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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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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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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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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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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1c1c1,#444444><colcolor=#E40001,#FED11E>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colbgcolor=#d1d1d1,#222222><colcolor=black,white>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김용범
김일성
제1차대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두봉
제2차대회 김일성
제3차대회
제1차대표자회
제4차대회
제2차대표자회 중앙위원회
총비서
제5차대회
제6차대회
제3차대표자회 총비서 김정일
제4차대표자회 제1비서 김정은
제7차대회 위원장
제8차대회 총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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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colcolor=#FED11E> 상무위원 <colbgcolor=#fff,#222>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일성·김일·오진우·김정일·리종옥
가나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박성철·최현·림춘추·서철·오백룡·김중린·김영남·전문섭·김환·연형묵·오극렬·계응태·강성산·백학림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최영림(승진)·서윤석(승진)[1]
[1] 북한의 공식 약력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김만금도 정치국 위원을 지냈으나 언론보도상으론 확인할 수 없음.
1983년 3월 리종옥(강등)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허담(승진)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리근모(승진)·홍성남(승진)
1988년 3월 6기 13차 전원회의 계응태(재승진)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전병호(승진)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광(승진)·한성룡(승진)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김영주(복귀)
후보위원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허담·윤기복·최광·조세웅·최재우·공진태·정준기·김철만·정경희·최영림·서윤석·리근모·현무광·김강환·리선실
1981년 4월 6기 3차 전원회의 강희원
1981년 10월 6기 4차 전원회의 계응태(강등)
1982년 4월 6기 5차 전원회의 홍성남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전병호·김두남
1983년 6월 6기 7차 전원회의 안승학·홍성룡·김복신
1983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김중린(강등)
1986년 2월 6기 11차 전원회의 홍시학·홍성남(복귀)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한성룡·홍성남(강등)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태복·김철만(복귀)·최영림(강등, 복귀)
1992년 12월 6기 20차 전원회의 연형묵(강등)·김달현·김용순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양형섭(강등, 복귀)·홍석형[2]
[2] 이후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보선되었으며 그가 송두율이라는 주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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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d1c27,#e3111c> 초대 제2대 제3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역대 국가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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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가주석
<rowcolor=#ed1c27,#e3111c> 초대 제2대 제3대
김두봉 최용건 김일성
섭정대행 김정일
<rowcolor=#fff>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방위원장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국무위원장
<rowcolor=#ed1c27,#e3111c> 제4대 제5대 제6대
김영남 김정일
섭정대행 김정은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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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내각 수상 정무원 총리
<rowcolor=#003478,#C39335> 제1-4대 제5대 제6대 제7-8대 제9대
김일성 김일 박성철 리종옥 강성산
<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총리 내각총리
제10대
제11-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리근모 연형묵 강성산 홍성남 박봉주
<rowcolor=#003478,#C39335> 내각총리
제16-17대
제18대 제19-20대 제21대 제22대
김영일 최영림 박봉주 김재룡 김덕훈
}}}}}}}}}

파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력 최고사령관 휘장.pn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무력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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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50000,#d50000> 초대 제2대 제3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

파일:조선인민군 휘장.svg
조선인민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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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Generalissimo_rank_insignia_%28North_Korea%29.svg.pn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大元帥
<colcolor=#000,#ddd> 김일성 · 김정일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Marshal_of_the_DPRK_rank_insignia.svg.pn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元帥
김정은
파일:1920px-Marshal_of_the_KPA_rank_insignia.svg.png
조선인민군 원수
朝鮮人民軍 元帥
김영춘 · 리병철 · 리을설 · 박정천 · 오진우B · 최광 · 현철해
*A: 사후추서
*B: 공화국 원수였으나 계급 개편으로 인한 강등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
金日成 | Kim Il Sung[1]
파일:김일성(1960).png
<colbgcolor=#ED1C27><colcolor=#fff> 본명 김성주(金成柱)[2]
출생 1912년 4월 15일[3][4]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
(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1동)[5][6]
사망 1994년 7월 8일 오전 2시 (향년 82세)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특각
(現 자강도 향산군 향암리)
묘소 금수산태양궁전
서명 파일:김일성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4FA2><colcolor=#fff> 본관 전주 김씨[7]
부모 아버지 김형직(1894 ~ 1926)
어머니 강반석(1892 ~ 1932)
형제자매 남동생 김철주(1916 ~ 1935)
남동생 김영주(1920 ~ 2021)
배우자 첫째 부인 한성희(1914 ~ ?)
둘째 부인 김정숙(1917 ~ 1949)
셋째 부인 김성애(1924 ~ 2014?)
자녀 장남 김정일(1941 ~ 2011)
차남 김만일(1944 ~ 1947)
삼남 김평일(1954년생)
사남 김영일(1955 ~ 2000)
오남 김현(1971 ~ ?)
장녀 김경희(1946년생)
차녀 김경숙(1951년생)
삼녀 김경진(1952년생)
사녀 김백연(1987년생, 사생아)
학력 창덕학교[8]
화성의숙 (중퇴)
지린 위원중학교 (퇴학)
종교 개신교[9]무종교 (무신론)[10]
신체 177cm[11], 90kg, AB형[12]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주요 서훈 공화국영웅 (4회)
국기훈장 (6회)
로력영웅
레닌훈장 (2회)
자유독립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조국해방전쟁승리 60돐 기념훈장[PL]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 기념훈장[PL]
군사 경력
복무 동북항일연군
1936년 ~ 1941년
노농적군[15]
1942년 ~ 1945년
조선인민군
1948년 ~ 1994년
최종 계급 소좌 (노농적군)
공화국원수 (조선인민군) (1950년~1992년)
대원수 (조선인민군) (1992년 수여)
}}}}}}}}}
파일:김일성 초상화_2.jpg
공식 초상화[16]

1. 개요2. 생애3. 성격
3.1. 끝없는 권력욕3.2. 무능한 전쟁광3.3. 무자비한 숙청3.4. 인간관계
4. 평가
4.1.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4.2. 지도자로서의 평가4.3. 세계사적 평가와 여파
5. 여담
5.1. 독재자들의 우상5.2. 사치 생활
6. 가족 관계7. 소속 정당8. 어록9. 대중매체에서
9.1. 대한민국9.2. 외국 작품9.3. 북한
10. 별명 및 호칭
10.1. 부정적 호칭10.2. 북한 입장에서
11. 관련 사건사고12. 관련 문서13. 관련 연구1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초대 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표방한 북한을 실제로는 왕조와 다를 바 없는 3대 세습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으로 생전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을 지냈다.

해방 이전에는 항일운동을 했다.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한 적이 있으며 소련군 소속 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소련에 의해서 선택되어 삼팔선 이북의 한반도를 통치하는 지도자로 옹립되었으며,[17] 북한정권 수립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에 올랐다. 8월 종파사건(1956년)박금철·리효순 사건(1967년 / 갑산파 숙청 사건) 등을 통해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 올라서 스스로 ‘신’이 되었다. 북한의 1인 독재정권, 세습 체제를 수립했으며 1994년 사망하며 그의 장남 김정일에게 권력이 승계되었다. 사후에도 ‘영생불멸의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사실상 영구적인 맹목적 숭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생존과 권력 획득을 위한 정치적인 수완, 화술이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그 권력을 얻기 위해 비윤리적인 수단까지 서슴없이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김정은의 할아버지이자, 김정일의 아버지로, 6.25 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자이다. 그의 목표는 적화통일로, 전쟁을 통해 남한을 침략하여 한반도 전체를 공산주의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외세인 소련에게서 허가를 받아내 6.25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후 UN군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자 중국을 끌어들이는 외환의 죄를 저질렀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김일성은 끊임없이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한 무력 도발을 일삼았다. 또한 김일성은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군사력을 투자하고 비밀리에 핵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해 남한을 겨냥했다. 그와 동시에 화전양면전술의 일환으로 자신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자인 것 처럼 포장해 남한의 정부와 사회를 기만하려 했다.

그의 지배과정에서 십만 단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숙청되었으며, 숙청된 사람들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는 식으로 장기간의 고통을 느껴가면서 학살당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해 자신에 대한 철저한 개인숭배체제를 수립했으며, 북한 주민들은 강제적으로 김일성과 그와 관련된 상징물에 숭배를 해야 했다.

김일성의 경제정책은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모토로 북한 주민들이 잘사는 사회를 표방했지만, 서방 국가들로부터 지닌 막대한 부채, 그리고 현실을 무시한 각종 경제정책으로 북한의 국가 경제는 이미 김일성 생전에 파산의 길에 접어 들었다. 결국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은 배급제가 붕괴되었고 국민들이 먹을게 없어서 수십만이 굶주려 죽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일성/생애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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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Il-sung_in_1927.jpg
파일:김일성1945.jpg
1927년, 15세 1945년, 33세
파일:Kim Il-Sung 1950.png
파일:Kim il-sung 1984.png
1953년, 41세 1984년, 72세

1912년 4월 15일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평양중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대 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 밑에서 만주 지역의 여러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여기서 훗날 친위 부대격으로 활동하여 김일성 체제 성립과 유지에 큰 기여를 한 충성도 높은 빨치산 출신 동료들을 얻게 되었다. 일본의 탄압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월경해 소련군에 입대했고 1945년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에 돌아왔다.

광복 이후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믿던 소련 군부에 의해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하자 폭력적인 토지개혁으로 갈등을 조장하여 더 공고한 권력을 추구하였다.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며 이후 8월 종파사건, 갑산파 숙청 사건 등을 통해서 중국과 소련과 연계가 깊었던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채택과 함께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파일:kimilsung1958.jpg
1958년 11월 방월 당시 호찌민 주석과 건배를 하는 모습

전후 한반도 북부의 공업 기반과 사회주의권의 원조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통해 성공적인 전후복구를 마치고 1950 - 60년대에는 대한민국보다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애초 계획경제의 한계, 지나친 자립 노선, 과도한 국방비, 미흡한 경공업 따위의 까닭이 맞물려 차츰 남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밀리게 되었다. 소련중국대립 와중에 독자노선병영국가화에 몰두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제2세계 국가들과 동떨어진 길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란 목표도 허울 좋은 집권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과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에도 꿋꿋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차츰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 하에 미국대한민국 등 국가들과 대화 통로를 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 향년 82세.
파일:EP-307139944.jpg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일성

"인민들에게 고깃국과 이밥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50여 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약속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의 사후 북한은 아예 대다수의 인민이 굶주림과 아사(餓死) 위기에 노출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사망 직후 김씨일가 신격화 차원에서 그의 사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방부처리(엠버밍)한 뒤 금수산태양궁전박제되었고, 그의 장남 김정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주석직을 영구 결번 시켰다. 현재까지도 북한의 국가수반의 직책명으로 주석이 사용된 것은 김일성 이후로 단 한 명도 없다.

2.1.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일성/사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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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격

3.1. 끝없는 권력욕

김일성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고학력인 중졸[18][19]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그 어떤 나랏일보다 중요시하는 태도와 함께, 전문적인 능력은 부족했다는 평가.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않았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고 본다. 남북통일을 위해 사회주의를 연구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산주의자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재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초졸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같이 학력이 낮아도 추후 사회주의로 나라를 이끌고자 하면 그럭저럭 사회주의 이념으로 나라가 굴러가나 김일성은 티토보다 학력이 높았어도 그렇지 못했다.[20] 중국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 것을 감안하면 '학습능력'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련의 군대에서 복무했을 때도 몸은 허약하나 두뇌가 명석하다는 평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 외교적으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완은 있었다.

하지만 진짜 권력만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군사적 수완 같은 다른 능력은 부족했다. 권력욕이 너무 강하여 성급하게 일을 벌이다가 망할 뻔한 사건이 6.25 전쟁이다. 박헌영의 부추김이 있었다고 하나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서 통일은 못하나 국체를 보전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되면 박헌영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계획도 있었고, 정전 후 실제로 이를 시행하였다. 심지어 전쟁을 처음 제안한 것은 김일성이 맞다. #

정부 수립 초기에는 농민의 지지를 얻고자 토지개혁을 통해 북한 농민들에게 땅을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둘러댔다. 토지의 국유화를 북한 주민이 싫어할 것을 예측하여 일단 눈속임을 한 후 실행 여건이 갖추어진 후 실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식 토지개혁은 땅이 포함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농민과 노동자의 증오와 피해의식을 부추겨 북한의 지주나 종교인, '반동'으로 일컬어진 학생세력 등을 숙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 그 뒤 북한에서 권력 기반을 키우는데 집중하다가 더 많은 권력을 얻을 조건이 성숙했다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6.25전쟁을 일으킨다.

김일성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 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만약 펑더화이쑹스룬 등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21] 사실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던 전쟁 초반에도 소련의 지원과 전쟁을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를 못한 남한의 실책이 겹친 덕에 운좋게 이겼을 뿐이다. 그것도 한국 전쟁 시기 북한편에서 뛰어난 군공을 세운 것은 그의 파벌이 아니라 김일성이 나중에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시킨 김무정 같은 연안파였다.

김일성은 점령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학살과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 인력과 자원을 징발하여 그나마 있던 민심마저 잃어버렸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뭐하고 있어?"라고 화를 냈고 마오쩌둥조차 어리석다고 김일성을 비판했다.[22][23] 권력을 지켜줄 세력만 자신을 지지한다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보였는데, 머슴이나 고용농 등에게 빼앗은 땅을 넘겨주며 농민위원장 등으로 출세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북한인들이 김일성의 실체를 깨닫고 6.25 전쟁 당시 월남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굳이 실제로 잘 대해주는 식으로 민심을 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반발하면 충성파가 이들을 잘 숙청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 중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전후 권력 기반이 확고하지 않을 때는 레닌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레닌프롤레타리아 독재 뿐 아니라 레닌의 전위당 이론을 통해 모든 정치적 권력이 관료화된 전위당인 노동당에 집중되어 사회의 전 구조가 수직적 통제 하에 들어있어야 하며, 모든 권력이 1인과 일당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였다. 전쟁이 멈추자 주었던 땅도 다 뺏고 사회주의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체제는 권력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주의의 일부만 빌려온 것이었다. 권력 기반을 더 갖추자 소련의 사상을 갖다 버리고 주체사상을 주장하였다. 세종대왕, 이순신 같은 민족의 영웅조차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되고, 일체의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지 말도록 하고 자신이 만든 '근로단체' 같은 조직 이외의 동창회와 같은 모임도 금지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을 너무나도 많이 이식하였다. 가령 초강성 민족주의[24]와 지나친 반외세 경향을 강조한다거나[25], 핵심계층-동요계층-적대계층이라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거나[26], 족벌 세습을 당연시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와 그의 수하들이 주체사상이라는, 카를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이 들었다가는 무덤에서 뛰쳐나올 법한 사이비 공산주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경제가 국유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이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생산력의 부족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재로 인한 '기형적 노동자 국가'에 어울릴 법한 사상을 만든 것도 그가 공산주의에 무관심했기에 때문으로 볼 수 있다.[27] 과거 1990년대 주사파들이 불법 월북을 통해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했지만, 김일성 본인은 주체사상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남한의 추종자들이 설파하는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주체사상 자체가 (여느 설정놀음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끌어다 붙여서 만든 결과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찬 설정인 데다, 애당초 김일성 본인이 사상 자체에 별 관심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유가 크다.[28]

다만, 6.25 전쟁이 끝난 뒤 박헌영, 김무정, 최창익 등 수많은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온갖 권력을 휘둘러댄 것으로 볼 때, 권모술수 하나만은 천재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군인으로서는 무능한 정치군인에 불과했어도 정치적으로는 쓸데없는 쪽으로 꽤 수완이 있었던 셈이다. 비록 많은 사람의 민심을 얻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도덕과 상식에는 어긋났지만,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머슴이나 돈이 없는 사람, 교육을 못 받은 사람 등의 서러움과 권력과 인정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여 적어도 자신에게 힘을 합쳐 대드는 것은 어렵게 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을 찾는 능력도 뛰어났다. 6.25전쟁 당시에도 남한에서도 인민군이 점령하던 자리에는 머슴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남이 가진 땅은 내 땅이 된다며 좋아했고, 남에게 상전 노릇을 하려고 했다고 하는 경험담이 곳곳에 있다.

이들이 새로운 '엘리트'가 되어 김일성 가문의 권력을 유지시킨다는 종국적 목표는 유지할 수 있었고, 한국 전쟁 이후의 고난, 동유럽 혁명, 탈냉전 같은 체제 위기에도 이들은 배신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국력이 강한 중국과 소련의 간섭을 남들은 관찰하지 못하는 빈틈을 보아 물리치다 못해 조종을 하였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세습을 한다는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던 일을 해내고, 방호산 같은 인물이 여러 명 나왔다면 진짜 적화통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며, 한국 정치에까지 북한의 힘을 빌어서라도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권력욕을 자극하여 내분을 일으킨 '지능'은 어떻게보면 높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하필 그 지능이란 것이 얼마나 상대를 자신의 욕구에 맞게 잘 조종하고, 언제 상대를 공격하며, 거짓말을 가장 그럴 듯하게 할 것이냐에 관련된 것이었기에 역사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 한반도가 아니라 국력이 더 강한 곳에서 태어났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어두운 모습이었을 것이다.[29]

굉장히 머리가 좋았던 예시로, 1940~1945년 88여단에 김일성이 복무하였을 때, 김일성 대대장의 연락군관이 부대의 규율을 어기고 후임격인 유성철을 깨워 깨워 급식부로 가서 김일성이 먹을 연어를 타오라고 한 심부름을 거부한 적 있었다. 여기에 군대 회의장소가 변경되었는데, 그 장소를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김일성에게 이실직고하니 김일성이 '무슨 심부름을 그따위로 하느냐'며 화를 내고, 유성철 역시 기분이 나빠 '중대장이 안가르쳐 주는 것을 어떻게 하겠소. 내가 뭘 잘못했소?'라고 반박하며 밖으로 나와 버린 일이 있었다. 유성철은 훗날 북한군 작전국장으로 복무하기는 했으나 이윽고 숙청을 피하여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북한 정권이 세워지고 나서 문일이라는 동료에게 김일성이 이 두 가지 일로 악감정을 품고 있다고 전했고, 그는 숙청을 피해 1959년에 소련의 타슈켄트로 탈북을 하게 된 것이다. # 김일성은 자신이 시킨 심부름을 거부한 일을 그 일로부터 최소 14년 뒤인 1959년까지 기억하여 '갑질을 못한 원한'을 갚았다는 뜻이다. # 스탈린도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다고 하지만,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탈출할 때 잠깐 태워준 마부도 기억해뒀다 보답한 일도 있었다고 하나, 김일성은 자기 위의 여단장인 저우바오중이나 소련인 장교들에게는 순종적이고 다정다감했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격하고 차가웠다.

사실 민족주의자이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반미, 반일이라는 일관된 개념은 있었고 우방이라 할 수 있는 소련,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에 끌려다니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나름 독자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일제에 대한 해방을 원했던 북한 주민의 소망을 악용하고,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간섭[30]을 피하는 용도에 국한된 것이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독립운동으로 중국공산당의 눈에 들어 중국의 안도현장이 되기를 꿈꾸던 인물이었으며, 스스로 '안도 사람'[31]이라고 하였다. 건국 초창기에는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자를 탄압하며 소련에 아부했고, 민족 문화를 '봉건주의'로 탄압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는 스탈린 초상화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있어 박헌영보다 믿음직스럽기에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한복을 입는 모습이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김구를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해방 직후에는 오기섭 같은 좌익 독립운동가 출신과도 싸우고는 했는데, 소련의 제도를 본받고 노동자의 역량을 키워야 하고 민족 반역자를 최대한 배격하여야 한다는 다른 공산주의자와 달리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친일파, 지주라도 '교양하고 개조'하면 된다고 주장하며 세력을 불렸다. # 이는 '통일전선론'이라고 하여 지금도 어느 정도 유효한 내용이다.

음력설은 한국 전쟁의 정전 이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아예 명절이 아니었고, 추석은 1972년부터 '민족 최대 명절' 김일성 생일보다 격이 낮은 명절이 되었다. # 판소리, 전통 음식, 사투리 같은 민족 유산도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친일파라도 자신에게 아부하면 '탄백작업'에서 보듯 혜택을 주고, 김원봉 같은 좌익 독립운동가도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면 숙청시켰다. 특히 일본 제국이 미국과 대응한다며 '귀축영미' 구호를 내세우며 조선인을 착취한 것은 절대로 주민에게 알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 아들 김정일은 일본 군가인 라바울 소패를 즐겨불렀다고 한다. 70년대부터 초상화 검열 정책이 도입되더니 80년대에는 아예 일본 천황 마냥 초상화가 불에 타면 목숨을 버리고 초상화를 구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 순수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더 많은 권력을 위해 민족주의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에 가깝다.

