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7 19:21:55

지미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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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immyCarterPortrait2.jpg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본명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
출생1924년 10월 1일[1][2] (만 [age(1924-10-01)]세)
미국 조지아 플레인스
국적미국 파일:미국 국기.png
학력플레인스 하이스쿨(졸업) (1937-1941년)
조지아 남서 주립대학교 공학과 (편입) (1941-1942년)
조지아 공과대학교 (편입) (1942-1943년)
미국해군사관학교 (졸업) (1943-1946년)
유니언 칼리지
정당민주당
직업정치인
배우자엘리너 로잘린 스미스 카터
신체178cm, A형
종교침례회
경력조지아 의회 상원의원(1963년 – 1967년)
제76대 조지아 주지사(1971년 – 1975년)
제39대 미국 대통령(1977년 1월 20일1981년 1월 20일)
자녀잭, 제임스, 도넬, 에이미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Jimmy_Carter_Signature-2.svg.png
SNS페이스북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1970년대)
Time Time Person of the Year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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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time_1970.jpg파일:attachment/time_1971.jpg파일:attachment/time_1972.jpg파일:Person Of The Year 1973.jpg파일:attachment/time1974.jpg
1970
빌리 브란트
1971
리처드 닉슨
1972
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1973
존 시리카
1974
파이살
파일:attachment/time1975.jpg파일:attachment/time_1976.jpg파일:attachment/time1977.jpg파일:attachment/time_1978.jpg파일:attachment/time_1979.jpg
1975
미국의 여성
1976
지미 카터
1977
안와르 사다트
1978
덩샤오핑
1979
호메이니
1920년대1930년대1940년대1950년대1960년대
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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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성장기2.2. 1976년 ~ 1980년 대통령 선거2.3. 퇴임 후 활동
3. 평가
3.1. 외교
3.1.1. 반론 - '도덕주의 인권 외교'가 아닌 현실주의 외교
3.2. 경제3.3. 단순한 도덕 외교가 아닌 당근과 채찍의 외교
4. 종교적 성향5. 등장 매체6. 기타
6.1. 김대중과의 관계6.2. 독재자 킬러6.3. 시한부 흑색종 4기 선고와 완치

1. 개요

파일:Official_presidential_portrait_of_Jimmy_Carter_(by_Herbert_E._Abrams,_1982).jpg
공식 초상화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풀네임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인데 일반 대중들에게는 제임스의 애칭인 지미(Jimmy)라는 이름을 써서 '지미 카터'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서명을 할 때도, 선서를 할 때도 '지미 카터' 라고 했다.[3] 덕분에 다른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대통령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와 함께 현재 생존하고 있는 전직 미국 대통령 4명 중 한 명으로 나이가 가장 많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생인데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1946년생,[4] 오바마 전 대통령은 1961년생이다.

2019년 3월 22일부로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을 제치고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자가 됐다.

2. 생애

2.1. 성장기

조지아 주 플레인
파일:external/www.achievement.org/car0-025.jpg
스(Plains) 시 출생. 증조부가 남군 장교였다. 원래 1941년 조지아 공대에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1943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46년 미국해군사관학교를 59등으로 졸업[5]한 뒤 잠수함에서 근무하게 된다.[6][7] 1953년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된 카터는 해군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음에도 가업을 잇기 위해 제대를 선택하여 땅콩 농장과 함께 각종 농기구를 취급하는 카터상회를 운영했다. 이 땅콩 농장주 경력은 유명해서 이후에도 카터에겐 '땅콩 장수'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다. 이후 조지아 주 상원 선거에 나서서 낙선했지만 당선한 후보의 부정선거가 드러나 그가 당선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 주지사까지 역임했다. 이 기간에 그는 흑인 등용법을 제정하는 등 인종차별 폐지와 도덕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인종차별이 심한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서 인종차별을 가장 싫어한 사람 중의 한 명. 그 본인은 백인이지만 어렸을 때 흑인들이랑 같이 놀다보니 저절로 편견이 없어졌다고.

오해가 있는데 조지아 주는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반(反) 북부 정서로 인해 미국 민주당의 텃밭이던 조지아는 이후 공화당의 보수 전략에 따라 "빨간 주"로 넘어갔지만, 주지사는 2003년까지 민주당에서 나왔다. 1868년~1872년의 4년을 빼고는 무려 #[8] 150년간 민주당 독주. 민주당 텃밭인데 주지사는 공화당 출신이 줄줄이 당선되던 캘리포니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여하간 카터는 76대 조지아주 주지사(1971년~1975년). 12년 뒤 클린턴 역시 남부 출신 주지사인지라 주목을 받았는데 오바마가 기록을 깰 때까지는 "당분간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의 표를 끌어올 수 있는) 남부 출신 주지사들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하는 푸념도 나왔다고 한다.[9] "남부전략" 이후 공화당의 우세가 강했던 시절의 반영.

그리고 해군 복무 시절이 워낙 짧게 끝나서 잘 인식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카터는 1950년대 전후 미 해군에서 차세대 브레인으로 촉망받았던 인물이다. 카터가 복무하던 시기인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은, 하이먼 리코버 제독이라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원자력 잠수함을 처음 만들어내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부터 로널드 레이건 시절(...)까지 이 원자로 깎던 노친네는 막무가내로 인재를 갈구고 시험에 들게 하며 머리 깨나 한다는 인재들에게 엄청난 좌절과 환희를 안겨줬다.[10] 카터는 이런 리코버의 시험을 통과하고 초창기 원자력 잠수함 개발팀에 들어갔던 초엘리트였다. 리코버가 허구헌날 욕먹던 시절에는 별로 감이 안 잡혔을지 모르나 훗날 1980년대부터 리코버의 제자들이 해군참모총장을 독점하는 시대가 온 것을 보면 카터 또한 미 원자력 해군의 역사에 크게 기여했을 수재였다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남긴 가업을 잇기 위해 창창한 미래를 포기했던 효자는 훗날 제독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대위 시절에 군복 벗는다 만다 하던 선생님이 내가 대통령 그만둘 때도 현역...

한편으로는 리코버와의 일화가 있다.
리코버 : 자네 해사 몇등으로 나왔나?
카터 : 59등입니다.(820명 중)
리코버 : 열심히 한 건가?
카터 : 열심히...는 아니고 좀 설렁설렁 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리코버 : WHY NOT THE BEST?(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카터 : ...!

이 WHY NOT THE BEST는 카터가 자주 입에 담는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고 대통령 취임 후 낸 자서전 제목으로도 쓰였다.

2.2. 1976년 ~ 1980년 대통령 선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ElectoralCollege1976.svg.png

197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도덕주의 정책과 인권 외교를 공약으로 해 당시 대통령이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제럴드 포드를 이기고 대통령에 올랐다. 역대급 압승이 많았던 1960~1990년대의 대통령 선거 중에서 가장 박빙이였고,[11] (297:240, 50.1% 대 48%.) 당시 카터는 서부 전역을 포드에게 내주었지만 1960년대 이래 흔들렸던 남부의 옛 민주당 텃밭을 온전히 되찾으면서도 북부(미네소타, 위스콘신)와 동부에서도 승기를 거두면서 대통령을 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존 F. 케네디가 승리했던 전략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예로, 미국 지도가 동서로 딱 갈라지는 결과를 보인다. 민주당에겐 불행히도 이때 딱 한 번만 성공했다. 한편, 1976년 대선에서 두 후보의 득표율 차이가 5%도 안될 정도로 박빙이였던 주가 무려 20개나 되었는데, 이 주들은 전부 1980년에 레이건에게 돌아가게 된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텍사스플로리다를 뺀 남부의 지지를 상당부분 이끌어냈지만, 무소속 후보인 존 B. 앤더슨의 독자출마로 조지아를 제외한 남부 전역에서 패하고 북부에서 표가 크게 나뉘면서 결국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권을 넘기고 재선에 실패했다. 앤더슨은 공화당 출신이었고, 홀로 고작 6.6%만을 득표했지만 그 득표 대부분이 동부에 집중해 카터의 전략에 큰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뒤에 설명하는 이란 대사관 인질사건도 한 몫 한다.

