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6 19:57:55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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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쟁의 발발 전쟁의 전개 전쟁의 영향
6.25 전쟁/미군의 참전과 역할 6.25 전쟁/인식
6.25 전쟁/관련 기록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UN기념공원 6.25 전쟁/대체역사
6.25 전쟁 이후 대남 도발 역사

6.25 전쟁
六二五戰争 / 韓國戰争 | Korean War
파일:attachment/k28_12040357.jpg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Max Desfor[1][2]

파일:attachment/korea_war.gif
저작자: Roke(2006.06.05.)
기간 1950년 6월 25일 04:00 ~ 1953년 7월 27일 22:00(휴전)
장소 한반도 전역 및 부속도서 일부[3]
원인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
교전국 파일:유엔 깃발.png 유엔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4px-Hammer_and_sickle.svg.png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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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최소 92만명[12]
+전투협조 병력
최대 200만여 명
결과 휴전[13][14]
영향 미소 주도의 냉전 체제 가속화
분단 고착화와 남북 체제 대결 심화
남북 독재체제 수립
휴전선 형성
이산가족 발생
피해규모 인적 피해 군인 26만 명[15],
민간인 100여만 명 추정
민간인 납북, 월북
군인, 민간인
최소 250만여 명[16]
민간인 월남
물적 피해 공업기반의 절반,
30억달러 또는 국부의 1/4[17]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18]
1. 개요2. 명칭3. 상세
3.1. 전쟁 발발3.2. 전쟁의 전개3.3. 미군의 참전과 역할3.4. 전쟁의 영향3.5. 6.25 전쟁 결과의 대체 역사3.6. 전쟁에 대한 인식3.7. 관련 기록3.8.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4. 전쟁범죄
4.1. 유엔군4.2. 공산군
5. 기타6. 다룬 책
6.1. 역사학계에서6.2. 군사적 자료6.3. 다큐멘터리
7. 관련 작품
7.1. 문학7.2. 영화7.3. 드라마7.4. 뮤지컬7.5. 만화7.6. 게임7.7. 노래7.8. 미술작품7.9. 동영상
8. 참고 문서9. 어록


1. 개요

6.25 남침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도 없이 무단으로 남침[19]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적 대리전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3년 1개월 간 이어졌다. 이후 남북한 모두 준 전시상태를 유지하며 군사적 대치를 이어갔으며, 세계사에 유례없이 긴 휴전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진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하게된 사례중 하나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례이기도 하다. 간혹 이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으나 그 이전부터 남북은 이미 별개의 정권으로 분단돼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중화민국이 살아나는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침략자로 규정된 중화인민공화국은 20년 넘게 고립을 면하지 못했다.

2. 명칭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반면 이 전쟁은 (남한 기준으로는) 특이하게도 발발한 날짜가 그 이름으로 쓰인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관습적으로 날짜-사건을 조합해 6.25 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영어로는 Korean War라고 부른다. Korean War라는 이름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 사령부에서 붙인 것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한국 전쟁이라는 명칭 외에도 이 전쟁을 호칭하는 몇몇 단어가 있는데, 가령 북한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이라고 부르며 현재 중국도 정식 수교국인 한국을 의식해 항미원조전쟁 대신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좀 더 많이 사용한다. 여기서 조선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쓰는 접두어 '한(韓)-'을 대신해서 한자문화권에서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조선전쟁이나 한국전쟁이나 의미는 같다.

1952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정부간행물 "6.25사변 피살자 명부"와 1952년 국방부에서 간행된 정부간행물 "한국전란지"를 보면 전쟁 당시부터 두가지 용어를 병행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안에서도 이 두가지 단어를 병행 사용했지만 행정관서는 주로 '6.25'를, 군에서는 주로 '한국전쟁'을 사용했다. 1973년 한국 정부에서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도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이 등장하고, 2014. 3.24일에는 6·25 전쟁일로 개정되었다. 반면 한국 정부에서 만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국전쟁이 등재되어 있다. 또한 민간에서는 아무 설명없이 날짜만 가지고 6.25라고도 불렀고, 6.25 사변[20] 또는 6.25 동란이라도 부르고 있다. 또는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 불린다. 6.25 전쟁이란 말은 우리만 사용하는 단어로 우리 민족만의 자주성 주체성을 강조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Korean War라는 명칭은 객관성 중립성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그 번역어인 '한국전쟁'은 엄밀하게 중립적이지는 않다. 전쟁의 한 쪽 주체인 북한에서 스스로를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 학계에서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대체로 6.25 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쓰인다. 2011년 한국전쟁학회에서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전쟁 발발 책임이 모호해지거나 전도될 우려가 있다면서 6·25전쟁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6·25가 당시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점을 감안하면 이 전쟁의 영문 표기는 '1950~53 한국 6·25 전쟁(the 6·25 War in Korea 1950-53)' 혹은 '1950~53 한국 공산주의자 전쟁(the Communist War in Korea 1950-53)'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전병근 기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 미국의 수정주의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1, 1981년 출간·국내에는 1986년 번역·출간)이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국내 좌파들에게 확산됐다는 기사를 썼다. 기사

