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린성 영도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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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주보중(周保中) |
국적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민족 | 바이족 |
출생 | 1902년 윈난성 다리현 만교현 |
사망 | 1964년 2월 22일(향년 62세) 베이징 |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혁명가.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으며 김일성의 상관으로 유명하다.2. 생애
1902년 윈난성 다리현 만교현에서 소수민족인 백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3년 운남강무학당 17기 공병과에 입학했고 국민혁명군에 입대해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에서 대대장으로 참여했다. 192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공결렬 이후 1928년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했다.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귀국하여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에 임명, 동북항일연군 5군 군장, 2로군 총지휘,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여장을 역임하였다. 이때 휘하에 최용건, 김일성 등 주요 조선인 게릴라 지휘관들을 부하로 거느렸다. 하지만 관동군 및 만주국과의 싸움에서 끝내 패배하여 1940년 12월, 소련으로 피신하여 하바롭스크에 잔존부대를 집결시켰다. 소련군 극동방면군의 아바나센코 장군으로부터 1942년 7월 중국 특별여단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소령 대우를 받았다.
1945년 7월, 동북항일연군교도려는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저우바오중은 동북위원회 서기에 임명되어 창춘 지역의 동북공작을 담당하였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시작되자 소련군 사령부에 김일성의 정치적 가치를 보고하여, 그가 북한의 지도자가 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일제 패망 이후 9월 동북인민자위군을 결성하여 총사령에 취임하였으며, 소련 점령하 만주의 장춘 중앙경비사령부 부사령원, 중공 동북국위원회 위원, 길료군구 사령원, 지린성 정부주석을 맡았다. 동북지역의 3건운동, 정풍운동을 담당하며 만주에서의 공산당의 지배를 닦았으며 국공내전 요심전역에서 국부군과 압록강으로 몰아냈다.
하지만 김일성을 추천한 일에 대해 마오쩌둥으로부터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고 분노를 사서 좌천되어 1949년 8월, 고향인 윈난성에 전근되었으며 윈난성 정부 부주석, 서남행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등을 맡았다. 1958년, 김일성의 중국 방문 때 베이징으로 초대되어 김일성과 재회했다.[1]
윈난성 쿤밍시에서 집무하던 도중 병을 얻었으며,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베이징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어 1964년 2월 22일 베이징에서 죽었다.
3. 참고문헌
- 와다 하루끼,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2).
-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서울: 청계연구소, 1988).
- 김선호, 「1945~1947년 북중관계의 형성과 북중혈맹의 근원」『동북아역사논총』57 (2017.9).
- 백정윤, 「'주보중 일기'를 통해 본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조선인 대원들의 활동(1936~1941)」『한국근현대사연구』68 (20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