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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살바도르 내전 Guerra civil de El Salvador Salvadoran Civil War | |
1979년 10월 15일 ~ 1992년 1월 16일 | |
장소 | |
엘살바도르 전역 | |
원인 | |
불평등한 토지소유 1979년 쿠데타에 따른 군사혁명정권(JRG) 수립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원 국가 및 세력 |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칠레| ]][[틀:국기| ]][[틀:국기| ]] [[과테말라| ]][[틀:국기| ]][[틀:국기| ]]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동독| ]][[틀:국기| ]][[틀:국기| ]] 쿠바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니카라과|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알바로 마가냐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아돌포 아르놀도 마하노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하이메 압둘 구티에레스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호세 기예르모 가르시아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카를로스 비데스 카사노바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로베르토 도뷔송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도미니고 몬테로사† | 샤피크 한달 호아킨 비얄로보스 카예타노 카르피오† 살바도르 산체스 세렌 페르만 시엔푸에고스 |
병력 | |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9,850명(1980)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39,000~51,150명(1985)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70,000명(1992)[1] | 12,000~15,000명(1984) 6,000~15,000명(1985) 8,000~10,000명(1992) |
피해규모 | |
[[엘살바도르| ]][[틀:국기| ]][[틀:국기| ]] 7,000~10,000명 전사 | 14,000명 전사[2] |
결과 | |
차풀테펙 평화협정 엘살바도르군 구조조정 엘살바도르 국가경찰을 엘살바도르 민사경찰로 대체 헌병군과 재무경찰(Policía de Hacienda) 해체 FMLN 무장해제 및 정당으로 전환 | |
영향 | |
총 70,000~80,000명 피살 8,000명 실종 난민 105만 명 발생[3] |
[clearfix]
1. 개요
엘살바도르 내전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엘살바도르 정부와 파라분도 마르티 국민해방전선(이하 FMLN)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다. 일반적으로 1979년 10월 15일 쿠데타와 그 후 정부가 벌인 시위대 살해가 내전의 시작일로 여겨진다. 공식적으로 내전은 1992년 1월 16일 정부와 반군 양측이 차풀테펙 협정을 체결하여 끝났다.2. 배경
1950년대 레무스 군부정권은 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엘살바도르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투쟁과 정치적 민주화 요구투쟁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매도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탄압을 가했다. 따라서 민중투쟁이 침체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1959년 쿠바혁명을 계기로 엘살바도르 민중들은 합법적 사회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우선적으로 기독교민주당이 창당되어, 결사의 자유 보장, 신경제정책 수립 등을 주장하여 지지기반을 확대했다. 그리고 국민혁명운동(MNR)도 이 시기에 결성되어 도시에서 주로 활동영역을 넓혔으며, 1970년에 결성되어 활동했다.1969년 온두라스와 벌인 축구전쟁은 엘살바도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흘 남짓한 전쟁의 결과 30만명의 엘살바도르인이 난민이 되었는데 대부분은 온두라스에서 추방당한 엘살바도르인이었다. 정부에겐 그들을 수용할 경제력이 부족했다. 1972년 대선에 부정선거로 당선된 국민연합당(PCN)의 아르투로 아르만도 몰리나 대령은 연이은 대내외적 악재에 직면했다. 이미 1970년 결성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 파라분도 마르티 인민해방군(FPL)이 소규모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72년에도 인민혁명군(ERP)이 창설되었다. 1975년 창설된 전국저항무장군(FARN), 1976년 창설된 중앙아메리카 노동자혁명당(PRTC), 1979년 창설된 혁명무장군(FAL) 등 1970년대에 여러 좌익반군 세력이 창설되었다. 좌익반군의 게릴라전은 식료품 물가 상승과 농업생산량 감소로 이어졌고, 여기에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벌어진 오일쇼크는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몰리나 정권은 토지개혁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려 했으나 이미 토지를 독식한 지배 엘리트들의 반발에 밀려 결국 무산되었다. 토지개혁 실패는 정부에 대한 전사회적 신뢰상실을 초래했다.