앤더슨의 당시 선거 뱃지 Anderson BeCause Anybody But Carter(앤더슨인 이유는 카터가 아니니까)

2.3. 퇴임 후 활동

파일:Photograph_of_the_Four_Presidents_(Reagan,_Carter,_Ford,_Nixon)_in_the_Blue_Room_prior_to_leaving_for_Egypt_and..._-_NARA_-_198523.jpg
1981년 10월, 백악관을 방문해서 로널드 레이건, 제럴드 포드, 리처드 닉슨 전, 현직 대통령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사실 이 사진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집트로 떠나기 전날 밤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있다.

파일:attachment/f0043889_4fa1f9cc43df7.jpg
대통령 자리에 물러난 뒤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많은 활동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Habitat for humanity 운동이다. 사랑의 집짓기라고도 부르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에 참여해 봉사활동에 앞장섰으며, 이것과 별도로 자연재해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위한 단기간 집짓기 봉사 프로젝트인 지미 카터 프로젝트를 만들어 동남아시아 쓰나미 사태나 카트리나 사태, 아이티 지진 등 굵직한 사건 때마다 봉사단을 조직해 전세계를 돌았으며 2001년 대한민국 아산시에서 열린 지미 카터 프로젝트에도 직접 참여해 봉사했다. 지미 카터는 해비타트 운동을 세계로 알린 역할로 Habitat for humanity 본부에서 '수석 자원봉사자' 라는 명예직을 주었고 지미 카터가 중심이 되어 참여하는 건축봉사활동을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독립시켜주었다. 이 해비타트 수석 봉사자 명예직은 건강상의 이유로 2009년에 반납했다고. 여담으로 2002년 수능 외국어 영역에 지미 카터의 해비타트 운동이 문법 관련 지문으로 나온 적이 있다. 그 지문은 대부분의 문제집에서 과거와 현재 완료의 시제를 비교하면서 예제로도 많이 나온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전 대통령의 위치를 살려 1994년에는 북한을 전격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도 했다. 당시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 상태[12]였으나 북한과 미국 모두 실상은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바라던 참이라서 카터의 방문을 계기로 전쟁위기는 사라지고 관계는 급 호전되었으나 그 직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이런 업적에 힘입어 2002년, 인권과 중재 역할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덕분에 대통령으로 있을 때보다 전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전 대통령" 이라는 말도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처음부터 전 대통령이었다면 더 좋았다" 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일단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선한 이미지를 쌓았고 정치적 이미지도 옅다보니 미국 안보상 중요한 문제에 비공식 특사로도 몇차례 가게 되었다.

2011년 4월에는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그로 부룬드란트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전직 지도자들과 같이 방북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은 북한의 내부 사정이니[13]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 안 되며, 북의 기아와 핵개발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과 남한에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가 북한 대변인 노릇하러 갔냐는 비아냥에 시달렸고, 지미 카터가 자신이 북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에서의 브리핑을 요청하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hell no"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카터는 퇴임 후에 종교, 외교와 관련해서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일부 해외 언론들은 미국 언론이 카터의 퇴임 후 활동을 지나치게 미화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스스로를 다른 전직 대통령들보다 우월(superior)하다고 주장했다가 미국 내에서도 큰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대선 개입 덕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다면서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3. 평가

일반적으로 외교나 경제 문제에 있어서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다. 총체적 난맥상을 겪었던 외교는 물론 그나마 나았다는 내치에 있어서도 경제 불황을 겪는 등 공보다 과가 두드러진다는 평이다. 미국 역사상 재선에 실패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의 하나라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를 대변한다.

미국 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크게 인기있는 대통령이다. 아직도 그의 집권 4년 간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지만, 퇴임 후 업적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편이다. 퇴임 후 업적 때문에 집권 당시의 문제가 미화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그것 때문도 있지만 21세기 들어서 총체적 난국의 대통령들도 정치 안정(4년만에 바뀌면 혼란이 올 것이니)을 이유로 재선에 성공하기 때문에 집권 당시의 내용도 이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들보다 평가가 좋기 때문이다. 반쯤 농담삼아 21세기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재선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3.1. 외교

카터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 외교정책은 현실에서 많은 좌절을 겪었다. 특히 그의 이러한 외교정책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촉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그의 인권 외교는 우방국들과의 동맹에 균열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미국 내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러한 연속된 외교적 실패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결국 강한 미국을 내세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14] 일부 카터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카터의 업적으로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등을 들지만 두드러지지 않는 데다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주로 닉슨 정권의 핑퐁외교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카터의 인권 외교대한민국에도 적용되었다. 카터는 임기 내내 인권을 문제삼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여 당시 박정희 정부와 크게 마찰을 빚었다. 1979년 카터 대통령의 방한 만찬 때는 박정희가 카터 앞에서 40분간 안보 훈시를 하여, 회담 후 카터가 주한미국대사에게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방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박정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전도한 것은 유명하다. 카터가 부마항쟁10.26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는 사실상 "방조했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카터의 인권 외교는 일관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우방국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지만 몇몇 공산권 독재국가들에게는 오히려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카터는 1978년 4월 워싱턴을 방문한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에게 "우리(카터와 차우셰스쿠)는 신념과 목표를 공유한다. 정치와 경제의 공정한(just) 체제를 갖고, 개인적 자유를 누리고 …"는 내용의 환영사를 안겨준 적이 있다. 최근에 카터가 북한의 인권문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봐도 그의 인권 외교가 이중 잣대라는 평가를 부정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차우세스쿠 건은 인권 외교의 이중성보다는 소련 견제 전략이 인권 외교 정책에 우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차우세스쿠는 내치에서는 분명한 독재자였지만 국제 관계에서 보면 중국의 마오쩌둥, 유고의 티토와 함께 동구권에서 소련의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 독자 개인숭배 노선을 걸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동구권 내의 반소 국가들과 관계 증진을 시도했던 것은 닉슨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한국의 경우도 그러나 정작 당시 미국 대사가 12.12 군사반란을 하루 만에 쿠데타가 아니라고 결론지어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막지 못했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솔직히 광주는 지미가 계엄군들 살짝쿵만 밟았어도 최소 피바다는 면했을듯 하지만 미국 외교력의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힘은 마치 큰 몽둥이 같아서, 12.12사태 같은 현상을 고치기에 필요한, 의료용 메스처럼 작고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절대 아니다.(조금이라도 심기 불편하다는 뉘앙스조차도 가히 절대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게 미국의 힘인데, 이걸 정밀하게 쓰고 싶어도 그 심기를 느끼는 순간 세계는 이미 큰 난리가 나버린다) 미국은 당시 보복성 외교절차를 생각했지만, 북한용으로 미국에 이익이기 때문에 별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5.18 민주화운동도 임기 말이었기에 거의 방조하는 상황이었다(사실 5.18은 임기 말보다는 한반도의 안정성을 고려한 면이 컸다). 그리고 당시 미국은 이란대사 피랍사건이라는 초특급의 외교적 위기에 빠져있었다. 단지 취임식 직전에 레이건에게 정권은 바뀌어도 김대중사형만은 막아야 한다는 부탁을 하는 정도였다(이 약속은 이뤄졌다). 하지만 김대중의 목숨은 당시 카터에게 직접 보고가 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김대중은 당시의 인권정책에 정확히 부합하는 정치적 수감수였다. 당시의 인권정책은 사회들의 민주화보다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다. 카터의 인권정책들은 남한보다 인권이 훨씬 열악했던 남아메리카 독재정권들을 제재하는 데서 출발했고, 임기말까지 그 틀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기초부터 미국이 가진 힘의 제한을 정확히 판단했고, 목표가 "사회 변화"가 아님을 명확히 명시했다.