국방부에서 발간한 군 공식간행물을 보면 1952년부터 2004년까지 발간된 서적은 제목이 '한국 전쟁'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4년부터 '6·25전쟁'이 사용되기 시작해 2005년부터는 6·25전쟁 한가지만 사용하고 있다.[21] 국방부 지정 공식용어가 과거에는 한국 전쟁이었으나 2004년부터 6·25전쟁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 중인 단행 자료를 검색하면 1980년 이전에 발간된 자료 중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는 자료는 제목이 6·25로 되어 있는 자료보다 2배가 더 많이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출판계나 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한국 전쟁'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2]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비단 6.25 전쟁만이 아닌데 한국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6.25가 그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건들의 명칭도 바꾸어야 하냐는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그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기점으로 사건의 명칭을 부여한 예도 존재한다. 따라서 6.25 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 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그것 역시도 하나의 해석의 산물이자, 사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 전쟁을 지칭했다. 6.25 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6.25 전쟁이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와 서방의 대중들에게 6.25전쟁이 '전쟁이지만 전쟁 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하여 지칭한 것이었다(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 후에 6.25 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 쯤, War라는 단어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3. 상세

소련에서는 지원에 소극적이었지만 중국군으로 위장을 한 파일럿들을 일부 보낸 바 있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확전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무시했다. 6.25 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 스케일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비춰졌다.[23]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까발려져 명예를 실추당한다.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 뿐만이 아니었고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을 통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까봐 크나큰 내적 괴로움을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4][25]양쪽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전쟁 억제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제1~5공화국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에서 국시로 삼았던 반공, 북한은 남조선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국가 운영과 국민여론 및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 전쟁으로 생긴 각 체제(體制, REGIME)는 유지되고 있다.

3.1. 전쟁 발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쟁 발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전쟁의 전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미군의 참전과 역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미군의 참전과 역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전쟁의 영향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 6.25 전쟁 결과의 대체 역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대체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전쟁에 대한 인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인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관련 기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관련 기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쟁의 참전국, 주요 전투, 주요 인물, 사용된 장비를 다룬다.

3.8.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전쟁범죄

4.1. 유엔군

※ 유엔군,국군,미군,우익이 저지른 학살 행위는 6.25 전쟁 학살/유엔군,국군,미군,우익 문서 참조.

4.1.1. 대한민국

양민학살을 자행한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군인들
김종원 김창룡 송요찬 최덕신 탁성록


반공이 국시였던 지난 세기에는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상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도 전쟁 범죄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표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군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에 의해 10만~30만 명의 38선 이남 거주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그 외에도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자발적으로 종군한 학도병과는 별개),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군 위안부 등이 있다.

4.1.2. 미국

6.25 전쟁에 참여한 여러 군대 중에서 그나마 가장 신사적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완전히 깨끗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한국군, 인민군, 중국군은 물론이고, 미군 스스로가 저지른 학살까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모조리 사진과 자료로 남겼다. 그렇게 남은 미군의 대표적인 학살 사건은 제1기병사단이 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다. 그 밖에 세균전을 행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미국측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4.2. 공산군

※ 공산군과 좌익이 저지른 학살행위는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문서 참조.

4.2.1. 북한

소위 인민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행위가 가장 유명하다. 지역주민을 모아놓고 지역 유력가, 정치인 등을 처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였다.

또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손진태, 박열, 정인보, 이광수, 방응모 등 유명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납북자의 88.2% (84,659명)가 한국 전쟁 발발 이후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되었으며, 그 중 80.3% (77,056명)가 자택이나 자택 인근에서 납치되었다. 납북된 한국 인사 중에는 법조인이 190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언론인이 226명이었다.[26] 또한 이러한 납치의 기획은 전쟁중에 뿐만아니라 전쟁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생산된 북한 당국의 문서에서도 확인이 된다.[27][28]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그 외에 포로에 대한 처우가 처참했다는 말도 있다.

4.2.2. 중국

흔히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들먹이며 중국군은 범죄가 없는 깨끗한 군대였다는 환상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29], 식량을 배급하지 않고 행군을 시키거나, 낄낄 웃으며 포로들을 쏴죽이거나, 채찍 등으로 구타, 부상당한 포로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등 중국군도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하는 전부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UN군 장병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수용소에 있던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되었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중국군에게 잡힌 UN군 포로 중 건강하거나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부상자들은 수용소까지 걸어갔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가거나 총살시켰다. 포로들이 죽은 이유는 대부분 위생관리 부재, 식량 부족, 이질, 폐렴 등이었다. 중국군들은 소량의 식량을 주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배급된 식량 또한 영양가가 없었다.
또 중국군은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 적군은 포로들을 두들겨 패고 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한동안 집어넣기도 했다.
죽음의 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였다. 이곳에 보내진 포로들은 담요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벨리 아타소이 병장은 이러한 포로수용소들 중 한 곳인 450M짜리 터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 모르며, 이틀에 한 번 주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 '터키인이 본 6.25 전쟁' 지음 : 알리 데니즐리, 옮김: 이선미, 감수 이난아
중국군은 부상당한 나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차에 태우고 새끼줄로 묶었다. 차는 여차하면 전복 될 것만 같았다. 자동차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 길 위를 지나갔다. 부상자들 중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은 다시 차에 태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을 쏴 죽여 버렸다. 중국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미군 한 명이 떨어졌다. 그는 밧줄을 붙잡고 차 뒤에 질질 끌려오다가 힘이 빠지자 그 줄을 놓았다. 중국군 중 한 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다 중국군 한 명이 내게도 총을 발사했다. 총알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머리에 닿을 듯 지나갔다.
- 터키군 무자페르 쉔부르치 하사의 증언
장진호 전투 제 3 일 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세 겹, 네 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 되자 중국군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또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의 증언

