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B, #BC0021 20%, #BC0021 80%, #9C001B); 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003478,#C39335> 내각 제1부수상 1959년 1월 20일 직함 신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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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이 許哥而 | |
이름 |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러시아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08년 3월 18일 |
러시아 제국 하바롭스크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하바롭스크) | |
사망 | 1953년 7월 2일 (향년 45세) |
평양시 | |
직업 | 정치가 |
이론사상 | 공산주의 |
학력 |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허가이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
러시아어 | Хо Га И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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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해방 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북한 정권의 파벌 중 소련파의 거두였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면서 6.25 전쟁 휴전을 20여 일 남기고 평양 지하 방공호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공식적으로는 권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인 성씨 중에 간혹 ~가이가 붙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가이 앞에 있는 것이 한국에서의 원래 성씨다. 가령 나 씨 성을 쓰는 고려인은 러시아에서는 '나가이', 유 씨 성을 쓰는 고려인은 '유가이'라는 성을 쓴다.[1][2] 그는 허씨 조상의 성이 이런 식으로 '헤가이'가 되어 버린 것을 다시 음차해서 '허가이'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2. 생애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나[3] 모스크바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슈켄트주의 주당(州黨) 비서로 근무하다가 1945년 8.15 광복 후 12월에 스탈린의 지시로 방학세, 박의완, 김열, 김찬 강상호, 기석복, 김승화 등과 함께 당과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파견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에 참가했고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신설된 검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6월 당의 제2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당 비서에 선출되면다. 이렇듯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기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이며 비서실장을 지낸 문일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한국말도 거의 제대로 할 줄 몰랐다고 하며 이 때문에 얼마 안되는 당내의 실무경험자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급으로 부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50년 조선로동당 제1비서를 거쳐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지만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대중정당론에 맞서서 전위정당론을 내세우면서 당을 개편할 것을 주장하다가 박창옥, 박영빈, 박금철, 박정애 등 김일성을 옹호하는 4박가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조직부장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제1비서에서 해임, 11월 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으로 좌천당한다. 평소 김일성의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 박헌영, 리강국 등을 비롯한 남로당 일파에 대해 누명을 씌워 숙청이 벌어질 때 그는 이들이 미국과 교신하지 않았다고 변호하였다.
1953년 6월 30일 정치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김일성과 박창옥은 그를 맹렬하게 규탄하였으며 그의 실수로 인해 저수지 복구 계획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가 당 비서와 당 부위원장에서 해임되게 만든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마구 비난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을 소홀이 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였으나 그 외의 비난은 김일성과 박창옥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미워해서 음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그를 부수상에서도 해임하여 대외경제상으로 좌천하는 안을 제기하였으며 그는 소련 대사관을 찾아서 하소연하였으나 소련 측은 그냥 김일성에게 싹싹 빌라고만 했다. 결국 이틀 후인 1953년 7월 2일에 자신의 사무실인 평양의 지하 방공호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김일성은 박정애를 시켜 그의 자살을 맹비난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가족이 반발하자 김일성은 소련 공민이었던 이들을 껄끄럽게 여겨 소련 측에 부탁하여 장인 최 표트르, 아내 최 니나를 비롯한 가족들을 소련으로 귀국시켰다. 아들인 허 이고르는 모스크바에 거주 중이다.