그러나 이부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광주학살 1년전까지는 미국 동아시아 안보의 핵심인 주한미군을 가지고 박정희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는 등 인권을 명분으로 큰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던 양반이 바로 반년만에 제2의 박정희인 반란 세력을 용인해버리고 1년뒤에는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더 지독한 행보를 보여주는데도 묵인을 넘어 일부 외교문서를 보면 암묵적 지원까지 해주는 행보를 보여준다. 결국 아무리 약하게 비판하더라도 카더가 특히 한국에서는 표리부동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고, 이런 행보때문에 한국의 민주화 세력내에는 반미적 성향의 계파가 뿌리깊게 잡았고, 그 중 일부는 더 나아가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는 등 카터의 인권외교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내치에 있어서는 심각한 경제 불황에 직면했다. 특히 임기 후기에 제2차 오일쇼크가 발생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오일쇼크로 인해 미국이 경제적으로 받은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가파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동시에 실업자가 급증한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난 시기였다. 제2차 오일쇼크는 대외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에 카터 정권의 실정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옹호론도 있다.[15] 경제문제에서 실패는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다음 레이건 정권에 이르러서야 안정화되었다. 다만 레이건 정권에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성공한 폴 볼커 FRB의장이 카터 정권 임기 말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를 카터 정권의 경제정책의 업적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다.

카터가 외교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내치가 성공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 불황은 오일쇼크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 밖의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성공적이었다는 것. 카터의 업적으로는 항공산업과[16] 화물운송의 규제를 풀고[17] 국립공원 체계를 정비하며 최초로 히스패닉계도 등용했다는 것.

임기 초에는 50%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보여줬지만 후반에 경제 불황과 이란 대사관 사건 등이 터지면서 급하락. 웬만하면 재선되는 미국 치고는 안습한 대통령. 이게 얼마나 안습한 것인지를 강조하면 이렇다. 미국 역사상 8명의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는데[18], 정권 교체를 이룩한 뒤 재선에 패배, 그것도 참패한 대통령은 오직 카터뿐이다.[19] 하지만 닉슨 이후 조지 부시까지 이어지는 24년간의 공화당 대통령 집권 기간 중 한번이라도 집권에 성공한 카터가 용한 것이다(...) 왠지 재선 실패한 게 새옹지마인 듯하다. 그 저주를 면했으니.근데 후임 레이건도 암살미수로 그쳐서 임기 중에 사망하지 않고 다 마치고 물러났다.

3.1.1. 반론 - '도덕주의 인권 외교'가 아닌 현실주의 외교

카터가 낙선한 원인으로는 흔히 뜬구름 잡는 도덕주의 외교의 실패를 꼽는다. 그러나 카터의 도덕주의가 뜬구름 잡는다는 비판은 정확하게 그의 도덕주의 정책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온다.

카터의 도덕주의 정책은 명확히 미국의 힘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20] 카터의 도덕주의 정책은 6~70년대 미국 내의 반인종차별운동, 반전운동과 페미니스트 시민권운동 등 여러 인권운동들에서 힘을 받고, 비아프라 전쟁[21]이나 방글라데시 기근 등 당시 발생한 국제적인 인권위기들,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유명한 인권단체들 (국경없는 의사회, 옥스팜, 국제 엠네스티 등)의 탄생에 힘입어 탄생했다. 인권을 앞세웠던 카터가 당선된 것 자체가 그 당시의 인권에 대한 시대정신을 잘 반영해주는 현실이었다. 타겟 또한 주로 남아메리카로서, 80년대로 진입하면서 일어난 폴란드나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련된 사태들은 그의 외교 정책의 주된 타겟이 아니었으며 카터의 외교 정책 설계 한참 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이다.

당시 남아메리카는 심지어 유신체제 아래 한국보다도 인권이 열악한, 정부에 의한 납치와 살해가 아주 공공연히 일어나던 국가였다. 이런 현실에 맞게 카터는 외교정책을 설계했고, 실제로 남아메리카에선 카터의 정책들이 빛을 본 경우가 많고 그의 인권정책 참모였던 패트리샤 다리엔 (Patricia Darien)은 여전히 남아메리카에서 칭송받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나[22] 민주주의가 몰락하는 현실에 대한 대처를 하기는 매우 부적합한 외교안이었고, 이미 그 노선을 바꾸기엔 1980년은 매우 늦은 시기였다. 오히려 한국의 군부의 탄압으로 인해 죽음에 처해진 김대중이라는 개인을 살리는 행위야말로 매우 카터스러운, 현실적인 개인 보호에 치중한 인권 외교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민족주의사관을 지닌 역사학자들은 12.12 군사 반란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시원찮은 반응을 보인 카터 정권과 미국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이며[23], 이런 카터식 외교의 현실이나 임기말 일어났던 이란 대사 피랍사건과 독수리발톱 작전[24]의 실패의 영향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 석방에 대한 행보는 아무리 빨리잡아도 광주학살 이후의 행보였고

이렇게나 상당히 자신들의 목적과 한계를 잘 파악한, 매우 정교한 외교안을 뜬구름 잡는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인권의 개념 자체와 인권 관한 법률이 굉장히 추상적이기 때문에 정확히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기 떄문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무작정 세계 모든 인간들의 인권을 지켜주고 상향시키지 못했기에 실패했다는 식의 사고방식의 결론인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주의가 아닌 도덕주의를 내세웠으면서도 미국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 자체가 정책으로서는 실패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미국은 중미와 남미를 "내 앞마당"취급해왔기에, 타이밍나쁘게 들이대는 인권문제 제기는 길들이기 위해 트집잡는 몽둥이로서 인식되기 좋았다). 현실주의라면 모를까 도덕주의에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기준을 세웠다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카터의 인권외교는 어찌되었는 "의도는 좋았다"는 중지는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항목이 인권외교 자체의 성패를 말하고 있지만, 카터가 인권외교로 비난받는 다른 이유는 인권외교 그 자체의 성과보다는 인권외교를 하며 트레이드오프로 내준 것에 있다.