5. 기타

  •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딘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전쟁 중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 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 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전후 샌프란시스코 육군장교회관에서 백선엽과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하는 말이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푹 빠졌나 봅니다." 였다고.
  •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선 각지의 부대에 알리는 전보를 쳤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송해였다고 추정된다. 고향이 이북인 송해는 6.25 전쟁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는데,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당시에 쳤던 모스 부호를 기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앞서 소개된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소휴전회담 중 1번 항목의 상호 안전보장 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 스탈린은 6.25 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규제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30]으로 삼는 집단인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탈린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인민재판을 도입한 것은 다름아닌 김일성 본인으로, 스탈린은 자제하길 바랬던 그 짓을 김일성은 되려 자기가 앞장서서 부하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 이 전쟁에서 양측이 한반도에서 사용한 탄약량은 2차대전기 유럽 전선 전체에 쏟아부은 것에 비견될 정도로 많다. 전선이 교착된 후에는 하루에 수십 만 발을 쓰기도 해서 '밴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소비량 단위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6.25직전의 국지전때 국군 포병대가 사용한 탄약량을 보고 '좀 아껴 효율적으로 쓰라'며 탄약보급량을 줄이고 탄약고를 걸어잠근 것이 미국 고문단이었다는 것. 근데 이건 고문단의 잘못이 아니라 초기 한국군이 대책없이 탄약을 낭비한게 문제였다고 보는게 맞다. 미군이 1949년 6월에 5100만발의 각종 탄약을 제공했는데 6개월동안 3000만발 이상을 소모했다. 그 와중에 옹진반도에서는 6일동안 105mm 곡사포탄 5,572발, 각종 박격포탄 19,000여발을 포함하여 100만발 이상을 소모했고 전과는 북한군 69명 사살. 거의 북한군 한명 죽이는데 14,700여발을 쓴거다. 포탄만 따져도 1명당 350발을 넘기는 판이라 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이 한국군이 탄약을 너무 낭비하니 달라는대로 주면 답이 안나온다는 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참고로 당시 1개 포병대대가 동원되었으니 15문의 야포가 투입된 셈이니 1문당 하루에 62발을 갈겨댄 셈인데 미군 포병의 탄약 제한이 105mm 야포는 하루에 50발로 제한되어 있었고 저 양이 크게 부족한것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갈겨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 탄약을 소모해서 전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그렇게 갈겨서 올린 전과가 최대로 잡아도(즉 모든 적 병력이 105mm탄에 죽었다고 가정할 경우) 69명 사살하는데 그쳤으니 제한을 걸어도 할 말이 없다.
  • 유색 인종에 대한 군입대가 전면적으로 허용 되었다. 2차대전까지만 하더라도 주전투 요원은 대부분 백인이었고 흑인황인종, 히스패닉등은 극히 일부를 제외 하고는 입대 자체가 힘들었다. 입대 했더라도 대부분 비전투직에다 인종별로 나누었다.[31] 하지만 한국 전쟁에서는 피부색 따윈 상관 없이 여러 인종의 병사들이 같은 참호와 막사에서 먹고 자며 부대끼는 풍경이 연출 되었다. 물론 아직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이라 장교진은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패싸움을 하는등 순탄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의도였던, 의도치 않았던간에 보수의 끝판왕인 군에서 먼저 인종간의 화합을 시도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도 높게 평가 받을만 하다.
  • 근세기 가톨릭 성인 중 가장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인 파드레 비오의 경우에는 6.25 전쟁을 세상 종말의 전조라는 사적 계시를 하기도 했다. 1950년에 일어난 전쟁은 6.25 전쟁뿐이므로 6.25 전쟁을 두고 말하는 게 분명하겠지만 이 사적계시의 날짜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거의 5달 전인 2월이다.
  • 북한의 남침 1시간전 지구반대편 브라질에서는 제4회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 킥오프가 있었다.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고 있을 때 브라질은 멕시코를 탈탈 털고 있었으며 경기 결과는 브라질 4:0 멕시코였다.
  • 관우의 67대손이자 관평의 66대손인 관충금(關忠金)이 중국군 신분으로 이 전쟁의 1.4 후퇴에 참전하였다.
  • 1960 로마 올림픽1964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을 2연패한 아베베 비킬라가 이 전쟁에서 에티오피아군 참전부대인 각뉴부대의 대대장 경호병으로 참전했었다.
  • 아폴로 계획 당시의 우주 비행사였던 닐 암스트롱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미 해군 장교로, F9F-2B 팬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 영국의 원로 영화배우 마이클 케인 역시 이 전쟁에 영국 육군의 병사로 참전하였다.