3. 전개
3.1. 1979년~1980년: 내전의 시작
평범한 민간인들도 정부가 자행한 폭력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80년 5월 14일 헌병군과 친정부 민병대 국민민주조직(ORDEN)은 온두라스의 협조 하에 북부 찰라테낭고 주 숨풀 강변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다. 마을의 탈출행렬이 강을 건너려 하자 온두라스군이 그들을 막아 사지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 학살로 600여 명이 살해되었고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학살 후 현장을 목격한 온두라스 사제는 시체를 쪼아먹는 독수리들이 너무 많아서 강 전체가 검은 카펫으로 보일 정도라고 보고했다. 이듬해 엘살바도르 정부가 자행할 바다를 말려버리기(Draining the sea) 정책의 전주곡이었다.정부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민간인들이 반군에 가담했다. 아니, 어쩌면 정부의 폭력이 오히려 민간인의 반군 가담을 초래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1980년 10월 10일 엘살바도르의 여러 반군조직과 노동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단일 혁명조직인 파라분도 마르티 국민해방전선(FMLN)을 결성했다. FMLN은 혁명이 성공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국민해방전선(FSLN)으로부터 M16 소총과 M79 유탄발사기 등을 지원받았다.
3.2. 1981년: "최후 공세" 對 "바다를 말려버리기"
엘살바도르 행정구역 | 엘살바도르 지형도 |
정부는 18일 반격을 개시하여 FMLN에게 잃은 영역들을 되찾았다. FMLN은 베트남 전쟁에서 구정 공세를 벌인 베트콩처럼 자기들이 공세를 벌이면 도시와 농촌에서 호응하는 봉기가 잇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살바도르 정부도 공세를 눈치채고 경계령을 내려 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임기 말 지미 카터 행정부도 엘살바도르 정부에 대규모 지원을 개시하였다. FMLN의 후퇴는 26일 종료되었다. 비록 공세에 참여한 FMLN 병력 대부분이 큰 손실없이 북부의 산악지대로 후퇴하는데 성공했지만, 어쨌든 1981년 최후 공세는 FMLN의 권력탈취가 무산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1981년 FMLN의 활동 지역 |
이것(역자 주―엘살바도르군의 초토화 전략)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효과적인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폭격, 기총소사, 포격, 그리고 때때로 민간인 학살과 같은 테러 전술이 수반되는 전략이기도 하다."
This may be an effective strategy for winning the war. It is, however, a strategy that involves the use of terror tactics—bombings, strafings, shellings and, occasionally, massacres of civilians.
Draining the sea: Six Supplement to the Report on Human Rights in El Salvador(March 1985), Americas Watch[5]
엘살바도르군의 대게릴라전 전략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및 20년째 내전을 치르는 이웃국가 과테말라 정부를 모방했다. 즉 농촌에 있는 반군의 지원기지를 박멸하여 반군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주요 표적은 다름아닌 민간인 주민들이었다. 민간인이 반군을 지원할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 그들을 살해하거나 소개하는 것이 대게릴라전의 핵심이었다. 아메리카즈 워치(Americas Watch)의 보고서 제목에 사용된 바다를 말려버리기(Draining the sea)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즉 게릴라와 농민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에 비유한 마오쩌둥의 관점을 게릴라 진압자의 입장에서 적용한 것이었다.[6] 현지 주민을 반군과 한패로 여긴 미국과 과테말라의 시각을 그대로 적용하였으므로 그 결과도 똑같았다. 대게릴라전은 본질적으로 초토화 작전이었으며 따라서 수많은 민간인 주민들이 엘살바도르군의 손에 학살되고 생존자들이 대거 난민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This may be an effective strategy for winning the war. It is, however, a strategy that involves the use of terror tactics—bombings, strafings, shellings and, occasionally, massacres of civilians.
