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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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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전사한 강건(인민군 총참모장)의 장례식에 참가해서 눈시울을 붉히는 최용건.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손을 숨겨서 프리메이슨임을 알리는 김일성.[1]
崔庸健
1900년 6월 21일 ~ 1976년 9월 19일
1. 개요2. 이력
2.1. 독립운동2.2. 해방공간에서의 활동2.3. 6.25 이후2.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3. 평가4. 창작물에서의 최용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군인, 정치인. 다른 이름으로 최석천(崔石泉), 최추해(崔秋海), 김지강(金志剛)이 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국가수반 역할을 수행했다. 평안북도 태천군 서읍내면 출생.

2. 이력

2.1. 독립운동

국권이 강탈당하자 중국에 망명하여 쿤밍의 윈난(운남)군사학교[2]에 들어갔다. 이 당시 독립운동 세력 중 드물게 군사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다. 이후 쑨원이 세운 황포군관학교교관으로 일했다. 이때는 또 학교 교장이 장제스에 주요 교관이 저우언라이, 왕징웨이...

이후 국민혁명군에서 연대장을 하다가, 4.12 상하이 쿠데타, 마일사변에 이어 국공결렬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 학살이 벌어지자 피신한다. 이때 중국인 부잣집 딸인 왕옥환[3]을 만났는데, 왕옥환은 최용건이 일본관원에 쫓기자 자기 침대 밑에 숨겨주었다고 한다. 이후 둘은 결혼했다. 이때 이미 왕옥환과 최용건의 나이차는 20살이 넘었다고. 진정한 위너?

동북항일연군에서 싸운 후 일제의 토벌작전이 거세자 1940년대에 소련으로 건너갔다. 이때 같이 건너간 이가 바로 김일성, 김책 등의 북한 정권 인사들이다. 최용건은 직책상 김책, 김일성의 상관이었다.[4]

2.2. 해방공간에서의 활동

해방이 되자 북한에 건너와 오산중학교 스승이었던 조만식조선민주당에 가입하였으나, 조만식이 감금(연금)된 후 실질적으로 조선민주당을 이끌면서 조선노동당의 꼭두각시 정당이 되었다.[5]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최용건은 6.25 전쟁 개전 당시 국방장관[6]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으나, 6.25 개전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박명림[7]에 따르면 한국전쟁김일성남침 주도에 반대한 몇 안 되는 북한의 정치인이다.

2.3. 6.25 이후

한국전쟁 휴전1955년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숙청 당시 최고인민회의 재판장으로 지냈다. 니들이 전쟁 주장해서 망할 뻔 했잖아소련파 출신 망명가가 회고한 박헌영 재판기

비록 6.25에 소극적이긴 했지만 동북항일연군 및 교도려 시절엔 김일성보다 선배였고 해방 후에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추대하는데 앞장섰으며 북한의 유일무이한 공개적인 권력투쟁 사건이었던 8월 종파사건에서는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위해 북한을 비웠을 때 반대파를 주시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포착하고 보고하여 김일성이 결국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사실 최용건은 1972년도까지 북한의 국가원수, 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다. 즉, 김일성이 1972년까지 자신보다 명망있는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활용하다가 자신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히자 주석제도를 도입하고 자신이 직접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그전까지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형식적으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국가원수는 입법기관에 해당하는 인민회의/인민대표자회의에서 의장이 맡았고 정부 수반은 내각 수상/총리가 맡았다. 논리적으로는 인민회의/인민대표자회의가 수상/총리를 선출하고 내각을 조직하며, 수상/총리가 지휘하는 내각이 공민으로부터 선출된 인민회의/인민대표자회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이다. 하지만 북한 최고인민회의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선노동당과 구색정당밖에 없다. 즉, 실질적인 야당이 없다는 의미이다. 조선노동당에서 최고인민회의와 내각 수상 선거와 관련해서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모든 사안에 대해서도 조선노동당이 한 번 결정하면 최고인민회의는 이를 별다른 반대 없이 승인하거나 입법하게 되어있다.

주석제 확립 이후 최용건은 부주석이 되었으며 기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로 개편되었고 상설회의 의장직에는 그 유명한 황장엽이 임명된다.

김책과 더불어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8] 북한 정권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1960년대부터 사회주의권 기준에서도 강한 폐쇄성을 가지게 된 후로 그의 아내가 중국인[9] 왕옥환이라는 점 때문에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지 북한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최용건을 숙청하거나 사후 평가절하한 적은 없다. 어쨌거나 그는 사망할 때까지 북한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동지로써 당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존경과 존중을 받았다. 김일성이 말년에 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높게 평가되었고 최용건의 아들 최운주도 아버지의 덕으로 북한에서 정치인으로 일하고 있다.

최용건의 아내는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60년대부터 북한 정권 내부에서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역시 그의 남편처럼 당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존경과 존중을 받으며 살았다. 최용건 사망 후 1980년 10월 10일~14일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참석했으며 1983년 6월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3. 평가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지키려고 애썼던 마지막 지도자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북한은 최용건이 사망한 이후 김씨 왕조로 변질되면서 공산주의를 내팽개치고 주체사상을 내세웠으며, 2009년에는 아예 조선노동당 당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조항을 삭제해버렸다. 이제 공산주의 국가는 없는건가[10]

4. 창작물에서의 최용건


[1] 다만 영문 위키백과에는 이 사진이 김책의 장례식이라고 적혀있는데, 어느쪽이 사실인지는 불명.[2] 이 학교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많다. 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주더, 북베트남군 총사령관 보응우옌잡(지압 장군)등...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도 여기 출신. 그리고 덩샤오핑 시절 국방부장을 지냈던 예젠잉 원수도 여기 출신이다. 그러고보면 6.25 때 남북한 국방장관은 동문에다가 동갑이었다... 그리고 이 학교는 중국은 물론 남북한, 북베트남의 국방장관을 배출한 명문사관학교다![3] 2007년에 사망했다.[4]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이들이 만든 파벌이 바로 빨치산파다.[5] 김일성이 조선민주당 와해를 위해서 일부러 그를 잠입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6] 북한식으로는 "민족보위부". 이후 인민무력부가 된다.[7] 고려대 교수. 한국전쟁연구의 떠오르는 별이다.[8] 여담이지만, 공식적 자리에서는 그래도 "일성 동지"나 "김장군"이었다고.[9] 한족[10] 소련과 동유럽 공산정권은 망했고 중국과 동남아의 공산국가는 이미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공산당이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할 뿐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북한은 알다시피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일본 제국주의를 계승한 파시즘 국가이며(실상 극좌도 아닌 극우)군주제 아니었나, 유일하게 쿠바만이 공산주의식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