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3:15:23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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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us and Ethel Rosenberg
파일:로젠버그 부부.jpg
사건의 중심에 선 로젠버그 부부
"우리의 훌륭한 과학자들이 소련원자탄을 완성할 것으로 예상한 시기보다 수년 앞서 소련인들의 손에 원자탄을 쥐어준 피고인들의 행동이, 이미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유발해 5만 명이 넘는 미국인 사상자를 낳았다고 본인은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판사 어빙 카프먼이 판결 당시 한 말 中
"이번 사형 선고는 놀랍지 않습니다. 사형선고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인들이 한국 전쟁을 납득할 수 있으려면 미국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집단적 공포는 더욱 강렬해야 했기에, 로젠버그 사건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용의자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中
1. 개요2. 전개 과정3. 진짜 간첩?4. 여담5. 참고 자료6. 같이 보기

1. 개요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폭탄 정보를 소련에게 넘겼다는 간첩 혐의를 받고 사형당한 사건이다. 사후 그들이 정말 간첩이었는지 무고한 시민이었는지 끊임없는 논란이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1) 남편 줄리어스는 간첩임이 입증되었고 소련에 기밀 자료를 넘긴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원자폭탄 정보까지 넘겼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한편 2) 아내 에셀은 간첩임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남편의 간첩 활동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남편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했음이 밝혀졌다.

2. 전개 과정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위아더월드를 외치며 추축국을 때려잡았던 공산주의 세력과 자본주의 세력은 곧 냉전이라는 첨예한 대립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으로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닥쳤고 반공주의가 판을 쳤다. 그런 상황에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몇몇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에 대한 기밀 정보를 소련에 넘긴 사실이 드러났다. 이 일에 연루된 과학자들과 군인들이 체포되었는데 군인 신분이었던 데이비드 그린글래스(David Greenglass)가 자신이 가진 원자폭탄 관련 스케치를 자신의 매형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1]의 종용으로 그에게 건네주었다고 증언한 것이었다. 증언을 확보한 FBI는 1950년 6월 16일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체포했고 3주 후에는 그의 아내 에셀 로젠버그(Ethel Rosenberg)[2]까지 체포했다. 둘은 1951년 간첩모의죄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로젠버그 부부는 자신들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3] 이에 로젠버그 부부를 고발했던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는 자신이 줄리어스에게 스케치를 건네주자 그가 그 정보를 소련에 빼돌렸고 그의 아내 에셀은 타이핑을 맡아 그를 보조했다고 증언[4]했으며 또 다른 사건 관련자는 로젠버그 부부 뒤에는 소련의 고위 관료가 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런 증언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물증'을 검찰은 제시하지 못했다. 검찰이 제시한 것은 증언과 빈약한 증거뿐이었다. 그럼에도 재판은 로젠버그 부부에게 불리하게만 흘러갔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지식인들은 로젠버그 부부의 무고 혹은 선처를 주장하며 미국 정부를 비난했다. 장폴 사르트르[5],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장 콕토, 파블로 피카소, 프리다 칼로 등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줄을 이어 이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교황 비오 12세까지 나서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로젠버그 부부의 사면을 부탁하기도 했다.[6] 이와 반대로 조지프 매카시 같은 반공주의 성향의 정치인과 미국 대다수의 언론은 로젠버그 부부가 빨갱이 간첩이라며 둘을 매우 규탄했다.[7]

1951년 4월 5일, 재판부는 로젠버그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8][9] 판사 어빙 코프만은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폭탄 기밀정보를 소련에 유출했으며, 이 일로 6.25 전쟁이 발발했으니 "살인보다 더한 범죄"라고 말했다. 로젠버그 부부는 즉각 항소했지만 이는 곧 기각되었다. 둘의 사형은 1953년 6월 19일[10]에 저녁 8시 뉴욕 싱싱 교도소에서 집행됐다. 둘은 사형 2시간 전에 최후의 만남을 가진 후 전기의자에 앉았다. 죽는 날까지 그들은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11] 사형 직후 워싱턴 D.C.에서는 반공주의자들이 그들의 죽음에 환호했고 뉴욕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벌어졌다.

3. 진짜 간첩?

로젠버그 부부 사형 이후 이 사건은 흔히 '무고한 로젠버그 부부가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로젠버그 부부의 명예회복을 위한 운동이 있어 왔다.

그런데 소련 붕괴 이후부터 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이들이 실제로 소련을 위해 일하던 간첩이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다수 나왔다. 먼저 1990년에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녹음 파일이 공개되었는데 그가 "원자폭탄 개발에 로젠버그 부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도 녹음되어 있었다.
불하게도 (우리를 도운 외국인들의) 그 이름을 다 밝힐 순 없다. 아직까진 이를 밝힐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았다. 다만 에셀과 줄리어스 로젠버그 부부의 이름만은 언급해두겠다. 스탈린이 살아있었을 때, 그는 로젠버그 부부에 대해서 무척이나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들의 조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스탈린과 몰로토프(특히 몰로토프가 많이 알았다)로부터 로젠버그 부부가 우리의 원자폭탄 개발에 매우 핵심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Nikita Khrushchev, Memoirs of Nikita Khrushchev vol 2: Reformer(1945-1964)

