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4 22:51:58

폴란드 계엄령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002664, #000 40%, #000 60%, #cc000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keep-all; letter-spacing:-.2px"
국가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33%"
{{{#000,#ddd {{{#!folding [ 자본주의 진영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1세계
맹주
유럽
· · · · · · · · · · · · · · ·
[[튀르키예|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
· ·
아시아 & 오세아니아
· · · · · · · · · · · · · · · · · · · · ·
아프리카
· · · · · · · · · ·
북아메리카
· · · · · · · · · · · · · · · ·
남아메리카
· · · · · · · · ·
}}}}}}}}}}}}
{{{#!folding [ 공산주의 진영 ] 
{{{#!folding [ 비동맹 진영 ] 
}}} ||
<colbgcolor=#2d2f34> 주요 사건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5~1947)
<colcolor=#000,#ddd>봉쇄정책 · 언싱커블 작전 · 제2차 국공내전 · 철의 장막 · 그리스 내전 · 미소공동위원회 · 트루먼 독트린
전반부
(1947~1969)
마셜 플랜 ·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 제1차 중동전쟁 · 베를린 봉쇄 · 티토-스탈린 결렬 · 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 · 6.25 전쟁 · 쿠바 혁명 · 제네트릭스 계획 · 1956년 포즈난 시위 · 1956년 헝가리 혁명 · 제2차 중동전쟁 · 1958년 레바논 위기 · 진먼 포격전 · 스푸트니크 쇼크 · 콩고 내전 · 중소결렬 · U-2 격추 사건 · 1962년 버마 군사반란 ·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 베트남 전쟁 · 캄보디아 내전 · 피그만 침공 · 쿠바 미사일 위기 · 제3차 중동전쟁 · 68 운동 · 프라하의 봄 · 브레즈네프 독트린 · 우주 경쟁 · 중국-소련 국경분쟁 · 매카시즘 · 상호확증파괴 · 죽의 장막 ·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 · 과테말라 내전 · 북예멘 내전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데탕트
(1969~1979)
닉슨 독트린 · 동방 정책 · 닉슨-마오쩌둥 회담 · 7.4 남북 공동 성명 · 핵확산금지조약 · 전략무기제한협정 · 제4차 중동전쟁 · 앙골라 내전 · 베트남 통일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독일의 가을 · 중일평화우호조약 · 이란 혁명 · 중국-베트남 전쟁 · 엘살바도르 내전 · 니카라과 혁명
후반부
(1979~1985)
흑묘백묘론 · 폴란드 계엄령 · 악의 제국 연설 · 그레나다 침공 · 이 장벽을 허무시오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이란-이라크 전쟁 · 스타워즈 계획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콘트라
냉전의 종식
(1985~1991)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 도이머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북방정책 · 1988 서울 올림픽 · 천안문 6.4 항쟁 · 베를린 장벽 붕괴 · 몰타 회담 · 1989년 동유럽 혁명 · 예멘 통일 · 동서독 통일 · 걸프 전쟁 · 8월 쿠데타 · 남북기본합의서 · 소련 붕괴
탈냉전
국제 기구
·
TIAR · SEATO · ANZUS · CENTO | 경제상호원조회의(СЭВ | COMECON)
군사 대결 구도
미군 vs 소련군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color=#fff><colbgcolor=#dc143c> 상징 <colcolor=#000,#fff>국가 · 흰꼬리수리 · 국호 · 국기 · 국장
역사 <colcolor=#fff><colbgcolor=#dc143c> 국가 역사 전반 · 폴란드 영지 · 폴란드 왕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 바르샤바 공국 · 폴란드 섭정왕국 · 폴란드 제2공화국 · 폴란드 망명정부(자유 폴란드군) · 폴란드 지하국 · 폴란드 인민 공화국 · 약사(국가)
사건 폴란드 분할 · 포즈난 봉기 ·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독소 폴란드 점령(카틴 학살) · 바르샤바 봉기 · 바르샤바 게토 봉기 · 1956년 포즈난 시위 · 폴란드 계엄령
정치 정치 전반 · 행정구역 · 대통령(선거) · 의회(상원 · 하원)
외교 외교 전반 · 폴란드 회랑 · 유럽연합(탈퇴 논쟁) · 비셰그라드 그룹 · 여권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 오데르-나이세 선 · 러시아-폴란드 관계 · 루블린 삼각동맹 · 폴란드-우크라이나 관계 · 독일-폴란드 관계 · 독일-러시아-폴란드 관계
경제 경제 전반 · 폴란드 즈워티
국방 폴란드군 (육군 · 해군 · 공군 · 특수군) · 바르샤바 조약 기구 · NATO · 윙드 후사르 · NATO군 vs 러시아군(폴란드군 vs 러시아군) ·
FB 탄탈/Skbk wz.89 오닉스 · FB 베릴/미니 베릴 · 그롯 · RPG-76 코마르 · 팔라트 유탄발사기
문화 문화 전반 · 관광 · 영화 · 콘투쉬 · 요리 · 보드카 ·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폴란드어 · Ł ł · 라틴 문자 · 매여
교통 LOT 폴란드 항공(바르샤바 쇼팽 공항, 바르샤바 모들린 국제공항), 폴란드의 철도 환경(EIP, 바르샤바 지하철)
사회 폴란드 마피아
인물 카지미에시 3세 ·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 마리 퀴리 · 프레데리크 쇼팽 · 조지프 콘래드 · 요한 바오로 2세(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 레흐 바웬사
민족 폴란드인 · 카슈브인 · 실레시아인 · 독일계 · 우크라이나계 · 러시아계 · 립카 타타르 · 폴란드 유대인 · 리투아니아계 · 벨라루스계
디아스포라 폴란드계 미국인 · 폴란드계 프랑스인 · 폴란드계 러시아인 · 폴란드계 독일인 · 폴란드계 우크라이나인 · 폴란드계 영국인 ·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 · 폴란드계 브라질인 · 폴란드계 아르헨티나인 · 폴란드계 캐나다인 · 폴란드계 호주인 · 폴란드계 멕시코인 · 폴란드계 뉴질랜드인 · 폴란드계 네덜란드인
}}}}}}}}} ||