  • 미국의 제48대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부친인 에드워드 펜스(Edward Joseph Pence Jrㆍ1929~1988)도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미 육군 소위로 참전한 그는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전쟁영웅이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미국의 스키선수 린지 본의 할아버지 도널드 킬도도 한국전쟁 참전용사이다. 특히 그는 동계올림픽이 열린 정선 인근에 주둔한 부대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킬도는 손녀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워 지킨 땅에서 열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 때문에 린지 본은 할아버지의 유골 일부를 정선 알파인 경기장에 뿌렸다고 한다.
  • 케이툰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되는 웹툰 야오네집 21화에서는 6.25 전쟁을 거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의 어머니는 피난길에 친어머니에게 버려지려다가 그걸 본 유엔군의 흑인 군인이 아이를 버리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준 담요와 크래커로 버텼고, 그럼에도 결국에는 나무에 묶인 채로 버려졌는데 이를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의 한 군인이 보고는 안쓰럽게 여겨 나무에서 풀어주고 돈을 쥐어주고는 마을에서 따듯한 걸 사먹으라고 했다고 한다.[32] 그 돈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가다고 한국군 장교의 눈에 띄었고, 그 장교의 지인에게 맡겨졌다가 우연히 그 집을 찾아왔던 영어교사 부인이 데려가 부부가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 덧붙여 작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는 평소보다 불편했던 체험 쯤으로 회고했다고 하고 작가의 시어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작가의 아버지는 평범하게 모내기하다 미군 부대 카투사에 들어가 스크램블 에그 만드는 법을 배워온 게 다라고 한다.
  • 이 전쟁이 일어나기 딱 1년 전인 1949년 6월 26일은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던 날이였다. 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은 백범 사망 1주기를 맞이하였던 해였다.
  • 1950년 5월에 첫 발매하였던 칠성사이다는 사이다 출시 한 달만에 전쟁으로 사이다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밀리터리 FPS 게임인 콜 오브 듀티배틀필드 시리즈에는 2018년 5월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북미권에서의 “Forgotten Wars”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휴전상태였기 때문에 섣불리 게임화하기 힘들었던 소재였던 듯 하다. 결국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으로 한국전쟁 종전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한국전 배경 콜 오브 듀티와 배틀필드는 끝내 볼수 없었다. 콜옵은 그나마 있던 싱글플레이도 빼버리는 판이고 배필은 한국어화도 안 해줄 정도인데 한국에 대해 게임을 내줄리가...
  • 이 전쟁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매년 6월 25일마다 전투준비태세 훈련을 한다.
  • 제주도가 전쟁 당시 전장이 되지 않았던 이유 때문에 실제 제주도로 한국 정부를 피난시키는 방안이 나타나기도 했다.[33][34]
  • 지금도 서울 중심부에는 '9.28 서울 수복 작전'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암시하듯 오래된 건물이나 유적지의 석재등을 살펴보면 탄흔이 남아 있다. 경복궁, 숭례문, 흥인지문등의 건축물은 물론 신라시대때 세워진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에는 지금도 선명히 탄흔들이 남아있으며, 연세대학교의 언더우드 동상 또한 살펴보면 기단에 수많은 탄흔을 볼 수 있다.
  • 중공군은 말도 안 되는 미군의 화력을 막기 위해 지하 만리장성을 수천km 규모로 건설했다. 중공 기록만이 아니라 UN군 기록에도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공격하는데 화력 지원을 할 수 없어 피해가 심했고 결국 UN군의 계속된 공세로도 밀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 일부 언론사에서는 6.25 전쟁 정전 협정을 맺은 1953년 7월 27일을 종전일인 것처럼 쓰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6.25 전쟁은 종전된 것이 아니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 협정을 맺었고 그 이후 협정을 파기한다거나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휴전 또는 정전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어디까지나 6.25가 의미하는 건 전쟁 시작일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며,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시작된 이 한국전쟁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1953년 7월 27일 전쟁을 잠시 멈추자는 정전 협정을 맺었을 뿐이고 공식적으로는 아직까지도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의 미사일, 핵 개발이나 군사 도발 등의 상황에 대해 남한을 비롯한 동맹국에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북한의 이런 정전 협정을 무시한 행위에 대해 남한이 공식적으로 대응한다면 언제든지 전쟁을 계속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한국 전쟁은 일시 정지된 상황일 뿐이라는 것이며 아직 꺼지지 않은 전쟁의 불씨는 분명히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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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룬 책