1995년에는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전파탐지기 관련 정보를 넘겼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로젠버그 부부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머튼 소벨(Morton Sobell)은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간첩이었다는 증언을 했다.[12] 이렇게 되면서 로젠버그 부부는 간첩이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다만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첫째, 아내인 에셀 로젠버그의 혐의이다. 결국 지금까지 밝혀진 증거들로 남편인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소련의 간첩임이 확실해졌다. 다만 에셀 로젠버그가 간첩이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은 상태다. 간첩이었던 줄리어스는 '리버럴'이라는 코드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에셀은 코드명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FBI 기밀문서에 따르면 FBI는 줄리어스의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에셀까지 체포한 것이 드러났다.[13] 게다가 잠적했던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는 2001년에 "자신과 아내의 목숨을 구하고자 허위 증언으로 누이를 팔았다"며 고백했다.[14] 이에 고무된 로젠버그 부부의 자식들은 2015년에 자신들의 어머니는 무죄라고 주장하는 글을 뉴욕 타임즈에 보내기도 했으며 오바마 대통령에게 청원하기도 했다. #, #

둘째, 넘겨진 정보가 중요한 것이었냐는 것이다.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분명 간첩으로 몇몇 정보들을 소련에 넘긴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원자폭탄과 관련한 정보인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검찰은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폭탄 정보를 넘겼다는 결정적인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줄리어스가 여러 정보들을 소련에게 넘겼다는 것만 다른 기밀문서들을 통해 밝혀진 상태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간첩 혐의는 인정하지만 원폭기밀을 넘긴 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15]

한편 1997년에 전 KGB 요원이었던 알렉산드르 셰묘노비치 페클리소프(Александр Семенович Феклисов)[16]가 뉴욕 타임즈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위의 논란에 대해 로젠버그가 넘긴 것은 원자폭탄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고 에셀은 줄리어스가 하는 일은 알았지만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다만 에셀이 줄리어스의 활동에 전폭적 지지를 보냈음을 밝혔다. #

4. 여담

파일:로젠버그 부부의 아이들.jpg

스파이 처형 1일 전

로젠버그 부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다. 형은 마이클 미어로폴(Michael Meeropol)로 매사추세츠 주에서 경제학 교수를 하고 있고 동생은 로버트 미어로폴(Robert Meeropol)로 '로젠버그 재단'을 운영하며 부모의 정치적 행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있다고 한다. 둘은 1973년부터 로젠버그 부부의 무죄와 명예 회복을 주장해 왔으나 2008년에 아버지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였다. 이후에도 둘은 어머니의 무죄와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L. 닥터로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다니엘서'를 집필하였다.

5. 참고 자료

인물세계사 - 로젠버그 부부편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행위로 처형된 이유는?
로젠버그 부부는 죽음의 교도소에서 무엇을 보았나

6. 같이 보기


[1] 유대인으로 1918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공산주의와 인연을 맺은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청년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했는데 거기서 아내 에셀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미군 통신대에 들어갔지만 공산주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쫓겨났고 그후엔 전기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또 그는 미국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다.[2] 유대인으로 1915년에 태어났다.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파업 주동자로 몰려 회사에서 해고된 전력이 있었다. 좌익 단체에서 활동하다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남편을 지지해 주었다.[3] 다른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공안당국에 협조하는 자세였지만 로젠버그 부부만은 협조를 거부했다.[4] 이 증언은 로젠버그 부부의 간첩 혐의에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5] 그는 이 사건을 두고 "법을 빙자한 린치"라며 비판했다.[6] 비오 12세는 반공 성향을 지닌 교황이었다.[7]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는 로젠버그 부부의 행위가 "세기의 범죄"라고 말했다.[8] 다만 존 에드거 후버는 로젠버그 부부가 아이 둘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론의 악화를 우려하여 에셀의 사형에는 반대했다고 한다.[9] 한편 로젠버그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보다 낮은 형을 받고 나중에 사면되었다.[10] 하필이면 이 날이 로젠버그 부부의 14번째 결혼 기념일이었다.[11] 사실 판결 이후에도 FBI는 미국 내 소련 스파이 조직망을 알아내고자 로젠버그 부부에게 접근하여 끊임없이 타협을 시도했다. 이들은 '형 집행 정지'를 해 줄 테니 자백하라며 회유 공작을 펼쳤지만 로젠버그 부부는 끝내 이를 거절했다.[12] 그의 말에 로젠버그 부부의 자식들은 '반박할 수가 없다'며 아버지의 간첩 혐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 이후 그들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명예회복에 주력했다.[13] 당시 법무부 고위 인사는 "에셀 로젠버그를 기소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지만 남편을 잡아넣기 위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검찰도 재판 전에 "에셀 로젠버그의 혐의점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본보기로 무거운 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14] 그는 대배심에서 처음에는 에셀이 관련이 없다고 말했으나 나중에 말을 바꾸어 그녀도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15] 사실 원자폭탄 정보를 넘긴 건 영국으로 망명한 독일인 물리학자인 클라우스 푹스였는데 푹스는 맨하탄 프로젝트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얻은 각종 정보를 소련에 먼저 흘리고 나중에 영국으로 넘어가 영국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다가 영국 정보부에 발각돼서 로젠버그 부부보다 1년 전인 1950년도에 투옥됐지만 사형이 아닌 징역 14년을 선고받았고 그마저도 1959년도에 사면을 받아서 동독으로 추방 형식으로 풀려났다.[16] 그는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50여 차례 만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