이보다 더한 좌파 계열의 전체주의 독재권력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경제성장 자체를 부정했던[32] 폴 포트선군정치라는 해괴한 개념을 만들어낸 김일성 본인의 아들 김정일 정도 밖에 없다. 다만 폴 포트처럼 정치의 진면목을 밝힌 것과 다르게 김일성은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같은 기만으로 통치를 해왔다는 면에서는 더 간사한 면도 있다. 결국 그의 주체사상은 지적으로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전체주의 + 군국주의 + 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자기네들 독재권력 유지에 유리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아 그 자신과 후손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2. 무능한 전쟁광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인류 역사에 일찌기 없던 특출한 군사사상과 전략전술, 영군술로 무패백승을 펼치며 한 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이긴 명장'[33]이라고 허위 날조하고 있으나, 실제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옆집 할머니, 아니 지나가던 어린애가 지휘해도 이길수 있었을 압도적인 물량 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34] 6.25 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6.25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도 탱크를 보병과 똑같이 운영하여 탱크들이 보병의 이동속도에 발을 맞추어 천천히 진격해야 했고, 국군과 UN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고 말았다. 빨치산 경험만 있었지 기갑부대 운영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이런 멍청한 전략을 짰던 것이다. #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시를 떠나 덕천시로 도주했고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시를 떠나 강계시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그는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림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배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35]

이 때문에 6.25 전쟁 중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중국 인민지원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쳤고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36]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일부 과장되었다는 평가가 있고 중공군도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지만, 적어도 그런 '삼대기율 팔항주의'라는 허물이라도 있던 중공군북한군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펑더화이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전세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이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주도한 것이다. 게다가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북한군은 진짜로 한 게 없다.[37] 정확히는 공군은 전쟁 초반에 괴멸당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대규모 전투는 다 중국군이 맡았기에 6.25 후반 전투 중 북한이 자랑하는 전투는 비교적 덜 치열했던 동부 고지에서 벌어진 1211고지 전투351고지 전투[38] 이렇게 2개밖에 없을 정도다. #

게다가 1960년대 이후, 한국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가지기 위해 국가 예산의 30%를 군비에 지출시키고 100만이 넘는 젊은 인력들을 군대에 10년 이상 징집시키면서 북한 경제에 큰 주름을 가져다 주었다. 국부의 상당수가 지출 대비 경제적 효과 창출 효과가 매우 제한적인 군대에 투자된 것은 물론이고 젊은 노동 인구들이 10년 이상 군대에 강제로 복무하게 되면서 북한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 외에 그의 군사적 실책에 대해서는 4대 군사노선 참고.

그리고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지만, 김일성은 끈질기게 스탈린을 설득하며 전쟁을 부추겼고,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6.25 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북한이 이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북한을 침략해 일어난 '민족 해방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셈.

이렇게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은 북한 경제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전쟁 이전의 북한은 원산이나 청진 등에 공업단지가 꽤 많이 조성되어 있어서, 이것만 열심히 굴렸어도 북한은 동독같이 공산주의 국가 치고는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될 수 있었겠지만, 김일성이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한국을 구하려는 일념에 참전한 미군이 원산 등의 지역에 대규모 함포사격과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바람에 그 많던 공업단지를 깡그리 잃었으며, 북한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나마 소련과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70년대 초중반까지는 국부에 한정해서는 남한보다 더 잘사는 나라로 남아 있었지만, 70년대 이전에도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나 그 후유증을 극복한 뒤의 배급제로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삶의 질이 남한보다 뒤쳐지는 경우도 많았으며, 남한의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북한의 온갖 경제 실책들로 이제는 북한이 극빈국인데 한국이 선진국인 정반대 포지션이 되었다.

3.3. 무자비한 숙청

종파분자와 계급의 원수는 그가 누구이건 3대에 걸쳐서 씨를 없애야 한다.
1968년 김일성 교시[39]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6.25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도 어김이 없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 3, 4사단은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는데 제1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한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 → 임진강문산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 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 사령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수원 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북한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 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 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 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으며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욱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 주소 북한대사 리상조와 소련 유학생 허웅배(1928~1997)[40]의 김일성 정전[41]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의 전략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림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는데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정·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출처]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는데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김무정을 실각시켰다.

6.25 전쟁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까 두려웠던 김일성은 자신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헌영은 6.25 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하는데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 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 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는데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김일성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박길룡에 따르면 박헌영은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운 꼭두각시답게 김일성 역시 스탈린식 개인 숭배를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의 신격화가 중지되었다. 한편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신나게 써먹었다가 갖다버린 연안계와 소련계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갑산파, 심지어 혁명을 한 적도 없는 김영주같은 낙하산들이 채우고 완장질을 하는 현실에 기가 막혀서 김일성에게 이를 시정해줄 것을 수차례 강력히 요구하였다. 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인사정책에 대한 항의가 들어오자 이들을 조금 승진시켜줌으로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간 김일성의 토사구팽과 무도한 정치에 질려있던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리필규 등은 조선로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그의 정치를 시정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와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들 김일성 우상화 반대 세력에 협조적이였던 소련이 헝가리와 폴란드의 소동을 거치며 북한의 지도부 교체가 가져올 혼란을 두려워해 전원회의 전 이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중국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파악도 못했으며 이들 8월 그룹조차도 그 시대의 이상적인 공산주의자들로, 김일성은 젊고 능력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맑시즘을 잘 배운 자기들이 옆에서 지도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렇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본 김일성은 잔혹하게 이들의 항명을 진압한다.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박창옥의 당직과 당적은 모두 박탈되었으며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 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했다. 이것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었다. 또 8월 종파 사건 등을 통해 김일성이 숙청한 연안파의 수가 6만 명 내지 9만 명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43] #1 #2 이후 1958~1959년까지 1957년 8월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 무려 1/4가 숙청되었다고 한다.[44]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도 8월 종파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하는데 8월 종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반대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후 1958년 1차 당대표자회를 열어 반대파들에게 동정적이었던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등도 모조리 숙청하는 등 북한에서 김일성 친위세력을 제외한 세력은 거의 씨가 마르고 만다.

최후의 분파였던 갑산파는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김일성과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으로 이러한 숙청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김원봉 등 월북한 인물들도 숙청했다.

3.4.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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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4.1.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

보천보 전투는 본인의 이름을 날린 시초였다. 비록 날렸다는 것이 고작 선전용 전투의 전과가 과대포장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그는 친일파라도 교양을 하면 된다면서 자신에게 아부하는 경우에는 권력 강화를 위해 친일 행적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아예 정준택 같이 친일 부르주아라며 추방당한 사람을 김일성이 직접 복권시키기도 할 정도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에게 빌붙은 친일파들이 '수령님의 령도력으로 과거를 뉘우치고 (과거를 백지화하여) 조국 건설에 합류했다'고 정말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친일파 등용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는 국가 정도로 중요한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작사가(리찬/이찬)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더 와닿는 예시로는 드라마 야인시대로 유명해진 북한 공훈배우 심영이 있는데, 대놓고 일제강점기에 《망루의 결사대》라고 하여 비적과 일본군이 싸우는 활극을 찍은 바가 있다. 김일성이나 그의 동료가 될 수 있던 만주 항일 빨치산을 비하하는 표현 중 하나가 마적, 비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일제강점기의 행적은 북한 측에서는 통치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공적을 심하게 과장하며, 남한은 김일성 가짜설처럼 아예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시각이 많아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

물론 김일성 가짜설은 현재 거짓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평가에 좋은 영향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 애초에 고국의 독립을 주도한 진짜 독립영웅이었던 아메드 세쿠 투레로버트 무가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도 고국의 지도자가 되고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나라를 파탄내며 이전의 명성을 다 말아먹은 마당에[45] 이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고국의 독립에 기여한 게 전혀 없던 김일성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악행들에 면죄부를 받을 여지는 전혀 없다. 애초에 독립영웅이 권력을 잡은 후 잔혹한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은 아프리카, 동남아 지역에서 매우 흔해빠진 일이다.

4.2. 지도자로서의 평가

지도자로써의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 능력은 매우 부족하고 권력만을 탐한 잘못된 지도자이자 겉으로는 인민공화국을 표방하지만, 북한을 전제군주제 국가와 다를 바 없는 3대 세습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런 인물이 불행히도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능력만큼은 세계의 독재자 중에서도 특히 뛰어났다.[46]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의 직책을 지냈는데, 당 총비서 직책이 곧 최고지도자임을 의미하므로 사실상 압도적 전제권력을 지닌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47]

집권 초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을 지냈으며, 8월 종파사건(1956년)갑산파 숙청 사건 (1967년)[48] 등을 통해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한 이후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 올라서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북한의 1인 세습독재 체제를 수립해서 1970년대부터 김정일에게 권력을 서서히 이양해나갔으며, 1994년 사망하며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였다. 사후에도 평양정권 주도 하에 '영생불멸의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다른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과는 달리 영구적인 맹목적 숭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분단을 경험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전쟁을 일으켜 최소 360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6.25 전쟁은 김일성이라는 일개인이 결심만 안 했다면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평화적인 통일 노력을 모두 거절하고 전쟁준비만 했다. 베트남도 전쟁으로 적화통일을 이루긴 했지만 일단 공격을 북베트남이 했음을 숨긴 것도 아니고, 실제 자신의 공적이 있는 호찌민의 지지가 남북베트남 모두 압도적이어서 남베트남 정부의 주민 지지가 낮아 평화적으로 통일을 추진해도 적화가 될 공산이 있었다. 물론 호찌민도 전쟁으로 통일을 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49]

존 에버라드 전 평양주재 영국대사의 의견에 따르면 한반도의 통일 여건은 똑같이 분단되었지만 좌우의 합의로 통일을 이룬 오스트리아보다 유리했다고 주장한다. 미소의 대립이 유럽에서 더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지원을 적화통일을 위한 것으로 이용했고, 이들을 끈질기게 설득시켜 남침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다.[50] # 마오쩌둥조차 처음엔 전쟁을 거절했다가 스탈린의 승낙을 보고 자신도 동의하고, 국제연합군에게 밀리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하였다. # 이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공격할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1965년과 1975년에 김일성은 다시 남침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두 차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지도부의 만류로 실현되지 못했다. ##

6.25 전쟁 과정에서 남한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지르고[51][52] 미군의 폭격 역시 만만치 않은 인명, 재산적 피해를 야기했다는 것만큼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애초에 김일성이 6.25 전쟁을 추진하지만 않았어도 동족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면서 수백만 명이 전쟁의 포화 속에 목숨을 잃는 모든 일은 없었을 것이며,[53][54] 후술하듯 전쟁과는 완전히 무관한 내치에서의 행적만 따져도 김일성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원래 김일성 계파는 소수에 불과한 세력이었다. 평안도는 조만식을 위시한 온건한 우익이 득세하고, 함경도는 좌익이 우세하였으나 오기섭 같은 공산주의자의 역할이 컸고 소련에 아부하는 척하던 김일성의 태도와 다르게 민족주의적으로 외세에 겉으로도 아부하려고 들지 않아[55] 함흥에서는 시위하다 총맞고 숨진 학생들도 있었다. #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서며 해방 직후 정치 활동을 하던 공산당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거기에 김일성의 계파가 섞여 있던 것이다. 해방 직후까지 북한에 거주하던 한국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은 광복이 된 직후에는 '무식 유식 잘살고 못 살고 없이 나라 위해서라면 눈알이라도 빼서 바칠 심정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오죽하면 소작인들이 지주와 친해서 소련군도 일부 공산주의자조차 '지주를 모욕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평가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이가 좋은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선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도 하였다. #

그러나 큰 형님인 소련에 대한 아부하는 식의 쇼와, 인간이라면 예상 못할 뻔뻔한 사기행각과 질투심을 위주로 한[56] 탐욕을 부추기는 방식을 위주로 하는 악랄한 세력확장을 통해 자신이 절대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못할 행동을 한다고 하여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종종 있었지만, 이미 뒤에서 그런 행동을 하도록 뒤에서 권력을 갖추어놓은 뒤였다. 김일성이 없었어도 북한이 이렇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에 북한의 정치권에 뛰어든 사람들은 비록 오랜 식민통치로 협의의 기술이 부족하거나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와 비슷하게 독재자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있을 망정 거짓말과 탐욕으로 일관하여 정치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나마 매력적인 정치이론을 들고 나오려고 하거나 잘못된 신념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신념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일성은 해방전을 자신이 주도했다는 역사 왜곡[57]허황된 날조들에 기반한 개인숭배 등 숱한 거짓말, 자신의 반대파에게 가혹한 행위를 일삼는 사람에게 출세를 시켜주기 등의 수단과 함께 사회주의를 구실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장악하여 주민들을 충성도에 따른 배급에 길들여서 절대 권력을 얻었는데,[58] 이는 배급이 예고없이 끊겨 일어난 비극인 90년대의 대기근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외부에서는 마치 사이비 종교 같은 우상화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속되는 허위 사실 유포&가스라이팅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사실은 김일성 일가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헐뜯기만 해도 출세할 수 있는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 일반 주민을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있는 친위대를 구성한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59] 그의 주체사상은 조악하고 모순이 심한 내용이었기에[60] 마오주의는커녕 호자주의 수준의 파급력도 국제적으로 미치지 못하였고, 일찍이 소련 등지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어 박노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의 증언처럼 소련 국민들이 북한의 선전매체들을 개그 잡지라며 일부러 구독해 읽었을 정도였다. #

대신에 구미가 당기는 사상을 내세우기 보다는 권력의 속성을 이용하여 도덕성이나 협동심을 무력화시키는 일을 잘하던 인물이었다. 가장 권력에 갈증을 느끼기 쉬운 머슴 같은 '노동계급'이라고 이름 붙인 하류층을 포섭하여 농민위원장 같은 높은 자리나 경찰에 해당하는 보안원 같은 자리로 출세시키는 등 이쪽으로 매우 지능적이고 교활한 행보를 보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젠더 갈등, 노사 갈등 같은 것[61]을 만들면서[62] 거짓 정보와 상황을 흐리게 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상대를 악마화시켜 죄책감을 없애고, 특정 계층에게 높은 자리를 안겨주고 재산도 두둑하게 챙겨주면서[63] 이 상황이 아니면 남들 위에서 군림할 수 없다는 쾌락과, 이 상황이 아니면 권력과 재산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64]을 통해 증오를 부추기는 무서운 전략인 것이다. 황순원과 같은 남한으로 피난을 온 고향이 북한 땅인 소설가는 카인의 후예 같은 작품에서 이런 상황을 묘사하며 사랑이 필요하다며 이런 상황을 끔찍하게 여기기도 했다.

해방되자마자 소련 몰래 지방의 당조직 착수·노동계급속에서의 새로운 인재발굴(지지세력 확보), 기술자·전문가 발굴 및 추천(무력 확보) 같은 적극적인 세력 확장을 하는 등 처음부터 권력을 추구하는 능력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인물이었다. # 6.25 전쟁 때도 인민군 점령지에서 이것 때문에 신분이 아예 거꾸로 되고 벼락출세하게 된 사람들은 기세등등하게 그 앞잡이를 한 경우가 많았다. 김일성과 정실 관계가 있던 강량욱 목사 같은 경우 북조선임시인민위 서기장[65] 같은 권력의 유혹에 빠져 신앙을 저버리고 북한에서 개신교인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기도 할 정도였다. # 그가 자신의 수족이 될 인물을 찾고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은 정말로 일반인은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과 수치를 모르는 대담성[66]과 잔학성을 띤 것이었다.

심지어 김일성에게 이를 가는 사람들조차 그가 '사회주의자', '친 소련파'라고 믿어 김일성에게 속아넘어가는 바람에 진짜 사회주의자가 김일성의 정체를 모르고 그에게 협조를 한다든가, 남한에서는 소련이 속고 있음을 주장하여 북한을 견제한다는 카드가 잘 나오지 못할 지경이었다.
소련군을 따라 1945년 9월21일 원산에 상륙, 한달 후인 10월14일 평양 시민환영대회에서 명실상부한 집권자로 부상할 때까지 김일성은 주로 소련 점령군 고위층과 긴밀히 협력, 때로는 향연을 베풀면서[67] 정치상황에 복잡한 논리로 대응하는 남로당 박헌영 연안파 김두봉 또는 소련파 허가이에 비해 군대전우의 단순 충성논리로 소련 점령군에 협조했다.
따라서 보다 통제하기 쉬운[68] 김일성을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대권주자로 점찍어 스탈린의 오른팔인 즈다노브 정치국원에게 직접 연결시켜 어렵지 않게 북한지도자로 옹립한 것이다.
만주 항일빨치산과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서 같이 근무한 25명 정도의 김일성 직계 빨치산은 김일성이 소련군 비호속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한 전위 세력이었다. 이들은 안길 서철 임춘추 이동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학,국민학교 중퇴 정도로 김일성과는 이념적 갈등이 있을 수 없고 도전세력이 될 수 없으며 흩어지면 생존 불가능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김일성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행동집단이 됐다. 그들은 정권장악 후에도 당,안전기관,군대에서 반대파를 암살하는 폭력집단으로 행세했다. 결국 김일성 정권은 소련군의 지원과 그의 소수 빨치산 부하의 테러와 감시, 그리고 적시에 반대파를 제거하는 기민한 술책발휘로 이루어진 원천적 군사정부 성격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방조속에 이들 빨치산 요원을 동원, 전쟁 전에는 조만식[69], 전쟁 중에는 박헌영, 전쟁 후 50년대 중반기에는 연안파, 60년대 초에는 소련파[70]상호이간, 개인별로는 파격적 승진과 보직으로 환심을 사고 방심하는 순간 전격적으로 숙청, 제거하는 기민한 정치술수를 과시했다.
베일속 「김일성과거」 파헤쳐/「유성철 나의 증언」연재를 끝내고, 1990년 12월 1일, 한국일보 #

북한 당국의 경제 정책이 이상하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느끼며 아예 어떻게든 이를 어기며 사는 사람들이 과반 이상이다. 다만 북한을 빠져나와야 알 수 있는 군사력 강화로 미국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통일도 이루어낼 수 있어 부강해진다는 식의 주장은 깬 사람 정도나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에도 무기를 아무리 만들어도 나라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이 우상화 선전은 안 믿어도 북한 당국의 행태에 따르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남한에서도 약간의 거짓말과 푼돈에 북한에 기밀을 빼돌리는 장교도 있으나, 훗날 김일성의 통치술을 전수받은 김정일의 요리사가 된 후지모토 겐지 같은 선진국 일본 출신조차 '자신이 일본에서 평생을 초밥 요리사로 일했다고 벤츠를 몰아볼 수 있었겠는가'라며 북한에 충성하게 될 정도였다.