6.1. 역사학계에서

현재까지는 다음 학자들이 역사학계 및 정치학계, 사회과학계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 브루스 커밍스 :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1은 6.25 전쟁 발발전까지 남한의 내부상황을 다뤘는데 최고의 실증연구를 보여줬고 실제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 넘사벽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6.25 전쟁과 그 이후를 다룬 2권은 추측과 근거없는 음모론으로 가득해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1권은 소련 문서 공개 이후에도 가치가 높은 학술서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2권은 당시에도 비판받았고[35] 소련문서가 더 공개되자 가치를 잃었다. 그가 좌파적 시각을 가진 탓도 있을 수 있겟으나 군사학적 분석을 무시한 지나친 실증주의 집착이 주 원인이었다. 반대로 1권은 주로 한국 내부를 미군 문서를 중심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실증주의 집착이 오히려 강점이 됐다. 최근에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 박명림 : 정치학 박사 학위 논문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주장된 남침 유도설을 논파하였다. 사실상 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박명림에서 완결이 났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기준에선 최고의 실증업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술적인 연구를 할 때 꼭 봐야하는 책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놓은 한국전 요약의 비중이 크다는 한계가 있다. 이 요약은 당시 스탈린과 소련의 개입을 축소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그리고 아직 미국에서 소련문서 번역이 완벽하게 이뤄진 상황이 아니었다. 러시아어를 못해서.. 사실, 요즘도 러시아 국내의 도서관과 문서고에 직접 들어가 연구할 게 많고 그러는 분들이 있다(미국정부나 미국 학계가 골라내 영역한 게 사료의 전부가 아니란 점을 명심하자!). 2010년대 중반에도 한국전쟁기를 전후한 시기의 외교문서 관련해 가끔 새로 발굴한 자료 소식이 들려온다.
  • 김영호 : 대표 연구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스탈린의 세계전략이 6.25 전쟁에 미친 파급력을 분석하였다.
  • 김명섭 : 대표 연구저서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 정전협정과 한미동맹으로 구성된 6.25 전쟁과 정전체제에 관해서 집대성하였다.
  • 와다 하루키 : 양심있는 일본인 학자중 한 사람이다. 소련사와 북한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 북한사와 김일성 항일투쟁사를 연구한 학자이다 보니 뉴라이트를 비롯한 세력들에게 빨갱이로 까이기도 한다. 한국전쟁 관련한 책도 썻다.
  • 정병준 : 대한민국, 북한, 미국, 소련의 문서들을 전부 교차검증한 최초의 학술도서다. 실제 정병준 교수는 미군 문서와 북한군 노획 문서를 미국까지 가서 1년이 넘게 직접 확인하고 복사해서 가져왔다. 또한 당시 소련 문서는 미국에서 완벽히 번역된 상태였다. 실증연구로 브루스 커밍스와 박명림을 능가하는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건 정병준이 꼭 박명림이나 브루스 커밍스보다 뛰어난 학자라기보단 당시에 소련 문서가 미국에서 완벽하게 번역된 이유도 있고, 정병준 자신도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하며 미국 측 학계의 대단한 점을 저서 '한국전쟁'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 김동춘 : 대표 연구저서 '전쟁과 사회'
  • 박태균 :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한국전쟁 발발, 정전과정 등 개략적으로 다룬 대중역사서 '한국전쟁'을 쓴 저자이자 서울대 교수다. 대표적인 대중서적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있다.
  • 조갑제: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비사라는 책이 있다.

6.2. 군사적 자료

지난 60년간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존재한다.[36]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다보니 한글로 된 책자도 그 양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그러나 수준이 제각각 천차만별이라 기본 텍스트는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공식간행물부터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초등학생용부터 중고등학생용, 일반인용, 전문가용 각종 버전의 자료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37]

그 다음은 미 육군 당국의 공간사를 읽어 보는게 좋다. 영문판은 미 육군 전사감실 홈피에서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한글판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피에서 무료로 원문보기를 할 수 있다.
<정책과 지도> 제임스 F. 슈나벨, 온창일 옮김, 육군본부, 1974. (James F.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OCMH, 1972.)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로이 E. 애플먼, 육군본부, 198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OCMH, 1961.)
<밀물과 썰물> 빌리 C. 모스맨, 대륙연구소출판부, 1995.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OCMH, 1990.)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 월터 G, 허메스, 육군본부, 1968.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OCMH, 1966.)

퓰리쳐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6.3. 다큐멘터리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
1부 영상, 2부 영상

밀덕질/역덕질은 아니고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제작,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원작은 1990년에 제작, 방영되었고 그해 방송대상까지 받았던 작품. 이후 2010년에 리메이크되는데 이때 구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영상자료와 중국측의 협조를 받은 자료 등을 대폭 보강하였다. 이 다큐에는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다.

특히 1990년판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DVD에서 갑자기 화면비가 4:3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면 90년판 내용을 활용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38]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다만 DVD 판매 때문에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는 할 수 없으며, DVD로 구입해야 하는데 선례들이 그렇듯이 좀 비싼 편.