폴란드 계엄령
Stan wojenny w Polsce | Martial law in Poland
원인
1980-81년의 경제위기에 따른 불만 고조 및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발흥
발효시기
1981년 12월 13일[1] ~ 1983년 7월 22일
장소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전역

1. 개요2. 배경
2.1. 폴란드 경제위기2.2.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발흥 및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실각
3. 전개4. 결과5. 민주화 이후6. 여담7. 반응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 1981년 12월 13일에서 1983년 7월 22일 사이 실시된 계엄령이다.

2. 배경

2.1. 폴란드 경제위기

1970년 경기침체와 시위로 인해 사임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를 뒤이은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경제성장과 사회간접자본 현대화를 위해 부분적 경제자유화를 단행했고 이를 위해 서방 국가들로부터 외채를 도입했다.

하지만 급격한 지출 증가로 인해 1970년대 중후반대부터는 서방 국가들이 외채 발행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폴 볼커 연은의 미국 인플레이션 대응으로 인해 뛰어오른 금리는 폴란드의 외채부담을 가중시켰다. 뒤이은 1979년 석유 파동으로 인해 폴란드는 외채 상환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동시에 1970년대의 경기호황으로 인해 국내 소비재 수요는 급증한 반면 경제위기는 국내 소비재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채 상환을 위해 내수 수요를 위한 소비재를 수출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어진 소비재 부족 사태로 인해 배급제가 시행되었고 이는 많은 불만을 낳았다.

2.2.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의 발흥 및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실각

경제위기로 인한 불만이 가중되자 분노한 노동자들은 당의 어용단체가 아닌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를 설립,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솔리다르노시치 주도의 파업과 집단행동은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1980년, 기에레크 정부는 폴란드인들의 분노에 승복하여 솔리다르노시치와 협상하여 '그단스크 협정'을 체결하여 솔리다르노시치를 비롯한 독립 노조 합법화, 집회 · 시위 권리, 표현의 자유 인정, 임금 인상 등에서 양보한다.