천리마 운동 같이 북한이 김일성의 리더십으로 60년대 즈음에 잘 살았다더라라는 주장도 많이 퍼져 있으나, 그건 국부를 김일성의 무리들이 다 가져가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겨우 연명할 정도의 물질적인 보상만을 제공하여, 한민족 중 가장 키가 컸던 함경도 출신이 많은 탈북자들의 키를 재보아도 남성은 해방 이후 출생자부터 평균 키가 남한 주민보다도 작았다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여성도 늦어도 60년대부터 밀린다. # 정신력이 부족하다며 일반 주민들을 갈구면서[71][72]인민대중이 강한 정신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아무리 현대적인 군사 기술수단과 든든한 경제적 밑천을 가지고 있어도 침체와 답보를 면할 수 없지만 인민대중이 불굴의 정신력을 발양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불가능도 가능으로 전환시킨다."는 구절이 나온다. 출처] 그들이 만들어낸 몫을 저들이 다 가져간 것뿐이지, 일제강점기 이후로 90년대 대량 기근 사태인 고난의 행군기까지 북한 주민들의 평균키가 아예 안 자랐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이 다 가져가 놓고서는 그 지위를 유지하고자 외부에다가는 평양 중심 같은 잘 사는 모델만 보여주고,[73] 북한 주민에게도 남조선 등이 뼈빠지게 가난하다고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74] 외부 접촉을 광적으로 차단한 덕에 저 당시는 진실은 김일성 측근만 알고 북한 일반인과 북한 밖의 모든 인사들이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75]

주민을 직접 탄압하는 국가보위성 출신 중 중앙에 가까운 경우나 같은 경우나 다른 이유로 중앙에 가까울수록 정말로 탈북을 해도 북한에서 누리는 권세는 못 누리고 심지어 북한에서 사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 수 있다. 가장 노골적으로 주민을 탄압하는 김일성의 최측근들은 남한에서 태어났으면 중산층에도 편입되지 못할 사람들이 많았다. 김일성 동료의 지인의 아들인 현철해 같은 경우도 나이를 속여가며 소위로 입대하며 김일성에게 아부하더니 지방간, 고지혈증, 당뇨 같은 질환[76]으로 호사스럽게 먹다가 죽었다. 물론 일반 주민들의 정신을 최대한 조종하고자 하였으나, 인간은 자신의 본능에 거스르는 세뇌가 불가능하여 외부에 대한 인식을 속이는 방식으로만 주민 세뇌가 가능한 터라 외부 정보를 접하는 순간 김만철 일가의 사례처럼 바로 김일성 가문에 깊은 배신을 느꼈다. 다만 저렇게 외부 정보를 극단적으로 차단시키면서 외지인들이 듣기엔 터무니없기 그지없는 김일성의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든 모르든[77] 그를 근거로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조직을 실제로 구축한 것이 더 경악스러운 것이다. 이렇듯 김일성은 조직을 다루며 보신을 하는 능력은 수준급이었으며, 고위 간부조차 김일성의 계획을 잘 모르거나 속는 등 가면을 쓰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또한 김일성은 권력유지를 위해서 "독초는 적시에 제거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며 북한 체제에 조금만 거슬리면 그 사람의 3대에 연좌제를 적용해[78] 지옥과도 같은 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 쥐어짜면서 학살하는 것은 물론이고[79] 단체생활을 통해 국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어[80] 국민들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도록 한 데다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며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국민들을 3개의 계급으로 나눠 카스트와 같은 전근대적인 신분제를 20세기에 구축하는 등[81] 46년간 집권하면서 무자비한 학살[82]과 인권 탄압을 자행하며 폭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더욱이 김일성은 사회주의가 반대하는, 자신의 자손에 대한 권력 세습[83]에 수십년간 공을 들여 이런 실태가 영구적으로 유지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권력지향성과 더불어 비도덕적이며 비열한 일을 많이 했다. 자본가들의 투자를 받을 때는 온갖 좋은 약속을 다 하지만 일단 투자를 받은 후에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70년대에 빼앗은 스웨덴 볼보 자동차가 아직도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고 하며, 스웨덴의 채무국 가운데 채무 이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 뿐이라고 한다.[84] 심지어 소련과 중국의 빚을 제때에 갚지 않는 일조차 흔했다. 1980년대에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으로 재일동포들은 북한에 투자하였지만 자기들이 이를 가로채고 투자금도 거의 돌려주지 않았다. #

게다가 외부 교류를 통해 자신에게 반하는 뜻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 아니라 양국의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도 38선을 막아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만나지도 못하게 했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전쟁이 멎고 30년이 지나서 김일성 생전 단 한 번 실시하여 남북 도합 100명만 만나게 하였다. 남한만 해도 실향민 약 140만 명 정도의 인원은 죽기 전까지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고, 이산가족은 1971년 기준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의 1/5에 달하는 총 천만 명은 된다고 평가받았을 정도다.[85]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김일성에게 복수를 해야되겠다며 군대에 말뚝을 박은 사람도 나왔고, 김일성에게 가능한 욕을 다 퍼붓는 등 한맺힌 절규가 잇따랐다. 그나마 김정일 시대가 되어 가족을 만난 경우도 있었으나 3만 명도 되지 못했다. 당시 만난 사람들조차 교도소 면회하는 사람마냥 감시받아야 하여 오히려 상봉 후 우울증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2021년까지도 남한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하여 적극적으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 중에서도 80%는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86] 세습을 가장 반대하는 사회주의를 거스르면서 자기 자식도 폭군으로 키웠지만, 정작 혈육을 다른 나라보다도 중시하던 한국인에게 죄값을 계산하기도 힘든 행위를 하던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은 권력을 얻는데 쓰던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변화하는 국제정세조차 무시한 채 해외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고는 "세상에 부럼없어라"와 같은 선전 문구들을 동원해 국민들에게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세뇌시키면서 국정 운영도 폐쇄적으로 해서[87] 그가 죽을 무렵에는 북한을 명실상부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만든 것은 물론이고[88] 경제 수준마저 한강의 기적으로 선진국 문턱까지 솟아오른 남한과는 정반대로 북한을 최빈국 문턱 수준으로까지 후퇴시켰다. 비록 북한의 최빈국화는 김정일 시기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89], 북한의 최빈국화는 김일성 체제에 기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김일성을 북한을 세계 최빈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90]

그럼에도 김일성이 워낙 국가를 폐쇄적으로 운영하고 국민들을 세뇌시킨 나머지 김일성의 집권기에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자신이 노예화되고 국가 상황이 나빠진 줄도 몰랐다.[91] 남한에 가족이 있던 사람들, 기독교 같은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92] 등 분명 속앓이를 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불만은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남북한의 화해·재통일 및 북한의 정상국가화가 기약 없이 보류되고 영원히 없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명색이 갈라진 한반도의 북쪽의 지도자였으면서 통치기간 내내 한국과 세계에 적대 위주의 태도만 고집했으며, 전쟁은 비롯하여 군사적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후계자들까지도 그런 입장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가 워낙 말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의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소 간의 갈등 심화와 좌우 사이의 새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방향성에 대한 대립 때문에 어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전쟁이 없은 채 국내 정치인들 간에 타협이 어느 정도 되었다면 분단이 실제 역사만큼 길어지거나 남북관계가 실제 역사만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후 긴 세월에 걸쳐 남북한의 청년들이 군대에 징집되어 그들의 시간을 잃어 온 것까지 이 모두가 김일성과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폭압적인 체제로부터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아들과 손자인 김정일김정은은 모두 김일성이 닦아놓은 기반과 정책 위에서 권력을 세습받아 잔혹한 학정과 대외 도발, 경제 파탄, 국민 세뇌, 우상화, 사치를 벌이고 무능한 경제정책과 대북제재 자초로 경제를 후퇴시키는 것인 만큼 김일성 한 명만 아니었어도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그로 인한 모든 비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이 지금처럼 세계적 강대국 내지 경제대국들이 즐비한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극빈국이자[93][94] 2차 대전 후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가 될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은 전술한 것처럼 반세기 동안 집권하며 만행들을 저질러왔음에도 고국 내부에서는 사후 30년이나 된 현재까지도 그 어떠한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계속되어 마치 신인 것처럼 숭배되고 있으니[95] 더욱 통탄할 일이다.

전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극악한 독재자로 여겨지지만,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남북 분단 및 고착화 + 6.25 전쟁 + 수많은 이산가족 양산 + 남북 간의 대립 + 남한 반공주의의 극단화[96] + 남북한 징병제 + 북한의 인권탄압 + 북한의 최빈국화'의 책임을 혼자 전적으로 가진 원흉으로서 이완용도 능가하는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인물임과 동시에 한민족의 반역자, 절대로 존재했으면 안 됐을 물건으로 영구적으로 비판받는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다.[97] 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한국인들도 그를 아돌프 히틀러폴 포트도 능가하는 마귀 이하의 물건이자 인간 도살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악행들을 수도 없이 저질러왔지만, 특히나 6.25 전쟁을 직접 겪었던 대한민국의 1940년대생 이전 노인 세대들은 김일성에 대한 차원을 달리하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 김일성이 야기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직접 가족이 죽거나 이별하고 김일성의 군대로 인해 재산도 빼앗기고[98] 김일성이 점령지에서의 권력 강화를 위해 재산과 권력에 대한 피해 의식을 기반으로 부추기던 질투심과 증오로 인해[99] 마을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싸움을 하는 등 비극을 겪고, 나라가 3년 만에 세계 최빈국으로 초토화되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김일성의 생전에는 인터넷이 요즘과 비교하면 없다시피했기에 김일성의 만행이 해외에 그렇게까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오히려 아들인 김정일은커녕 손자인 김정은에게도 악명이 밀린다.[100]

정치적 측면에서 좌우파 모두에게도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좌파에게서는 세습과 계급적 착취나 앞뒤를 안 가리는 권력욕[101][102]으로 비판받는다.[103] 또한 민족주의자에게도 자국민 인권 탄압과 6.25 전쟁 개전으로 비판받는다.

4.3. 세계사적 평가와 여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지 고작 5년 후에 김일성이 불법 남침을 결정함으로써 초래한 비극은 비단 한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상흔을 남긴 비극이기도 하다.

1950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제1세계제2세계 간의 대립은 베를린 봉쇄 등으로 인해 물밑에서부터 서서히 가시화되고는 있으나 본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의 침략전쟁과 그들을 적극 지원하는 공산권의 모습은 자유 진영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다시 2차 대전 이후 일어났던 평화적 세계 질서 구축을 위한 노력을 전부 허사로 만들었다. 내부 단속이라는 미명 하에 적대감과 극단주의가 양 진영 내부에 팽배했다. 소련의 경우 군대를 동원해 동독과 폴란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였으며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으로 인한 마녀사냥이 횡행했다. 6.25 전쟁으로 인해 냉전이 발발했음이 명백히 각인되었고, 세계는 다시 한 번 전쟁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또한 김일성의 행동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 청산을 심각하게 방해했다. 공산권의 침략에 대한 공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그 방파제로서의 독일일본의 재건이 우선시되었으며, 때문에 1950년을 기점으로 2차 대전의 전후 처리는 매우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좌파 세력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어쨌든 주축이 제거된 추축국 잔여 세력은 명령에 따르기만 했다는 참작 사항이 존재하면서 자유주의 우파 서방 세력과 똑같은 반공 보수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손을 잡을 만했기 때문이다. 가령 반인륜 범죄의 책임을 지고 완전히 해체되었던 독일군은 6.25 전쟁을 계기로 독일의 방위 필요성이 대두되어 부활하였다. 홀로코스트에 가담하며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구 독일 국방군 인사들 역시, 공산 국가들과 싸운 경험을 제공하는 댓가로 사면받았다. 당장 6.25 전쟁 발발 직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연합국 몰래 비밀리에 재무장 정책의 초안을 만들 때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나 헤르만 푀르취 같은 나치 부역자들도 상당히 기여했다.

같은 이유로 일본의 정상국가화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전쟁 발발 고작 한 달 뒤 경찰예비대가 설립되었고, 이들은 곧 자위대가 된다. 2차 대전 당시 침략전쟁에 가담했던 많은 일본 정계 인사들과 전범기업들도 연합군의 처벌을 피해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쟁특수를 톡톡히 누리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실제로는 개인적으로 뼛속까지 반일이었던 이승만조차도 친일파들을 숙청하지 않고 중용했을 정도로 1950년대 당시 레드 콤플렉스는 심각했다.[104]

때문에 북한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파시스트로부터의 해방자라고 평가하는 김일성이 같은 민족 수십만 명의 핏값으로 살려낸 구 추축국 인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목숨을 구한 것을 넘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기까지 했으며, 그 여파는 현재까지도 대안 우파, 네오나치, 일본 극우, 넷우익 그리고 뉴라이트라는 암적 존재로 자리잡았다.[105][106] 반대로 김일성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잃어버린 2차 대전의 피해자들은 그보다 몇 배 이상으로 많다.

8월 종파사건 당시 다른 좌파 인사들이 숙청당하는 바람에 주체사상이라는 좌파 역사상 기괴한 이념[107]이 탄생했고 이는 현재의 북한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좌파에게도 영향을 미쳐 NL, 일본 신좌파처럼 권위주의적이고 반서방적, 반지성적으로밖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여파로 동아시아가 우파 강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국의 민주당계 정당에게도 미쳐 김대중, 노무현이 중도주의적으로 지지자들을 이끌려는 노력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뿐만 아니라 북한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게 만들었다.[108]

5. 여담

  •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金聖柱)였으나 1929년에 김일성(金日星)으로 개명하였다. 1935년에는 한자 표기를 金日成으로 변경했다.[109] 북한식의 변형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쓰면 Kim Il Sŏng이 되고 기존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Kim Ilsŏng이 되겠으나, Kim Il Sung은 당사자가 쓰던 표기가 굳어진 것으로 보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의 라틴문자 표기법 참고. 한어병음로는 Jīn Rìchéng(진르청. 항일 투쟁 시기에 알려진 '진지첸' 등의 표기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로는 Ким Ир Сен(킴이르센)[110]. 소련 체류 시절에는 러시아식 이름[111]도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 6.25 전쟁을 일으키긴 했으나, 자신이 적대하던 대한민국이승만과는 의외로 별 접점은 커녕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다. 애초에 광복 이전까지 둘은 별 접점이 있을 법한 인생사를 살아오지 않았으며,[112] 이승만은 김구와 달리 김일성은 협상이 일체 통하지 않을 고집스런 인물임을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또한 휴전 협정에도 반대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판문점 휴전 협정장에도 찾아가지 않아 평생 김일성과 대면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에게 있어 적국의 수장인 만큼 연설로는 서로를 매국노, 반역자라고 비난했다.[113]
  • 자신의 손자 김정은처럼 상당히 어린 나이에 일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처음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던 1946년에는 34세였고, 북한 임시정부 시절이었던 당시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바지사장을 내세웠었다. 대표적인 바지사장이었던 최용건이나 김두봉에 비해서도 물론 한참 어린 나이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을 일으켰을 땐 고작 38세였다. 남쪽의 이승만이 한국전쟁 당시 70대의 노인이었으므로 거의 아버지와 늦둥이 아들의 나이 차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후술할 김일성 가짜설이 도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김일성의 가족관계와 출신성분을 생각하면, 정말로 공산주의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라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 북한이 정말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였다면, 김씨조선의 집안은 가장 먼저 숙청을 당해야 할 입장이었다. 물론, 북한은 지금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고 그 놈의 엉터리 주체사상으로 만들어진 전제군주제 국가나 다름없는데, 현재 북한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헌법에서 제외하고 금지시켜버린 국가라서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을 주장하면 정치범으로 숙청되어버린다. 그래서 북한이 극좌계열처럼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극좌성향도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근원인 제3의 위치와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김씨조선 집안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생부터 출신성분에서 무조건 걸러내야 하고 박멸해야 되는 타도의 대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래의 내용같은 공산주의 유머도 있다.
제목 : 당신은 주체조선에 어울리지 않소.

"동무의 집안은?"

"증조부지주놈의 묘지기였소."

"계급주의의 개였군. 동무의 조부는?"

"리조시대에 지방관을 하댔지요."

"봉건잔재의 끄나풀이구만기래, 동무의 부친은 무엇을 하댔소?"

"한약방을 운영하는 의사였다오."[114]

"인텔리 분자였구만. 집안에서 믿는 종교 같은 것은 있소?"

"어마니의 성함이 베드로(반석)였댔소."

"이거이거, 종교까지 믿다니! 네놈 집안은 완전히 반동 놈의 집구석이구만! 이런 반동 놈! 어디 잘난 이름이나 한번 들어보자우!"
"김일성."[115]
  • 대략 1970년대에 김정일기쁨조를 만들어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고[116] 자기 세력을 확보하였다.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김일성의 경호원을 1년 6개월 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쁨조는 1975년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인민국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음팔이가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여자를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부터 기쁨조를 신명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똑같이 1971년 득남을 했는데 김일성은 김현, 김정일은 김정남을 각각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종요처럼 75살에 김백연을 득녀했다.
  • 북한 사람들은 키가 무려 193cm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키는 177-180cm 정도 된다.[117] 말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177cm면 2022년 한국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며,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장신이다. 더불어 1930~1950년대 기준으로는 세계 기준으로도 꽤나 큰 편이었다. 서로 비슷한 키도 아니고 아래 쪽에서 올려다보면 상대방의 키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고 김일성은 키에 비례해 덩치도 제법 되기 때문에 키가 작은 옛날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얼핏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164cm이었음을 감안[118]하면 현재 한국 평균 키로 환산하면 188~190cm이 된다. 즉 체감상으로는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기에 저런 소문이 돌았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김일성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였다. 티토의 추정 키는 대략 172cm 정도로 추측된다.
  •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후덕한 얼굴이 북한 기준으로는 잘생긴 외모다. 김일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신격화하는 북한이 김일성의 외모까지 찬양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119] 의외로 젊었을 적 외모는 남한 기준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긴 하다.[120] 다만 북한은 젊은 김일성의 얼굴에 대해서도 '출중한' '준수하고 환한' '수려한'은 기본에 심지어는 "얼굴은 태양이요, 몸매는 산악인 듯 근엄한데 안광에는 천 리도 순간에 뚫을 듯한 영채가 뿜어 나왔다"는 등의 심하게 과장된 평가를 남겼다.(...)[121] 아들손자의 젊었을 적 외모와 비교해 봐도 훨씬 외모가 좋았다. 김일성 본인은 이러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 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47년 이후 살이 찌기 전의 이야기. 45년에 처음 북한에 들어왔을때는 마르고 날씬한 체형이었으나 북조선 인민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매일같이 산해진미와 보약을 먹어대면서 급격히 살이 찌기 시작하여, 턱선이 무너졌고 결국 혹까지 생겨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6.25 전쟁 개전 직전 스탈린에게 최후 승인을 받으러 갔던 김일성에게 1945년의 마른 모습을 기억하고 스탈린이 살쪘다고 놀리기도 했다.