한편 국내에 소개된 국외 제작 6.25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로는 19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4부작)'과 1994년 SBS에서 방영된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이 있다.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은 SBS에서 먼저 방영되고 다음날 KBS에서 방영되었다. 당초 방송 3사가 공동 구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SBS 측이 이를 깨고 프리미엄을 얹어서 독점 방영권을 따냈고, 이에 KBS 측이 시청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내세워 항의하는 바람에 SBS는 해당 프로그램을 KBS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당시 SBS 가시청권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KBS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고, KBS는 정규 편성을 변경하여 긴급 편성 방영했다.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은 고품격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 BBC의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은 6.25 전쟁 당시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기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를 통해 당시 소련이 6.25 전쟁에 비공식적으로 참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외의 6.25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 76인의 포로들 - MBC에서 제작된 2부작 다큐멘터리로 1993년 방영되었으며, 그해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6.25 전쟁 당시 남북한 대신 중립국행을 택한 76인의 포로들의 이후 행적과 현재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로,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현지 취재를 통해 제작되었다.

7. 관련 작품

외국 것도 많기는 한데 , 당연하게도 한국의 작품들이 더 많다.

7.1. 문학

7.2. 영화

한국 영화가 아닌 것은 괄호 안에 제작국가를 명시하였다.
  • M.A.S.H. (미국)
  • 격퇴 - 베티고지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 고지전(영화) - 전쟁의 아이러니함과 그 속의 다면적인 인간상을 극렬히 드러냈다.
  • 국제시장(영화) -1000만 관람 돌파작이지만 6.25전쟁만을 다룬 영화는 아니라서 진정한 전쟁 영화 수작의 타이틀은 밑에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가 가지고 있다.
  • 남부군
  • 낙동강은 흐르는가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마이 워 (중국)[39]
  •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미국)
  • 배틀 힘 (미국)
  •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66년 作)
  • 서부전선(영화)
  • 순교자들(65년 作)
  • 아벤고 공수군단
  • 아일라(터키 영화) - 2017년 10월 터키에서 개봉해서 500만명 이상이 관람했다. # 터키군과 전쟁고아의 실화이야기. MBC스폐셜에서 다루었다.
  • 에미의 들(92년 作)
  • 영호작전(미국) - 1952년 개봉.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루기도 한 독특한 작품. 한국에는 1957년 개봉되었고, 동명의 한국영화가 1967년에 제작된 바 있다. 물론 전혀 다른 영화다.
  • 오! 인천 (미국/한국)
  • 울지 않으리[40]
  • 원한의 도곡리 다리 (미국)
  • 웰컴 투 동막골 - 800만명 관람으로 6.25 전쟁만을 다룬 영화 흥행 2위이자, 반전과 평화의 중요성을 잘 나타낸 영화.
  • 은마는 오지 않는다 - 전시 미군 성매매를 다루고 있는 작품.
  • 인천상륙작전(영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활약했던 특수부대원들을 다룬 영화.
  • 작은 연못
  • 적과의 동침
  • 집결호 (중국)
  • 죄없는 병사들(90년 개봉)
  • 철모(미국) - 미군과 전쟁고아의 이야기. 다만 인종차별이라는 평도 있다.
  • 태극기 휘날리며 - 한국 전쟁 영화 최고의 수작, 천만 돌파 흥행작.
  • 포화속으로 -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들을 다룬 영화.

7.3. 드라마

파일:Yainsidaelogo.png
야인시대 극중 사건사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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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중앙극장 습격 사건
(64, 65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6.25 전쟁 단성사 저격 사건 황금마차 습격사건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충정로 도끼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
혁명재판
(122, 123화)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124화)
국회 오물 투척 사건
(1, 124화)
}}}}}} ||
  • 여명의 눈동자
  • 왕초
  • 일월 - 1993년 KBS에서 방영. 드라마 후반부가 6.25 배경인데 그것도 주인공 자매의 부산 피난생활까지다.
  • 전우 - 6.25 배경인 드라마 로드넘버원과 다른 배경스토리.
  • 지리산 - 1989년 KBS에서 방영.
  • 천둥소리 - 1986년 MBC에서 방영.
  • M.A.S.H. - 위 영화의 드라마 판. 문서 참조.

7.4. 뮤지컬

7.5. 만화

7.6. 게임

  • 스틸 팬더스 시리즈 - 몇몇 시리즈에서 6.25 전쟁 배경의 캠페인과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들로 장진호 전투를 다룬 캠페인인 Chosin Few, 북한군을 지휘해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를 궤멸시키는 시나리오인 Task Force Smith 등이 있다.
  • Theatre Of War 3: Korea
  • 워게임: 레드 드래곤은 6.25 전쟁이 직접적인 배경은 아니지만 부산 포위의 작전 계획이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또 2번째 DLC로 추가된 신규 캠페인이 '제2차 한국전쟁'이기도 하다. 워게임: 레드 드래곤/캠페인 참고.
  • 스타크래프트 2의 유즈맵 한국전쟁 korean-war의 배경이며, 나무위키를 참고하여 고증을 맞춘 게임이다. 제작자는 국가유공자인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 War Thunder : 후기 제트기에 한해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의 교전지역이던 춘천맵을 플레이할 수 있다. 지상군의 경우 한국을 배경으로 한 맵이 존재한다.