3. 의혹
- 공식 사인은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암살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권총을 2개나 갖고 있으면서도 가슴에 장총을 맞은 자세로 죽었다든가, 죽기 몇 시간 전 장인이자 조선인민군 탱크부대장이던 최표덕과의 대화에서 조금도 자살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그의 딸 허리라는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되자 암살당했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친구였던 장학봉은 당시 허가이가 등 뒤에서 총을 맞아 암살된 것이라고 했으며 모스크바에 거주 중인 아들도 한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암살을 주장하였다.# 그는 소련파의 수장이기 때문에 소련대사관을 들락날락하는 인물이라 부수상이자 외무상이었던 박헌영과 공무가 겹쳐서 계속 만나는 돈독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로당을 숙청하려고 할 때 박헌영을 변호하려고 나선 그가 김일성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이자 제거 대상 1호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죽는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김일성이었는데 그 이유는 6.25 전쟁 실패의 원인을 남로당에게 뒤집어 씌우는 작업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파의 수장인 그가 반대하면 일이 다 틀어지는데 그는 죽기 직전까지 소련 시민권자였으며 그가 자살하지 않고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국제적 분쟁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는 자살할 정도의 정신상태는 전혀 아니었답니다. 가족에게 전할 유언이라고 생각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만약 자살할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외조부는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다만 아버지는 외조부에게 "김일성 동지는 내가 자기의 일거 일동을 모스크바에 보고하고 있다고 오해해 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오해는 쉽게 풀릴 것이다. 지금 조국에는 37년도를 생각게 하는 징조가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는 김일성 동지를 너무 치켜세워 그를 조선의 스탈린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 고치지 않으면 인민들의 불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께서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차례 나를 소환해주도록 모스크바에 요청했다. 조국에서 나의 사명은 거의 끝났다. 오직 아첨분자들이 분별없이 날뛰고 있음이 걱정될 뿐이다.” 고 말했답니다. (친딸의 증언)[4]
- 그의 죽음에 대하여 다른 증언도 있다. 1951년 박영빈(소련파, 전 로동당 조직부장 겸 정치위원)은 그의 암살설을 일축했으며 3가지 이유 때문에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1951년 당에서 비판당해 조직부장 직에서 해임당했다. 둘째로 순안저수지 복구 사업을 김일성으로부터 지시받고 책임자가 되었는데 공사 현장에도 잘 나가지 않고 그 일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다. 자연히 복구 사업이 지연되고 지원군도 동원되지 않는 상황에 최경덕이 현장에 직접 나가 확인 후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오? 내가 보고받기로는 잘 안되는 것으로 듣고 있소"라며 비난했다. 이에 허가이는 "잘못 보고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일성이 직접 순안저수지 복구 현장을 보고 즉각 당 회의를 열어 허가이를 힐난했다. 셋째로 여자 문제 폭로였다. 소련파 간부들이 당시 연회장에서 유명한 여배우들을 초청해다가 술자리를 가졌는데 연회 후에 연회장 앞에 있던 저수지에 배우 하나가 죽으려 하는 것을 경비병이 목격했다. 그 배우는 "내가 유부녀인데 허가이 동무가 나를 욕보이려 한다"고 했다 한다. 이 사실이 당에 보고돼 허가이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허가이는 유서를 써 놓고 죽었다. 내가 직접 보았고, 허가이 필체가 틀림없었다. 유서 내용은 간단했고 그 중 "김일성이 독일 방문 때 나에게 선물로 준 권총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가이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5]
하지만 박영빈이 허가이가 몰락하면서 그의 자리를 차지한 수혜자였고 숙청당해서 소련으로 돌아간 고려인들 중에서도 김일성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양호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걸러 들어야 한다.
4. 여담
조선대백과사전에서는 그냥 반당분자로 욕만 먹고 있지만 이후에는 약간 대접이 나아진 것이 보인다. 2011년 북한에서 나온 소설 총서 <불멸의 력사> 미래 편에 오기섭과 함께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허가이가 그래도 김일성을 존경하지만 소련에서 오래 산 탓에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동정적으로 묘사되면서 예비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묘사되는 오기섭과 크게 대비된다.5. 대중매체에서
- 북한 영화 성새에서는 공훈배우 박동국이 분했다. 항일혁명열사들을 갖은 트집을 잡아 괴롭히는 간사한 소인배로 나온다.
[1]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 초기에 러시아 당국에서 인구조사를 하면서 고려인들에게 성씨를 물었을 때 이들이 자기 성씨를 "~가(哥)요"(ex. 이(李)가요, 김(金)가요) 라고 소개한 것을 러시아인 통계원들이 그게 성씨인 줄 잘못 알고 그대로 받아적은 게 굳어진 것이다.[2] 담당 공무원의 오해 또는 실수로 이민자의 성이나 이름이 바뀌어 버리는 일처리는 사실 외국어에 대한 이해가 박하고 행정이 아날로그식이었던 옛날에는 전세계적으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미국 과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조상대의 성씨는 '뒤마인'이었으나 이민 중 입국 심사대 직원이 잘못 알아들었는지 '다이아몬드'가 되어 버렸고(...) <대부> 시리즈의 비토 콜레오네도 원래 성은 '안돌리니'였으나 "콜레오네에서 온 비토 안돌리니"가 "비토 콜리오네"로 잘못 기재되어 그대로 굳은 것이다.[3] 함경북도 출신설도 있다. 그의 딸 허리라는 그가 연해주 포시예트(Посьет) 출신이라고 밝혔다.[4] 출처: 강상호 '내가 치른 북한 숙청'[5] 출처: 정창현 '인물로본 북한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