    다만 손자 김정은처럼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초고도 비만까지 찌지는 않았다.
    • 흔히 김정은이 살찐 것이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알려져 있는데 2020년 기준 김정은의 비만도는 김일성이 가장 뚱뚱했던 시절보다 심각하게 더 쪄 있다. 처음에는 따라한거라고 해도 김정은의 경우는 생활 습관 자체가 잘못된 것에 가깝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내외적으로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 때까지는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7년부터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 기념 연설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 연설 1977년 12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한 연설 1994년 1월 1일 신년사
  • 기록영화에 남은 생전 김일성의 목소리는 상당히 걸걸했다. 이는 김일성의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젊은 시절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육성 녹음을 들어 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손자인 김정은의 목소리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는 김정은이 집권 초기부터 김일성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런 김일성의 목소리를 '친근한 음성'으로 선전한다.[122]
  • 1994년 지미 카터를 만나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사망했는데 1994년 당시 칠순이었던 지미 카터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다. 참고로 한국 한정으로 지미 카터는 그가 만난 독재자들이 얼마 가지 않아서 권력을 잃거나 사망한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여겨져 농담삼아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이 있다.[123]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 정말로 지미 카터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는 진지한 분석들이 있기는 하다. 지미 카터가 주선한 북미 대화 및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로, 6.25 전쟁 중에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고는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124]인 김태서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125]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 쪽으로 닿는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안이 정말 전주 김씨인지를 교차검증할 만한 자료가 마땅치 않다. 1915년 전주 김씨 대동보가 편찬되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으며 김일성 일가가 살았던 평안남도 대동군 일대가 누락되었다. 따라서 문서로써 김일성 일가가 확실히 전주 김씨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전주 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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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에 혹이 있었으며, 특히 이 꽤나 쪄 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김씨 일가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하였고, 만약에 논할 경우엔 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988년 북한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때 프랑스 취재진이 녹화한 영상에 그의 혹이 드러난다. 20초 부근 참고.[127]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 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도 있었으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후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기에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남북고위급회담 차 방북했을 때, 김일성을 예방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내외통신(현 연합뉴스) 기자에 의해 혹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도 있다. #
  • 위의 이유로 김일성에게는 목 뒤의 혹과 사실상 왕국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삼대세습 정치체제를 로마 황제식으로 비꼰 '혹부리우스'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된다. 아들 김정일은 머리 모양을 따서 '뽀그리우스'. 여기에 묘호룰 붙여 태조 혹부리우스, 핵종 뽀그리우스로 불리곤 했다. 2010년대 초반에는 김정은도 이 전통을 따라가서 돈종/저종 꿀꾸리우스로 많이 불렸으나 이후에는 시들해진 상태.
  • 김일성의 전직 주치의가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김일성이 젊은 청년 피 뽑아 한 달에 한 번씩 피갈이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피갈이의 부작용으로 목 뒤에 혹이 생겼다는 것이다. 20대 내내 김일성에게 피를 헌납한 청년들은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과 같을 정도로 폭삭 늙었다고 전한다. 실제 나이는 20대인데 외모는 70대처럼 변했다는 것이다.[128]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129] 그래서인지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다. 예외적으로 1966년과 1970년에는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반대로 비밀주의를 표방하던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130]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그의 주장이 지금까지도 정치에까지 미치는 남북한 언어에 중대한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 교과서조차 그의 주장을 검증하지 않고 인용하는 바람에 셀 수 없이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 북한에서는 표준 규범인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와 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그러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 없는 일인데,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로드리고 두테르테, 훈 센과 같은 정치인들이 막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비하면 상당히 양반이며 적어도 미국이나 필리핀, 캄보디아는 대놓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상스러운 욕설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나, 일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전투적 화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 그런데 이것도 지도자의 품격에 따라 달라져서, 김정일 때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북한을 외부에서 대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히 주목을 받던 표현이지만, 김일성 일가를 찬양할 때도 당연히 '전투적 화법'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부드러움을 넘어 낯간지러운 표현도 많이 쓰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이들에게 쓰이는 높임말이 구분되어 '몸소', '서거', '가르쳐주다', '사랑', '선물' 같은 표현을 이 지도자의 행동을 대상으로 주로 쓰게 하였다.
    • 더 심한 것은 분단 전 조선어학회 등이 욕까지도 서울 방언에 기반해 설정한 결과를 반영한 이 표준어[131]를, 아예 평양말이라면서 거짓말을 하면서 서울말은 오염되었다는 식으로 대결을 부추긴 것이다. 김일성은 평양말이란 평안도 사투리가 아니라는 빨간 것을 파란 것이라고 주장하는 궤변[132]을 섞어가며 문화어에서 서울 방언에 유래한 요소가 많음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세뇌하면서 '평양문화어'라는 주장을 세뇌시켰다. 일반인의 양심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뻔뻔하고 끈질긴 거짓말이기 때문에 지금도 '평양말'이 서울말과 비슷한 것인지 등을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으며, 그 손자 김정은도 '평양'이라는 타이틀에 매우 집착하여 평양문화어보호법으로 일반 직책에 '님'을 붙이는 사람 등을[133] 거의 비유적 표현이 아니고 공개처형까지 지시하며 사실상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 북한 당국이 자신이 남한보다 민족어를 지킨다는 것도 김일성의 거짓말이다. 외래어 순화의 수준은 사실 통계적으로 분석하면 남한에 가까웠지만, 여기다가 북한에서는 민족의 언어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의 공적을 숨기거나 폄하하기 때문이다. 현 북한에서의 역사교육에서 한글 창조를 세종대왕이 아니라, 김일성이 완성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실제로 탈북민 유튜버 놀새나라TV 에서 역사시간에서 배우기를 세종대왕님이 조선글을 창조하시다 그만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조선글을 완성하였다. 라고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는 한글날이 조선글날이라는 이름으로 있긴 하지만,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134][135]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이걸 실제로 믿는다. [136]
      • 애초에 북한은 TV가 2016년까지 지방은 조선중앙TV 한 채널이 끝이었고, 평양은 약간 풀어주는 대신 더 심하게 세뇌교육을 시켜버리니 진짜로 믿는것. 다만 지역마다 배우는건 좀 다른 모양이다. 인터넷에 유출된 교과서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인민의 요구를 악용하여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한다.
      • 분단 전 민족 언어문화를 발전시킨 사람 중 김소월 등 한 단원 정도로 남한에서 유명한 사람의 작품[137]이 2010년대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렇지만 60년대 후반 도서정리사업 때 그의 시가 유행하고 있었는데도 그 시집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 북한에서 외래어도 많이 쓰인다. 영어 fund에서 유래한 '몫', '할당량' 등을 뜻하는 '폰드(뽄뜨로 아는 사람이 많다.)' 같은 남한도 안쓰는 표현이 쓰이고, 중국에서 순화해서 쓰는 텔레비전, 컴퓨터, 마우스, 미사일 같은 표현도 북한은 '텔레비죤', '콤퓨터', '마우스', '미싸일'로 부른다. 심지어 잔을 외래어로 부르면 남한은 영어에서 유래한 '컵'이라고 하지만, 북한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고뿌'를 쓴다. 테제라는 단어도 남한보다 인지도가 높다. 그러나 세뇌 교육 탓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어느 게 순우리말이고 어느 게 외래어, 한자어인지를 잘 구분 못한다. 심지어 아빠트(아파트)가 외래어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남한에와서도 자신들이 외래어를 많이 쓴다는 것을 모르고, 남한의 새 문물을 보고서는 남한의 동조[138]와 더불어 '남한말이 정말로 영어, 일본어에 오염되었다'며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면 북한에서 온 사람들도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 따라서 언어순화 운동 관련 주제에 대해 한국 정치에 가장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정 하에서 '혼다데', '하꼬' 같은 말이 거의 잊혀질 정도로 언어순화 운동이 강력히 추진되고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 음악 그룹 이름까지 순화시키려고 할 정도였지만, 김일성이 언어 순화를 철저히 했다는 정치선전 때문에 기존 보수 우파가 갑자기 자신의 업적을 잊거나 부정하고,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우파를 욕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언어순화를 북한처럼 철저히 하자고 주장하는 혼란이 빚어진 것이다.
  • 해방 이후에는 남측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 당할 뻔했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되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으나,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소련군정문서 19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전에 북한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조만식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 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기념영화까지 나왔으며,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하지만 이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외부에서는 역사 왜곡 서적으로 비판받는다. 그나마도 나중에 나온 2권은 계승본이라고 해서 김일성이 죽은 후에야 당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에서 써낸 것으로 탈북 하기 이전 황장엽은 계승본을 쓰는 것은 코미디 그 자체라고 편찬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후 한참 세월이 흘러 세기와 더불어의 후속작 민족과 더불어가 편찬되기 시작했다.
  •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었으며, 심지어는 남한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143] 실제 1989년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하여 주석궁에 갔을 때는 황석영의 여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했을 정도라 한다. 문익환 목사는 성경책을 보여줬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항일연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김일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조모인 리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국제친선전람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는데, 양강도 삼지연군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1992년 80세의 김일성이 사향가를 부르는 영상도 남아 있다. 들어보면 나이를 감안해도 굉장한 음치다.
  • 서예 활동을 많이 했다.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꽤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개성에 있으며, 인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한의 종합대학 중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는 기나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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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납북신상옥과의 대화 도중 고려연방제의 국호 후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라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의 신라 계승 정신도 좋지 않게 보았다. 위 발언에서는 '우리가'라고 하여 고구려를 망하게 한 계파를 '우리'라고 주장한다고 적혀 있지만, '우리', '그'라는 군말이라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시켰다고 하여 나쁘게 본 것으로 묘사된 경우도 있다. # 아이러니한 것은 김일성 본인이 신라의 혈통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인데 김일성의 성씨인 전주 김씨경주 김씨의 분파로,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김태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인데 원래 경주 김씨였던 인물이 전주로 건너와서 분점을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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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정권도 초창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기에 김일성과 태극기가 나란히 있는 사진들이 있다. 심지어는 위의 사진처럼 김일성이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영상도 있다. 지금 와서 보면 매우 어색한 모습이기도 하다.
  • 장성택의 길이라는 책에 의하면 김일성은 자신의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던 시점에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10명을 불러 모은 뒤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는 권총 열 자루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후계와 체제 문제에 대한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그 발언은 "만약 자신이 죽은 후 후계자인 아들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댄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 총으로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한다. 하지만 이 일화를 소개한 라종일이 부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총 열자루를 나눠주면서 김정일을 받들어 모시라는, 충성을 당부하는 부탁이었다는 정반대 방향의 증언도 있다.
  • 2023년에도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의 실향민김형석 씨가 존재한다. 북한에서 1947년까지 살다가 하나 둘씩 조용히 주변 인물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월남한 것이다. 김일성은 아이 때부터 골목대장의 성격을 가졌으며, 지식보다는 의지가 강하고, 목적의식이 강했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를 젖 먹여 키운 할머니가 김일성에 의해 자식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그놈, 내 아들 두 놈 다 잡아 죽일 줄 알았더라면 그때 젖꼭지로 콧구멍을 막아서 죽이는 건데 못했다'라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
  • 어려서 중국인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국어는 대단히 능통했다. 영상으로 보다시피, 김일성은 한국어 억양이 약간 섞인 중국어 동북방언 억양으로 말했는데, 이는 그가 지린성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펑더화이 역시 김일성이 지린성 억양을 썼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외에 월어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중국어 방언도 수준급으로 구사할 줄 알아서 통역 없이 회담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을 방문하면서 통역을 대동하지 않고 그냥 즉석에서 대화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경우에는 호남성 사투리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나중에 솔직히 마오쩌둥이 뭐라고 하는지는 못 알아들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세련된 중국어를 사용한 저우언라이와는 불편함없이 유창하게 소통했다. 러시아어는 30대 되어서 배우긴 했지만 소련에서 몇년 살았기 때문에 통역 없이도 그런대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은 되었으나 중국어만큼 유창하진 못했고 이 때문에 고려인 출신의 유성철, 문일 등 러시아어 통역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 북한 주민들은 무조건 김일성을 신으로 모시며, 탈북한 사람도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나, 불행 중 다행히도 이는 북한 당국의 선전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현 시점에서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당장 6.25 전쟁 직후에도 전쟁으로 가난해졌으나 너무 감시가 삼엄하고 밀고자에게 대가를 잘 주어서 불만이 진압당한 것이며, 김일성이 독재 체제를 완전히 구축하기도 전인 6.25 이전에도 김일성이 학창 시절에 2차례나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CIA 보고서에도 기록되었을 정도로 널리 퍼졌던만큼 당대 북한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불만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출생한 북한 주민은 김정은을 ‘아버지 원수님’으로 김정일을 ‘할아버지 대원수님’으로 불러야 한다면 김일성에 대해서는 ‘증조 할아버지’로 불러야 맞지 않냐며 비꼬면서 자신에게 해준 것도 없는 옛날 할아버지 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 이미 도시에서는 김일성 동상 근처에서 북한 당국 입장에서는 '불경스럽게' 데이트를 하기도 하며 언론 뿐만 아니라 강나라 씨 같은 탈북자도 증언한 바 있다. 20대의 부모 세대라면 좀 존경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바깥 세계를 경험하거나 김만철의 사례 같은 것을 접하면 바로 증오로 바뀐다.[147] 애시당초에 정치적 통제의 일환으로 조직생활을 강요한 장본인이 김일성인데, 이런 것이 굶주림보다 끔찍하다고 증언하는 경우도 많다. 북한 밖에서도 김일성을 진심으로 존경할 부류는 높은 정치적 지위를 북한 체제에서 누릴 수 있는 경우, 아니면 이런 월북 사건의 당사자처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밖에 없다. 북한의 구세대들이 김일성 시대를 그리워한다고 하는 경우도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대를 경제적 호황기로써 그리워한다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148]
애초에 2015년 3월 자유아시아방송평안북도의 한 소식통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을 '최고존엄'으로 떠받들던 시기는 '고난의 행군 시대에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일단 북한의 가정마다 있었던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있는 저작들과 김일성의 회고록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오래전부터 휴지와 땔감으로 애용되었다고 하며,[149] 김정은 정권이 새로 만든 김일성•김정일 배지는 장마당에서 입쌀 1kg 값도 되지 않는 5천 원에 팔리고, 덤으로 이들은 "북한주민들에게 '최고존엄'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북한 주민들도 자본주의의 맛(?)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언급했다. # 이 말대로라면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은 진심으로는 김일성 일가의 '공'을 이해하지는 못할 망정[150] 겉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김일성 일가를 존경하는 '척'하고 북한의 거짓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 의외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은 일반민중 뿐 아니라 당 간부를 가리지 않았는데, 김일성 또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당시 김일성은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2번 이상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1951년부터 휴전 때까지 김일성은 평안남도 강동군 시정면 곤지리의 전선사령부에서 지냈는데, 1951년 7월 29일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그가 앉아있던 곳에서 불과 1m 지점에 총알이 박혔으며, 8월 4일에는 사령부 뒤뜰에서 500kg짜리 폭탄이 떨어졌으나 불발이어서 살아남은 일도 있었다. 당시 김일성이 머무는 동안에 전선사령부에 떨어진 미군 폭탄이 무려 149개라는 점에서, 김일성 또한 미군의 폭격에서 생명을 보장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일성 또한 북한 인민들 처럼 미군 폭격의 공포를 직접 체험한 것. 물론 6.25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인 만큼 김일성이 폭격으로 죽을 뻔했던 것은 사실상 김일성 본인의 업보이며, 무엇보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미군의 폭격에 무고한 한반도 주민들이 살상당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 1983년 2월 14일자 뉴욕 트리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평양에 들른 한 쿠바인 기자는 김일성과 회견하고는 원숭이가 제 아무리 높은 왕좌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원숭이의 왕좌라는 내용의 중국 속담을 떠올렸으며, 4시간 30분 동안 '사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가로서 모든 인민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사상을 듣고는 '도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며 김일성을 '정신분열적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묘사했다.[151] 이후 그 기자는 6개월 뒤 하노이에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평양에 들렀다가 쿠바 대사관에서 실수로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빈 병과 깡통을 쌌는데, 대사관에 있던 북한인 직원이 이를 보고 밀고하였고, 그 기자는 다음날 외교부에 호출되고는 '위대한 지도자' '민족의 아버지'의 사진이 실린 신문지로 폐품을 싼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152] 즉, 김일성은 같은 공산권 국가 사람에게도 정신 질환자 취급을 받을 정도였던 셈이다.
  •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 4월 15일 바로 그 날에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으며, 4월 15일은 킬링필드의 주동자 폴 포트가 사망한 날짜이기도 하다. 정말 우연인 일이긴 하지만 북한 당국은 그걸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본인들이 모시는 수령이랑 엮어서 서구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조선 사회주의의 기상이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5.1. 독재자들의 우상

생전에 우상화를 통해 전국민의 '존경'[153]을 받은 것과 동시에 짐승만도 못한 만행들과 거짓말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도 반세기 가까이 집권하며 절대권력과 최고급 저택, 최고급 음식, 여성 편력, 장수 등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고 죽은 후에도 그의 후손들이 3대째 권력을 세습받으며 대대로 나라를 통치하고 고국에서 비판 여론 하나 없이 무한한 '숭배'를 받고 있다 보니 많은 독재자들이 그를 존경하며 모방하기도 했다. 2차 대전 후 집권한 독재자 중 마오쩌둥, 가말 압델 나세르와 함께 가장 많은 독재자들에게 영감을 준 독재자이자 사실상 독재자계의 아이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술하듯 북한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최악의 독재국가들인 투르크메니스탄과 에리트레아도 다 북한을 모방하며 독재 체제를 확립할 정도였으며, 짐바브웨와 에리트레아는 독립영웅이던 사람들이 북한에 감명을 받아 아예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이 독립시킨 고국을 처참히 망가뜨렸다.

그러나 하단의 독재자중 장기 집권을 이어가거나 천수를 누린 독재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다수가 김일성의 독재를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처형이나 실각 등의 방식으로 몰락했다.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루마니아): 김일성을 모방한 우상화 정책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며, 심지어 아들 니쿠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김일성과 다르게 1인 독재를 확립할만한 정치공학적인 능력이 부족했고, 민중봉기로 정권이 붕괴할 모든 여지를 제거하지 못해 끝내 아내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로버트 무가베(짐바브웨): 구쿠라훈디 학살 때 북한의 지원을 받은 제5여단을 쓸 정도였고, 고위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사상을 알기 위해 주체사상을 공부하거나 아예 주체사상을 신봉하기까지 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주체사상에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 국민들이 쫄쫄 굶는 와중에도 김일성에 버금가는 초호화 생일파티를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며, 잠재력이 풍부하던 나라의 경제를 전란 하나없이 미스터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망가뜨린 것[154] 역시 북한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만의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지 못했으며 군부를 적으로 돌린데다[155] 독립한 고국을 식민지 시절 이상으로 박살냈다보니 국민 절반 이상이 그를 싫어했으며, 독재자 자리를 물려받을 기반조차 없는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에게 별다른 준비도 없이 세습하려다가 에머슨 음낭가과가 일으킨 쿠데타에 당해서 결국 실각을 당해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싱가포르에서 사망했다.
  •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적도 기니): 김일성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축출되기 직전에 자식 3명을 북한에 보낼 정도로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본인도 적도 기니의 독립 1년 후인 1969년에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생긴 북한 주재 적도 기니 대사관을 통해 북한의 통치 수법을 익혀가며 자신의 독재 기법을 확립해[156][157] 북한도 뺨치는 학정을 저지르며 인구의 최소 절반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혔다.[158] #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리트레아): 북한 체제에 감명을 받아 이를 모방한 체제[159]를 자국에 구축하며 에리트레아를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국가로 만들었으며, 이들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집권 중이다. 그나마 김일성보다 확실히 나은 점이라면 사치와는 거리가 매우 먼 인물이라는 것.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인물로 보인다는 점은 오히려 김일성보다도 스탈린과 더 가깝다.
  • 시아드 바레(소말리아): 그가 롤모델로 삼은 두 인물이 바로 가말 압델 나세르와 김일성이다. 덤으로 바레 시절 소말리아가 숨 막힐 정도로 매우 촘촘한 감시 체제를 유지했던 것도 북한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 폴 포트(캄보디아): 김일성을 존경했는지 여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163] 키우 삼판 주석이 "우리는 모두 앙카르(크메르 루주 수뇌부)의 보호를 받는 커다란 가족입니다."라고 사회주의 대가정론을 연상시키는 말을 하기도 한 것과[164] 집단농장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생활총화를 실시한 것[165], 극단적인 민족주의 강조 등으로 미루어볼 때 북한 체제를 접하고 이에 감명을 받아 자신들의 체제에 적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북한 체제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냥 사상을 짜다가 우연히 북한과 겹쳤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 이상으로 말도 안되게 극단적인 통치를 일삼았으며, 난데없이 베트남을 침공하는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배트남의 반격에 당해 5년도 못 가 정권을 상실한채 10년넘게 정글에서 게릴라전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가 캄보디아의 신 정권에게 체포당했다.
  •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티오피아): 198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본 국경절 행사에 감명을 받아 1984년 집권 10주년을 맞이해 당시 가치로만 1억 달러를 들인 대규모 행사를 열었는데, 행사를 기획, 감독한 사람들이 북한의 고문들이었다. 문제는 행사에 마련한 예산이 해외의 기근[166]30만~120만 명이 사망한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이는 라이브 에이드We Are the World 공연에도 큰 영향을 줄 정도로 국제적으로 파장이 엄청나게 컸다.] 원조금을 횡령하며 마련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 모부투 세세 세코(자이르[167]): 표면적으로는 반공을 내세웠는데도 1974년에 방북했을 적에 북한의 우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김일성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상화했으며, 그가 내세운 이념인 '모부투주의'도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5.2. 사치 생활

아들손자의 사치와 미식가 행각이 너무 유명해서 가려진 감이 없지는 않지만, 김일성도 경악스러운 수준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168]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해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특혜와 특전도 허용하지 않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했다'고 선전을 하고 있으나 김일성의 실제 생활은 '겸허함', '소박함'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릴 수 없을 수준으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사실 북한은 원래 김일성의 휴양을 위해 각지 명승지에 소규모 특각을 건설하다가 1950년대 말부터 그 규모를 크게 늘려 '특각'이란 이름으로 전용 별장을 대대적으로 건립했다고 한다.[169] 김일성 부자는 풍광 좋은 곳을 골라 중앙당 8국의 전담하에 'OO공사' 라는 명칭으로 전용별장을 짓도록 했는데, 건축 공사는 호흡과 생체리듬에 최적이라는 해발 500m 지대, 경승지 등 자연적 입지조건은 물론 신선한 외부공기의 실내 유입장치 등 건강을 고려한 설계 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얼마나 김일성 부자의 별장 건설에 세심히 공을 들였냐면, 콘크리트는 300~500마르까[170]의 시멘트와 흙 등 일체의 불순물이 없도록 깨끗이 세척한 자갈, 최상급 모래, 오염된 지표수가 아닌 지하수를 사용하는 이외 딸기 향같은 향기까지 배합하여 제조했다. 이러한 별장들은 전부 군대를 동원해 지었으며, 해외 건축가를 비싼 돈을 주고 초빙하여 설계를 맡겼다고 한다.