7.7. 노래

  • 6.25의 노래
  • Sabaton - Light in the Black
  • 꽃밭에서 - 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의 동요.
  • 전우여 잘 자라

7.8. 미술작품

7.9. 동영상




8. 참고 문서

9. 어록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다. 전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 후세 다쓰지[41]
"포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그맣게 갈비 조각이 나요. 사람이 분해돼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펑 하고 터지고 나서 가 보면 (손바닥을 반절쯤 붙잡아 보이며) 나무에 창자 조각 요만큼 걸려 있고 살 토막 요만큼 걸려 있고 그래요. 포탄 맞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버린 게 아니라 (시체를) 찾을 수가 있어야 버리죠. (영화 고지전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그런데 그건 애들 장난이지."
- 김달육 육군 소령(퇴역),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 8사단 16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I cannot in good conscience return to Korea as a Christian missionary in peacetime if I am not first willing to be there to help the Koreans defend their freedom in time of war,”
-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본부중대 정보장교로 6.25 전쟁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에서 전사.)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백선엽[42]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 월튼 워커
"Stand or die."
고수 혹은 죽음뿐.
- 월튼 워커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
- 신성모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 신동우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 박헌영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
- 저우언라이[43]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44]
-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이승만 정부이승만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을 포함해서 이를 재구성하고 각색한 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틀은 방송. 정작 이 방송이 들릴 시점에서 이미 이승만은 국군과 피난민들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 다리마저 끊고 서울에서 도망친 후였다.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해오던 1950년 10월 11일 밤 평양에 방송된 김일성의 음성. 그리고 몇 시간 뒤 김일성은 평양에서 도망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45]
- 김일성
"조선 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마오쩌둥
"남한은 미국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 해리 S. 트루먼
"딘 장관,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 해리 S. 트루먼
"이 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해리 S. 트루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 이오시프 스탈린
"인천 상륙작전은 5000 대 1의 도박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확률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그들을 격멸할 것입니다."
"...Inchon is a 5000 to 1 gamble, but I am used to taking such odds... We shall land at Inchon and I shall crush them."
- 더글러스 맥아더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괴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손원일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 손원일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 이승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고참병은 전쟁터에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 남아 제대하는 것으로 전쟁터에서는 사라진다는 뜻)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 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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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멕스 데스포. 1950년 12월 4일 촬영했으며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2] 흔히 한강철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진이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철교다. 한강철교는 폭파 당시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수준으로 무너졌었다. 그때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하고 있었다.[3] 막연하게 전체 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 본토에서는 전투와 교전이 일어났지만 제주, 울릉 등 일부 부속도서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4] 터키군의 경우 쿠르드족이 상당수 포함되있었다[5] 물자지원만 해 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공군 병력을 보낸 전적도 있고, 참전군인들의 수기에 따르면 러시아 장교 시신을 발견했었는데 묵살했다는 기록도 있다.[6] 사실 이탈리아는 6.25 전쟁 발발 5년 후인 1955년 12월 22일에 UN에 가입했지만 6.25 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링크[7] GHQ하의 비공식적 참전. http://news.joins.com/article/21043425 대한민국 대통령인 이승만이 일본군의 개입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소규모 참전하여, 동해상의 기뢰 제거 작전 등에 투입되었으며 사상자도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일본의 각종 민간선박업체들이 LST 등을 파견하여 병력 및 화물 운송등에 투입되었다. 이는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도 언급된다.[8] 당시에는 카스트로 정권 수립 전이여서 국군 측으로 의료 및 물자 지원을 했다.[9] 쿠바와 마찬가지로 당시엔 사회주의 계열의 바트당이 정권을 잡기 전이라서 국군 측으로 의료 및 물자 지원을 했다.[10] 유엔군 측에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도 지원했다.[11] 군마 지원.[12] 전쟁 말기 한국군 58만, 미군 34만 가량이었기에 이 이상의 수치로 추산된다. 최대 수치는 공산군보다 적은걸로 추정된다.[13] 2018년 4월 27일의 판문점 선언의 내용은 종전을 연내에 추진한다는 내용이었을 뿐이며, 아직 종전 선언을 한 적이 없으므로 휴전 상태다.[14] 판문점 선언 3-③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15] 미군 사망자는 4만 명 가량이고 한국군 사망자가 14만인데 한국군의 경우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다.