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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드 필모어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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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 1800년 1월 7일 | ||
미국 뉴욕주 모라비아 | |||
사망 | 1874년 3월 8일 (향년 74세) | ||
미국 뉴욕주 버팔로 | |||
재임기간 | 제12대 부통령 | ||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 |||
제13대 대통령 | |||
1850년 7월 9일~1853년 3월 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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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아비게일 파워스(사별) 캐롤리나 카마이클 매킨토시(재혼) | ||
자녀 | 아들 밀러드 파워스 필모어 딸 메리 아비게일 필모어 | ||
학력 | 고졸 | ||
종교 | 유니테리언 | ||
신체 | 키 175㎝ / 체중 79㎏ | ||
소속 정당 | [[휘그당(미국)| 휘그당 ]] → [[무지당|미국당 ]]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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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전임자 재커리 테일러의 급사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2. 생애
1800년 1월 7일, 미국 뉴욕주 모라비아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재봉사였기에 어린 시절 옷감 제작 기술을 배워 재단 견습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인 1819년부터 판사 월터 우드의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결혼 후에는 버팔로에서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뉴욕주 민병대 여단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다.1828년 주의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그 후 하원의원으로 6년간 재직하다가 1844년 뉴욕 주지사에 도전했지만 패하였다. 대신 회계감사관이 되어 뉴욕의 금융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고 1848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필모어를 내세워 인구가 많은 뉴욕주의 지지를 받는다는 전략이었고, 덕분에 그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취임한 지 1년여 만인 1850년 7월 9일에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하고 만다. 부통령이었던 필모어는 대통령직을 승계해 미국의 제13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했는데 1850년의 타협안과 도망 노예법이 그것이었다. 그는 테일러에 비교해서 노예제에 관대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노예제에 관대하다기보다는 전형적인 도우페이스(doughface)[1] 북부 정치인으로서,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악하기는 하지만 연방 정부가 규제할 사항이 아니라는 시점을 견지했다. 그는 부통령 시절 1850년 대타협에 대한 토론을 상원의장[2]으로서 주재했고, 대통령인 테일러에게 만약 표가 50:50으로 갈린다면 타협에 찬성할 것이라 통보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되자 1850년 대타협과 도망 노예법에 서명한다.
그렇지만 이 법은 문제가 있었는데, 도망 노예법은 남부의 노예 소유주가 마음대로 남의 주에 들어와 노예를 다시 잡아갈 수 있도록 한 법이었다. 이에 대항해 북부가 이러한 노예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드는 등 아수라장이 되자, 결국 이로 인해 북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재선을 위한 두 번째 대선 후보가 되는 데 실패했다.
한편 그의 외교 정책은 기존과 달리 태평양, 특히 아시아에 치중되어 있었다.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것이 대표적이다(다만 일본과의 조약은 후임자인 피어스 재임기에 체결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하와이 왕국에 관심을 보이자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막아버렸다.
미국 국회의사당을 지금의 모습에 가깝게 증축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돔이 바로 그의 시대에 설계되었고,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을 걸쳐 완성되었다.
백악관을 떠난 지 3년 뒤인 1856년 휘그당 내 개혁파들이 공화당으로 떠나버리고 미국당(당시에는 노우나씽당)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표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3] 이 선거에서도 패한 휘그당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그는 마지막 휘그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1860년에는 스티븐 A. 더글러스를 지지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에이브러햄 링컨과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자 링컨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으며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링컨의 반대파였던 조지 메클레런을 지지했다. 전후에도 앤드루 존슨의 재건 정책을 지지하며 사실상 친민주당 성향으로 전향하였다.
3. 평가
링컨 전후의 남북갈등기에 재임한 대통령들이 대부분 그렇듯, 전반적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업적 평가 순위에서는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5] 실제로 미국에서는 재임 기간이 워낙 짧기도 했고 인지도도 가장 낮은 대통령에 속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개항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다. 자국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대통령들 중 한 명.
4. 여담
- 1800년생으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로 이어진 18세기 태생 계보에서 최연소 대통령이다. 후임자 프랭클린 피어스부터 19세기 출생의 계보가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은 1791년생의 제임스 뷰캐넌이 마지막 18세기 태생으로서 대통령을 지낸 이후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까지 쭉 19세기 출생자들이 대통령이 된다.
- 상당히 유머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방영되었다.
- 버팔로 대학교 창립하는데 공헌한 인물이기도 하다.
- 대통령 퇴임 직후인 1853년 첫 아내이자 대통령 시절 영부인인 애비게일이 죽은 후 1858년에 부유한 과부와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 얻은 집이 꽤나 넓어서 한동안 그 지역 사교계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첫 아내 애비게일은 자신을 가르쳤던 교사였다고 한다. 사제결혼을 이룬 케이스. 실제로 애비게일이 필모어보다 2세 연상이다.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 계의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인 셈?
- 남북 전쟁 중에는 링컨을 지지했는데 이른바 '연방대륙군(Union Continentals)' 조직하여 신병 모집과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한 자금운동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입장을 바꾸어 공화당과 링컨을 비판했고, 링컨이 재선에 도전한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그 상대 후보인 조지 매클레런을 지지했다.
- 퇴임 후인 1855년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대학 측에서 그 기념으로 라틴어 명예 박사 학위를 주려고 하자, 필모어는 "저는 제가 모르는 분야의 학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6]
-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생일이 가장 빠르다.[7]
- 미국의 배우 알렉 볼드윈과 매우 비슷하게 생겨서 인터넷 밈으로도 쓰인다. 낮은 인지도 때문에 오히려 밈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대통령 중 한 명인데, 최근에는 역사를 다루는 포스팅에 뜬금 없이 밀러드 필모어를 집어넣는 밈이 유행하고 있다. 특히 미국사 덕후 + 오덕후의 경우 "일본을 개항시켰으니 필모어가 실질적인 아니메의 아버지" 등의 개드립을 치기도 한다.
[1] 'doughface'는 영어로 줏대(패기)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남북 전쟁 당시 남부의 노예제를 찬성한 북부 정치인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필모어뿐만 아니라 후임 대통령들인 프랭클린 피어스와 제임스 뷰캐넌도 같은 도우페이스 정치인이었고, 이들의 과도한 남부 호의적 성향과 정책들이 남북 간의 갈등을 크게 고조시키게 되었다.[2] 미국은 부통령이 상원의장을 겸직한다. 그러나 캐스팅보트 역할만 할 뿐 실권을 행사하지는 않아 평상시에는 실질적인 상원의장의 기능을 수행할 '상원의장 대행'을 두고 실권도 상원의장 대행이 행사한다.[3] 물론 존 C. 프리몬트의 급진적인 노예 해방 공약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필모어가 불출마했더라도 공화당의 프리몬트가 승리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애초에 프리몬트는 남부 대다수의 주에서 입후보 하지도 않았으므로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4] 사실 트루먼은 프랭클린 피어스에게도 그랬듯이 남북전쟁 직전 혼란기의 대통령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5] 그나마 최하위권은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앤드루 존슨, 워런 G. 하딩이 항상 차지하기 때문에 필모어는 최하위권을 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슬프게도 뒤에서 10위 내를 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도 마찬가지이다.[6] 필모어는 가난한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만 간신히 마쳤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지 못했다.[7] 반면 생일이 가장 늦은 미국 대통령은 17대인 앤드루 존슨이다.[8]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재커리 테일러, 밀러드 필모어