물론 공사는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내부공사 때부터 일정 구역별로 호위총국 초소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위총국 발행 비표를 지급하여 방 또는 층 등 지정된 담당 작업구역만 출입하도록 하고 있고, 도배, 실내장식 등 마무리공사는 아예 중앙당 8국에서 전담토록 조치했다고 한다. #

김일성이 1년에 자모산 별장[171]에서 보내는 시간만 한 달이 넘었으며, 문에는 상아로 만든 1회용 손잡이[172]가 있었고, 초소구역 안에 사냥구역을 만들고는 그 근처에 콩과 옥수수 밭을 만들고는 일부러 수확하지 않아 동물들이 풍요롭게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이런 별장들 안에서 1년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은 '아미산 대표부'라는 부서를 해외의 유명 도시에 두고는 이 지구상에 있는 최고라는 물건이란 물건을 수입하게 했으며, 프랑스제 헤네시 코냑, 싱싱한 잉어회[173], 원숭이골[174]을 좋아했고, 이러한 사치품과 해외 식료품 구매 자금은 중앙당 39호실이 마약 수출과 골동품, 금을 밀매하는 식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1974년부터 1985년까지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에 있는 창성특각의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박수철(1959년생)의 말에 따르면, 창성특각은 주변에 수풍호와 원시림이 펼쳐 있고 곰, 멧돼지, 꿩 등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최고의 명승지에 있었으며, 김일성이 갈 때마다 늘 반나체 차림의 여간호사가 수행했고, 특각에는 아름다운 처녀 관리원 10여명을 배치해 김일성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한다.[175] 그리고 김일성은 5~7월마다 매년 한 차례씩 40일 동안 창성특각에 머무르며 사냥과 수영, 산보, 낚시, 호수 유람을 즐겼으며, 별장 내에서는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게다가 수영장은 날씨가 좋을 때는 지붕과 담이 자동으로 걷히는 (당시로써는) 최신식이었고 밤에는 불을 밝힌 채 구소련의 노래를 배경으로 정원에서 노래와 춤 잔치가 벌어졌으며, 특각에는 오락실, 음악실, 연회실, 어린이용 놀이방,[176] 광물표본실 등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장에서 김일성 경비는 호위총국(이후 호위사령부) 소관으로 상주 경비대원은 140명이었고 김일성이 특각에 올 때는 기동대원 500여명이 따로 따라 붙었으며,[177] 그 외에도 창성특각은 야산특각과 고산특각, 수영장, 산책로, 선착장, 동·식물원 등의 시설들도 있었으며, 방사선 차단을 위해 지붕에 납이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

또 북한군 대좌(한국으로 치면 대령) 출신이자 북한의 전직 해외 군수담당 조달요원이었던 김정률[178][179]이 201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한, 김일성 부자의 사치 생활을 폭로한 책 '독재자를 위하여'[180]에 따르면 김일성은 외국 음식만을 먹었고, 북한의 요리사들을 유명 요리학교 3곳과 오스트리아의 유명 레스토랑에 보내 직접 '가장 좋은 요리법'을 배우게 하기도 했으며,[181][182] 오스트리아 빈에는 외국 음식 공급을 전담하는 수행원까지 있었고, 그가 가진 수십 채의 초대형 저택들은 모두 커다란 샹들리에[183]와 비단 벽지, 비단 양탄자, 값 비싼 타일, 조명, 위생 설비, 고급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고, 이 빌라 가운데 몇 채는 지하에 건설돼 있었으며 핵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는 환기 시스템을 갖춘 곳도 있었다고 설명했다.[184] 덤으로 김일성의 동굴형 주거 복합 건물 최소 2개에는 원자력 방사선을 막아 주는 통풍 설비[185]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김일성 일가의 별장들은 거의 '오스트리아식' 주택들이었으며, 벽과 천장들을 제외하고는 수없이 많은 '메이드 인 오스트리아' 제품이 설치되었다는데, 실제로 김일성의 별장 내부는 문들과 알루미늄 창문들, 녹슬지 않는 특수 수도관[186]이 다 오스트리아산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은 '자본주의 자가용'인 방탄 메르세데스 600을 위시한 수백 대의 벤츠와 포드, 캐딜락, 시트로엥 등 호화 차량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던[187] 자동차 애호가였으며, 크고 육중한 리무진을 좋아했고, 1990년대 초에 벤츠 200 북한판 버전을 만들라고 지시하기도 했으며,[188] 틈만 나면 차 안에 침대를 설치하거나 '절대로 소음이 없는 운행'을 하도록 요구해야 해서 김정률 등은 김일성의 차를 수리하기 위해 차를 부품별로 해체해 수리했다고 한다. 경비행기 수집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미녀들이 쌀 알갱이를 일일이 검사하고 기차 여승무원으로써 김일성에게 차와 음식을 접대하는 것도 김일성 시절부터 있던 일이며, 물론 김정률 등 김일성의 보좌관들도 독일제 냉장고와 일제 TV 등을 사들였다. #1 #2 #3 다만 후지모토 겐지김정일의 생활 폭로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보니 국내에서 김정률의 책의 인지도는 낮다.

심지어 김일성 장수연구소로 알려진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98년에 탈북한 한의사 석영환(1964~)이 2004년에 출판한 책 '김일성 장수건강법'에 따르면 김일성이 쓰던 이불은 70만 마리의 참새의 턱 밑 잔털을 모아 만든 것이었으며,[189] 침대에는 각 신체 부위가 닿는 곳마다 몸에 좋은 약재를 넣어 놓았고, 베개는 32가지 한약재가 들어간 '신선베개'를 사용한 데다가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밟고 다니면 뇌와 관절에 충격이 가해져 수명이 짧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반영해 별장의 바닥엔 반드시 푹신한 카펫을 깔았다고 한다.[190] 더욱이 김일성이 먹는 사과도 그냥 사과가 아닌, 사과 뿌리 부근에 겨울에는 누런 강아지를, 봄에는 개구리를 묻어 양분으로 삼게 한 특별 사과였다고 한다. #

다만 아들인 김정일의 매우 사치스러운 식습관이 세부적인 부분까지 잘 알려진 것에 비해 김일성의 식습관은 알려진 부분이 많지 않다. 우선 김정일이 집권하던 시기는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대인 만큼 김일성이 생존하던 시절에 비해 매체가 더 발달하였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준 후지모토 겐지와 같이 이를 증언하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더 많다. 그래서 김일성보다 더 잘 알려진 것. 사실 김일성의 식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니라 김정일의 식생활이 유난히 상세하게 알려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김일성의 경우 상술한 것처럼 진귀한 음식을 먹었다는 증언도 있는 데 반해 된장과 같이 으로 만든 음식, 개고기, 고래고기, 평양냉면, 삼삼탕[191]을 자주 먹었다는 식의 증언도 있는 등 교차검증이 잘 안되는 편이다. 다만 적어도 육식 위주로 식사를 했다는 것과[192] 확실히 김정일에 비해 소박한 입맛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한데, 성장 배경과 젊은 시절 행적을 보면 적어도 아들처럼 산해진미를 맛보면서 자랐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때문에 집권 이후, 박정희처럼 농촌을 방문하면 농부들과 어울려 소박한 세참을 아무 거리낌없이 먹기도 하는 모습 등도 보였다. 사실 미식가 항목에 나와 있듯 특출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독재자, 기업가들은 아무리 사치를 부리더라도 식생활만큼은 소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김일성과 모부투 세세 세코가 특이 케이스일 정도.[193][194]

또 김일성은 1982년 자신의 칠순 생일잔치를 위해 260병의 위스키 면세구입 신청서를 주스웨덴 북한대사관을 통해 스웨덴 의전실에 제출했다가 '수량 과다'로 거절당하기도 했다. #

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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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김태서가 시조인 전주 김씨의 후손이다. 물론 현재 전주 김씨 족보에서는 8대손 김계상 이후의 가계가 누락되어 있는데 남한에 있는 전주 김씨 사람들이 족보상 먼 친척인 김일성 일가를 그만큼 증오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김계상 때 전북 전주에서 이북 평안도로 이주한 후의 족보는 6.25 때 족보가 파괴되고 구성원 대부분이 이북에 있기 때문에 족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8대조부: 김계상 / 8대조모
  • 7대조부: 김차형 (1699년 ~ 1768년) / 7대조모: 나씨 (1703년 ~ 1744년)
  • 6대조부: 김욱 (1728년 ~ 1813년) / 6대조모: 도민숙 (1735년 ~ 1811년)
  • 현조부: 김민수 (1770년 ~ 1854년) / 현조모: 고송희 (1772년 ~ 1832년)
  • 고조부: 김송령 (1810년 ~ 1899년) / 고조모: 나현직 (1811년 ~ 1897년)
  • 증조부: 김응우 (1848년 ~ 1878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이끈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건 역사왜곡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사건 당시 김응우는 21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1807년생으로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는 뻔한 일. / 증조모: 리씨 (???? ~ ????)
  • 조부: 김보현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 조모: 리보익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부친: 김형직 (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5일): 개신교 미션스쿨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는 자신의 아들과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훗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점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 외조부: 강돈욱 (1871년 2월 3일 ~ 1943년 11월 14일) / 외조모: 위돈신[195]
  • 모친: 강반석 (1892년 4월 2일 ~ 1932년 7월 31일): 베드로의 음차인 그 반석이 맞다.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차녀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참고로 숙부인 강량욱은 장로회의 목사였다.[196]
  • 본처: 김혜순, 김일성이 만주에 있던 시절 여자라 정식 혼인관계였는지는 불확실하나 1940년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조선족 순사와 재혼하고 자연스레 헤어짐.
  • 정처: 김정숙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 본래 회령지역 지주에게 첩으로 팔렸다가 탈출하여 김일성의 부하 지갑룡의 아내로 1933년부터 1940년까지 6년간 있다가 지갑룡이 생사 불명일때 김일성이 데려다 살다가 김정일을 낳으면서 아내로 격상되었다. 참고로 김혜순이 있을때도 김일성과 불륜 사이였고 생사불명이던 지갑룡은 멀쩡히 살아있었다고..
  • 후처 김성애 (1924년/1928년 12월 29일 ~ 2014년 9월 추정) 타자수 출신으로 김정숙이 김정일을 임신중에 불륜으로 간통해서 김정숙이냐 나냐 선택하라고 김일성에게 요구 했고, 김정숙이 난산으로 위험할때 치료를 거부하고 사실상 자살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 첩실
      • 지순옥: 빨치산 시절 부하 강홍석의 아내였으나 김일성이 몇 달 데려다가 살았다고 한다. 김정숙처럼 아들을 못 낳아서 아내로 승격 실패..
      • 홍귀원: 벽초 홍명희의 딸로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비서였으나 김성애가 임신 중, 김일성이 간통하여 임신시켰고 1956년경 출산 중 사망했다는 이 있다.
      • 제갈 아무개: 김일성의 주석궁 안마사 내지는 간호사. 김일성의 많은 자식들 중 하나인 김현의 모친. 이외의 알려진 것은 없다.
      • 김송죽 기사: 기쁨조 출신이라고 한다.
      • 김순희 기사: 김일성 말년에 전담 간호장교 였다고 한다.
  • 형제
  • 자식
    • 김정일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 김만일 (1944년 ~ 1947년): 3살 때 김일성 관저에 있는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
    • 김경희 (1946년 5월 30일 ~ )
    • 김평일 (1954년 8월 10일 ~ )
    • 김영일 (1955년 9월 30일 ~ 2000년 5월 10일?)
    • 김현 (1971년 ~ ?): 김일성과 제갈씨에게서 태어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 김백연 (1987년 ~ ):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며 동년배 내지는 1살 연하로 확정된 김여정의 고모다.

김일성 집안은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 어머니 강반석이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부모가 기독교인임을 부정하고 김형직은 무신론자. 어머니 강반석삼촌어머니 현씨와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며 기독교인 집안임을 부정한다. 김일성은 교회에 나가기 싫어했고 아버지가 안나가도 된다고 맞장구를 쳤으며 강반석은 심심해서 나간거라고 애써 기독교의 영향을 부정하며, 오히려 자기가 기독교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와의 인연을 친아버지처럼 여겼다고 과시했는데 이 사람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이다.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가 아들처럼 돌봐주었다고 했지만 손 목사 가정에선 이를 부정한다.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이며 손원일 제독과는 학년이 많이 차이나서 알지도 못했을 거라고. 다만 손목사가 김일성이 길림시절 다른 어려운 조선 청년들을 도와 주었을 수도 있고, 만년의 김일성이가 손 목사를 장문에 걸쳐 칭송했기 때문에 이런 인연으로 손제독의 형 손원태 박사는 미국 거주중에 김일성 에게 초청받기도 하고 사망 시 조문차 방문하고 방문기간에 생일을 맞은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직접 차려 주기도 했다.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198]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는데 소련에 의해 우상화된 김일성의 전기인만큼 신뢰성은 낮다.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그나마 연재처였던 정로 신문은 199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책자 형식으로 편찬하여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비치중이니 큰맘 먹고 서초 국립중앙도서관 5층까지 가서 뒤져봐야 한다.

===# 가계도 #===
한성희
홍일천
김혜경


2
신정희
(리씨)
김혜순
리혜경
김솔희
홍영숙
서영라
김이순
장길선
김영숙
김춘송
(자녀)
(부인)
(장남)

3
(셋째)
(아들)
(남편)
(딸)
(딸)
김경진
김인강
(부인)
김은송
김성강
(부인)
(자녀)
제갈순복
김송죽
김백연
김형록
김영성
(부인)
(부인)
김정현
(부인)
김원주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31 - 1945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탈당


파일:조선공산당 글자.png
194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조선공산당 남북 분당

파일:북조선공산당 글자.png
1945 - 1946 창당

파일:북로당 글자.png
1946 - 1949 합당[199]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949 - 1994 합당[200]
사망

8. 어록

어머니예배당에 다녔지만 예수믿지 않았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 제 1 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에서
사령관님, 우리 항일 빨찌산도 해방전에 참전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
1945년 9월 하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장군을 처음 만나서 한 요청. # 이 요청은 그가 거절했지만 김일성이 권력을 얻고 난 후 김일성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공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황당한 역사왜곡이 이어졌다.
임금이 일제 때보다 높은 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강요하여 나섰습니다.
1945년 12월 17일, '직업 동맹에 대한 지도에 관하여' 중. 평양 사동에서의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비난하며.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대항하며 키운 노동자의 저항 역량은 김일성이 조선직업총동맹 같은 단체에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통제하여 없애버렸다.
조국통일이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소련에 가서 스탈린 동지를 만나 조선인민군의 공격허가를 받아오라.
1950년경, 6·25 직전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실린 김일성의 발언. #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제2차세계대전후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된 반면에 국제민주력량은 급속히 장성강화되였습니다. 특히 작년에 중국혁명이 승리함으로써 세계의 정치적력량관계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로 국제민주력량은 더욱 강화되였으며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되였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는 리승만괴뢰도당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장개석도당은 리승만괴뢰도당을 도와줄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쏘련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고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개전 당시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비상회의에서 한 연설 《결정적인 반공격[201]으로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자》에서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202]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반공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들고나오는 상투적인 구호입니다.
사람이 건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다면적인 지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학교당국은 어째서 새것을 한창 섭취해야 할 청년들에게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을 연구할 권리마저 빼앗습니까.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이 보통책방에까지 흘러나와 글을 아는 사람이면 다 읽는 판인데 유독 화성의숙에서만은 어째서 그런 책들을 못읽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1권 제2장 제3절 타도제국주의동맹.
우리가 해방직후에 조선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떠들었다면 누가 그것을 인정하였겠는가? 인민들은 우리의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란 것은 한 이부자리를 쓰고 살며 한 가마 밥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까지 악선전하였기 때문입니다.[203]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때에 우리가 사회주의 구호를 들었다면 인민들은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현단계에 있어서 당 및 국가사업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5년 4월 4일) #
우리 북반부에서 종교인들은 모두 착취 계급의 대변자로서 거의가 다 우리를 반대하여 왔으며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마귀라고 욕하고 빨리 망하라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천주교에서 집사 이상의 종교 간부들을 모두 재판해서 처단해 버렸고 그 밖의 일반 종교인들 중에서도 악질들을 모두 재판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종교인들은 본인이 개심하면 일을 시키고 개심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1962년 사회안전성에서의 연설에서
해방직후에 있은 일을 한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략) 나는 그때 청년들에게 우리가 나가는 길은 (중략) 조선식민주주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군중속에서 누군가 불쑥 《장군님도 공산주의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204]
1974년 12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근로자》 8페이지에서
소련을 모델로 삼는 것이 이 나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지는 젼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자기 백성들을 너무 잘 먹이는 것을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1977년, 동독에리히 호네커[205]와 만났을때 그는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더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206]고 말했다. 이것은 베른트 쉐퍼가 말했듯이 "어떤 동독 지도자 입에 올렸을 경우 무사하지 못했을" 발언이었다. 발라즈스 스잘론타이는[207] "김일성은 일관되게 정권의 사회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경제적 '조정' 보다 그렇지 않은 것을 선호했다"고 지적한다.
B.R. 마이어스 저,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중에서-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장거리 탄도 미사일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위에서는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매
지금 일꾼들은 마치도 리순신(이순신) 장군을 우리 시대의 영웅보다 더 나은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려 하고 있다. ‘조국해방전쟁’(6.25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리순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 일꾼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도 리순신 장군만 자꾸 내세우고 있다.[208]
1967년, 김일성저작집에서 #
노동자들에게 생활에 빈 짬을 주지 말라.
중앙일보의 1995년 보도에서. 인민이 짬을 가지면 딴 생각을 품게 되므로 인민에게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해야 한다는 기조라고 한다. # 실제로 자는 시간을 포함하여 8시간만 쉬고 나머지 16시간은 일하면서 사상교육 받으라는 내용의 저 기사에서 언급되는 사회주의로동법 제33조는 지금도 여기서 검색하면 나온다.
내가 죽으면 나의 혁명동지들이 묻혀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 그곳에서 내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
1994년,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아들 김정일에게 유언처럼 남긴 당부. 그러나 김정일은 이 유언을 무시했고, 체제 선전을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엠버밍했다.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민족 단합이 아닌 외세와의 야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을 문민정부라 칭하지만 역대 군부독재 정권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핵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충돌(동)질 하는 건 미국입니다![209]
1994년 생전 마지막 신년사 중.
동무들이 당의 결정을 아는가? 농사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 세가지 제일주의인데 화학비료는 남흥화학하고 흥남화학을 생산정상화하도록 만들라. 비료만 생산정상화하라.
금년에 비날론은 계획된 대로 하고 명년에는 5만톤 만부하를 걸어야 돼. 그 다음에 세멘트를 우리가 정상화해야 돼. 세멘트를. 세멘트가 1 200만톤이란 말이야. 세멘트를. 난 세멘트를 만부하 역시 걸라는 게다.
허구 배무이(선박건조)를 많이 해야 돼. 배무이. 배무이, 그전에 내가 말한것을 백척을 맨들라(만들어라). 그 다음에는 전기를 앞세워야 돼. 내가 늘상 말하는것 같이 전력, 철도, 이거는 어떤고 하니 인민경제의 선행관(앞세워야 할 부문)이라고.
금속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되겠어. 금속은 지금 어떤고 하니 우리가 구체적대책을 세워야 한다, 전기하고 금속만 풀면 우리 나라에서는 잘 살수 있다고, 우리가.
내가 이번에 카터 보고 회담할 때 지금 유엔에서 제재하겠다 하는데, 하려면 해라. 이때까지 우리는 제재받고 살았지 제재 안 받고 산적이 없다. 다 제재한다고 우리를. 일본놈들도 제재하지, 당신들도 다 제재하지. 우리 제재 받고 살았다. 제재받고도 이만큼 살아나가는데, 제재하려면 더 똑똑히 해라. 우리 못살 거 뭐이가? 그랬더니 '제재 취소하겠다.' 그래. 취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도 마찬가지다. 못사는가 봐라. 우린 더 잘산다.
1994년 7월 6일 생전 마지막 지시 中#(02:13부터)