[16] 공산군의 경우 누락된 수치가 많기에 정확한 수치 추산은 힘들다. 그래서 자료를 보면 온갖 추측이 다 있다.[17] 이대근, 현대한국경제론: 고도성장의 동력을 찾아서, 경기: 한울 아카데미, 2008, p.60[18] #[19] 많은 사람들이 남침과 북침을 헷갈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남침이 맞다. 한자 표기상으로는 북침도 한의 공일 수도 있으니 틀린 표현이 아니란 의견도 있지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참고하면, 남침(南侵)은 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으로, 북침(北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침략함.으로 정의를 하고 있어 6.25 전쟁은 북쪽 나라의 남침(南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20] 한 지역에 국한되어 발생한 사건(ex)만주사변)이 아니므로 적절치 못한 표현임.[2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http://www.imhc.mil.kr/ 간행물 목록에서 확인 가능.[22] 국립중앙도서관 http://www.nl.go.kr/ 소장자료 검색에서 확인 가능.[23] 당시 맥아더는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장제스와 함께 중국해안에 상륙하자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24]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1945년, 한국전쟁 발발은 1950년으로 고작 5년 뒤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누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싶겠는가. 했다가는 전세계의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심지어는 패배에 망신까지 살 수 있을 일이다. 이때문에 문책당한 맥아더 장군이 미국에서 전쟁광 등등 안좋은 별명이 생긴 이유이다.[25] 특히나 소련은 2차대전으로 수천만명의 인명피해와 핵심 농-공업지대가 전장이 되어 초토화되었다. 실전경험 풍부한 대병력은 있지만 한창 전후복구중인 소련이 또다시 대전쟁을, 그것도 어마어마한 경제력(렌드리스 참조)을 보여준 미국을 상대로 벌일 생각을 할수 있을리가...[26] 이미일,〈6·25전쟁 중 남한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과제〉[27] 1949년 8월 5일〈연천주재지사업보고서〉"…반동분자들을 분열.와해시키고 납치함으로써 국토완정의 결정적 역할을 높일 임무…"[28] 1950년 8월 17일〈북조선 군사위원회 결정사항 제18호〉"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은 각 부 각 청의 요구에 맞추어 북조선의 농업 및 산업 현장으로 50만 명을 후송하도록 한다."[29] 사실 전쟁범죄가 아예 없었다기보다는 중국 지휘관들이 아군도 자주 처벌해서 나온 이야기다.[30] 미덕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스탈린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가 그 "미덕"을 무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력한 집권체계와 전시동원체제가 완비된 다음이라 점령지 주민을 짓밟아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지장없었기 때문이다.[31] 지금이야 다민족국가의 대표주자지만 이시절만 해도 미국은 '백인의 나라' 였다.[32] 그 때문에 작가의 어머니는 그 유엔군에게 고마워서 아프리카 고아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버릇처럼 말했고, 겨울만 되면 길가에 보이는 군고구마 장수의 모자를 보면 그 인민군이 생각나서 항상 고구마를 사온다고 한다.[33]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밀려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 피난해야 한다는 제안을 들었으나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아예 대한민국 정부를 서사모아로 이전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부 이전 후보지 중에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제주도는 면적이 너무 좁고 농경, 식수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결국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34]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로 대표되는 위기가 닥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유엔군사령부가 북한군과 중공군이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을 도달할 경우, 한국 정부를 제주도로 이전해서 차후 공세 전환의 거점으로 삼자는 구체적인 안건이 나왔지만 연합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백지화되었다.[35] 원서는 레이건 집권 초기인 81년에 나왔으나 한국어판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나왔다.[36]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용사들의 수기.[37]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 오프라인상으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 내부 1층 우측의 카페에 책꽂이에 판매도서용이라 해서 진열되어 팔고있다. 재고가 있다면 1권당 거의 2만원대돈으로 살수야 있겠지만 상업용서적(?)이 아닌 비매품에 가까운 책이라 상설재고 여부는 불투명하다. 군에서 발간한 전문학술 자료인 만큼 흥미 위주의 민간 서적에 비해 훨씬 자세하게 전쟁기간 동안 군사적, 전술적 상황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두드러진 점은 어느 전투, 전역, 작전이 있으면 세부내용과 특정전장의 지리환경, 투입부대, 전투서열과 각 제대 지휘관 성명, 전술지도(?)로 당시 상황 구현과 일자별 각 제대,부대의 전투기록명시가 있다.[38] 참전 당시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39] 중국판 이름은 아적전쟁. 참고로 이 영화의 홍보 동영상이 중국군의 6.25 참전을 미화하고 한국 측을 조롱하여 문제가 되었다. 물론 영화는 흥행 평가 모두 거하게 망했다.[40] 오! 인천 못지 않은 괴작인데, 감독은 놀랍게도 임권택이다![41] 6.25 전쟁과 관련이 깊지 않지만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아닌 일개 변호사가 무서울 만큼 한반도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발칸반도에서도 구 유고내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연방의 대립, 키프로스 분쟁을 비롯한 수많은 문제들을 발생하고, 그것을 구 1세계 및 유럽권 전체가 떠안게 됨으로써 이 발언이 역으로 실행되기도 하였다. 뭐 이 발칸반도는 1차대전의 원인으로써 지목된 것이고 구유고 내전은 그렇게 전세계에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42] 다부동 전투 당시 방어 담당 구역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후퇴한 11연대 1대대 장병들에게 한 발언. 이 발언 직후 백선엽은 주머니 속 권총을 뽑아 사단장 일선 돌격을 감행한다(...)[43] 1950년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제3보병사단이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을 시작한 직후 한 발표.[44] 이 연설은 영화 부산행의 안전행정부 장관의 연설의 모티브가 되었다.[45] 1950년 11월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한 말.[46]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 된 이후 전쟁승리를 자축하는 이른바 ‘전승열병식’에서 한 연설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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