3.2. 경제

"민간 기업들이 고금리정책의 여파로 파산하고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이제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볼커는 인플레이션의 숨통을 끊었지만 카터 정권의 숨통도 함께 끊었다." (어느 민주당 인사)

카터의 경제 인사는 임기 말에 윌리엄 밀러 Fed 의장의 오락가락 정책이 실패로 끝난 뒤 취임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독일 혈통 미국인으로, 통화주의자로 케인스 주의와 대립한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그의 정책을 요약하면 닥치고 고금리 . 연 13%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엄청난 고금리 정책으로 버블을 깨버리는데 성공했다. (어느정도였냐면, 1979년에 1차로 14%로 올리고 1981년엔 21%나 되었다. 정말 지금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금리다.)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기가 침체되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물론 폴 볼커가 일반적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볼커는 악명을 감수한 깨끗한 원칙주의자라는 게 정평. 그러나 그의 정책 덕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기가 침체되었으며, 일본 경제에 따라 잡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25] 이 때문에 볼커는 '대공황과 버블 위험을 넘긴 카터 최고의 인사 정책' 이란 칭찬과 '카터 재선 실패의 원흉' 혹은 '정리해고로 점철된 신자유주의의 대문을 열은 인물' 이란 비판을 함께 받는다. 즉, 그의 통화주의가 이른바 케인즈주의의 조종을 알렸다는 사실엔 모두가 동의한다.[26]

카터의 재선 실패에는 이란 대사관 사건 못지 않게 경제 악화도 있다. 간신히 정권을 잡은 민주당 입장에선 경제정책을 전문가에게 위임함으로서 "경제에 무능한 대통령"이란 이미지로 끌려내려갔다는 푸념이 나올 수 밖에. 그래서 '외치보다 내치엔 더 실패했다' 는 평가를 받는다. # 빌 클린턴이 바깥에서 여기저기 물리고 다녔지만 아주 좋은 이미지를 남긴 것은 비록 아시아에는 외환위기를 선물했지만 어쨌든 경제면에서 미국을 번성시켰기 때문이다.물론 이 대통령 이후에는 경제를 망쳐도 재선에 성공하는 걸 보면 운은 억수로 없는듯.

폴 볼커의 정책은 비록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커다란 반발과 농민들의 파업 속에서도 그를 계속 중임했는데, 1983년에야 인플레이션이 잡히면서 미국 경제의 내실은 안정되었다. 그는 1987년까지 FRB 의장으로 재직한 뒤, 1927년생으로 82세의 노령에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재직했다.

볼커는 신자유주의의 대문은 열었다지만 월가의 유태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투자와 상업, 회계와 컨설팅은 나눠야 한다' 라고 외친 인물이기도 했다. 볼커가 있었다면, 비록 출혈은 있었어도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 볼커는 한발 더 나아가 "은행권에서 혁신이라고 하는 것 중 쓸 만한 건 현금 자동 입출금기 하나뿐" 이라면서 글래스-스티걸법 금융규제법 폐지를 끝까지 반대한 이유로 사임했고 지금 시점에선 그가 옳았다. 볼커 식으로 말하면 간신히 욕 먹어가면서 버블 꺼뜨려놨더니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이 기어이 다 버블 올려서 칭찬만 먹다가 이 사단을 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볼커는 그런 점에선 감세정책으로 고성장 저물가를 기록하면서 임기중엔 칭찬 일색이었으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욕을 먹는 그린스펀과 대비된다. # 민주당에 호의적이었던 볼커는 반통화정책을 폈는데도 공화당 레이건 정부에서 중용했고, 공화당에 호의적이었던 그린스펀은 통화정책을 폈는데도 민주당 빌 클린턴 정부에서 중용한 것이 놀랍고도 재미있다. 원래 미국은 상대 당파 성향의 인물을 비교적 인정하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3.3. 단순한 도덕 외교가 아닌 당근과 채찍의 외교

사실 내치는 잘하고 외교문제에 난관이었음은 린든 B. 존슨 이후 민주당 대통령의 공통적 현상이기도 하지만(클린턴을 빼면[27]) 그 역시 인재복은 있었다. 공화당에 헨리 키신저가 있다면 카터에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젊은 인재 즈비그뉴 브레진스키[28]가 있었던 것.

이른바 '카터의 제갈공명'이었던 브레진스키는 평화적 수단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정책, 즉 온건해보이지만 현실주의적인 전략가로 유명한데 이렇듯 카터 정권을 단순히 지미 카터라는 개인의 성격으로만 해석하려면 상당한 무리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카터 정권의 이미지는 온건해보이지만 임기 말에 터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해 나중에 먼 뒷날 미국과 앙숙이 되는 오사마 빈 라덴 등의 반소 게릴라를 지원한 것도 브레진스키의 조언에 따른[29] 카터의 정책이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보이콧한 것도 그때.

다만 반론도 있다. 브레진스키는 미·중국교에 집착하고 밴스 국무장관을 무시하고 외교라인을 장악했다가 기어이는 밴스는 사임하고 무장 헬기를 이란 대사관에 들였다가 패망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뒤에 보듯 브레진스키 선에서 수습하긴 했지만 국민들이 그걸 아나. # 사실 진보 측에서는 카터가 애초에 지론인 "인권외교" 에서 벗어나 친팔라비 행보를 보인 것이 대선의 향방을 바꾼 외교적 실수라는 평도 있으며, 브레진스키를 "냉전 진영주의자" 라고 보기도 한다. 아프간 전쟁에 따른 소련의 몰락도 끝내 공화당 시대에나 드러나니... 아프간 개전시에 그렇게 될 거라고 내다본 사람은 없었으니 공적을 돌릴 순 없다.

여하간 카터의 임기는 이 볼커, 브레진스키라는 두 관료가 주도했고 성과도 있었지만 거꾸로 카터의 인기는 급전직하, 재선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밖에 F-20 항목에 보다시피 한국이 F-20을 도입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결국 도입은 취소했지만.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박정희의 핵개발을 자극한 것도 덤.

4. 종교적 성향

독실한 개신교[30] 신자로 유명하다. 주일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하는 등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평생 140명을 전도했다고. 아울러 그의 이상론적 도덕주의 외교는 독실한 개신교 신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카터의 개신교 신앙은 보통 미국 남부의 독실한 침례회 개신교도라고 하면 떠올릴법한 근본주의적 태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상기했듯이 "여성을 목사로 임명하는 걸 반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동성결혼은 반대하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31]

게다가 미국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권 탄압에 문제제기를 했는데 미국 민주당을 지배하는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여 주장을 철회했다. '미국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현직 정치인이나 전직 대통령에게조차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1979년 방한 때 마찰을 빚고 있던 박정희를 개신교 신자로 전도하려 한 일은 유명하다.

2013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가톨릭과 이슬람교의 행태와 교리를 비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이슬람에 남아 있는 성차별적 요소를 비판한 것이다. 가톨릭에서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이슬람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 다니던 교단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교단으로 옮긴 인물이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발언이다.

카터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는 영상들. 예수의 산상수훈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은총은 비신자들에게도 열려 있으며, 무신론자도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5. 등장 매체

남북전쟁을 모토로 한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젊은 나이에 남부연합[32] 해군육전대로 휴가중 집을 지키다가 흑인 게릴라 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워게임: 유러피안 에스컬레이션의 DLC 캠페인 "중대한 오류(Fatal error)"[33] 에서는 자던 와중에 페탈 에러 사건이 벌어졌고(...) 졸지에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모든 전쟁 권한을 떠안아 보복 핵공격과 전면전을 지시한다.[34] 이후 소련의 핵공격이 없었음을 알자 발사한 핵미사일을 다 자폭시켰지만 NATO군은 매우 뜬금없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패퇴시켜 동서독을 무력통일하였고(...) 이는 구소련 영향권의 몰락을 불러와 졸지에 "번개와 같은 신속한 행동으로 소련을 무릎 꿇린" 위대한 군사지도자에 올랐다(...)