9. 대중매체에서

9.1. 대한민국

19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의 사진은 한국의 방송에서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김일성을 묘사할 때에는 대부분 캐리캐처의 형태로 등장했으며 브리태니커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으며 해외 제작 6.25 전쟁 다큐멘터리의 경우 김일성의 육성 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풀린 시기는 1988 서울 올림픽 전후.
  • 1961년작 영화 《붉은 두목》에서는 배우 백송(본명 김정순)이 연기했다.
  • 1982년 KBS1 100분 드라마 《반역자》에서는 배우 김희라가 연기했다.
  • 1982년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손과 입만 나오는 걸로 처리되었으며, 영상자료실에 테이프가 많지 않아 배우는 불명이다. 문오장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그가 출연한 KBS2 토크쇼 《밤과 음악사이》 자료화면에 따르면 그는 김철만 역도 맡은 것으로 나온다.
  • 1990년 KBS 실록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서는 배우 전광렬이 연기했다. <TV가이드> 1990년 10권 25호 기사 '탤런트 전광렬 북한 김일성역 최초로 맡았다(강기석 기자)'에 따르면 전광렬 본인은 1990년 6월 중순에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아 방송사에 간 후, 담당 연출자인 이녹영 PD로부터 김일성 역을 맡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자 막상 당황했지만, 이녹영 PD와 김교식 작가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받은 뒤에야 해당 인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솟았다고 전했고, "김일성 연기로 화제를 모은 배우가 아닌, 극중 캐릭터를 소화해낸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며 <지금 평양에선>의 김정일(김병기 분)과 같은 식상한 북한 캐릭터 연기를 지양하겠다고도 했다. 이녹영 PD 측도 "전광렬은 175cm짜리 키와 특유의 얼굴이 김일성의 30대 모습과 닮은 점이 있다"고 하며 과거 반공 드라마처럼 희화적인 모습을 지닌 배우를 쓰지 않고 외모가 비슷하며 비중있는 역을 소화해낼 만한 인재를 찾고자 TV는 물론, 연극, 영화계까지 뒤지고서야 전광렬을 찍은 거라고 한다.[210] 그러나 해당 작품은 외압성 조기 종영으로 끝났는데, 외압을 받은 이유는 김일성 미화 논란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이상을 가진 항일 투사였으나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자로 타락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전광렬은 기존의 '혹부리 돼지' 이미지와는 다른 샤프한 미남이었고, 방영 당시에는 3당합당 이후의 여대야소 정국인데다 김일성 가짜설이 아직 대세여서, 김일성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직된 시기였다. 드라마에서 박정희의 모습도 일본군 신분으로 비밀 광복군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왔다.영상
  • 1993년 남파간첩 출신 귀순자 이항구[211]가 <소설 김일성>을 출간하였다.
  • 1995년 MBC 8.15 특집극 《최승희》에서는 배우 오현섭이 연기했다.
  • 1998년 불교만화가로 유명한 최병용 화백이 그린 삼성초등학습백과 한국현대사편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 이은 주요 악역으로 등장. 스탈린에게 형님이라고 아부하면서 6.25 전쟁을 일으키면서 부산에서 생일 기념 미역국을 먹겠다고 주접을 떨다가 유엔군 개입으로 개박살나고 모택동에게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빌어 중공군을 데려와 살아남는다.
  •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배우 겸 성우 박철호[212] 연기했다. 주로 박헌영과 갈등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 굽시니스트의 2차 세계대전 만화에 코믹하고 무능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웹버전과 출판버전 둘 다 나오는데 웹버전은 지프차 타고 전장에서 도망치다가 홍범도 장군한테 관광당하는 내용이며, 출판버전은 독일군 포로로 잡혔는데 자신이 북쪽의 실권자라면서 "살려주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허풍을 친다. 홍범도 장군이 구해주면서 페어로 다니는데, 마지막에 홍범도가 버려진 정교회의 성당에서 봉인이 풀린 라스푸틴의 고환을 재봉인하기 위해 김일성의 목 뒤에 고환을 박아버려 혹이 생긴다. 시간이 흘러 김일성이 죽기 직전 김정일에게 자신이 친모임을 고백한다.스스로 모태신앙이라고 자부해서 공산주의자인데도 기독교와 인연이 깊다.
  • 2016년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배우 이원종이 연기했다. 흰색 육군 원수용 하예복을 입고 있다.
  •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은 2019년 6월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제목의 음반을 발표하였다.#
  •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중일전쟁이나 독소전쟁 대목에서 짤막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보통 현대 한국인 출신인) 주인공이 손을 써서 영문도 모르고 살해당하거나 혹은 주인공으로 인한 역사개변으로 원역사에서의 여러 가지 기회가 사라져서 어디 빌붙을 데도 없는 한심한 꼬락서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웃음벨로 활용되는 편.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간도특설대가 더 빠르게 만들어지면서 마적으로 토벌당해 사살된다.
    •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 서울에서 공산혁명을 일으키려다가 대실패하고 박헌영을 팔아치우고 다시 관군쪽에 붙으려했으나 실패하고 죽는다.
    • 한국 독립 전쟁: 일본군에게 정보를 누설하여 일본군이 홍범도를 죽이게 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지나가던 일본인 포로를 풀어주고 홍범도 위치에 대한 떡밥을 쥐어줘서 홍범도를 어떻게든 일본군 손에 죽이려고 발악한다. 무다구치 렌야에게 잡혀 고문당한다.
    • 고종, 군밤의 왕: 주인공이 미래를 생각하여 김일성마오쩌둥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는데 아버지 김형직이 작중 사탕 달라는 5살 어린애 모습으로 등장한다. 본인은 등장하지 않으며, 아들 김정일이 영화감독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평범한 삶을 산 듯하다.
    • 조선, 혁명의 시대: 대한제국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라서 그런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로 나오며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에게 러시아 정교의 축복을 받으며 목사가 될 것이라는 암시가 있었다.[213] 이후 4부에 재등장했는데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군종 목사로 등장했다. 러시아 정교 영향을 받아 소련과의 성전을 벌여야한다고 주장한다.
    • THE LAST EMPIRE: 무자비한 대한제국군 장교로서 몽골을 점령하고 지배한 것으로 나왔으나 패치 이후 김경천으로 변경되었다.
    • 근육조선: 2부가 끝나고 나온 외전에서 목사 이승만과 함께 2차대전 참전을 독려하는 역할로 잠깐 나온다. 그 외에는 금수산 입신체비 궁전을 만들려다가 잡혀간 미친 놈으로 언급된다.
    • Hearts of Korea : 공식설정상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죽기전에 한국에서 공산혁명을 일으키면 소련 지원군을 이끌고 혁명에 합류한다.

9.2. 외국 작품

외국 작품에는 특이하게도 처럼 취급되어 한국이 나오면 자주 언급된다. 오죽하면 카이저라이히 제작진들은 김일성은 뭐하고 있냐는 질문에 알거없다면서 대신에 다른 김씨인 김구, 김원봉, 김석원, 김홍일이 대신 등장한다며 제발 그만 찾으라고 할정도다.
  • 영화 레모의 원작인 워렌 머피와 리처드 사피어의 더 디스토리어 시리즈 중 Assassin's Playoff의 악역 중 한명으로 나오나, 한치운에게 굴복하는 굴욕을 맞이한다.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아무르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을 이끌고 있으며 일본으로부터 외만주 지역을 돌려받은 아무르의 파시스트 군벌의 추적을 받아 잔존 부대마저 모두 무너지는 와중에 김일성 스스로는 끝까지 살아남아 숲 속의 은신처로 도주한다.
  • Equestria at War에서는 개가 짖는 소리라는 barking에서 이름을 따와 킴볼 바킹선으로 패러디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한 나라인 그리포니아 제국의 제후국 중 브론즈힐 백국의 좌익 지도자로 등장한다. 여기서도 주체 사상을 설파하지만 특이하게도 고향인 브론즈힐 백국이 찐 근왕파들만 모인곳이라서 자신이 아니라 황태자인 그로버 6세[217]가 수령이 되어야 한다는 근왕공산주의[218]를 설파하며 자신은 섭정으로 그로버6세를 주체사상을 구현할 지도자로서 교육하고 놀랍게도 때가 돼서 순순히 권력을 이양하고 물러난다. 현실 인물과 달리 그로버6세가 살아있다면 황제를 구하려다가 갈비뼈가 부서져도 충성을 다하는 충신으로 등장한다. 만약 그로버6세가 죽는다면 아예 도시하나를 그로 버6세의 무덤으로 만들고 영구보존시키는 미치광이 근왕파 컨셉.#

9.3. 북한

북한 영화에서 김일성을 다룬 유명한 작품 중엔 1980~1987년까지 만든 연작영화 <조선의 별>, 1985년작 북-소 합작영화 <영원한 전우> 등이 있는데, 상당수 내용은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과 정권 수립 준비과정 등이며 1993년까지 관련 영화들은 김정일이 만든 '백두산 영화창작단'이 제작했다. 의외로 김정일이나 김정은과 외모가 비슷한 배우가 젊은 날의 김일성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예가 배우 강덕이다.

김일성 역할을 한 배우는 '1호 공훈배우' 대우를 받으면서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주는데, 김일성 가족 역을 한 배우들도 마찬가지다.[219] 2012년 러시아 방송에서 한 의사가 김일성 배역 연기를 위해 성형수술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이하 2014년 KBS2 《남북의 창》 보도내용 참고)

10. 별명 및 호칭

10.1. 부정적 호칭

이하 내용은 1994년 7월 11일 한국경제신문 기사12일 한국일보 기사를 참고함.
  • 남한
    • 혹부리우스: 뒤통수에 혹이 났다고 혹부리 + 로마 황제들의 ~ㅜ스 류의 이름을 합쳐놓은 별명. 한국식 묘호는 없다
    • 돼지 등 외모 비하 별명들: 이것들은 김정일과 김정은에게도 동일.
    • 개새끼 등 온갖 욕설들[220]
  • 북한: 일반 주민들 관점의 경우, 특히 김일성이 완전히 북한을 장악하지 못한 해방정국 시기에는 쓰인 명칭으로 북한 언어전문가 서정범 경희대 명예교수 등이 위 기사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마무리 된 후 반대파가 추방된 평양과 같은 곳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라고 한다. #
    • 골든 베이비: 북한 주재 서방국가 외교관들이 김일성 동상이 금박으로 칠해진 것을 비꼬는 호칭.
    • 김마두: '김일성은 마적단 두목'의 준말.
    • 조선 히틀러: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같은 독재자란 뜻. 둘 다 북한 집권 초기에 은밀히 입에 오르내렸다.
    • 양다리 동무, 왔다갔다 동무: 중-소 분쟁 때 북한이 등거리 외교를 할 당시 붙여진 호칭.
    • 왕포쟁이, 후라이 6단, 대포쟁이: 김일성은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한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내포된 호칭들.
    • 큰곰, 너구리, 메사구(입이 큰 메기) 등: 김일성의 외모에서 착안함.
    • 송지떡(소나무 껍질떡) 장군, 죽장군 등: 북한 주민들을 제대로 먹여주지 못한 데서 오는 반발심으로 붙인 것이다.
    • 1호 대상자: 숙청 제1호라는 뜻
    • 김인백 동무: '김일성은 인간 백정'의 준말.
    • 김피내: '김일성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명수'에서 따온 준말.

10.2. 북한 입장에서

위 기사에서 언급된 국방연구원 북한연구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했으며, 옹호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 김일성장군: 1945년 귀국 후 처음 불려짐.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을 더 큰 크기로 굵게 쓴다.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민 환영대회 때 불려짐.
  • 내각수상, 김일성수상: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뒤 불려짐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6년 직위 신설 후 사용됨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2년 직위 신설 후 사용됨
  • 수령: 정권 초기부터 일컬어짐. 1956년, 스탈린 격하에 놀라 일시 중단했으나 8월 종파사건으로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이후부터 다시 사용 시작. 1970년대 중반까지는 '경애하는 수령'이 많이 쓰이다가 이후부터는 '위대한 수령'이 많이 쓰이고 있다.
  • 대원수: 1992년 대원수 계급을 받으면서 사용됨