하지만 소련은 폴란드에서 합의된 일련의 개혁을 공산주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폴란드에 압력을 가하였으며 기에레크의 급진적인 개혁 양보에 반발한 폴란드 통일노동당 다수는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를 제1서기 직위에서 해임시키고 당에서 퇴출, 부패 혐의로 입건한다.

기에레크를 뒤이은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정국 안정화를 위해 솔리다르노시치와의 협상을 재개하려 하였으니 기존의 협정을 조인한 기에레크가 축출당하는 것을 지켜본 솔리다르노시치는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였고 소련 또한 폴란드 통일노동당에 솔리다르노시치 해체 및 반정부 시위 탄압을 요구하며 폴란드로의 원유와 천연가스 공급을 축소하는 등 압박을 가중시켰다.

3. 전개

계속된 소련의 압박과 진전되지 못하는 솔리다르노시치와의 협상 중의 1980년 말엽부터 국방장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정국 타개를 위한 계엄령 선포를 준비해왔고, 1981년 10월 스타니스와프 카니아가 실각하자 야루젤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1981년 12월 12일 폴란드 국가평의회는 계엄령 선포를 결의하였고 군부 인사들로 이뤄진 초법기관 '구국군사평의회'를 발족시켰다. 12월 12일 밤 폴란드 비밀경찰은 솔리다르노시치 인사 간 통신을 막기 위해 전국 각지의 전화국들을 점거, 전화선들을 절단하였고 12월 13일 0시를 기점으로 폴란드 인민군 7만여명과 내무부 소속 인원 3만명을 투입하여 솔리다르노시치 인사 긴급 체포에 나섰으며 오전 6시에 전국에 계엄 선포가 공표되었다.

그 결과 레흐 바웬사를 포함한 2천여명의 솔리다르노시치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며 바르샤바, 그단스크, 크라쿠프, 루블린 등 폴란드 주요 도시들에서 벌어진 시위는 1982년 11월 14일 레흐 바웬사가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4. 결과

1980년 합법화되었던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1982년 다시 불법화되었다. 체포되었던 레흐 바웬사는 석방 후에 재야로 돌아가 그단스크 조선소의 조선공으로 복귀하여 계속된 감시와 탄압을 받았지만 지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어나갔으며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다만 이 또한 당대의 탄압으로 인해 아내 다누타 바웬사가 대리수상하였다.

계엄령으로 인해 전국적 야간 통행금지, 국경 폐쇄, 학교 및 대학들 임시 휴교 등이 시행되었으며 기자, 교수 등 지식인들 다수가 가짜 뉴스 살포 및 선동 혐의로 해임되거나 군법으로 처벌당하였다. 우편, 출판물, 전화에 대한 검열 또한 강화되어 기본권에 대한 제약 또한 강화되었다. 그로 인해 1981년1989년 사이, 약 70만명의 폴란드인들이 서방으로 망명하였으며 망명을 위해 폴란드 여객기들이 서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으로 납치되는 사건도 빈번히 발생하였다.

계엄령으로 인한 국제무역 감소 및 기본권 제한은 기존의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폴란드 군사정권은 적자 및 소비재 부족 사태 대응을 위해 소비재 가격을 상승시켰고 이는 폴란드인들의 실질 임금 하락으로 이어졌으며 악화된 경제상태로 인해 폴란드에는 1989년까지 배급제가 계속되었다.

5. 민주화 이후

1992년, 폴란드 하원 특별위원회에서 1981년 계엄령 선포는 위헌이었다고 선고하였다.

폴란드 계엄령 선포를 주도하였고 민주화까지 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 이후 폴란드 제3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야루젤스키는 2001년 계엄령 선포에 대해 재판을 받았으나 건강 상의 이유로 판결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야루젤스키는 자신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한 것이이었다고 강변하였다.

6. 여담


7. 반응


각국의 반응을 다룬 당시 경향신문 기사

8. 관련 문서




[1] 실질적으로는 12월 12일 결의 직후 시행에 들어갔다.[2] 폴란드어 철자가 'wrona'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