심슨 가족에서는 항상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안습한 전 대통령으로 나온다. 스프링필드에 카터의 동상을 세웠는데 그걸 공개하자마자 시민들이 나쁜 놈이라면서 동상을 끌어내리고 길바닥에서 끌고 다녔고, 번즈의 생일 행사에 전직 대통령들이 입장하는데 재선 못한 사람은 안 받아준다며 입장 거부당하고 뒤이어 입장 거부당한 조지 H.W 부시한테도 무시당한다. 주택 건설 봉사를 할 때는 조지 H.W 부시를 모르고 건설 자재로 때렸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

레이첼 맥아담스, 해리슨 포드 주연의 '굿모닝 에브리원(Morning Glory)'에서는 성범죄 용의자(Sexual offender)라고 나오는 굴욕을 당했다.(...) 사실 극중에서도 카터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게 아니라, 뉴스 중에 도주중인 성폭행 용의자 소식을 전한 후 화면이 지미 카터 근황 소식으로 넘어갔는데 자막이 계속 'sexual offender'라고 떠 있었던 것. 즉 방송사고 장면.

상기한 예시들처럼 뭔가 거물 정치인 중 만만한(...) 사례로 미국 대중매체에서 자주 인용된다.코난 오브라이언스티븐 연과 함께 찍은디지털쇼트 찜질방 편에서도 코난이 농담의 소재로 언급한다. "이봐, 그 땟국물들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던 시절부터 내 몸에 붙어있었다고!" 아무래도 카터의 이미지가 개신교 평화주의자라서 그런지 소송드립에서 좀 자유로울 것이라는 미국사회의 편견 같은 게 있을지도?[35]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서는 해당 세계관의 자니 카슨이라고 할 수 있는, TV 토크쇼 진행자로 '지미 카버'가 등장하는데, 이름이나 생김새나 영락 없는 지미 카터를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에서도 토크쇼 주인공으로 나치 수뇌부의 일원인 프라우 엥겔을 불러다놓고 토크쇼를 진행하는데, 작중 프라우 엥겔의 최후생각해보면 (간접적으로나마) 독재자를 죽인 셈. 미국이 나치 손아귀에 들어갔어도 독재자 킬러의 본성은 숨길 수 없나 보다.

6. 기타

한국어 위키백과의 첫 번째로 작성된 문서의 표제어이기도 하다. 한국어 위키백과 같은 경우 2002년 10월에 서비스를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지미 카터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서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관련 링크).

아시다시피 카터의 집권 시기가 당시 한반도로는 4 말기 최절정, 막판이던 무렵. .(- 1세3대 통치자(주석) : 김일성) 우리나라 기준으로 뒷날의 요 후배 둘에 결코 못지 않았던 의외로 대격변기와 겹쳐진 대통령. .

존 F. 케네디 이후로 계속 이어지던 해군 출신 대통령의 기록을 그가 마감했다. 이후, 후임 로널드 레이건을 건너 뛰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현재로서는 마지막 해군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웹툰 이말년 서유기에 드립으로 등장했다. 졸지에 존속살해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한국 대법원에 발송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중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29일에 로널드 레이건(93년 120일)의 기록을 넘어섰고, 3월 6일에 제럴드 포드의 기록(93년 165일)을 넘었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11월 30일 사망하면서 (본인 생일 기준으로) 최소 6개월(2019년 4월 1일 이후)을 보내어 달성. 그리고, 현 기준 퇴임 후 지내는 시간이 가장 긴 전직 대통령이기도 하다.

2013년 4월 존 스튜어트와 인터뷰를 했었는데 미 행정부(적어도 카터 행정부 및 본인)의 전통적 대북 협상 접근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언급을 했다. 당시 북한이 정전협정을 파기한다며 협박을 하던 중이었는데 카터 왈 남한과 북한간 정전협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과 북한, 더 나아가 미국과 중공군간의 정전협정만이 존재한다는 언급을 지나가듯이 했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남한은 최소한 정전협정과 관련해선 아예 협상 대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도 지양해야 겠지만 이런 협상 주도자에 대한 인식 차이는 평화 또는 통일을 향한 미국식 다자회담과 한국식 양자 또는 다자회담 주장의 의견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단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 닮았다.

1979년 국빈으로 한국에 방한한 바가 있는데, 딸 에이미 카터가 영부인 로절린 여사와 덕수궁 방문 도중 구두 끈이 끊어지자 맨발로 걸어다녀 한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식을 유일하게 워싱턴 DC의 공립학교에 보낸 대통령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디씨지역의 공립학교 수준은 흑인밀집지역이데가 교육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에(빈민가이다), 공화당계는 물론 민주당계 대통령들도 자기 자식들을 값비싼 사립학교에 보냈다. 버락 오바마도 두 딸을 연 3만불 가까이 수업료를 받는 사립학교에 보냈을 정도인데, 카터는 유일하게 공립학교에 보냈다.

4년 임기를 채운 대통령 중 연방대법관 지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4년을 채 못 채우고 백악관을 떠난 카터의 전임자 제럴드 포드조차도 연방대법관을 지명할 기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36] 나름 안습....

한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를 많이 한다.

6.1. 김대중과의 관계

김대중 前 대통령에겐 카터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나이도 같고, 둘 다 젊은 민주당/신민당 소속의 개혁파에 속하는 대통령이며, 인권운동을 하고 평화주의자였던 것 등에서 겹치는 측면이 많았다.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뒤 박정희가 부정개헌 독재만 하지 않았다면, 나란히 동갑내기가 한미 대통령을 역임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을 정도.

이렇다 보니, 그 당시 김대중을 죽이려고 했던 박정희와의 관계는 헌정 사상 최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미관계도 마찬가지. 어느 정도로 안 좋았냐면, 박정희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시위를 대학생까지 동원하여 한 적도 있었고, 1979년 6월 30일 한미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카터가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비판하며,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촉구했더니,[37] "인권 좋아하시네"라고 말한 것은 최악의 사례. 심지어는 저 한미정상회담도 원래는 열리지 못할 뻔 했다고 한다.[38]

정확히 말하면, "인권 문제는 내가 먹여 살리는 내 국민인데 내가 더 잘 안다. 간섭하지 말라"며, 굳이 가겠다면 (주한미군도) 빼내가라면서도, 무기와 장비는 놔두고 가라는 뻔뻔한 소리까지 정상회담 자리에서 하며, 카터를 더 빡치게 했다. 기사 [39] 전날인 6월 29일에도 김포공항에서 환영 행사 하는 내내 표정이 굳어있는 것도 모자라, 마중 나온 박정희하고는 악수만 한 번 하고, 환영행사가 끝나자마자 청와대가 아닌, 헬기로 동두천 미군 2사단으로 날아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보냈을 정도. 다음 날 아침에 조깅까지 해놓고, 한국군 기지 시찰 일정을 날씨가 나쁘다면서 취소한 적도 있다.