11. 관련 사건사고

12. 관련 문서

13.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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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Kim Ilsŏng이고, 조선어의 라틴문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Kim Il Sŏng이지만, 최고존엄이기 때문인지 표준 표기법 사용이 강제되는 북한에서 이례적으로 생전 사용한 통용 표기를 쓴다.[2] 金聖柱로 적혀 있는 자료도 있지만 북한 관영 언론이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한자 이름은 金成柱다. 북한에서 이것을 숨기는 것이 내나라 같은 대외 선전을 겸하는 사이트에서 초명이 성주라고 주장한다.[3] 1908년 출생이란 설도 있다. 만약 맞다면 생년월일은 1908년 3월 30일.[4] 공교롭게도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이다. 북한에서는 이를 앵글로색슨식 자본주의가 침몰하고 주체의 시대가 열린 날로 선전한다.[5] 전주 김씨 집성촌이다.[6] 이북 5도 기준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 만경대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7] 몇 세손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일성의 사망일을 예언한 것으로 화제가 된 풍수지리사 손석우의 저서 『터: 육관 도사의 풍수·명당 이야기』에 따르면 32세손(또는 해석에 따라 33세손)이 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떤 문헌에서도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이다.[8]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소재. 현재는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속해 있다.[9]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세칭 안식교 신자라는 주장이 있다. 조모 리보익과 김일성의 사촌 김원주는 재림파였던 것으로 확인되어 왔고 김일성이 태어난 남리에 재림파 교회인 칠골교회가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외가 강돈욱이 장로회 장로이고 어머니 강반석을 따라 송산교회를 다닌 것으로 보아 어린 시절 장로회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감리교회 목사인 손정도와의 인연으로 교회에서 풍금도 탔다는 충격적인 회고도 있으나, 대체로 손정도 목사 측에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손정도 목사와의 관계를 과장했다며 부정하는 편이다.[10]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후에는 대외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무신론적 스탠스를 내세웠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상당 기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해방 직후 수술을 할 때 기독교식 기도를 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의 회고) 자손들은 철저한 무신론자인 것과 대조된다.[11] 젊은 시절의 키로 노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김일성이 태어난 시대를 감안하면 장신이다.[12] 북한의 김씨 세습 3대 중에서 유일하게 AB형이다. 김정일김정은A형.[PL] 사후 추서[PL] [15] 제88분리소총여단 출신[16] 흔히 알려져 있는 초상화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자세한 건 태양상 참조.[17]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군과 인연이 있으며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젊은 김일성을 한반도 이북의 대중을 사로잡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강하게 선호했다. 이는 김일성 스스로가 소련군 통역을 자기 심복으로 배치시키고 술자리를 제공하는 등 소련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한 치밀한 노력이 그 배경이 되었다.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통해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당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기도 했다. 소련은 그를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은 선택지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8] 정확히는 중학교 중퇴지만 교과과정은 거의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학제는 영국에서 유래한 2단계 학제였다. 그러므로 현재로 치자면 고졸 내지는 고교 중퇴에 해당한다.[19] 사실 해방 직후 시점에서도 한반도의 (일본어) 문맹률은 무려 78%였으며, 1944년 기준 중학교 이상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비율은 고작 1.4%였다. 이승만이 오늘날 기준으로도 엄청난 엘리트였기에 가려지는 감이 크지만 김일성도 당대 기준으로는 명백한 고학력이었다.[20] 소련군 장교들은 소학교 졸업을 겨우 한 대다수 항일연군 병사들이 아닌, 중졸에다 나름대로 리더십도 엿보였던 김일성에게서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21] 중공군 개입이 시작된 1950년 10월과 11월에 미군은 압록강변의 국경도시인 혜산진에 도착했고 한국군은 함경북도 청진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반면 이 때 김일성은 중공군이 올 때까지 강계의 벙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22]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우선 민심을 얻기 위해 토지개혁으로 땅을 나눠주고 약탈과 학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민심을 얻었다. 학살자로서의 악명은 주로 체제가 안정된 이후에야 집중된 것이다.[23] 무엇보다 스탈린은 불과 몇년 전 바로 이런 상황을 독소전에서 겪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겪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사람들은 독일군을 일종의 해방자로 여겨 환영했다가 그들의 정신나간 짓거리를 본 뒤 파르티잔으로 돌아섰다.[24] 다만 사회주의를 지킨다는 쇼와 해외의 지지기반을 위해 미국의 인종차별을 트집을 잡거나, 해외의 독재자와도 잘 어울리기는 했다.[25] 분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공산주의는 민족을 초월한 계급적 연대를 강조하며 자문화 중심인 사회를 터부시하여 문화의 우열도 대체로 따지지 않는다.[26]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이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단 한 번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대립이 사회의 근본 모순이며, 이러한 계급투쟁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변증법적으로 해체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세우는 계급론을 폐기한 적이 없다. 이런 계급구분조차도 생산수단의 사유화 여부에 따른 것일 뿐, 혈통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수단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즉, 신분제 사회부터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이다.[27] 경루동에 대한 북한의 선전만 봐도 북한 지도자들이 공산주의가 뭐 때문에 만들어졌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8] 물론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의 결함들을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인류사상사의 최고봉' '그 모든 기적들을 다 합쳐도 비길 수 없는 거대한 위력으로 이 세상을 변모시킨 영생불멸의 사상'이라고 터무니없이 자화자찬하고 있다.[29] 당장 아시아의 일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 불과했던 김일성을 롤모델로 삼으며 김일성의 행적을 모방한 독재자들 때문에 미래가 완전히 망가진 나라들이 수두룩한데, 하물며 김일성 수준의 인물이 공산권 내 강국의 지도자였다? 보나마나 미래가 망가진 나라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졌을 것임이 안 봐도 뻔하다.[30] 유사한 사례로 87년 6월 항쟁 당시 미국의 반대가 전두환의 진압을 방해하는데 기여하였다. 폴 포트의 독재도 같은 공산 국가인 베트남에 의해 종식된다.[31] 아예 북간도에서 태어난 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에서 자신의 고향을 강(두만강) 건너 남쪽이라고 하고 만주는 돈벌러 가는 곳이라고 여겼던 것과 대조적이다.[32] 적어도 김일성은 경제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고 그래서 실제로 개발 독재 정책을 추진은 했다.[33] 정확히는 1945년일본을, 1953년미국을 항복시켰다는 주장을 말한다. 물론 이 주장은 모두 허위 날조로, 실제 역사 속에서 일본을 패망시킨 것은 미국이었던 데다가 6.25 전쟁에서 북한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을 식민지배한 나라(프랑스)와 미국을 모두 이긴 명장은 김일성이 아닌, 베트남보응우옌잡이다. 애초에 디엔비엔푸 전투만 봐도 보천보 전투랑 비교하는 것이 디엔비엔푸 전투에 대한 모욕이다.[34]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은 약 170명이 동원된 반면 보천보에 있던 일본 병력은 군도 아닌 순사 5명이 전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았다. 정작 이 전투에서 전사한 건 유탄에 맞은 요리사와 2살짜리 여자 아기, 이렇게 꼴랑 2명 뿐이다.[35] 림은,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金日成 王朝', 沃村文化社, 1989) p 252.[36] 다만 이 에피소드는 신빙성이 의심되는 이야기이긴 하나, 적어도 김일성이 펑더화이에게 '모욕적인 처우'를 당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37] 당장 백마고지 전투장진호 전투도 중국군이랑 싸운 것이다.[38] 이것 역시 북한이 15분 만에 완승했다고 과장했다.[39] 정작 웃긴 것은 그 조건에 가장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 바로 누구보다 강경한 반공주의자독실한 개신교도의 아들인 김일성 본인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T4 작전으로 무고한 장애인들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는 실제로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매우 특이한 장애인 잠복고환이었으며 책을 똑바로 들 줄 아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몰아 학살한 폴 포트 역시 실제로는 부농 출신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고 교사까지 지낸 엘리트였다.[40] 참고로 그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의병장 허위였다. 허웅배에 관한 글[41] 북한의 암살을 피하기 위해 전 비서 임은이라는 가짜 신분을 내세웠다.[출처] 림은, '北韓 金日成王朝 祕史' 한국양서, 1982, pp. 326 - 327.[43] 정황상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44] 1959년 7월 19일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보궐선거(120만 명의 투표자 중 무려 14명이 반대포를 던졌고, 이후 이 투표는 2023년 이전까지 반대표가 나온 마지막 북한 선거가 되었다)의 언론매체 보도를 금했다는 것을 보면, 숙청 규모가 매우 컸던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45] 심지어 투레도 독립 직후 프랑스가 보복으로 나라의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고 이후에도 투레를 몰아내기 위한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다는 큰 참작 요소가 있음에도 이와 상관없이 잔혹한 독재자라고 욕을 먹는데, 하물며 참작 요소도 전혀 없이 독재자가 된 김일성은...[46] 비슷한 유형인 마오쩌둥도 권력을 얻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평가되나, 그는 군인으로서도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 손에 꼽는 인물로 평가되기에 독립운동을 했을지언정 과장이 있다고 평가되는 김일성과 동렬에 놓기는 힘들다.[47] 북한은 당국가체제(黨國家體制)로서, 조선로동당 총비서 직함이 다른 어떠한 직책보다 앞선다.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전문, 제1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은 ...(중략)...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리춘히가 항상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라며 가장 먼저 호칭하는 데는 다 이러한 이유가 있다.[48] 북한에서는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으로 불린다. # 박금철 부총리는 갑산파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민족보위상(오늘날의 '국방상')도 맡고 있었다. 이효순은 대남총국장으로, 박금철의 수하였다. 이 사건은 김일성 우상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그 흐름에 배치되게, 박금철에 대한 개인 우상화 때문에 일어난 숙청사건이다. # 이를 계기로 북한 내 반김일성세력이 종적을 감췄다.[49] 그러나 적어도 호찌민은 자신을 김일성처럼 우상화하지는 않았다.[50] 참고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 요청을 무려 48번이나 했다고 한다. #[51] 특히 민간인 학살에 있어서는 국군이 인민군보다 횟수, 규모 모두 더했던 것만큼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긴 하다. 물론 인민군이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52] 애초에 6.25 당시 인민군의 학살이 만 단위다. '겨우' 수준이 절대 아니다.[53] 사실 6.25 당시 우익의 학살도 엄밀히 따지자면 기존부터 남한 사회에 고여 있던 극단주의 반공주의가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김일성의 남침으로 인해 한국이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점진적으로 치유할 수 있던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린 셈.[54] 그리고 인민군의 학살도 만 단위로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준이 아니다.[55]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면서 약탈, 강간 같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현재도 김형석 명예교수 같이 이를 직접 본 사람도 남한에 생존하고 있다. 대중적으로 알 수 있는 예로는 작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다와이('줘'라는 뜻)라는 러시아어를 언급하며 '여자들까지 다와이 당했다고 난리였다'는 묘사나, 전광용의 <꺼삐딴 리> 같은 소설이 대표적이다. 조만식 등은 이런 조치에 항의했으나, 김일성의 계파는 소련의 사상에서도 병력 관리를 잘 못한 것임에도 이 행태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두둔하게 하였다. 너무 아부를 잘했기에 이 모습이 남한에서 김일성은 '민족에 대한 배신자' 같은 인식을 낳은 배경이 되기도 했다.[56] 무슨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정치 세력과 마찰을 빚은 것이 아니다. 김영주(북한) 문서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김일성은 소련파의 간부를 숙청하기 위해 비밀리에 소련에 친한 간부들을 두고 '자기 자식들은 북한 주재 소련학교에 보내면서 자기들끼리 뭉쳐 특별 대우를 받고 러시아어만 쓰는 '두개의 의자'에 앉아있는 자'라며 자신이 지목하는 대상을 없애면 더 출세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최대한 배아파하도록 증오심을 부추겼다.[57] 쉽게 말해서 한반도는 자신의 군대가 일본군을 물리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소련군 사령부를 찾아서 처음 한 말이 소련군이 벌인 해방전에 참가하지 못한 자신도 참가한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거절당하자 아예 가상의 군대를 동원한 역사왜곡을 벌여 아이들에게까지 이를 가르친다. 김일성/생애 문서 참조. 그 외에도 아래 어록에서 보듯 스스로 '인민이 다가오게 하는 수단'이라며 거짓말을 정권 유지 수단으로 삼았음을 인정하긴 했으며, 건국 초기 종교의 자유나 소유권을 보장하겠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고 한다.[58] 실제로 1976년 12월 11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모든 도시노동자들을 상대로 김일성 사상전집을 교재로 한 사상 시험을 연간 세 차례 실시, 성적이 나쁘면 임금과 식량배급량을 줄였다고 한다. 정확히는 1등급에서 8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임금과 식량배급량을 올려줬지만 8등급은 임금과 식량배급량을 절반으로 깎았다고... #[59] 도덕적인 사람도 출세를 하긴 했으나 자신에게 속고 있는 우직한 사람을 좋아했다.[60] 북한/이념 문서와 2016년 데일리NK 기사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61] 참고로 지역 갈등의 경우 김일성은 '지방주의'라고 이름 붙인 다른 지방의 세력화를 극도로 싫어하여 그렇게 지역갈등을 부추기지는 않았다.[62]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하기 전만 해도 저런 지역은 오히려 새로 개척된 지역이라 지역 주민간 신분이 비교적 평등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적서차별도 적고, '양반'이라는 지배계층이 적었다. 상업을 해야 먹고 사는 곳이라 직업 차별도 적은 편이었다. 김구는 아예 이 일대를 '상놈의 낙원'이라는 표현까지 썼을 정도다. 실제로 대한민국이 통치하던 지역을 잠시 북한에서 점령했을 때 이로 인한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63] 이것보다 약하게 좋은 기업에서 어떤 계층을 취업 시키는 것만으로도 현대 사회에서도 갈등이 심한 편인데, 이건 단순히 앉아서 자식도 출세하고 재산이 들어올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라 사람에 따라 비열한 행동을 하게 할 동기가 될 수도 있었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마자 한 일 중 하나가 '혁명자유가족학원'이라는 만경대혁명학원의 전신인,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충성파의 자녀가 출세할 학교를 만들어준 것이다.[64] 왜냐하면 원래는 권력과 재산이 딱히 없던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쥐어 주었기 때문이다.[65] 김일성, 김두봉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다.[66] 평양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인 조만식에게 큰절을 올리며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소련군정과의 마찰을 줄이겠다'면서 조만식 당에 들어가겠다는 제안을 번복하고서는, 뒤에서 반동 영감쟁이 조만식을 죽여야 한다라고 그를 언제 처리할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마찰을 줄이는 것이 아니고 소련군 뒤에서 조만식의 올곧은 면을 헐뜯으며 그를 연금시키고서는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다. 윗문단의 숙청을 다룬 내용만 봐도 얼마나 상식을 뛰어넘는 뻔뻔한 행각을 보여왔는지 알 수 있다.[67] 평양 기생들을 동원하여 치스차코프 사령관 같은 소련군내 주요 인물들에게 술을 대접하며 아양을 떨기에 바빴다고 한다. #[68] 통제하기 쉽다고 판단했으나 8월 종파 사건 즈음 소련에 친밀한 정치인을 숙청시켜 노골적으로 소련을 배신하는 등 보여주기 식의 알맹이가 없는 행태에 속은 것이었다.[69]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김일성과 정실 관계에 있는 강량욱이 프락치 역할로 잠입하여 가입하고 나서는, 조만식이 체포되자 그 당을 아예 접수해버린다.[70] 한 마디로 가장 강한 세력의 힘을 빌어 만만한 세력을 가장 먼저 제거하고, 힘을 키워서 그 세력마저 배신하는 계산적이며 무자비한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71]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은 '유인동기를 물질적 보상보다는 노동자의 명예심과 도덕적 양심'에 맞추었다고 한다. #[72] 실제로 2024년 3월 1일 로동신문 기사 <정치용어해설 - 정신력>에서는 "혁명과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근본요인은 객관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인 인민대중의 사상정신 상태에 있다.[73] 이는 김정은 시기도 마찬가지라 북한이 경제난과 전력난에 시달림을 감추고자 대외에 선전하는 북한의 밤 모습도 절대다수가 수도 평양 중심부 인근의 야경이다.[74] 한 탈북자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가 일본인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거품경제 시기였는데, 그런 시절에도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철저히 감춘 것이다.[75] 한국에서도 북한이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한 게 1976년이었을 정도다.[76] 북한 매체에서 잠깐 비추어준 내용이다.[77] 1956년의 대숙청인 8월 종파 사건 당시 김일성의 반대파들이 소련에 알리려고 한 내용에는, 김일성 우상화의 근거가 된 보천보 전투가 보잘 것 없는 내용이었음을 김일성의 측근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무리는 정직한 사람들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주장했다.[78] 물론 진짜 '중대한' 경우에는 7촌 조카의 일가족까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했다. 정작 그 연좌제가 가장 먼저, 가장 철저히 적용되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김일성 본인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김일성의 망언과 판박이인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폴 포트 역시 킬링필드 피해자들에게 적용된 연좌제가 가장 먼저, 가장 철저히 적용되어야 하는 인물이었다.[79] 애초에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운영 방침 자체가 "당과 수령과 조국을 배신한 배반자로서 곱게 죽어서는 안 되고, 뼈에 사무치도록 아픔과 고통을 처절하게 느끼다 서서히 죽음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이다. #[80] 김일성을 숭배하던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2중 감시를 통해 국민들을 억죄긴 했으나, 루마니아 출신으로서 그런 감시를 직접 몸소 경험했던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인 그렉 스칼라튜에 따르면 (최소 4중 감시를 하는) 북한이 이런 문제에서 한 수 위라고 한다. #[81]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민주 캄푸치아도 '성분'에 따라 '신분제'를 만들기는 했으나, 북한에 비하면 지속 기간도 매우 짧았다.[82] 타 악명 높은 독재자들과 정반대로 대놓고 공개적으로 인명을 학살하는 것은 되도록 피하는 대신 비밀리에 쥐어짜는 방식으로 학살하는 것을 선호했다.[83]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한다고 할 때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은 대다수가 김일성의 세습 시도를 반동 거짓 선전이 분명할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고 한다. #[84]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조차 외채를 갚는다며 극단적인 긴축정책으로 민생을 파탄낼 때도 '외채를 갚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선전을 했지, 김일성처럼 외채가 있다는 사실을 아예 숨기고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축출되고 처형되기 직전에 진짜로 외채를 다 갚긴 했다.[85] UN 추계 기준으로 1970년의 남북한 인구는 4천 5백만 정도라고 추정되었고 신문 기사에서는 '5천만 남북인'이라고 묘사되었다. 60~70년대만 해도 남북한 모두 출산율이 대체출산율보다는 높았기에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여 21세기에 이르러서는 7천만명 대까지 증가한 것이다. # 참조된 기사를 보면 나오지만 이런 사람들의 8촌까지 하면 당시 남북한 주민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86] 이는 동서독이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이산가족끼리 친인척의 결혼식 정도는 갈 수 있었던 것과 완벽히 대조된다. # 사실 동독은 서독에게 북한 수준의 무력 도발은 전혀 하지 않았다.[87] 김일성 시기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의 존재에 대한 암시는 물론이고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붕괴 사실 자체를 감췄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남한으로 치면 대한민국 군사정권남베트남 정권의 붕괴 사실 자체를 감춘 것과 같다. 덤으로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사실조차 전혀 알리지 않다가 김일성 사후인 2001년에야 조선대백과사전에 이를 실으며 처음으로 달 착륙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88] 그와 비교될 만한 수준의 독재자들과 비교하면 아돌프 히틀러는 한반도의 해방 전인 1945년 4월에 자살한 데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은 6.25 전쟁 휴전 전인 1953년 4월에 사망했으며, 마오쩌둥은 1976년에 사망했고, 마시아스 응게마, 이디 아민, 폴 포트는 모두 1979년에 축출되었다.[89] 엄밀히 말하자면 김일성의 최만년 시점부터 최빈국으로 전락했다.[90] 박정희 시기 한국이 경제성장을 했어도 집권 말기에야 겨우 중진국에 진입한 수준인데도 박정희를 보고 보수 층에서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실 찢어지게 가난한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만든것도 대단한 것이긴 하다. 결국 박정희가 세운 바탕에서 더 발전할 수 있었고 김일성은 무리한 남한과의 국력대결을 하다 망조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91] 북한 주민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까지도 자신들이 한국보다 잘 산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북한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에시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김일성이 해외 정보를 현 북한도 개방적으로 만들 정도로 워낙 극단적으로 차단한 나머지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80년대 후반까지도 북한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인 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하며, 덤으로 이와 비슷한 시기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상술한 바와 같이 (거품경제 시절의)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줄 알 정도였다고 한다. 한류나 중국의 외부 문물이 들어온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야 북한 주민이 자신의 국가가 가난함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다.[92] 평안북도의 선천군 같은 지역은 분단 전 주민의 50% 정도가 기독교도였는데, 현재의 남한의 어느 시군구도 이 정도로 주민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은 곳이 없다.[93] 아프리카의 최빈국들 중에는 북한보다 가난한 나라가 더러 있긴 하지만 이들은 거의 모두 내전과 쿠데타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나라들이다. 내전과 쿠데타의 후유증이 없는 국가 중 북한보다도 가난한 나라는 말라위마다가스카르가 전부다. 심지어 현재 북한의 1인당 GDP는 문자 그대로 휴전 초반인 50년대 중반~60년대 초반의 남한과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못한 수준이며, 2022년 UN 통계 기준 북한의 1인당 GDP는 소말리아(!!!)보다도 낮다.[94] 심지어 김일성이 죽고 북한이 최빈국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1994년은 남한이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 해이기도 하니 이쯤이면 그 비극에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95] 2024년 들어 김일성&김정일의 우상화 강도가 축소되고 있긴 하나 단지 그 뿐이다. 게다가 그것도 실질 목적은 김정은의 우상화 강화다.[96] 실제로 남한의 개신교가 반공 성향이 강한 것도 북한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평양은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조선의 예루살렘이리 불릴 정도로 개신교 세가 매우 강한 도시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보수우위 도시였다. 당장 김홍도 목사가 6.25 이전 고향이던 북한 땅에서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남한으로 피난을 온 인물이며, 전광훈 목사도 김홍도 목사 휘하에서 수련받은 인물이다. 심하게는 한경직 목사처럼 서북청년단을 옹호하는 일도 있었다. 더욱이 북한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민주 캄푸치아를 제외하면 제일 극단적인 케이스였는데 남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가장 기형적인 모습을 가장 자주,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다 보니 공산권에서도 매우 이단적인 모습을 전형적인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97] 이완용보다 김일성이 더욱 극악무도한 것이, 이완용이 만든 체제는 길어야 40년 갔으나 김일성이 만든 체제는 2024년 현재 그의 2배에 가까운 76년 동안 현재진행형이며,(심지어 1967년 도서정리사업으로 북한 체제의 시작을 대폭 축소해도 2024년 현재 57년이다) 김일성은 이완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넘어 이완용을 능가하는 추잡한 악행들을 저질렀음에도 이완용 이상으로 안락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다가 아무런 죗값을 치르지 않은 채 이완용 이상으로 오래 살고는 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 기준으로는 식민지 국가의 일개 관료에 불과한 이완용과 달리(당장 한국 입장에서 치환해 보면 이완용도 가볍게 능가하는 리투아니아의 매국노 안타나스 스녜츠쿠스는 인지도가 전무하며, 해외에서 악명 높은 매국노에 대해 다루는 글들에서도 이완용은 빠지는 경우가 많다) 전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를 정립하고 전쟁과 엄청난 인권유린을 저지르며 외교적인 도발을 벌인 김일성의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니 자업자득이다.[98]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은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숨어다니며 자신이 세운 가게의 물건을 김일성의 인민군에 의해 빼앗겼다.[99] 남쪽에도 해방이 되자마자 농민의 토지 '소유', 가진 놈의 것을 뺏어서 '내 것으로' 만든다는 식의 원래 사회주의와는 다른 선전을 펼쳤고, 토지를 무작정 몰수하여 권력이 약한 사람들에게 주는 식의 북한식 토지개혁을 이런 사람들이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동유럽식으로 저런 개혁을 온건하게 하려고 한 걸 김일성이 잔인한 방향으로 밀어 붙인 것이다. # 이런 김일성에 대응해 한국 정부도 일반 좌익과 이런 세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매우 극단적으로 대응하여, 북한의 학살과 같은 지시에 좌익들이 잘 따른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도 김일성대학 입학 같은 출세를 미끼로 자신들의 토지개혁을 이런 좌익들을 거쳐 하게 했다고 한다. # 북한에서의 역사의 흐름을 보면 저 땅을 국유화시켰기에 김일성이 거짓말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조차 부농의 토지를 마구 빼앗지는 않고 보상을 추진하려던 적도 있는데 북한은 그냥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의 재산을 다 빼앗게 해주고 출세시켜 준다는 식의 정책에 가까웠다. # 이런 집성촌의 같은 성씨도 죽이던 학살에 2010년 정도 돼서야 위령비를 세우거나 2020년대에 들어서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마을도 있다.