 어랑군이 더 따뜻한 이유는 개마고원과 백두산이 북서풍을 막아주고 수심이 깊은 동해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반면, 최난월인 8월의 평균기온은 18.2℃로 서늘하다. 서울의 5월 평균기온과 유사하다. 강수량은 575.2mm로 한반도 내 대표적인 소우지이다.
6. 하위 행정구역
1읍 1구 23리로 이루어져 있다.삼수군의 행정구역 | |
읍 | 삼수읍 |
로동자구 | 포성구 |
리 | 간령리 개운성리 관동리 관서리 관평리 관흥리 광생리 동수리 령성리 룡복동리 반룡기리 번포리 삼곡리 신양리 신전리 신포동리 원동리 일자봉리 중평장리 천남리 청수리 풍덕리 회골리 |
7.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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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면(三水面)
- 관할 리 : 중평장(仲坪場), 관동(館洞), 교암(轎巖), 나산(羅山), 남풍(南豊), 남회(南淮), 독산(獨山), 동수(東水), 무학(務學), 별흥(別興), 북수(北水), 석우(石隅), 신창(新昌), 신풍(新豊), 신풍중(新豊中), 신흥(新興), 운봉(雲峰), 원덕장(院德場), 유동(柳洞), 유평(楡坪), 은포(隱浦), 중석(中石), 중평상(仲坪上), 중평하(仲坪下), 천평(川坪), 하석(下石), 화계(花溪), 화산상(華山上), 화산중(華山中), 화양(華陽), 회동(檜洞), 회산(檜山)
- 면소재지와 군청이 중평장리에 있었다. 원래 군청은 금수면 성내리에 있었으나 의병장 차도선의 대일항쟁으로 인해 이전했다. 원래 삼남면(三南面)이었으나 1942년에 개칭하였다.
- 관흥면(館興面)
- 관할 리 : 삼덕(三德), 간령(間嶺), 개운성(開雲城), 고암포상(高巖浦上), 고암포하(高巖浦下), 대서(大西), 대장(大藏), 대청계(大淸溪), 동화(東和), 복서(福西), 사품(寺品), 삼포(三浦), 상두릉(上杜陵), 상은산(上銀山), 상청계(上淸溪), 생양(生陽), 서덕(西德), 석곡(石谷), 소장(小藏), 소청계(小淸溪), 수인(守仁), 인순(仁淳), 장수(藏修), 중두릉(中杜陵), 채가(彩佳), 청학(靑鶴), 하두릉(下杜陵), 하은산(下銀山), 흑연(黑硯)
- 1914년 관동면(館東面) 일부와 관서면(館西面), 흥남면(興南面)을 병합하여 신설되었다.
- 금수면(襟水面)
- 관할 리 : 성내(城內), 가매덕(佳梅德), 간천(間川), 관동(館洞), 남산(南山), 농막(農幕), 반룡기(盤龍基), 봉덕(鳳德), 상삼흥(上三興), 속사(束沙), 수차(水遮), 신성(新成), 신촌(新村), 신흥(新興), 양응(兩應), 억두(億斗), 용수(龍水), 용천(龍川), 인동(仁洞), 일건(日乾), 장항(長項), 중(中), 탑동(塔洞), 하삼흥(下三興), 함포(咸浦)
- 원래 읍관면(邑館面)이었으나 1942년에 개칭하였다 조선시대 및 북한 행정구역상 삼수군 소재지.
- 삼서면(三西面)
- 관할 리 : 보성(堡城), 간포(間浦), 강응계(江應界), 계양(啓陽), 구지(龜地), 금천포(金川浦), 동동(銅洞), 사평(沙坪), 상니구지(上泥龜地), 상진목(上眞木), 성기(城基), 신창(新昌), 연평(淵坪), 용암(龍巖), 자지(紫芝), 장재기(長在基), 장항(獐項), 지야덕(芝野德), 하진목(下眞木), 희사봉(希沙峰)
- 원래 어면면(魚面面)이었으나 1914년에 개칭하였다. 면 남서쪽의 강응계리·희사봉리·신창리는 장진군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참으로 검열삭제스러운 지명이 있다(…).
- 신파면(新坡面)
- 자서면(自西面)
- 관할 리 : 상동구(上洞口), 고영(高永), 광암(廣巖), 광암덕(廣巖德), 내목척(內木尺), 내평(內坪), 도룡덕(道龍德), 동동(東洞), 백산(白山), 복수(福守), 부내(釜內), 사덕(沙德), 상거(上巨), 생양(生陽), 서가(西佳), 석촌(石村), 석평(石坪), 송전(松田), 수침(水砧), 신암동(新巖洞), 신전(新田), 신풍(新豊), 아안(阿安), 연화(蓮花), 외목척(外木尺), 용교(龍橋), 용수(龍水), 용천(龍川), 원동(院洞), 을산덕(乙山德), 이만(李萬), 족교(足橋), 차보(車堡), 차천(遮川), 태양(太陽), 태평(太平), 하거(下巨), 하동구(下洞口), 하원동(下院洞), 화룡(化龍), 황철(黃鐵)
- 1914년 자작면(自作面)과 서별면(西別面)을 병합하여 신설하였다.
- 호인면(好仁面)
- 관할 리 : 보성(堡城), 고거(高巨), 관흥(館興), 국은(國恩), 농평상(農坪上), 농평하(農坪下), 대암(大巖), 박씨대(朴氏垈), 봉삼(峰三), 삼형제(三兄弟), 상대복(上大福), 상병풍(上屛風), 성암(城巖), 신덕(新德), 신성(新星), 신풍(新豊), 신흥(新興), 영성(嶺城), 왕가(王哥), 운곡(雲谷), 운전(雲田), 인산(仁山), 입암(立巖), 장령(長嶺), 재전(財田), 재함(財咸), 조전(笊田), 중위(中位), 중평(仲坪), 직동(直洞), 최가(崔哥), 춘방(春芳), 하대복(下大福), 하병풍(下屛風), 한평(漢坪), 화전(樺田), 효동(孝洞)
- 삼수군의 동부 국경지대. 1914년 호재면(好財面)과 인차외면(仁遮外面)을 병합하여 신설하였다. 철도는 북부내륙선이 지나가며 관내에 인산역, 삼수청년역이 있다.
8. 문화재
- 삼수읍성 동문(朝日門)
- 삼수향교
- 중흥사 극락전 - 호인면(북한 행정구역상 관평리)에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9. 출신인물
[1] 여기도 일제강점기 때 혜산군과 풍산군이 신설되기 전까지 (별동면을 제외한) 혜산군 전역과 풍산군 3개 면까지 관할하던, 지금보다 훨씬 넓은 고을이었다.[2] 현대 북한에서도 이 지역은 유배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김일성에게 숙청당해 이곳으로 보내진 시인 백석이 있다. 백석은 그래도 적응을 잘 해서 삼수군 지역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죽는 날까지 문단에 복귀하지는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