이 것도 모자라, 핵개발도 막았을 정도다. 박정희가 "우린 당신(미국) 정부와 충분한 사전협의를 요구했다."고 반박하자, 빡친 카터는 "지금 당신은 핵무기에 대해 얘기하는 거요?"라고 거칠게 쏘아붙였고, 잔뜩 쫄아버린(...) 박정희는 "아니다. 원자력 발전이다."라고 말했다고. 그 외에도 GNP의 20%를 군사력 증강에 쏟아붓는 북한을 두고, 남한의 군사비 확충을 요구하자,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폭동 일어날 수도 있다."고 되받아쳤다. 물론, 박정희 정부가 어떤 정부였는지 생각해본다면...

지미 카터는 항상 김대중 대통령의 신변에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 것이 바로 한국의 독재자들이 김대중을 함부로 죽이지 못 한 이유다. 후임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에게 인수인계를 한 사항 중 "김대중 문제는 꼭 챙겨달라."도 있었고, 전두환은 보수 성향인 레이건이 당선되자 잘 됐다며,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국 측에서 극구 반대한 일도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김대중을 석방하는 대신 전두환을 방미시키는 방법으로 사형을 막았고, 이후 김대중을 미국에 망명시킨다. [40]그리고 그 레이건은 6월 항쟁 때 진압하려던 전두환에게 무력진압을 하면 청와대를 날려버리겠다는 경고를 미군을 통해서 했다.

6.2. 독재자 킬러

독재자 킬러라는 점이 화제가 된다. 카터가 만난 독재자들은 죄다 요단강 익스프레스에 탑승했기 때문이다. 처음은 1977년 파나마의 독재자 오마르 토리호스로 1981년 비행기 추락사로 4년만에 사망했다. 1978년 이집트-이스라엘 간 캠프 데이비드 협정 때 미국을 방문해 카터를 만났던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은 수상했지만 1981년에 과격파의 총격으로 사망했다.(후임자는 호스니 무바라크) 같은 해 만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도 다음해인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에 당해 쫓겨나 망명지에서 1980년 사망. 1978년 만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 와중에 다른 동유럽 공산권 지도자들처럼 퇴진을 거부하다 유혈혁명으로 총살, 그 다음 희생자는 1979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을 맺기 위해 만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으로 1982년 사망.

한편 유신시절 혼란했던 대한민국도 피해갈 수 없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16년[41] 동안이나 대통령으로 집권했던 박정희는 1979년 카터와 한미정상회담을 한 이후 4개월 만인 그 해 10월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했다.

북한의 김씨 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터는 1994년 6월, 미국 특사 자격(이 시점에선 전직 대통령)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만난 김일성14일 만에 죽었다. 카터가 살해(...)한 역대 최단기록 사망자.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엔 개드립이 아니라 정말로 카터 때문에 죽었다는 진지한 분석이 존재한다. # 카터가 주선한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김일성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는 의견이 나와서다. 자세한 것은 김일성 문서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2010년 8월 25일 북한을 또 다시 방문했으나 김정일김정은을 데리고 중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카터는 다음해 오는 26~28일을 기해 북한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음해인 2011년 4월 28일에도 김정일을 만날 수는 없었으나 만나지도 않았는데 2010년 첫 방문으로부터 1년 4개월 만인 12월 21일 김정일을 죽이고야(...) 말았다. 당시 북한은 지미 카터가 조문사절로 올까봐 외국인들의 조문을 안 받겠다고 발표했다. 기사. 참고로 김정일의 공식 사망일은 12월 17일. 기사

2004년 8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재신임 투표 개표상황를 감시하고자 14개국 참관인 수백명과 함께 방문하여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만났으나 그 선거에서 58%의 득표율[42]로 재신임에 성공한 차베스는 이후에 갑자기 암에 걸려 오랜 기간 투병을 하던 중 최후의 발악으로 2012년 대선에서 자기가 직접 출마하기도 했으나 2013년 3월에 사망했다. 카터와 만난 지 9년 뒤의 일이다. 참고 링크. 그런데 2009년에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참고

그가 은퇴한 뒤에 쓴 에세이 제목이 '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 이다. 혹자는 위의 일화를 읽고 나면 '진정한 독재자는 (세상을) 떠난 후에 아름답다' 로 들린다고 평하기도. 아니면 진정한 리더 (지미 카터)는 (대통령의 자리에서) 떠난 후에 (독재자를 죽게 만드는 활약이) 아름답거나.

여하간 그를 만나지 않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그래도 40년을 잘 살았지만.... 그 대가(?)로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1차 리비아 내전이후 끔찍하게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43]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자들은 굳이 카터를 만나거나 방문을 허락하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카터가 현직 대통령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퇴임한 대통령인데 굳이 만나줄 필요는 없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공식적인 활동이 아닌 비공식적인 활동이니 중요하지 않은 만남으로 간주하고 막으면 그만이다. 더욱이 이들의 국가는 독재 국가이므로 이런 외지인의 자국의 입국을 막기는 더 쉽다. 그런데도 카터가 잘만 방문하고 다닌다니, 독재자 당사자가 허락해주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물론, 비공식이긴 하나 천조국의 의지인 만큼 대놓고 거부할 깡은 없겠지만.

카터가 만나려 하는 독재자들은 애초에 주위의 어그로를 지나치게 끌거나 독재가 장기화되어 문제를 노출한 독재자이거나 딱 봐도 늙어서 오늘 내일하는 독재자이다. 영리한 암살자 지미 카터 옹 여기에 다 들어간 사례는 북한의 김씨 일가(김일성, 김정일)
이는 위 문단에서 나오듯 천조국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국제 외교적으로 볼때 매우 높은 지위이면서도 해외봉사에 적극적이었고 외교적으로 이미지가 매우 좋다 보니 현직 미국 대통령이 직접 현지에 날아가 못 푸는 상황에 놓인 적성국,혹은 미수교국과의 통치자와 뭔가 물 밑에서 비밀 회담을 해야할때 회담에 미국 대통령의 대리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높은 자격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라서다. 특히 대외 강경노선을 고집하는 공화당 정권의 대통령이 아닌 그나마 유화노선인 민주당 정권의 대통령이었다는 점도 플러스 효과.

전술한 1994년 당시 북한 핵문제 역시 이런 이유로 지미 카터가 미국 특사로 평양까지 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때 전쟁이 날 뻔했다. 국방부가 북한에게 카운트다운을 하고 미국의 주력폭격기를 평택에 집결 및 토마호크, 벙커버스터 등의 미사일 주파수도 전부 맞추었다고 한다. 이때 미국 고위장성들은 우와! 이제 친다! 며 축배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터의 특사 파견을 제안한 인물이 바로 김대중. 그가 야인으로 해외에서 칩거중이던 1994년 5월 미국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동아시아 정세를 놓고 강연을 했는데, 바로 이 때 미국이 북한에 김일성을 만나기 위한 특사를 파견하는 방안을 내놓았고 누가 적합하냐는 질문에 지미 카터를 거론한 것. 이미 전날 카터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실명을 밝혔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이 소식을 전해듣고 카터와 접촉하게 된다. # 김영삼 대통령을 제끼고 당시 야인이었던 김대중 총재의 제안을 전격 수용할 만큼 당시 빌 클린턴은 한반도 외교에 있어서 김영삼의 강경한 노선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제안이 가능했으며, 카터의 방북이후 북한의 본심을 어느정도 파악한뒤 유화책을 쓰면서 전쟁위기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김일성의 사망과 클린턴의 후임 조지 부시의 등장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이전의 강경노선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김대중이 한국 정계로 복귀하는 계기가 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재자 킬러라는 이미지 모든 것은 그냥 우연과 끼워맞추기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진지하게 믿으면 곤란하다. 근데 너무 많잖아 하지만, 전 대통령으로써 미국의 국제외교에 상당히 기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공적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손자인 제임스 카터는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문제의 47% 동영상을 당시 자리에 있었던 바텐더에게 얻어서 퍼트려 밋 롬니를 떨어뜨리는 데 한몫했다.