[100] 서양에서는 일개 아나운서에 불과한 리춘히보다도 인지도가 떨어진다.[101] 40년대 후반의 해방정국에서조차 오기섭 같은 입장의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지주, 자본가라도 돈만 내면 되나며 청년동맹 같은 조직을 만들고서는 그곳에서 충성하는 사람을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행태를 싫어하고는 했다. 애시당초에 해방 1년도 되지 않아 가장 먼저 숙청시킨 인물이 친일파, 우파 정치인이 아니고 현준혁 같은 민족주의 진영에서도 지지받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라는 의혹이 있을 정도였다. 친 소련 성향보다 민족주의적 좌파 성향이 강한 그를 로마넨코 소장을 설득하여 암살의 허락을 받고 소련이 이를 무마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의 무리는 자기들이 공산주의자를 암살해놓고서는 민족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선전을 했다는 것이다. #[102] 더 단적인 예로는 빨치산을 때려잡겠다며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주도한 최덕신은 월북을 해서 웬만한 사회주의자 이상으로 떵떵거리며 살다가 생을 마감한 사례도 있다.[103] 예를 들어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는 2000년 5월 17일호에 북한에 대해 "북한 체제를 공산주의와 동류로 취급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며, 북한 스스로도 감히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좌시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고, #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영국 공산당을 위시한 일부 공산당이 우익 정당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을 비난하는 것이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 세습은 물론이거니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 로힝야투치족 마냥 천대받거나 소수인 민족 내지 집단을 우대하여 서로 싸우게 만드는 제국주의자의 수법과 아주 유사하다.[104] 다만, 이승만은 6.25 전쟁 발발 이전에도 친일파들을 중용하기는 했으나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의 직접적인 적대 세력이라는 참작 사항이 존재하며, 이로 인하여 대한민국 내에서는 초대 대통령이자 거물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와 더불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것을 넘어 아예 친일파였다는 억울한(?) 비판을 받기도 하고, 잘 아는 사람들도 그를 하다가 만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105]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탄생한 서양 극우 세력은 현재 북한의 통치 방식과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국가가 가장 닮았다는 이유로 북한 찬양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 보통 대안 우파가 가장 선호하는 국가인 러시아보다도 훨씬 더 극단적인 통치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며, 극우적 관점에서 전세계에서 가장 순수성이 높은 국가로 꼽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서양권의 정상적인 보수가 아닌 극우 한정이며, 다른 동네는 극우일지언정 친북은 절대 아니다.[106] 뉴라이트는 이승만 정부부터 이어진 보수우파 세력이 아닌 NL 주사파들이 연세대 사태 이후에 반대편으로 전향해서 일뽕이 된 케이스다. 그들은 자신이 숭배하는 독립운동가를 제외한 타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왕조를 비하한 북한 정부의 언행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107] 실제로 해외 좌파뿐만 아니라 해외의 보수우파들도 주체사상이 극우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108] 중도주의자인 김대중이 먼저 북한의 인권에 관심을 가졌지만 NL과 NL에서 전향한 뉴라이트가 북한 인권 여론을 장악하는 바람에 북한 민주화운동 = 뉴라이트 여론이라는 편견이 만연하게 되었다.[109] 일제강점기에는 '金日星'으로 더 자주 표기되었다.[110] 이 탓에 김정일의 러시아어 이름이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이였다.(이르센의 아들 유리)[111] 이르센이 아닌 러시아 이름[112] 이승만은 일찍부터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김일성은 중국소련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둘이 만날 일이 아예 없었다.[113] 이승만 역시 공산주의를 굉장히 싫어해서 김일성이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지 않는 한 절대 대면할 일은 없을 거라고 못박았다.[114] 게다가 그는 좌익들에게는 진료조차 해주지 않았을 정도의 강경 반공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리고 한약방 영업도 무면허로 했어서 실제로 인텔리 분자인 것도 아니다.[115] 사실은 소련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도 대부분 그들이 추구하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긴 했다. 카를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도 실제로 19~20세기 사회주의/공산주의애서 유력한 혁명가들은 대부분 프롤레타리아와는 거리가 멀고 돈 많은 부르주아-중산층 같은 지식인 출신이 더 많았다. 그리고, 이런 부르주아-중산층 출신 운동가는 신념이 확고해서 진짜 프롤레타리아 출신 운동가들과 달리 변절하는 일도 적었다.[116]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버지가 김성애와 불륜을 저지른 성격도 있고, 자신도 70년대 초에는 권력을 얻기 위해 애를 썼음을 감안하면 이쪽이 유력하다. 굳이 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국가의 수명을 단축시킬 이유도 찾기 어렵다. 실제로 김일성이 싫어했다면 권력을 얻고 싶어한 김정일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김일성이 오늘내일하던 90년대 초였다면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을 지 모르나 기쁨조가 처음 생긴 1975년은 아직 김일성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117] 키가 180cm에서 190cm까지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김구와 대비해도 아무리 원근법으로 김일성이 앞쪽에 있다고 해도 키가 비슷하거나 좀 더 클 수 도 있다. 김일성 김구 사진[118] 지역차가 큰 편이라 전라북도 지방은 161 - 162cm, 함경북도 지방은 167~168cm.[119] 북한에서 김일성 얼굴에 대해 남기는 찬사는 '웅장무비한' '해빛같은 미소, 친근한 음성, 자애로운 안광, 따뜻한 체취' '눈부시게 환하신 존안, 천기를 헤가를듯 한 예지로운 안광, 마디마디 따스히 스며드는 친근한 음성' '거룩하신' '조선의 성산 백두산의 기상을 지닌 천출위인의 용모' 등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120] 그렇게까지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적당히 남자답고 군인스러운, 카리스마 있는 외모라고 평가된다. 가수 한동근을 닮았다는 평가도 있다.[121]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인 김정숙 역시 북한에서는 절세미녀로 선전되고 있다고 한다.[122] 북한에서 김일성의 위상과 김정일이 북한 내부에서 목소리 공개를 사실상 안하다시피 했다는 것, 김정은의 목소리가 김일성과 비슷하게 걸걸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긴 하다.[123] 하지만 이 별명은 대체로 억지로 끼워맞추기에 불과하고 시기상으로 봐도 박정희, 김일성, 우고 차베스를 제외하면 몇 년 정도 간격이 있어 카터에게 적합한 별명은 아니고, 무엇보다 이 별명은 전술한 것처럼 오직 한국에서만 쓰이지 해외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다.[124] 라고 했지만 경주 김씨가 인구가 많아 그렇게 표현했을 뿐 전주 김씨가 장손(長孫) 집안이다.[125] 17세기경 김일성의 8대조인 김계상이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126] 1992년에야 북한에서 존재가 밝혀진 고려 태조의 먼 후손조차도 족보 3권 분량을 태운 사례가 있었고, 직계 후손이던 왕명찬조차 '봉건 왕조의 후손'이라 낙인찍힐까봐 족보 및 옥새를 숨겨왔었다.[127] 프랑스 TF1에서 '붉은 왕(Le roi rouge)'이라는 이름으로 1988년 12월 2일에 방영된 르포 프로그램(전체 영상)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8년 12월 27일KBS 1TV에서 방영된 바 있다.[128] 다만 신빙성은 높지 않은게, 김일성이 특이 혈액형이라서 소수에게 뽑았으면 모를까 수십명이라면 딱히 노화가 올 정도로 위험한 행위가 아니다. 거기다가 싱싱한 청년 피를 뽑으려고 할 텐데 70대처럼 보일때까지 착취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40, 50대 수준에서도 뽑았다는 말이니까. 이와 비슷하게 김일성을 존경하던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건강을 위해 주기적으로 어린이들의 피를 수혈받았다는 말이 있었으나 사후에 루머로 밝혀졌다.[129] 김책은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김일성도 김책에게는 깍듯했다고 한다.[130] 이는 김정일이 눌변이었기에 대외적으로 육성 공개를 매우 꺼렸기 때문이다.[131] 심지어 '건느다', '역스럽다' 같이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서울 방언을 표준어로 택한 사례도 있다. 평양 방언 등이 없지는 않지만 거의 손에 꼽을 정도다.[132] 유럽의 언어들은 옛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도 영어, 스페인어 등 원래 유래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공용어의 이름을 붙인다. 이건 중국에서 조선족을 위한 한국어 규정을 제정하면 중국어라는 궤변이나 다름 없다. 중국도 이런 언어를 '조선어'라고 하지 김일성 같은 주장은 안 한다.[133] 그나마 외부의 우려와는 달리 '부모님',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134] 그런데 세종대왕의 눈이 멀었다는 건 의외로 진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실제로는 당연히 한글을 다 완성하고 반포까지 다 한 후 그 후유증으로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은 거지 김일성이 완성했다는 건 완전히 개소리.[135] 놀새나라TV 에서도 남한에 오고나서 한글날 이라는 날이 있는걸 처음 알았다고 한다. 과거 주영북한공사를 지냈던 태영호 의원에 의하면 조선글날은 푸대접 받아서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전에는 달력에라도 표시 됐지만 김정은 집권 후로는 이마저 빠졌다고 한다.관련기사 자세한 내용은 한글날 문서의 북한의 한글날 문단 참조.[136] 다만 '김일성이 한글을 완성했다'는 주장은 실제와는 약간 다르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우상화/북한 항목 참조.[137] 김소월의 초혼, 나도향벙어리 삼룡이, 최서해의 탈출기 정도가 실려 있다.[138] 한국 교과서에서도 김일성의 주장에 기반한 내용이 실려 있어, 남한 사람들은 북한이 어느 부분이 순우리말을 쓸 것인가만을 찾고 북한이 외래어를 쓰는 부분을 잘 다루지 않아 스스로 김일성의 모략에 말려드는 모양새를 보였다. 심지어 '얼음보숭이' 같은 가짜 북한 표준어를 북한 사전에 한 번 실린 적 있다는 이유로 아주 대중적인 북한말처럼 교육하기도 했다.[139]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남로당 사건으로 군에서 예편된 후 군에 복귀하지 못하고 평생 빨갱이 소리나 들으며 살았을 것이다.[140] 6.25 전쟁이 없었다면 중화민국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멸망 당했을 것이고, 장제스도 반동분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141] 전쟁 특수가 없었다면 이케타 하야토의 발언으로 실각되었을 것이다.[142]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근데 6.25 전쟁 덕분에 미군의 공급기지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143] 이와 비슷하게 김정일은 늦어도 2002년부터 북한에서는 금지된 인터넷을 통해 남한 사이트를 자주 드나들었다.[144] 시인 전동혁. 이 사람은 1957년 소련파가 숙청당해 힘을 잃자 소련으로 돌아갔다.[145] 특히 중간에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라'는 내용.[146] 참고로 스탈린과 김일성의 나이차는 30살 이상으로, 스탈린이 아빠뻘이다. 아무래도 공산권이기 때문에 나일리지 문화가 약한 영향인지도[147] 이것 때문에 탈북자 중 극우 성향이 많지 않냐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김일성을 정말 싫어하기는 하되, 그 만행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좋겠느냐, 어떤 정치 사상을 지지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에 도전한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은 '위대한 영도자 하는 것은 다 민족의 도둑의 별명'이라며 김일성도 나쁘게 여겼고, 그 행태를 박정희가 닮아간다는 주장을 하던 인물이었다. 북한이 들어서며 사망자가 20명 이상 발생했던 시위인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의 사상적 배후로 주목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인물이다. 반공투사로 탈북민을 대하던 전통 때문에 정치적으로 활동이 많은 쪽은 보수 정치권에 편입되는 경향이 많은 정도다. 조용한 사람들은 주변 정보를 따라서 지지 정당을 정한다. 북한이탈주민 문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148] 중앙당 측에서 '태양절' '광명성절'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 했다고 지시했다는 2024년 4월 15일 자유아시아방송 기사에서도 갈수록 어려워지는 생계난에 "그나마 김일성 시대에는 식량배급도 있었고 무상치료, 무상교육도 실시되었는데 김정은 시대에는 아무것도 바랄 수 있는 게 없다"며 선대 수령들의 시대를 회상하는 주민들이 있다고 언급된다. # 다만 저 시대는 철저히 외부 정보가 차단되어 2010년대 정도가 실질적으로는 배급 등으로 식량을 통제받지 않아 민생이 나은데도 속고 있는 것에 가까워서 김일성 시대의 타국과의 비교나 남한과의 비교를 하다보면 앞서 말했든 김일성을 가장 문제가 있는 인물로 꼽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노인 세대면 저 시대가 궁핍했던 면이 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149] 북한 주민들도 이런 책들을 훼손하는 것이 처벌을 받는 '범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책 한 권을 모두 태워버리며 증거(?)를 인멸하기에 처벌할 수도 없다고 한다.[150] 국제앰네스티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직 반항심까지는 아니고 젊은 세대 중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계층이 주가 된다는 의견이 많다. 북한을 나오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는 많다.[151] 사실 주체사상 자체가 동어반복모순으로 점철된 사상인 만큼 공산권 사람들도 비웃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152] 출처: 강광식 편저, 북한의 실태 - 분야별 경험자료 및 예비적 고찰 , 198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0쪽[153] 물론 이 존경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자.[154] 짐바브웨 달러로 대표되는 시기인, 짐바브웨가 멸망 직전이던 2009년 기준으로 짐바브웨의 취약국가지수전란 하나 없이 소말리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155] 독재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은 군대를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장악하는 것임에도 군부를 적으로 돌린것만 봐도 무가베가 얼마나 생각이 없었는지 알수 있다.[156] 그 예시로 김일성을 모방한 우상화 정책을 펼친 것은 물론 기독교를 잔혹하게 탄압하는 국가 무신론 정책을 펼쳤으며, 북한의 영향을 받은 1973년 개헌을 통해 절대권력을 가지게 되었다.[157] 다만 그의 학정은 나치 독일에게서도 많은 것을 차용해왔으며, 응게마는 마오쩌둥도 김일성과 같이 존경했다.[158] 정확히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밖게 안 되던 나라에서 10년 만에 5만~8만 명을 죽이고 1만 명을 실종시켰으며 10만~15만 명을 해외로 이주하게 만들었다.[159] 에리트레아의 독재는 북한과 쌍벽을 이루는 언론 탄압, 기독교 박해, 국내 여행에 대한 통제, 열악한 군복무 환경, 극도의 폐쇄성 등을 북한과 공유하며, 특히 야당 없는 완전한 일당제와 20년 동안 선거 자체를 시행하지 않는 것은 그 북한보다도 더하다.[160] 그 세습도 김일성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는지는 불명.[161] 쿠바조차 남한과 수교하게 된 2024년 현재도 남한과 수교도 하지 않을 정도다.[162] 애초에 지금 시리아의 나라 꼬라지를 보면 한국 입장에서도 수교할 가치 자체가 없다. 아예 여행금지국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치안과 정세가 매우 나쁜 나라이며 경제 상황도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개판이다. 외교 성향도 극단적인 반미, 반서방, 친중, 친러라 이 나라를 방문할 시 미국 무비자 입국도 죽을 때까지 막힌다. 쿠바는 시리아에 비하면 정말 순한맛에 속하는 나라다. 쿠바는 나라 자체는 반미, 반서방에 속할지언정 시리아, 이란, 베네수엘라급으로 극단적인 성향은 아니며 결정적으로 쿠바 국민들은 오히려 친미, 친서방 스탠스에 더 가깝다.[163] 일단 마오쩌둥을 존경하여 대약진운동으로부터 영감을 아주 크게 받은 것은 사실이다.[164] 사회주의 대가정론과 이엥 티릿 사회사업부장이 주도한 정책이 혼합되며 크메르 루주캄보디아에 살던 부모와 자식을 분리시키며 서로간의 인연을 끊게 하고 10살도 안 된 어린이들을 납치한 후 '앙카르가 너희의 친부모다'는 식으로 세뇌해 소년병으로 키웠다.[165] 북한과 민주 캄푸치아를 제외한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은 조직생활은 하더라도 생활총화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166] 1983~1985년까지 에티오피아 북부에서는[167] 1971~1997년까지 콩고민주공화국의 국명.[168] 애초에 김정일의 사치는 김일성이 물려준 기반을 바탕으로 행해진 것이다.[169] 참고로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로 등극한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별장을 지었으며, 1960년대에 지은 특각들은 '낡고 어둡다'는 이유로 '당과 수령을 찬양하라'며 작가동맹에 넘겨주는 등 특정 계층들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이 비교적 초기에 쓰던 특각들은 이후 지은 특각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평범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0] 북한에서는 콘크리트와 강철 등의 강도는 '마르까'를 이용해서 나타낸다. 참고로 어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는 '스탬프, 표, 기호, 부호, 등급, 계급, 성질, 품질' 등을 나타내는 러시아어 마르카((марка)에서 유래된 단어다.[171] 김일성의 별장 중에서도 가장 큰 별장이었으며, 관리하는 직원만 150~200명에 별장을 호위하는 직원만 5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172] 한번 사용한다고 손잡이가 망가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김일성이 한번이라도 잡으면 곧바로 새 손잡이로 교체했다고 한다.[173]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정도로 신선한 회만 먹었다고 한다.[174] 김일성이 먹는 원숭이골은 식탁 위에 오른 원숭이가 김일성이 골을 다 파먹을 때까지 눈을 깜빡이고 있어야 했을 정도로 '신선한' 것이어야 했다고 한다.[175] 이들은 모두 기쁨조의 일원이었는데, 이는 즉슨 김일성도 아들만큼은 아니었어도 여색을 밝혔다는 소리다.[176] 정황상 김정남을 위한 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77] 그러나 김일성이 그렇게 신변 안전에 신경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178] 1935~, 1994년까지 20여년간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유럽 지역에서 김일성 일가를 위한 물자 조달을 담당했지만,(그가 서유럽에서 구매한 제품 중 무려 80%가 독재자 가족 주위 사람들에게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고 믿은 나머지 1994년 10월 18일부터 죽은 척 가장하고 오스트리아의 외진 곳에서 '에밀'이라는 가명으로 한동안 숨어 지냈다고 한다. 참고로 김종률은 북한 주민들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자가 사치스럽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으며, 처음에는 젊었을 적에는 북한 체제에 대해 희망을 품어왔으나 후에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고는 깊은 배반감을 느낀 나머지 음식점에서 김일성, 김정일과 관련한 말이 나오면 소리를 지르며 '그놈한테 반드시 핵폭탄을 던져야만 할 거요.'라고 외칠 정도로 김일성을 마치 악마와도 같은 존재처럼 여기며 증오하게 되었다.[179] 덤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김정률은 숨어 살면서도 부자 나라에서 사는 만큼 먹고 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사과 한 개를 들고 "나는 매일 과일 한 개를 먹습니다. 북한에서는 대부분의 장관들도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 아주 소수의 지도부만이 차지하는 이것이 도대체 어떤 빌어먹은 놈의 체제란 말입니까? 도주자가 장관보다도 더 잘 먹는다면,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도망자인 나는 그 체제를 이겼습니다."라고 '독재자를 고발한다' 저자들에게 말했다. 사실 북한에서는 "평양 시민들에게 남새(채소)와 과일도 신선한 것을 늘 떨구지 말고 공급하여야 합니다."라는 김정일의 말에 따라 평양 시민들에게 사과를 공급하고 있기는 한데, 문제는 선전 사진에 나온 사과들이 죄다 설익은 사과들이다.[180]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에 '독재자를 고발한다'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다.[181] 묘사에 따르면 김일성의 수행원들에게 제공된 음식은 그들이 이전까지는 결코 먹어 보지 못했던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하고, 기름지고 무엇보다도 양이 많은' 음식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김일성은 그보다 훨씬 질 높은 음식을 먹었을 것이며, 김정률이 언급한 요리로는 '아주 고급스런 소스'와 '가장 연한 송아지고기 구이', '비싼 치즈', '값비싼 와인' 등이 있다.[182] 덤으로 만수대의사당에 방문한 동독의 고급 관료들은 '최고의 맛'을 낸 무려 20번의 코스 요리를 제공받았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김일성의 요리사들의 실력이 매우 뛰어났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사실 김일성을 포함한 김씨 3대가 외국 정상과의 회담 때에만 만찬을 먹었으면 소소한(?!) 비판거리는 됐을지언정 '인민의 고혈을 빨아 사치를 했다'는 말은 거의 듣지 않았을 텐데 평상시에도 이 모양이었으니 더욱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사실 외빈 만찬이 소소한 비판거리가 되야 하는 것도 억지인 게, 애초에 외빈 만찬은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대접해야 하는 만큼 국가 위신과 외교관계 문제도 있어서 좋은 음식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183] 큰 샹들리에는 무려 24m나 되었다고 한다.[184] 이는 황장엽평양 지하 300m 지점에 '샘물과 풀까지 있는', '북한의 지도층만을 위한 딴 세상'이 존재한다고 밝힌 바와 일치한다.[185] 기계공학자였던 김정률이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정률은 오스트리아 망명 중에도 스스로 잠수함을 설계할 정도로 유능한 기계공학자이기도 했다.[186] 이를 북한에 들여오는 데에 무려 50개 이상의 컨테이너가 필요했다고 한다.[187] 김일성은 중소관계 악화 이후 서방 외래품의 성능을 알기 전까지는 소련제 자동차를 선호했다고 한다 김정률이 보위부에 합류한 1970년대 초 기준으로 대략 1000대의 자동차를 보유했다고 한다.[188] 물론 겉보기만 똑같았지 차체는 흔들리고, 래커에 기포가 생기고, 내부는 더욱 처참한 데다가 몇 미터도 가지 못하는 한마디로 고철덩어리 수준이었으며, 북한 내에서는 '100미터 미인'(멀리서 아름답게 보이는 소녀는 가까이서 보면 실망스럽게도 못생겼다는 의미)으로 비유되었다. 그런데도 당 지도부의 의원들은 이 고철덩어리를 한 대씩 의무적으로 가져야 했다.[189] 다만 황장엽은 이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인했다.[190] 그리고 석영환은 김일성이 17세~20대 초반의 어린 소녀들을 기쁨조로 부리며 기쁨조 두세명을 동행하며 자신을 즐겁게 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도 한 번씩 웃을 때마다 뇌세포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김일성 장수연구소'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191] 三蔘湯, 갈비탕&삼계탕에 전복, 산낙지, 수경삼 등을 넣고 끓인 요리.[192] 실제로 1951년에 작성된 CIA 보고서 '김일성 배경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주로 육류를 선호하며 생선류와 채소는 거의 먹지 않았고, 닭고기와 함께 요리된 개고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매일 아침, 저녁마다 먹었을 정도였고, 와인을 선호했지만 음주량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193] 김정일과 김정은은 어릴 때부터 지도자의 자식으로 살아왔으니 논외.[194] 모부투도 김일성처럼 전통음식과 호화음식을 절충해 먹었다.[195] 김일성의 조부모 4인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1917년에 사망했다는 설과 1940~50년대에 사망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196] 북한에서 성모마리아처럼 숭배되는 김일성의 어머니지만, 김형직 사후 안도현 만보라고 부르는 중국 동네에서 아편농사를 지었던 조광준이라는 홀아비와 재혼했었다. 그걸로 인해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엇나가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물론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불리할 가정사가 있다면 철저히 숨기며 김일성 일가를 미화하고 있다.[197] 1993년 - 1998년 9월까지 부주석. 2003년부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198] 1909년생으로, 김일성 유격대 소속이었으나 1941년 사망하였다. 대성산혁명렬사릉이 준공되자 김정숙,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맨 윗단에 안치되었다.[199] 조선신민당과 신설 합당[200] 남조선로동당과 신설 합당[201] 국군이 1~2km 이미 침공했으니 남침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군대가 질은 좋겠지만 북침을 실행하는 국군에 비해 수가 적으니 분발하라는 등 거짓말을 늘어놓기에 바빴다.[202] 후에 김일성은 10월 12일 밤 평양을 비밀리에 탈출하여 덕천으로 도주했다가 일주일 후 평양이 한국군과 UN군에 의해 점령되자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중에 중공군이 개입하고 난 뒤 12월 6일이 되어서야 평양으로 나왔다.[203] 일제가 사회주의를 싫어하였고, 북한이 사후 행할 정책이 거부감이 심하리라는 예상이 있던 건 사실이나 대신 평안도 같은 지역은 자발적으로 민족자본가, 기독교 민족주의자가 있던 곳이었다. # 함경도는 좌파가 제법 있었으나 오기섭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도 이 발언이 있고 난 후 수년 뒤 숙청된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유진오가 밝혔을 만큼 사회주의는 단순히 공산주의와 다른 진보적 사상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의 정책이 너무 폭력적이기에 사람들이 꺼린 것이다. 실제로 북한에 살았던 사람들이 드러내던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대한 옹호를 목격하고 사회통제가 더 강화되기도 했다.[204] 위에서 보듯 1955년만 해도 일본 때문에 사회주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김일성이었다.[205] 당시 동독 서기장.[206] 여기서 사상이 나태해지고 행동이 산만해진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해서 국민들 삶의 질이 높아지면 국민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카자흐스탄도 경제 성장이 된 후에야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한국에서 경제부장관이었던 김재익이 "경제가 성장하면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로 발전된다" 확신하였고 실제로 신군부에 협력했다는 비판에도 김재익의 경제정책은 한국이 신군부를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국가지도자라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이며, 김일성의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북한은 잊을 만하면 식량난에 시달리는 나라가 되었다.[207] 오역이다. 발라즈 샬론타이로 번역하는게 맞다.[208] 정작 김일성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리순신 장군들과 같은 우리 선조들의 영예로운 업적과 용감성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 신성한 투쟁에서 우리의 인민군 장병들과 전체 인민들을 영웅적 위훈에로 고무 격려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후에는 그나마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급적 한계를 언급하고 외세 배격을 강조하는 하에 북한에서 연구되고 있다.[209] 웃긴 것은 그 자손들인 김정일과 김정은은 핵개발을 자신들의 '치적'이라고 자랑하듯 선전하고 있다.[210] 해당 잡지 58~59쪽 참고.[211] 1990년대까지 각 언론매체에서 '북한통'으로 이름을 날렸다.[212] 2010년 드라마 전우에서도 작지 않은 비중의 인민군 고급장교 역할을 맡아 비슷한 느낌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전시에 무능하다는 점도 같다.[213] 이는 김일성이 기독교 집안 출신이며 스탈린이 기독교 신부가 될 뻔했다는 이야기의 패러디인 듯하다.[214] 박정희가 원래 남로당출신인 걸 반영했다.[215] 아나키스트로 나온다.[216] 아나키스트였던 현실의 모습과 달리, 극단적인 고토회복주의자로 나온다. 단재 선생의 이름을 자주 팔아먹고 단재 선생 역시 생전 민족주의적인 성향이었으나 유사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단재 선생의 논리는 일제강점기라는 한계로 인한 일부 오류와 왜곡에 의한 것이다.[217]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모티브이다.[218] 실존하는 사상으로 현실에는 카를리스타 좌파나 믈라도로시의 사상,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이 있다.[219] 김정일은 미등장. 탈북자 주순영도 1호 공훈배우 시절 첫째부인 김정숙 역을 맡았다.[220] 사실상 어쩔 수 없이 갈라진 민족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어 어마어마한 사상자들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비속어도 웬만해선 허용된다. 심지어 욕설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군대 정훈교육 시간에도 백두혈통 삼부자 사진이 나오면 훈련병들이 욕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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