Draining the sea: Six Supplement to the Report on Human Rights in El Salvador(March 1985), Americas Watch[5]
3.3. 1982년~1984년: JRG의 해산, 과도정부의 수립, 지속되는 학살
1982년 3월 28일, 기존의 JRG를 대체할 과도정부를 수립할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 과정은 친정부 민병대와 FMLN의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엘살바도르 전국변호사협회는 계엄령 하에 모든 기본권과 자유가 중지된 상황에서 선거를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를 순 없다고 밝혔다. 아무튼 그렇게 구성된 국회에서 4월 29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선출하기 위한 대선이 실시되었다. 대선후보 3명은 모두 군부가 지명한 사람들이었다. 60명 중 36명의 지지를 받은 알바로 알프레도 마가냐 보르하가 당선되었다. 마가냐는 5월 2일에 취임선서를 했고, 이로서 JRG가 해산되었다. 마가냐 정권은 평화, 민주화, 인권, 경제 회복, 국가안보 및 국제위상 강화를 목표로 했지만 내각에 참여한 각 정치세력간의 이견과 정부-반군간 무력분쟁으로 인해 그의 임기에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었다.3.4. 1984년~1989년: 두아르테 집권기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 |
1984년 대선에서 두아르테와 경쟁한 후보자는 민족주의공화동맹(ARENA) 후보이자 처형부대 지휘관, 퇴역장교 로베르토 도뷔송이었다. 도뷔송은 엘살바도르의 평화를 회복하려면 20만에서 30만을 죽일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떠벌린 작자였다. 또한 서독 언론인 앞에서 히틀러를 찬양하고 유대-볼셰비키 음모론을 진지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훗날 1993년 UN은 도뷔송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암살을 명령했다고 결론내렸다. 도뷔송만큼은 도저히 안된다고 판단한 CIA는 그나마 온건파인 두아르테를 전폭 지원했다.[7]
3.5. 1989년~1992년: 크리스티아니의 집권, FMLN의 총공세, 그리고 종전
4. 결과
5. 여담
게릴라 조직에서 합법정당으로 변모한 FMLN은 1994년 총선에서 84석 중 21석을 획득하여 제1야당으로 발돋움했고, 2000년 총선에서는 아예 제1당이 된다.[8] 2009년 대선에서는 FMLN 후보 마우리시오 푸네스가 승리하여 최초로 대통령도 배출했다. 이후로도 ARENA와 양당체제를 구성하였으나 부정부패로 민심을 잃었고 2019년 대선에서 ARENA와 같이 참패, 2021년 총선에서 득표율 6.9%에 의석수 4석만 건지며 군소야당으로 전락했다.[9] 2024년 2월 4일 선거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더욱 크게 폭망했다. 이 선거에서 엘살바도르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를 한번에 모두 치렀는데 대선 후보 마누엘 플로레스는 득표율 6.40%를 기록해 압도적으로 발렸다. 총선에서는 득표율 6.28%로 모든 의석을 상실해 아예 원외정당으로 추락했는데 3개 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에서 11개 주에서 모두 한자릿수 득표율을 보여 완전히 궤멸되었다. 지방 선거도 득표율 7.78%를 기록하여 후보자들 중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다.전쟁 당시 가장 거대한 학살이 벌어진 엘모소테는 1992년부터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992년 10월 13일부터 11월 17일까지 아르헨티나 법의학팀(EAAF)이 교회의 성구실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한 결과 최소개체수(Minimal Number of Individuals) 143구를 수습했는데 그 중 131구는 12세 이하, 평균 6세의 어린이들이었다. 현재 엘모소테는 추모지로 탈바꿈하였고 희생자들의 묘지도 들어섰다.
6. 관련 문서
[1] 정규군 55,000명, 준군사조직 15,000명[2] 피해규모는 A Guide to Intra-state Wars: An Examination of Civil, Regional, and Intercommunal Wars, 1816-2014(2015), Jeffrey S. Dixon, Meredith Reid Sarkees, CQ Press; 1st edition 참고.[3] 국내실향민(IDP) 55만명 포함.[4] 단 일로팡고 기지 기습으로 엘살바도르 공군 자체가 무력화된 것은 아니다. 미국은 엘살바도르에게 파괴된 우라강보다 대게릴라전에 더 적합한 A-37 공격기를 지원했다. A-37은 반군 기지와 대열 공습, 근접항공지원, 항공후방차단(Air Interdiction) 등에 투입되었다. 내전 기간 총 30기(A-37B 21기, OA-37B 9기)가 엘살바도르 공군에 공급되었다.[5] 아메리카즈 워치(Americas Watch)는 1978년 출범한 헬싱키 워치의 활동이 성공을 거둔 이후 세계 각지에 세워진 여러 '워치' 조직 가운데 하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활동했다. 세계 각지의 워치 조직들은 후일 1988년 휴먼라이츠워치(HRW)로 통합되었다.[6] 1981년 1월 17~18일 온두라스 국경지대에 형성된 난민촌을 방문한 미 의회 조사단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바다를 말려버리는" 엘살바도르 정부의 방식은 지도상의 모든 마을들을 없애고 게릴라를 고립시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모든 농촌 기지에 대한 게릴라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다.[7] 골때리게도 도뷔송은 미국이 세운 미주 군사학교(School of the Americas)에서 교육받은 적 있다. 근데 애초에 SOA가 도뷔송 같은 놈들을 양성하는 곳이긴 했다.[8] 단 2000년 총선의 총 득표율 자체는 ARENA가 더 높았다.[9] 해당 총선의 승자는 나이브 부켈레의 새로운 생각으로 56석을 독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