2013년 5월 초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 씨[44]의 석방을 위해 방북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카터 측에서는 대변인을 거쳐서 초청을 못 받아 방북 계획을 안 세웠으나 방북 의사는 확고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 2014년 9월 김정은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태. #

참고로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4년 전에 아사드와 카터가 만난 적은 있다(...).

유일하게도 IS만은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저주를 가장 끈질기게 버틴 사람은 피델 카스트로였다. 2002년 방문 후에도 장수했으니까(...)[45] 또 2010년 카터가 방문할 즈음 이미 카스트로는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물려주는 작업을 하며 자신의 독재를 스스로 그만둬서 카터의 저주를 피해버린 셈이 되었다. (참고로 이 매치는 김정일 원격 방문보다 한 달이나 먼저 있었다.) 그러나 사신은 사신이라고 불사신 카스트로는 사신 카터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2011년 3월에 벌어진 리턴 매치에서도 카스트로는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연인이 대신 죽었다. 모두 카터가 방문한 이후 4년만에 벌어졌다. 근데... 그뒤 갑자기 카터가 뇌암에 걸린다! 이로서 둘의 대결은 카스트로의 역전승으로 끝나나 했더니...

그 후 2016년 11월 25일에 피델 카스트로가 죽었다. 다만 다른 독재자들처럼 임기 중 병이나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피델이 90살 먹은 고령이라서 자연사이고 이미 2008년에 정권을 물려준 상태라서 애매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독재자들에 비해서는 꽤 오래 버텼다. 카터가 2002년에 만난 이래 14년. 2011년 재회담을 포함하면 5년이다.[46]

2012년 6월 이집트의 前 독재자였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혼수상태에 빠졌고 사실상 사망 취급받고 있는데 2012년은 2008년 카이로에서 지미 카터와 무바라크가 회담을 가진 뒤 4년 뒤이다. 물론 무바라크는 나중에 운이 좋게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다.

2017년 10월에는 대북 특사로서 다시 한 번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전직 대통령이 나설 일이 아니라 했다고. 하지만 현재 한반도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며 대북 특사로서 방북을 또다시 요청했다. #

2019년 94세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로 카나 의원을 통해 하노이 회담으로 다시 교착에 빠진 북한핵문제를 아버지와 아들을 처리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자신의 4번째방북을 제안했다.
  • 저술활동을 상당히 즐겨, 2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다. 한국에도 몇 권의 도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카터의 자서전이 2018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카터는 집필한 책 가운데, 두 권을 통해 그래미상도 두 차례 수상했다. 2016년 그래미상 수상 도서가 바로 카터의 자서전이다.

6.3. 시한부 흑색종 4기 선고와 완치

2015년 간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서 좋은 결과가 나온... 줄 알았는데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 한다. 암은 흑색종으로 진단되었으며 간에서 종양이 2.5cm 절제되었다. 허나 암이 뇌에 전이된 것이 발견되었고, 2015년 8월 20일 현지시간 오후에 첫 방사능 치료를 앞두고 있다.

8월 말,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회견을 통해 밝혔다. 그는 매주 자신이 강연하는 교회 주일학교 성경교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성경교실을 이끌려고 기다리는데 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SBS 보도,죽음 앞둔 '평화전도사'…뭉클한 품위

그런데 감동이 가시기도 전인 2015년 12월 6일 암을 치료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카터는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와서, 면역관문수용체[47]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약물 치료법으로 4기 흑색종(뇌에 전이된 부분 포함)이 완치되었다고 발표했다.#영문 그리고 그 다음날인 12월 7일 손자인 '제임스 카터'가 카터 전 대통령의 자선 재단 '카터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흑색종이 완치되었음을 발표했다. 면역 요법제(Immunotherapeutic Drugs)인 키트루다[48]를 사용해 흑색종을 치료했다고 하는데 가장 최근에 받은 MRA[49] 검사에서 뇌에 전이되었던 흑색종이 사라졌다고 한다. #영문 #BBC 보도

암 중에서도 무섭기로 소문난 뇌암에다 카터가 91세의 고령임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 역시 박수갈채를 보냈고 네이버 검색어 핫토픽 키워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종종 뇌부위에 암이 돌아와서 아직은 계속 치료중이라고 하는데, 만약 암의 재발을 잘 막아낸다면 장수의 길이 활짝 열릴 듯.

레딧 뉴스 서브 쪽 댓글#레딧 영어 댓글을 보면 불사신 영감님, 대통령 재선 선거 때 낙선했으니 미국 법률상 대통령 후보 출마가 가능하니 이번에 2016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와 재선하자는 댓글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카터는 1980년에 레이건에게 패배해 재선에 실패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대통령 선거 출마가 가능하며, 이런 경우에는 상대 편 쪽에서는 아버지 부시도 나올 수 있다. 물론 이건 카터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려울 듯하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부시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둘 다 선거에 나오는 일은 영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암을 이겨낸 지 불과 2주 만에 그의 손자인 제레미 카터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나마 수면 중 심장마비로 고통없이 사망했으며 심장병에 걸린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 흔히들 지미 카터 前 대통령은 10월생 조지 H. W. 부시 前 대통령은 6월생이라 미국의 커리큘럼상 조지 H. W. 부시가 1년 더 일찍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 지미 카터가 더 일찍 졸업해서 194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근데 왜 해군 입대 일자는 1년 더 늦은 1943년인가 하면 아버지의 권유에따라 카터 前 대통령은 조지아 공대에서 2년 동안 대학생활을 한 뒤에 해군사관학교로 편입한 것이고 부시 前 대통령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1942년에 해군장교로 입대를 해서 그렇다.[2]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나이가 같다.[3] 비슷한 예로 후에 빌 클린턴이 있다. 이쪽은 풀네임이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이며, 본래는 블라이스 3세였다.[4] 현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46년생이고 생일도 빠르다.[5] 입학은 1943년에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교육기간이 단축되었다. 참고로 동갑내기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42년 해군으로 입대했다.[6] 요즘 대통령의 이름은 웬만하면 항공모함에 붙지만 잠수함에 근무했다는 인연으로 세계 최강 그리고 세계 최고가의 원자력 잠수함 시울프급의 3번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미 카터'로 이름지었다.[7] 카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와의 인연으로 2004년 펫코 파크 개장 첫 공식경기 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부터 초청을 받아 시구를 던지기도 했다.[8] 주지사 명단. 1847년부터 파랑의 압박에 주의하라.[9] 한국으로 치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영남 출신 후보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정도다. 매우 잘 들어맞는다[10] 심지어 2차대전 이후 미 해군 최고의 명장에 꼽히는 엘모 줌왈트 제독도 깨갱했을 정도.[11] 1964년 486:52, 1968년 191:301, 1972년 17:521, 1980년 49:489, 1984년 13:525 등.[12] 당시 북한 정권에 무지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 체제의 동요를 전쟁 가능성으로 보고 강경대응하려 했지만, 당시 영국 유학중이던 김대중은 북한 체제를 더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유화적 대응 및 비밀 회담을 제의했다.[13] 만약 카터가 재임시 김대중과 한국내 인권상황에 대해 이런 말을 하며 박정희를 비호했다면 한국 현대사는 국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김대중씨는 대통령이 못 됐을 지도 모르고, 카터와 박정희의 사이가 나빠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14] 이란의 호메이니는 인질을 레이건 취임식 직후에야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끝까지 카터를 엿먹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실 레이건이 아닌 카터가 풀었는데 안습. 그리고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더 큰 엿을 먹고 말았다.[15] 박정희 말기의 경제사회불안도 오일쇼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군인정권이 내건 정당성, 국민이 인정한 정당성은 어쨌든 먹고사니즘이었는데, 설사 외적 요인 때문이라 해도 그 목표가 불투명해지니 내려오라는 말이 힘이 얻을 수밖에 없었다.[16] 1978년, 문제는 이 규제 완화 때문에 유나이티드 항공이 막장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현역 민항기의 노후화 가속[17] Motor Carrier Act of 1980. 관련 법인수를 폭발적으로늘렸고 전국단위 운임을 내렸으며 화물운송노조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18] 징검다리로 집권한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더하면 9명[19] 존 애덤스는 연방주의자로 집권했으나 정당의 개념이 처음 생긴 시대였으니 논외. 그로버 클리블랜드도 사실 위 기준에 들어가긴 하는데, 그는 낙선 4년 뒤 재기했다. 애덤스vs제퍼슨, 퀸시 애덤스vs존슨, 밴 뷰런vs해리슨, 클리블랜드vs해리슨 대결의 경우는 2번 맞부딪쳐 각각 1승 1패를 한 케이스.[20] PRM-28 참고 # pdf 파일 특히 "사회를 바꾸는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21] 나이지리아 동부 지역[22] 이전에는 폴란드를 누가 여기 덧붙여놨는데, 당시 폴란드에 카터가 브레즈네프와 싸워가며 간섭했다면 그것은 민주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냉전시작 이래의 친소정권을 뒤엎는 시도가 됐을 것이다. 물론, 80년대에 폴란드 자유노조는 서방측 단골 토픽이었지만, 소련 몰락 전에는 가능성없는 이야기.[23] 그 실망감은 당시의 운동권 대학생들이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이유기도 했다. 미국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정치성향과 상관없이 나타나는데, 2017년의 탄핵반대시위에 등장한 성조기, 소수자 인권 시위에 등장한 성조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지미 카터는 1년전에 박정희에게 민주화를 요구하는 등 민주화에 지지적인 행보를 보여줬으며 더군다나 당시 반란군이 속한 대한민국 국군의 평시작전통제권은 주한UN군 사령관 즉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있었다. 이런상황에서 80년 당시에 미국 대통령에 대해 전두환 반란군의 통제를 요구하는 행태가 단순히 기댄다고 펌하하기는 어렵다.[24] 피랍된 인질들을 구출하려던 군사작전[25] 인플레를 잡으면 실업이 증가한다는 것은 '필립스 곡선'으로 유명한 이야기다. #[26] 아예 케인스 경제학보다도 좌파적인 해석에선 포드주의 이래 뉴딜 호황으로 잠시 화해를 맞았던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필연적인 인플레로 파국을 맞았으며 결국 자본가와 통화의 승리로 끝났다고도 해석한다.[27] 그러나 그 클린턴도 비슷한 면이 있다. 소말리아 문제, 북핵 문제 등. 걸프전의 뒷처리를 해야 하는 대통령이라 축소기에 있기는 했지만, 클린턴도 임기말에는 유고 내전 등 큼직큼직한 군사행동을 결정해야 했다.[28] 1928년생으로 겨우 만 49세에 발탁되었다. 폴란드계로 망명한 외교관의 아들. 그래서 더 반공적이고 러시아에 원한이 있었다고.2017년 5월 26일 타계.[29] 브레진스키는 그때 '요시 그란도 시즌! 이제 소련은 놈들의 베트남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었다.[30] 미국 개신교 최대교단 중 하나인 남침례회였으나,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반발하여 다른 침례교 교단으로 갔다.[31] 이건 사실 가톨릭을 포함해 개념적인 기독교도로선 평범할 정도의 상식이다. 다만 카터가 속한 미국의 침례회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교단이라서, 교단 차원에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며 더불어 장로회감리회 등에서 허용하고 있는 여성 목사 임직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 중에서도 최대 교파이자 가장 근본주의에 가까운 분파라 할 수 있는 남침례회 출신이므로 카터가 엄청 특이한 경우.[32] 본작에서는 남부연합이 1944년까지 존속한다.[33] NORAD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가 새 미사일 요격체계 연습 전, 시스템을 훈련 모드로 돌려야 되는걸 잊고 소련이 일제히 전면 핵공격을 한다는 시나리오 디스크를 삽입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천개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경보가 발령되었다. 당직자에게 일단 묵념[34] 실제 역사에서는 NORAD에서 2200여개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단 경보가 울렸지만 다른 기관에서 이런 경보가 없어서 허위경보임을 안다.[35] 역으로 말하자면 위 문단의 '굿모닝 에브리원'에서 해리슨 포드가 "이제 카터에게 소송당할 준비나 하라고, 뭐 성범죄 용의자?"라고 비꼬는 건 그만큼 큰 방송사고를 쳤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36] 2010년 6월에 은퇴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을 지명하였다.[37] 이 때 김영삼이 제명된지 얼마 안 됐었던 때였다.[38] 어떻게 보면, 도널드 트럼프와 비슷한데, 트럼프를 보수 정부의 지미 카터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39] 당시 배석자로서 그런 분위기를 경험한 주한미국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의 말에 따르면, "정상회담에 여러 번을 배석해봤지만, 이런 정상회담은 본 적이 없다."고 회고할 정도(...). 또한 아마코스트 미 국방부 차관보도 정상회담후 당시 합참 전략기획국장이던 손정래에게 찾아와 "It's a disaster(이건 재앙이다)"라고 말했을정도.[40] 미 대사관을 비롯한 미 당국은 투옥된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때문에 김대중의 명줄을 잡고 있던 전두환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것이다. 2016년 기사[41] 공식 취임은 1963년부터. 이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다.[42] 원채 2002년 하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의 석유파업과 자본파업으로 석유공사 노조와 주요 기업들이 파업하면서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8~-9%대의 성장률을 찍으며 국가파탄까지 갈수있을 지경까지 다달았기에 차베스가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베네수엘라의 석유생산이 정상화되고 이라크전의 여파로 유가도 급등하면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던 참이었다.[43] 참고로 카다피는 김정일보다 두 달 일찍 죽었다.[44] 여담으로 케네스 배의 아버지는 과거 빙그레 이글스-MBC 청룡의 감독을 역임한 배성서 씨다.[45] 카터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2002년은 그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 해였기 때문이라는 농담도 있다.[46] 카터가 암에 완치된 지 1년도 안 되어서 피델이 사망했다.목숨을 바꿔서 최종 승리[47] 2018년 노벨생리의학상의 주제였다.[48] 상표명 Keytruda, Pembrolizumab. PD-1 저해제[49] Magnetic Resonance Angiography. MRI를 통해 뇌 혈관만 보는 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